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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외 답사 스크랩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김창집 추천 0 조회 115 11.09.09 08: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탐문회 강원남부 답사기(2)

 

  *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과 '문수성지' 표지석 

 

♧ 삼신산에 버금가는 오대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가 되는 길이 어디쯤인가 가늠하면서 오대산으로 달린다. 한 번도 온 적이 없기에 이번 영월과 함께 묶어 넣은 오대산. 백두산에서부터 힘차게 흘러내리던 백두대간은 금강산과 설악산을 지나 대관령, 태백산, 소백산으로 이어지다 대관령을 넘기 전 곁가지 하나를 뻗친다. 이것이 차령산맥인데 치악산을 거쳐 충청도를 지나 서해의 대천 앞바다의 성주산에서 마감하는 그것. 이 백두대간이 차령산맥으로 갈려나가는 지점, 차령산맥의 발원지에 우뚝 솟은 산이 바로 오대산이다.

 

 오대산은 예부터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리는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다음으로 꼽던 성산(聖山)이다. 일찍이 신라 선덕여왕대 자장율사 이래 1천여 년 동안 문수보살이 많은 권속을 거느리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왔으며, 5대신앙의 본산이라고 일컫는다. 높이 1,563m의 비로봉을 주봉으로 동대산, 두로봉, 상왕봉, 호령봉 등 다섯 봉우리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으며, 동쪽 조금 떨어진 곳에 노인봉, 아래로 소금강이 자리한다.

 

 원래 오대산은 중국 산서성에 있는 청량산의 별칭으로 신라시대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 가서 공부했던 곳이다. 그가 귀국하여 전국을 순례하던 중 백두대간의 가운데 있는 산의 형세를 보니 중국 오대산과 비슷하여 ‘오대산’이라 이름 하였다고 옛 문헌에 전하는데 이것이 지금 오대산국립공원이 되었다. 강릉시, 홍천군, 평창군 등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이 산은 1975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면적은 무려 303.929㎢에 달한다.

 

 이 산에는 월정사 입구 전나무 숲을 비롯해 곳곳에 아름드리 전나무가 있어 수목군락의 절경을 보여주며, 병풍처럼 둘러선 봉우리를 잇는 능선의 완만한 곡선이 너무도 아름답다. 또한 노인봉을 시발로 동쪽으로 펼쳐진 소금강은 기암들의 모습이 금강산에 버금간다고 해서 소금강이라 부르며, 학의 날개를 펴는 형상이라 해서 청학산으로도 불린다.

 

 * 상원사 가는 길에 펼쳐진 전나무 숲 


♧ 먼저 상원사로 가면서


 겨울철은 날씨에 따라 어둠이 일찍 찾아온다. 더욱이 산에서는 오후 4시만 되어도 캄캄할 때가 있다. 아무래도 영월 청령포에서 정이 넘치는 문화해설사를 맞아 시간을 오래 끌었는지 차가 오대산 월정사 경내에 들어섰을 때는 눈까지 쌓여 있어 먼저 상원사에 다녀오자고 서둘렀다. 비포장도로지만 안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 절 입구에는 주차장 시설이 되어 있고 안내소도 있다.   

 

 오대산은 오대산 지구와 소금강 지구로 나뉘는데 그 성격이 서로 다르다. 비로봉 정상에서 볼 때 동대 너머의 청학산 쪽 소금강 지구는 바위산으로서 금강산에 견줄 만한 절경이며, 비로봉에서 평창 쪽으로 내려가는 오대산 지구는 부드러운 흙산으로서 산수가 아름답고 불교문화유적이 많다. 호명골, 중대골, 서대골, 신성골, 동피골, 조계골, 등의 계곡물이 만나 시작되는 오대천은 동대천과 합류하면서 정선을 지나 남한강으로 굽이굽이 흘러든다.

 

 무려 32개의 산봉우리와 31개의 계곡, 12개의 폭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뛰어난 자연림을 자랑하며, 신선초와 같은 희귀식물을 비롯하여 수백 종의 식물과 동물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오대산은 봄에는 온통 꽃동산으로, 여름에는 시원하면서도 울창한 계곡과 숲으로, 가을에는 오색의 단풍으로, 겨울에는 설화를 피워내는 설경이 아름답다.

 

 이처럼 풍부한 천연자원과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가진 오대산은 신라 자장율사가 오대산을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사는 산으로 믿은 뒤로, 우리의 역사 속에서 불교성지로서 큰 몫을 담당하여 왔다. 또 김시습이나 함무외, 허목과 같은 빼어난 문인과 도가적인 취향을 가진 이들도 이곳을 거쳐 갔다. 율곡과 이중환은 오대산을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하였다. 오대산의 우통수(于筒水)는 한강의 발원지이다.

 

 *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이 보관되어 있는 종고


♧ 5만 보살이 있는 성지 오대산


 월정사 홈페이지의 오대산 성지 관련 기사를 옮겨본다. …오대산은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살고 계시는 산이다. 이곳을 진성(眞聖)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믿게 된 것은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화현을 친견(親見)하고 부처님의 정골사리, 가사, 발우 등을 얻으면서부터이다. 이로써 "동북방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시면서 1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늘 설법한다."는 ‘화엄경’을 바탕으로 한 오대산 신앙이 우리나라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처럼 문수보살이 오대산에 머문다는 믿음은 뒤에 7, 8세기에 이르면 오류성중(五類聖衆)이라 하여 5만 보살신앙으로 더욱 발전된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 효명 두 태자가 오대산에서 수행하며 5만 보살에게 일일이 참배하였다고 한다. 동대 만월산(滿月山) 관음암에는 1만의 관음보살이, 남대 기린산(麒麟山) 지장암에 1만의 지장보살이, 서대 장령산(長嶺山) 미타암에도 1만의 대세지보살이, 북대 상왕산(象王山) 나한당에는 오백 나한이, 중대 지로산(地爐山) 진여원에는 1일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천태자의 당부가 어느만큼 실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동, 남, 서, 북 중의 오대에 저마다 다른 산 이름이 있고 지금 오대산의 암자들도 모두 이 기록과 일치하는 것을 보면 오대산은 보천태자 이후로도 많은 이들의 신앙의 귀의처가 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오만보살신앙은 경덕왕대에 살았던 신효거사(信孝居士)에 의해 다시 확인되면서 더욱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에는 상원사에서 세조가 문수동자를 친견한 일화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오대산이 문수신앙의 성지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이에 따른 유물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근대에 와서는 한암, 탄허, 만화 같은 큰스님이 오대산에 머물면서 그 이름을 크게 떨쳤다. 오대산은 이렇듯 불교성지로서 정신과 신앙의 귀의처였던 만큼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뛰어난 유물들이 많다. 오늘도 오대산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로서 그 몫을 다하고 있으며 마음의 안식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월정사 홈에서)

 

 * 문수사 현판이 걸려있는 건물과 문수동자를 모신 문수전 


♧ 상원사를 창건한 성덕왕 


 상원사는 705년(성덕왕 4)에 성덕왕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효소왕(692~701 재위) 때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가 오대산에 입산하여 5만 문수보살을 첨례(瞻禮)했다는 이야기는 앞서 한 바 있다. 후에 성덕왕이 된 효명은 다시 이 산을 찾아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하고, 문수보살상을 조성하여 봉안함으로써 이 절이 창건된 것이다.

 

 1376년(우왕 2)에 영암이 중창했고, 1464년(세조 10)에 왕이 이곳에 행차했다가 문수보살을 배알한 후 고양이 덕분에 자객으로부터 목숨을 건졌다고 하는 일화가 전하는데, 이로 인해 다음해에 중창하고 전답을 하사하고는 이를 영산부원군 김수온(金守溫)에게 기록하도록 했다. 1469년(예종 1)에 세조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904년에 선원(禪院)을 개설하고 1907년에 수월화상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당우로는 선원인 청량선원(淸凉禪院), 승당인 소림초당(小林草堂), 종각인 동정각(動靜閣), 영산전 등이 있다.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과 복장유물 23점(보물 제793호), 동종(국보 제36호) 등이 있는데, ‘중창권선문(上院寺重創勸善文)’은 한문과 한글이 병기되어 있어 한글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덕왕은 신라의 제33대 왕(702~737 재위)으로 정치적 안정과 함께 사회적으로도 통일신라의 전성기를 이룬 왕이다. 당에는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여 당의 국학(國學)에 신라 귀족 자제들의 입학을 요청했고, 733년에는 당의 요청을 받아 발해를 공격하기도 했다. 735년에는 당으로부터 패강(대동강) 이남 지방의 영토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대내적으로는 왕권이 안정돼 상대등(上大等)의 역할이 약화되었고, 중시(中侍)의 역할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 상원사 동종(사진, 문화재청 홈) 

 

♧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


 치우다 남은 눈에 미끄러지면서 경내로 올라가 오른쪽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바로 맞는 조그만 종고(鐘庫), 앞에 세워놓은 해설 안내문을 읽고 가까이 들어다 보니 바로 그 유명한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이 매달려 있었다. 현존하는 우리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우며 청아한 소리 또한 이루 비길 데 없는 이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다.

 

 조선 태종대 불교가 박해를 받을 때는 안동으로 옮겼다가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다시 옮겨졌다는데, 한국 종 고유의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 범종이다. 음통(音筒)이 있는 용뉴(龍뉴) 아래 종신은 약간 길쭉하게 배를 불리다 끝에서 안으로 살짝 오므라든 형태가 이상적인 비례감과 안정감 있는 조형미를 이루었고, 풍부한 양감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 수법이 사실적이다.

 

 종신(鐘身)는 상대, 하대, 4유곽(乳廓)의 문양은 당초문을 바탕으로 2~4인의 작은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卷紋)이 새겨졌고, 종복(鐘復)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 8판연화문(八瓣蓮花紋)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나 또 공후(공후)와 생(笙)을 연주하는 손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볼록한 두 뺨,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인 사실풍의 불교 조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상에는 약동하는 용이 있고, 그 옆에 연꽃이 조각된 음통이 붙었다. 용뉴 좌우에는 70자에 달하는 명문이 해서채로 음각되었는데 첫머리에 '개원 십삼년 을축 3월 8일 종성기지(開元 十三年 乙丑 三月 八日 鍾成記之)'라고 되어 있어,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종 끝부분이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鐘身形), 상대와 하대 및 4유곽 등의 주조적인 특징은 한국 종의 대표적인 유형이 되어 이후의 모든 종에 계승되었다. 

 

 *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사진, 문화재청 홈) 

  

♧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경내를 한 번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나서, 찾은 곳은 국보 제221호 문수동자좌상이 모신 곳이었다. 이 문수동자상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높이 98cm의 동자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보물 제793호로 지정됨)에 의하면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와 그의 남편 정현조가 득남을 기원하기 위해 오대산 문수사에 문수보살상 등 8구의 보살상과 나한상 등을 조성하여 세조 12년(1466)에 봉안했다고 되어 있어,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상원사로 옮겨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개는 약간 숙인 상태이며 신체는 균형이 잡혀 있는 편인데,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린 동자머리를 하고, 얼굴은 볼을 도톰하게 하여 어린아이 같은 천진스러움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넓은 어깨에는 왼쪽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가로질러 옷자락이 표현되었고, 가슴에는 구슬장식이 늘어져 있다. 옷주름은 신체의 윤곽에 따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고, 왼손은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거의 맞닿을 듯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왼쪽 다리를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를 밖으로 둔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데, 대좌(臺座)는 마련되지 않았다. 이 동자상은 고려불상(高麗佛像)의 양식에서 조선(朝鮮) 전기(前期) 양식으로 전개되는 양식적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조선(朝鮮) 전기 조각사의 귀중한 자료이다.

 

 이 동자상은 양쪽으로 묶은 동자머리를 제외하고는 자세, 옷을 입은 방식 등에서는 보살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특이한 상이다. 이 문수동자상은 나무의 질감을 최대한 살려 조각한 것으로 조각기술의 극치를 보여주며 제작연대가 정확한 왕실발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 1984년 7월21일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기초 조사를 하다가 발견한 복장유물 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기원문, 세조의 어의(御衣) 등이 있다.


 * 세조를 구했다는 고양이 석상 - 많이 마모되었다. 

 

♧ 상원사를 지켜낸 방한암 스님


 방한암 스님은 서른 살 되던 1905년에 양산 통도사 내원 선실의 조실로 있다가 1910년 봄에 선승들을 해산시키고, 평안도 맹산 우두암에 들어가 보임(保任) 중에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때가 서른다섯 되던 겨울이었다. 한암은 이때부터 중생이 서로 의탁하여 사는 이 세상에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면서 아무 때 아무데서나 선풍을 크게 떨쳤다.

 

 한암스님은 쉰이 되던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 스님으로 있다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하면서 오대산에 들어갔다. 한암은 오대산에 들어와 들고 다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 사자암 앞뜰에 심었는데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나와 나무가 되니 중대 앞의 단풍나무가 그것이다. 이즈음 조계종 초대 종정이 되었다.

 

 6.25 전쟁이 나자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으나 한암은 그대로 상원사에 남았다. 이어 일사후퇴 때에 국군이 월정사와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 하여 모두 불태우려 했다.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올라온 군인들이 상원사 법당도 태우려는 것이다. 한암 스님은 잠깐 기다리라 이르고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수(受)하고 법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 정좌한 뒤 불을 지르라고 했다.

 

 장교가 “스님이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하자 한암 스님은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법당을 지키는 것이 나의 도리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 하며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이에 감복한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 뜯어내 마당에서 불을 지르고 떠났다. 오늘날 상원사 법당이 남은 것은 오로지 한암 스님의 덕이다. 일사후퇴로 모두 피난을 떠난 지 두 달쯤 지나 1951년 3월 21일 아침, 스님은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시고는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서 입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이때 한암스님의 세수는 75세요, 법랍은 54년이었다. (월정사 홈에서)

 

 * 상원사 경내의 달마상 


♧ 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인 월정사


 상원사에 갔다가 눈에 미끄러지면서 내려와 월정사(月精寺)에 이르렀을 때는 날씨가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치워놓은 눈이 녹아 질퍽거리는 경내로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유명한 월정사팔각구층석탑이었다. 다 어둡기 전에 사진 한 장 찍어둔다고 서둘렀으나 시원스런 것이 나오지 다음날 아침 일찍 와서 자세히 보고 찍으려고 했는데, 숙소와의 거리가 멀고 아침에 일어나니 길이 미끄러워 더 이상 찍지 못하고 말았다.

 

 월정사(月精寺)는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신라시대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인데, 강원도 중남부에 있는 60여 개의 절을 관리한다. ‘삼국유사’ 권3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에 의하면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慈藏律師 590~ 658)가 중국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얻은 석존 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가지고 돌아와서 통도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할 당시에는 풀로 엮어 만든 임시암자였지만, 신효(信孝)와 신의(信義), 유연(有緣)이 차례로 이곳에 머물면서 점차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1307년(충렬왕 33)에 큰 불이 일어나 불타 이일(而一)이 중창했고, 1833년(순조 33) 다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44년(헌종 10)에 영담(瀛潭)과 정암(淨庵) 등이 재건했는데, 1·4후퇴 때 적이 이용할까봐 아군에 의해 칠불보전을 비롯한 10여 채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이때 양양군 서면 선림원지(禪林院址)에서 출토되어 절에서 보관하고 있던 통일신라시대의 선림원지 동종(804)도 함께 불타 녹아버렸다. 그 뒤 1964년에 탄허(呑虛)가 적광전을 중창한 이래로 만화(萬和)가 계속 중건하여, 지금은 대강당, 삼성각, 심검당, 승가학원, 용금루, 일주문, 요사채 등이 있다. 진신사리와 여러 가지 보물,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성보박물관도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여서 대충 둘러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 국보 제48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 어둠 속에 빛나는 월정사팔각구층석탑


 처음 후문으로 들어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 나타난 월정사 적광전 앞에 있는 고려시대의 8각 9층석탑은 보기만 해도 위용이 넘친다. 국보 제48호로 높이 15.2m인 이 탑은 6·25전쟁 때 일어난 화재로 절의 건물과 함께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일부를 보수해 놓은 상태인 점이 아쉽지만 상륜부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 아쉬움을 달래주고 있다.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팔각형의 2층 기단 위에 9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올려진 특이한 형식의 석탑이다.

 

 기단부는 낮게 지대석 위에 놓여 있는데, 하층기단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2개씩 조각되었으며, 그 위를 덮고 있는 갑석 윗면에는 복련(覆蓮)의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상층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고 그 위로 갑석과 탑신을 받치는 별개의 8각 받침돌이 차례로 얹혀 있다. 탑신부는 옥개석과 옥신석의 크기에 따라 1개 또는 2, 3개의 돌로 만들어지고 옥신에는 우주를 새겨놓았다.

 

 옥개석은 전반적으로 수평을 이루고, 그 밑에는 각형과 반원형의 받침돌이 있는 것이 특이하며 처마 끝에는 풍령(風鈴)이 달려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은 석재로, 보개(寶蓋), 수연(水煙), 용차(龍車), 보주(寶珠) 등은 금속으로 되어 있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체감비율이 서서히 줄어들면서 2층 탑신부터는 거의 같은 폭으로 되어 안정감을 준다. 1970년 해체, 보수할 때 1층 옥신석에서는 동경, 경문(經文), 향목 등의 사리장치가 나왔으며, 5층 옥개석에서는 은도금 불입상 1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석탑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할 석조보살상이 보이지 않아 찾아보았더니, 성보박물관에 옮겨 놓은 것 같다. 석조보살좌상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물 제139호, 높이 180cm라고 한다. 이 외에도 월정사에는 세조가 친필로 썼다는 보물 제140호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과 소형 목조탑을 비롯하여 경전, 인도불상, 불화 등이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름날이 아니어서 너무 빨리 어둠이 찾아와 적멸보궁까지 다녀오지 못했고, 또 아침에 다른 곳의 답사를 빼서라도 가려하였으나, 길이 꽁꽁 얼어 숙소에서 차 있는 곳까지 나오는데도 몇 번씩 나동그라지는 바람에 인연이 없어 그런가 보다 하고 포기해야만 했다.

 

 *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월정사, 건물은 적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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