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목사님
(나 2:9)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원어중심 성경강의 나훔 35 케리, 기구 라는 제목으로 말씀나누겠습니다.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라고 할 때
‘저축한 것’은 ‘테쿠나’라고 했죠, ‘테쿠나’는 ‘배열, 준비’의 의미였고 나훔에서 나오는 의미는 ‘쌓은 것, 그리고 쌓은 것을 ‘모아 놓은 것’이라는 의미였고요, 그래서
(마 6:20-21)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라고 했는데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데사우로스’, ‘보물’ 그걸 쌓고 축적하는데 그게 보물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열심히 쌓으면, 그러면 땅이 될 수도 있고 하늘이 될 수도 있다라고 했죠, 하늘의 진리라는 보물을 열심히 쌓아서 저축해서 하늘이 되는 거라고 했죠. 내가 그 진리의 보물을 담아놓는 하늘이 되는 거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이 된 내 안에 담고 잘 간직하면, 그게 바로 하늘에 쌓여 있는 보물이 되고, 하늘과 보물이 하나가 되고, 내가 하늘 되고 보물 되는 일이라고 했죠, 근데 이 하늘의 보물은 감추어져 있죠.
그래서 그걸 찾아야 되는데 찾는 방법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찾을 수 있을까요? 그 감추어진 하늘의 보물이 어떻게 찾아지지요? 마태복음 7장 7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마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렇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이 성령 주신다’고 하시죠, 그 성령이 하늘의 보물인 거죠, 진리란 말이에요. 진리를 우리가 아는 것을, 그 ‘보물을 찾는다’라고 하는 거예요. 성도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가 돼서 하늘의 보물, 성령, 진리를, 얻는 자가 되는 거죠.
‘두드린다’는 말은 ‘크루오’예요, ‘두드려서 죽인다’는 거예요, ‘때려서 죽인다’는 거예요, 문이라는 말은 없어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거예요. 반석이 맞아서 죽고, 성령이, 성령의 생수가 나오는 것처럼, 주님이 죽고 그리스도로 오시는 거죠. 히브리서 10장 19절 합독하시겠습니다.
(히 10:19-20)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육체가 찢어지는 거죠, 주님이 죽으시는 일인 거예요. 그렇게 주님이 죽으심으로 해서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 진리를 온전하게 알 수 있다라고 하는 거죠.
휘장은 열폭이죠, 열폭, 열의 계명이란 말이에요, 말씀이란 말이죠. 말씀으로 오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거예요, 그렇게 주님이 죽어 주시지 않으면 그러면 우리는 절대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말씀을 깨닫는 것은 주님이 스스로 죽어 주신 그러한 일인 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죽인 죄인’이라는 그 자각을 우리로부터 받아내시는 거죠. 그게 ‘자기 부인의 죽음’이란 말이죠. 그걸 깨닫게 해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율법으로서의 예수, 그 행동 강령으로서의, 성경이 나에게서 삭제가 되는 거죠, 이걸 ‘두드린다’라고 하는 거예요. 창세기 43장 16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창 43:16)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지난 시간에 한 구절이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테바흐’ ‘도살’의 짐승을 ‘타바흐’, ‘도살하라’. 이게 ‘쿤’, ‘준비다’라고 하는 거죠, ‘준비고, ‘확정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축한 것, 쌓은 것, 이 테쿠나잖아요. 테쿠나라는 단어 자체가 ‘쿤’이라는 글자에서 온 거거든요, 그러니까 준비하는 것은, 쿤의 의미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거, 이것이 우리의 안에 쌓이는 것이고, 보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죠, 이 진리가. 창세기 22장 13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창 22:13)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 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준비한다’라고 하죠. 물론 의미는 준비한다지만 이 ‘준비한다’는 말은 ‘라아’라는 글자예요, ‘라아’, ‘본다’라는 뜻입니다. 근데 이걸 여호와 이레 해서 준비한 하나님으로 우리가 이해하기도 하는데, 보시는 하나님이에요, 우리를 바라보시고 지켜보시는 하나님인 거죠.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거죠. ‘오늘날까지’ ‘하욤’이에요, 하욤 ‘그 날’이죠, ‘빛이 비치는 때’, 그때의 ‘여호와의 산’, ‘하르’, ‘성전’이니까 우리 안에, 우리 안에 ‘라아’, ‘본다’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르기를’이라고 할 때는 이것도 ‘아마르’고요, 니팔 미완료형이에요, 그래서 ‘진리로 말해진다’라고 하는 거죠. 이렇게 하나님의 산에서, 성전에서, 성전은 우리예요, 우리 안에서 이렇게 준비된다라고 하는 거죠.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아브라함이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하였는데 진리로 말해지기를 그날 그가 여호와의 산에서 보일 것이다라고,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서, 그는 양이잖아요, 양이고 주님이란 말이죠. 주님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보게 하실 것이다라고 하는 거죠, 라아. ‘호라오’죠, ‘진리로 깨닫는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욤에, 참빛을 받고 진리를 깨닫는 그때에,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라고 하는 거죠.
‘그 땅 이름은 여호와 이레라’고 했는데 그 땅, 땅이라는 말이 ‘마콤’이에요, ‘서는 것, 서는 곳’이죠, 그런 의미죠, 단어 자체는, 그러니까 서는 곳, 서는 것은, 십자가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죽는 십자가가 내 안에 선다라고 하는 거죠. 이렇게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된다’는 의미는, ‘내 안에 준비되고 깨닫게 되는 그 일이 바로 십자가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준비되는 거는 내 안의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거죠, 내 안에 십자가가 준비 되고 그것이 하나님이 깨닫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 자가 된다라고 하는 거예요. 본문으로 가서요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아름다움은 ‘헤므다’라고 해요 이게 ‘갈망’이라는 뜻이 있고, 그리고 ‘바람직한, 귀한’, 이게 형용사도 되고 명사도 되는 거죠. 그리고 기구, 기구는 ‘케리’, ‘기구’라고도 하고 ‘용기, 그릇’이라고도 하는 거죠.
그리고 풍부하다는 ‘카보드’예요, ‘풍부’ 또 ‘영광’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출 11:2)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라고 해요
은금 패물, ‘은’은 ‘케세프’고, ‘금’은 ‘자하브’고 그리고 ‘폐물’이라는 말이 이게 ‘케리’에요. 은은 케세프고 금은 자하브고 패물이라는 말이 케리인데, 이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라고 하니까 은과 금과 패물, 이렇게 보이는데 이게 그 케리 케세프, 케리 케세프는 은 그릇이죠, 은폐물, 은 기구, 그리고 케리 자하브 금 폐물, 금 기구, 금 그릇이 되는 거죠, 그걸 ‘구하라’고 하는 거예요. 은은 주님을 가리키죠, 속전. 그리고 금은 성령을 뜻하잖아요. 그러니까 은금 패물이라고 하면은 그 케리가 은과 금과 별개의 것으로 보이지만은 여기서 지금 은폐물, 금폐물이라고 하면은 지금 케리라는 게 예수 그리스도, 그 속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성령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된다라는 거를 이 구절로 알 수가 있죠. 그러니까 케리의 의미가 뭔가 좀 더 분명하게 이해가 되는 그런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창세기 42장 24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창 42:24-25)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라고 해요. ‘떠나간다’는 말은 ‘사바브’예요, 사바브는 ‘돌다’라는 뜻이에요. ‘주위를 돌다, 둘러싸다’ 이런 의미예요. 그러니까 떠난 게 아니에요, 주위에 있는 거예요, 주위에서 둘러싼 거예요. 그리고 ‘바카’ 우는 거예요, 심하게 우는 거죠, 매우 ‘비탄하고, 애통하고’ 그래서 ‘통곡하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죠. 사바브 돈다고 했는데
(창2: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라고 하는데
‘둘렀으며’가 ‘사바브’예요. 에덴은 우리잖아요, 우리 안에 보좌가 있고, 그 보좌에서 진리에 생수가 흘러나오는데 그 생수가 네 강으로 흐른다고 했죠. 첫째 강이 비손인데, ‘비손’은 ‘쏟아져 나오는 물, 넘쳐 흐름’의 의미라고 했어요, 생수가 흘러넘치는 거예요. 그게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다라고 하는데, 자하브 금이 있는 하윌라,‘하윌라’ 라는 말은 ‘모래 땅’이라는 뜻이에요, 모래 땅, 그러니까 하윌라는 우리를 가리키는 거죠, 온 땅이니까 온통 모래인 우리, 모래라는 거는 반석을 조각조각 낸 거잖아요, 율법이란 말이에요. 모든 그 모래 땅에 근데 뭐가 있대요? 금이 있고, 성령이 있고, 넘치는 그 물, 비손, 진리의 말씀이 사바브, 둘렀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은혜로 우리를 감싸신 거예요. 조각목에 금을 입히신 것과 같은 일인 거죠. 이게 에덴이란 말이에요, 천국이란 말이죠.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일을 보여주신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요셉이 형제들을 둘러싸고 운 거예요. 그러니까 울면 어떻게 돼요? 눈물이 나죠, 예, 생수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비손이 하윌라 온 땅을 둘러쌌다라는 것과 같은 일인 거예요. 생수가 그 둘러싼 거예요, 형제들을 둘러싸고 생수가 흐르는 거죠, 형제는 우리잖아요. 주님이 반석이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죠, 물이 언제 나와요? 지팡이에 맞아서 깨질 때 나오죠, 지팡이, 십자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그때 반석이 깨지고 물, 성령, 진리의 생수가, 비손이 하윌라 땅인 우리에게 온통 흘러넘치는 거죠.
그러니까 요셉이 운 거는, 주님이 십자가 죽음 죽으셨다, 이걸 또 가르쳐 주시는 거고 또 그리스도로 다시 오셔서 진리의 말씀을 주는 일을 알려주는, 미리 알려주는 그런 일이기도 하죠. 그래서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로 다시 오셨다’라고, 죽고 ‘다시 오셨다’, ‘슈브’란 말이에요, ‘그들과 말하다가’ 이렇게 다시 오신 거에요. 재림이잖아요,
재림은 주님이 구름 타고 하늘에서 오시는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진리가 깨달아지는 거, 그게 그리스도, 예수가 죽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시는 일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진리가 깨달아지는 거, 그게 재림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재림은 우리 안에서 지금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과 말한다 ‘다바르’, ‘말했다’라고 하는데요, 피엘형이에요, 강조형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다, 반드시 주신다라고 하는 거죠.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앞에서 결박하고'. 지난 시간에 시므온에 대한 공부를 했었죠. 주석을 보면은 시므온 끌어낸 이유가 나름대로 다들 해석이 돼 있는데 볼모로 지금 잡히게 되잖아요. 흔히 뭐라고 하냐면 시므온이 둘째 아들이잖아요, 그래서 르우벤을 뺀 거는 르우벤이 요셉을 살려주려고 했다, 구덩이 들어갈 때, 그때 요셉을 살려주자는게 르우벤이니까 르우벤은 빼고 나면은 시므온이 첫째다, 그래서 시므온이 택해진 거다. 그리고 세겜 족속을 살육할 때 그때 앞장선 게 레위와 시므온이다, 그래서 시므온이 뭔가 죄가 많기 때문에 그래서 붙잡힌 거다. 이렇게 주석들은 해석을 하는 거죠.
그렇지만 우리 지난 시간에 말씀을 나눴지만은 ‘들음’이라고 했잖아요, 들음. 들을 귀 없는 우리의 그 들음을 주님이 차압해 주시는 거, 그게 구속의 은혜죠. 그걸 가르쳐 주시는 장면인 거고, 그래서 끌어내어라고 하는데 이게 죄인을 취급하는 것 같지만 ‘라까흐’, ‘취한다’는 거에요, 이게 아내로 취한다라고 할 때, 그때 쓰는 말이 라까흐 잖아요. 취해서, 그들의 ‘눈앞에서 결박하고’라고 하는데 이게 ‘눈’은 ‘아인’이에요, 여기에 ‘레’라는 전치사가 들어 있어요, 앞에. 그러니까 ‘눈을 위하여’, ‘그들의 눈을 위하여 결박한다’라고 하는 거예요. 눈앞에서 결박하는 게 아니라, 레 전치사가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아인’이라는 말, ‘눈’은 ‘진리’를 뜻한다고 했잖아요, ‘샘’이고 ‘눈’이고 이런 뜻이죠. ‘샘’ 자체가 샘물 나오는 거, 그러니까 진리를 뜻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들의 진리를 위하여 ‘아사르’, ‘결박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진리를 위해서 우리의 듣지 못하는 그 들음을 결박했다라고 하는 거죠, 우리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명하여’, ‘차와’, 차와에서 ‘미츠와’가 나오죠, ‘계명’이에요. 그러니까 말씀하시는게 계명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말씀을 주시는 거죠, 그 말씀을 주는게 뭐냐면은 곡물, ‘곡물’은 ‘바르’라고 하는데 ‘양식’이잖아요. 생명의 양식, 말씀을 그릇에 케리, 케리에 가득 채운다는 ‘말레’, ‘가득 차게, 충만하게’ 그러니까 양식을 그릇에 가득 채운다의 의미는, 그릇은 그렇죠, 우리 안에 말씀을 가득 채우는 거죠. 이게 지금 양식을 케리에 채우는 건 사실은 말이 안 되거든요. 뒤에 나오지만은 돈은 자루에 채워요, 양식은 곡식은 자루에 담는 거지, 그릇에 담는게 아니잖아요, 별로 담지도 못해요, 얼마. 그러니까 이 케리에 담는다, 굳이 이렇게 쓴 거는, 우리 안에 케리는 성전 이야기하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결국. 우리 안에 그 양식을 생명의 양식 말씀을 가득 채운다라고 하는 거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돈’, ‘케세프’, 케세프는 자루에, ‘자루’라는 말은 ‘사크’라고 해요. 근데 ‘그의 자루’라고 지금 번역이 돼 있죠, 이거 잘 된 번역이에요. 근데 우리가 느낄 때는 형제들의 자루에 돈을 넣은 것 같잖아요, 그렇지만은 ‘그의 자루’라고 한단 말이에요, 단수예요. 그러면은 이게 그가 누구겠어요? 이거는 형제들이 아니라 요셉이란 말이에요, 그는 요셉의 자루, 요셉이고, 그의 자루는 요셉의 자루인 거예요.
요셉은 주님의 모형이란 말이에요. 근데 자루를 뜻하는 ‘사크’가 뭐냐면 이게 자루면서 ‘굵은 베옷’을 이야기해요. 굵은 베옷은 초상 났을 때 입는 거죠, 그러니까 은을 베옷에 넣었다는 거예요. 속전이신 주님이 지금 베옷에 들어간 거죠, 주님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베옷을 입었는데 그게 속전이 들어 갔으니까, 속전이 베옷에 들어갔으니까, 주님이 죽는다라는 그 의미가 또 담겨 있는 거죠, 그렇게 케리 안에 양식을 담고 그리고 속전 대신 주님이 죽으시는 것, 이게 계명이란 말이죠. 말씀을 주시는데, 명하시는데, 차와하시는데,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계명으로 들리게 되는 거예요. 계명은 하라, 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렇게 명령 형식으로 주시지만 전부 구속의 은혜가 담겨 있는 그런 말씀인 거죠.
(창45:20)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에 좋은 것이 너희 것임니라
이것도 요셉이 한 말이죠. ‘너희의 기구’, 케리는 성전이라고 했어요,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그러니까 너희의 기구는 옛 사람의 성전이죠, 율법의 성전이 되는 거죠. 너희 눈, 진리의 눈이죠, 아인. 아끼지 말라는 게 뭐냐면은 너희 눈에 아끼지 말라 이렇게 돼 있어요, 눈이란 말이 번역에서는 없는데 눈이 있어요. 그러니까 진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진리를 너희 그 율법에 대해서 ‘후스’ 아끼지 말라라는 말은 ‘불쌍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라는 뜻이에요, ‘측은히 여기다’ 이런 뜻인데 그거를 ‘아까워하지 말라’는 거죠.
우리가 옛 것을, 우리가 전에 가지고 있던, 습관이나 또는 쌓은 것, 모은 것, 이런 것들을 아까워하잖아요.
그렇지만 지금 뭐예요? 계명은 ‘아끼지 말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 버리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죽이라고 하는 거예요. 로마서 8장 32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죠. 그러니까 육으로 오신 주님을 십자가에서 아끼지 않고 죽이신 것처럼 너희 기구, 그 율법의 옛 성전, 십자가에서 죽이라라고 하는 거란 말이죠. 로마서 9장 21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롬 9:21-23)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그릇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죠, ‘스큐어스’라고 합니다, 요 스큐어스가 ‘케리’인 거예요, 히브리어의 케리, 하나님이 토기장이신데 ‘토기장이’, ‘케라뮤스’라고 해요. 그 토기장이가 ‘하나는 귀히 쓸 그릇,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느냐’라고 하는 거죠. 이 구절은 흔히 진노의 그릇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멸망하는 불신자를 뜻하는 거고, 긍휼의 그릇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서 구원받는 성도를 가리킨다라고 흔히 이해하는 구절이죠.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만유의 주시니까 그분이 당신의 피조물들을 어떻게 취급하건 우리가 무슨 불만을 제기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것처럼 들린단 말이죠. 특히 유기되고 멸망한 자들은 그들은 또 무슨 불만을 따로 말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단 말이에요. 그렇게 들리는 구절인데,
성경은 항상, 우리 안의 일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이 나오는데 이건 전부 우리 안에서, 우리 안에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진노의 그릇은 성도의 옛 사람인 거고, 그리고 긍휼의 그릇은 성도의 새 사람인 거죠.
바리새인과 세리에 비유해서 보셨죠? 그 이야기에서 말씀드렸었죠, 바리새인과 세리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에서 세리로 가는 거라고, 성도는. 그렇게 자기 죄를 깨닫고 가슴을 치는 자로 가는 거라고 했었죠.
하나님을 토기장이라고 하는데 이 토기장이라는 말, ‘케라뮤스’는 ‘케란뉘미’에서 온 말이에요, 케란뉘미는 ‘섞다’라는 뜻이에요, ‘혼합하다’는 뜻이에요. 뭘 섞어요? 이거 섞으면 흔히 율법이라고 하는데 지금 하나님이 섞는 거는, 일단 토기장이니까 그릇은 우리죠, 우리를 만드시는데 만드시는데 흙이 필요한 거죠, 흙에다가 물을 넣는 거죠, 말씀, 성령을 넣는 거란 말이에요. 이 그릇은 전부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은, 전부 성령이 가입된 자란 말이에요. 성령이 가입됐는데 거기에서 진리를 깨달으면, 하나님이 어둠을 경험하게 하신 거란 말이에요.
빛인데, 원래 빛인데, 어둠을 경험하기 위해서 그런 상태로 있는 건데, 그걸 진노의 그릇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화를 내신다가 아니라, 그게 뭔지를 알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진노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거는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삭제되어야 하는 그러한 존재라는 거를 알려주시는 거죠, 그 율법의 그릇. 나훔서 1장 2절 합독하겠습니다.
(나 1: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질투하고 보복하고 진노하시는데', 진노는 하나님이 몹시 화를 내고 그래서 지옥 보내고 멸망시키고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게 전혀 아니라고 했죠. '질투한다'는 말도 '칸노', '칸노'는 '열심'이라고 했어요. '열심' '카나'에서 온 말이죠, 열심히 하다. 그래서 에스겔서 39장 25절에 보면
(겔 39:25)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
'열심을 내서 야곱의 사로잡힌 자'9, 율법에 사로잡힌 자, 우리를 돌아오게 하겠다. 그래서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겠다라고 하시잖아요. 그러니까 열심히 사랑하겠다라고 하시는 걸 질투한다라고 하는 거고, 보복하신 하나님은 '나캄'이라고 했죠, 보복한다는 말은. 이게 창세기 4장 15절에서
(창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벌을 칠 배나 받는다'. 언약의 칠이잖아요. 벌은 갚아주는 건데 하나님의 그 말씀으로, 그러니까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에게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신다'라고 하는데 '표'는 '오트'예요. 이게 표적이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가인이 말씀을 표로 받아서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라고 했는데, '모든 것'이라고 했죠, '것'. 모든 것. 그 만나는 '마차' '그를 찾는 모든 것', 그건 말씀이라고 했잖아요, 말씀. 그러니까 가인이 모든 말씀으로부터 '오트' '표적'으로 받으니까 죽지 못하게 된 거죠. 그래서 유리 방황하게 되는 거죠. 십자가 죽음을 죽지 못하니까 광야를 떠돌아야 되는 자가 되는 거죠, 그래서 광야에서 죽는 자가 되는 거죠.
그렇게 하나님이 언약을 가르쳐주시는 거 그걸 '벌 받는다'라고 하는 거예요, '나캄'. 그리고 예레미야서 46장 10절에 보면
(렘 46:10)a그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라고 하는 거예요.
'원수 갚는 보복일', '원수를 갚는다'란 말이 '나캄'이고 '보복일'은 '네카마'란 말이에요. '네카마'가 '나캄'이에요, 나캄은 여성형이에요. 그러니까 '원수' 원수는 '오예브', '그날' '하욤'이잖아요. 빛을 주셔, 진리의 빛을 주셔서 그 진리를 깨닫게 하는 거 이걸 이제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고 하는 거죠.
'그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하신다'라고 하는데, '진노하신다'는 말은 '나타르'라고 해요, 나타르. 나타르는 진노하신다라고 하는데 이게 '지키고 보호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모든 우리를 향하신 진노 분노 그리고 질투 이런 것들은 전부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에서 율법의 상태에서 머물지 말라고 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신인 동형론적인 그런 표현을 그렇게 감정을 담아서 쓰신 거고, 그건 전부 성도를 진리의 아들이 되게 하시겠다라고 하는 당신의 다짐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 원수를 지키고 보호하겠다라고 하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진리의 빛을 주시면 나의 그 어두움 무지 죄가 멈추게 되는 거죠, 죽게 되는 거죠. 이것들이 하나님의 원수인 거예요.
하나님이 빛을 주셨잖아요. '빛이 있으라' 하고 빛을 주셨는데 그러고 나서 빛과 어둠이 나누어지죠. 그러니까 성도는 원래 빛이었단 말이에요. 잠시 어둠을 경험하는 자리로 나오는 거고, 그런 다음에 경험하고 난 다음에는 다시 빛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빛을 주시니까 그날에 '하욤'의 빛을 주시니까 그러니까 그와 같이. 성도는 원래 영이란 말이에요. 영인데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인데 잠시 육을 경험하는 자인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육은? 육은 결국 다 멸망하는 거잖아요, 우리의 육체까지도. 그러니까 육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어요. 보이는 것 나타난 것 우리가 판단하는 모든 것, 그리고 우리의 육신까지 다 들어있는데, 영이 아닌 모든 것이 다 육이고 그런 육의 상태를 경험을 하고 그리고 그 육이 뭔지를 알게 되면 육의 그 불가능함을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성도의 결론은 실패란 말이에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뭔가를 이루는 자가 아니에요. 실패가 성도의 결론이에요. 불가능을 깨닫는 자란 말이에요. 성도는 그래서 나는 불가능한 자구나 가능하지가 않구나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불가능한 존재로 머무는구나 멸망하겠구나 이걸 아는 자란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뜻 그러니까 어둠을 배워서 빛을 알게 되는 거고 육을 경험하고 영을 알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러한 과정에서 불가능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무릎 꿇는 거예요. 엎드리는 거란 말이죠. 그게 성도가 이 땅에 온 이유고 할 일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성도는 이러한 실전을 분명하게 깨닫고 진리의 빛을 받아서 무지의 그 어둠에서 벗어나서 교육의 재료로 주신 그 육의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게 되는 거란 말이죠. 그게 진리를 아는 게 되는 거고, 그게 진리니까 그걸 통해서 자유케 되는 거죠. 이걸 알면 자유가 되는 거예요. 이걸 모를 때는 육의 일 보이는 것의 일 거기에 연연하게 된단 말이죠. 그것 때문에 괴롭잖아요.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전토, 그 안에 다 들어 있잖아요. 모든 것들이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그 의미를 아는 거예요. 그것들을 왜 주셨는지를 아는 거죠. 그래서 그 의미가 뭔지를 알고 영을 소망하는 거예요.
빛을 소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빛의 아들이 되는 거란 말이죠. 마태복음 12장 29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세간' '스큐오스'라고 해요. '스큐오스' '그릇, 용구, 물건'이라고 하는데, 이게 히브리어 '케리'죠.
사람 안의 일을 강도가 집안을 강탈하는 일로 주님이 비유를 하신 거죠. 그 강도는 주님이라고 했어요. 강한 자는 귀신 들린 자고, 그 귀신 들린 자를 고쳤을 때 '바알세블'을 힘입어 고쳤다, 이렇게 비난할 때 주님이 주신 말씀이잖아요. 그 '귀신 들린 자' '우리'란 말이에요. 그 귀신은 '오해된 하나님'이라고 했죠. 율법, '푸뉴마'가 아닌 건 전부 율법 그리고 귀신 들린 것이라는 말이죠. 육체라는, 좀 전에 했던 그 육체와 같은 의미인 거죠.
영을 깨닫지 못한 상태, 푸뉴마를 갖지 못했다는 건, 푸뉴마를 깨닫지 못했다는 거에요. 영을 깨닫지 못했다는 거고, 영은 진리니까 진리를 온전하게 깨닫지 못한 걸 '귀신 들린 거다, 율법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뭐라 그래요? '결박한 후에 그 집을 강탈하리라'라고 했죠. 그러니까 세간은 곧 집인 거란 말이에요. 세간과 집은 같은 의미인 거예요.
아까 다 이해를 하셨지만, 이 '케리' '스큐오스' 이게 성전의 의미란 말이에요. '집' '오이키아'인데, 성전의 의미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케리'는 성전을 이루는 '기명'이면서 그것들을 전부 모으면 성전 되는 거죠, '내 안' 이야기니까.
'세간'을 강탈한다. 그러니까 '성도를 강탈하는' 거예요, 우리 옛 사람을 강탈하는 거죠. '하르파조'라고 해요. '낙아채다, 잡아채다, 잡아채서 데려가다'라는 뜻이죠. 잡아채서 데려갔는데 그 데려가는 곳이 낙원이라고 했잖아요.
(고후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라고 하잖아요. '하르파조' 하는 거 하나님이 성도를 하르파조하는 거는 낙원으로 하르파조 하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세간을 강탈한다는 거는 낙원으로 이끌려가는 거고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거죠. 진리를 깨달아서 새 성전된 거 이게 낙원되는 거 그것과 같은 일인 거죠. 고린도후서 4장 7절 합독하시겠습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보배' '데사우로스'. 보배는 그리스도라는 진리죠. 그 진리가 '질그릇'에, 그릇은 우리잖아요, '스큐오스'. 우리에게 담긴단 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그 능력이 우리에게 담기는 게 되는 거죠. 우리에게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게 있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질그릇, 그릇은 결국 우리를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케리'는 곧 성도. 역대야 36장 10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대하 36:10) 그 해에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여호와의 전의 귀한 그릇들도 함께 가져가고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세워 유다와 예루살렘 왕으로 삼았더라
느브갓네살 왕이 유다를 멸망시킨 거죠. 멸망시키고 나서 '히스기야를 세워서 유다와 예루살렘 왕으로 삼았더라',
새 왕으로 세운 거죠. '그 해에 느브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갔다'라고 해요. 여기서 여호야긴이란 말은 안 나와요 원문에. 앞에 나와요. 앞에 여호야긴인 건 알아요 앞에 나오기 때문에. 그렇지만 이 구절에서는 안 나와요.
그리고 '그 해'라고 하는데, 그 해는 '테슈바 샤나'라고, 테슈바 샤나. '샤나'는 '해, 년'인데, 그러니까 해에 '테슈바' '돌아온' 바뀜이 되겠죠. '새로 돌아왔다'라는 그런 의미죠, 그래서 '해의 바뀜'이 되는 거죠. '샤나' 앞에는 관사가 있어요, '하샤나'. 그러니까 '테슈바 하 샤나'는 '해가 바뀌었다'라는 거죠. '샤나'는 샤나라는 동사 '바뀌다, 변화하다'에서 온 거예요. 그러니까 '변화해서 새롭게 바뀌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바뀐 건 뭘까요? 새롭게 바뀌었는데, 성경은 우리한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잖아요. 우리가 새롭게 되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새롭게 바뀐 거니까 율법에서 진리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변화해서 새롭게 바뀔 때,
'느브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라고 하는데 '사람'이란 말이 없어요.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냈다'라고 하는데 '보냈다'는 말은 '샬라흐'예요, '쫓아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을 뭔가 보내서 뭔가 일을 시킬 때는 쫓아내는 게 아니죠. 그러니까 이게 지금 뭐냐면 느부갓네살이, 느부갓네살 왕이 보낸 게 아니라 '느부갓네살이 왕을 쫓아냈다' 이렇게 번역해야 되는 거예요. 왕이 느브갓네살하고 이렇게 붙어서 해석되면 안 되는 거고, 사람에 해당되는 말이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이제 번역이 안 되니까 사람을 집어넣어갖고 이렇게 느브갓네살하고 왕을 붙여버리니까 뭘 보내야 되는데 보낼 게 없으니까 사람이라는 말을 그냥 집어 넣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느부갓네살이 왕을 쫓아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왕을. '하 멜레크'니까 '그 왕을 쫓아냈다'. 그러니까 우리 성경에는 여호야긴이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내용상은 여호야긴이지만 지금 성경은 본문에서는 여호야긴이라는 말을 안 쓴단 말이에요. 그냥 '그 왕을 쫓아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여호와의 전의 귀한 그릇들도 함께 가져가고'라고 해요. '귀한 그릇' '케리 헤므다'. 지금 우리 본문에 아름다운 기구와 같은 글자죠, 케리 헤므다. 그리고 '그의 숙부 히드기아를 세워 유다와 예루살렘 왕으로 삼았더라'.
'치드키야', 여기 치드키야라고 하는데 '체데크'라는 말 '의' '디카이오쉬네'죠. 그리고 '야흐' '여호와', 그러니까 '체데크'와 '야흐'라는 말이 합쳐진 거예요. 그러니까 '의로우신 여호와' 그러니까 의로우신 여호와가 이제 왕이 됐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 왕을 내쫓고 의로우신 여호와가 왕이 된 거죠.
우리한테 하는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쫓겨난 왕은 뭐겠어요? 예수죠. 그리고 새로운 왕, 새로운 왕은 그리스도이신 거고, 그래서 숙부 시드기야라고 하는데 이 '숙부'라는 말은 '아흐'예요, 형제라는 거죠. 실제로 여호야긴과 시드기아가 관계가 이렇게 조카와 숙부 관계라서 이렇게 했겠지만, 성경은 그렇게 얘기 안 한단 말이 '아흐'라고 하는 거에요, '형제'. 예수와 그리스도, 에서와 야곱, 이 관계란 말이죠.
그리고 이 왕의 교체 사건 있죠. 예수와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앞뒤로 나오는데 그 사이에 뭐가 나와요? '귀한 그릇' '케리 헤므다'가 나오는 거죠. 이 케리 헤므다는 뭐였어요? '케리'가 '성전'이잖아요. '헤므다'는 '갈망'이라고 했죠. 탐심의 성전을 보내버렸죠, 쫓아내는 거예요. 쫓아내는 게 그 왕 율법의 왕과 새 왕이 교체되는 사건이라 그것과 같은 일이라는 걸 이 성경의 구조를 통해서 알려주는 거란 말이에요. '탐심의 성전을 쫓아내는 거다', 그게 '그리스도께서 나의 왕이 되시는 일'이라는 그런 의미인 거죠.
이 '헤므다', 헤므다가 '갈망'이고 '탐나는 것, 귀한' 이런 뜻인데, 이게 '하마드'라는 말을 써왔어요. 하마드가 '몹시 바라다, 탐내다' 이런 뜻이에요. 창세기 3장 6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마드'예요, '탐스럽기도 한 나무다'. 하마드 '몹시 탐나는 그러한 나무다'라고 하는 거죠. 아름다운 그 기구는 그러니까 이 탐심으로 가득한 탐심의 성전이 된 우리를 이야기하는 거죠. 우리 안에 선악의 두 마음으로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잖아요. 그러면 모든 것들이 다 율법이 되는 거고 그것들이 전부 나의 선악의 판단을 거쳐서 내 마음에 드는 것들을 가득 채우는 그러한 율법의 성전이 되는 그러한 일이 되는 거죠.
오늘 본문이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 '은과 금을 노략하라'는 말씀은, 눈에 보이는 그 은과 금을 사랑하던 우리의 탐심을 제거하고 참된 은과 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겠다라고 하는 약속인 거고,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다'라고 하는 거는 저축한 거, 우리가 열심히 땅에 쌓았던 그 보물들을, 그것들을 털어가 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그 마음을 새롭게 바꾸어 주시는 거죠. 그래서 영혼 속 하늘의 보물, 진리를 찾게 해 주시는 거죠.
그리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하다'라고 하는 거는 탐심의 성전이던 우리 안에 하나님의 그 헤므다, 하나님의 그 '에피뒤미아', 하나님도 '헤므다'를 하신단 말이에요, 갈망하세요. 에피디미아를 가지신단 말이에요. 우리가 성전 되기를, 빛의 아들 되기를 '헤므다' 갈망하신단 말이죠. 그걸 깨닫고 그 뜻을 따르는 자 본받는 자가 우리가 탐심의 성전이었는데 하나님의 헤므다를 깨닫고 그 뜻을 따르는 자 본받는 자가 되는 거죠. 이 에피뒤미아가 헤므다의 의미란 말이죠.
(눅 22: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에피뒤미아'란 말이죠, 주님도 '에피뒤메오' 하신단 말이에요. 에피뒤메오 동사형이죠, 간절히 바라시는 거예요. 히브리서 6장 11절부터 합독하겠습니다.
(히 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간절히 바란다'고 하는 거죠. 우리가 간절히 바란대요, 이게 사도의 입을 빌려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이렇게 간절히 바라신다. '너희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그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가 되라라'고, 그러면
(히 6: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그러니까 복을 받고 그리고 번성하는 자 열매 맺는 자가 되는 거죠. 이게 창조의 뜻이란 말이죠. 창세기 2장 9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보기에 아름답고' '하마드'예요. '아름답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었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뜻이 몹시 아름답고 바라고 기뻐하는 거. 하나님의 '헤므다'를 깨달은 자는 이제 그 나무, 나무를 더 이상 선악의 나무로 보지 않겠죠.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이에요 나무는. 나무는 십자가고, 십자가는 진리의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 십자가 진리의 말씀을 더 이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두 마음으로 받지 않고 생명나무로 받는 거죠. 한마음으로 받는 거죠, 항상 선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받는 거죠.
그러면 이제 혼돈이고 공허인 우리, 완전히 불가능한 자였던 우리에게 이 일을 가능하게 우리 안에서 만들어주신 주님의 그 구속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거죠. 이게 '참으로 아름다운 기구', 아름다운 기구, 다른 말로 바꾸면 '갈망의 성전'이란 말이에요, 갈망의 성전. 이게 하나님이 갈망하시는 참으로 바라시는 성전이 되는 일이라는 거죠. 그러면 '풍부하다' '카보드'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라는 거죠. 이게 영광이야, 성도는 하나님이 갈망하시는 아름다운 성전이 되는 자란 말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자란 말이죠. 그러한 성도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그 진리의 십자가 나무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보지 않고 생명나무로만 볼 수 있게 하시고 그 하나님의 뜻 가운데 기뻐하고 풍성히 열매 맺는 자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모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