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화(形象化)에 대하여
김 형 진
1970년 이후 수필의 문학성 제고에 대한 문제가 ‘수필문학진흥회’, ‘수필문우회’ 등에 의해 쉼없이 논의는 되어 왔지만 그 해결책에 대한 논의는 미미했다. 사안에 대한 문제 제기 뒤에는 그 해결책을 찾아 구체화시키는 작업이 뒤따라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세미나, 포럼, 수필의 날 행사, 문학상 제정 등 외형적인 행사가 대부분이었고 수필의 문학성 제고를 위한 내실 있는 작업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외형을 경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것은 아니다. 외형 없이는 결실도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외형이 웃자랄 경우 내용은 쭉정이가 된다는 것 또한 상식이다.
그동안 수필의 문학성 제고를 위해 형상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대두되어 왔다. 그러나 상당수의 수필가들이 아직도 형상화에 귀먹고 눈먼 상태에서 작품을 쓰고 있는 실정이다. 시에서나 논의될 문제를 왜 수필에 끌어들이냐며 아예 도외시하고 있는 작가들도 많다.
20세기 들어 형상화 문제는 모든 장르의 문학에 영향을 준 큰 화두였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시작된 심벌리즘(symbolism)이 근대문학에 대한 반란이었다면 20세기 초에 영국에서 대두된 이미지즘(imagism)은 근대문학의 종지부를 찍고 현대문학의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지즘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한 철학자이며 시인인 T.E.흄은 종래 낭만주의 문학의 주관주의와 모호성을 공격하였으며, 일반 예술에 있어 객관성과 지적 훈련은 물론 시에 있어서의 건실한 이미지를 강조하였다. 흄에 이어 이미지 운동을 이끈 에즈라 파운드 등의 시인들에 의해 결성된 이미지즘은 낭만주의의 막연한 정신 편향, 감상주의에 반대하고, 벽돌을 쌓아 올리는 듯한 정밀함과 억제력을 요구하는 태도를 지향했다. 이 운동이 미국과 프랑스에 전파되어 이전의 개념적이고 낭만적인 시와 결별하고 모더니즘을 형성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몇 개 항의 강령을 내세워 이미지 시의 중요성을 다짐하기도 했다.
이미지즘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1930년대 영문학자이며 문학평론가였던 최재서이다. 그는 1920년대 초에 만연했던 병적 낭만주의의 무기력과 1920년대 후반에 기세를 떨쳤던 이데올로기 문학이 주는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 이미지즘의 문학 이론을 소개한 듯하다. 최재서에 의해 소개된 이미지즘은 김기림의 시와 이론, 정지용, 이장희, 김광균 등 시인들에 의해 주지시 운동으로 이어져 우리나라 문단에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이러한 우리나라 문예사의 흐름은 20세기 초에 영국에서 이미지즘 운동을 시작한 상황과 아주 흡사하다. 그래서 김기림은 그의 두 번째 시집 『태양의 풍속』의 서문 「어떤 친한 시의 벗에게」에서
드디어 이 책은 완성된 질서를 갖추지 못하였다. 방황, 돌진, 충돌, 그러한 것들로만 찬 이렇게도 야만한 토인의 지대냐?
그러면서도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의연히 상봉이나 귀의나 원만이나 사사나 타협의 미덕이 아니다. 차라리 결별을, 저 동양적 적멸로부터 무절제한 감상의 배설로부터 너는 이 즉각으로 떠나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
(중략)
그 비만하고 노둔한 오후의 예의 대신에 놀라운 오전의 생리에 대하여 경탄한 일은 없느냐? 그 건장한 아침의 체격을 부러워해 본 일은 없느냐?
까닭 모르는 울음소리, 과거에의 구원할 수 없는 애착 정돈. 그것들 음침한 방의 미혹과 현훈에 너는 아직도 피로하지 않았느냐?
그러면 너는 나와 함께 어족(魚族)과 같이 신선하고, 깃발과 같이 활발하고, 표범과 같이 대담하고, 바다와 같이 명랑하고, 선인장과 같이 건강한 태양의 풍속을 배우자.
(중략)
나는 물론 네가 이 책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영구히 너의 사랑을 받기를 두려워한다. 혹은 네가 이 책을 두고두고 사랑하는 사이에 너의 정신이 한 곳에 멈춰 쉴까 보아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1934년 10월 15일
이렇게 낭만주의의 매너리즘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피력하였다.
현재 우리의 수필문학이 처한 상황은 김기림이 주지시 운동을 주도하던 1930년대와 흡사하다. 수필을 단순한 체험의 기록이나 감정 표출의 도구로 착각하여 흥미를 유발하거나 감정을 자극하는 글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에 갇혀 있다. 그래서 일기장에나 적을 듯한 이야기를 수필이란 이름으로 발표되고, 1920년대이 최남선의 ‘심춘 순례’, 이광수의 ‘금강산 유기’, 변영로의 ‘백두산 등척’ 등의 기행문이 어엿한 수필문학의 대우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한술 더 떠 개인사, 가정사, 넋두리 등을 직설적으로 쓴 글이 수필로 둔갑한다. 수필의 문학이기를 거부하는 행위가 아니면 수필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아직도 김진섭의 ‘백설부’, 민태원의 ‘청춘예찬’ 이양하의 ‘신록예찬’ 등 찬사로 가득한 글들이 명수필로 대우받고 있으며, 피천득의 감성을 자극하는 글들이 현대의 한국을 대표하는 수필로 우대받고 있다. 더구나 현역 유명 수필가들은 물론 신진들마저 피천득의 수필을 한국 수필의 모본(模本)으로 삼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이는 분명 한국 현대수필의 매너리즘이다.
흄은 이미지는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을 거부한다고 하였다. 이미지스트들이 내세운 6개 강령 중 다음 4개 항은 수필에도 그대로 적용할 만하다. ‘정확한 일상적인 언어 사용, 자유로운 제재의 선택, 구체적이고 정확한 표현, 대상에 대한 집중’이 그것이다.
1930년대에 김기림이 지적 태도의 견지,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형상화 등을 강조하는 시론으로 주지시 운동을 선도하며 한국 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듯, 늦긴 했지만 수필에서도 형상화 운동이 절실한 시점이다.
형상화(形象化)란 형체가 분명하지 dskg은 추상적인 본질 따위가 어떠한 방법이나 매체를 통해 구체적이고 뚜렷한 형상으로 재창조함을 이른다. 이는 추상적인 이념이나 철학을 시가이나 청각 등 감각에 호소하여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함으로써 예술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감상자에게 어떤 형상을 제시한다. 미술은 선과 색으로, 음악은 소리로, 무용은 몸짓으로 감상자와 만난다. 그렇다면 문학은 무엇으로 독자와 만나야 하는가. 한 수의 시, 한 권의 소설, 한 편의 수필이 문자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독자들의 문학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문자는 단순히 표현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문자를 통해 어떤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게 문학이다. 아무렇게나 그어 놓은 선, 다듬어지지 않은 소리, 일상적인 몸짓이 미술이나 음악이나 무용일 수는 없듯이 겪었던 일, 생각하고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써 놓은 것이 문학일 수는 없다.
문학적 표현에서 이미지의 형성은 주로 비유에 의한다. 비유란 추상적인 개념의 원관념을 그와 외형이나 속성이 상통할 수 있는 사물을 보조 관념으로 끌어들여 구체적인 형상을 떠오르게 함으로써 추상적 관념을 실감있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표현 기법이다. 인간의 의식 체계는 표면에서 내면으로 심화되는게 정상이다. 그래서 구체적 형상에서 그 사람 나름의 느낌과 생각을 끄집어내게 되어 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위의 시에서 유의할 어휘는 ‘눈’과 ‘매화’이다. 눈과 매화의 원관념을 알아 내기 위해서는 우선 그 속성을 탐색해 보아야 한다. 눈의 빛깔은 희다. 흰색은 순수함, 쓸쓸함 등의 속성을 지녔다. 눈의 감촉은 차갑다. 차가움은 시림, 시원함 등의 속성을 지녔다. 눈은 겨울에 내린다. 겨울은 추움, 억압 등의 속성을 지녔다. 매화는 생김새가 아름다움, 선비를 연상시킴, 이른 봄에 핌 등의 속성을 지녔다. 시인은 이러한 속성 중 어느 한 가지를 취해 시 전문에 융합시켰다. 여기서 ‘눈’의 원관념이 겨울이며 이의 추상적 의미가 억압이라면 ‘매화’의 원관념은 봄이며 이의 추상적 의미는 해방으로 볼 수 있다.
시에서는 시어(詩語)가 지닌 개별적인 은유가 시 전체에 기여하는 바가 크지만 수필에서는 비유가 글 전체에 작용함으로써 형상화에 기여해야 한다.
참새들은 자리를 못 붙여 한다. 우선 내 옆에 있는 더벅머리 떼가 ‘우여’ 소리를 쳤다. 참새 떼가 와르르 날아갔다. 천 마리는 될 것 같다. 날아간 참새들은 원을 그리며 저편 논배미에 앉아 본다. 저편 애놈들은 날아 앉은 새 떼를 보았다. 깨어져라 하고 석유통을 두들긴다. 일제히,
“우여!”
소리를 친다. 참새들은 앉기가 무섭게 다시 피곤한 나래를 쳐야 한다. 어디를 가도 ‘우여 우여’가 있다. ‘꽝꽝’이 있다. 참새들은 쌀알 하나 넘겨다보지 못하고 흑사병같은 ‘우여 우여’, ‘꽝꽝’ 속을 헤매는 비운아(悲運兒)들이다.
-김상용의 「백리 금파에서」중
위의 수필에서 ‘참새’는 그냥 참새가 아니다. 배가 고파도 ‘우여’와 ‘쾅쾅’에 쫓겨 끼니를 때우지 못하고 떠도는 비운아들이다. 독자들은 이 비운아들을 그냥 참새로만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생존권마저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미지는 묘사에 의해 형성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잠시 낙향해서 있었을 때의 일. 어느 날 밤이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 서울서 이사 온 윗마을 김 군을 찾아갔다. 대문은 깊이 잠겨 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밖에서 혼자 머뭇거리다가 대문을 흔들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맞은편 집 사랑 툇마루에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 했다.
“좀 쉬어 가겠습니다.” 하며 걸터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이내 “아랫마을서 오셨소?”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노인은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윤오영의 「달밤」중
위의 수필은 달밤의 묘사를 통해 동양적 정취를 형상화하였다. 그야말로 마음의 눈 앞에 펼쳐 놓은 그림이다. 이 수필에 등장하는 ‘나’와 ‘노인’은 인물이 아니다. 그저 달밤의 분위기를 형상화하는데 기여하고 있을 뿐이다.
문학 작품에서 직설적인 설명이나 주장은 용허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화가가 그림 대신 자기가 그리고자 하는 내용을 설명해 놓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원래 예술이란 그 작품 속에 담고자 하는 주제를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상 안에 담아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제시한 형상 속에서 주제를 탐색하는 일은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 놓아야 한다.
이러한 서두로 시작되어 Y교수의 설명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대자연의 자유를 잃고 새장 속에 구속된 꾀꼬리는,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이 굳게 입을 다문다. 이 닫힌 입을 여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로 뿐이다. 그것은 꾀꼬리의 집을 까만 보자기로 싸 가지고 꾀꼬리들이 많이 있는 산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부터 시작된다. 캄캄한 조롱 속에 갇힌 꾀꼬리는 대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부르는 옛 친구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때, 옛 고향을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여 침통한 심정으로 귀를 기울인다. 이때 새장을 덮었던 보자기를 확 벗긴다. 이 순간, 찬란한 광명과 새장 밖으로 보이는 대자연의 모습이 갇혔던 꾀꼬리의 눈을 부시게 하며, 밖에서 부르는 옛 친구들의 노래는 더욱 황홀하게 고막을 울린다. 찰나에 조롱 안의 꾀꼬리는 또다시 해방이 왔다는 착각에 사로잡히며 잃었던 옛 노래를 소리 높이 부른다. 마치 플라톤의 생멸계(生滅界)로 타락된 영혼이 그림자를 보고 이데아를 상기하는 순간과도 같이, 그러나 날개를 뻗쳐 높이 날려던 꾀꼬리가 여전히 갇힌 신세라는 것을 깨닫자 또다시 굳게 입을 다물어 버린다.
한 번 울리기가 그렇게 힘든대서야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산에까지 가서 노래를 들을 바에야 구태여 조롱 속의 새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후련한 뉘우침에 Y교수의 연구실을 나오는 몸과 마음이 거든해짐을 느꼈다. 동시에 꾀꼬리의 입을 여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음을 깨달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다행히도 꾀꼬리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 조롱 문을 조용히 열어 주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꼼짝도 않는다. 끄집어내서 멀리 날렸더니 그제서야 훨훨 창공으로 달아난다.
꾀꾀리가 날아간 하늘에는 흰 구름장이 둥실 떴다. 첫여름 훈훈한 바람이 빈 새장을 가늘게 흔든다.
-김태길의 「꾀꼬리」의 결미
이 수필은 표면상 꾀꼬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꾀꼬리 한 쌍을 구입한 데서부터 놓아주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을 뿐 정작 작가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읽어 가다 보면 단순히 꾀꼬리의 생사나 울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얕게는 자연과 연결 지을 수도 있겠고 깊게는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과 연과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가 자기 작품을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관여하는 것은 독자에 대한 모독이다. 구성주의 이론에 의하면 한 편의 작품은 작가의 독단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독자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추상적인 멘트를 형상화하는 데는 고도의 지력(知力)이 필요하다. 화가가 대상을 그릴 때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린다면 이는 예술품이 아니다. 대상을 그리는 화폭 안에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용해시켜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펼처 놓았을 때 뛰어난 예술품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해진 대상을 어떤 각도에서 보고 어느 부분에 포인트를 주어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여 작가의 개성을 표출하느냐가 중요하다. 아울러 독자들이 편안한 주택에 든 듯한 안락함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수필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문학은 예술의 한 분야이고 수필은 문학의 한 부문이다. 형상이 없는 글은 문학예술 작품으로서의 자격을 취득할 수 없다. 따라서 붓 가는 대로 쓴 글은 수필일 수 없다.
수필세계 2014년 여름호(창간 10주년 기념호)
(원문을 건드려 작가분께 죄송합니다.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을 밑줄과 색상으로 표시했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
첫댓글 아주 좋은 자료다. 형상화에 관해서 작품 해석을 곁들여 정확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아직 수필문학에 관해서 이 평론문과 같이 현대문학 이론에서 말하고 있는 이론을 근거로 정확한 논리를 제시하는 글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여러분에게 나의 이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님은 물론 내 머리 속에서 처음 나온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늘 강조한다. 나는 이 글을 처음 보았다. 그런데 이 분의 이론과 내가 말하는 형상화의 이론이 꼭 같지 않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것은 이분도 현대문학 이론을 공부하였고 나도 그렇기 때문이다. 나는 대한민국 수필가들이 모두 이 글을 읽기를 바란다. 그리고 정신들 차리기 바란다.
예술이 무엇이고 문학이 무엇인지 모르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축약 설명된 교과서 같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김귀선 선생님!
역시 김귀선 우리 총무이고 카페 운영자십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프린터 해놓고 자주 들여다보겠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방황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창작문예 수필 ~콜 ㅎㅎ
고맙습니다.
더이상 말이 필요없네요^^
이관희선생님! 화이팅!!!
창작문예수필! 화이팅!!!
대박!
또 요약정리해보니 A4 용지 한장이 되네요.
들고다니며 달달 외울 작정입니다. 연기대본 연습하듯이.
우리는 이미 이관희 선생님 통해 배우며, 열공 중이니 복덩이들?
처음 글을 배울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갑니다.
마음이 더 바빠집니다. 공부해야지요. 더 열심히. 내가 글을 쓰는 한 해야겠지요.
세상만사 다 때가 있나봅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것 또한.
제 블로그로 이사 시킵니다. 김귀선 선생님, 감사.
수필에 조금만 관심이 있고 사랑한다면 김형진선생처럼 생각을 갖는게 당연한 것 아닐까요.
이 분을 문창수로 모시면 어떨까요---
며칠 전 수필세계 10주년 행사에 참여하여 책을 여러권 받아, 읽은 몇장 중 포함된 내용이네요. 모두에게 알릴 생각하다니 역시 우리 사무국장님 최고입니다!
정말 오랫만에 우리 이관희선생님과 같은 말을 하는 동지(?)를 만났으니 선생님은 힘이 실어져 기뻐하시고 우리에게도 더없이 반가운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형상의 세계를 형상적으로 잘 펼친 글입니다.. 형상의 눈이 번쩍 떠지네요.. ^^
역시 수필계가 서서히 바뀌고 있군요. 우리도 큰소리로 이렇게 당당한 근거에 입각해 외치는 날이 오기를~~~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같은 목소리를 만나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