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그 정신을 되새기다
인묵 김형식
1.머리글
사마천은 사기 열전을 쓰면서 첫 편으로 백이숙제 열전을 썼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동생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왕이 죽은 뒤에 숙제는 형인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하고자 했다. 백이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한다며 달아났는데, 숙제도 왕위를 잇지 않고 형을 따라갔다. 그 기저에는 선비정신을 깔고 있다.
선비, 그 정신을 되새겨 본다.
2.선비를 정의
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키는 유교의 용어로 써왔다.
3.선비의 어원
선비는 한자어의 사(士)와 같은 뜻을 갖는다. 어원적으로 보면 우리 말에서 선비는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다.
‘선비의 ‘선’은 우리 선조, 조상의 언어인 몽골어로 ‘어질다’인데 ‘sait’의 변형인 ‘sain’과 연관되고, ‘비’는 몽고어 및 만주어에서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박시’의 변형인 ‘비이’에서 온 말로 분석되기도 한다.
이에 비하여 한자의 사(士)는 ‘벼슬한다’는 뜻인 사(仕)와 관련된 말로서, 일정한 지식과 기능을 갖고서 어떤 직분을 맡고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사(士)의 글자 뜻을 ‘일한다’ 또는 ‘섬긴다’(士, 事也)’는 뜻으로 보아, 낮은 지위에서 일을 맡는 기능적 성격을 지적하였다.
동시에 ‘士’는 ‘十’(수의 끝)과 ‘一’(수의 시작)의 결합으로 된 회의문자(會意文字)로 보고 있다. 곧 ‘十’을 미루어 ‘一’에 합한다고 풀이하면 넓은 데에서 간략한 데로 돌아오는 박문약례(博文約禮)의 교육방법과 통하고, ‘一’을 미루어 ‘十’에 합한다고 풀이하면 하나의 도리를 꿰뚫는다(吾道一以貫之)는 뜻과 통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士)’는 지식과 인격을 갖춘 인간, 문인으로 이해될 수 있어, 우리말의 선비와 괘를 같이 한다.
4.선비의 인격적 조건
선비, 문인의 인격적 조건은 생명에 대한 욕망도 초월할 만큼 궁극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공자는 “뜻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 하였다.
증자(曾子) 또한 “선비는 모름지기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어야 할 것이니, 그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다. 인(仁)으로써 자기 임무를 삼았으니 어찌 무겁지 않으랴. 죽은 뒤에야 그칠 것이니 또한 멀지 않으랴.”라고 하여 인(仁)의 덕목을 지적하였다.
자장(子張)도 “선비가 위태로움을 당하여서는 생명을 바치고, 이익을 얻게 될 때에는 의로움을 생각한다.”고 하여 의로움의 덕목을 강조하였다. 맹자는 “일정한 생업이 없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은 선비만이 할 수 있다.”고 하여 지조를 선비의 인격적 조건으로 지적하고 있다.
5.선비의 역사적 유래
삼국시대 초기부터 유교문화가 점차 폭넓게 받아들여지게 되자, 유교적 인격체인 선비의 덕성에 관한 이해가 성장해갔다.
2세기 말엽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때, 은둔하여 밭갈이하고 살다가 추천을 받아서 재상의 자리에 올랐던 을파소(乙巴素)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재상의 책임을 맡고서 나올 때 말하기를,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나와서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을파소는 자신의 처지를 선비로 자각하였고 선비의 나아가고 물러서는 도리를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고려 말엽 충렬왕 때 안향(安珦)과 백이정(白頤正) 등에 의하여 원나라로부터 성리학 내지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유교이념의 새로운 학풍과 학통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이른바 도학이념이 정립되면서 선비의 자각도 심화되었다.
곧 불교나 노장사상의 풍조를 배척하고 유교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개혁의식이 이들 도학이념의 선비들 속에서 성장하였다. 이색(李穡)을 중심으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또는 길재(吉再) 외 고려 말 ‘삼은(三隱)’은 학문이나 의리 등에서 이 시대 선비의 모델로 존숭되는 인물이었다.
조선 초에 들어와 유교이념을 통치 원리로 삼으면서 선비들은 유교이념의 담당자로서 자기확신을 정립하였다. 조선 초에 선비들은 고려 말 절개를 지킨 인물인 정몽주를 추존(推尊)하였고, 절개를 굽히지 않은 길재의 학통에서 선비의식을 강화시켜갔다.
이들은 조선왕조 건국기의 혁명세력을 중심으로 고위관리로서 문벌을 이룬 훈구세력에 대항해 새로 진출하기 시작한 인물들로서, 절의를 존경하고 숭배하는 입장을 지닌 자신들을 사림파(士林派)로 구분하는 선비의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였다.
사림파는 도학의 이념을 철저히 수련하고 실천하며 사회의 개혁의지를 발휘하였다. 이들은 훈구파의 관료세력을 비판하는 입장에 섰고, 훈구파는 사림파를 과격한 이상주의자로 배척하여 억압하는 데서 이른바 사화(士禍)가 일어나 사림파의 선비들이 엄청나게 희생을 치르었다.
조선시대는 유교이념이 지배한 시대라 선비들의 사회적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사화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마침내 선비들이 정치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는 사림정치시대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에 의한 관료제도가 정착되었고, 사회의 지도적 계층에서 선비의 위치가 중심이 되었다.
6.선비의 생애와 활동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선비들이 사회의 지도적 계층으로서 그 지위가 확립되었을 때에는 선비의 생활양상도 매우 엄격한 규범에 의하여 표준적인 정형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선비는 관직에 나가면 임금의 바로 아래인 영의정에까지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혹은 산 속에 은거하더라도 유교의 도를 강론하여 밝히고 수호하여 실천하는 임무를 지니는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신분이다. 따라서 이들 선비가 서민대중으로부터 받는 존숭은 지극하며 그만큼 영향력도 컸다.
선비는 도학의 이념을 담당하는 계층이므로 사회의 올바른 방향을 지도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며, 의리의 신념을 사회 속에 제시하고 실천해야 하였다. 이와 더불어 유교적 도덕규범들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서 대중들을 교화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었다.따라서, 선비는 집 밖에 나가거나 집 안에 들어오거나 항상 그 사회의 가치를 실현하고 제시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임무를 실천해야 하는 지도자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소학'에서는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통해 선비의 생애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예기 ' 내칙편(內則篇)을 인용한 고전적인 양식이다. 곧 어린아이가 가정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다가 10세가 되면 남자아이는 사랑에서 아버지와 자며 선생을 찾아가 배우고, 20세가 되면 관례(冠禮: 아이가 어른이 되는 예식)를 하고 널리 배우며, 30세에는 아내를 맞아 살림을 하며, 40세에는 벼슬에 나가고, 70세에는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다는 것이다.
선비는 한평생 공부인으로 살아야 한다. 특히 가정에서는 인성을, 밖에서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 배워서 지혜를 발굴 해야 한다.
선비들은 자신의 감회를 ‘시(詩)’로 표현하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선비들의 모임이 옛날에는 시회(詩會)라 했으며 오늘날에는 그 명칭을 문학회라 하고 있다.
선비는 자신의 학문을 제자들을 통하여 전하기도 하지만 직접 저술을 통해 후세에 가르침을 내려주는 것이 선비의 숭고한 임무이다.
선비가 한 시대에 출현하여
도를 시행하고(行道一世) 후세에 가르침을 베푸는 일(立言垂後)’은 선비가 지향하는 기본 방향으로 선비는 이를 중히하였다. 선비들은 자신의 저술을 생존시에 반포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저술은 죽은 뒤에 후손과 제자들이 편찬한 유고(遺稿)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선비는 자신의 신념을 한 시대만이 아니라 만세에 전하려는 확신을 지닌 인격체라 할 수있다. 선비는 도를 밝히고 자신을 연마하여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도를 실천하는 공부인이다.
7.선비의 정신세계
이황(李滉)은 선비를 세력과 지위에 굴하지 않는 존재로 지적하였다. 그는 선비의 입장을 세속적 권세에 대조시켜서, “저들이 부유함으로 한다면 나는 인(仁)으로 하며, 저들이 벼슬로 한다면 나는 의(義)로써 한다.”라고 특징지었다.
선비는 유교이념을 수호하는 임무를 지녔기 때문에 유교이념 자체가 바로 선비정신의 핵심을 이룬다. 선비는 부와 귀의 세속적 가치를 따르지 않고, 인의의 유교이념을 신봉하였다. 특히 세속적 가치를 인간의 욕망이 지향하는 이익이라 한다면 선비가 지향하는 가치는 인간의 성품에 내재된 의리라 할 수 있다.
8.선비정신의 근대적 성찰과 실현
도학이 정착하면서 선비의식은 어떤 시대보다도 선명하고 자각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사회적으로도 선비가 주도세력으로 꾸준히 성장하였다. 하지만 선비가 정치의 담당자로 부상하여 사림정치를 하게 된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사림들 자체가 내부의 분열을 일으키고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른바 당쟁이 시작되자 당파는 계속하여 핵분열을 거듭하였고, 서로 비난하던 주장들이 정치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당쟁은 출발점에서 보면 선비정신의 기본 이념에 따라 ‘군자·소인론’으로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스스로를 반성하고 다른 이의 좋은 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군자라 칭하고 남을 소인으로 비난하면서 서로 격심한 적대감을 일으켰다. 권력의 부당성을 비판하면서 견제할 때는 순수한 입장을 지켰으나, 권력의 주체가 되자 선비는 엄청난 권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실학파의 선구적 인물인 유형원(柳馨遠)은 신분의 귀천이 문벌에 의하여 세습되는 것을 비판하여, “예법에는 나면서부터 귀한 자가 없다.”라고 하여 상하의 서열을 재덕(才德)과 연령에 따라서 나눌 것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선비가 재주나 덕이 아니라 신분적으로 사대부로 태어나고 있는 사실을 반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식은 실학파의 학자들 사이에 사대부 내지 양반에 대한 사회적 기능과 지위를 재평가하는 문제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박지원(朴趾源)이 『양반전 兩班傳』에서 양반의 가식적인 행동규범과 지배계층으로서의 탐학상에 대해 조목을 열거하여 조소적으로 비판한 것도 신분제도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선비의 구실을 재평가하면서 농사를 밝히고 상품을 유통하게 하고 공장(工匠)에게 은혜롭게 하는 것이 바로 선비의 학문이라 지적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당시에 농·공·상의 상민(常民)이 생업을 잃는 것은 선비가 실학을 하지 않은 과오라고 반성하고 있다.
선비는 도덕규범만 담당하고 생산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직접 생산에 참여하여 산업을 성장시키는 데서 그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재화의 생산이 인간생활에 필수적인데, 선비가 의리만 내세우며 재화를 비천한 것으로 보는 의식을 비판하였다. 곧 재화의 생산활동이 바로 도덕적임을 인정하며, 오히려 생산은 하지 않고 놀고 먹는 행위의 부당성을 지적하여 선비가 놀고 먹는 유식계층(遊食階層)이 되고 있음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비판하였다.
일제의 억압에 맞서 애국계몽사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을 때, 다른 한편 전통 도학의 선비들은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오히려 산간에 은둔하여 끈질기게 일제의 억압정책에 항거하였다. 일제의 민적(民籍) 등록을 거부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의 강요에도 저항하였다.
일제하의 선비는 일본의 동화정책에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단발의 강요에 응하지 않았고, 일본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이 설치하였다고 철도를 이용하지 않았고, 신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지도 않았다.
이러한 저항정신은 선비들의 강인한 민족의식이 발현된 것으로 존중될 수 있지만, 이미 변혁된 사회에서 그 지도적 기능을 상실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9.선비정신의 현대적 의의
박지원이 조선시대의 선비가 지닌 사회기능적 성격을 규정한 것은 일종의 종합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천하의 공변된 언론을 사론(士論)이라 하고, 당세의 제일류를 사류(士流)라 하며, 온 세상의 의로운 주장을 펴는 것을 사기(士氣)라 하고, 군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하며, 학문과 도리를 강론하는 것을 사림(士林)이라 한다.”
선비는 분명히 그 사회의 양심이요 지성이며 인격의 기준으로 인식되었고, 심지어 생명의 원동력인 원기라 지적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사회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적 양상에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선비는 언제나 지도적 구실을 하는 지성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해왔다. 이처럼 개화 이후에도 시대이념을 수호하고 이끌어가는 주체로서 지성인의 구실이 요구되었다.
독립투쟁기에는 의사(義士)·열사(烈士)가 요구되고, 산업성장기에는 경영자·기술자가 요구된다. 그리고 선비는 언제나 그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적 지도자요 지성인을 의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전통의 선비상은 우리 시대에서도 의미 있는 선비의 조건을 제시해준다.
곧 선비는 현실적·감각적 욕구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높은 가치를 향하여 상승하기를 추구하는 가치의식을 지닌다. 그리고 그의 신념을 실천하는 데 꺾이지 않는 용기를 지닌다. 자신의 과오를 반성할 줄 아는 성찰자세가 필요하며, 사회의 모든 계층을 통합하고 조화시키는 중심의 구실이 있다.
선비는 이제 신분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의 모범이요, 시대사회의 양심으로서 인간의 도덕성을 개인 내면에서나 사회질서 속에서 확립하는 원천으로 이해될 수 있다.
10.결언
궁형宮刑을 당한 사마천
기원전 9년 흉노 정벌을 위해 출격하던 대장군 이광리의 군대 가운데 소규모의 유격대가 흉노의 본대와 마주쳤다. 지휘관 이능은 소수의 병력으로 10여 일 동안 싸웠지만 사방으로 고립된데다가 원군조차 오지 않아 결국 전력만 소비하고 적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처음에 이능이 적은 병사로 적과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위아래 할 것 없이 이능의 용맹을 칭찬했으니 이어서 적에 항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칭찬은 분노로 바뀌었다. 이 소식을 들은 효문제는 격노하여 이능 장군의 죄를 문책하는 어전 회의를 열게 했다. 결국 이능은 신분을 박탈당하고 그 가족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 사마천만이 이능을 변호했다. 이능 장군의 사람됨이 충직 무쌍하다는 것, 5000의 소수 병력으로 8만 대군에 포위되어 선전 분투하였으나 칼은 꺾이고 화살이 다한 후에도 병사들을 이끌고 맨주먹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최후까지 싸우다 죽게 한 것은 고금을 통해 볼 때 아무리 뛰어난 명장이라도 능히 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한군의 용맹함을 천하에 과시했을지언정 죄될 것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가 죽지 않고 적에게 항복한 것은 후일 나라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함이 아는 것을 역설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의 변호는 이능을 처벌해야 한다는 다수의 주장에 압도되었을 뿐 아니라 사마천이 이능을 편 드는 것에 의해 간접적으로 대장군 이광리의 무훈에 손상을 입힌 것으로 간주되어 궁형에 처해졌다.
사마천은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은 자결해야 마땅하지만 자기의 뜻을 완성하기 위해서 선비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궁형의 굴욕을 참고 목숨을 이어간다고 했다.
하여, 사마천은 불후의 선비서(書) '사기'를 남겼다.
선비의 덕목은
언행이 일치해야 한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작금의 문인들의 작태를 보자.선비라 자처하며 역사의 사실을 왜곡하고 선비라 써 붙이고 다니는 어용 글쟁이들이 있어 심히 부끄럽다. 수많은 문인들이 사마천의 선비정신의 기계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내 양심을 성찰하며
선비, 그 정신을 되새긴다.
※.궁형 (宮刑):죄인의 생식기를 없애는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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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사마천 사기
2).『한국의 선비문화』(국제문화재단 編, 시사영어사, 1982)
3).『조선시대 선비연구』(이장희, 탐구당, 1989)
4).『조선시대 유교문화』(최봉영, 사계절, 1997)
5).「정암(靜菴)과 조선시대의 선비정신」(금장태, 『유교와 한국사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0)
6).「의리사상과 선비정신」(금장태, 『月刊朝鮮』, 1981.6
7).「조선시대 선비정신 연구」(최봉영,
『정신문화연구』 가을호, 1983)
8).「이조유교정치와 ‘사림’의 존재」(이우성, 『한국의 역사상』, 창작과 비평사, 1982)
9).한국학 중앙연구원의 '선비정신의 현대적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