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일곱째 주일(어버이/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4년 05월 12일(주일)
에베소서 6:1-4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풍수지탄/風樹之嘆)“
다른 둥지를 튼 자녀들이 고향 집에 올라치면 부모님의 마음은 벌써 들떠 있습니다. 아니 설레기도 하지요. 자녀들과 도란도란 얘기 꽃을 피우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하지만 말문이 막힙니다. 평소 자녀들과 애틋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탓이 있을 거예요. 막상 부모가 되어 보니 어릴 적의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보곤 합니다.
집 떠난 자녀들이 멀리 타지에 떨어져 살게 되면 보고 싶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 고향 집에 돌아온 자녀를 만나보면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망설여지고 어색한 분위기만 덩그러니 남습니다. 이런 저 자신을 볼 때 아버지로서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여 삼 일 전에 <조각달>이란 글을 써 보았습니다.
아이가 집에 온다고 하니 마음이 설렌다.
기차역으로 데리러 가는 내내 마음이 들떠 있다.
아이를 차에 태우고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워야지 그 생각 숨어버리고
말문이 막힌다.
아이는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가 전화를 건다.
친구겠지.
하루 이틀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둥지 튼 집으로 가기 전 용돈만 낚아채고 날아간다.
서쪽 밤하늘에 떠 있는 조각 달,
그는 내 마음 알까?
조금 과장되고 확대해석한 표현이지만 용돈만 낚아채고 가버리는 아이를 탓하기보다 나 자신이 아버지로서 역할을 잘못 했다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로서 내가 과연 잘살고 있는지 자신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성찰해 보았습니다.
어릴 적 나를 키워주시던 아버지의 마음이 그랬을까, 표현도 서툴고 자녀를 대하는데도 도통 어색했던 아버지의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비록 표현도 서툴고 무뚝뚝했던 아버지이지만 그 속마음은 여느 아버지보다도 나를 사랑하셨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된 나를 들여다보면서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듯싶었습니다. 옛 어른들이 그랬던가요?
”너도 자식 낳고 키워 봐라. 그때 부모 마음을 알 것이다.“
”십칠만 오백 원이 든 봉투를 나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소주 한 병 에쎄 한 갑, 남을 위해 천 이백만 원을 기꺼이 지출할 수 있었던 아버지 본인에게 필요한 돈은 하루 사천 원이었다.
마지막 날 아버지는 과한 지출을 했다. 4월 30일 구천오 백원(식대 4,000×2=8,000, 소주 한 병 1,500원), 생의 마지막 날, 아버지는 누군가와 사천 원짜리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아마도 메뉴는 된장찌개였을 것이고 상대는 심중팔구 박선생이었을 것이다. 교원 연금으로 그럭저럭 살 만한 박선생이 만류했을 것이나 빚지고 못사는, 치매 걸려서도 그 성정 버리지 못한 아버지는 호기롭게 일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들었을 것이다. 하염없이, 라는 말을 나는 처음으로 이해할 듯했다."-(『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창비, P.61-62)
『빨치산의 딸』이란 장편소설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한 대목입니다.
사실, 정지아 작가는 아버지가 실제 빨치산 출신이었습니다. 하여 청소년기를 지나 대학에 들어가서야 빨치산 출신이었던 아버지를 조금 이해했다고 해요. 독재정권 시절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이라면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공무원도 될 수 없었고, 유학도 가기 어려웠지요.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정지아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지 않은가 싶어요. 나이 쉰 살을 넘은 뒤에야 빨치산 아버지의 삶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도 주인공의 부모님은 빨치산 출신입니다. 어찌어찌하여 부모님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두 분은 철저한 빨치산 정신으로 사는 분들이에요. 어머니는 혁명 전사 같은 분이고 아버지 역시 어머니 못지않은 혁명가였습니다.
그런 아버지는 먼 친척 빚보증을 섰는데 그만 그 친척이 야반도주한 거예요. 천 이백만 원이란 돈을 고스란히 빚으로 떠안게 된 거예요. 아버지는 충직한 빨치산답게 친척이든 누구든 형편이 어려운 것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성정을 가진 분이었지요.
아버지의 빚보증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힘겹게 남의 농사를 지어 번 돈을 족족히 홀라당 남의 좋은 일만 시킨 거예요. 일흔이 넘은 아버지는 어느 날 찾아온 치매를 이기지 못했어요. 아버지는 남의 밤농사를 지어 돈 번으로 빚을 갚다가 치매에 걸려 딸이 몰래 보내 준 돈으로 친구인 박 선생과 된장찌개, 소주 한 병을 나눠 드시고 영영 세상과 이별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멋들어지게 친구와 함께 나눔의 잔치를 하고 가신 거예요.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정지아 작가에 의하면 환갑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이해했다고 고백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딸, 참 오래도 잘못 살았습니다. 그래도 뭐 환갑 전에 알기는 했으니 쭉 모르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딸을 대장부의 몸으로 낳아주신 것도, 하의 상의 인물로 낳아주신 것도 다 이해할 터이니 그간의 오만을, 무례를, 어리석음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길······ 감사합니다, 아버지.“-(위의 책, P.296)
그렇습니다. 저도 환갑이 되니 겨우 어릴 적 부모님이 왜 그렇게 매를 드셨는지, 야단을 치셨는지, 나를 차별한 것처럼 느꼈는지 거기에는 다 까닭이 있었던 거예요. 세상천지에 어떤 부모가 뱃속으로 난 자식을 미워하고 원망하겠습니까?
다 거기에는 부모님의 속사랑이 있었던 거예요. 그걸 이해하는데 60년 한 갑자를 돌았습니다.
제주 4.3때 자식 잃은 부모님, 4.19혁명 때 생떼 같은 아들은 잃은 엄마, 5.18광주항쟁 때 면사포 쓴 채 공수부대원의 총에 맞아 쓰러져간 딸을 잊지 못해 눈을 감지 못했던 어머니,
며칠 있으면 볼 줄 알았던 아이들, 진도 맹골수도에서 304명이 별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세월호 참사 어머니들, 아버지들, 이태원 밤 축제에 놀다 오겠다던 159명 젊은이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영영 가버렸습니다. 가슴에 자식을 묻은 부모 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한국 근현대사가 흐르는 동안 못다 핀 꽃송이들이 부모의 가슴에 묻혔습니다. 부모의 피눈물과 한, 고통과 아픔, 한숨과 설움이 강물이 되어 지금 자식을 낳고 키우고 있는 우리의 가슴에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 부모님의 은혜를 다 헤아리고 갚을 수 있을까요? 아니요. 갚을 수 없습니다. 부모님을 이해하는 데도 60년이 걸리는데요. 부모님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일,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일, 부모님을 홀대한 일, 부모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멀리 한 일 등등 부모님께 잘못 한 일이 있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부모님 앞에 용서를 빕시다.
예부터 가정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은 뭐니 뭐니해도 부모가 아닐까요? 부모는 우리의 뿌리요 버팀목이요 울타리입니다. 부모는 큰 산과 같습니다. 어릴 적 부모는 나의 이상이요 꿈이요 희망이었지요. 부모가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것과 같았지요.
오늘 에베소서의 저자는 먼저 1세기 당시 고대 사회의 사회적 약자인 자녀들에게 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주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1세기 당시 자녀 교육이 어떻게 행해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세기 고대 사회는 헬레니즘 문화가 배경이 되고 있어요. 하여 그리스도교의 자녀 교육은 당연히 헬레니즘의 인간중심 교육과 유대교의 규범적 교육이 융합(癒合)이 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런데도 그리스도교의 교육 중심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었어요.
그래서 본문 저자는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주안에서’란 말을 강조한 게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당시 헬레니즘 문화권에서는 보통 자녀 교육은 아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어머니나 유모가 아이 교육을 책임졌어요. 그러나 유대교에서 모든 교육의 중심은 종교교육입니다. 말하자면 자녀 교육은 아버지가 책임졌어요. 당시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유대교의 영향권 아래 있었기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침을 준 거예요. 역시 당시 고대 사회는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사회였기에 어머니나 딸은 교육 주체나 대상에서 제외된 거지요.-(『국제성서주석 에베소서』, 요아킴 그닐카 지음, 강원돈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P.433-434)
그러면 주어진 본문 말씀을 더 꼼꼼히 들여다보겠습니다.
1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에서 ‘순종’을 뜻하는 헬라어 휘파쿠오(ὑπακούω)는 ”아래에서“를 뜻하는 휘포와 “듣다”를 뜻하는 아쿠오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말 그대로 “아래에서 듣다”는 뜻이 됩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씀을 아래에서 듣는 위치에 있는 거예요. 말하자면 자식은 부모의 말씀을 따르는 거지요. 그래서 ‘순종’이란 번역보다는 ‘따르다’는 번역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의 가르침에는 두 개의 명령문이 나옵니다.
하나는 “너희 부모를 따르라!”(1절)는 말과 또 하나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2절)는 말입니다.
특히 2절은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이 담겨 있어요. 2절 두 번째 구절에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하고 덧붙이고 있지요.
사실, 2절의 첫 구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말은 구약성서 출애굽기 20장 12절과 신명기 5장 16절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을 부분적으로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이 바로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했어요.
왜 이스라엘은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을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을까요.
출애굽기 20장 12절을 보겠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한 다음,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 히브리어 ‘마안’(מַעַן)이 따라옵니다. 2절의 둘째 구절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주는 그 땅에서 네 날이 길게 하기 위함이다.”(출 20:12b/직역 성경)
그러니까 십계명 제5계명이 중요한 것은 앞선 세대의 생활 경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입증하는 게 바로 늙으신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민족의 삶을 규정하면, 이 계명에 약속으로 따라 나오는 복이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날이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관주∙해설 성경전서』, 독일성서공회 해설, 대한성서공회, P.112)
오늘 본문에서는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3)로 표현을 좀 더 확대해서 단정(斷定) 짓고 있어요. 1~3절까지 문맥의 핵심 구절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오경에서도 “부모 공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만큼 부모 공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에 규정해 놓은 거예요. 1세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것은 네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뜻이다.”라고 말했어요. 말하자면 부모를 경외하는 게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첫걸음이란 뜻이지요(레19:3).
그렇습니다. 1세기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모 공경은 도덕적 의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 공경을 십계명 제5계명에 규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약속의 증표와 같은 거지요. 말하자면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 제5계명은 사람이 권력자나 어떤 권위자들보다도 우선 부모를 공경해야 함을 보여준 거예요. 자유로운 삶은 생명의 원천인 부모를 공경하는 데 달려 있어요.
사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었던 ‘언약’이란 조건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거기에는 서로의 존엄성과 성실성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한 충성심과 신뢰가 결합 되어야 하지요. 그것은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둘 이상이 함께 수행해야 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홀로 하실 수 없는 일도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그 대답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의 자유로운 동의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뜻) 아래 있을 때야 비로소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되는 거지요. 하여 언약은 도덕적 약속이 뒤따릅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란 정체성을 보증해요. 언약은 변화를 추구합니다. 언약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묶어냅니다. 그래서 언약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함께라면 할 수 있다는 공동선을 끌어냅니다. 언약은 진정 삶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각입니다.-(『오경의 평화 강론』, 랍비 조너선 색스 지음/김대옥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P.130-134)
그렇습니다. 언약으로 묶어진 십계명의 제5계명인 ‘부모 공경’은 바로 한 공동체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도덕적 의무요 약속인 거지요. 이를 무시하고 가볍게 여긴 탓으로 오늘날 가족 공동체가 해체되고 붕괴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은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는 새로운 언약 관계로 묶어진 거예요.
예수님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강조했습니다(막 7:1013). 부모 공경이 가족 공동체를 지탱해 주는 지주대와 같습니다. 이 지주대는 혼자서는 해낼 수 없습니다. 언약 관계로 묶어진 우리가 함께라면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 공경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2절)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부모 공경은 도덕적 의무요 약속이라고 했어요. 부모 공경은 외적 공손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대교 랍비 문서에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데 구체적인 의무들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입을 것과 덮을 것을 주며, 아버지를 들고 나게 하고, 아버지의 얼굴과 손과 발을 씻어 주는 것이다. 아들이든 딸이든 그렇게 해야 한다.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렇습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뭘까요?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 좋은 옷을 사드리는 것, 해외여행을 보내 드리는 것 등등 많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부모님이 제일 좋아하는 게 뭔 줄 아십니까?
다른 게 아녜요. 용돈을 드리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옷이나 해외여행도 좋지만,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는 거예요. 부모님에게 용돈 좀 드립시다.
오늘 본문은 부모를 공경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3절)고 했는데 이 말씀의 방점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 곧 부모님의 말씀을 잘 받드는 것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엄마는 /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
엄마는 /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외할머니 보고 싶다 /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 울던 엄마를 본 후론 / 아! /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심순덕 시인)
어릴 적 부모는 다 그러는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어 자식 낳고 키워보니 가난한 시절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고 아프고 고달팠을까 생각하니 애가 탔습니다.
저는 가끔 아버님이 쓰신 일기장을 몰래 봅니다.
아이들 학용품 살 돈이 없어 이리저리 돈 꾸러 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상상하니 얼마나 초라했을까 싶어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습니다.
김소월 시인의 <부모>란 시가 있습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 겨울의 기나긴 밤, /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 옛이야기 들어라. //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 이 이야기 듣는가? /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이 대목이 전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처지가 되어 보니 그때 그 시절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옛말에 부모님은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부모님에게 효도할만한 데 부모님은 세상을 떠나시고 안 계십니다.
살아계실 때 부모님을 자주 만나고, 얘기를 나누고, 맛있는 음식도 사 드리고, 가까운 산도, 강도, 바다도 함께 놀러 가는 평범한 일상을 한 번이라도 더 해보지 못한 게 너무나 후회가 됩니다. 부모님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즐기는 게 부모를 공경하는 삶이 아닐까요.
기도 / 가족 공동체의 주인이신 하나님!
맛있는 음식 함께 먹고 싶은데, 좋은 옷 사 드리고 싶은데,
해외여행 보내 드리고 싶은데, 이젠 함께 할 부모님이 안 계십니다. 부모 공경이 평범한 일상을 함께 하는 것인데 그걸 하지 못했습니다. 바쁘다 핑계 대며 부모를 멀리한 죄 용서하옵소서.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인 부모 공경을 다음 세대에게 이어갈 수 있게 부모인 우리에게 지혜를 허락하옵소서. 가정을 말씀 위에 세우고 가족을 건강하게 이끌어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