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병의 진급은 간혹 처벌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날자만 차면 저절로 되는 법이다. 더욱이 돈을 미군이 주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진급을 시키는 원칙이 불문율이었다. 그래서 월남을 다녀오면 무조건 병장이었다. 그런데 내가 귀국 후 육군 본부 중앙경리단에 월급을 수령하러 갔더니 담당자가 “뭐? 일병! 일병으로 갔다가 일병으로 돌아오다니 천연기념물이네”라고 했다. 즉 파월되었던 34만명의 한국군중 일병으로 갔다가 일병으로 귀국한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눈물 없이도 들을 수 있는 사연은 이렇다. 일병에서 상병으로 진급할 달에 사단 본부 중대 서무계가 진급을 하면 봉급에서 오른 부분을 부관부 사병계에게 주어야 한다고 정보를 제공(?) 했다. 내가 그렇게 못 하겠다고 했더니 서무계는 "너 그러면 끝까지 진급 못해." 라고 했다. 설마 그럴 수가 있을까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우리 부대에서만 있는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백마 사단 본부 중대에서 진급하는 첫달치 월금의 증가된 부분을 떼어 먹는 관행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중대 서무계는 나와 친한 믿을만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이상하지 않은 것은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돈 때문이었다. 월남전은 한국군에게 돈 맛을 알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군대에 부패가 있었지만 먹을 것이 없었는데 남의 돈으로 싸우는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먹을 것이 많아졌으니 완전 먹자판이 안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월급이 오르지 않아 손해를 볼지언정 이런 흐름에 다라 흘러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진급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일이지만 부패에 협조하지 않음으로 소극적 저항을 했던 것은 나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주월 한국군에는 실제로 일병이 없어 상병이나 병장뿐이어서 나도 상병 계급장을 달고 다녔고 군종사병으로서 다른 중대원들과 같이 내무반에서 생활을 하지 않고 다른 막사에서 지냈기 때문에 실제 생활에는 불편이 없었다.
하루는 정훈교육이 있으니 각 참모부의 필수요원만 남기고 전원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좀처럼 참모부 병력을 동원하는 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본국에서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면서 유신헌법의 정당성에 대한 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정훈대장이 장교, 하사관, 사병의 3개 그룹으로 나누어 연속적으로 교육을 했는데 유인물로 나누어준 헌법 개정안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흩어 보아도 대통령의 임기제한 규정이 없는 것이었다. 세상에 뭐 이런 헌법이 있나 싶었다. 순간 입대하기 전 제6대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씨가 이번 선거가 국민의 손으로 뽑는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고 이번 선거에 실패하면 총통제가 될 것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실 베트남 파병 이전까지는 ‘제2의 5·16’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쿠데타 가능성이 계속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파병을 계기로 박정희는 막대한 자금을 획득하고, 군부 세력의 강화와 군부 통제력 강화를 달성했다. 군부 내에서 베트남 참전 유공자 중심으로 자신의 친위 세력이 될 만한 ‘하나회’ 등의 장교 집단을 구축했다.
‘아!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영원히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돌아갈 다리가 끊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더욱이 일개 사병으로서 무슨 길이 있을 수 있겠나?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않아 철수를 해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터인데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는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가 없는 형편에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역만리 월남땅, 그것도 군대에서 누구와 터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참으로 답답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하루는 PX에서 항상 외톨이로 맥주를 홀짝 홀짝 마시고 있는 두꺼비같이 생긴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사단 사령부 병력은 대부분이 행정병이라서 비교적 차림이 깨끗한 법인데 이 녀석은 군복도 꾀죄죄하고 어벙벙한 것이 한 눈에 척 봐도 고문관처럼 보였다. 내가 접근해서 말을 붙여도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나는 그런 모습이 더 재미가 있어서 자꾸 말을 시켜 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정말 놀란 것은 도수가 많이 나가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이 대학물을 먹었을 것 같아 보이기에 장난삼아 심드렁하게 “어느 학교 다니다 왔냐?”라고 물으니까 퉁명스럽게 “서울 상대”라고 하면서 우습다는 듯이 나를 흘겨보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의 처지가 이해가 되었다. ‘군대는 보직’이라는데 서울 상대씩이나 다니던 녀석이 공병대 작업병으로 근무하는 것이 전혀 조합이 안 맞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신 상병은 나에 비하면 비사교적인 타입이어서 스스로 왕따를 자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멋대가리 없던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가 슬슬 보따리를 풀어 놓기 시작하고 보니 3년 굶은 과부가 꼭 홀애비 만난 꼴이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그런 신 상병이 신수가 훤해져서 나타났다. 이게 웬 조화인가 했더니 뒤늦게나마 가방끈을 인정받아 사단의 건물수리 용역을 맡고 있던 빈넬이라는 필리핀 회사(당시에는 필리핀이 우리 보다 형편이 나아서 부대내 용역을 필리핀 회사에서 맏았었다.)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자리는 사병들이 부러워하는 사단에서 단 두 명밖에 없는 자리였다. 가방끈이 보장하는 터에 마침 공병대에 근무하다 보니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월남에 있던 한국군 중에서 사고를 내고 간혹 캄보디아로 도망을 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캄보디아는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일단 캄보디아로 가면 제3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어느 부대의 경리 장교가 부대의 월급을 수령해 오다가 운전병과 경계병을 살해하고 캄보디아로 튀었다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작심을 하고 신 상병이 판단력이 흐려질 정도로 술을 먹인 다음에 나는 앞으로 기회를 보아 캄보디아로 도망갈 생각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만일에 신 상병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술기운에 했던 이야기로 돌릴 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신 상병은 대단히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자기는 용기가 없어서 같이 가지는 못하겠지만 적극적으로 도와는 주겠다고 했다. 사실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에 대하여 애정도 없었었고 개인적으로도 남한에 남아 있는 가족이나 친지에 대하여 부담을 느낄 일이 전혀 없었던 나와는 달리 경남고에 서울상대 출신인 신 상병이야 한국을 등질 필요가 없었다.
일단 동지가 생겼으니 일이 빨리 진행되었다. 우리 같은 사병들이 캄보디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헬기로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내 개인 공간이 전혀 없는 내무반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 회사로 파견을 나가 나보다 행동이 자유스럽고 물건을 보관할 공간이 있는 신 상병이 당분간 정글에서 생활할 수 있는 물품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헬기를 어떻게 타느냐 하는 것이었지만 오래 전부터 꿍꿍이가 있었다. 한국군은 헬기가 없었고 사단에 미군 헬기 중대가 파견 나와서 사단의 운송을 책임지고 있었다. 백마 사단 사령부는 모든 직할대가 함께 있기 때문에 남산만큼 넓었다. 피터슨이라는 미군 헬기 조종사가 저녁 마다 조깅을 하다가 사단 교회가 있는 언덕에서 돌아갔다. 교회에 자주 갔던 나는 그 동안 그와 친해졌고. 전략적으로 신상병과 그의 막사에 자주 놀러 갔다. 피터슨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신 상병이 제대 후 곧 미국 유학을 갈 계획이라고 꾸며댔다.
나는 피터슨이 팬티 바람의 조깅 중에 만나서 처음부터 이름을 불렀지만 신상병과는 군복을 입고 막사에서 만났으니 처음에 만났을 때 자연히 신 상병은 말끝마다 “sir"를 붙였더니. 피터슨은 그러지 말고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우리 편에서 생각할 때 상대는 미군 중위고 우리는 미군의 눈으로 볼 때는 보잘 것 없는 한국군 사병들이다. 그러나 미군은 업무를 떠나서는 계급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문화의 영향이었던지 피터슨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대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피터슨의 비위를 잘 맞춰서 헬기를 태워 달라고 해서 일단 뜨기만 하면 사정을 해보고 안 되면 할 수 없이 총으로 위협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가능한 한 미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한국의 정치적 상항이 급변해서 나는 아무래도 귀국하면 감옥에 갈지 모르겠다고 연막을 폈다. 신 사병이 옆에서 정말로 크게 걱정하는 척하는 연기를 했더니 처음에는 무관심하던 피터슨이 슬슬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피터슨이 나트랑에 나가고 싶으면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사병인 내 처지가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했지만 다른 군인이 타지 않고 피터슨이 단독 비행을 하는 기회를 노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디에 떨어지나 일주일 정도는 버텨야 하기 때문에 더블백 안에는 레이션을 쑤셔 넣을 수 있을 만큼 쑤셔 넣었다. 혹시 피터슨이 물건이 가득 든 더블 백을 보고 물으면 인도 상점에 팔 레이션이라고 하기로 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2 주 후에 한국군 업무가 아니고 미군의 업무로 나트랑 공항에 단독으로 갈 일이 있단다. 나트랑까지는 헬기로 30분 밖에 안 걸린다. 30분 안에 결판이 나야 한다. 국경 너머 아무 마을이나 내려달라고 사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짧은 시간 안에 시끄러운 헬기 안에서 영어로 피터슨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 하는 것을 자면서도 생각 했다. 최악의 경우 피터슨을 총으로 위협해야만 할 경우도 상상하기도 괴롭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D 데이를 사흘 앞두고 갑자기 신 상병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모래 원대복귀 하란다. 부대가 곧 철수할 모양이다.”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신 상병이 원대복귀 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탈출 작전은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을 신 상병이 가지고 있는데 신 상병이 사라진다니 나는 기가 막혀 있는데 신 상병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도 안 쓰고
“그런데 큰일 났어. 나 총을 잃어버렸어.”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내 문제 때문에 멍하고 있다가 그 소리에 정신이 들어
“뭐야? 야! 이 쌍놈의 새끼야! 너 군인 맞아?”
“글쎄 이 회사에서 총을 쓸 일이 없으니까 어디다 처박아 두었는데 도저히 몬 찾겠다.”
“뭐 이런 정신없는 새끼가 있나? 할 수 없다. 나트랑에 나가면 살 수야 있겠지만 하루 밖에 시간이 없는데 나갈 수도 없고 피터슨에게 부탁해 보자.”
우리는 허겁지검 피터슨에게로 달려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최대한으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부탁을 했다. 멍청한 우방군인 국군이 총을 구해달라니 피터슨도 난감해 했지만 '한미우호 방위조약'의 정신에 입각하여(?) “Stupid!"를 연발 하면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디서 M16 소총 한 정을 구해왔다. 역시 미군은 부자여서 그까짓 총 한 정 정도 가지고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피터슨에게 감사 감사하면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총을 얻어 들고 돌아온 신 상병으로서는 지옥문 앞에서 되돌아온 기분이었겠지만 나로선 정말로 기분이 씁쓸했다. 완전히 "원님 지나가려고 길 닦아 놓았더니 거지가 먼저 지나간다." 는 속담 꼴이었다. 하여간에 캄보디아를 가기 위해 헬기를 얻어 타려고 그 동안 피터슨에게 온갖 정성을 기울였는데 결과적으로 신 상병의 목숨을 건진 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히 무모하고 서툰 계획이었다. 만일에 내 계획대로 헬기를 탔더라도 피터슨이 국경을 넘었다며 월남 땅 아무 곳에나 내려놓으면 나는 도로 잡혀 올 수밖에 없었다. 보이는 국경이 없기 때문에 항공 지리를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마 계획했던 대로 되었다면 지금쯤 캄보디아 어느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청룡부대 철수 이후 육군 사단의 철수 계획은 1972년 6월에서 12월로, 그리고 다시 그다음 해로 계속 연기되었다. 결국은 유신 선포 한달 전인 1972년 9월에 1973년 여름까지 한국군 전체가 철수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일단 철수 명령이 떨어지니까 부대가 갑자기 정신없이 돌아갔다. 신 상병은 공병대로 원대 복귀가 되고 나는 밤낮 없이 진행되는 철수 준비 작업 때문에 우리는 그 후 만나보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