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탐방(12)
*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슬픈 무덤이 모여 있는 곳(고양시 역사 탐방)일정 및 해설요점
* 탐방일정 : 굴씨 묘(명나라 궁녀) - 밀풍군(소현 세자 증손. 이인좌의 난)묘 - 경안군 묘역(소현 세자 3남) - 최영 장군 묘역 -성녕 대군묘역(태종4남) - 이성군 묘역(성종서9남))-경혜 공주 묘(단종누이)
*명나라 황실궁녀 굴씨묘(明皇室宮女 屈氏墓)
명황조 후기 궁녀 출신으로 성(姓)은 굴씨(屈氏)이다. 명나라 황실에서 사용하던 이름은 굴저(屈姐)이다. 1638년(인조16)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 세자가 청나라 예친 왕으로부터 귀국 허락을 받기에 이른다 그때 천주교 신자로 개종했던 소현 세자는 천주교 신자인 명 황조 5명의 환관과 4명의 궁녀를 데리고 귀국한다 이들 중 가장 세인의 입에 회자되던 이가 바로 굴저(굴씨)였다. 그녀는 원래 중국 소주(蘇州)지방의 양인(良人)출신의 딸이었다. 당시는 명나라 말기로 탐관오리들의 행패가 극에 달해있었다. 그녀는 내직 관리의 도움으로 장추궁(長秋宮)에 들어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황후였던 주 황후(周皇后)를 모시게 된다. 그러나 농민 반란군 이 자성(李自成)에 의해 자금성이 점령되고 황제와 황후가 자결하자 그녀도 함께 자결하고자했지만 황후의 만류로 궁궐에서 도망쳐 나와 민가에 숨어있었다 그녀는 결국 청나라 군사에게 발각되어 예친 왕에게 보내졌다 이때 그녀는 오랑캐를 유적(流賊:부랑배)이라 욕하고 반항하였다 차마 죽이지 못하고 심양에 있던 소현 세자에게 보냈다 당시 나이 22세였다 이후 귀국하는 소현 세자를 따라 조선으로 건너와서 대비인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를 모셨다가 후에 세자를 따라 향교방(鄕校坊:안국동 교동초교 근방)에 나가 살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세자가 죽자 아들 경안 군과 이어 어린 손자 임창 군을 보살피다 죽었는데 유언으로 “오랑캐는 나의 원수요 내 생전에 오랑캐의 멸망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었지만 행여 북벌하러 가는 군대가 있다면 내 두눈 부릅뜨고 지켜 볼 것이오 허니 내가 죽거든 서쪽 교외 길가에 묻어주오” 그녀의 간절한 소원에 따라 서쪽 교외인 고양시 대자동 간촌(間村)마을에 고이 묻어주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 70세였다 굴 씨는 비파(琵琶)를 잘 타고 명나라 황실에서 익혔던 결발법(結髮法:상투 트는 법)을 시범케 하여 본을 삼았다 또한 평소 새와 짐승을 잘 길들였는데 각기 신호가 있어서 재주를 부리게 하였다 지금은 소현 세자의 자손들이 근대에 비석을 세우고 돌보고 있다.
*밀풍 군(密豊君) 이 탄(李坦)묘
밀풍 군<숙종14년(1688)-영조5년(1729)>은 소현 세자(인조의 장남)의 세째 아들인 경안 군의 손자이며 임창 군의 아들이다 소현 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하자 인조는 왕권에 위협을 느껴 소현 세자를 독살하고 그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맏아들 경선 군과 둘째아들 경완 군은 그곳에서 죽고 경안 군만 혼자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밀풍 군은 소현 세자의 혈손이다 영조 4년(1728)소론인 이인좌등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할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밀풍 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는 말이 퍼지자 난이 평정된 뒤 자결하였다 영조는 1년 동안 밀풍 군을 심문 한번 하지 않은 채 감옥에 가두어 놓고는 홍치중등 측근 신하들의 주청이라는 형식을 빌려 죽여 버렸다 그 후 영조는 1755년(영조31)6월 밀풍 군의 처자식까지 죽이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권력유지에 장애라고 생각하여 죄도 없는 처자식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그 뒤 아들인 사도세자까지 뒤주 속에 가둬 죽이는 전대미문의 광기를 보여주었다.
*이 인좌의 난
이 인좌의 난은 조선 영조4년(1728)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반란이다 이 인좌, 정 희량 등이 주동이 되어 밀풍 군 탄(坦)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오명항의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 인좌를 비롯한 반란 주모자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밀풍 군 탄은 자결하였다.
*경안 군(慶安君) 이 회(李檜)묘역
경안 군 이 회(1644-1665)는 조선중기 왕족으로 소현 세자와 민 회빈 강씨의 3남이다 이름은회(檜) 초명은 석견(石堅)이다. 소현 세자의 아들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유일한 아들이었다. 1644년 심양 산해 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소현 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어머니 민 회빈 강씨는 1646년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사약을 받아 죽고 이후 두형 석철, 석린과 함께 4세의 어린 나이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한다 1650년(효종1) 강화도로 이배되었다가 1656년 석방되어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 후 1665년 온천에 목욕하러 갔다가 병이 나서 돌아온 후 갑자기 죽었다. 경안 군 묘 아래에는 장남 임창 군과 차남 임성 군 묘가 있다.
*가족관계(경안 군)
할아버지 : 인조 숙부 : 효종
아버지 : 소현 세자 어머니 : 민 회빈 강씨
첫째형 : 경선 군(석철) 둘째형 : 경완 군(석린)
부인 : 분성군부인(김해 허씨)
장남 : 임창 군 손자 : 밀풍 군 外 5명
차남 : 임성 군(백부 경선 군에게 출계했으나 소생 없이 요절)
*최 영(崔榮) 장군 묘역
최 영<1316년(충숙왕)-1388년(우왕14)> 장군은 평소 우직하고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했다. 오늘까지도 최 영이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은 그의 나이 16세 때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다. 무민(武愍) 최 영은 사헌규정(종6품)최 원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철원이다. 최 영은 젊은 시절부터 풍채가 당당하고 체력이 남보다 뛰어나 무예를 즐겼다. 1361년에는 개경까지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치고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고 반란을 평정하는 등 흔들리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는 역할을 했다. 1384년 문하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며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고 그 이북, 이서, 이동의 땅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개경에서 이 성계 일파에게 붙잡혔다. 고양, 마산, 충주등지에 유배되었다가 1388년에 개경에서 처형되어 이곳에 안장되었다. 이 성계는 조선을 세우고 나서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는데 그 무덤에 풀이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최 영 장군이 “내가 부정한 짓을 하지 않았으니 내 묘에는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유언을 했고 최 영 장군의 묘는 1970년 대까지 적묘(赤墓)였으나 호우로 인한 흙의 유실을 염려한 후손들이 흙과 잔디를 계속 갈아 줘서 1976년부터 풀이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봉분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2단의 호석을 두른 전형적인 고려 양식의 방형묘(方形墓)이며 최 영 장군 묘 위쪽에는 아버지 최 원직 묘가 있다.
*성녕 대군(誠寧大君) 이 종(李種) 묘역
성녕 대군 이종(1405-1418)은 조선태종 임금의 제4적자로 이름은 이 종이다 태종과 원경왕후가 39세의 늦은 나이로 본 막내 아들이기에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자랐다. 그러나 1418년(태종180 홍역에 걸려 14살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부인은 성 억의 딸이다. 후에 셋째 형 세종(충녕 대군)이 즉위 후 세종의 세째 아들 안평 대군이 양자로 들어 왔으나 1453년(단종1)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그해 10월 안평 대군 일가가 화를 입어 멸문되었다. 1459년(세조4)에 종부시(宗溥寺)에서 대군가가 대(代)가 끊기어 제사 봉행을 못하고 있으므로 효령 대군의 6남 원천 군(原川君)을 양자로 들여 봉사 하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종손이 일곱 번이나 끊겼다 딱하게 여긴 고종이 입직강관(정4품) 이 승보에게 명하여 대군의 후손을 찾게 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입직강관 이 승보의 농간으로 인하여 고종의 은전을 받지 못하고 가세가 계속 기울어 고양시 대자동에서 충청도 음성으로 하향까지 하였다 이후 16대손에 이르러 종손가에서 종사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특히 전주 이씨 효령 대군파 종회에서는 같은 종손으로 예우하고 있다.
*이성 군(利城君) 이 관(李慣)묘역
1489년(성종20)-1552년(명종7) 조선 9대왕 성종의 서자 9남이다 이름은 관(慣) 자는 공숙(公肅) 시호는 장평(章平) 어머니는 숙용(淑容)청송 심씨이다 1497년(연산 군3) 9세에 이성 군에 봉해졌다 사람됨이 총명하며 맡은 일을 잘 처리 하였으므로 왕자로서는 파격적으로 조정의 일을 처리하는 직책에 임용되었다. 문소전, 연은전, 사옹원등의 도제조를 역임하였다. 1545년(인종1) 선왕인 중종의 어용(御用)을 추화(追畵)할 때는 도제조가 되어 그림을 그렸고 왕의 종친의 집에 갔을 때 호종하면서 안양(安養:마음을 편하게 하고 쉬게 함)할 것을 진언하였다. 그해 명종이 즉위할 때는 대윤인 윤임을 탄핵하여 명종을 보위에 오르게 하는 공이 컸으므로 위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 경혜 공주(敬惠公主) 묘
경혜 공주(1436-1473)는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단종의 친누이이기도 하다. 경혜 공주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 문종은 즉위 전이었고 어머니 권씨는 세자의 후궁으로 품계는 종3품 양원이었다 그러나 경혜 공주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당시의 관습대로 재액을 피하기 위해 조 유례의 집에서 유모 백씨 손에서 컸다 경혜 공주는 미모가 굉장히 뛰어났다 고한다 1450년(세종32) 15세의 나이에 정 종(鄭悰)과 혼인이 결정되었다. 이후 문종의 즉위로 경혜 공주는 공주로 책봉되었고 문종은 딸의 살림집을 당시 대표적 부자 동네였던 양덕방 향교동(안국동 교동 초교 근방)에 차려주었다. 단종은 자주 향교동 경혜 공주의 집을 찾았고 계유정난이 있던 날 밤에도 경혜 공주의 집에서 자고 있었다 경혜 공주의 남편 정 종은 금성 대군 사건에 연루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경기도 양근으로 옮겨졌다 이후 정종은 승려 성탄등과 결탁해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거열형을 당하였다 당시 경혜 공주는 임신 중이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경혜 공주 또한 남편의 죄에 연좌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유배되어 순천의 관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혜 공주가 순천적소에서 아들을 낳자 세조 비 정희 왕후가 친히 양육을 하고 세조가 미수(眉壽)라 이름하였다 정 종은 영조 때 신원되어 의정부 영의정 영양부원군에 추증되었고 영월 장릉 장 판옥과 공주 동학사 숙모 전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헌민(獻愍)이다 묘는 실전(失傳)되어 경혜 공주 옆에 단(壇)이 설치되어 있다.
* 참고
(1)산길을 비롯하여 6km 정도 걷게 되니 필히 편한 신발(등산화)과 스틱을 준비하시면 좋겠습니다
(2)탐방지 주변에는 음식점이 없어서 늦은 점심(오후2시쯤)을 할 예정이니 떡, 빵, 다과 등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는 외숙모인 <정순왕후 송씨(단종비)>를 어머니 처럼 지근에서 모시었으며 사후에는 가문의 종산(현 사릉)에 유택을 조성하고 영조때 신원이 될 때까지 대대로 봉사하였다
아..
그랬군요
정말 모르는게 너무 많습니다
항상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