[질문]
제가 동래 정씨인데요..
전 시조가 정문도라고 알고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정회문이라고 나와있네요..
어찌 된거죠?? 그리고 양정에 있는 회관이름이 뭐에요?? 무슨회관이라고 하던데여..
[답]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신라(新羅)의 전신(前身)인 사로(斯盧)의 6부촌장(六部村長)으로 정씨(鄭氏)의 성(姓)을 하사(下賜) 받았던 취산진지촌장( 山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의 원손(遠孫) 정회문(鄭繪文 : 안일 호장)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고려(高麗) 초에 보윤(甫尹)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며, 누대(累代)에 걸쳐 정착 세거(定着世居)해 온 동래(東萊)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온화하고 불편부당(不偏不黨)하여 남과 적을 삼지 않는다는 가통(家統)을 지켜오면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지위를 굳혀온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부산 양정동 화지산(華池山)에 자리잡은 2세(二世) 안일공(安逸公) 정문도(鄭文道) 묘소(墓所)에 대한 명당(明堂)의 전설이 아래와 같이 전해오고 있다.
그가 죽었을 때 맏아들 목(穆)이 장지(葬地)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가 동래부사(東來府使)를 지내던 고익호(高益鎬)가 일러준 화지산에 장례를 치루었다. 그러나 장례를 치른 다음날 이곳에 와 보니 누군가가 무덤을 파헤쳐 놓았다. 기이하게 생각하고 다시 복원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분통을 참을 수 없었던 목(穆)은 밤을 세워 가면 숨어 지켜 보기로 하였다.
밤이 어지간히 깊었을 때 도깨비들이 나타나 또다시 무덤을 파헤치며 하는 말이 "여기가 어딘데 함부로 건드려, 적어도 금관을 묻어야 할 곳에....."하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가난하게 살았던 목(穆)은 이 사실을 알고 걱정이 되어 한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 "염려 마오, 황금빛 나는 보릿짚으로 관을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을 것이오"하고는 사라졌다.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하였더니 과연 그 후부터는 무사하였다.
목(穆)은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고 슬하에 아들 제(濟)·점(漸)·택(澤)·항(沆) 4형제를 두었으며, 목의 아우 선조(先祚)는 호장(戶長)을 지냈고, 그의 후손들이 동래(東萊)와 양산(梁山) 등지에 산거(散居)하면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져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좌복야 목(穆)의 셋째 아들 택(澤)이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문장(文章)과 재능(才能)으로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항(沆)은 숙종(肅宗)때 등과 하여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도(楊廣道)와 충청도(忠淸道)의 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한 후 인종(仁宗) 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예부 상서(禮部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냈다.
인종비(仁宗妃) 공예대후(恭睿大后) 동생의 남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서(서)는 의종(毅宗) 때 폐신(嬖臣)들의 참소로 동래(東萊)에 유배되었는데, 그 곳에서 정자(亭子)를 짓고 오이를 심어 과정(瓜亭)이라 당호(堂號)를 삼고 연군(戀君)의 정을 가요(歌謠)로 읊은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어, 우리 나라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빛나는 업적(業績)을 남겼다.
13세 때 진사(進士)가 되었던 흠지(欽之)는 양도공(良度公) 양생(良生)의 손자(孫子)로 풍채가 좋고 성품이 강직했으며, 특히 사학(史學)과 천문학(天文學)에 정통하여 세종(世宗)의 명을 받아 역법(曆法)을 연구했고, 그의 아들 갑손(甲孫)과 창손(昌孫)이 크게 현달했다.
세종(世宗) 때 독격골(獨擊 )로 조정이 두려워하였던 갑손(甲孫)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대강(臺綱)을 바로잡아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판한성 부사(判漢城府事)와 예조 판서(禮曹判書)·좌·우참찬(左·右參贊)을 지내고 중종(中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필월잡기(筆苑雜記)」에 의하면 그의 성격이 청직(淸直)하고 엄준(嚴峻)하여 자제(子弟)들도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청탁을 못했다고 한다. 일찍이 함길도 감사(咸吉道監司)가 되었을 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양(漢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길도 향시(鄕試)의 방(榜)이 발표되었음을 보니 그의 아들 오(烏)가 방에 들었으므로 시관(試官)을 불러 꾸짖기를 "늙은 것이 감히 나에게 아첨을 하느냐. 내 아들 오(烏)가 학업에 정진하지 못하거늘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이려 하느냐."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시관을 파면시켰다고 한다.
「용재총화( 齋叢話)」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청렴 강개한 성품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때 이조(吏曹)에서 사람을 벼슬에 잘못 임명한 일이 있었다. 세종(世宗)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서 상참(常參: 조정에서 매일 정례적으로 행하는 조회)을 받을 때 정승 겸 판서 하 연(河 演)과 이조 판서 최 부(崔 府)가 함께 입시(入侍)하였더니 갑손이 왕에게 아뢰기를 "최 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 연은 조금 사리를 알면서도 알맞지 못한 사람을 등용하였으니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화한 얼굴로 양편을 화해시켰으나 조회가 끝난 뒤에 밖에 나와서 둘 다 땀이 물 흐르듯할 때 갑손이 웃으면서 "각기 제 직분을 다했을 뿐이니 서로 해침은 아닙니다."하며 녹사(錄事)를 불러서 "두분이 심히 더우신 모양이니 네가 부채를 가지고 와서 부쳐 드려라"하고는 조용한 태도로 조금도 후회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고 한다.
갑손(甲孫)의 아우 창손(昌孫)은 세종 때 부제학(副堤學)으로 춘추관(春秋官)의 수찬관(修撰官)을 겸하여「고려사(高麗史)」와「세종실록(世宗實錄)」·「치평요람(治平要覽)」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세조(世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왕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고, 세조가 신임하여 "내가 경을 공경하기를 숙부와 다름 없소"하면서 창손이 술을 권하면 반드시 어좌(御座)에서 내려앉았으며 술을 못 마시는 창손을 위하여 좌석에 반드시 단술을 준비케 하였다고 한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발의 연골(軟骨) 뼈가 붙어 일어설 수 없다고 칭병하여 벼슬을 마다했던 구(球 : 무안 현감 유의의 아들)는 18년 동안이나 거짓으로 앉은뱅이 노릇을 한 집념의 선비였다.
그의 아들은 난세에 살면서 간신(奸臣)들과 집념으로 항거하면서 기구하게 일생을 마친 희등(希登)이다. 그가 상처(喪妻)하자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 김안로(金安老)가 사위로 맞으려 했으나 "평생 홀아비로 살지 그 추문(醜門)에 들지 않겠다."고 면박을 하여 김안로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구수담(具壽聃)이 간신 진복창을 추천하자 "이놈은 간사한 자의 괴수다."고 막말을 하고 진복창이 앉았던 자리를 거두어 불태우기까지 하였다. 또한 간신 이 기(李 기)의 탄핵소를 올리고 이 기 일당에게 정정당당하게 그 사실을 고하여 적을 삼았으며, 파당의 거장 윤원형(尹元衡)이 그와 더불어 일을 하고자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도 뜯어보지 않고, 죽을지언정 언평(彦平 : 윤형원의 호)과 같이 일할 수 없다고 전갈을 보내어 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용기있는 저항으로 뜻있는 선비들의 존망을 받았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용천(龍川)으로 귀양가기 전야에 별세했다.
가족들이 염습(殮襲)할 재력이 없어 시체 옆에서 울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알지 못하는 선비들이 무명 3백여 자(尺)를 가지고 와서 염습을 하고는 "우리가 누구냐고 묻지 말아달라"면서 돌아갔고, 영남(嶺南)에서도 그의 부음(訃音)을 듣고 백여 명의 선비가 올라와 부조(扶助)만을 하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직제학(直提學) 사(賜)의 아들이 성종조(成宗朝)의 명신(名臣) 난종(蘭宗)이다.
「명신록(名臣錄)」에 의하면 그는 풍채가 아름답고 도량이 활달하여 일찍부터 세조(世祖)의 아낌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날 세조가 주역(周易)과 원각경(圓覺經)의 우열을 물으니, 세조가 독신하는 임금인 줄 알면서도, "불교의 요사스런 글을 어찌「삼성경(三聖經)」과 비교하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세조가 크게 노하여 역사(力士)를 시켜 잡아매어 매질하게 하였으나 난종은 얼굴빛이 평상시와 같이 태연하므로 기가 질려 그만 두었다고 한다.
난종의 아들이 중종조(中宗朝)의 명상(名相) 광필(光弼)이다. 안 당(安 당)·김 정(金 淨)·조광조(趙光祖)·김 식(金 湜) 등과 더불어 <팔현(八賢)>으로 일컬어졌던 광필은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연산군(燕山君)의 사냥이 너무 심하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아산(牙山)으로 귀양가기 시작하여 삼흉(三兇 : 조선 중종 때 전권 횡자하다가 사사된 김안로·허 항·채무택의 세사람)에 거슬려 관력의 절반을 유배지에서 보냈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재기용되었을 때 육식(肉食)을 금하고, "전 임금의 생사를 모르는 처지에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여 사람들을 탄복시켰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가 파직되어 회덕현(懷德縣)에 내려가 있었는데, 불의에 금오랑(金吾郞)이 달려들자 사사(賜死)되는 줄 알고 온 집안이 모두 놀래고 두려워 우는데도 광필은 변색도 없이 장기를 두면서 치우지 않았다. 금오랑이 전하기를 감형(減刑)되어 김해(金海)로 귀양보낸다 하니 광필은 "임금의 은혜가 지극합니다."하며 머리를 조아렸고, 김해로 귀양가는 길에 지은 다음과 같은 시(詩)가 「당적보(黨籍譜)」에 전한다.
훼방이 산같이 쌓였으나 마침내 용서받았네
이세에 임금 은혜에 보답할 길 없구나.
열번 높은 고개를 넘는데 두줄기 눈물이요.
세 번 장강(長江)을 건너면서 홀로 혼이 끊어지네
아득히 높은 산엔 구름이 먹을 뿜고
망망한 들판에는 비가 항아리를 쏟는 듯 하네
저물게 바닷가 동쪽 성밖에 다다르니 초가집이 쓸쓸한데
대나무로 문을 삼았고녀
서울 중구 회현동 1가 14번지는 동래 정씨의 옛 기지(基地)였다고 한다. 이곳은 문익공 광필이 살던 터로 약 400여 년간 자자손손(子子孫孫)이 대를 이어 지켜 왔던 유서 깊은 곳이다.
어느 날 광필의 꿈에 선인(仙人)이 나타나 집앞 은행나무에 열두 개의 서각대(犀角帶)를 걸어 놓고 가더라는 것이다. 그후 광필의 손자 유길(惟吉), 증손 창연(昌衍), 현손 태화(太和) 등 열두 명의 상신(相臣)이 배출되어 동래 정씨의 화려한 명맥(名脈)을 이루었다.
광필의 손자 유길(維吉)은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대사헌(大司憲)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선조(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고, 문장(文章)과 시(詩)에 능했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유길의 아들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창연(昌衍)은 광해군(光海君)의 비(妃)인 류씨(柳氏)가 그의 생질녀였기에 왕의 자문에 응했으며, 공정한 마음으로 억울하게 옥사(獄事)에 관련되었던 많은 선비를 구해주면서도 본인에게는 물론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창연의 아들로<삼세호당(三世湖堂)> 이라 우러름을 받았던 광성(廣城)과 광경(廣敬)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으며 광성의 아들 태화(太和)는 효종(孝宗)과 현종조(顯宗朝)에서 영의정을 지내며 현상(賢相)으로 명망이 높았다.
조선조(朝鮮朝)에서 17명의 상신(相臣)을 비롯한 수많은 명신현관(名臣賢官)을 배출해낸 동래 정씨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더불어 <삼대상신가문(三大相臣家門)>으로 유명을 떨쳤으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충의열사(忠義烈士)가 배출되어 도덕과 학문이 뛰어났던 석학(碩學)들과 함께 명문 동래 정씨의 가통(家統)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