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M. 5권 BIRD CAGE 1] ROMAN HOLYDAY - 上 (뉴타입 연재분)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마태오 11장 27절)
“어이, 아가씨. 거기 블라우스 좀 보여 줘. 저 치마도. 파니에는 레이스가 달린 걸로 부탁해. 사이즈는 S…. 아, 아가씨. 귀여운데. 함께 식사라도 할래?”
“네? 응? 네에?”
프릴과 레이스로 장식된 색색깔의 옷들 틈에서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아직 젊은 점원은 당황하며 대답했다.
이런 남자가 여긴 왜 온 걸까?
점원은 그런 눈으로 지상 2미터 높이에서 능글맞게 웃고 있는 갈색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사제복을 아무렇게나 걸친 거구의 남자는 태연했다. 남자 냄새나는 외모와 가슴 털로 소녀복 전문 매장의 화사한 분위기를 처참하게 박살내며 남자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점원에게 넉살 좋게 속삭였다.
“판테옹 근처에 스테이크를 잘 하는 가게가 있는데, 예약을 해둘 테니까-.”
“레온 씨, 남한테 짐을 떠맡겨 놓고 지금 뭐하는 겁니까?”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달콤한 말로 헌팅을 시작한 거한의 귀에 원망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이런 곳에는 왜 온 걸까 싶은 양팔에 커다란 짐을 안은 또 한 명의 신부가 동그란 안경 아래의 눈을 게슴츠레 뜨며 호소했다.
“당신이 딸에게 줄 선물을 사고 싶다길래 이 추운 날에도 따라와 준 것 아닙니까, 다 샀으면 빨리 사제 기숙사로 돌아갑시다아.”
“닥쳐, 어리버리. 여자라는 이름이 붙은 것과는 암술과도 인연이 없는 주제에 남의 연애사업을 방해하지 마.”
거한-레온 가르시아 신부는 유유하게 뒤를 돌아보며 벌칙 게임이라도 받고 있는 듯한 표정의 동료를 윽박질렀다.
“게다가 난 이제부터 밀라노에 가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를 만나야 되거든? 선물을 잔뜩 준비하는 게 남자의 의무 아니겠나?”
“세간에서는 그런 걸 ‘팔불출’이라고 하지요…. 파나는 네 살이죠? 명품이 뭔지도 모를 나이라구요.”
목에 걸린 종이가방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며 은발의 신부- 아벨 나이트로드는 처량하게 콧물을 훌쩍였다. 깜찍한 종이가방에는 장난감 화장 세트와 소꿉장난 세트가 가득 담겨 있었다. 크리스마스로부터 2주일이 지난 지금 산타클로스도 이렇게 많은 선물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 빨리 돌아가요. 밀라노에는 오늘밤 특급 열차로 가실 거죠? 이쪽 일을 전부 처리하고 가지 않으면 저쪽에서 카테리나 씨한테 혼날 걸요?”
“…쳇, 할 수 없지.”
우는 아이도 그친다는 호랑이 상사의 이름에 거한은 겨우 점원의 손을 놓았다.
‘철의 여인’ 카테리나 스포르차 추기경은 잡무를 처리하기 위해 영지로 돌아가 있다. 밀라노에 가면 싫어도 얼굴을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 사실과 이미 잔뜩 사들인 선물을 비교분석해본 후 레온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지. 좀 부족하긴 하지만 파나한테는 이 정도로 참아달라고 해야겠군.”
“이 정도면 충분해요. 그보다 아빠의 건강한 얼굴을 보여주는 게 파나에게도 더 기쁠-크헉!”
겨우 고역에서 해방된 기쁨에 희희낙락 뒤돌아선 은발 신부의 몸이 느닷없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호리호리하고 기다란 몸이 양팔을 들고 바닥으로 쓰러져갔다. 레온이 재빨리 손을 뻗지 않았더라면 잔뜩 안고 있던 짐과 함께 바닥에 넘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어이, 괜찮냐?”
레온이 느긋하게 말을 건넨 것은 뒤에서 멱살을 잡힌 채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동료가 아니었다. 질식사 직전의 아벨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레온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사람에게 다른 한 손을 뻗었다.
“꼬마 아가씨, 이런 곳에서 뛰어다니면 위험해. 다치진 않았냐?”
“아, 아야아….”
검은 머리 위에 베레모를 쓴 소녀는 작은 신음과 함께 허리를 문질렀다. 상당히 세게 넘어진 모양이었다. 커다란 안경을 쓴 동유럽(슬라브)계 얼굴에 초록빛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자신에게 내민 손을 뿌리친 후 가느다란 눈썹을 치뜨며 거한을 노려보았다.
“네 이놈! 어딜 보고 다니는 것이냐?! 그 덩치로 길을 가로막고 있다니…. 조심하거라!”
“어이, 그게 무슨 소리냐? 부딪힌 건 너잖아, 꼬마 아가씨?”
‘나죽어나죽어요아아저기꽃밭이’라며 창백한 얼굴로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동료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레온은 다부진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외국에서 로마로 관광여행을 온 부잣집 따님 아닐까. 아직 열 살 남짓한 앳된 얼굴을 내려다보며 레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보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는 모르겠다만 이런 곳에서 뛰어다니면 못 써요. 다치면 큰일이잖냐.”
“흥! 쓸데없는 참견 말거라. 너 같은 것의 충고는…, 앗!”
밉살맞게 쏘아붙이던 소녀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리고는 발목 근처를 누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야야…. 다리가….”
“거 봐라. 내 말이 맞지?”
거한은 임사체험 중인 동료를 내팽개친 후 소녀 옆에 무릎을 꿇었다. 비명을 지르며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신부 따윈 아랑곳없이 글러브 같은 손으로 가느다란 발목을 어루만졌다.
“뼈는 부러지지 않았군. 좀 삔 것뿐이야. 조금만 참아라. 병원에 데려가주마.”
“벼, 병원?!”
그 말에 소녀의 안색이 변했다. 소녀는 겁먹은 표정으로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섰다.
“쓰, 쓸데없는 참견 말아라! 병원에 가지 않아도 이렇게 멀쩡히 설 수…, 아야야!”
“거 봐라, 뭐가 괜찮냐?”
짧은 비명을 지르며 또다시 주저앉을 뻔한 소녀를 재빨리 부축하며 레온은 무뚝뚝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는 귀찮은 듯이 귀를 파며 지적했다.
“그냥 내버려뒀다가는 나중에 툭하면 삔다. 그러니까 의사에게 진찰을-.”
“아아,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우아하지만 어딘가 딱딱한 여성의 목소리가 무뚝뚝한 레온의 말을 중단시켰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 옷의 남자 몇 명이 하녀복 위에 숄을 걸친 젊은 여자를 선두로 가게에 들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소녀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핏기 없는 입술을 열었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미, 미안하다, 테레사…. 예, 예쁜 옷이 있기에 그만….”
소녀는 머뭇거리며 변명했다. 방금 전 레온을 대할 때의 건방진 태도와는 달리 왠지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소녀는 거한의 부축을 받으며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그보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용케 알았구나….”
“저는 아가씨의 시녀장이니까요.”
여자는 차갑게 대답하며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양산을 만지작거리며 정중하게 덧붙였다.
“그보다 주인님께서 매우 걱정하고 계십니다. 옷이라면 저희가 사겠습니다. 아가씨께서는 곧 숙소로 돌아가십시오.”
“아, 알겠다….”
소녀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어서는 도중 커다랗게 비틀거리며 레온의 팔에 매달렸다.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악! 살려줘어어어어! 유괴범이다아아!”
“뭐라고….”
고막이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비명에 거한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소녀는 그의 팔을 단단히 잡으며 일그러진 얼굴로 또다시 외쳤다.
“테레사, 살려줘! 이 자들이 나를 납치해서 몹쓸 짓을 하려고 해!”
“야, 잠깐만.”
대체 무슨 소리일까. 레온은 짜증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심드렁한 얼굴로 상대를 나무랐다.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여자 미만의 생물한테는 흥미 없거든? 헌팅을 하려면 7, 8년 후에나 찾아와라. 그럼 얼마든지 상대해줄 테니까.”
“미안하지만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다.”
시녀를 비롯한 검은 옷의 남자들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아직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가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슬며시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소매에서 금속 덩어리를 거한에게 들이대며 속삭였다.
“명령이다. 지금 당장 나를 유괴해라…. 거절하면 당장 쏘겠다!”
“이봐, 꼬마 아가씨….”
손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의 원반에 짧은 통을 달아놓은 듯한 금속 덩어리를 바라보며 레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팜피스톨이라 불리는 22구경 6연발 호신용 권총. 어린아이도 쏠 수 있는 총이지만 사정거리도 짧고 위력도 극히 낮다.
“그런 장난감 권총으로 날 협박할 수 있을 것 같냐? 그딴 걸로 심장을 쏴봤자 사람은 죽일 수 없어. 날 협박하려면 눈이나 입을 겨눠야 할 거다.”
“…이 탄환에는 맹독이 들어있다.”
거한의 충고에 소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원반 가장자리로 튀어나온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며 앳된 목소리로 협박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곰도 즉사시킬 만한 양이라고 들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내 말을 들어라!”
“…….”
그 협박에 레온은 아무 말 없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긴장으로 새파랗게 질린 소녀의 얼굴과 가늘게 떨리는 흉기를 쥔 작은 손을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바라본 후 큰 소리로 외쳤다.
“들었냐, 너희들!”
땅이 울릴 듯한 포효가 가게 안을 뒤흔들었다.
“이 꼬마는 내가 데려가겠다! 돈을 가지고 올 곳은 나중에 지시할 테니 연락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라! 경찰에 찌르면 이 꼬마의 목숨은 없는 줄 알아라!”
“레, 레온 씨.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겨우 몸을 일으킨 아벨이 이를 드러내며 남자들을 협박하는 동료에게 허둥지둥 말했다. 그리고는 레온이 미쳤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반쯤 착란에 빠진 상태로 호소했다.
“아아, 당신이 그렇게 쪼들리고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알았더라면 돈을 꿔줄 사람을 함께 찾아봤을 텐데…. 하지만, 레온 씨. 행복은 돈이 아닙니다! 행복이란 사랑-.”
“시끄러워! 됐으니까 너도 이리 와!”
레온은 착란 상태에 빠진 동료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며 외쳤다. 아벨이 코피를 뿜으며 몸을 뒤로 젖혔을 때 그의 거구는 이미 생선가게 앞의 도둑고양이처럼 재빨리 돌아서 있었다.
“안 돼! 놓치지 말아라! 쫓아라!”
화사한 옷들을 뛰어넘어 가게 안쪽으로 달려가는 거한과 괴성을 지르며 그를 쫓아가는 은발의 신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남자들에게 지시를 내린 것은 하녀복을 입은 여자였다. 그 명령에 검은 옷의 남자들은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의뢰인에게 보고하겠다.”
도망치는 신부들과 그를 뒤쫓는 남자들을 지켜보며 여자는 홀로 옆에 남아있는 검은 옷의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그 뒤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점원 따윈 안중에도 없는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너희는 그 계집애를 잡아라. 잡을 수 없으면 처치해도 상관없다.”
Ⅰ
“이건 중대한 사태일세! 우리 보헤미아 공작가가 시작된 이래 최고의 불상사야!”
로마를 방문한 국빈의 숙소로 제공되는 벨베데레 궁전의 다실.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장식들은 교황청(바티칸)의 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 다실의 가죽소파에 몸을 기대며 브라티슬라바 백작 볼레슬라프는 급한 전갈을 받고 국무성성에서 달려온 두 손님을 노려보았다.
“조카-공녀전하가 마을에 납치를 당하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로마의 치안이 이토록 형편없어서야!”
“시내의 치안은 매우 양호합니다, 각하.”
볼레슬라프의 비난에 정중하게 대답한 것은 두 손님 중 나이가 많은 쪽-알비온 억양이 조금 남아있는 중년 신사였다. 밀라노로 돌아간 국무성성 장관의 대리인이라는 그 남자는 사려 깊은 얼굴로 턱을 쓰다듬으며 불을 붙이지 않은 파이프를 씹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습니다만 범죄 발생률은 매우 낮습니다. 살인이나 유괴 같은 흉악범죄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습니다.”
“호오, 그럼 이번 사건은 어떻게 된 거요, 신부님?”
보헤미아 공국 제2 공위 후계자 씩이나 되는 볼레슬라프가 상대에게 일일이 경칭을 쓰는 것은 딱히 신앙심이 깊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순히 상대의 이름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볼레슬라프는 시가에 불을 붙인 후 담배연기와 독설을 한꺼번에 뿜어냈다.
“백주 대낮에 길 한복판에서 VIP가 납치되다니…. 우리 보헤미아 공국은 시골이긴 하나 이런 불상사는 일어난 적이 없소이다.”
“공녀 전하는 신분을 숨기고 외출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볼레슬라프의 도발에 응한 것은 두 손님 중 젊은 쪽-긴 철봉을 든 미모의 청년이었다. 청년은 초록빛 눈을 조용히 빛내며 벌레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볼레슬라프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우연히 범죄에 말려들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사전에 철저히 준비된 유괴단체의 소행이라고 추측됩니다. 각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공녀 전하의 시중을 드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눠 봐도 되겠습니까? 수상한 인물을 보지 못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건 상관없네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걸세.”
볼레슬라프는 더욱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한 마디도 없이 옆 소파에 앉아 있는 인물을 흘낏 바라보며 극히 사무적으로 설명했다.
“한 달 전 조금 불상사가 있어서 조카 주위의 사람들을 전부 교체했다네. 아직 업무에 익숙하지 못해서 수상한 인물을 눈치 챌 말한 여유는 없을 걸세.”
“호오, 불상사?”
중년 신사의 눈이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빛났다. 신사는 멋지게 파이프를 비틀며 볼레슬라프가 자연스럽게 넘기려던 그 말을 날카롭게 추궁했다.
“시중드는 사람들을 모조리 교체하다니 상당히 대담한 처사로군요. 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아아, 좀 사고가 있어서.”
볼레슬라프는 귀찮은 듯이 고개를 저으며 피우다 만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는 새 시가를 꺼내서 끝을 자르며 말했다.
“전의 시녀장이 술에 취해서 강에 빠져 죽었다네. 뭐, 흔히 있는 일이긴 하네만 공녀 전하의 시녀장으로서 있을 수 없는 사고였지. 그래서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시중드는 사람들을 전부 교체했다네.”
“그렇습니까. 그럼 혹시 그 때문에 공작가에 원한을 품은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해고당한 자들의 리스트를 알려주시겠습니까? 이쪽에서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야 상관없네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 이 사건을 해결해주게. 자네도 알겠지만 공작 각하는 내일 아침 공녀와 함께 교황성하를 알현할 예정일세. 그때까지는 반드시 해결해주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단 내일 아침 알현은 연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중년 신사는 파이프를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은 볼레슬라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시선을 던진 것은 볼레슬라프 옆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또 다른 인물이었다. 신사는 정중한 어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사건은 해결할 때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공작 각하, 알현은 공녀 전하를 구출할 때까지 미루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 그건 곤란하네.”
중년 신사의 충고에 30대 정도의 남자-보헤미아 공 오타카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나이에 비해 노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얼굴 아래 손깍지를 끼며 남자는 금욕적인 눈빛으로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작년 내란이 발생했을 때 교황 성하께 도움을 받았네. 이번 알현은 그것을 감사드리기 위한 중요한 공무일세.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예정을 변경할 수는 없네. 국무성성의 배려는 감사하네만 알현은 예정대로 진행하겠네.”
“허나 각하, 그건-.”
보헤미아 공의 말에 젊은 신부는 눈썹을 찡그렸다. 딸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주저 없이 공무를 우선시하는 아버지에게 청년은 어딘지 비난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그가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중년 신사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보헤미아 공.”
신사는 지팡이를 들며 우아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만 실례하겠다는 뜻이었다. 신사는 유유히 소파에서 일어서서 공작과 공작의 동생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각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내일 알현은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사건 해결-공녀 전하의 구출은 그와 병행해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주게.”
오타카르는 소파에서 일어서며 여전히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도는 한 나라의 주인답게 침착했으며 딸을 유괴당한 아버지의 동요는 털끝만큼도 엿볼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동요 따윈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만큼 냉정한 표정이었다.
“나는 한 나라의 주인으로서 공무를 내팽개쳐 둘 수는 없네. 딸-리부셰 문제는 국무성성에서 알아서 해결해 주게.”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전하를 구출하겠습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리 자신만만한 것일까, 중년신사는 믿음직스럽게 장담하며 우아하게 몸을 돌렸다. 젊은 신부가 그 뒤를 따르고 오타카르도 그들을 배웅하며 방에서 나갔다.
“참, 그렇지. 내일 알현 시에 헌상드릴 물품의 목록을 제출하고 싶은데 그건 어느 쪽으로 보내면 되겠나?”
“그건 관저 관리실 관할입니다. 허나 지금 준비하실 수 있다면 저희가 대신 제출해 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은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며 문 밖으로 사라졌다. 방안에 홀로 남겨진 볼레슬라프는 작게 혀를 차며 세 사람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았다.
“형님은 여전히 매정하군.”
볼레슬라프는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비웃음인지 쓴웃음인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형의 일중독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작년에 아내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조차 공무를 중단하지 않았고 결국 그녀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을 정도다. 딸이 납치당하면 좀 더 아버지답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줄 알았건만 저 모양이다. 물론 딸에 대한 형의 무관심은 볼레슬라프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니 불평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거기 있나, 테레사?”
“네.”
볼레슬라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순간 그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 난로 옆에 하녀복 차림의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손에 들고 있던 양산을 옆구리에 끼며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테레사입니다. 무슨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각하?”
“용무가 있으니 부른 것 아닌가. 리부셰를 납치한 사람들의 신원은 알아냈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시녀장-테레사는 낮지만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범한 시녀치고는 지나치게 날카로운 눈에 차가운 빛을 담으며 명료한 어조로 보고를 계속했다.
“허나 현재 시내에 사람을 풀어뒀습니다. 그들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빨리 잡아라. 그 계집을 이대로 풀어두는 것은 위험하다.”
볼레슬라프는 시가를 물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소피아라고 했던가. 지난 달 처치한 시녀장은? 그 여자는 ‘성당’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만약 처치하기 전에 그 계집애에게 뭔가를 전했다면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 유괴사건은 각하께 바라지도 않던 기회 아닐까요?”
불쾌한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볼레슬라프와는 대조적으로 테레사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사태를 분석할 뿐이었다.
“이 유괴가 단순한 사고이든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든 유괴는 유괴입니다. 이 사건 때문에 공녀 전하가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것은-.”
“책임은 유괴범에게 있다 이 말이냐…. 흠, 그건 그렇군.”
볼레슬라프는 중요한 발견을 한 과학자 같은 얼굴로 시녀장의 의견에 찬성을 표했다. 그리고는 소파에서 일어나 다실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찌되었든 형이 교황을 알현할 때까지는 그 비밀을 지켜야 한다. 그 계집애가 어디까지 눈치 채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안 요소는 제거해야 한다.”
볼레슬라프는 어둡게 중얼거리며 벽에 설치되어 있는 금고로 손을 뻗었다. 복잡한 순서로 다이얼을 맞춘 뒤 무거운 철문을 열었다.
신중한 동작으로 금고 안에서 꺼낸 {물건}을 내려다보며 볼레슬라프는 엷게 웃었다. 조명의 명도를 낮춘 실내에서 그 웃는 얼굴은 양손에 든 물건의 빛을 받아 불길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볼레슬라프의 손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작은 모형이었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인류사회 최고의 성지를 정밀하게 재현한 모형. 단 평범한 모형은 아니었다. 얼음처럼 투명한 모형은 공국 최고 유리 세공사들이 3년이라는 세월을 쏟아 부어 만들어낸 보헤미안 글라스의 걸작이었다.
“겨우 찾아온 기회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처럼 빛나는 모형을 사랑스러운 듯이 끌어안은 채 볼레슬라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야심과 살의에 찬 목소리로 명령했다.
“테레사, 그 계집애를 없애라. 함께 있던 신부들도.”
Ⅱ
아직 1월 초순인데도 오늘 로마는 봄처럼 따뜻했다. 푸른 하늘에 이끌려 밖으로 나온 가족과 연인들, 그리고 그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피자와 크레이프 노점상으로 광장은 몹시 붐비고 있었다.
“젠장, 다들 행복해 보이는군….”
계단 꼭대기에 걸터앉은 거구의 남자는 마치 자신의 장례식이라도 구경하는 듯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캔맥주를 마시며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야, 어리버리…. 우리 대체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음, 피자를 먹고 있는데요?”
거한의 회의에 찬 발언에 오른쪽 옆에 앉아있는 은발의 신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쟁이라도 하는 듯한 기세로 신문지만한 피자를 위 속에 집어넣으며 심각하게 대답했다.
“참고로 저는 지금 여섯 개 째입니다. 다음엔 나폴리타나에 도전해 볼까…. 레온 씨는 뭘 드실래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여기서 이 녀석을 콱 밀어버리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긴 계단을 내려다보는 거한의 눈에는 그런 생각이 떠올라 있었다. 어째서인지 왼쪽으로는 절대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거한은 그리스도를 유혹하는데 실패한 악마 같은 목소리로 신음했다.
“난 오늘밤 밀라노에 가야 한단 말이야. 처리해야 할 일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바쁜 몸이라 이거야…. 그런데 왜 이딴 곳에서 너 같은 놈이랑 사이좋게 밥을 먹어야 되는 거냐?”
“어쩌겠어요. 우린 흉악한 유괴범이잖아요? 범인은 피해자를 구속해야 하는 법. 그렇죠, 소피아 씨?”
“음, 그대 말이 맞다. 나이트로드.”
레온의 왼쪽 옆에 앉아있는 소녀가 아벨의 발언에 엄숙하게 찬성을 표했다. 아까부터 우아하게 피자를 뜯어서 입안에 넣고 있던 소녀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은 뒤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니뭐니해도 너희는 흉악한 유괴범이다. 부디 그 점을 잊지 말거라. 음.”
“…잊게 해줘, 제발.”
신탁을 전하는 무녀처럼 가슴을 펴는 소녀로부터 시선을 피하며 레온은 불쾌한 얼굴로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는 천박하게 트림을 하며 말했다.
“난 생야채와 어린애가 죽도록 싫어. 가까이 있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날 정도란 말이야. 그런데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여봐라, 가르시아.”
작은 손가락이 고뇌하는 거한의 옆구리를 찔렀다. 소녀가 반짝반짝 빛나는 초록빛 눈으로 레온을 올려다보며 거만하게 말했다.
“목이 마르구나. 마실 것을 가져오너라.”
“…야, 어리버리!”
흉악한 유괴범은 인질의 요구에 넌더리가 난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귀찮은 일을 동료에게 떠넘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이 꼬마는 너한테 맡기마. 난 더 이상 같이 못 놀아 주겠다. 무엇보다 나는 오늘 밤 밀라노에-.”
가야 한단 말이다-라고 말하려던 레온은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은발의 신부는 어느 새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문득 긴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호리호리하고 기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저 놈이….”
레온은 살인 광선이라도 발사할 듯한 눈으로 피자 가게를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겨우 체념한 듯이 종이가방을 열고 캔주스를 꺼냈다.
“자, 말해두지만 사 주는 게 아니다. 나중에 돈 내놔라.”
“안심해라. 이래보여도 우리 집안은 보헤미아 최고의 대부호다. 몸값과 함께 청구하거라.”
듣자하니 프라하에 본사가 있는 어느 대기업의 사장 따님인 모양이다만 정말 귀염성이라고 털끝만큼도 없는 꼬마다. 소녀는 시건방진 얼굴로 레온이 내민 캔주스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곧바로 마시지 않고 한동안 캔을 상하좌우로 뒤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 아닌가.
“가르시아, 뚜껑이 열려있지 않구나. 열어다오.”
“…까불지 말아라, 꼬마.”
레온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레온은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위협했다.
“나 지금 기분 더럽거든? 더 이상 까불지 말아라…. 젠장, 부모의 얼굴이 보고 싶군. 자기 일 정도는 자기가 해야 할 것 아냐.”
“…….”
짜증스럽게 입술을 일그러뜨리는 거한을 바라보며 소녀는 캔주스를 든 채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몰라.”
“엉?”
거한의 뛰어난 청각으로도 소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레온은 커다란 몸을 구부려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에게 귀를 바짝 들이댔다.
“안 들려. 뭐 불만이라도 있냐?”
“여는 법을 모른다고 했다!”
이번에는 분명히 들렸다. 소녀는 거의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외치며 더욱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이런 것은 마셔본 적이 없다! 전에 다른 아이가 마시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직접 마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여는 법을 모른다.”
“…그럼 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레온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여버린 소녀의 고백을 비웃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에서 억지로 캔주스를 빼앗아서 능숙하게 뚜껑을 열고 다시 내밀며 말했다.
“자…. 흘리지 말고 마셔라.”
“으, 으음, 수고했다.”
소녀는 거만하게 레온을 치하한 뒤 그가 내민 캔주스를 받았다. 뭔가 동경하는 장난감이라도 손에 넣은 것처럼 눈을 빛내며 단숨에 그것을 들이마셨다.
“푸웁! 뭐냐, 이건! 왜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냐!”
“너 바보냐, 그렇게 단숨에 마시니까 그렇지.”
캔을 지나치게 기울였던 모양이다. 레온은 대량으로 흘러나온 과즙에 콜록거리는 소녀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난폭하게 닦았다. 그리고는 눈물을 글썽이는 소녀의 눈앞에서 올바르게 마시는 법을 몸소 보여주었다.
“알겠냐? 캔을 기울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캔 속에 공기를 잘 집어넣는 거지. 캔 속의 수면이 지면과 평행이 되도록 해 봐라.”
“으음…. 이, 이렇게 말이냐?”
진지하게 맥주를 마시는 레온을 바라보며 소피아도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시범에 따라 서툴게 캔을 기울였다.
“오옷! 성공했다, 가르시아!”
“그럭저럭 괜찮군. 제법 잘 하는데.”
레온은 엄지손가락을 척 세우며 얼굴을 빛내는 소녀를 칭찬했다. 그리고는 나머지 맥주를 단숨에 들이마신 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공부도 끝났겠다 슬슬 진지하게 얘기를 해볼까…. 이봐, 꼬마 아가씨. 너 대체 우리한테 뭘 시키고 싶은 거냐? 슬슬 솔직하게 말해 봐라.”
“음, 그대들이 편지를 써 줬으면 한다. 우리 아버님 앞으로.”
여전히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주스를 마시며 소피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아쉬운 표정으로 빈 캔을 흔들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른바 협박장을 말이지. ‘딸을 인질로 잡고 있다. 무사히 돌려받고 싶으면 우리의 요구에 응해라.’ 그래, 내 아버님을 협박해 줬으면 한다.”
“그러니까 우리더러 가자 유괴를 도우라 이거냐? 꼬마 아가씨, 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냐? 이건 훌륭한 범죄야.”
“나를 바보로 아는 것이냐? 물론 그쯤은 알고 있다…. 보수라면 걱정할 것 없다. 우리 집은 부자다. 몸값을 듬뿍 받아서 그대들에게 주마. 정당한 노동에는 정당한 보수가 필요한 법이니까. 음.”
“그렇군…. 하지만 대답을 하기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거만한 태도로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는 소녀를 레온은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남자다운 얼굴에 온화한 표정을 지은 채, 그러나 어딘가 험악한 기운이 담긴 굵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굳이 이런 짓을 하는 거냐? 아버지한테 원한이라도 있냐?”
“글쎄….”
레온의 험악한 말투에 소녀는 조금 동요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눈을 내리깔면서도 허세를 부리며 대답했다.
“아버님은 늘 일밖에 모른다. 늘 일만 하느라 가족 따윈 안중에도 없다…. 작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조차 일을 하셨을 정도다.”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린 것일까, 소녀의 눈에 어두운 빛이 감돌았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
“그래서 조금 소동을 벌여서 혼을 내주고 싶다. 아버님은 사회적으로 책임이 있는 몸이다. 딸이 유괴당하면 여러모로 난처할 터…. 아, 혹시 뒷일을 걱정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대들은 협박장만 써주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대는 걱정할 필요-.”
“미안하지만 거절한다.”
요구가 끝나기도 전에 거절이 되돌아왔다. 소녀를 내려다보는 거한의 표정은 방금 전 캔주스 마시는 법을 전수해줄 때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검은 눈은 육식동물처럼 빛나며 소녀의 앳된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까불지 마. 아무리 사정이 있어도 그렇지 부모를 협박하는 자식이 어디 있냐. 부모한테 불평할 시간이 있으면 너 자신을 돌아봐라, 싸가지 없는 꼬맹아.”
“싸, 싸, 싸가지 없는 꼬맹이?! 나더라 하는 말이냐?!”
“그럼 너 말고 누가 있냐?”
레온은 내뱉듯이 말하며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옆에 놓아뒀던 산더미 같은 종이가방을 들며 싸늘하게 말했다.
“나 참, 바보 같은 꼬맹이 때문에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잘 있어라, 꼬맹이. 두 번 다시 만날 일도 없겠지만 빨리 집에 돌아가서 아빠 곁에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다.”
“가르시아, 네 이놈! 무례하다!”
자신에게 관심을 잃어버린 남자의 눈을 끌기 위해 소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가느다란 팔다리를 휘저으며 협박했다.
“내 말을 안 들으면 소리를 지를 테다! 큰 소리로 살려달라고 외칠 테다! 그래도 상관없느냐?!”
“마음대로 해. 난 오늘밤 밀라노로 딸을 만나러 가야 되거든? 너 같이 어리광만 부리는 싸가지 없는 꼬맹이랑 더 이상 놀아줄 수 없단다.”
소녀의 협박에도 레온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소녀에게 등을 돌린 채 손을 흔들어 줄 뿐이었다.
“너 같은 꼬맹이가 어찌 되든 나야 알 바 아니지만 이런 싸가지도 딸이라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을 부모를 위해 한 마디만 하마. 쓸데없는 장난 그만하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발 닦고 잠이나 주무셔.”
“이, 이…!”
이렇게 심한 폭언을 들은 것은 아무도 태어나서 처음인 모양이다. 소피아의 얼굴에서 한 순간 소리를 내며 핏기가 가셨다.
“너, 너 같은 놈은 딱 질색이다. 가르시아! 너야말로 가슴 털에 목매달고 죽어버려!”
“……? 앗, 잠깐만요. 소피아 씨, 무슨 일이세요?”
마침 산더미 같은 피자와 홍차를 들고 계단을 올라오던 은발의 신부가 토끼처럼 달려오는 소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계단을 뛰어내려온 소녀에게 태평하게 말을 건네던 그는 스쳐 지나가는 순간 소녀에게 다리를 걸려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고 말았다.
“쳇, 바보 같은 계집애.”
뜨거운 홍차를 머리에 뒤집어 쓴 신부는 비명을 지르며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런 희생자 따윈 아랑곳없이 광장으로 달려가는 소녀를 바라보며 레온은 작게 혀를 찼다.
이미 태양은 기울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늘 안에 밀라노에 도착하려면 슬슬 역으로 가야 한다. 거한은 불쾌한 듯이 어깨를 흔들며 계단에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걸으려다 말고 문득 걸음을 멈췄다.
“……쳇!”
두꺼운 입술에서 짜증스러운 듯이 혀를 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레온은 또다시 몸을 돌렸다.
“젠장, 이래서 애들은 딱 질색이라니까.”
레온은 작게 중얼 거리며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편에서 계속)
*.클라비스 S. C.님께서 올려주신 <HUMAN FACTOR>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내용이자 R.A.M. 5권 첫 장에 수록된 <ROMAN HOLYDAY>입니다. NT PLUS 05년 2,3월호에 연재되었으며 그중 2월호 연재분을 먼저 올려드립니다.
*.이건 제가 레온의 Ax 첫 임무를 다룬 팬픽 [R.A.M. Side] CLOUD 9을 연재할 때 ‘키보드로 레온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한다’라는 거창한 슬로건으로 타이핑 해놓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이 작품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사랑스러운 이야기이자 R.O.M. 2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요 에피소드입니다.
즐겁게, 그리고 주의 깊게 감상해주세요~
첫댓글 <ROMAN HOLYDAY>의 아름답고 화사한 컬러 일러스트 2개는 자료란에 올려 놓았습니다. 하편은.. 내일 올려드리는게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더 올려주세..(<-)멋집니다///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ㅂ+(반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