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딸' 보고 왔습니다.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에 초대자 명단에 제가 없어 당황했습니다.
극단 측에서는 이전에 초대자 명단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반납하신 분의
이름을 몰랐다면 어찌 했어야 하는지...
그래도 여러 번 확인을 하고 연극을 보러 갔기 때문에
반납한 분의 이름이 생각이 나더군요.
하지만 공연장에 들어가서 몇 분간은 극단 관계자가
찾아 올까봐 약간 불안했습니다. 제 이름을 다시 적고,
빨간 표시를 했거든요. 제가 또 워낙 소심한 터라....
초대자가 변경된 상태라면 반납하신 분의 이름도 명확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이 번에 알았습니다.
다시 초대 받아 간 경우는 처음이었거든요.
물론 초대 받은 연극이 이 번이 두 번째인 세내기랍니다.
우선 연극을 보기 전에 바리데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고 갔습니다.
극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더군요. 그리고 제목에 대한 의문 때문에 무가의 내용을 찾아
보게 되었습니다. 알고 있는 내용과 제목이 잘 연결이 안 돼서 찾아 보았는데 여전히
알 수 없는 제목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니와 같이 연극을 관람했는데 어머니는 처음에
'바람난 딸'로 알아들으시더군요.^^
어쨌든 약간의 의문점과 소심한 불안감을 가지고 극을 기다렸습니다. 의문점은 극을 보면서
풀렸고, 불안감도 극이 시작되면서 사라졌습니다.
극의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악기 연주가 인상 깊은 공연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에 선
아비가 오구를 만나는 대목이나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 놓는 길에 연주되는 타악기와
전통 악기들의 음률은 무엇인지 모를 음산한 분위기를 잘 말해주었습니다.
전통악기에 대한 식견이 짧아 어떤 악기가 연주되거나 배우들이 들고 등장하는 악기들이
정확하게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소리를 내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극의
흐름과 연결되어 극의 분위기를 잘 받쳐주었습니다.
무대 한 켠에서 대부분의 배경음악을 담당하시는 김재철님의 연주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몇 해 전에 우리 악기와 소리를 들려주는 '슬기둥'의 연주를 본 기억과 전혀 다른 또
다른 느낌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슬기둥의 연주는 우리의 악기가 가지고 있는
소박함과 함께 즐거운 울림을 준 연주로 아직도 기억이 됩니다. 거기서는 모든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던 원일이라는 젊은 청년이 우리 나라의 큰 행사에서 이제는 우리 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음악의 거목이 되었더군요. 슬기둥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군요.
슬기둥이 전통 악기를 가지고 우리의 소박한 삶을 보여주었다면 바람의 딸의 배경 음악에
사용된 악기들의 어울림은 이와는 전혀 다른 죽음 자체의 색깔이나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곳, 족음과 만나는 순간, 이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잘 말해주는 소리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연극 중간 중간 보여주는 배우들의 몸동작은 전통악기의 소리와 잘 어울려 있었습니다.
춤추는 배우들이 들고 나온 각각의 악기들도 극의 흐름과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인 바리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모습에서 저는 오히려 운명이란
거역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꼈다기보다는 바리가 오히려 그들의 죽음에 관여하여
그들의 죽음을 참혹하거나, 또는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절정은 바로 창녀의 아버지인 중독자의 죽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대로 어쩌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엮어진 아버지와 딸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리가 그 중간에서 죽음을 도와주는 결과가 되었으니 중독자의 삶을 바꾸어 놓은 것이 되었
으니까요. 또한 눈 먼 노파도 물론 거리에서 동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을지 몰라도 바리가
돈을 주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비참하게 안타까워하면서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형수 또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억울함을 가슴에 묻고 죽었을 것인데
진실을 알게 된 후로 그의 죽음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아내를 위해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진실의 은폐가 그렇게 고귀할 수 있다니.. 그의 죽음은 숭고하기까지 하더군요.
청년 또한 바리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한 일을 돌이키게 되고, 바리의 손에 죽게되지요.
누나를 찾아나선 소년 또한 바리에 의해서 처음에 죽었다가, 다시 생명을 찾게 되잖아요.
아비가 오구 대왕이 되는 것도 바리의 사고와 행동이 가져온 결과와 무관하지 않지요.
사실 시작은 죽음을 삶으로 되돌리고 운명을 막으려 했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들을
어떻게 든 구하고 아비도 구하려고 했지만 바리의 생각대로 결과가 따라 주지는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서 죽음을 생각할 때도 삶을 생각할 때도 있지만
그것을 누군가 관여하여 바꾸려 한다면 오히려 우리의 삶의 길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띨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운명이라는 것이 결과만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과정도 바로 운명이니까요. 바리가 바꾸려고 했던 것은 죽음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바리는 살아서도 죽어있는, 죽어서도 살아있는 모순된 모습을 하고 있고, 우리가
만질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는 바람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에서 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라는 과정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연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