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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은혜 스크랩 명 설교 모음 [박경상목사]
푸른세상 추천 0 조회 1,027 19.03.07 22: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유명설교 여러편  

<금주의 설교>

1. 옥한흠 목사  여호와는 나의 능력 시편 118:14-21
2. 김삼환 목사  성도의 능력 고린도후서 12:7-12
3. 이중표 목사  복음의 능력 로마서1:13-16
4. 이정익 목사  능력있는 증거 고린도전서2:1-5
5. 고 훈  목사  하나님의 능력 사무엘상24:16-22



2000년 7월 2일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능력


시편 118:14-21

저는 오늘 읽은 이 시편 말씀을 굉장히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지난 천년 사이에 이 세상에 등장한 많은 설교자들 가운데서 열 명을 뽑으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설교자 한 분이 있는데 바로 영국의 유명한 스펄젼 목사입니다. 그 목사님도 이 본문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그가 50세 되던 해, 즉 희년을 기념해서 교회에서 쥬빌리 하우스라는 기념관을 세워 드렸는데, 그 건물의 머릿돌 위에다 스펄젼 목사님이 이 본문 말씀을 새겼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본문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세기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한 위대한 설교자라면 어떤 면에서 굉장히 화려한 목회를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이 말씀을 그렇게 좋아했을까요? 이는 그에게 정말로 어려운 위기가 자주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죽을 고비도 있었고, 힘이 빠져서 주저앉고 싶은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을 그토록 마음으로 사랑하고 좋아했으며 나중에는 돌비에다 새겨 놓을 정도로 그 말씀의 은혜에서 멀어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십니까? 오늘 세례 받으시는 분들은 예수 믿고 세례 받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영광이며 은혜인 줄 아십니까? 아마 잘 모르실 겁니다. 이와 같은 신령한 지식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아마 전체의 1/100도 안될 것입니다. 왜 예수 믿는 것이 대단합니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힘이요, 나의 구원이 되신다.'고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말고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우주를 보존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함과 전지전능하신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 하나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신다. 그 하나님이야말로 나에게 구원이 되신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리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우리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대단한 존재입니까? 이것을 우리가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누구든지 의인이 됩니다.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우리는 의인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이 사는 가정은 의인의 장막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의인이 된 사람에게와 의인의 가정이 된 집안에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되십니다. 구원이 되십니다. 찬송이 되십니다.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면 그 사람은 의인이요, 그 가정은 의인의 장막입니다. 할렐루야! 세상에 어디 그런 가정이 있습니까? 세상에 어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나 하나님을 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이 되시는 겁니까? 아무나 자기 가정을 의인의 장막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실제로 그 가정이 의인의 장막이 되는 겁니까? 하나님이 인정을 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고 의인이 되었고 우리 가정은 의인의 장막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요, 나의 찬송이요, 나의 구원이 되셨다고 마음놓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복을 많이 받았습니까?

다윗은 먼저 본문에서 하나님은 나의 능력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나의 힘이라고 소리쳤습니다. 15절, 16절에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권능을 베푼다는 말은 하나님이 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제가 어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해질 무렵 집 옆에 있는 중학교 마당에 가서 산보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쳐다봤습니다. 그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우리 집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의 장막이지.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에 약속하신 대로 오른손을 높이 드시고 우리집을 덮고 계시고, 우리 가정에 축복하고 계시며, 능력을 베풀고 계시는구나.' 그러자 정말 우리집 위에 하나님의 오른손이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디 우리집만 입니까? 그 아파트에 예수 믿는 가정이 한두 가정입니까? 사랑의교회 나오시는 분들이 한두 가정이 아닙니다. 그 가정, 가정 위에 하나님의 크시고 강하신 오른손이 덮고 있다는 것을 저는 영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몸을 돌려서 삼익 아파트를 보았는데 거기에도 하나님의 손이 있었습니다. 또 저 서쪽을 쳐다보니 삼풍 아파트가 보였습니다. 삼풍 아파트에도 하나님의 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도 하나님을 믿는 의인의 장막이 한두 가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가정, 가정에 하나님이 오른손을 높이 드시고 능력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밤낮 없이 하나님이 오른손을 들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을 말씀을 통해 확인하고 믿으면 어지간한 힘든 일을 만나도 주저 앉지 않습니다. 주저 앉았다가도 다시 힘을 얻고 일어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면 필요한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쓰러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남 보기에는 배운 것도 별로 없을지 모릅니다. 남 보기에는 성공을 못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남 보기에는 그렇게 대단하게 살지 못하는 초라한 집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엄청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른손을 들고 보호하고 지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초라하게 보여도 우리는 절대로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죽는 것 같아도 절대 죽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오른손이 우리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어려움을 많이 겪은 사람이 아닙니까? 시편 118편에 나오는 배경을 보면 그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열방이 나를 에워쌌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전세계 모든 사람이 다 자기의 적이 되어서 자기를 포위한 것처럼 느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저희가 벌떼와 같이 나를 에워싸서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얼마나 위기입니까?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의인입니다. 다윗의 가정은 하나님이 지키시는 의의 장막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가정을 위기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구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17절,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너희들 보기에 내가 죽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다. 나는 죽지 않는다.' 그리고나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 붙이지 아니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다윗이 잘못한 것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매를 드시기는 했어도, 절대로 그를 죽음에는 붙이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가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하루하루를 기적같이 살고 있습니다. 제가 기적같이 산다는 말을 할 때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바닥에서 사고를 당하여 다치거나 죽습니까? 그런데 내가 이렇게 멀쩡한 것이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인가요? 내가 운전을 잘해서 그렇습니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만 가지 병균의 공격을 받아 쓰러지고 있는데, 그래도 내가 이만큼 건강을 유지하고 살고 있는 것이 내가 건강 관리를 잘해서 그런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길에서 구원해 주시고, 모든 병마에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나 잘났다' 하면서 세상을 살다가 하루 아침에 집안이 폭삭 망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삼십 세, 사십 세, 오십 세, 육십 세 될 때까지 이만큼 우리 가정이 화목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시고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나 잘나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구원이 되셨기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주님께 예배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 되셨기에 간혹 내가 잘못할 때라도 하나님께서 경책 하시기는 하지만, 나를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습니다. 위기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망하는 데서 나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쉽게 죽지 않습니다. 여러분, 병이 들었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공포에 떨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게 쉽게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기 때문에 죽는 것이지 우리는 병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이요,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데 어떻게 우리 입에서 찬송이 안 나오겠습니까? 다윗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그 말은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어다오. 내가 하나님 앞에 가 그리로 들어가서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 입에서 이런 찬송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교회에 나와서 앉았을 때는 굉장히 경건한 것처럼 찬송도 잘 하고 하나님께 감사도 많이 하는 것 같아도, 집에 가면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불평불만이 많으면 안 됩니다. 과거에 몹시 어려움을 당하던 시절에 살던 우리 조상들에 비해서 얼마나 팔자가 늘어졌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불평합니까? 남편에 대해서 왜 불평합니까? 왜 아내에 대해서 불만인가요? 나를 위해 하나님이 이 아내를 주셨다고 생각하면 날마다 엎드려 절은 못할지언정 감사는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자녀들을 놓고 한 번 보십시오. 자녀들로 인해서 고통 당하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래도 이만큼 잘 자라 주고, 이만큼 순종하는 자녀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동을 보아도 감사하고, 서를 보아도 감사하고, 그저 감사할 것 뿐인데, 왜 집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얼굴이 찌그러지고 기쁨이 없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가정에 구원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는 것을 모르고, 내가 잘나서 사는 줄 알기 때문에 불평불만이 터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만한 삶을 살면 안됩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됩니다. 외출을 하고 들어와도 '하나님,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나를 지켜 주셨기에 지금 내가 이렇게 건재하게 집에 돌아 왔습니다.' 하고 생각하면 감사가 있습니다. 병원에 가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병상에서 고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내 폐를 지켜 주시고, 간을 지켜 주시고, 내 혈압을 지켜 주시니, 그래도 이만큼 살고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면 무슨 불평이 있습니까? 열 평짜리 아파트면 어떻고, 백 평짜리 아파트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 입에서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주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의의 문을 내게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우리가 이와 같은 능력 있는 삶을 사는 하루하루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0년 10월 22일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성도의 능력


고린도후서 12:7-12

성도는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2000년 동안 수많은 어려움과 환란과 유혹과 재난 속에서도 교회는 살아있고, 성도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넘어졌지만은 교회가 넘어지지 않는 것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능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역도 선수가 큰 쇠덩어리를 들어올리듯이 교회의 힘은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을 들어올리는 성도의 능력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기도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기도하고, 모세도 기도하고, 어거스틴도 기도하고, 우리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약한 자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약해도 기도하는 어머니는 강합니다. 몇 사람이 모여도 기도하는 교회는 가합니다. 힘이 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날 동안은 기도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능려깅 있어야 하니까요. 용맹스런 사자도 늙으면 힘이 없습니다. 죽을 때가 가까워 오면 그를 잡아먹기 이해서 광야에 모든 짐승떼들이 사자를 물어뜯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늙어도 힘이 있습니다. 독수리 같은 새 힘을 얻는다라고 했고, 사 40장에는 늙어도 곤비치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는 사도 바울이 죽는 날까지 능력이 있었던 것은, 모세가 120세가 되도록 능력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늘 교통하는 기도가 있는 동안은 성도를 해칠 자가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유치원 때도 합니다. 나이가 많아서도 기도합니다. 초등학교 때도 국어를 배우지만 대학가서도 국어를 배우듯이 기도는 어렸을 때도 하지만 우리가 장성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요, 기도의 높은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적어도 집사 정도만 되면 금식기도를 몇 번은 다 거쳐야 됩니다. 40일 금식기도를 예수님이 하셨는데 기도하는 사람이 귀한 자입니다. 기도에 깊이 들어가는 사람이 능력 있는 자입니다. 기도를 얕은 곳에서 하면 신앙생활을 얕은 곳에서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몇십 년 다니면서도 아직까지 금식기도 한 번, 일주일 금식기도도 하나님 앞에 감당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약한 자입니다.

아는 것, 머리는, 들은 것은 많을지 몰라도 움직이는 능력, 처리하는 능력, 감당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깊이 들어가서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여러 가지 내용이 있지만은 저는 오늘 특별히 한 곳에 맞추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어려움을 참는 것에 대해서 맞추려고 합니다. 성도의 능력은 어려움을 잘 참음으로 우리의 큰일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성령 충만하고 말씀에 깊이 있고, 기도 많이 했지만은 바울의 능력, 사도의 능력은 참는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은사도 아니고 능력도 아닌 것 같지만은 오히려 모든 능력 위에서 지배하는 하는 것이 인내인 것입니다. 참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성령 충만하고 기도도 많이 했지만은 어려움이 안팎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면 아무 어려움이 없어야 될텐데 사도 바울에게는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 같은 믿음도 없고, 바울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지만은 어려움은 오히려 챔피언처럼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전에 11장을 보겠습니다.

11장을 보면 바울은 어려움이 밖으로부터 많이 있었습니다.(고후 11:23-27 :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분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하나의 어려움도 대단한데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까? 바울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참았습니다. 그래서 큰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 아무 어려움 없이 하는 것 아닙니다. 문제없이 평탄하고 형통하게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면 일을 많이 할 것 같지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밖에서의 어려움만 있었다면 그래도 괜찮아요. 안에 어려움이 있었어요. 자기 육체에 가시가 있었어요. 큰 질병이 있었어요. 눈이 나쁜 것은 성경 여러 곳에 나오고요, 신약성경 12권을 썼지만 거의 자기 손으로 못 적습니다. 눈이 어두워서 적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옆에서 적어 주지 않습니까? 눈 어두운 것만 해도 큰 어려움이지요. 그런데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간질병이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병은 다 고치는데 자신의 병은 못 고치는 거예요.

안타까운 일이잖아요. 기도 많이 했어요. 눈물을 흘리고, 몇 년을 매어 달렸는데 하나님은 이 병을 고쳐주지 않았어요. 고쳐 주지 않은 이유가 어디 있느냐? 크게 두 가지예요. 네가 약할 때 강하다라는 거예요. 네게 그것이 없으면 일을 많이 할 것 같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 때문에 더 크게 임하여서 하나님을 향하여 더 큰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이 말이 맞지 않는 것 같지요. 무슨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 문제가 없으면 기도 많이 할 것 같잖아요? 사실, 그 사람 기도 안합니다. 많은 것 주시면 감사 많이 할 것 같지요.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은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 감사하지요. 부자들이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 있는 사람이 절대로 헌금하는 것 아닙니다. 시간 많은 사람이 충성하는 것 아닙니다. 시간 없는 분이 충성하고, 어려움이 많은 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좋은 환경에 있는 분..

2090작전에도 누가 안 나오느냐? 팔자 좋은 분 안 나옵니다. 간단합니다. 신앙은 환란과 어려운 고난이 있는 분들이 하나님도 잘 믿고, 세상에서도 큰 일을 하는 줄 믿습니다. 고난은 좋은 학교입니다. 배고픔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평생 먹어도 먹는 감사를 모릅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하루하루에 대한 삶에 대한 감사를 모릅니다. 건강에 대한 고마움, 하나님 주신 축복, 나라에 대한 고마움, 부모에 대한 고마움, 교회에 대한 고마움, 이웃에 대한 고마움, 이 세상에 고생하지 않은 사람은 이런 일에 대해 전혀 눈을 감고 살게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학교에 교장 선생님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류를 위해 최고의 고난을 당하시고, 지금도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길러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 역사가 고난의 역사입니다. 교회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여기에 제2회 졸업생이 사도바울입니다. 얼마나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까? 바울에게 그 크고 ㅁ낳은 어려움은 일을 못할 것 같은데 기독교 역사에 바울 같이 일 많이 한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 같이 능력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왔느냐. 고난에서 왔습니다. 오늘 인류 역사에 위대한 인물이나 위대한 국가나 위대한 작품들이 다 고난을 통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문학집에 존 번연의 철로역정은 감옥에서 기록했습니다.

밀턴의 실낙원은 밀턴이 눈이 어두워 기록한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위고도 나폴레옹3세 때 국외로 추방되어 5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며 집없이 고난 당하며 길거리에서 쓴 것이 바로 레미제라블입니다. 이것은 원고가 8000매 정도 되는 엄청난 대작입니다. 이방인 저자 까뮈는 어려서 너무 가난했습니다.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아 두메 산골에 극빈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지 1년만에 아버지가 돌아 가셨습니다. 외가댁으로 가서 그곳에서도 극빈 생활을 합니다. 너무나 어려운 절망 속에 자라났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은 절망에 있을수록 어려움이 있을수록, 살아나고, 강해지고, 힘이 있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몰아 가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싹들을 이른봄에 보십시오. 모진 추위 속에서 누르는 땅을 뚫고 일어나는 생명을 보십시오. 그는 빈민국에서 자라났습니다. 1937년에는 결핵에도 걸렸습니다. 1942년에는 신문에 투고한 일 때문에 정부의 미움을 받아 강제 추방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1947년 페스트라고 하는 작품을 내어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1957년에는 '추방과 왕국'이라는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잘아는 일본 작가 가운데 미유라 아야꼬 라는 자각도 있습니다. 이 분의 작품 빙점이 있습니다. 이 분은 병원에서 수십년을 누워지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예 믿고, 은혜 받고, 너무 감사해서... 예수 믿고 나면 모두가, 세상이 다 바뀝니다. 보는 것이 바뀝니다. 아무리 좋아도 예수 없는 사람은 불평, 불만이 많고, 예수가 있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알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신앙에 눈 뜬 사람, 예수를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너무 감사해서 일기를 적었습니다. 자주 글을 써가면서 문장력이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사람은 무엇이든 자꾸 하다 보면 자라나는 것이지요. 그 후 그가 빙점이라는 작품을 내어 놓았을 때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고난은 큰 뜻이 있습니다. 고난이 찾아오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고 가는 것입니다. 고난이 찾아온 사람에게는 좋은 것이 남습니다. 여러분, 물질이 찾아오고, 명예가 찾아오고, 인기가 찾아오는 것은 오히려 좋은 것을 다 가져가 버립니다. 인격의 아름다움이 파괴되고, 양심이 파괴되고, 훌륭한 신앙도 다 빼앗아 가버리는 것이 세상의 부귀, 영광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언제나 좋은 것을 가져다줍니다.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걱정 말라고 합니다. 마음대로 놀라고 합니다. 마음껏 잠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깨어라. 참아라. 이겨라. 십자가 져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주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것과 마귀가 우리를 이끄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려움이 많이 왔지만은 사도 바울은 힘있고, 능력있는 삶을 다 이겨내는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약할 때 강함이라. 할렐루야!

약한 자 입니까? 자신을 약한 자라고 생각합니까? 강한 자입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틈탈 때가 언제입니까? 까불고, 잘났다고 하고, 교만하고, 큰 소리 치고, 좋은 차 타고 다니면서 무언가 여유가 있을 때 마귀가 틈타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부패시키는 것이고, 교만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것입니다. 약해 보세요. 겸손해 보세요. 틈이 있나요? 마귀가 틈 탈 수 있는 길이 있나요? 그래서 약한 자가 강한 자이고, 약한 자가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틈 탈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부족함이 없어야 행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든 것이 있어야 잘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을 전도해 보면 돈 많이 벌어서 예수 믿겠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많이 벌면 예수 믿습니까. 믿다가도 떠나가는데요.

우리는 잘 입어야, 먹을 것이 많아야 모든 것이 풍성해야 행복하다. 잘 믿는다. 걱정 없다라는 생각을 하는데 모든 것이 많을수록 걱정도 많고, 고민도 많고, 해도 많고, 나쁜 것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의 힘은 어려움을 참는데 있을 줄 믿습니다. 한국 교회가 힘이 있고, 성장하는 것은 바로 고난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은 90% 이상이 다 교인입니다. 그러나 아시아에는 교회가 성장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일본도, 중국도 선교사가 우리보다 조금 먼저 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부흥이 없고, 한국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일본에는 순교자가 별로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카톨릭은 얼마나 많은 순교자를 내었는지 모릅니다. 개신교도 많은 순교자가 나왔기 때문에 순교의 피가 교회의 거름입니다.

말 한마디만 하면 잘 살수도 있는데 그 한마디 지키느라고 모진 고문당하고, 식구들과 함께 유리걸식하면서 우리 선조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지켜주었습니다. 순수한 깨끗한 신앙을 물려주었습니다. 금요일에 방지일 목사님이 다녀가셨습니다. 구역장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예수 믿을 때 아버지가 먼저 믿으셨다고 합니다. 방씨 문중에 종가집 아들이 믿는다고 해서 온 문중이 모여서 붙들어 매놓고 두드려 패는데요, 물을 뿌려가며 때렸대요. 짐승처럼 잔인하게 때리며 호적을 파서 내어쫓는다고 해도, 끝까지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거예요.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을 보고 매맞으면서도 죽어가면서도 신앙을 지키는 것을 보고 나도 예수를 믿을란다. 하며 고문하던 할아버지가 아들 편에 서서 죽기 전에 그 아들을 잡고 그 동네를 떠났답니다. 문중 재산 다 버리고, 모든 것 다 버리고, 거지 같이 나와서 산으로 가서 밭을 일구며 감자 심고, 옥수수 심고, 하였는데 은혜를 주셔서 농사가 그렇게 잘 되었대요. 그렇게 살다가 전쟁이 나고 남쪽으로 내려 왔는데, 방 목사님을 통해 자녀들 중에는 85명의 목사, 박사가 태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신앙을 어려움 가운데 지켜야 그것이 힘이 있는 것이고, 능력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줄 믿습니다. 고난은 내게 유익입니다. 고난은 내게 손해이고, 이것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고난은 내게 끊임없이 좋은 것을 가져다줍니다. 시 119(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 4:16(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 미국 집회를 간 사랑의 교회는 해외에 있는 교회 중 최고로 부흥하고, 목사님이 큰 일을 합니다. 신문에도 많이 나오고하여 이 분이 어떤 분인가 생각했는데 이번에 가보니 교회가 13000평에다 1500만불을 들여 교회를 짓고 수천명이 모이는 아주 큰 교회이고, 부흥을 하는 교회였어요. 알고 보니 그 목사님이 누구보다 많이 배우고, 인물이 좋아서 능력이 많아서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님이 부산에서 개척교회를 하셨는데 자녀들이 당하지 않은 고생이 없었어요. 그 시련이 세계적으로 큰 일을 하도록 자녀를 길러준 거예요. 자녀에게 물려주는 가장 좋은 재산이 무엇이냐? 고생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고생없이 잘 먹이고, 잘 입히고, 고생없이 길러야 그 아이가 큰 일을 하리라고 생각하는데 이 세상 살아가는데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 세상에 그렇게 길러서는 밥도 못 먹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옛날이나 오늘이나 이 세상에 어떤 어려움이라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워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자녀가 고생을 당할 때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오히려 사람이 되고, 교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인간이 되고, 좋은 어머니가 되고, 좋은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는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소련은 자식을 낳을 때 얼음물에 넣었다가 건져낸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밀림에 사자나, 표범이나, 치타는 새끼들이 빌빌거리면 그냥 죽여버립니다. 그렇게 커서는 노루에게 물려 죽는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살 필요가 없다라는 거예요. 지난번 TV에 우리 나라에 세계적인 희귀종 흰꼬리 수리를 촬영했는데 보니 독수리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는데 한 마리는 건강하고, 다른 한 마리는 약해요. 어미가 고기를 가져다가 누구에게만 주느냐 하면 잘 ㅁ거는 건강한 새기에게 주고, 약한 새끼에게는 주지를 않아요. 빼빼 마르고, 죽어가는데도 어미가 사랑해 주지를 않아요. 학자들이 해설하기를 독수리 세계가 얼마나 냉정한데 힘있는 독수리를 길러야지 빌빌대는 것은 길러봐야 까마귀에게 물려 죽는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기를 때에 예수님의 말씀에 마귀가 우리는 삼키려는 이 땅에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도록 길러야 성도가 승리하는 것이지 베드로는 뭐라고 했습니까?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는 때에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도 이길 수 있는 능력있는 하나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험한 세상길 나홀로 가도 외롭지 않으오. 비 바람 속을 나홀로 가도 내 맘에 두려움없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주가 계시오니 주를 뒤따라 나서는 길에 두렵지 않아♪ 우리 나라는 축복을 오복이라고 할 때 수부, 귀, 강령, 단암입니다. 오래 살고, 돈 많이 벌고, 영광누리고, 건강하고, 그 다음에 자식 많은 것을 복이라고 했어요. 서양 사람들은 이런 것이 복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중요한 목표를 정의, 진실, 사명감, 개척정신, 이런 정신적인 면으로 맞추는데 우리는 물질에다 맞추고, 건강에다 맞춥니다. 정신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까? 사명감이 없는 사람이 오래 산다고 해서 큰 일을 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을 길러서 오늘 우리도 오복에다 정신적인면 어떤 어려움도 참아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것이 제일 복 받는,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으로 우리는 자녀를 길러야 할 줄 믿습니다.

저는 이번에 집회를 가서 하루 요세미티 공원에 갔습니다. 공원 하나가 경상북도 크기예요. 몇시간을 가는데요, 왠 공원이 그렇게 큽니까? 그런데 여관이 하나 없고, 술집도 하나 없고, 호텔이 딱 하나 뿐이예요. 우리는 한집 건너 love Hotel이고 술집이 온 나라에 가득 찼어요. 그곳은 반짝거리는 것이 하나 없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가 자연 관리도 너무나 잘하고, 사람이 자연을 보고, 감사하고, 증기지 않고, 우리는 방안에 들어가서 즐기려고 하고, 지금 일산 아줌마들이 잘하는 거예요. 잘 싸운다라는 거예요. 일산 여자들이 최고예요. 나라가 이래서 되겠어요? 세계에 이런 나라가 없어요. 이렇게 술집 많고, 러브호텔 많고 되겠어요? 저희 아이가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는데 그곳에 가보면 여관 하나가 없어요. 술집 하나가 없어요. 오락실 하나 없어요. 우리는 대학촌이 소돔 고모라입니다. 공부하면서 천하에 제일 타락한 곳이 대학생들이에요. 개똥같이 공부를 하고 있어요. 이렇게 타락할 수가 없어요. 지방이고, 서울이고 할 것 없이 온 세계에 타락한 문화들은 우리 대학촌으로 다 들어오고 있어요. 세상에 이래서야 어떻게 나라가 되겠느냐 말이에요.

오늘 우리는 자녀를 기를 때에 정신적으로 그런 대학에 가더라도 여러분의 자녀들은 그런 곳에 빠지지 않도록 좀 똑똑하게 길러 내세요. 하나님의 자녀로 요셉같이 길러요. 사람이 재산인데 사람이 이렇게 타락해서야 우리가 어떤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겠느냐 말이예요? 이제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고생하며 커야 됩니다. 며느리 볼 때도 고생한 며느리, 사위 볼때도 고생한 사위, 지도자도 고생한 지도자, 고생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좋은 일꾼이 되겠어요? 고난을 미워하지 마세요. 고난을 싫어하지 마세요. 피하지 마세요.

누가 내 말만 하면 달려들고 하지 말고, 오늘 우리는 내게 고난을 주는 사람이 다 의미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민식 목사님은 내게 고난을 주는 사람이 천사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나로 좋은 사람 만들려고 고난을 주고 떠나가는 거예요. 천사가 왔다가 떠나간다라는 거예요. 고난이 올 때 인격이 다듬어 지고, 강인한 정신력이 살아나고, 삶에 대해 감사하고, 양심은 살아나고, 이웃에 눈을 뜨고, 신앙에 눈을 뜹니다. 어려움을 이기는 자가 인생의 금메달을 걸게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저도 아이들 길러보면 군에 가서 훈련소에 있을 때는 편지도 자주 보내고, 아버지, 아버지 찾고 그래서 효자하나 태어났다... 그러나 좋아지면 그냥 끝나는 거예요. 부대배치 받으면, 좋아지면 끝나는 거예요. 사람은 환경이 좋아지면 영적으로, 육적으로, 병들고 타락하고 잠다는 거예요. 나는 우리 성도들이 어려움이 많이 있지만 어려움이 있는 분은 소망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자녀들은 집에 가보면 집에 가시가 있고, 만나보면 그 가시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러나 그 가시가 우리에게 진주를 만들어 내고 그 아픔이 우리에게 신앙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가정도 어렵게 살 때는 아이들과 정도 많아지구요, 하나가 잘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한 방에 잠자고, 한 상에 먹을 때가 좋은 거예요.

아이들도 방을 하나씩 달라할 때 주지 말아요. 수상하다니까요. 아이들은 같이 섞여 같이 만나야 정도 살아나고, 부모도 알고, 감사도 알고, 이런 만남이 있어야지 잘해주는 것이 부모가 훌륭한 것으로 생각하면 착각인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서 강인한 어디에 가서도 넘어지지 않는 능력있는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데 능력이라는 것을 잘살고, 힘있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것이 능력이 아니라 참아내는 사람이 제일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어디가서도, 어떤 어려움도 잘 이겨내는 사람이 제일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 내 입에 맞는 것만 골라먹는 사람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한 분을 소개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분은 만델라입니다. 이 분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통령이었습니다. 이 분은 1964년에 감옥에 들어가서 27년간 한번도 나오지 못하고, 보통 감옥이 아닌 바닷가에 외로운 고도에다, 마치 귀향을 보내듯이 그냥 갇혀 있었습니다. 얼마나 어렵고, 혹독한 고난이 있었지만 만델라는 거기에서 기도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하고,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감옥에 가면서 자꾸 발전을 한거예요.

흑인을 사람 취급도 않고, 공부도 함께 하지 않고, 선거도 하지 못하게 하고, 아무런 자유도 없이 짐승처럼 죽이고 팔고 하던 몇백년 동안 고난을 당하던 그 나라에서 흑인이 드디어 백인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온 세계 여론이 이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끝나는 줄 알았어요. 흑인이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얼마나 그는 잘하는지요. 백인을 모두 추방하고 죽이고 할 줄 알았는데 백인 대통령을 부통령으로 세우고, 경제를 회복하고 나라를 평화롭게 이끌어 나갔어요. 세계의 경제가 그 나라를 지원해 주고, 얼마나 훌륭히 잘해내었는지 모릅니다.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거기에서 훈련을 받으면 좋은 지도자가 되고, 큰 일을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줄 믿습니다. 성도의 능력 한 손에는 기도, 또 한 손에는 고난, 이것은 약한 것이 아닙니다. 약할 때 강함이라.








2000년 3월 5일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복음의 능력


로마서 1:13-17

저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로서 이런 생각을 하는 때가 많습니다. '무명하고, 무능하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복음을 전 한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어떤 때는 위대하게도 되고, 굉장한 실력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굉장한 능력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는구나!' 그래서 복음의 위력에 대해서 감탄을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외친 복음 때문 에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받고, 인격적으로 겸손해지고, 불량한 사람들이 선해지고, 불의 한 사람들이 의롭게 살아가는 삶의 보면서 복음의 위력에 대하여 늘 마음으로 느끼는 신비 한 감격이 있습니다.
내 생에 가장 놀라운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볼 때 여러 가지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내가 예수 믿은 것이라고, 내가 예수의 복음을 받은 것이 최대의 사건이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 지닌 능력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었습니다. 내가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체력도 단련하고, 출세도 하려고 합니다. 공부하면 실력이 있습니다. 돈 벌면 금력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힘 중에서 가장 큰 힘을 어디에서 보느냐 에 따라서 자기 생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돈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돈을 벌 것이고, 실력있는 것을 최고의 힘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힘을 보면서 실력을 쌓을 것이고, 모든 힘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위대한 선언을 듣게 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의 능력이 됨이라"(16절)
우리는 가장 강하신 분, 전능하신 분을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능하신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생에 있어서 가장 큰 능력을 우리가 체험했고, 그 능력으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 능력은 바로 복음입니다. 이런 복음의 능력을 우리는 오늘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비출 때 그는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 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같이 가던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사흘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을 때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주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 사울을 찾아가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나니아라는 사람으로부터 안수를 받을 때 눈의 비늘이 벗겨지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이제부터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고, 남을 죽이려고 살기등등 하던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의 사랑으로 충만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복음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권력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능력도 있었고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기에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 한 실력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후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이전까지의 삶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은 사람 죽이는 능력이었고, 자기 교만에 빠지는 실력이었지 사람을 살리는데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는 위대한 능력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 라"(13-14절)라고 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기를 그렇게 원했으나 로마에 가지 못하고 이렇게 편지를 보내노라 그러나 이제 나는 분명히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어리석은 자에게 복음의 빚진 자 인데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요, 믿는 자 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제한된 것이고 유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당시에 세계는 로마의 권력 아래 있었습니다. 로마의 무력이 약소국가들을 침략하고, 강탈하여 노예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그 힘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거기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너희는 무력과 권력과 인간의 힘으로 세계를 재패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힘을 가지고 로마에 간다. 그 힘은 곧 복음의 능력이다. 사람을 구원시키는 능력이다."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 말씀은 로마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나는 이 복음의 능력으로 네게 가기를 원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힘이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을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진 폭탄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군대에 가서 탄약과 총알을 관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총알이나 대포알이 탄피 안에 있을 때는 그것이 작게 안 보이지만 탄피를 빼고 보면 그 알맹이는 아주 작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화약이 터지면서 뇌관에 불이 붙으면 이것이 폭발하는 힘이 있어서 빌딩을 파괴하고 산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능력이라는 말로 'duvnami"'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폭탄이 떨어지면 로마라고 하는 도시가 무너진다.'라는 무언의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다이나마이트는 1866년 노벨이라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발명함으로 그는 거부가 되었고 위대한 발명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유명해지던 어느 날 신문을 펼쳐보니까 이런 기사가 쓰여 있었습니다.
"알프레드 노벨 죽 다. 다이나마이트 왕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자가 죽다."

노벨이 살아있는데 이 기사가 신문에 나온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동명이인이 죽은 것을 기자가 잘 모르고 그렇게 아프레드 노벨이 죽은 것으로 썼던 것입니다.
그 때 그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죽는 날 나는 죽음의 사업가요, 파괴의 발명자가 된단 말인가. 내가 이렇게 인생을 끝내서는 안되지.' 이런 생각을 갖고는 거대한 재산을 바 쳐서 인류 문화를 살려내고, 인류를 살려내는 일에 공헌한 사람에 대하여 시상하는 노벨상 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노벨 의학상, 문학상, 평화상을 만들어서 세계 인류를 살려내는 일 을 하는 사람에게 시상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전 세계 노벨상을 받는 사람들 대 부분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만이 살려내는 일에 생명을 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로마의 시저, 나폴레옹, 히틀러 이런 사람들은 모두 죽음 의 파괴자들이었습니다. 무서운 무기의 폭약을 가지고 수많은 도시를 무너뜨리고 전쟁을 일으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 데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을 가지고 인류를 살려놓습니다. 가정을 살려놓습니다. 국가를 살려 놓습니다. 우리를 살려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둘째, 복음은 사람을 살리 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죄인을 살리는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철학이나 사상이나 지식도 사람을 살려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인들을 살려 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간들을 살려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 이들을 살려놓는 힘이 복음입니다.
'예수 믿으시오.' 이 한 마디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내 입에서 일단 나가면 그 말은 총알과 같은 것입니다. 폭탄과 같은 것입니다. 입 속에 있을 때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마치 탄피 속에 있는 폭약과 같이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 번 터져 나가면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언덕을 무너뜨리고 파괴의 능력을 갖는 것처럼 내 입 속에 있는 폭탄과 같은 "예수 믿으시오."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가서 어떤 심령 속에 떨어지면 심령 속에 있는 죄악이 무너지고 마을에 떨어지면 마을 전체가 무너지며, 가문에 떨어지면 가문 전체가 변화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지나온 날을 곰곰히 생각하면 우리가 예수 믿은 것 대단한 것 아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도지를 주었다든지, '예수 믿으시오.'라는 말을 친구로부터 들었다든지, 이 말 한 마디가 날 변화시켜서 내가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그런데 복음을 입 속에 담고 부끄러워서 말을 못하면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복음이 나갔을 때 무한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복음이 한 가정에 떨어지면 한 가정을 살립니다. 연세대 총장이었던 백낙준 박사는 한국 교회사에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 아버지는 점쟁이었습니다. 길거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관상을 봐주고 돈을 벌었습니다. 어느 날 길을 지나가던 한 집사가 백낙준의 아버지를 보고 한 마디를 했습니다.
"여보시오. 그런 짓 하다가 당신 도망하고 자식들도 망할텐데 그짓 빨리 그만 두고 예수나 믿으시오."
그 때 그는 눈을 흘기면서 '너나 잘 믿어라. 재수 없게 왜 떠들고 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워있는데 집사님이 한 마디 던진 말이 계속 귀에서 맴돕니다. '그런짓 하다가 당신 도망하고 자식들도 망해'
잠을 자도 그 소리가 들립니다. 드디어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청산해 버리고 예수를 믿었는데 그 아들이 연세대 총장 이 되었습니다. 지나가는 말 한 마디로 그렇게 위대한 인물을 낳았습니다. 한국 교회사에서 위대한 인물들이 다 예수 믿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것을 봅니다. 제가 살던 군에서는 인물이 안나오고 이웃 군에서는 인물이 많이 나왔습니다. '왜 우리 군에서는 인물이 안나올까' 하고 생각해보니까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는 큰절이 있는 데라야 인물이 나왔습니다. 절 이 있어야 문화가 절을 통해서 개화가 되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복음이 일찍 들어간 곳마다 거기에서 전부 인물이 나왔습니다. 한국 교회 구석구석에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므로 개화되어서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이 유학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공부해 서 위대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알았습니다. '이 폭탄이 로마에 떨어지면 로마는 무너진다. 로마의 제국이 무너지고 바티칸 왕국이 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가슴속에 타올랐던 복음의 위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거꾸러뜨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무서운 자가 없었고, 아무도 당할 자가 없었으며 아무도 그 실력 앞에 논란을 벌일 자가 없었는데 복음 하나가 사도 바울을 거꾸러뜨렸고 변화시켰습니다. 그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 능력을 가슴에 안고 '내가 로마에 들어가 내 입에서 복음이 나가는 날 저 로마제국은 무너질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로마로 갔던 것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나가면 그 복음 이 나가는 곳마다 가정과 사회가 변화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당시에 로마 사회는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유대 땅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곳은 유대 땅에서도 가장 초라한 촌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무식한 사람들이 살고, 병든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태어난 예수, 목수의 아들이고 목수로 살았던 사람, 그가 죽을 때는 로마의 권력에 의해서 십자가 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예수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는 부끄러운 자가 아니고 죽었다가 산 자 다.' 하고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50년 전에는 성경 가지고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 신문에 싸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당시도 복음의 신비를 안 사람들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입을 열고 복음을 전해서 한국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민족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미국이 한국 땅에 많은 것을 원조했습니다. 6․25사변 때 이 민족을 위해서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이 민족 을 살려낸 가장 큰 힘은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전한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했던 단순한 선교가 이 민족을 오늘 에 이르도록 축복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고 가서 전하는 자가 민족을 살리는 애국자 인 줄 믿습니다. 이 무한한 능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 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 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2-40)
우리가 육신적으로 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야 됩니다.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어야 됩니다. 헐벗은 자에게 입혀야 됩니다. 나그네를 영접하고 병든 자를 돌아보고 옥에 갇힌 자를 찾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40년 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옷 도 갖다 주었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계속 주니까 거지근성을 갖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인들에게는 구제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안믿는 사람에게는 구제할지언정 교인들은 굶어죽지 않는 한 도와줄 필요가 없습니다. 교인들이 조 금 가난하다고 먹을 것을 도와준다든지, 조금 빚졌다고 빚을 갚아준다든지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으로는 해결이 안됩니다. 그 사람이 복음을 가지고 서야 합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복음으로 서게 만들어 주어야 됩니다.
굶주린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굶주린 자를 말합니다. 이 굶주린 자에게 생명을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헐벗은 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버리고 죄인의 옷을 입은 자인데 이 사람들에게 의로운 옷을 입혀야 됩니다. 목마른 자가 누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목마른 자들입니다. 돈을 벌어도 공허하고, 출세해도 만족하지 아니하고, 술로 살아가고 마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수를 공급해서 저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시켜야 됩니다.
나그네가 누구입니까? 나그네는 집없이 방황하는 자가 나그네입니다. 정처없이 헤매는 자가 나그네입니다. 인생의 목적도 없이 방향도 없이 헤매는 자들, 수많은 불신자들이 다 나그네입니다. 이들을 다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해서 방향을 세워주어야 되며 목적을 바로 세워주어야 됩니다. 이들에게 주어야 할 것이 복음입니다.
옥에 갇힌 자가 누구입니까? 오늘날 청소년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포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헛된 사상과, 유혹과, 헛된 정욕에 포로가 되어 자기 자신을 온전히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자유케 하는 능력,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이 복음이 저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병든 자가 누구입니까? 정신과, 영혼과, 심령이 병든 자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는 병든 자입니다. 이들을 치유하는 능력이 복음에 있습니다.

셋째,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14절)
당시에 유대인이나 헬라인 전 세계 인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선민과 이방인, 이 사람들은 누구든지 다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자에게 필요한 이 복음을 우리가 저들에게 주어야 됩니다.
복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식인이나 무지한 자나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복음을 사도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절)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에게 할 수 있는대로, 시간이 있으면 시간이 있는대로 물질이 있으면 물질이 있는 대로, 내가 사람을 만나면 만나는대로 복음 전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믿음 위에 세워지기 바랍니다.
고재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육군 중령 일가족 4명을 도끼로 쳐죽인 사람, 살인자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 고재봉 이 교도소에 들어가니까 그 옆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간수도, 형목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죄수들끼리 만나서
"나 고재봉이야"
하면 모든 죄수가
"형님"
했습니다. 사람 셋 죽인 사람도
"나 고재봉 이야"
그러면
"형님"
하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포 하나가 고재봉한테 왔습니다. 열어보니까 성경이 들어있었습니다.
"재수 없다"
하고 성경을 던졌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화장실 휴지로 쓰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뜯어 가지고 화장실에 가서 무슨 내용이 씌여 있나 보다가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어느 날 한 감방 안에 있던 이인수 대령이 보니까 눈에 살기가 빠졌는데 하루는 그러더랍니다.
"대령님, 나같은 사람 도 하나님이 받아줄까요?"
이 말을 들은 이인수 대령이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무슨 트집 잡힐까봐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차츰 차츰 태도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목에게 연 락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 사람 신상에 변화가 온 것 같으니 와서 확인 좀 해주시죠."
형 목이 확인해보니까 달라졌어요.
"목사님, 나 예수 믿으면 용서받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 믿고 영접해서 그 때부터 전도를 하는데 2천명 의 죄수 가운데 1800명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가 전도하는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앞길이 구만리 같은 놈들아 너희가 이렇게 살다가 갈거냐? 이 감방에서 다시 나 같은 사람을 안만나려면 너희들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재봉에 게 예수 믿겠다고 손들고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내 공로 아니라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
찬송했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좀 더 일찍이 하나님을 알았다면 이렇게 악한 자가 되지 않았을 것을... 나에게 일찍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죽지는 않았을텐데..."
그는 찬송하면서 하나님께 갔습니다.
고재봉과 같은 악질에게 복음이 들어가니 그 인간이 변화되었습니다. 감옥을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어떤 자에게 들어가서 능력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어떤 교수에게, 어떤 지성인에게, 어떤 사람에 게 들어갈지 모릅니다. 총알이 나가듯, 폭탄이 터지듯, 입을 열고 복음을 내놓을 때 심령에 떨어지면 심령의 죄악이 무너질 것이며, 가정에 떨어지면 가 정이 변화될 것이며, 마을에 떨어지면 마을 전체가 복음화될 것이며, 이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놀라운 복음의 능력으로 로마를 변화시키던 바울의 위대한 사건이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2000년 2월 27일 신촌성결교회 이정익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능력있는 증거


고린도전서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말 잘하는 사람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그것은 은사입니다. 말은 아무나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유독 말을 잘하는 분이 있습니다. 참 부럽습니다. 그리고 설교 잘하는 목사도 부럽습니다. 그것도 은사입니다. 목회자에게는 설교 잘 하는 일이 가장 큰복입니다.
초대교회 때 아불로(Apollos)라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웅변을 그렇게 잘 했다고 합니다. 한 번 웅변을 하면 수많은 군중으로부터 뜨거운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주석자에 의하면 구슬 이 흐르듯이 막힘이 없게 그렇게 유창한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이 분은 그 시대 사도바울과 경쟁상대였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사도바울도 그의 상대가 되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옛날 그 시대에는 수사학이 인기였다고 합니다. 수사학(修辭學)이라는 것은 "말을 잘하는 법을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킵니다. 당시는 자기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말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구사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당시는 광장 모퉁이에서 자주 토론회가 벌어지고 변론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변론에서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하여 상대방에게 승리할 경우 명성을 얻고 출세했다고 합니다. 이긴 사람은 박수를 받았고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런 삶을 즐기는 부류들을 가리켜서
"소피스트"라고 합니다. 사도바울도 한 때 헬라철학을 심도 있게 공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소피스트들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소피스트들은 말쟁이들이었고 언어 에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바울이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 당시 수사학이 한창 선풍을 일으켰을 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구원이나 복음을 설명하는데는 이 수사학으로는 어렵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수사학은 듣기에는 좋고 고상하고 아름다울지는 모르나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영을 거듭나게 하는 일은 설명할 수 없다  말합니다. 복음 전도에 이 수사학은 역부족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수사학의 한계입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평소 말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하면 아주 구성지고 재미있게 해서 좌중을 사로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어느 말이나 다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사람에게 기도를 시켜 보십시오. 평소 말 잘하는 사람 기도 시켜 보면 잘 못합니다. 그 언변으로 전도하면 잘 할거다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은 제가 평소 말 잘하는 성도님이 있어 안심하고 대중기도를 시키고 나서 크게 시험든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을 잘 하던 분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도를 하다가 마무리를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 당황해서
"예수 이름으로"
이 부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 잘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이나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는 별개입니다. 바울도 처음에 전도할 때는 철학적으로 전도했을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설교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전도가 되었겠습니까. 처음에는 숫한 시행 착오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러다 안되니까 방법을 바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오늘 읽은 본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고백을 합니다.

하나는
"복음전도는 말이나 수단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는 복음을 전할 때 말이나 이론이나 수단으로 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당시에도 복음을 전하는데 여러 가지 이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 는 말이나 지혜나 아름다움으로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복음전도는 말이나 수단이나 방법으로 예수를 소개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 복음, 십자가를 전할 때는 소피스트들의 말장난처럼 고상하고 아름답고 매끈한 말솜씨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말은 잘 못했던 사람입니다. 설교는 어느 정도 말솜씨가 있어야 합니다. 그게 어느 정도 기초가 되어야 말씀을 잘 전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점이 약점이었던 사람입니다. 설교를 얼마나 못했으면 창틀에 앉아있던 청년이 졸다가 떨어져 죽었겠습니까. 언변 없는 설교가 또 깁니다. 설교학에서는 설교 하다가 졸게 하는 것은 목회자 책임이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이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이 언변이 없다고 입방아를 찧어댔습니다. 설교자에게는 이것도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나는 말에는 졸하다"
하고 솔직하게 고백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어눌한 말솜씨가 전도하는데는 오히려 잘 먹혔습니다. 투박하고 졸한 언어를 가지고 십자가, 부활, 예수를 전할 때 그것이 오히려 잘 먹혀들어 갔습니다. 알고 보면 이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전도나 설교는 사실 미끈한 언변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어느 정도는 언변이나 요령도 있어야 하지만 닳고닳은 말솜씨는 오히려 효과가 반감될 수 있습니다. 참 묘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기도나 설교나 복음전 도는 말솜씨 가지고는 안됩니다.
어느 선교 단체에서 선교사 두 사람을 모집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말이 어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기대를 많이 걸었습니다. 저 사람은 어디를 가든 일을 해낼 것이다 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말이 참 어눌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두 사람을 모두 선정해서 파송했습니다. 알고 보면 이것이 사람들의 부질없는 염려입니다. 선교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던 말 잘하는 선교사는 매사를 꾀와 요령을 부리고 자기의 말솜씨를 너무 과신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선교를 말로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말이 어눌한 선교사는 매사를 묵묵하고 우직하게 일을 해냈습니다. 매사를 진지하고 진실하게 기도하면서 일을 처리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그런 만큼 더 집중적으로 기도하면서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 냈던 것입니다. 이 선교사는 자기의 약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자기를 너무 과신한 사람은 실패했지만 자신의 부족을 알고 노력했던 선교사는 결국 성공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를 전하는데는 말로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극히 적은 일부분만 깨닫게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구원의 길"을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전하는데 너무 방법론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도법에 이론이나 방법론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칫 말 잔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간증집회도 보면 말이 너무 많고 과장도 심합니다.
한국 교회사를 보면 최권능이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전도에 사명이 있는 분입니다. 이분의 전도방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천당"
이었습니다. 아주 간단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전도는
"예수 천당"
한마디로 했습니다. 거기에 이론이나 방법론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유치한 것 같은데 그 전도 방법이 그렇게 잘 먹혀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론도 없고 앞 뒤 논리적이지도 못한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아주 쉽게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전하는 사람의 믿음과 확신이 실려 서 전달이 되니까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조용히 들어가 서 있다가 갑자기
"예수 천당"을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놀란 사람들은 그 당시에 는 미친 사람의 소행으로 여겼겠지만 집에 가서 조용히 잠을 자려고 하면 그 말이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예수를 영접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천당!"
아무리 생각해 보아 도 모양도 없고 이론도 없고 고상함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속에 확 신이 들어있고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짤막한 말 한 마디가 가슴을 깊이 찌르고 움직이게 하고 변화하게 하는 능력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를 보고 충청도 사투리를 너무 쓴다고 지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련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서울 말씨로 고쳐 쓰랴?"
하고 물으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여유가 있고 구수하다고 그럽니다. 여러분, 아주 세련된 말씨는 거부감이 따르고 지루합니다. 너무 완벽하면 좋지 않습니다. 피곤합니다. 너무 달변이 면 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나는 예수를 전하는데 말이나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인위적으로 꾸미거나 만들어 내지 않고 내가 만난 예수를 만난 느낌 그대로를 전했다는 말입니다. 그 체험 그 감각 그대로를 전하니 얼마나 능력이 있겠습니까. 사도바울도 공부 많이 한 사람입니다. 처음엔 그도 철학적으로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버블 바꾼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예수를 만나 체험한 그대로를 전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좀 우직하게 믿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두 번째
"오직 예수"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상당한 지성인이고 높은 수준의 철학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를 전하는데 철학적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철학적으로 예수를 전했더라면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라는 투박한 표현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을 아주 철학적인 표현으로 고상하고 매끄럽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만일 그렇게 매사를 표현하려고 애썼더라면 그렇게 능력 있는 전도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때로 기도할 때 시적(詩的)으로 하 고 논리적으로 하고 감상적으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듣기에는 좋은데 어딘지 모르게 기도 속에 힘이 없고 구체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기도는 확신이 결여되어 핵심을 비 켜 나가기 쉽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론을 버린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내분이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인들이 너무 지식과 이론과 학설에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라는 점을 잊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것이 핵심인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부수적인 것을 가지로 왈가왈부하다 보니까 갈등에 휩싸인 것입니다. 그 점이 강조되었더라면 쓸데없는 것들 때문에 다투거나 분열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쓸데없는 문제들 때문에 그냥 넘어가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불화하고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오늘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오늘 교회들이 자꾸만 분열되고 갈등합니다. 거기에는 이유는 있습니다. 교회들이 본질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부활과 회개와 천국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따지기 때문입니다. 핵심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교회는 모든 역량을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느 대교회 목사님이 세미나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교회에 사람들 이 많이 모이게 하고 싶으냐? 그러면 '죄, 십자가, 심판, 종말'은 설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현대 교회의 문제점들을 꼬집은 말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나 그저 듣기에 편한 말씀을 듣고는 은혜 받았다고, 설교 잘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교회에 구심점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죄, 십자가, 심판, 종말 빼고 뭐가 중심이 되겠습니까. 중심 없는 교회는 흔들리기 쉽습니다. 바울은
"나는 오직 예수만 전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보면 앞뒤가 없고 논리적이지 못한 것 같지만 그의 전도는 언제나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그 전도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권세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나는 하나님의 능력만 의존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확신있는 고백입니까. 이것이 신앙인의 신앙인 되는 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말씀을 전할 때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사용하지 않고 논리적으로나 상대방 듣기 편하도록 다듬어서 전하지 않았습니다. 각색을 하고 다듬어서 표현했더라면 핍박을 덜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 그대로를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의 말은 언제나 거칠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도 주신 말씀 그대로를 전하다가 핍박을 당했습니다.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그 말이 얼마나 거칠었습니까.
"이 독사의 새끼들아"
이 얼마나 지독한 욕입니까. 그래서 세례요한을 가리켜서 광야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아주 거칠은 말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원색적인 욕을 들으면서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요단강으로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말이 거칠었으나 그 말에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과 은혜와 진리와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전하는 말 한마디가 생명력이 있고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 보십시오. 얼마나 자신감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 자신감이 없으니 어디서나 신앙인 표시도 못하고 매사 자신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전도는 유식한 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직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는 매끄러운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투박하나 힘이 있고 자신감이 배어있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가끔 툭툭 던지는 말 한 마디가 힘이 있어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 여사는 죽기 전에 유일한 소망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3일만 눈을 떠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눈을 뜨면 첫 번째로 선생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두 번째로는 바람에 나풀대는 나뭇잎과 아름다운 눈망울, 그리고 먼동트는 웅대한 장면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도시의 번쩍이는 발코니와 쇼윈도우 에 진열된 상품들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죽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엔 그것이 소원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난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겨우 나뭇잎이나 보고 눈망울이나 보고 먼동트는 것 보는 것이 소원입니까. 적어도 성령으로 거듭난 신앙인의 소원은
"아직껏 보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 사랑의 세계, 영의 세계를 보고 죽는 것"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세계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말이 터져 나올 때마다 누구도 느끼지 못할 만큼 확신에 찬 증거가 터저나와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변화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 고 합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서도 확신에 찬 삶을 살 수 있다면 여러분의 그 삶이 바로 증거의 삶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그랬듯이 여러분들의 삶에도 이런 확신이 있을 때 사람들이 우리의 확신을 보고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00년 2월 27일 안산제일교회 고훈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사무엘상 24:16-22


사울 왕은 시기로 사위 다윗을 살해하려 했으나 오히려 다윗이 사울 왕의 옷자락을 칼로 베고 살려줌으로 사울은 회개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의지한 하나님의 능력은.....

1. 용서입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 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0~12절)."
용서는 사람의 능력이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판단, 정죄, 심판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할 일이기에 다윗이 사울에게 복수하지 않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
남을 비판하면 남이 당한 손해나 상처보다 내가 당한 상처와 손해가 더 크다는 얘기입니다. 만일 다윗이 사울을 죽였더라면 왕을 죽인 자요, 장인을 죽인 자가 되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죽인 하나님의 형벌이 평생 뒤따를 것입니다. 남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면 불행이 시작되나 용서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은 시작됩니다.

2. 감동입니다.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17~19절)."
원수 사울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 감동은 용서입니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창 33:10)."
에서가 야곱을 용서할 때 그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은 가장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스데반 이 원수를 용서할 때 그 얼굴을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행7장). 탕자가 돌아올 때 용서한 아버지는 하나님이었습니다(눅16장). 욥의 위대한 신앙은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2)."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10)."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6)."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23:10)."입니다. 그보다 가장 위대한 신앙은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42:10)."입니다. 욥의 용서가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사울의 무릎을 꿇게 한 것은 골리앗을 이긴 물메돌의 믿음이 아니라 옷자락 베는 용서입니다.

3. 변화입니다.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 을 이제 여호와께로 내게 맹세하라 (20~21절)."
용서는 감동을, 감동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장발장을 변화시킨 것은 18년 감옥생활이 아니고 신부님의 용서였다. 이것이 용서의 능력입니다. 주님은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하신 첫 말씀은 용서입니다. 다윗은 후일 자신도 모르게 간음과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회개를 통해 깨끗이 용서하신 것은 그가 과거에 사울 왕을 크게 용서한 것을 기억한 일입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가 있습니다. 주기도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용서받고 용서해야할 존재입니다. 참으로 모두에게 용서받고 용서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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