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은혜
조응태•한진선 가정
1. 탄생 및 어린 시절 2. 청소년기 3. 통일교회 입교 4. 아버지? 아버지! 5. 성화학생 6. 참부모님?? 참부모님!! 7. 대학생활 8. 군대생활 9. 참부모님??? 참부모님!!! 10. 축복 및 동원 11. 신학 및 종교학 공부 12. 앞으로 계획
주요 내용 : 원고 작성자 조응태, 출생시의 버려진 상황, 농촌의 힘든 일, 뱀과의 투쟁, 가출 및 사찰 숙식, 이삭에 대한 오해, 아버지를 부르면서 흘린 눈물, 범냇골 성지 방문, 도시락을 교회에 제공, 만물복귀, 불신과 눈병, 금식, 이백림 할머니가 주신 인친표, 군종사병, 맘몬이즘에 빠짐, 몽시, 학생부장 청년부장, 국제결혼가정의 꿈 좌절, 동원, 선교교육원 근무, 신학 및 종교학 공부, 교수생활, 앞으로의 계획
1. 탄생 및 어린 시절
나는 1954년 12월 26일(음)에 경남 밀양 농촌에서 탄생하였다. 내 위로 형 둘, 누나 둘, 아래로 남동생, 6남매였고,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내 바로 위의 형이 나보다 한 살 많았다. 즉 어머니는 형을 낳고나서 곧바로 나를 임신한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연달아 임신과 출산을 하는 것 자체가 엄청 힘든 일이었고, 게다가 힘든 농사일, 집안 일, 제사 등 육체적으로 초인적인 역할을 하셔야 하는 환경에서 아들 둘을 같이 키우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나만 살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둘째 형을 선택하고, 나를 포기하셨다. 방구석에 밀쳐놓았다.
내가 배가 고파서 앙앙 울어대니까 큰 누나가 등에 업고서 이웃을 찾아다니면서 젖동냥을 하였다. 그러나 갓난아기였지만 환경에 대해 본능적인 느낌은 있어서 마음에 스트레스가 있었고, 여러 젖을 먹다보니까 소화가 잘 안되어서 늘 설사를 하였다. 그때는 기저귀가 안 좋아서 큰 누나의 치마 뒷부분은 똥이 흘러내렸다. 옷, 비누, 세탁 등이 힘든 농촌 상황이었기에 큰 누나는 고생을 많이 하였다. 어쨌든 누나 덕분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까 1년이 지나서 호적에 등록을 하였다.
출생과 동시에 호적 등록을 하지 않고 1년이나 2년이 지나서 등록을 하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보통 현상에 속하였다. 농사일이 바쁘고, 면사무소로 가는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고, 영양실조나 위험에 노출된 환경 때문에 사망하는 경우도 있고, 국가 차원의 행정에 대해 무지하였기에 제 때에 등록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또 일찍 등록했다가 아기가 사망할 경우에는 사망신고를 등록하기 위해 사무소를 가야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기가 죽지 않고 살게 되면 호적에 등록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원시적인 생활보다 조금 나은 벽지(僻地) 시골생활이라서 그러하였다.
어려서 설사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지 나는 늘 아랫배가 편안하지 않았다. 자주 배가 차가웠고, 소화가 잘 안되었고, 설사를 했다. 내 몸의 그런 증상을 알기에 나는 늘 긴장을 하였고, 고기를 잘 먹지 않았다. 건강에 늘 신경이 예민했다. 몸이 그런 상태라서 그런지 정신적으로도 염세적(厭世的) 성격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2. 청소년기
부북초등학교 및 밀양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이 힘들어서 가출한 작은 누나를 따라서 부산으로 갔다. 누나는 동양고무신 공장에 취직하였고, 나와 같이 달동네에서 자취를 하였다. 물을 긷는 것도 큰일이었다. 돈을 주고 물을 통에 담아서 언덕길을 넘어서 집에 왔다. 물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젖동냥으로 살려준 큰 누나도 농사일이 힘들어서 도시로 탈출하였다. 아버지의 꿈이 안 좋아서 나중에 다른 사람과 맞선을 보자고 제안하셨으나 누나는 하루 속히 농촌을 떠나고 싶었다. 영도에서 조선소 노동자로 일하는 매형과 서둘러서 결혼을 했다. 그러나 임신 중독으로 그만 세상을 떠났다. 미래에 누나에게 뭔가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만 사망하였다. 이를 계기로 내 마음에 죽음이라는 실체 먹구름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죽음이 왜 있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이 생겼다.
부모님의 소원은 내가 기술자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벌어오는 효자가 되는 것이었다. 1971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누구나 나이가 장성기 완성급(16-18세)에 들면 인생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나 역시 그런 정신적 영적인 자아를 발견하려는 용틀임이 있는 홍역 기간을 맞았다. 무엇인지 모를 어떤 것이 나를 휘감았다. 마음이 괜히 안정되지 못하여 불안하기도 하고, 뭔지 모를 욕구불만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심기가 불편하니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께서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이사를 왔는데, 하수구가 지나가는 옆에 마련된 셋방에서 사는 것도 힘들었다. 그곳은 여름이면 악취가 진동하고, 싸우는 소리가 자주 들렸고, 먼지가 많고, 사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스트레스 수치가 높은 환경이었다. 나는 돈을 아끼느라 장거리를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실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힘든 때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수업시간에 교실에 앉아 있으면 큰 뱀이 나를 휘감고 입을 벌리고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 그러니 두렵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 뱀에게 먹히지 않고, 이기려고 힘쓰다 보니까, 눈빛이 반짝거렸다. 어느 날 교련(敎鍊) 수업 중에 뱀과 투쟁을 하다가 지쳐서 잠시 졸음이 와서 몽롱한 상태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눈빛이 좀 흐려졌을 것이다. 그러자 교련 교사가 “너 왜 눈빛이 흐려지니? 반짝거리고 빛나는 눈동자가 아니구나?”라고 말했다.
인생 문제에 대한 화두가 본격화되면서 공부가 잘 되지를 않았다. “빨리 좋은 직장을 구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께 효자 노릇을 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공부에 집중이 잘 되지를 않았다. 누나의 죽음이 자주 떠오르면서 “죽음이 무얼까?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화두가 용솟음치면서 죽음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부산 태종대에 있는 자살절벽을 찾아가 보았다. 그곳은 가파르고 높은 수직절벽이라고 투신하면 바로 바다에 첨벙 빠져서 익사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거기서 투신자살하는 자들이 많아서 경고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이곳은 위험하니까 접근하지 마세요. 투신자살하지 마세요.”라고 되어 있었다. “여기서 투신하여 이미 죽어버린 자들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냥 죽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저 파도는 인생의 진리를 알까?”라고 생각하면서, 절벽 아래에서 억겁의 세월동안 철썩거리면서 다가오고 나가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 파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지나가는 어떤 아저씨가 “학생 거기는 위험하니까 빨리 가거라.”고 하였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귀가하였다.
그렇게 헤매다가 겨울방학이 되자마자 나는 결심했다. 큰형님 내외분과 같이 살던 전세집에서 내 책상 위에 작은 편지를 써서 얹어 놓고 출가를 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도(道)를 깨닫기 위해 출가를 하오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깨달으면 곧장 귀가하겠습니다.” 작은 용돈을 갖고서 무작정 동해안 열차를 탔다. 12월이라서 해가 빨리 떨어졌다. 오후 4시 반경에 해운대를 조금 지나서 있는 시골 기장역에 도착하였다. 어둠이 내릴 것 같아서 그냥 내렸고, 가방 하나를 들고서 그냥 논둑길을 걸었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겨울의 찬바람이 휭휭 불고 있었다. 텅 빈 내 가슴으로 찬바람이 파고들었다. “내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되려는가? 왜 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혼자 중얼거리면서 그냥 걸었다.
걷다보니 작은 절이 하나 나타났다. 무작정 들어가서 스님을 만났다. “잠시 머물면서 삶을 알고 싶습니다.”고 했다. 스님은 내 학생증을 받아놓고서 투숙을 허락했다. 바닥이 잘 데워진 방에 나를 잠자게 허락하였다. 생후 처음으로 낯모르는 사람의 집, 그것도 사찰에서 하루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다음날, 주지스님은 나에게 사명을 주셨다. 그 다음날 새벽부터 3시 반에 일어나서 대웅전을 물걸레로 닦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새벽 4시부터 스님이 예불을 드리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캄캄한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우물에서 물을 길러서 걸레를 빨고, 전기도 없는 캄캄한 대웅전에 들어가서 걸레 청소를 하는 것은 몹시 무서웠다. 낮에는 인자한 모습의 부처님의 미소가 새벽에는 무섭게 다가왔다. 그리고 부처님 뒷면에 죽은 고인을 위한 49재를 드리다가 남은 물건들을 보관해 두고 있어서 그것을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등골이 오싹하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후다닥 걸레질을 하고 나왔다. 다행히 우물물은 미지근하였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김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물마저 차가웠다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3. 통일교회 입교
1972년 새해가 밝았다. 태양은 새롭게 붉게 타올랐으나 나의 가슴에는 여명이 오지 않았다. 답답하고 암울하고 미래가 보이지를 않았다. 산중이라서 해가 뜨자말자 곧 정오가 되고, 오후가 되고, 서산으로 넘어가는 것이 하루일과였다. 나는 주로 청소를 하였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고, 시간나면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생애를 기록한 책이 있어서 그것을 읽었다. 의상은 원효와 함께 661년에 중국으로 유학을 가던 친구였다. 가던 중에 원효는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고서 유학을 포기했고, 의상은 중국으로 가서 화엄종을 배워서 신라에 퍼뜨렸다. 진리를 얻기 위한 그의 전력투구한 모습이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의상대사가 깨달은 진리는 무엇일까? 최고의 진리, 궁극적인 진리는 무엇일까? 깨달았다면 왜 세상에는 죄악이 있고 싸우는가? 중생들은 그냥 이 험한 세상에서 지친 영혼의 모습으로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죽음의 문턱으로 들어가야 하는가?”는 물음이 생겼다.
2월 달이 되었다. 해동(解冬)의 기운이 대지(大地)에 퍼지기 시작하는 때였다. 그 절에는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청년이 있었는데, 스님이 되기 위한 과정을 배우는 중이라서 학승(學僧)이었다. 그가 나보고 “봄이 되었으니까 밭을 일구러가자.”고 하였다. 곡괭이를 들고 사찰 옆에 있는 작은 밭에 가서 땅을 파서 뒤집었다. 흙을 골라야 씨앗을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창 땅을 파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남녀 청춘 20명 정도가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서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입춘대길을 맞이하여 등산 중이었다. 그러자 학승이 괭이를 붙잡고 한참동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마침내 산모퉁이를 돌아서 보이지 않게 사라질 때에 그 학승은 “나중에 죽어서 보자.”라고 하면서 다시 곡괭이를 들고서 땅을 팠다. 저 말이 무슨 의미일까? “이 세상에서는 저 남녀들이 청춘을 즐기느라고 바쁘겠지만 죽게 되면 저들은 지옥으로 갈 것이고, 불도를 닦는 학승은 극락의 세계에 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구나.”로 나에게 와 닿았다. 그 순간 나는 “아, 저 학승의 마음에도 남녀간의 사랑욕구가 여전히 남아있구나. 이 곳 깊은 산 속에 있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구나. 하산(下山)하자.”고 판단하였다. 두 달 정도의 사찰생활은 막을 내렸다.
하루를 더 고심하다가, 그 다음날 주지 스님께 말씀드리고 학생증을 돌려받고서 귀가를 하였다. 집에 오니까 꾸중을 하지는 않았다. 또 출가한다고 난리를 피울까 걱정이 되어서 그런지 그냥 수용해 주었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 나를 참인생으로 안내해 줄 누군가가 없을까?”는 질문이 가슴에 맴돌았다. 머리가 뒤숭숭하였다. 부모님께서는 힘든 노동을 하면서 자식을 키웠으니 이제는 내가 졸업하면 떼돈을 벌어다 줄 것으로 기대가 가득하셨다. 그런 기대만큼 나는 심리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숨이 막힐 듯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4월 중순이 되었다. 내 친구가 갑자기 나에게 “좋은 진리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같이 가보자.”고 제안하였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듣고 싶었던 상황이어서 바로 그날에 친구를 따라갔다. 가서 보니까 목재건물 2층에 20평 전도가 되는 다다미방으로 꾸며진 부산진 통일교회였다. 성전, 안방, 부엌 세 개가 있었다. 계단을 오르면 삐거덕 소리가 났다. 430가정의 유정옥교회장께서는 날마다 저녁에 원리강론을 쭈욱 강의를 하고 계셨다. 사모님은 동원되어 강원도로 가셨다. 식량은 국수나 수제비였다.
그 날에 한 강의는 후편의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였다.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 사생결단의 자세로 판서강의를 하셨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노정을 강조하셨다. 그러나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경에 무지한 나였으니까 이해가 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한 단어가 내 눈에 익숙하게 들어왔다. “이삭”이었다.
나는 시골 출신이라서 봄이 되면 보리 이삭을 주웠고, 가을이 되면 벼 이삭을 주운 경험이 있었다. 그것을 주워서 학교에 가져가면 학교에서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그 순간 “아, 통일교회가 가난하니까, 곧 보리 추수가 시작되면 보리 이삭을 주워서 갖고 오라는 것이구나.”라고 판단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니라 보리 이삭으로 이해를 하였다. 성경에 대해서 선지식(先知識)이 있어야 제대로 강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는데, 농촌 단어가 내 머리 속에 있으니까 내게는 보리 이삭으로 와 닿았던 것이다. 나중에 이를 알고서는 나 자신이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때가 되면 꼭 성경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 보자.”고 다짐했다. 그 꿈은 6천가정 동원된 이후에 실현되었다.
교역장께서는 “하루라도 빨리 입회원서를 제출해야 영계에 빨리 등록이 될 수 있고, 조상들도 엄청 기뻐하게 된다.”고 강조하셨다. 그래서 며칠이 지나서 입회원서를 작성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1972년 4월 17일인 것 같다. 입회원서를 작성할 때에 아래 부분에 “위 원인”이 있다. 여기에는 작성자의 이름을 쓰고 사인을 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공식적인 서류를 작성하는 나는 원인(原人)을 원인(原因)으로 해석하였다. 즉 “이 입회원서를 작성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적는 곳이구나.”라고 생각하고서는 “참인간이 되기 위하여”라고 적었다. 내가 늘 화두로 삼고 있는 내용을 나도 모르게 기록하였다.
4. 아버지? 아버지!
그런데 교회장께서 강의를 끝나고 기도를 할 때에 막 우셨다. 나는 이상했다. “왜 우시지?” 일요일 예배 시간에 기도를 할 때에는 참석자들이 모두 “아버지!”라고 하면서 마구 울었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왜 예배시간에 울지? 예배시간은 본래 반갑고 즐거운 시간이 아닌가? 이상하네?”라고 생각하였다. 나 혼자 울지 않고, “아버지?”라며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 의문에 사로잡혀 있으려니까 좀 뻘쭘하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고, 기도할 때에 눈물이 날까?”라고 고심하였다.
6월 말경, 성일(일요일) 새벽에 집 뒤에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고, 심정을 체휼하고, 기도할 때에 눈물이 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교련복을 입고서 산 정상에 올라가서 아래로 보니까 약간 내려가서 움푹 파진 곳이 있었다. 아마도 무덤을 이장(移葬)한 곳으로 보였다. 거기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 왜 저는 눈물이 안 납니까? 아버지께서 계시면 저에게 나타나 주시면 안 됩니까? 아버지!”라고 기도를 하였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수없이 외쳤다. 두 시간 정도 외치면서 기도를 하였다.
한참 그렇게 하다보니까 하나님의 심정이 전해지는 것 같고, 눈물이 살짝 나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나도 눈물이 나는구나.” 더 열심히 아버지를 외쳤다. 마침내 누가 내 오른쪽 어깨를 툭툭 쳤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직접 오셨거나 아니면 천사를 보내주셨구나!”하고 속으로 기뻐하면서 눈을 떴다. 그런데 거기에는 어떤 50대의 아저씨가 서 있었다. 하나님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라 아저씨가 있어서 약간 흠칫 놀랐다.
그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학생,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는지를 모르지만, 너무 상심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게.” 아마도 그 아저씨는 교련복을 입은 내가 구덩이에서 통곡을 하고 아버지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나의 아버지께서 사업에 실패하여 가정이 경제적 위기에 부딪쳤든지, 위독한 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떠날 지경에 있든지, 뭔지 모르지만 기가 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눈물을 닦고, 눈을 떠 보니 주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한참동안 나를 지켜본 것 같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생겼다. 아저씨가 “다들 가세요.”라고 하였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하산하여 교회로 갔다. 예배시간에 “아버지!”라고 기도를 하니까 눈물이 나왔다. 마침내 “아버지?”가 “아버지!”로 변하였다. 산상에서 통회기도를 한 결과 내 눈이 영적으로 좀 맑아진 느낌이었다.
5. 성화학생
토요일 오후면 성화학생 예배를 보았다. 일요일 예배 후에는 성화학생들과 같이 범냇골 성지로 갔다. 기도 바위에서 기도를 하고 작은 토담집 방안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나의 맹세>가 걸려 있었고, 지붕에서부터 흘러내린 누런 빗물 자국이 얼룩으로 새겨져 있었다. 구석에는 호롱불을 받치는 등잔대가 있었다. 거기서 참아버님은 《원리원본》을 집필하셨다. 김원필회장께서 거기서 미군 초상화를 그려서 자금을 마련하였다. 이요한 목사님이 같이 머무셨고, 강현실전도사가 찾아와서 전도가 된 곳이었다. 방 앞 작은 툇마루에 앉아서 저 멀리 내다보면 바다가 보였다. 지금은 부산 시민회관이 자리한 번화가인데, 그 당시는 빈 땅이었고,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참아버님께서는 마루에서 빈 터 뒤로 펼쳐져 있는 바다를 바라보시고서 6•25 전세(戰勢)를 판단하셨다. 즉 배가 많이 들어오는 것이 보이면 유엔군이 승리할 것을 예감하셨고, 배들의 출입이 뜸하면 전세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는지를 아셨다.
성화학생시절에 아침에 큰형수가 싸 주시는 도시락을 교회에 갖다 드리고 학교에 갔다. 점심은 친구들로부터 한 숟가락씩 받아먹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다시 교회로 갔다. 수제비도 먹고, 라면도 끓여먹고, 강의도 듣고, 식구의 심정 충만에 취하였다. 교회에서 잠도 자고 싶었지만, 방이 부족했고, 또 그 다음날 학교갈 준비를 해야 하고 형수로부터 도시락을 받아와야 하였기에 밤늦게 집으로 갔다. 소위 말하는 기독교의 초대교회에서 성령의 은혜 안에서 신도들이 행복하였던 것처럼(사도행전2:43~47) 우리들은 혈육의 정(情) 이상으로 천정(天情)에 취하여 살았다.
만물복귀를 위하여 종교신문도 팔았고, 모나미 볼펜을 팔러 시골로 다녔다. 그 때는 볼펜이 귀한 때였다. 돈 대신에 쌀을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쌀자루가 무거워서 빨리 돌아와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름이 되어 장마가 생기면 수재민 돕기 모금도 했다. 겨울이면 찹쌀떡 장사도 했다. 이런저런 사건을 만들면서 궁핍한 목회자의 생활에 작지만 기여할 수 있었다.
특히 수택리에서 여름방학이면 열렸던 성화학생 총회에 참석한 추억이 남아 있다. 같이 열차를 타고 상경하고, 버스로 망우리 고개를 넘어서 수다를 떨면서 갔던 일, 체육대회를 하면서 목이 터지도록 응원한 일, 기마전, 밖에서 이슬을 맞으면서 잠을 잔 것 등의 내용들은 청소년기의 감미로운 기억으로 내 의식에 남아 있다. 며칠간 잠을 설치면서 귀가를 하면 잠이 마구 쏟아졌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어디 아픈 것이 아닌지를 걱정하셨다.
부흥회가 있는 날에는 친구들을 많이 데리고 갔다. 이렇게 교회에 열중하다보니까, 학교에서는 소수의 학생들이 통일교회에 미쳤다고 소문이 나돌았다. 교무실로 불려가서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담임께서는 “나중에 좋은 직장을 갖고, 결혼도 하고나서 종교활동을 하라.”고 훈시하였다. 학기말 성적표에 이렇게 적었다. “이 학생은 종교에 지나치게 빠져 있어서 부모님의 특별지도가 필요합니다.”
6. 참부모님?? 참부모님!!
나에게 불신의 유혹이 다가왔다. 1973년 고3시절에 양산으로 하계 40일 전도활동을 나갔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방학 중에도 학생들이 학교 및 학원에 가면서 대학에 갈 준비를 한다고 분주하게 설치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내 맘속에 의심의 먹구름이 깔렸다. “나도 지금쯤 대학 입시를 위하여 전력을 쏟아야 할 것인데, 이렇게 시골에 와서 전도활동을 한다고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 되는가? 신앙생활은 나중에 직장 좋은데 취직을 하고 나서 돈을 웬만큼 벌 수 있을 때에 교회에 나오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빨리 귀가하여서 학원에 등록하여서 공부를 하자고 불신의 생각을 했다.
그런데, 또 나보다 2살 위인 형뻘 되는 학생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재수를 하여서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고생을 많이 한 성장기간을 거쳐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의 의견이 존중을 받는 입장이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한창 공부에 전념해야 할 시기에 이렇게 농촌에 와서 지내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 같다. 내일 당장 짐을 사서 귀가하자. 나중에 출세를 하고나서 신앙생활을 하자.”
우리 둘은 그날 저녁에 교회장을 찾아가서 양해를 구했다. 교회장께서는 냉정하게 선언했다. “참부모님이 개척하신 뜻을 위해 나섰으면 끝까지 가야지 중간에서 포기하는 무디고 약한 사나이가 되면 안 되지 않느냐? 밤사이에 잘 생각해 보거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너희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밤에 잠이 잘 오지를 않았다. 어느 판단이 좋은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새벽 일찍 그 형이 나를 깨웠다. “날이 밝기 전에 나가자. 그래야 덜 미안하지 않겠는가.” 우리 둘은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섰다. 첫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형과 내 눈에는 누런 눈꼽이 끼었고 눈동자는 붉게 충혈이 되었다. 서로가 깜짝 놀랐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눈병으로 생각하면서 버스를 타고 부산 집으로 왔다. 눈의 통증이 심했다. 약국에서 약을 사 먹고 안약을 넣었으나 완화되지를 않았다. 8월 말까지, 즉 40일 하계전도 기간이 끝날 때까지 나는 방안에서 누워서 지냈다. 밖에는 나가지도 못했다. 학원에 갈 생각은 엄두도 못 내었다. 딱 40일이 지나고 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니까 신기하게도 눈이 다 낳았다. 내가 봐도 참 기이하였다. “뭔가 내 판단이 잘못되었구나.”하고 회개하면서 다시 교회를 갔다.
참부모님의 길을 의심하였고, 내 생각을 앞세운 나를 하늘이 각성시켜 주셨다. 불신에 따른 질병 고통의 탕감을 하였다. 인간이 질병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원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유전병, 자연 재난 및 유행성 전염병, 개인의 건강관리 부족, 그리고 영적인 탕감을 위한 병이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불신한 “참부모님??”이 은혜의 “참부모님!!”으로 와 닿았다. 나는 더 열심히 성화학생 활동에 동참하였다.
성일에는 하루종일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예배, 수제비 혹은 국수 중식, 그리고 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우호증진 및 전도효과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교회장께서도 가끔 같이 즐기셨고, 함께 교회로 돌아 온 후에는 수제비를 맛있게 먹었다.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 밥을 먹을 수 없어서 늘 수제비, 국수, 라면을 먹었다. 강냉이 뻥튀기도 맛있게 먹었다. 한창 먹을 나이이기에 맛도 있었겠지만, 천정(天情)으로 만난 식구들이 함께 해서 더욱 맛있었다.
7일 금식도 두 번을 하였다. 나 자신을 새롭게 갱신시키고 싶었다. 원죄를 청산 짓고 싶었다. 내가 화두로 삼았던 ‘참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젊은 혈기에 두 번째 금식 후에는 바로 음식을 먹는 바람에 상당기간 위장병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본래 금식을 하려면 원칙이 있다. 금식하려는 기간만큼, 사전 준비 기간에 서서히 식사량을 줄일 것, 금식 기간, 서서히 식사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그런데 금식 후에 마구 음식을 먹었느니 오히려 건강이 안 좋게 되었다. 본래 위장 계통이 약했는데, 금식을 무리하게 했으니까 탈이 생겼다. 형식적으로 7일 금식을 했으나 실제로는 내 정성이 부족하여 정상적인 금식이 아니었다. 그래도 배가 고픈 것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경험했다. 그래서 방송에서 아프리카인이 기아의 고통에 허덕이는 장면이 나오면 안쓰럽게 느껴지고, 저들을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를 궁리하게 되었다.
7. 대학생활
1974년부터 대학생활이 시작되면서 나는 자청하여서 학생부장이 되었다. 후배들을 가르치는 것이 곧 내가 배우는 것이라는 신념에서 나 스스로를 철저한 신앙에 묶기 위해서였다. 학교 수업이 없거나 일찍 끝나면 교회로 와서 기도 및 경배를 드렸고, 방석을 깔아놓고서 학생들이 앉아서 듣고 있다고 가정하고서 원리강의를 연습하였다. 저녁에 학생들이 학교를 마치고 교회로 오면 강의를 하였고, 같이 대화를 나누면서 식구공동체를 만들었다.
학생들이 많이 모였다. 자녀를 돌보는 부모의 마음으로, 농작물을 돌보는 농부의 심정으로,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을 대신하는 심정으로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고, 오면 최대한 그리워하고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환영하였다. 하루라도 안 오면 그 다음에 만날 때에 최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런 정성을 들이니까 학생회가 잘 번성하였다. 이를 계기로 년말이 되면 연극도 하면서 문화행사를 진행하였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이백림 논산 할머니(1975.1.3. 특별순회사 임명)를 통하여 영계를 체험하였다. 교회를 순회하시면서 조상해원을 해 주셨다. 5월 하순경이었다. 부산교구에서 식구들이 모여서 찬양집회를 하였다. 성가 37장 ‘찾아진 양떼’를 수없이 반복해서 불렀다. 그러면 조상영인들이 어깨를 타고 내로오고, 합장한 두 손이 아주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면서 딱 붙었다. 그런 현상이 생기면 그 사람은 앞으로 나갔고, 순회사님으로부터 인친표를 받았다. 대개 5~10장을 받았다.
두 시간이 지났다. 눈을 살포시 떠보니 많은 식구들이 인친표를 받았고, 나를 비롯하여서 5명 정도가 남았다. 나는 초조해졌다. 속으로 조상영인들에게 외쳤다. “빨리 나오지 뭐하시나요?” 잠시 손이 흔들리는 듯 했다. 조상이 강림한 듯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다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땀을 흘리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그 때에 어떤 뚱뚱한 여자집사님이 내 등 뒤로 와서 손바닥으로 마구 내리쳤다. “빨리 회개하지 않고 뭐하느냐?” 나는 더욱 창피하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기도를 더 열심히 했다.
그러자 순회사님께서 그 집사를 호되게 꾸짖었다. “야 이년아, 너나 잘해, 감리교회 다니다가 통일교회로 왔으면 통일교회에 전념해야지 왜 두 교회를 왔다갔다해! 너나 똑바로 하라구!” 그러면서 “저 학생 앞으로 데리고 나오라.”고 지시하셨다. 앞으로 나갔더니 인친표 10장을 주시면서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인친표는 가로세로 약 5cm정도 되는 흰 종이였다. 나를 때렸던 그 집사는 감리교 신자였다가 통일교회로 왔는데도 불구하고 감리교회에 미련을 못 버리고 왔다갔다하는 이중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순회사님이 초능력으로 그런 숨겨진 사실을 단번에 알아버렸다.
나는 신기했다. 처음으로 영적인 현상을 체험했다. 그래서 한달 뒤에 양산에서 열리는 조상해원식에 가기 위하여 정성을 많이 드렸다. 캄캄한 새벽에 기상하여 옥상으로 올라가서 사방으로 성염을 뿌렸고, 양산 집회에서는 조상해원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 한 달 뒤, 갑자기 비가 엄청 쏟아졌다. 나는 양산에 가기를 포기했다. 그러자 임집사라는 남자 분이 자기가 돈을 낼 것이니까 택시를 타고 같이 가자고 하였다. 그 당시는 자가용이 귀하였다. 나는 곧장 동승하였다. 비가 오는 밤, 택시를 타고 부산에서 양산교회로 달렸다. 도착을 하였다. 집회가 막 시작되었다. 안에는 자리가 꽉 차서 들어갈 틈이 없었다.
나는 성전 문 옆에 살짝 앉았다. 그러자 이백림 순회사님께서 “저 문 뒤에 있는 학생 이리 나오너라.”고 하셨다. 나는 듣지 못하였다. 보조하시던 분이 문 가까이로 나와서 나를 지목하였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갔다. “그래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정성을 많이 들였구나. 앞으로도 정성을 많이 들이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하면서 인친표 15장을 주셨다. 나는 앉자말자 인친표를 받은 것이다. “아하! 남모르게 정성을 들이는 것도 하늘은 다 아시는구나. 정성의 효과가 크구나.”라고 깨달았다. 나는 더 열심히 학생부장 직분에 최선을 다하였고, 기도 정성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백림 순회사께서는 1976년 9월 12일에 성화하셨다. 1년 반 남짓 참부모님의 지시를 받아서 순회를 하면서 조상해원을 하다가 영계로 가셨다. 그 이후로 성가 37장을 부를 때마다 순회사께서 집회를 열정적으로 주관하시던 모습이 오버랩된다. 나를 일깨워 주신 귀한 분이셨다.
8. 군대생활
1976년 봄에 국가의 부름을 받아서 군대에 갔다. 대구에서 기본훈련을 6주간 받았고, 경기도 전곡의 신탄리에서 근무하였다. 그 지역은 철로가 북한으로 가다가 끊긴 지역이었다. 열차 차량 한 개가 녹이 빨갛게 쓴 철로에 얹혀 있었고, 거기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동족상쟁의 아픈 한을 철마가 보여주고 있었다. 붉은 녹은 젊은 나이에 전쟁에 동원되어서 피를 흘리고 영계로 간 한 맺힌 영인들의 절규가 와 닿았다.
그 당시에는 그동안 미군들이 사용하던 아주 무거운 M1 총을 M16으로 교체하는 시기였다. 훈련받을 때에는 M1으로 사격을 하였다. 자대에 배치가 되어서 M16을 사용하니까 너무나 가볍고 성능이 좋았다. 초겨울에 일주일간 계속 행군을 하면서 실제 전쟁을 체험하는 기간이 있었다. 이틀 정도 계속 걸으면 발에 물집이 생겨서 따가워서 걷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눈이 펑펑 오는 들판과 계곡과 산꼭대기를 걸었다. 가끔 초가집에서 새어나오는 노란 등잔불빛을 보면 고향생각, 가족생각, 교회식구들 생각이 났다. 행군 도중에 잠시 휴식을 갖게 되면 그대로 드러누워서 잠잤다. 얼굴에는 금방 폭설이 쌓였다. 잠자는 것도 잠시, 영하 20도 이하의 날씨라서 추워서 금방 잠이 깨었다.
대부분의 장병들은 걷다가 졸고, 졸면서 걷는 경우가 많았다. 수련을 받으면서 들은 내용 중에서 “참아버님과 김원필선생이 박정화를 자전거에 태우고 남하할 때에 김원필은 졸면서 걸었다.”(《말씀선집》 제42권, 31쪽)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설마 졸면서 걷는 경우가 있으려나?”라고 의심했는데, 군사 훈련을 통하여 그런 경지를 체험했다.
한 장병은 다리 위를 지나가다가 졸면서 걷다가 그만 추락하였다. 등에 짊어진 무거운 배낭이 먼저 바위에 닿았기에 몸이 보호되었고, 철모를 썼기에 머리가 바위에 부딪쳐도 안전하였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나는 따뜻한 경남 지방에서 자랐기에 처음으로 영하의 혹독한 추위를 경험했고, 걸으면서 잠을 자기도 했고, 꽁꽁 얼어붙은 얼음덩어리 밥을 먹을 수가 없어서 그냥 물로써 허기를 견뎌야 했다.
나는 처음 3일 동안에는 우리 중대(中隊)의 대열에서 자꾸 축 쳐졌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심기일전하였다. 참아버님의 노정처럼 승리하고 싶었다. 물집이 생긴 것을 따서 물을 뺐다. 일부러 탕탕 강하게 걸으면서 통증을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대열에서 맨 앞으로 치달았다. 마침내 훈련이 끝날 즈음에는 처음 선두에 서서 중대로 돌아왔다. 훈련 종료 훈시를 하던 중대장이 나를 칭찬했다. “이제 막 군대 생활을 시작한 신병도 강한 정신력으로 이렇게 이겨내는데 고참이 뒤지면 어떡하느냐? 조응태 일병에게 배워라.”고 했다. 입대하기 이전에 이미 교회에서 참부모님의 생애 노정을 배웠고, 여러 가지 훈련을 받았고, 7일 금식을 한 경험이 있기에 그 정도는 가뿐히 극복할 수 있는 정신력이 있었다. 감옥에서 승리하신 참아버님을 모델로 하여서 군사 훈련 고난 승리의 감격을 맛보았다.
그런데 12월 중순에 갑자기 사건이 생겼다. 우리 연대가 비무장지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대대장 한명이 무전병을 이끌고서 북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갑자기 우리부대가 비무장지대 철책선을 지키기 위해 크리스마스 다음날에 이동하였다. 흰눈이 내린 저녁에 철원평야의 한 모퉁이 부분 작은 도랑이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처음 일주일간은 24시간 전투체제로써 비상근무를 하였다. 사생결단의 전투태세였다.
나는 소대(小隊) 군종(軍宗)을 자청했다. 초소를 돌면서 전우들을 위해 기도를 해 주는 것이었다. 평균 영하 25도의 날씨, 하늘에는 보름달이 둥그렇게 떠 있고, 흰눈이 쭈욱 펼쳐져 덮인 태고적 자연 그대로의 철원평야를 바라보면서 하늘부모님의 창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보고 느꼈다. 비경(祕境) 설경(雪景)이었다. 기도로써 전우를 위로해 주면 때로는 눈물을 훌쩍이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대자연 속에서 총을 겨누고 대립해야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한없이 불쌍해 보였다. 한 줌의 흙만도 못한 인간이 하늘부모님께 감사하면서 대자연과 우주를 친구삼아서 행복하게 살면 될 것인데, 굳이 남을 지배하려고 하고, 땅과 자원을 빼앗고, 남보다 우월하다는 존재감 확인을 하려고 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싫었다. 사탄의 후예(後裔)인 자들의 삶의 목적은 파괴와 살상과 지배에 있음을 확인했다.
앞으로 축복가정들이 심정의 용사가 되어 참된 하늘편 군인으로서 사명을 다할 날이 올 것이다. 구약시대에 바빌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재건을 할 때에 느헤미야 지도자는 한편으로는 말씀을 읽고 의미를 새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를 조직하여서 “일하면서 싸우는 전통”을 세웠다(느헤미야4:4). 그처럼 하나님나라, 천일국은 세상 속에서 일하면서 악의 세력과 싸워서 이기는 자들에 의하여 창건될 것이다. 나는 휘황찬란한 철원 설야(雪夜) 평야를 쳐다보면서 보초를 서는 전우들이 있는 초소를 돌면서 격려의 기도를 해주었다. 그리고 사탄과 마지막 판가리 싸움에 승리하여 하나님의 기업을 성취하는(성가18장) 모습이 되기를 나에게 다짐하였다. 내가 제대를 할 때에 전우들이 비무장지대 철책선 기도가 참 좋았다고 칭찬해 주었다.
영적인 승리를 위하여 날마다 불평 없이 열심히 복무하다보니 10일간의 특별 휴가를 받아서 사단(師團) 본부가 건설한 한탄강 유역의 콘도시설에서 잘 지냈다. 중대장으로부터 모범군인 표창도 받았다. 참아버님께서 흥남 감옥에서 승리를 하셨던 것을 떠올리면서 모두가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3년간의 군대 생활에서 승리했다는 조건을 세울 수 있었다.
9. 참부모님??? 참부모님!!!
군복무가 36개월이었으나 대학교에서 교련 학점을 이수한 것을 고려하여서 3개월 빨리 제대하였다. 한달이 까마득한 군생활에서 3개월은 놀라운 혜택이었다. 집에 오니까 그 동안에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교회에서 찍은 사진을 다 없애버렸다. 특히 범냇골 토담집에서 찍은 사진은 귀한 것인데, 그 마저도 없어졌다. 군대를 제대했으니까 이제는 철든 모습으로 통일교회에 대한 미련을 끊고, 경제 자립을 하고, 장가를 잘 가라는 것의 부모님의 뜻이었다.
그리고 당장 경제적인 어려움이 따랐다. 집안 살림에 뭔가 보탬이 될 나이였고, 대학교 복학을 하려면 등록금을 벌어야 하였다. 그래서 어떤 음료수 회사에 시험을 치렀고, 무난히 합격하였다. 그 회사는 하루 2교대로 일하였다. 12시간 근로에 업무 인수인계를 하다보면 13~14시간이 되고, 귀가하여서 세수를 하고나면 15시간이 된다. 그러면 곧장 잠자기에 바빴다.
특히 토요일 야간 근무를 하고나면 성일(일요일)에 교회 예배시간에 계속 정신없이 졸았다. 식구들에게 너무 미안하였다. 예배 후에 인사를 하거나 국수를 먹는 시간도 나에게는 귀하였다. 왜냐하면 잠을 좀 자야 오후 8시에 다시 출근하여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너무 졸다가 옆으로 기울어지기도 하였다. 너무 미안하고 창피하였다. 그래서 그 다음 성일부터는 불참하였다. 한달이 지났다. 교회를 나가지 않아도 내 생활에 별 탈이 없어보였다. 두달을 나가지 않았다. 전혀 이상이 없는 일상생활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자 내 신앙이 비신앙적 방향으로 굳어졌다. 삼개월을 예배에 불참하였다. 그러자 내 마음을 사탄이 완전히 사로잡아서 강퍅(剛愎)해졌다. “굳이 꼭 교회에 안 나가도 별 탈이 없구나. 그 동안 괜히 교회에 나가서 시간을 허비하고 아까운 돈을 헌금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화학생 시절에 하계 40일 수련을 포기하여서 눈병을 앓았다가 회개하였던 사실, 이백림순회사로부터 인친표를 25장이나 받은 것, 비무장지대에서 자청하여 군종 생활을 한 것, 등의 추억들이 까마득히 잊혀졌다. 선업(善業)을 쌓기는 힘들지만 까먹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머리와 마음에서 참부모님과 하늘부모님이 떠나셨다. “참부모님과 하늘부모님이 필요한가?”라는 불신앙의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사탄이 침노하였다. “오직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탄이 던져놓은 덫인 맘몬이즘의 욕망에 푹 빠졌다.
그러자 하늘이 나를 살리시기 위한 몽시를 주셨다. 3일간 똑 같은 꿈을 꾸고서 나 자신을 바로 잡았다. 내가 어릴 적에 다녔던 부북초등학교 교문길 300m 양쪽에 코스모스가 활짝 피었고, 교정 안에는 얼굴은 안보이지만 옅은 초록색 가운을 입은 자들이 많이 모여서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맞추어서 흥겹게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나 혼자서 점퍼를 입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로 헤집고 들어가려고 허둥대다가 잠이 깼다. 이상한 꿈이었다. 다시 잠을 잤다. 둘째날에도 똑 같은 꿈을 꾸었다. 어제보다 많이 허둥댄 탓에 온 몸에 식은땀이 쭉 났다. “참 이상하구나? 무슨 의미이지?” 잠시 고심하다가 다시 잠을 잤다. 셋째날에도 똑 같은 꿈을 꾸었다. 동일한 장소, 동일한 인물들, 동일한 어깨춤이 나타났다. 나는 더 열심히 헤집고 들어가려고 애를 쓰다가 잠에서 깨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하, 내가 교회를 안 나가서 이런 꿈을 꾸었구나.”라고 깨달았다.
그 다음날, 퇴근하면서 곧장 교회를 찾아갔다. 교역장께서는 화를 내셨다. “당신이 그 동안 신앙이 좋아서 제대를 하면 학생부장, 청년회장을 시켜서 교회부흥을 시키려고 했는데, 돈을 벌기에 바빠서 교회에도 안 나오니까 하늘이 몽시를 주신 것이지요. 청년회원들이 당신을 위해 특별히 조식금식을 하고 있어요. 몽시가 나타난 것은 조상의 공적이 있고, 식구들의 정성이 있어서 하늘이 살려주시는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알아서 잘 판단하세요.”
나는 다시 회개하였다. 참부모님에 대한 불신앙을 물리쳤고, 다시 뜻길을 가려고 재기하였다. ‘참부모님??’이 ‘참부모님!!’으로 전환되었다. 핏속에 끈적끈적한 엿처럼 엉겨 붙은 원죄의 잔상이 틈만 나면 나에게 불신앙을 불러일으켰고,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벗어나도록 유혹하였다. 나는 심기일전하여서 학생부장과 청년회장을 맡았다. 대학교에 복학을 하고 야간공민학교에 교사를 하면서 경제적 자립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주말에는 학생부장, 성일에는 청년회장으로서 활동을 하였다. 일주일이 학교 수업과 레포트 작성, 원리강의 준비, 설교 준비, 상담 등으로 금방 금방 지나갔다.
10. 축복 및 동원
대학교 3학년 때에 축복식이 있으니 서류를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망설였다. 아직 재학 중이고, 돈을 버는 입장이 아니어서 내 학비와 용돈을 채우기도 버거웠고, 또 대상이 임지를 가게 되면 생활비를 3만원씩 보내주어야 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친구 박종권과 같이 내 방에서 새벽까지 의논하였다. 결론은 대학 졸업하고 취업을 한 후에 축복을 받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잠시 잠이 들었는데, 참부모님께서 나타나셨다. 내가 부산역 앞 광장입구의 지하도 입구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참부모님 내외분께서 부산교구방향에서 내려오셨다. 축복식을 주관하는 예복을 입으시고 함께 손을 잡으시고 건너편 지하로를 통하여 이쪽으로 건너오셨다. 나는 반가워하였는데 참부모님께서는 나를 외면하시고 그냥 쭉 걸어가시더니 광장 한 가운데서 “꽃 사세요!”하면서 꽃을 팔면서 춤을 추는 어떤 아가씨로 다가가셔서 그녀를 꼭 안아주셨다.
나는 놀라서 후다닥 잠에서 깨어났다. 참부모님의 예복이 축복식장에서 입으시는 것이니까 “내가 이번에 축복식에 들어가야 되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내 될 여성은 춤을 잘 추는가보다.”라고 생각했다. 종권이를 깨워서 이번에 같이 축복을 받자고 하였다. 그런데 그 날이 서류 접수 마지막 날이었다. 미리 사진을 안 찍어서 서류에 붙일 사진이 없었다. 요즘이면 금방 사진 현상이 되지만, 그 당시는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나서 며칠 뒤에야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할 수없이 대학교 학생증 사진을 떼어서 축복서류에 붙였다. 그만큼 준비를 덜 갖춘 철부지 모습이었다.
내가 지나온 과거들을 돌아보면, 부족한 나 자신이었고, 순금(純金)•순은(純銀)•순백(純白)이 아니라 얼룩덜룩한 자화상이었다. “선과 악이 공존하며 치열한 싸움을 하는 세상에 사는 인간들의 모습도 얼룩덜룩하다.”(《말씀선집》 제41권, 25쪽)는 말씀이 내게 딱 맞았다. 깨닫고 보니 그런 나를 구원해주시려는 참부모님의 은혜 앞에서 나는 그저 감사하고 황송할 따름이었다.
청년회원들을 설득하여서 함께 수택리의 약혼식장에 갔다. 나는 국제축복결혼을 원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세계화 시대가 도래할 것이므로 아내가 외국인이면 외국어를 마스터 할 수 있고, 또 그 나라에 가면 숙식 해결에 기본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국제결혼은 쉽지 않았다. 국제결혼가정에 대한 특강이 있었고, 가정부장께서 “희망자는 일어서보라.”고 했다. 나도 일어섰다. 20여명이 채 안 된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갑자기 가정부장께서 “당신은 키가 작아서 안 되니까 앉아요.”라고 하였다. 나는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보통이 되고 작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다시 내 쪽을 가리키면서 “당신 왜 안 앉아? 앉으세요.” 나는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금 돌아보고 있는 사람, 당신 말이야, 앉으라구요.” 나는 앉았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나보다 키가 작은 사람도 국제결혼을 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나는 “국제결혼을 할 팔자가 따로 있나보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마침내 참아버님께서 등장하셨고, 초능력을 발휘하셔서 “너 나와, 너 나와. 나가서 만나봐.”하시면서 쑥쑥쑥 짝을 맺어주셨다. 한창 진행 중에 참아버님께서 나를 지목하시고 또 대상을 지목하시면서 “둘이 나가서 만나보라.”고 하셨다. 강단앞으로 나가서 경배를 드리고, 밖으로 나가서 대상을 만나보니까 한선무용단 출신이었다.
내 몽시대로 꽃춤을 추는 여성이었다. 대상이 확인되자, 나는 같이 올라온 다른 여성식구를 돕는데 열중하였다. 한 여성이 축복이 잘 안되어서 힘들어하며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하기에 청년회장으로서 그녀를 상담하면서 절대적으로 이번에 축복을 받아야 된다고 설득하면서 도왔다. 정작 대상과 얘기를 할 시간이 없었다. 수련소 근처를 데이트로 하면서 얘기도 나누고 식사도 하면 좋았을 것을 그럴 생각이 안 들었다. 오로지 포기하려는 그 여성 식구를 설득하여서 다시 약혼식장 안으로 들여보내는데 전력을 쏟았다. 다행히 잘 되어서 지금도 잘 살고 있다.
대구에 있는 처가에 가서 인사를 드렸다. 복귀된 기성축복가정이라서 기분이 좋았다. 장인 장모께서는 박정민권사의 인도로 교회를 나왔으며, 대구 초창기 개척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래서 아내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가족 전체가 교회출석하면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족이 한 마음으로 뜻길을 가는 모습이 나에게는 몹시 부러웠다. 특히 장모님께서는 우리가 동원되고 힘든 상황에 있었을 때에 많은 격려와 경제적인 도움을 주셨다.
부산으로 가서 우리 부모님께도 인사를 드렸다. 부모님께서는 좋아하셨다. 1982년 10월 14일, 6000쌍 축복결혼식이 끝나고 양가의 부모님을 주변 식당에 모시고 간단히 인사를 드렸다. 40일 성별 기간이 필요하고, 또 동원이 되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져 있어서 인사를 확대해서 드릴 수가 없었다.
11월 24일부터 동원령이 내렸다. 아내의 첫 임지는 홍성이었다. 겨울방학이 되자 홍성으로 찾아갔더니 내가 제일 먼저 방문한 신랑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만나기는 했으나 사랑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강둑을 산책하다가 헤어졌다. 교역장께서는 꼭 협회 지침을 지키라고 당부하셨다. 솔직히 청춘 남녀가 만나서 손도 잡지 못하고 좀 어색한 분위기에서 데이트를 했으므로 별로 재미는 없었다. 인간적인 욕구보다는 하늘의 지시를 먼저 지켜야하였다.
아내는 서울 구로교회로 다시 배정되었다. 그런데 교회 사정이 열악하여서 빌딩 계단 및 작은 공간을 구하여 바닥을 적당히 깔고서 20명이 같이 생활하였다. 게다가 천정에는 하수구 배관이 설치되었다. 밤이 되면 대소변 보고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꼬르륵 다 들렸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반찬도 단무지가 대부분이었다. “통일교인은 못 먹고 고생을 해야 된다. 그래야 역사적인 한이 탕감된다.”(《말씀선집》 제42권, 30쪽)고 하신 참부모님의 말씀대로 동원된 자들은 최저생활을 하였다. 아내는 전도활동 및 사업활동을 하여 많은 헌금을 하였고, 전국 7등을 하여 협회장상을 수상하였다. 그렇지만 여럿이 함께 사는 빈곤한 살림살이에 잘 먹지 못해서 아내가 많이 약해졌다. 건강하여 춤을 잘 추던 아내의 모습이 변했다. 안타까웠다.
나는 1984년 2월에 대학교 졸업 이후에 창원에서 현대그룹의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 당시는 퇴근하면 술을 마시는 분위기였다. 나는 그런 자리가 어색하고 힘들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근무하고, 억지로 동료들의 분위기를 따르고, 신입사원 기숙사에 오면 밤10시가 넘었다. 취침기도를 하다가 그대로 꼬부라진 채로 잠들기도 했다. 직장생활이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다.
12월 17일자로 남자들의 동원이 있었다. 나는 곧장 사표를 내고 동원령을 따랐다. 추운 날씨에 갑자기 회사를 사직하고, 아침 6시, 가방 하나들고서 무작정 서울로 간다는 나를 보면서 어머니는 걱정이 많으셨다. 결혼을 한 아들이, 멀쩡한 직장을 포기하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무작정 서울로 간다고 하니까 어머니는 이해가 안 되신 상태에서 안쓰러워서 내 두 팔만 붙잡으셨다. 어머니는 모정을 발휘하여서 나를 데리고 옷 가게로 갔다. 겨울이면 아침 6시가 새벽이다. 그 이른 시간에 집 가까이에 있는 시장 옷 가게에 가셔서 셔터문을 쾅쾅 때려서 주인을 일깨웠다. 주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어나서 점퍼를 하나 팔았다. 아마도 그 주인은 가게를 하면서 처음으로 추운 겨울 찬바람이 불어대는 새벽 6시에 옷을 팔았을 것이다. 제정신이라면 누가 새벽에 옷을 사러 오겠는가? 나도 명령을 따랐기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어머니도 덩달아서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옷을 사셨고, 가게 주인도 비정상적인 상항에서 옷 한 벌을 팔았다. 복귀섭리는 그렇게 얼떨결에 하늘의 명령을 따라가다 보면 진전이 된다.
결혼식을 한 신랑과 신부를 집을 떠나도록 동원시키는 것 자체가 이미 통상적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섰다. 성경을 보거나 참부모님이 진행해 오셨던 복귀섭리는 부름을 받은 인물이 제정신 상태에서가 아니라 비일상적, 비세상적. 비상식적, 비합리적인 경우가 많았다. 사탄이 주관하는 것들을 뒤집어서 창조본연의 모습으로 돌리는 것이 어찌 쉽게 되겠는가? 반대로 축복가정들을 동원시키신 참부모님과 하늘부모님의 심정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슬펐을까?
나는 어머니께서 사 주신 점퍼를 입고 서울행 열차를 탔다. 그 당시를 회고해 보면, 나는 아브라함과 같은 자세였다. 아브람은 75세에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하란에서 부자로서 잘 사는 아버지 데라의 집을 떠나서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오직 믿음으로 여호와의 지시대로 걸어갔다. 그가 절대복종의 자세를 가졌기에 한 인간 아브람이 ‘만백성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되었다(창세기12:1~9). 하늘의 명령에 절대복종하여서 비정상적이고 고생을 사서 하였던 그로부터 이스라엘백성이 형성되었고, 메시아 강림이 있게 되었다.
동원된 후, 수택리에서 이요한 목사께서 심정에서 솟아나는 전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목회자로서 자질을 함양하였다. 년말연시가 다가오면서 만물복귀도 하였다. 찹쌀 떡과 초코렛과 귤을 포장하여 들고서 가가호호 방문하였다. 그런 중에 협회에 선교교육원이 신설되었고, 김항제 원장(6천가정회 초대회장)께서 나를 청파동 사무실로 데리고 가셨다. 출가를 하면서 내 사연을 적은 것이 마음에 들어서 나를 발탁하셨다. 내 역할은 목회자들이 교육을 받을 때에 각종 준비를 하는 것과 《가정교회(Home Church)》라는 홍보지를 출간하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원고를 많이 읽고 교정하는 기술을 익혔다.
11. 신학 및 종교학 공부
김항제원장께서는 내가 신학공부를 하도록 기독교 목사에게 소개시켜 주셨다. 나는 인천 부평에 있는 장로교 전도사로서 일하면서 기독교신학대학원을 다녔다. 신분을 숨기고 신학공부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하루에 두세번은 통일교회를 욕하는 말을 들어야 하였다. 통일교인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그날로 일체 다 종료가 되어야 하였다.
1972년에 내가 입교할 때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보리이삭으로 오해한 것이 너무 창피하였고, 때가 되면 성경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보자고 결심했는데, 그것이 마침내 이뤄졌다. 나는 구약성경을 전공했다. 히브리어도 공부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유대인들의 장점을 연구하면서 흥미진진했다.
신학공부를 한 덕분에 수택리 통일신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하였고, 그것이 나중에 천안의 성화신학교를 거쳐서 선문대학교로 이어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때에 천안으로 이사를 와서 2021년 2월까지 선문대학교 교수로서 일했다. 천안 삼거리 근방, 현재 행정타운에서 34년간을 살아왔다. 이제는 천안이 내 고향이 되었다. 건강관리를 위하여 해동검도를 배웠고, 합기도를 배웠고, 테니스를 하였다. 덕분에 건강이 좋아졌다. 천안은 “하늘이 편안한 곳이다.”는 말 그대로 살기가 좋은 곳이다. 가뭄이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거의 없고, 도시와 시골의 전원풍경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살 수 있는 곳이다. 내 인생에서 은혜가 많은 고향이 되었다.
성화신학교 건축을 하던 공사 기간에 왔다. 수업하다가 바위를 깨기 위한 다이나마이트를 설치하고 폭파를 위한 사이렌이 울리면 모두 밖으로 나가서 저 멀리 떨어져야 하였다. 학생들은 정말 통일교회의 엘리트들이었고, 지금도 곳곳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학생들과 함께 10~15일간 국토순례를 하였다. 전국 명산과 섬을 찾아가서 텐트를 치고 도보행진을 많이 하였다. 성지 순례를 하거나 교회에 가서 봉사도 하였다. 고생도 했지만 짜릿한 추억도 많이 만들었다. 가능하다면 우리의 자녀들이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육체 단련과 정신력 강화 및 신앙심 고취에 좋을 것이다. 아산 선문대학교 건립과정에서 천안교회 식구들이 날마다 자정에 현재 학교 본관 뒤에 위치한 삼봉산 정상에 모여서 철야정성을 드린 추억이 있다. 정성을 모으는데 동참하신 식구들께 감사를 드린다.
박사과정은 종교학을 했다. 국내에서 두 군데에 신학박사과정을 도전하고 신청했다가 중단했다. 왜냐하면 교회 현장을 가진 기독교목사가 아니라서 학교 분위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종교학을 선택하여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장을 많이 다니면서 종교학 공부를 하였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종교는 이론과 함께 현장을 많이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터득했다. 지나고 보니 종교학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비가 많이 들어서 힘들었다. 자녀 양육에 바쁠 때에 내 공부를 하느라 가계지출을 과다하게 하였다. 힘든 상황에서 내조를 해 준 아내에게 감사한다.
참부모님이 바라신 세계통일 방안은 기독교 통일, 세계종교 통일, 무신론자 통일, 무신론과 유물론을 갖는 공산주의자 통일, 지옥해방의 순서이다. 따라서 세계종교통일을 위해서는 종교학 공부가 필요하다. 목회자나 식구들이 세계종교를 알아야 통일 및 천일국 안착에 기여할 것이다. 그래야 “불원간에 종말의 때가 도래하고, 많은 종교인들이 찾아올 때에 그들을 잘 설득하여서 축복가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참부모님의 예언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종교통일에 승리할 때에 천일국안착이 실현될 것이다.
같은 6000가정이면서, 제1대 회장을 지냈고, 각종 논문, 책 출판, 기관장 활동, 초교파 활동, 설교가 등으로서 명성을 가진 김항제 회장은 나에게는 참 좋은 분이었다. 참부모님께서 내 운명을 바꾸신 분이라면, 김회장은 내 운명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잡아주신 분이었다. 2022년 7월 4일, 75세로 성화하셨다. 더 일할 수 있는 연세인데, 2년간 암투병을 하다가 영계로 가셨다. 6000가정회 회장단의 추모기도회 때에 나는 과거를 회고하면서 많이 울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건강간리를 잘 하여서 반드시 천일국을 안착하여 하늘 앞에 봉헌해 드리고 나서 영계로 가자고 다짐하였다. 우리 6000가정 형제자매들 모두 건강하여서 20년 뒤에 축복60주년을 맞는 축복회혼식을 기념하자고 나는 강조를 한다.
선문대 교수로 근무하면서 천안 다문화가정협의회의 활동에 동참하였고, 주말에 청소년 상담 관련한 봉사활동을 자주 하였다. 그 실적을 인정받아서 2004년에 충남도지사 상을 수상하였다(제76911호). 2006년에는 봉사활동을 체험수기에서 도지자 상을 수상하였다(제4735호). 2010년에는 대전 법원에서 위촉한 범죄 경력 청소년을 상담 및 지도를 하여서 대전지방법원 표창장(제10-1-07호)을 받았다. 2013년에는 충남청소년진흥원 1388 청소년 지원단 자원봉사에 대한 실적을 인정받아서 한국청소년 상담 복지 개발원장 표창장(제2013-36호)을 수상하였다. 청소년들을 상담하고 지도하면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가정이 화목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녀들이 가출을 하고 일탈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봉사를 통하여 참가정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체험하였고, 참가정 확립이 참된 세상 건설의 초석임을 인지하였다. 2020년 10월 10일(천력8.24)에 천보가정 입적을 완료하였다(KR 01144).
2021년 2월 28일에 선문대학교를 은퇴하였다. 33년간 교직생활을 한 것을 인정받아서 <옥조근정훈장>(제109655)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참부모님과 하늘부모님께 먼저 봉정하면서 감사의 뜻을 봉헌하였다. 그 동안 논문을 54편 작성하였고, 16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2012년 참아버님 성화식 때에 세계일보에 인류문화사적 입장에서 글을 쓴 박정진 박사가 2014년에 《메시아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책을 출간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저런 제목으로 내가 책을 출간해야 하는데, 한 수를 놓쳤구나.” 나는 논문 원고를 열심히 작성하여서 은퇴하기 전인 2020년에 《재림메시아는 이미 오셨다》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였다. 일종의 세상을 향한 재림메시아 강림 선포를 내 나름으로 공식적으로 한 셈이다. 정년을 맞이하기 전에 출간하여서 참부모님께 덜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12. 앞으로 계획
첫째, 6000가정회 회장직 수행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작년 8월, 수원에 있는 딸 집에 외손자를 돌봐주러 갔다. 그런데 아침에 새벽기도를 하고나서 아주!라고 하려는 순간에 갑자기 참아버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제 정년을 하였고, 시간 여유가 있으니 봉사활동을 하라구!” 나는 후다닥 일어났다. “무슨 일이 주어지려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에 백한영 회장이 찾아왔다. 식사를 하면서 나에게 6000가정회 회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하였다. 여러 사람들에게 요청을 했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제안이 참아버님께서 지시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승락하였다.
그런데 회장을 맡고 나서 6000가정회 형제자매들의 내용을 파악하였다. 회장단 및 임원단을 조직하였다. 그런데 회장직을 맡을 수 있는 능력있는 분들이 많아 보였다. “그런데 왜 나에게 회장직이 주어졌을까?”라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고심해 보았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축복40주년을 맞이하여서 연합자서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논문을 작성하고 책을 출간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활용하여서 연합자서전 출판을 하려고 결심했다. 다행히 이길연 문화수석부회장이 선배가정들의 연합자서전을 출간한 경력이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자서전 내용을 매주 목요일 저녁에 특강을 실시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 각자가 살아 온 뜻길 인생에 큰 박수를 쳤다. 고통과 고난이 있었기에 영광스러운 것이다.
둘째, 천보가정 활동을 많이 하여서 참사랑공동체 확산에 기여할 것이다. 그리하여 천일국 안착을 앞당기는 실적을 만들 것이다. 전도는 남의 생명을 살리는 길이기 이전에 나와 우리 가정을 살리는 길이다. 전도로써 축복가정의 대중화를 실천해야 뜻길 완성을 위한 초석이 만들어진다.
셋째, 종교백과사전을 발간하고 싶다. 종교통일을 하려면 각 종교들의 주요 교리나 문화를 우리의 것과 비교하는 책이 필요하다. 조만간에 종말의 정점에서 여러종교인들이 대거 하늘부모님성회로 찾아와서 축복을 받기를 원할 것이다. 그럴 때에 목회자나 중심식구들이 여러 종교에 대한 지식을 갖고서 저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저들이 어색함을 느끼고 나가버릴 것이다. 우리가 먼저 타종교를 아는 만큼 낯선 다른 종교인과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된다. 학연(學緣), 지연(地緣), 취미(趣味) 등도 필요하지만, 종교 상호간의 이해가 깊을수록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여기에 우리 축복가정들을 중심하고 종연(宗緣)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넷째, 성약시대의 내용을 중심하고 구약과 신약의 성경 내용을 해석한 주석서를 발간하고 싶다. 성경의 방향은 재림메시아 강림 영접에서 클라이막스를 맞는다. 기독교인들이 우리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관을 극복하고, 미리 성약에 대해 기본 지식을 갖추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
다섯째, 3대가 같이 사는 축복대가족을 만들 것이다. 참부모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3대가 같이 살아야 어려서부터 온전한 인격체로서 성장할 수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하늘부모님을 대신한다. 손주들은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사랑을 담뿍 받으면서 자랄 때에 몸과 마음도 건강하고, 영인체 성장도 정상적이 된다. 모두가 행복한 천일국 백성이 된다.
딸과 아들이 축복가정을 이루고, 외손자와 친손녀가 태어나서 잘 자라고 있다. 할 수 있는 한 3대가 같이 사는 효과를 얻도록 신경을 쓸 것이다. 자주 만나서 환담을 나누면서 가족애를 증진시키고, 특히 손주들에게 3대가 같이 사는 기쁨을 체험시킬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안 계셨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단어를 인지하지만, 그 단어가 내포하는 정감이 넘치는 추억은 하나도 없다. 즉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단어는 나에게 무미건조한 단어였고, 흥감(興感)이 없는 막대기와 같은 어휘일 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둔 친구들이 매우 부러웠다. 이런 아쉬운 추억이 있어서 나는 손주들에게 잘 해주고 싶다.
여섯째, 그 동안 바쁘고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서 부부가 신혼여행도 제대로 못하였고, 삶을 즐기는 시간을 많이 못 가졌다. 앞으로 틈틈이 국내 및 해외여행도 하고 싶다. 가능하면 국내외 여행담을 책으로 저술하여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선물로 남기고 싶다.
일곱째, 나도 참부모님처럼 다른 사람의 운명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는 중심인물이 되고 싶다. 통일교회에 입교한 지 어느덧 50년이 되었고, 축복 40주년을 맞았다. 지나고 보니, 참부모님과 하늘부모님께서는 내 삶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되어 주셨고,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내 운명을 이끄셨고 바꾸어 주셨다. 앞으로 찬양과 찬미와 영광을 많이 돌리면서 효정의 실적을 많이 봉헌하는 충효의 자세로 살 것이다.
여덟째, 6000가정회 축복회혼식을 다 함께 맞이하고 싶다. 결혼동기인 여러 형제자매들과 같이 앞으로 20년 동안 화목하고 건강하고 재미있게 지내면서 함께 2042년에 축복회혼식의 건배를 높이 들 것이다. 아주!!
첫댓글 손기문님 댓글
예전에 교수님의 구약성서 강의를 들으면서 다방면에 해박하셔서 넉넉한 금수저의 길을 걸어 오신 분으로 생각 했었는데, 정작 교수님의 살아오신 삶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흙수저의 삶으로 눈물젖은 빵을 경험하신 인생경륜이 묻어 있는 힘든 삶을 사셨기 때문에 훌융하신 교수님이 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시대의 사도로서 귀감이 된 글 감동있게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 하십시요.^^
윤연숙님 댓글
조응태회장님의 자서전을 읽고 많이 감명깊었으며 배울 점도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
김성연님 댓글
6000가정 조응태회장님 존경합니다 ~ 박사님이고 교수님이시니 당연이 좋은 환경에서 전도되어 뜻앞에 충효의 자리에 있는줄알았는데~ 어릴적 누님의 헌신적 참사랑으로 보호함으로 살아 남으신 일 그러나 그누님이 지금 뵙수있는곳이 아닌곳에 계심이 마음이 아프네요 하여튼 어려움속에서 승리하신 삶에 박수를 보냅니다 ~~ 자서전에는 사도의 고뇌가 있고 불굴의 신앙이있어 감동입니다~~감사합니다 ♡
정혁순님 댓글
회장님 자서전 잘 읽었습니다. 성약시대 사도행전으로 손색이 없으시네요. 축복가정은 하늘이 찾아세웠다는것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승리하신 교수님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