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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향문학 12호 특집] / 김인희 수필집 『지금은 사랑할 때』 출판 기념
/ 작가의 말 /
문학은 필자의 운명이라고 고백함에 일순의 망설임이 없다. 소녀 적부터 별을 사랑하고 시를 읊조리면서 시작 노트를 보물상자처럼 간직하고 지냈다.
꽃다운 시절은 책을 끼고 살았다. 최초의 별이 수불석권하라는 말 한마디가 빛이 되었고 이정표가 되었다. 그 시절 책은 회색빛 빌딩 숲에서 헤매지 않고 서정을 간직할 수 있게 하는 향기로운 꽃이었다.
두 자녀를 양육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편안한 보금자리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밖은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더라도 안에 있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동동거리면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지냈다.
등단으로 인도한 별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흙 속에 묻혀있는 돌을 캐내어 광맥을 찾아 주고 작은 어깨에 날개를 달아준 은혜에 감읍한다. 등단 후 강과 산의 모양이 바뀐 시점이 되었다.
수필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글들을 모아 방안에 들여놓으려 한다. 작품을 모으니 무녀리 같아 애처롭다. 모두 깨물면 아픈 손가락들이다. 산고 끝에 해산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이다.
『지금은 사랑할 때』 수필집 제목을 정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문학과 자연, 사람과 사람에게 보내는 모든 메시지를 용광로에 넣으니 ‘사랑’이 선명하게 남는다. 『지금은 사랑할 때』를 마주하는 모든 시간이 사랑할 때이기를 기도한다.
작가로 하여 작가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가장 맑고 순수한 DNA를 주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제나 영롱하게 빛나는 별이다. 사랑하는 남편과 두 자녀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편안한 보금자리의 주인공이다.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별들이 있다. 작은 우물 안에서 뛰쳐나올 수 있도록 인도한 별, 더 높이 오르게 하고 더 멀리 보라 손짓하는 별, 더 많은 꿈을 간직하게 한 별, 시시때때로 감동을 주는 별, 별, 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가장 높은 학문의 경지에 오르게 하고 수필집 『지금은 사랑할 때』에 최태호(중부대 한국어학과 박사) 스승님의 화룡점정에 감읍한다. 그 은혜 갚을 일이 태산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별이 총총 빛나는 작가의 하늘을 선물한다.
2023년 1월
影園 김인희
김인희 프로필
김인희 (金仁喜)
아호 : 影園
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 시낭송가, 강사
사)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 충청남도지역본부 부여군 지부장
충청남도 청양군 출생, 부여군 거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건양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사회복지학석사)
중부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문학공간> 수필가 등단, <문학사랑> 시인 등단
<시정일보>,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덕향문학 편집국장
한국문인협회 부여지부 사무국장
한반도문학 사무국장
1. 수불석권에 대한 추억
가을이다. 일과를 마무리하고 홀로 있는 시간을 누리고 있는 요즘이다. 밤에 옥상에 나가 서성거리다 하늘을 우러러 별을 헤아리는 날들이 잦다. 밤이 깊도록 자지러지게 노래하는 가을벌레의 사연을 엿듣는 요즘이 참으로 좋다. 시집을 열어 애써 방황하는 마음을 붙들어 본다. 가을이 독서하기 딱 좋은 계절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수불석권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나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20대에 나를 가장 나답게 잡아 준 말이다. 어쩌면 수불석권은 나의 호흡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나에게 가장 빛나는 학창 시절은 중학교 시절이었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골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남양면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추억하면 별 하나 영롱하게 빛난다.
2학년이 되면서 교과 담임 선생님을 새로 만나게 되었다. 선배들이 국어 선생님은 호랑이같이 무섭고 인정도 없어서 여학생에게도 남학생처럼 매를 든다고 겁을 주었다. 잔뜩 움츠리고 국어 시간을 맞이했다. 선배들 말처럼 국어 선생님은 얼굴에 차가운 카리스마가 가득했고 목소리도 카랑카랑해서 무서웠다. 첫 수업을 시작하면서 국문학에 대해 간략하게 브리핑을 하셨다. 그날 나는 넋을 놓고 문학에 푹 빠졌다. 문학을 가장 문학답게 열어주던 선생님의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그날 이후 국어 시간을 기다리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국어 노트에 한 단원 앞서 예습을 했다. 가장 반듯하고 예쁜 글씨로 글의 종류에 대해서, 글쓴이에 대해서, 어려운 어휘풀이에 대해서 꼼꼼하게 정리를 했다. 나는 작아서 맨 앞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선생님과 가장 가까웠고 선생님께서는 내 노트를 매시간 보셨다. 내 노트를 톡톡 쳐서 소리 없이 칭찬해 주셨다.
그리고 수업 중에 시를 배울 때는 수행평가로 시를 하나씩 외우게 하셨다. 그때 친구들은 쉽고 짧은 시를 외웠고 나는 일부러 가장 어렵고 긴 시를 골라 외웠다. 나의 기대에 어긋남 없이 ‘역시, 인희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잘 외웠어’하고 칭찬해 주셨다. 3학년까지 2년 동안 국어 선생님과 보낸 달콤한 시간은 봄눈처럼 사라졌다.
그때 청양군에는 인문계고등학교가 없었다. 남양면에 있는 우리 중학교에서는 인문학교로 진학하는 친구들은 주로 대전으로 진학을 했다. 3학년 2학기가 되고 학교에서는 몇 명 학생들을 선발해서 야간자습을 하면서 고등학교 진학 준비를 했다. 나도 야간자습을 하면서 부푼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 내게 아버지께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오라비 학비 대는 것이 겁난다. 너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으로 나갔으면 좋겠구나.”라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께 순종하고 밝게 웃었다. 그날 밤 이불 쓰고 울었던 가여운 나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다음 날 국어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선생님께서는 미래를 위해서 부모님 설득하라고 하셨다. 한 번만 거역해보라고 하셨다. 아무런 말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나에게 “미안하다. 네가 더 힘들 텐데··· 그럼, 한마디만 더 할게. 수불석권을 잊지 마라.”하시면서 어깨를 토닥이셨다.
나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천에서 살면서 용산 전자상가에 있는 전력회사에 경리로 일하게 되었다.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1호선 전철은 그때 별명이 ‘지옥철’이었다. 출근길에 사람이 너무 많고 복잡해서 힘들었다. 언젠가는 밀리는 인파에 핸드백 끈이 끊어진 적이 있었다. 구두가 짓밟혀서 리본 장식이 떨어져 나간 적도 있었다. 청양 촌놈이 눈 휘둥그레 뜨고 정신 바짝 차리면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날들이었다. 어쩌다 인문학교로 진학하여 한창 공부하고 있을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외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눈이 시려서 눈물이 흐르던 날들이 잦았다.
그때 번쩍하고 나를 때리는 섬광이 있었다. 아찔한 현기증으로 멍해서 멈출 수밖에 없었던 찰나. 국어 선생님께서 수불석권하라고 하셨던 말씀이 나를 흔들었다. 그날 이후 그 무서운 지옥철 안에서 내 손에는 항상 책이 쥐어져 있었다. 부천에서 남영역까지 약 20분 남짓 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출퇴근하면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내 손에 책이 없는 날은 공허해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는 나를 보았다.
나는 중독자처럼 책을 읽어댔다. 시집 · 소설 · 에세이 · 고전 · 역사···등등 장르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내 손에 들렸던 책은 내가 사는 이유였었다. 내 호흡이었다. 나를 간신히 지탱해 주던 버팀목이었다. 내 나이 지천명을 넘기고 돌이켜 보니 그 20대에 가장 빛 부신 날들을 보낸 것 같다.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으리라.
결혼하고 두 자녀의 엄마가 된 후에 한 맺힌 공부를 시작했다. 다섯 살 딸아이와 두 살 아들아이를 옆에 끼고 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공부를 했다. 그 공부가 밑천이 되어서 방과 후 교실 교사로 일하면서 다시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어찌하다가 시인과 수필가로 등단했다.
나는 공부하고 등단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독서의 힘이었다고 역설한다. 나를 친절하게 이끌어 준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 못지않게 방대한 만남과 위대한 경험이 책에서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그래서 수불석권의 생활은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천명이라는 나이, 하늘의 명을 알 수 있는 나이라고 했던가? 그 탓인가 보다. 요즘 생각하는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는 이유가. 주변을 둘러보고 타인을 헤아려 보는 여유가 생겼다.
내가 그토록 존경했던 국어 선생님께서 수불석권하라고 하셨을 때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으리라 예견하셨을까? 아니면 이렇게 살기를 바라셨을까?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장착하게 하신 거룩한 계획. 내가 잘한 일이라고 여겼다. 선생님께서 심어 주신 씨앗의 의미를 이제 깨닫는 바보다. 내 철없음도 불치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 돌아본다. 내가 했던 무수한 말들은 지금 어느 꽃잎 위에 앉아 있을까. 내게는 선생님의 한 말씀이 삶의 북극성이 되는 위대한 것이었는데······ 내 말이 누군가에게 그런 지침이 되었던가? ‘내가 꿈을 이루면 누군가의 꿈이 된다.’는 엽서의 글귀를 떠올려본다.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 내 말이 그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고 내 삶에서 작으나마 의미를 찾아갔으면 좋겠다. 내 웃음이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내 실수조차 위로가 되어주면 좋겠다. 온통 줄 수 있다면 다 내어주고 싶다.
2. 사랑은 움직이는 것
최근에 휴대전화를 최신형 울트라 5G로 바꾸었다. 지금까지 스마트폰을 선택하는 기준의 우선순위는 가격이 저렴한 것이었다. 단골로 가는 휴대전화 대리점 사장님은 휴대전화를 새로 교체할 때마다 나의 선택 기준을 알기에 망설임 없이 내놓는다. “이것 정도면 쓰는 데 지장 없을 것입니다. 전화 기능도 적당하고 가격도 저렴합니다.”라고 하면서··· 대리점에서 휴대전화를 교체할 때마다 전화기를 오래 사용했는데 아까울 만큼 깨끗하게 잘 썼다는 말을 칭찬으로 알아들었던 나였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스마트폰은 제한이 많았었다. 전화 요금이 저렴한 만큼 한 달에 사용할 수 있는 통화시간과 문자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월말쯤 되면 통화량과 문자를 확인하면서 사용했다. 데이터 요금은 더욱 촘촘한 제한을 요구했다. 우리나라는 인터넷 강국이니만큼 카페나 식당 등 건물에 들어가면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등록하면 얼마든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야외로 나갔을 때는 데이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어쩌다 문학회에서 답사를 다녀오는 일이 있을 때, 외부에서는 전혀 데이터를 켤 수 없어서 답답했었다. 나는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지인들이 전화해서 나만 카톡에 답장을 안 했다고 성화였다. 나는 귀가해서 카톡을 확인하고 답장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느긋하게 지내왔었다.
얼마 전 문화 시민기자 강의시간에 교수님께서 일침을 주셨다. 교수님께서 스마트폰 사용하면서 약정기간 지나고도 쓰고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셨다. 나는 자랑스럽게 손을 번쩍 들었다. 휴대전화 대리점 사장님께서 전화기를 교체할 때마다 전화기를 깨끗하게 사용해서 바꾸기가 아까울 정도라고 했던 말을 상기하면서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최신 전화기는 정보도 더 좋아지고 전화기 기능도 좋다고 하면서 약정기간을 넘기면서 쓰는 것은 좋은 것 같지 않다고 하셨다.
마침 3년 넘게 사용한 휴대전화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문자를 보낼 때 자판이 찍히지 않았다. 더러는 문자를 보냈는데 상대는 받지 않았다고 했다. 무엇보다 답답한 것은 휴대전화 저장공간이 늘 부족했다. 이런저런 행사 후 사진을 정리해서 비우지 않으면 저장공간이 부족하다고 빨간색 경고등과 문자가 반짝였다.
그래도 불만 없이 잘 사용했었다. 전화 통화는 꼭 할 말만 하면 되었고, 문자도 자제하면서 사용하면 한 달 동안 정해진 양을 다 소진하지 않을 때가 허다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도 건물 안에서는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입력해서 사용하면 되었고, 외부에 나갔을 때도 잠깐 인터넷을 열어서 카톡을 확인하고 급한 용건은 일일이 답을 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교육원 강의시간에 교수님의 충고를 듣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휴대전화를 교체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능이 떨어지는 구형 휴대전화를 달래가면서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단단히 벼르고 전화기를 교체하려고 대리점에 들어섰을 때였다. 대리점 사장님께서는 내 얼굴을 보시고는 진열장 안에서 아담하고 예쁜 휴대전화를 내놓았다. 사장님께서는 “오랜만에 오셨네요. 이 전화기를 한번 보세요. 저렴한 가격으로 들어왔는데 모델이 예뻐서 좋아하더라고요. 기존에 쓰던 통화나 문자 부족하지 않았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라고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가장 최신형을 보여달라고 했다. 사장님께서 울트라–21 최신형 전화기 세 개를 보여 주셨을 때, 가장 큰 것으로 선택했다. 구형 휴대전화기를 책상 서랍에 두기 전에 몇 번을 쓰다듬었다.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정을 단번에 끊어버리지 못하고 잠시 아쉬운 이별의 시간을 가졌다.
요즘 새 휴대전화와 사랑놀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영상을 촬영할 때 화질이 선명해서 깜짝 놀랐다. 같은 대상을 영상으로 담았는데 구형 휴대전화와 신형 휴대전화가 보여 준 모습은 천지 간이었다. 한낮에 태양의 입김이 아무리 뜨겁게 다가와도 예쁜 꽃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멈추어 서서 휴대전화에 포착한다. 아름다운 동영상에 문자로 시를 표기하는 ‘디카-시’를 제작하면서 나르시시즘의 바다에 퐁당 빠졌다.
오늘 점심시간에는 아스팔트 위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는 매미를 보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매미는 7년 동안 땅속에서 지내고 허물을 벗고 매미가 된 후 7일 동안 사는 슬픈 운명을 가지고 있다. 매미는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프라이팬처럼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작은 몸짓으로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었으리라. 내 양산을 같이 쓰면서 한참을 매미와 있었다. 나는 매미를 조심스럽게 옮겨서 풀밭에 두고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길을 막고 있었나 보다. 자동차가 경적을 울려서 화들짝 놀라서 일어섰다.
오늘 저녁에는 하늘의 빛깔이 주홍색으로 물든 모습이 아름다워서 발목 잡혔다. 그 노을도 놓치지 않으려고 휴대전화에 담았다. 신형 휴대전화의 매력에 빠져서 구형 휴대전화를 까맣게 잊었다. 내 사랑은 일편단심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변할 줄 몰랐다. 내 사랑이 흔들리고 있다!
3. 백제금동대향로, 그대가 선물이다
-코로나 블루 극복을 위한 백제금동대향로의 선물, 힐링 & 치유-
여름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우산을 받치고 걸었다. 국립부여박물관 전시실을 향하여 걷는 발걸음마다 빗방울이 온몸을 던져 낙하했다. 차가운 그의 촉감을 고스란히 껴안고 걸었다. 찰나의 순간 우산을 던지고 빗속을 뛰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으나 간신히 밀어냈다.
박물관 전시실 입구 넓은 홀에 서 있는 현수막에는“코로나블루 극복을 위한 백제금동대향로의 선물, 힐링 & 치유”라고 쓰여 있었다. 가야금 다섯 대가 나란히 줄지어 서서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야금 앞에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아름다운 자태로 앉아 있었다.
행사 담당 학예사가 코로나-19 때문에 온 국민이 팬데믹에 빠져있는 어려운 난국에 군민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박물관에서 특별히 기획한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모두 6회의 공연을 할 예정이고 첫 공연을 문인협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고 했다.
무대 중앙을 중심으로 거리두기만큼 떨어져 있는 의자들은 어림잡아 스무 개 남짓했다. 나는 그 순간만큼 이기적인 욕심을 맘껏 부리고 싶었다. 나는 무대를 중앙에 두고 앉은 순간 백제금동대향로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랑하는 연인을 마주한 것처럼 내 심장의 잔잔한 리듬이 해일 같은 변주곡으로 변해버렸다.
박물관에서 전시유물 해설 자원봉사를 했을 때 나를 온통 사로잡은 유물이 백제금동대향로였다. 그때 관람객을 인솔하여 전시실을 안내하고 전시유물을 설명할 때 절정을 이루는 하이라이트는 바로 백제금동대향로였다. 나는 백제금동대향로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백제의 태평성대와 슬픈 마지막을 역설한 후 관람객으로부터 박수갈채와 환호를 받았다. 더러는 눈물을 훔치는 관람객도 있었다. 추억을 되새기면서 나르시시즘에 흠뻑 빠져들고 실소를 머금었다.
다소곳이 서서 기다리는 가야금 앞으로 입장한 연주자들의 모습을 본 순간 앗! 하고 탄성을 지를 뻔했다. 백제의 의상을 입은 연주자들의 머리 모양은 향로 위에 있는 다섯 악사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야금 선율에 온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얽히고설킨 생각조차 음악에 싣고 맘껏 힐링하고 싶었다.
가야금 연주가 끝나고 학예사의 안내로 우리 일행은 백제금동대향로가 있는 전시실로 갔다. 백제금동대향로가 있는 전시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마치 1400년 전 백제로 안내하는 오로라처럼 신비하게 다가왔다. 학예사의 친절한 해설은 금상첨화였다.
백제금동대향로의 구조는 봉황 장식과 산악모양 뚜껑 그리고 연꽃 모양 몸체와 용 모양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향로의 꼭대기에 있는 봉황은 턱에 여의주를 가지고 있으며 두 날개를 펼쳐 금방이라도 하늘을 비상할 듯한 모습이다. 봉황은 태평성대의 성인이 나타남을 상징한다. 봉황 아래 다섯 마리의 기러기가 봉황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다섯 악사가 각각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산악모양의 뚜껑에는 여러 사람의 모양과 신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산에 사는 동물들과 사람의 얼굴을 가진 상상의 동물이 있다. 태껸하는 사람의 모습과 계곡에서 머리를 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흥미진진했다. 산봉우리와 신선의 모습에서 종교 도교를 만날 수 있다. 연꽃 모양의 몸체는 연꽃잎이 만개한 모습이며 꽃잎 하나하나에 수중 동물이 새겨져 있다.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은 세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 모양의 받침은 향로의 몸체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이 승천할 듯한 자세로 무게를 잡고 있다. 용은 한 발을 높이 치켜들고 꼬리와 세 발로 삼각형의 구조로 무게중심을 안정적으로 잡고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완벽한 구조와 아름다운 비례와 균형을 갖추고 있다. 역사에 기록된 대로 철을 다루는 기술이 빼어난 백제의 장인정신을 확증하고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의 모든 염원을 간직하고 있었다. 수중 동물의 왕인 용이 기저를 견고하게 다지고 신선들과 사람들이 어우러지고 악사들의 음악 소리가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하늘 향하여 뻗쳐오르던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했던 백제의 거룩한 꿈을 전해주고 있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창왕명석조사리감이 있었던 능산리 사지에서 발굴되었다. 창왕은 성왕의 아들로서 후에 위덕왕의 보위에 올랐다. 신라군과 장렬하게 맞서 싸웠던 관산성 전투에서 창 왕자가 군사를 진두지휘하여 싸웠다. 성왕은 창 왕자와 백제 군사를 격려하고 위문하기 위하여 오십 명의 적은 군사를 거느리고 관산성으로 향했다. 일본 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성왕은 전선에 나가 있는 왕자 창을 위문하러 가는 길에 신라군에게 길을 차단당해 포로가 되어 죽임을 당했고, 그의 머리는 신라 북청 계하에 매장하고 신라인들로 밟고 지나다니도록 했다고 한다.
창 왕자는 관산성에서 아버지 성왕을 잃고 삼만 명에 가까운 사졸들이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창 왕자는 아버지의 참담한 죽음과 사졸들의 전사에 얼마나 비통했을까! 창 왕자는 왕위 계승을 거부하고 불가에 귀의하여 아버지 성왕과 사졸들의 공덕을 빌겠다고 선언했다. 백제 대신들이 왕자 대신 100명을 출가시킨 후에 왕자 창은 위덕왕이 되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능산리 사지 회랑 공방 터 물두멍에서 발굴되었다. 당시 백제금동대향로의 모습에서 긴급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의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마지막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무참하게 짓밟히는 순간 긴급하게 물두멍에 숨겨졌을 것이다. 1400년 동안 어둠 속에 박제된 채 떨고 있었을 것이다. 찬란하고 슬픈 역사를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게 백제금동대향로는 스토리를 가장 많이 간직한 유물이 되었다. 음악과 종교와 생활 문화까지 모두 보여주고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어둠 속에서 1400년을 견디고 오늘날 우리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것처럼 코로나-19 때문에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조금만 더 버티라고 격려하는 듯했다. 현수막에 쓰여있는 글처럼 코로나블루 극복을 위한 힐링 & 치유였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속삭이고 있었다.
아버지 성왕이 꿈꾸는 세계, 아들 위덕왕이 이룬 태평성대 <별>이 되어 우리 가슴에 내렸다. 그 아버지를 향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아버지를 두고 그대를 두고> 곡조가 울부짖었다. 왕자 창에게 <그날의 기억>은 아픔이었으리라.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주는 향로를 피우고 <어디로 갈까나> 위덕왕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룬 후에 아버지께 돌아갔으리라.
가야금 연주를 마치고 독창 <햇살도 데리고 그대에게 돌아가리라> 노래를 들으면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백제금동대향로와 나의 재회의 기쁨은 찰나였다. 찬란한 슬픔의 역사와 함께 내 슬픔도 가야금 선율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그 아픔이 가슴에 파고들어 눈물샘을 휘저었다. 햇살도 데리고 그대에게 돌아가리라.
4. 정원을 손질하면서
주말에 한가한 시간을 만끽했다. 일부러 침대에서 이리저리 돌아누우면서 늦장 부리고 머리 감는 것도 생략하면서 맘껏 게으름을 호사처럼 누렸다. 그러나 이내 몸이 근질근질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집 안팎을 뒤집었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가구를 이리저리 장소를 옮기면서 대청소를 했다. 크고 두꺼운 겨울 이불을 따뜻한 물에 담갔다가 발로 푹푹 밟아 세탁했다. 좁은 세탁기 안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해서 시원하게 세탁되지 않는 것을 못 견디는 성미다.
오후에는 정원에서 지냈다. 아주 좁은 정원인데도 살뜰하게 손길 주지 않고 방치했다는 것이 못내 미안했다. 목련이 떨구어 낸 낙엽과 감나무에서 낙하한 잎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두꺼운 낙엽을 헤집고 연초록 새싹이 고개 내밀고 있었다.
갈퀴로 낙엽을 긁어모으려다 아기 새싹이 다칠까 걱정이 되어 직접 손으로 치우기로 했다. 손으로 살살 낙엽을 긁어내면서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이 쌓였다는 것을 알았다. 손놀림을 조심하면서 낙엽을 치우다가 멈추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몇 달 전 읽었던 박완서 작가의 수필집 <호미>를 생각했다. 박완서 작가를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 롤모델로 삼았었다. 불혹이 넘어 등단한 작가의 이력이 문학을 동경하던 내게 실현 가능한 꿈이 될 것만 같았었다. 작가의 글을 읽고 느낀 감동은 따뜻하고 잔잔하다는 것이었다. 하여 스스로 착하고 따뜻한 감동을 주는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노선에 들어섰으니 참으로 고맙고 감읍할 일이다.
수필집 『호미』는 박완서 작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라고 했다. 책 제목에서 예감할 수 있듯이 작가가 전원주택에 거주하면서 넓은 정원을 가꾸는 삶을 담아낸 수필집이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삶의 희로애락의 산맥 기, 승, 전을 넘어 결을 살고 있는 작가를 만났다. 또한, 정원에 일백 가지 넘은 꽃들을 가꾸고 있고 그 꽃들이 차례로 피었다 지기 때문에 계절마다 꽃을 볼 수 있는 행복을 과시하는 작가의 정원이 부러웠다. 그때 『호미』를 읽는 내내 “정원이 넓은 주택으로 이사하자. 나도 백 가지 넘은 꽃을 가꾸면서 계절마다 꽃을 보고 싶다.”라고 욕심부렸었다. 하늘까지 뻗쳐오르던 내 욕심은 독서를 마치면서 봄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일흔을 넘긴 작가는 글에서 “우리 70대들은 청소년 시절 조국이 해방되고 독립하는 광경을 맛보았고, 한국 전쟁을 당해서는 목숨 걸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했고, 전후 복구를 위해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자식을 낳았고,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그 자식들을 교육시켜 경제 성장의 주역으로 키웠다. 무엇보다 우리는 자식은 정직하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키워야 하는 줄 알았고, 가난보다는 부정이나 부도덕을 능멸했고, 단돈 몇 푼도 빚지고는 못 살 만큼 남의 돈을 두려워했다. 우리는 이렇게 간이 작다. 그러나 간 큰 이들이 아무리 말아먹어도 이 나라가 아주 망하지 않을 것 하나만은 확실한 것은 바로 간 작은 이들이 초석이 되어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좀 으스대면 안 될까.”라고 말했다.
나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늘 주창해왔으면서도 작가의 글을 읽은 후 이 땅의 어르신들을 더 존경하게 되었다. 그랬다. 우리 세대는 선조들의 수고와 피땀을 전설로 치부하면서 내 자식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들을 자행하는 것은 우리 세대 부모의 아전인수격 그릇된 가르침 탓이라고 통감하고 있다. 각종 매체에서 모골이 송연한 사람이 사람이기를 거절한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나는 무릎 꿇고 두 손 들고 벌서고 싶은 심정이다. 초석이 되어 떠받치고 계신 어르신들께 회초리라도 맞고 싶을 때가 많다. (물론 그렇지 않은 훌륭한 부모들도 많이 있겠지만······)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이따금 부는 바람이 아직은 물러나기를 아쉬워하는 겨울의 미련 탓인지 추웠다. 정원에 수북하게 쌓였던 낙엽을 긁어내니 산뜻했다. 수선화, 원추리, 꽃 잔디, 붓꽃, 개나리, 동백, 장미 등이 잎을 피우고 있었다. 지금 있는 꽃들을 사랑으로 알뜰살뜰 보살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좁은 정원 손질하는데 오후 내내 시간을 허비했다. 아마도 일백 가지 넘은 꽃들이 있는 정원을 갖게 되면 노동에 치여 다른 것을 못하게 되지 않을까?
어저께 한바탕 봄비가 내린 후 좁은 정원이 아우성이다. 꽃과 잡초들이 다투어 자라고 있다. 파란색 직사각형 화분에서 부추가 예쁘게 자라고 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아버지 텃밭에서 옮겨왔으니 우리 정원에서 생활한 지 올해로 9년째 되었다. 며칠 후면 식탁에 봄의 향기를 가득 품은 부추전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나는 그리움에 몸서리치리라.
5. 내 마음에 뜨는 별
비가 내렸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삼천 초목이 애타게 기다리는 봄비가 내렸다. 작은 정원에는 초록색 잎이 살짝 땅을 비집고 나오는 중이었다. 목련 나무는 가지 끝에 꽃눈을 달고 날마다 하늘 향하여 뻗쳐 오르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그들과 마주친 후 심장이 요동치고 있다. 이틀 만에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들이다. 내 새끼손가락 크기의 수선화는 그새 한 뼘 크기로 자랐다. 목련 가지의 꽃눈은 제 살을 찢고 크림색 속살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겨우내 현관을 드나들면서 앙다문 동백의 꽃망울을 쓰다듬었더랬다.
자연이 해답이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달콤한 사랑을 속삭였으나 요지부동이더니. 엊그제 봄비 다녀간 후 그들의 비밀이 탄로 나고 말았다. 도대체 봄비가 무엇이라 했을까.
해마다 봄비는 반가운 손님으로 찾아온다. 이번에 내린 봄비는 VVIP 대우를 해야 할 성싶다. 대지에 생명으로 스며들어 새싹을 깨우고 꽃을 피우는 거룩한 일과 온 국민의 애간장을 태우던 강원도 산불을 진화하는 위대한 과업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그 생명수가 내 마음에 길을 내고 흐르고 있다. 내 하늘을 맑게 씻어 주었다. 나의 하늘은 축복의 통로이다. 내가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따뜻하게 살아야 할 명분이다.
그 하늘에 별이 뜨기 시작했다. 밤하늘 우러러 별 헤던 소녀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순간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문학이 데려온 별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의 하늘에 별의 수가 더해지고 있다.
내 나이 지천명에 이르렀다. 마음은 소녀 시절의 그리움이 여전한데 거울 앞에 서면 중년의 여인이 있다. 소녀 시절에 굳게 걸어 두었던 빗장을 열어야 할까. 아니다. 싫다. 도리질한다. 내 마음의 하늘에 뜬 별 헤는 거룩한 시간이다.
최초의 별
선생님이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내 영혼의 눈시울이 퉁퉁 부어오른다. 딱딱한 나무 책상과 나무 의자에 앉아 오롯이 칠판을 향하고 눈이 초롱초롱했던 여중생이었다. 국어 수업시간을 기다리고 선생님 손끝을 따라 필기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좋아했다.
선생님은 무서웠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학생이 드물었다. 나는 선생님을 좋아했고 국어 수업시간에 전율하면서 수업에 열중했다. 선생님과 작별하던 날 들려주신 수불석권하라는 말씀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 과거의 언제 순간으로 돌아가겠느냐 물으면 단 1초의 망설임 없이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토록 애타는 그리움이다. 나의 하늘에 문학의 별이 뜰 수 있도록 최초의 작업을 한 선생님은 영원히 지지 않는 별이다.
나를 등단으로 인도한 별
그 별은 한 구절의 시구에 혼절할 수 있는 별이다. 그 별은 시가 없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그 별을 보고 기괴하다고 일축한다. 그러나 나는 그 별이 시를 향하여 뜨겁게 구애하는 아름다운 면모를 잊을 수가 없다. 내 하늘에서 빛나는 별이다.
한 해에 수필과 시를 등단할 수 있도록 나를 찾아내고 닦아 빛나게 한 별! 나는 등단 소감문에서 그 별의 은혜에 결초보은하겠다고 장담했었다. 어떤 방해물이 가로막는다손 그 별을 향한 내 신의는 일편단심 하리라.
북극성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별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별이다. 내게 별들을 점지한 별 중의 별이다. 나는 작은 우물 안에서 그 테두리만큼의 하늘을 이고 있었다. 내가 그 우물에서 나오도록 유도하고 블랙홀같이 문학의 바다에 뛰어들게 했다.
아낌없이 전부 내어준 가르침을 어찌 잊으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시고 위태위태한 순간에도 묵묵히 지켜보는 것으로 나를 키워냈다. 그 은혜 갚을 수 없지만 한 걸음씩 반듯하게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내가 입은 은혜를 나도 후배에게 전승하여 그 은혜의 열매가 몇 배로 맺게 하겠다.
나를 배움으로 인도한 별
내가 작년에 대학원 박사과정에 불합격했을 때 안타까워했던 스승님은 내 하늘의 별이다. 면접시험에서 시를 암송하게 하시고 또박또박 암송하는 제자를 넌지시 옆의 감독관에게 소개했다. 그 순간 스승님 얼굴에 비치는 만족하는 미소를 보았다. 코로나로 인하여 대면수업을 못하고 비대면 수업으로 동영상 강의로 공부하는 것이 불만이다.
스승님께서는 세종시 교육감으로 출마하여 한참 선거운동하시느라 바쁘게 지내고 계시다. 세종시 교육감에 한국어 전도사 최태호! 환상적이다. 스승님께서 세종시 교육감으로 당선되어 교육에 대한 확고한 철학으로 세종시 국가백년대계를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중앙 문단으로 이끌어 준 별
그 별은 카페에 있는 내 글을 모두 읽었다고 하셨다. 나를 중앙 무대로 끌어올려서 소임을 맡겨 주셨다. 어쩌다 전화하셔서 “신문에 낼 기사문을 써서 보내주세요.”, “내가 이번에 쓴 소설인데 출판 전에 미리 읽어 주세요.” 등 이런저런 글을 부탁하신다. 나는 재주가 없음을 한탄하면서 낑낑대면서 혼신을 다해 글을 써서 보낸다.
그 별은 우선 칭찬이다. “김 작가, 기사문을 육하원칙에 의해 아주 잘 썼어요. 많은 분량의 글을 읽으면서 오탈자를 정리해 주어서 감동입니다. 소설에 대한 감상문도 감사합니다. 그 글에 대한 장단점을 써 주세요.” 하여 나는 장점을 유창하게 써서 보냈다. 감히 단점을 찾을 수가 없었노라 말씀드렸다.
그 별의 충고다. 기성작가로서 능력이 출중하다. 단점을 지적할 수 있는 경지다. 겸손한 인품을 알겠으나 앞으로는 과감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쓴 편집 후기에 대하여 아낌없는 조언을 주셨다. 편집 후기 잘 썼다고 하시면서 다른 문학지의 편집 후기를 읽어 볼 것을 권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내 글의 부족한 부분을 깨닫는다.
지난주에는 내가 쓴 글의 분량을 하문하셨다. 시 몇 편, 수필 몇 편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책으로 출판할 수 있도록 정리해 두라고 하셨다. 우선 전자책으로 발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 별은 통화할 때마다 수필 쓰는 문장력으로 충분히 소설을 쓸 수 있다면서 소설을 쓸 것을 권면하신다. 시와 수필도 좋지만, 세계적인 명작은 소설이라는 말씀을 자랑삼아 내 어깨에 용기를 얹어 주신다. 감읍할 뿐이다.
다시 붓을 잡았다는 별
그 별은 우연히 연락이 닿아 카톡으로 글을 주고받는 인연이 되었다. 슬며시 놓았던 붓을 다시 잡았다고 한다. 쓴 글을 모아 출판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몸은 쇠약해져 가고 있지만, 마음을 붙들어 매고 열심히 글을 쓰겠다고 한다. 그 별과 세대를 아우르는 글 친구가 되기로 했다. 따뜻한 마음 모아 진심으로 응원한다.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별, 별, 별
문학회에서 직책을 맡아 동분서주하는 나를 늘 격려하는 별, 그리고 별들이 있다. 누군가의 언행 심사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일하는 모습에서 순수함을 보았단다. 사심 없이 수고하고 애쓰는 모습으로 문학회를 사랑과 화합으로 만들어가는 모습이 감동이라고 한다.
내가 더 발전할 수 있기를 빌어주는 별이다. 내 글이 더 깊이 있고 높아질 수 있도록 조언하고 백제의 고도 부여에 대하여 늘 연구하고 준비하라고 한다. 언제 어디서나 문학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누군가 물었을 때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있으라 한다. 누군가 강의를 의뢰할 때 흔쾌히 수락할 수 있도록 자신을 채찍질하라고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힘들어할 때 처방으로 준 처세술이 명쾌하다. 단체 대화방에서 누군가가 모함할 때 오히려 기뻐하라고 한다. 모두가 모함받는 사람보다 모함하는 사람을 지탄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같잖은 모함에 흔들리지 말고 견고한 사람이 되라고 한다.
감사가 넘친다. 홀로 걸어온 길이다. 그저 문학이 좋아서 책을 껴안고 낮이나 밤이나 지냈다. 한 편의 시에 자지러지고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는 외국의 늙은 작가에게 사로잡혀서 몇 날 며칠을 지낸다.
그 문학의 길에서 나 또한 별이 되리라. 시간이 흐르고 더 흐른 후 백발의 늙은 작가가 되었을 때 후배들에게 들려줄 사연을 보석처럼 간직하련다.
6. 지금은 사랑할 때
하루를 보내고 다시 하루를 맞이했다. 여기저기서 새해가 밝았다고 난리다. 시간의 일직 선상에서 쉼표를 찍은 이는 누구인가. 삼백 육십오 개의 별에 특별한 이름을 붙여준 이는 누구인가. 돌고 도는 별들 속에 비집고 나의 궤도를 차지하려고 몸부림친다.
지금까지 걸어온 여정 뒤돌아본다. 한 여자가 걸어온 별거 아닌 길이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이었다. 겨우내 하얀 눈이 산을 포근하게 덮고 있었다. 부엉이가 우는 겨울밤에 아궁이 불 속에 묻어 두었던 군고구마를 꺼내어 커다란 항아리에서 살얼음을 깨고 꺼낸 동치미와 먹었던 유년시절은 동화와 다름없다.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에서 꿀잠을 자고 예쁜 꿈을 꾸었다.
새벽녘이 되면 아랫목이 식어서 살짝 한기를 느끼지만, 곧 따뜻해지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께서 가마솥에 소여물을 끓이느라 장작불을 지폈기 때문이었다. 뒤꼍으로 난 부엌문을 열면 장독대 뚜껑마다 새하얀 눈을 소복하게 이고 있었다. 우리 장독대는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엄마의 성지였다. 엄마를 나르시시즘에 푹 젖게 하는 엄마의 비밀의 화원이었다.
내 유년의 봄은 소를 몰아 산비탈 밭을 가는 아버지의 함성에서 가장 먼저 다가왔다. 앞산에서 진달래가 분홍빛 수줍은 미소를 내비치는 것도 뒷산의 뻐꾸기가 봄맞이 노래를 하는 것도 부지런한 농부 내 아버지의 뒤 차지였다. 아버지와 엄마를 따라 논두렁을 뛰어가고 밭두렁을 달려가다가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들꽃들과 풀벌레들은 모두 내 동무가 되었다. 노란 나비를 따라 나풀나풀 춤을 추면서 까르르 웃었던 계집아이가 뒤돌아보면 언제나 아버지와 엄마가 있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고 아무것도 부럽지 않았던 마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봄이 여름을 초대하고 자리를 비켜 앉으면 엄마 따라 호미 들고 고추밭으로 갔다. 산등성이 길게 늘어선 고추밭 풀을 뽑아내면 그 옆에 있는 콩밭으로 옮겨 앉아 풀을 뽑았다. 콩밭 김매기를 마치면 고추밭에 자라고 있는 잡초를 뽑아야 했다. 마치 악보를 연주하다가 도돌이표를 만나면 그 부분을 반복하여 연주하듯이 내 여름날의 연주는 고추밭과 콩밭을 번갈아 김을 매는 도돌이표였다.
그 고단한 여정 속에서 한 편의 시로 각인된 장면이 있다. 여름밤에 마당에 밀짚으로 짠 멍석을 펼쳐놓고 엄마의 무릎을 베고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캄캄한 하늘을 빼곡하게 수놓은 은하수를 보았다. 엄마가 견우와 직녀의 사랑 얘기를 들려줄 때 길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엄마는 “인희야,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말해라. 그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하고 말했다. 그 여름밤의 단상이 지워지지 않는 절절한 그리움이다.
아버지의 대지가 황금 물결을 이루는 가을은 감사 그 자체였다. 엄마는 가을을 가장 사랑했던 것 같다. 논에서 고개 숙인 벼가 가을바람에 차르르 부딪히는 소리는 하늘의 소리였다. 고추밭에서 고추를 딸 때 엄마의 감탄사를 잊지 못한다.
엄마는 “인희야, 이 고추 빛깔을 보아라. 어쩌면 이렇게 고울 수가 있을까. 가을바람이 초록색 고추를 빨갛게 물들였단다. 저기 가을 하늘을 보아라. 옥색 호수 같은 빛깔을 보아라.” 하고 감탄했다. 나는 “엄마, 힘들지 않아? 여름 내내 김매기에 쩔쩔매다가 이제는 고추를 따는 노동에 시달리는 건데.” 하고 푸념을 섞어 대꾸했다. 엄마는 활짝 웃으면서 가을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해마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아버지는 “올해도 대풍이란다. 너희들은 많이 먹고 무럭무럭 크면 된단다.”라고 육 남매의 기를 팍팍 세워 주었다.
나는 좋은 아버지 예쁜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하여 소녀가 되었다. 중학교 시절은 어쩌면 내 삶의 여정에서 가장 그리운 시절인지 모른다. 계집아이가 처음으로 그리움의 빛깔을 배웠던 때였다. 그 소녀 시절에 별을 사랑한 시인 윤동주 님을 만났다. 스물여덟의 청년 시인은 가장 맑고 아름답고 순수했던 별로 내 마음에 각인되었다.
소녀가 그토록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 국어 수업시간에 예쁘게 꼭꼭 눌러쓴 예습 노트를 펼쳐놓고 선생님께서 내 옆으로 와서 내 수고를 알아주기를 기다렸다. 선생님께서는 수업하면서 자연스럽게 내게로 다가와서 노트를 살짝 톡톡 두 번 쳐서 나만 알아듣는 방식으로 비밀스럽게 칭찬했다.
그 순간 스스로 만족하여 전율했다. 소녀 시절 국어 선생님과 함께 보냈던 두 개의 나이테는 보석상자로 간직하고 있다. 두고두고 그 상자를 뒤적이면서 시를 쓰고 수필을 쓸 것이다. 언젠가는 소설을 쓸지도 모르겠다. 국어 선생님께서 헤어질 때 마지막으로 들려준 “인희야, 수불석권해라.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선생님의 마지막 당부를 기억해라.”라는 말씀을 계명처럼 여기고 지켜왔다.
고등학교 시절은 우울했던 기억이 많다. 우선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못하고 취업을 위해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이 슬펐다. 상업고등학교 교과 과정은 대학 진학을 위한 인문계 고등학교와 다르게 취업 위주의 과목을 배웠다.
나는 주산 · 부기 · 한글 타자 · 영문 타자 급수 등 각종 자격증 시험에 매달렸다. 상업계 고등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자격증을 보유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말에 대전에서 고향에 오는 친구들을 만나면 목마른 사슴처럼 고등학교에서 어떻게 공부하는지 묻곤 했었다. 흔히 여자들에게 여고 시절은 꿈 많은 소녀 시절의 대명사일 텐데 내게는 아름다운 꽃의 그늘처럼 회색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상경했다. 경기도 부천시에 거주하면서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전철 1호선을 타고 서울로 출퇴근했다. 전철 1호선은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다. 부천역에 전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리면 빽빽한 사람 속으로 나를 밀어 넣어야 했다. 앞과 뒤에 있는 사람과 양쪽 옆에 있는 사람들이 생면부지이지만 밀착해야만 했었다.
나는 그 전쟁터 같은 삶의 현장에서 독서를 했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출입문 바로 옆에 비교적 손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자리는 자유롭게 책을 펼칠 수 있어서 좋았다. 그 명당자리를 차지하려고 생쥐같이 반짝반짝 눈망울을 굴리면서 기회를 노렸다. 참으로 우스운 것은 매일 같은 시간에 만나다시피 하는 사람들인지라 그 명당자리를 내게 양보하는 아저씨가 있었다는 것이다.
국어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당부했던 한 마디. 수불석권!
지금의 나를 만든 일등공신이다. 내 처음 그리움이었던 국어 선생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켜내느라 책을 읽었던 것이 나의 가장 큰 콘텐츠가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늦깎이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 시인과 수필가로 등단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수불석권이 만들어낸 힘이었다는 것을 역설한다.
국어 선생님께서는 이를 노렸을지도 모른다고 미루어 짐작하고 있다. 여전히 책을 끼고 살고 있으니 국어 선생님의 가르침은 내 운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고 하겠다. 그렇게 만났던 저자와 책의 내용이 고스란히 내 삶에 녹아 스며들었으니 운명을 넘어 숙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꿈은 이루어진다!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좌우명이 된 문장이다. 나는 꿈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라고 덧붙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그 꿈이 이루어지는 여정에서 직시하고 얻은 말이다.
산골에서 시작 노트를 가지고 다닌 계집아이가 소녀가 되고 여인이 되었을 때 시인으로 등단했다. 나는 그 여정에서 시인의 꿈을 놓지 않았고 끝없이 자맥질했다. 긴 시간 동안 책을 읽었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시인에 걸맞게 공부를 지속했다. 시인의 말과 글은 시인을 고스란히 표출한다고 여겼다. 하여 나는 언행심사를 살얼음판 걷듯이 살피고 돌다리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살고 있다.
결혼한 후 현모양처를 꿈꾸었다. 한 남자의 착한 아내가 되기 위해 밤낮으로 고민했다. 두 자녀의 지혜로운 엄마가 되기 위해 삼백육십오일 긴장의 끈을 단단하게 조이고 지냈다. 그 남자가 시댁과 지인들에게 가장 행복한 남자라는 칭송을 듣고 있다. 두 자녀가 성인이 되어 딸은 아빠 같은 남자를 배우자로 만나고 싶다고 고백하고 아들은 엄마 같은 여자를 배우자로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춤을 추었다. 그 남자 어깨에 힘주고 당당하게 활보하고 두 자녀는 국가와 사회의 인재가 되었으니 무엇을 더 바라랴.
지금이 나에게 주는 최상의 선물이다.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는 효녀가 되고 싶었다. 남편에게 착한 아내가 되어 주고 싶었고 자녀에게 똑똑한 엄마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시어머니께는 따뜻한 며느리가 되어드리고 싶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지냈다.
참으로 고단하게 걸어온 길에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았다. 더러 소나기 내리고 폭풍우가 들이닥친 날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모니를 이루었다고 자부한다. 인생사 햇살만 따사롭게 비춘다면 꽃이 지고 열매 맺는 일이 있으랴. 꼬투리 안에 열매가 영글기 위해서 바람이 흔들어 주고 캄캄한 어둠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사랑할 때!
문학은 내 이상형이다. 문학을 북극성 삼아 오롯이 걸어온 길이다. 하여 문학은 내 호흡이고 내 운명이라 해도 한치 어긋나지 않는다. 시제를 붙잡고 몇 날 며칠을 되새김질한다. 그러다가 섬광처럼 찰나에 빛나는 어휘가 생각나면 컴퓨터를 켜고 편린을 불러보아 이리저리 자리를 찾아주고 퍼즐을 완성한다.
더러는 잠을 자다가 떠오르는 영감을 메모하기 위해 이불에서 빠져나올 때도 있다. 분주한 일상에서 동분서주하다가 모두 잠든 시간에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다. 내가 가장 나답게 빛나는 시간이다.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로 한다. 지금까지 세상을 향해 차마 열지 못하고 빗장을 고정한 채 소녀의 순수를 간직한 방을 고수할 작정이다. 세상의 조류에 걸음을 맞추지 못하는 불치를 그대로 사랑하기로 한다. 나는 계속 착하고 따뜻하게 살고 싶다.
내가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지인들이 착해서 당하는 것이라고 충고를 주었지만 그래도 착한 내가 좋다. 선한 끝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책이나 드라마에서도 착한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았다. 나도 착하게 살면서 복을 많이 받고 싶다. 나의 언행심사가 곧 나의 콘텐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더 좋은 자양분을 주어서 한 단계 높은 경지에 나를 두고 싶다.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준 별처럼 나도 누군가의 별이 되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에서 만난 작은 꽃의 사연을 들려주고 옷깃을 여미게 하였던 바람의 심술을 에피소드로 들려주고 싶다. 나그네의 겉옷을 벗긴 것은 세차게 불었던 바람이 아니라 소리 없이 따뜻하게 내리쬐던 햇살이었노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 머리 위에 흰 눈이 살포시 내리는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후배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리라. 내 입에서 나오는 말과 내가 쓰는 글에 향기가 스며들 수 있도록 바르게 살리라. 내가 사랑한 시인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리라.
멀리 가로등 불빛이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겨울밤. 작은 별 하나 창가에 바짝 다가와서 엿보는 밤이다. 반 평도 안 되는 공간에 앉아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시를 써야 할 시간이다. 지금은 사랑할 때.
7. 나는 아직도 연애를 꿈꾼다.
나는 아직도 연애를 꿈꾼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일상에서 전환하고 싶을 때 내가 지르는 외마디 입버릇이다. 계절이 또 다른 계절로 옮겨 갈 즈음 몸살처럼 바르르 떨면서 연애를 꿈꾼다고 실토하는 버릇은 어쩌면 불치인지도 모르겠다. 타인들이 얼핏 들으면 놀라움을 감추기 힘들겠지만 우리 가족들은 허허 웃으면서 넘겨버린다. 내 나이 지천명을 넘기고 두 자녀가 성인으로 성장한 지금도 불치는 호전될 기미가 없다.
나의 이십 대는 교회에서 헌신하고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마음의 빗장을 걸어두고 거룩한 소망을 마음에 간직하고 직장생활과 교회 생활을 오갔다. 가족들의 의기투합으로 남편을 소개로 만나고 손가락 꼽을 만큼 짧은 만남 후 결혼을 했다. 작은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할 시기에 우리 살림집이 고등학교 근처라는 이유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시동생과 동거를 했다. 그때 나는 바람직한 모범적인 새댁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밥을 지어 먹고, 시동생 도시락을 챙기고, 저녁에도 밥을 지어서 상을 차리고 밤에 야식을 준비해서 책상에 올려두고 고단한 잠을 청했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도 남편에게 연애 기간이 없었던 것과 달콤한 신혼이 없었던 것을 심심풀이 삼아 잔소리를 해댄다. 아마도 늙어 파파 할머니가 되어도 내 연애에 대한 한풀이는 멈추지 않을 듯싶다.
언젠가 “오늘부터 나 연애 시작했어”하고 선포하고 책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시집을 펼치고 미소를 머금은 나를 보면서 딸아이가 “엄마 애인이 누구예요?”하고 맞장구를 친다. 나는 말없이 시집 표지를 보여주었다. 그날 이후로 나의 연애 상대는 시한부라는 것과 언제든지 상대가 교체된다는 것을 우리 가족은 알고 있다. 몇 년 전에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아들아이가 호들갑스럽게 아빠에게 달려가서 “아빠, 이번에 어머니 연애는 장기간 유지될 것 같습니다.”하고 말해서 가족들이 박장대소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나와 딸아이는 일 년에 두 번씩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 전시회를 가기로 약속을 했고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 프랑스의 오르세 미술관이 왔을 때 고흐에 매혹되어서 지낸 적이 있었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지금도 우리 모녀의 대화에 등장하곤 한다. 샤갈 전에 다녀왔을 때는 감동이 몇 배 컸었다. 아름다운 색채 못지않게 샤갈이 유대인이라는 사실과 그의 그림 곳곳에 유대인의 삶 –랍비와 성경-을 표현해 둔 것에 감동이 커서 말을 잇지 못했었다. 샤갈은 그림으로 2차 대전 때 유대인 학살의 역사 홀로코스트를 잊지 않도록 유대민족에게 민족의식을 전해주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역시 유대인은 다르구나!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그 감동을 역설한 나를 보고 딸아이는 “엄마 이번에는 샤갈과 연애 중이죠?”하고 결론지었다. 그날 우리 가족들에게 나는 국제적으로 연애하고 있다고 대단하다고 놀림을 받았었다.
여름에 진해에서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들아이가 3주 하계휴가를 와서 같이 지냈다. 남편과 둘이 지내던 적막한 가정에 쿵쿵거리면서 다니는 아들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분위기가 좋았다. 퇴근하면서 간식을 사 들고 귀가하는 시간이 달콤했다. 일과를 마치고 밤늦은 시간에 책을 펼쳤더니 아들이 바짝 다가온다. 내가 읽고 있던 책을 살짝 뺏어 들고 표지를 살피더니 갸우뚱한다. 그때 나는 『칼의 노래』를 읽고 있었다. “엄마, 이번에는 애인이 누구예요? 감 잡기 어렵네요. 작가인지 주인공인지···” “응, 둘 다야. 작가도 멋지고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지.” 아들아이가 엄청 난감해하더니 소리 지른다. “와! 대박 사건이다. 아빠, 누나~~ 이번 어머니 연애는 삼각관계예요.” 하하 호호 낄낄. 난리 났었다.
불타는 태양이 물러가면서 코스모스를 불러들이고 있는 계절의 기로에서 나는 다시 신음하고 있다. 오늘도 사무실을 나와서 몇 번을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탄성을 질렀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늦은 밤에 가을벌레들의 합창이 한창이다. 주체할 수 없는 이 감정을 어찌할까? 아, 다시 연애를 시작해야겠다. 내일 주말에는 서점에 들러야겠다.
8. 너는 내 운명
글을 쓴다는 것. 내게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다. 내 이름에 따라오는 시인 내지는 수필가라는 이름을 영광스럽게 감당하고 싶다. 그러나 때로는 못 견디게 부끄럽고 버거울 때가 있다. 전자만 취하고 후자를 버리라고 한다면···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동전의 두 얼굴 같은 내 삶인 것을!
내 글쓰기의 추억을 뒤집어 본다. 시골아이로 성장하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글을 쓰기 위한 노트를 들고 다닌 기억이 있다. 네 잎 클로버 사이에 앉아서 행운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던 모습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그때 나에게 문학을 말해준 사람이 없었다. 문학책을 접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 시작 노트를 들고 다닌 자신이 의아하고 한편 대견하다고 여겨진다.
나는 어린 시절에 편지 쓰기를 즐겨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편지를 쓰고 우표를 사고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을 때 희열마저 넘쳤다. 그때 천안에서 대학교에 다닌 오빠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는 언니들도 자주 안부편지를 보내왔고 답장을 쓰는 건 내 차지였다. 부모님의 안부와 시골의 소소한 계절의 변화를 내용으로 쓴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에서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놀다가 큰 가방을 자전거에 싣고 집배원 아저씨가 오면 달려갔다. 내 편지를 가져오는 횟수가 잦은 탓에 친구들도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국군장병 아저씨께 위문편지를 쓰는 일이 해마다 치르는 행사였다. 그때 군인 아저씨 답장을 받고 몇 번의 편지가 오갔던 기억이 있다.
내가 성장할 때 동네 아주머니 중에 글씨를 모르는 분들이 많았다. 군에 간 아들에게서 편지가 오면 편지를 들고 내게로 달려와서 읽어달라고 하셨다. 내가 ‘어머니께’ 하고 한 소절 읽으면 아주머니께서는 ‘그려, 그려 어서 말 혀.’ 하셨다. 다시 내가 다음 소절 ‘건강하신지요?’ 하고 읽으면 다음 소절 읽기 전에 아주머니께서는 울먹이는 소리로 ‘그려, 엄마는 건강혀. 내 걱정 말어. 군에 간 니가 힘들지. 에휴.’하면서 울먹이다 앞치마에 휑하고 코를 풀었다. 그리고 내게 어서 읽으라고 재촉하셨다. 그렇게 한 통의 편지를 읽어주려면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나는 편지를 다 읽어주고 답장을 써야 했다. 아주머니께서 ‘내 새끼 재성이 보거라.’하고 운을 떼시면 나는 ‘보고 싶은 아들 재성이에게’라고 썼다. 구구절절 불러주는 사연을 표준말로 바꾸어서 쓰고 마지막에 ‘밥 잘 먹고 건강해라. 에미가’하고 매듭짓고 추신에 아주머니께서 부르시는 대로 받아 적었다는 것과 내 이름을 밝혔다. 그렇게 많은 편지를 읽어주고 답장을 썼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러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 동네에 선배들이 많았는데 어째서 편지를 읽어주고 답장을 쓰는 일이 내 차지가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작은 시골아이가 무슨 배짱으로 어르신들의 말을 받아 표준어로 바꾸었는지 허~참! 아무리 생각해도 신통하다고 여겨진다.
그렇게 성장하면서 중학생이 되었고 그리움의 주인공 국어 선생님을 만났다. 국어 선생님의 안내로 문학(文學)의 하늘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그해 가을에 만난 한 권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내 운명을 문학으로 살도록 이름 지었는지 모르겠다. 가을밤 마당에 서서 두 팔 벌려 하늘에서 우르르 내 품 안으로 쏟아지는 별들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울어버렸다. 그리고 별을 노래한 별의 시인 윤동주 님을 사랑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그 사랑의 빛깔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아니 영원히 변치 않을 자신이 있다.
수년 전에 모임에서 중국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중국 연변과 백두산을 다녀온 짧은 여정이었다. 일행은 여행 중에 용정에 있는 항일운동의 중심지 대성중학교를 방문했다.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학교에 윤동주 교실이 있어서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용정에서 편찬한 윤동주 시인에 대한 책을 살 수 있었다. 지금도 지인들과 여행담을 할 때 나는 그때가 가장 좋았다고 몸서리친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대전 대청댐으로 미술사생대회를 갔다. 그때 아이 담임 선생님은 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학부모백일장대회에 내 이름을 올렸으니 학교 명예를 위해 글을 한 편 쓰라고 당부했다. 하늘이 캄캄했다. 문학을 좋아한 것은 까마득한 옛일이 된 지 오래고 두 아이를 양육하면서 동분서주하고 좌충우돌하던 날들이었다. 그날 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물을 소재로 글을 썼다. 내 글이 당선되어서 대전 MBC방송국에서 수상하게 되었고 (수상장면이 TV에 나왔다. ㅎㅎ) 그 후로 학교에서 추천하는 학부모 대상 글쓰기대회를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장거리 경주를 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하고 수필가로 등단했다. 내 이름에 시인과 수필가라는 이름이 훈장처럼 다가왔다.
아직도 나는 공부에 대한 한이 많아서 책을 읽는다. 내 이십 대 꽃다운 나이에 공부하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면서 책을 읽었다. 그때 나는 활자중독자였다. 손에 책이 없으면 불안했다. 언제나 어디서나 인쇄물이 있으면 반사적으로 읽어댔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만나는 작가와 주인공을 애인이라 명명하고 있다. 하여 연애의 대상이 한시적이고 자주 바뀌고 있다.
현재는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읽고 있다. 얼마 전 TV에서 재러드 다이아몬드 학자를 봤다. 채널을 돌리는 중에 프로그램이 끝나는 무렵이었으니 스치듯이 만난 인연이었다. 학자는 패널들에게 “2050년에 나는 이 세상에 없겠지만, 여러분들이 아름답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라.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세상···”하고 말하면서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찰나의 그 모습에 사로잡혀서 『총, 균, 쇠』를 품에 안고 있다. 내 연애 방식대로 말하면 지금은 재러드 다이아몬드 학자와 열애 중이라고 해야겠다.
책을 읽는 시간은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것이기를 원한다. 그 감동을 글로 쓰는 시간이 달콤한 행복 그 자체다. 결코 책을 놓을 수 없고 글쓰기를 멈출 수 없으리라.
하여 문학, 너는 내 운명!!
9. 소녀가 사랑한 별
나는 오늘도 동산에 올라 하늘을 우러른다. 어둠 속에서 찬연하게 빛나는 별을 찾는다. 겨울바람 옷깃을 파고들고 나도 별도 파르르 떨고 있다. 우두망찰 서서 별 헤는 버릇은 소녀 적부터 여전하다. 세월이 이만큼 나앉아 있어도 별을 맞이하는 경건은 언제나 거룩한 의식이다.
소녀의 별 하나!
열다섯 살 소녀가 처음 만난 詩人은 스물여덟 청년이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소녀는 작은 동산에 올라 친구들이 술래잡기하는 동안 시집을 펼쳤다. 그들이 우르르 몰려가고 땅거미가 내려 등을 떠밀면 동산을 내려왔다. 소녀가 성장하여 사회인이 되었을 때도 시인을 동경하는 마음은 일편단심이었다.
<서시>를 좌우명처럼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다. 시인처럼 잎새에 이는 미세한 바람에도 괴로워하면서 바르르 떨었다. 어떤 중차대한 선택의 위기에 놓였을 때 내가 결정하는 선택의 포커스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것이어야 했다.
소녀 시절에 시인을 만난 후 지천명에 이르도록 그리움의 빛깔은 퇴색되지 않았다. 지천명에 소녀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 그의 나이가 언제나 스물여덟이기 때문이다.
그 별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가장 순수한 모국어로 詩를 쓴 윤동주 시인. 그가 부끄러움에 떨어야 했던 순간을 더듬었다. 그의 이름과 빛과 향기를 송두리째 빼앗은 나라를 증오했다. 그 나라에 여행하는 것조차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수년 전 중국 여행 중에 그의 고향에 머물렀다. 그가 다녔던 중학교에 방문하고 그가 앉아서 공부했던 자리에 앉아 보았다. 그의 고향에서 펴낸 책을 사 왔다. 카페에 그의 공간을 만들어 그의 詩를 한 편씩 탑재하고 있다. 내가 시 낭송가가 되어 무대에서 시 낭송하던 날 맨 처음 <별 헤는 밤>을 낭송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그를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몸부림치는 날들이다.
그의 옆에서 그와 함께 빛나는 별이 되고 싶다. 먼 훗날 내가 별이 되어 그에게 가는 날 그에게 들려줄 많은 말들을 준비해야 한다. 나의 말과 글과 행동이 모두 나의 공적이 될 것이고 그것들은 그에게 들려줄 사연이 될 터이다. 그의 발자국에 나의 발을 맞추면서 살얼음판을 걷는 이유다.
소녀의 별 둘!
아, 선생님! 가슴에 걸려 통증으로 다가오는 별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만난 국어 선생님은 판도라의 마지막 상자다.
영원아!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詩 잘 외웠어.
예습 꼼꼼하게 잘했네.
틀리라고 낸 시험문제 유일하게 맞은
똑똑한 영원.
세파에 시달려도 모습 변치 마라.
인문계 고등학교 갈 수 없다니···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꼭! 수불석권해라.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수불석권 잊지 마라.
선생님과 수업했던 ‘소나기’는 아직도 꿈에 등장하는 소재다. 수업시간에 황진이의 시를 배울 때 선생님께서는 서화담이 부럽다고 했었다. 어쩌면 그때 나는 황진이같이 절절한 그리움을 시로 쓰고 싶어 시인을 꿈꾸었을 것이다.
나의 스무 살 시절은 선생님의 마지막 당부 때문에 활자증독이란 불치병에 걸렸었다. 손에 책이 없는 날에는 전철 안에서 승객이 읽다 버린 구겨진 신문을 펼쳐 읽었다. 버스 정류장의 빼곡한 글씨를 허겁지겁 읽었다. 회색의 고층건물 숲에서 별을 찾다가 몽유병 환자처럼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선생님께서 주신 마지막 말씀 수불석권을 지켜내면서 세월이 흐른 후 등단하여 시인이 되고 수필가가 되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빛을 발하는 북극성처럼 선생님의 말씀은 좌표가 되었다. 내가 외도하지 않고 반듯하게 걸어온 발걸음을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다.
별이여, 사랑이여!
영원 김인희
당신을 향하여 피어난
그리움이 동산으로 이끕니다
구름 걷힌 맑은 밤하늘
또렷한 당신이 있습니다.
장대비가 내리는 밤에도
거기 그 자리 당신이 있음을 알아요
별이신 당신은
언제나 스물아홉 청년
가장 순수한 모국어로 사랑을 노래하고
조국의 암울한 역사 앞에서 오열했던 당신
중국에서는 동북공정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라 하고
남쪽 바다 건너에서 국적 분쟁을 야기하고 있는
참혹한 현실에 주저앉아 목놓아 웁니다.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갈구했던 독립운동가
조선인의 정체성을 부르짖은 저항 시인
원수의 땅 형무소에서 빛을 잃은 조선의 별
억울하게 빼앗긴 별이여!
몸부림치게 그리운 사랑이여!
결코
다시는
당신을 잃지 않겠습니다.
얼마 전 가족들에게 ‘나 국어 선생님 찾을 거야.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만날 거야.’라고 선언했다. 남편은 도움이 필요하다면 돕겠다고 했고 자녀들도 선생님 만날 수 있기를 응원했다. 선생님 주소를 들고 대문을 나서려는 찰나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 그리움의 선생님은 박제된 중학교 시절의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더 이상 소녀 시절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춘기 소녀를 중년의 여인으로 만들어 놓은 시간이 선생님의 모습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끙끙하다가 미루어 두기로 했다.
하여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못다 핀 소녀가 있다. 여기에 에피소드가 있다. 부여에서 정착하고 교회를 찾아 신앙생활을 할 때다. 교회 가족들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세상과 동떨어진 말과 행동이 가식 같았다고 했다. 하여 내가 없을 때는 당신들끼리 몇 년 지나고 나면 본색이 드러날 테니 두고 보자고 내기를 했다고 했다. 이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당신들이 불러주는 이름이 ‘소녀’가 되었다.
내가 차마 열지 못한 상자 하나. 그 판도라의 상자 안에는 소녀가 있고 소녀가 사랑한 별이 있다.
10. 한 송이 꽃과 같이
먼 산새 소리가 알람이 되어 잠에서 깬 토요일 아침이다.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주방으로 가서 식탁 모서리에 앉아 있는 씬지로이드 한 알 삼킨다. 거실에 있는 책상과 노트북을 방안으로 들고 왔다. 수진이는 새벽녘에 간신히 잠을 청했을 것이다. 나의 소음으로 지니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이어폰으로 대학원 강의를 수강했다.
수진이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 꽃다운 청춘이다. 작은 다람쥐가 되어 쳇바퀴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책상에 앉아 책을 끼고 캄캄한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새벽에 침대에 든다. 시험시간이 카운트다운 되면서부터 식사를 제대로 못 하고 있다. 그나마 소화를 시키지 못해서 등을 어루만져주고 차가운 손을 주무르면서 체온을 전달해주는 것이 부지기수다.
강의를 들으면서 집중하지 못하고 수진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분주했다. 낮에 책상에 자신을 묶어두고 생각은 온통 꿈에 박제시킨 지니를 위해서 밖으로 나가 태양을 만나게 할 기막힌 계획을 세웠다.
수진이가 잠에서 깰 시간쯤 외출할 수 있도록 밥을 지었다. 근처에 있는 마트에 가서 유부초밥 재료를 사고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했다. 수진이가 좋아하는 식혜도 잊지 않았다. 예쁜 유리그릇에 유부초밥을 만들어 담았다. 식혜 · 떡 · 수박 · 사과 등 빠짐없이 차곡차곡 가방에 챙겼다.
텐트를 꺼내고 작은 담요와 방석을 챙겼다. 자동차에 짐을 싣고 지니를 깨워 야외로 나가서 점심을 하자고 했다. 미처 잠에서 깨지 못한 수진이는 눈을 반쯤 뜨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지니를 태우고 시골길을 달려 도착한 우리 둘만의 비밀의 화원에 당도했다.
한적한 도로 옆에 텅 빈 정자에 텐트를 치고 준비한 음식을 차렸다. 수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많은 것을 언제 준비했느냐고 감탄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번갯불에 콩을 볶는 사람이 바로 엄마라고 칭찬 일색이다. 수진이는 식사하면서 내가 원하던 바대로 말이 많아졌다.
내가 식사를 마치고 텐트를 정리한 후 담요를 펼치고 수진이에게 잠시라도 누워서 쉬라고 권했다. 수진이는 앉아서 엄마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것이 좋다며 음식 준비로 힘들었을 거라며 나를 눕혔다. 수진이의 본격적인 달변이 시작되었다.
수진이는 공부하는 것이 힘들지 않다고 한다. 친구들은 공부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수진이는 스스로 과거를 준비하는 한량이라고 넉넉한 미소를 짓는다. 시험 날짜가 임박해서 긴장하는 것은 당연지사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수진이가 엄마를 위해 국어 강의에서 배운 詩를 들려주겠다고 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수진이가 휴대전화를 열어서 백석 시인의 시 <여승>과 <노루>를 들려주었다.
여승 / 백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수진이는 <여승>을 읽어 주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역순행적으로 시상이 전개되는 부분을 강조했다.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에서 인생을 전개함에 간결한 문장으로 감정을 절제하여 표현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수진이는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역사 속에서 여인의 삶에서 시대를 볼 수 있다. 섶벌같이 나아가 지아비, 어린 딸의 죽음을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고 표현한 부분이 슬프다고 감상을 말해주었다. 나는 말 없이 수진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나를 맡기고 의지와 상관없이 춤을 추었다.
노루 / 백석
장진(長津) 땅이 지붕 넘어 넘석하는 거리다
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 감주에 기장 찰떡이 흔한 데다
이 거리에 산골사람이 노루새끼를 다리고 왔다
산골사람은 막베 등거리 막베 잠방등에를 입고 노루새끼를 닮었다.
노루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 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 닷 냥 값을 부른다
노루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백이고
배 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사람을 닮었다.
수진이가 백석 시인의 <노루>를 들려주었을 때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처음 듣는 시였으나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수진이는 내 눈물에 놀라지도 않고 화장지로 살짝 닦아내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수진이는 막베 잠방등에를 입은 산골 사람과 노루 새끼가 서로 닮았다는 부분에서 공감했다고 했다. 가난한 산골 거리시장에서 노루 새끼를 팔려고 값을 흥정하는 초라한 산골 사람과 자신을 팔려고 흥정하는 것을 모르는 새끼 노루의 순박한 모습이 서로 닮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수진이가 마지막 연에서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한다’라는 부분을 말하면서 산골사람과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한 노루의 눈물을 선명하게 표현했다고 말하면서 울먹였다. 수진이는 새끼 노루를 팔 수밖에 없는 산골 사람과 팔려갈 수밖에 없는 노루 새끼의 닮은 운명에서 연민을 느낀다고 말했다.
수진이가 들려준 달콤한 말이다. 지니는 국어 공부를 따로 시간 내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다른 과목 공부할 때 힘들거나 스트레스가 쌓일 때 국어 공부를 하면 치료 효과가 있다고 한다.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강조하면서 독서 습관을 들였기 때문이라고 엄마에게 공을 돌렸다. 수진이는 문학을 좋아하고 글을 잘 쓰는 차세대 보석 같은 문학인이다. 수진이는 시와 에세이를 일기 쓰듯 쓰면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야심을 품고 있다.
수진이는 촘촘한 시간 속에서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있다. 제법 많은 구독자가 생겨서 더러 사업가들이 자신들의 글을 써달라고 프러포즈하는 모양이다. 엄마는 ‘네 글이 가볍게 거래되는 글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더 공부하고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권면했다.
수진이는 엄마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자녀가 어렸을 때는 자녀교육에 정성을 쏟아 주고 친가 형제들과 외가 형제들과 화합하는 엄마의 모습이 교훈이란다. 아빠에게 착한 아내이고 자녀들에게 지혜로운 엄마가 좋단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고 자신의 길을 자신 있게 걷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가 바로 엄마란다. 그래서 엄마가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한다. 몸 둘 바를 모를 칭찬이다.
청출어람이다. 수진이는 엄마보다 훨씬 멋진 여성이 될 것이다. 한 송이 꽃과 같은 수진이의 향기가 텐트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유월의 어느 토요일에.
11. 그가 오고 있다
오전에 창원에서 출발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고속버스를 이용해서 대전에 도착한 후 다시 부여로 오는 버스를 타면 오후 6시쯤 집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여름휴가를 다녀간 후 만 4개월 만에 집에 오는 것이다.
오전부터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집안 곳곳 대청소를 한 후 세탁을 했다. 휴가 때마다 집에 오면 2층에서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2층 창문을 활짝 열어서 환기를 시키고 침대 시트와 이불을 새것으로 바꾸었다. 보일러를 가동해서 따뜻하게 만들었다. 언제나처럼 집에 도착한 후 두 팔을 감싸 안고 팔짱을 끼고 집안 곳곳을 둘러본 후 2층으로 올라가서 ‘야호, 우리 집이다!’하고 탄성을 지를 것이다.
첫 아이 딸을 수술해서 출산했다. 둘째 아이는 아들을 낳고 싶어서 예정일까지 계획한 후 금식기도를 했다. 아침 한 끼 금식하면서 A4용지 한 페이지 분량의 기도 제목을 일기장에 적어두고 그런 아들을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었다. 두 자녀를 잉태했을 때는 태교를 위해 신중했고 양육하면서 육아를 위해 노력했다. 어미가 아는 것이 부족해서 책을 붙들고 지냈다. 자녀들의 올바른 인성교육에 중점을 두고 엄격하게 양육했다.
성장하면서 남다른 학습효과에 놀랐다. 시골에서 자칫 버릇없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을 우려해 ‘효자손’ 매를 거실 중앙에 걸어 두고 회초리로 사용했다.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말이 그 사람의 인격이다. 행동과 태도도 인격이다. 생각하는 것도 인격이다. 어린 자녀들을 끼고 지내면서 혹독하게 훈육했다. 마르고 닳도록 언행에 주의해야 한다고 잔소리했었다. 속담과 격언에 관한 책을 권하면서 자녀들이 마음이 깊고 생각이 넓게 성장하기를 바랐다. 천만다행으로 일곱 살 때부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겸손을 실천했다.
초등학교 내내 학교를 대표하는 학생으로 성장했다. 중학생이 된 후 성장통을 겪으면서 흔들렸다. 어미는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고 싶어서 양육에 관한 독서를 하면서 ‘사춘기’는 건강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나 머릿속에 저장해 둔 이론이 현실에서 빛이 되어주지 못했다. 아들은 흔들렸고 어미는 눈물을 흘렸다.
어미의 등 뒤에서 무릎 꿇고 “엄마, 제 이성은 이러면 안 된다고 하는데, 마음이 따라주지 못해요. 그냥 공부에 대해 회의를 느껴요. 하지만, 꼭 제 페이스 찾을 거예요. 조금만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세요. 울지 마세요.”하고 애원했다.
고등학생이 된 후 진로를 정했다고 선언한 후 열심히 공부했다. 학원에 보내줄 수 있고, 과외를 원하면 과외 선생님을 섭외해주겠다고 했다. 아들은 스스로 공부해서 원하는 학교에 가겠다고 장담했다. 자정이 넘어서 귀가하고 이른 아침 미처 잠을 깨지 못하고 등교하면서 3년을 지냈다. 3학년 2학기 H 사관학교 원서를 쓸 때 전문 논술 선생님께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아들은 “아닙니다. 제힘으로 하겠습니다. 혹여 제힘으로 합격하면 영광이 될 것이지만 논술 선생님 도움으로 합격하면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하고 고집을 부렸다. H 사관학교에서 최종 합격했다는 통보가 왔을 때 야간자습을 땡땡이하고 달려와서 거실에서 만세를 부르면서 흡족해했던 아들이었다.
H 사관학교 입교식 전에 5주 동안 가입교 기간이 있었다. 가입교 기간에 혹독한 훈련을 받고 그 훈련에 통과한 후 정식으로 입교식을 거쳐 위풍당당 H학교 생도가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전에 가입교 한 후 줄곧 어미를 떠나서 성인이 되었다. 다른 학생들은 힘들다고 전화해서 학부모들이 주말마다 면회를 다녀왔다고 하소연했다. 아들은 전화해서 한결같이 “집에는 별일 없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여기 생활이 딱! 이네요. 허허허···”하고 안심을 시켰다. 4년 내내 아들의 하얀 거짓말을 믿고 면회를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미련한 것도 불치다! 학부모 모임에서 동기 어머니가 “우리 아들이 그랬어요. 누구는 뼛속까지 H 사관학교 생도로 조성되었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어떻게 키웠길래 그래요?” 했을 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들이 4학년 졸업반이 될 때까지 한시도 기도를 멈출 수 없었다. 어미로서 혹독하게 양육했던 것이 죄스러웠다. 유독 어렸을 때부터 어른스러워서 주변을 놀라게 했던 아들이었다. 아이답게 어리광부리면서 성장할 수 있게 하지 못한 것이 이토록 뼈저린 아픔이 될 줄이야!
그러나 아들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충무공의 후예로서 문(文)과 무(武)를 겸비한 해군 제독이 되리라 믿으면서 그의 앞길을 위해 축복하리라. 그에게 어울리는 어미가 되기 위해 노력하리라!
어미가 만들어준 식사가 그리울 것이다. 매콤한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돼지고기 썰어 넣고 익은 김치를 넣어 보글보글 끓이고 있다. 갓 지은 하얀 쌀밥과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언제나처럼 어미에게 엄지 척을 해줄 것이다.
지금쯤 부여 터미널에 당도했을 것이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그가 오고 있다!
12.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
그래, 이때였다! 목련이 막 봉긋한 살을 열어서 크림색 미소를 짓기 시작할 때였다. 아버지께서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차가운 땅에 모셔두고 산에서 내려오는 날에 눈물이 가득 고인 내 눈에 개나리와 진달래가 빛깔을 자랑하려고 앞을 다투고 있었다.
일주일 전부터 형제들 전화방이 분주해졌다. 아버지 기일에 산소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이루어졌다.
아버지께서 떠난 신 후, 나는 아버지를 부르지 못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쿵- 내려앉고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글을 쓸 때조차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부를 수가 없었다. 지난가을 과꽃을 만난 후 <부모님 전 상서>를 쓰면서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아버지께서는 동화처럼 갑자기 떠나셨다. 아버지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청천벽력의 충격이었다. 그 후로 아버지와의 이별은 꽁꽁 묶어 마음에 보관한 나만의 아픔이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청양 산골 마을에서 평생을 지냈다. 젊은 시절 대처로 나가자는 어머니의 소망을 외면하고 소를 몰아 산비탈 밭을 일구었다. 수렁논에서 푹푹 빠지면서 소를 몰아 논갈이를 할 때 어린 내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농부였다. 여섯 남매 기르면서 경제적으로 부족했지만 넉넉한 웃음과 사랑을 주신 훌륭한 가장이었다.
사시사철 한순간도 편하게 누워 지낸 적 없던 아버지였다. 봄에 못자리하면서 본격적으로 농사가 시작되면 한시도 멈추지 못하고 동동거리는 날들을 보냈다. 여름 장마철에는 일손을 거두고 농사에 필요한 연장들을 손봤다. 어린 나는 아버지 옆에서 풀무를 돌리고 아버지는 달구어진 쇠를 망치로 쳐서 예리하게 폈다. 그때 아버지는 콧노래를 불렀다. 내가 참새처럼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 일축하지 않고 아버지께서는 맞장구를 쳤다. 함박눈이 내리는 한겨울에는 사랑방이 아버지의 거룩한 작업실이 되었다. 볏짚 가득 쌓아 두고 새끼를 꼬는 차락차락 소리는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마법 같은 소리였다. 지천명을 넘긴 지금도 깊은 겨울밤에는 잠을 뒤척이면서 유년의 소리를 그리워하고 있다.
지금같이 겨울이 물러가면서 막 찾아온 봄에 아버지를 따라 뛰어다니던 논두렁에는 민들레가 피고 있었다. 산비탈 밭을 따라가는 날에는 사태를 이루고 있는 진달래 무리를 보았다. 먼 산에는 벚꽃이 불꽃처럼 폭발하고 있었다. 산에서는 새들의 합창이 아름다운 꽃들과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유년에는 뛰다가 넘어지면 다친다고 걱정하는 어머니와 든든한 지원자 아버지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을을 좋아하고 과꽃을 사랑했던 어머니는 그 계절에 노래처럼 하늘나라로 떠났다. 누군가 어머니를 잃는 것은 하늘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 앞에서 울지 않았다. 아버지의 슬픔과 고독을 차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산 같은 아버지께서 무너질까 조바심하면서 달려 다녔다. 아버지께 날마다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께서는 ‘자주 전화하지 마라.’ ‘아비 잘 지낼 테니 걱정하지 마라.’ ‘시댁에 자주 가고 시어머니께 잘해드려라.’ ‘애들 잘 보고 사위에게 잘해라.’ 녹음해 둔 것처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날마다 아버지와 통화하고 주말에는 밑반찬을 만들어 다녀왔다.
자녀들이 외할아버지와 보낸 시간을 보물 같은 추억이라고 말할 때 슬프지만 행복했다. 외할아버지 사랑방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고 고구마와 알밤을 구워 먹으면서 숯으로 까맣게 고양이 얼굴이 된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늘 잔잔한 미소를 짓고 따뜻한 말씀을 주신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면 행복하다고 했을 때 감사했다. 하늘 같은 내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을 닮아서 마음이 여리다고 나를 볼 때마다 걱정하셨다. 험한 세상 살아가려면 마음이 단단해야 한다고 훈수하셨다. 그러다가 혀를 차면서 어쩔 수 없더라고 쓴웃음을 지으셨다. 내가 늦은 나이에 공부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이루었을 때 기쁨을 미루고 학창 시절에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지 못한 것을 미안하다고 하셨다. 내가 늦게 공부한 탓에 더 간절했고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다고 까르르 웃으면서 말씀드리면 못내 웃어 주셨을 뿐이었다.
언젠가 아버지께 갔을 때 현관 앞에 서있는 지팡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께서는 머리가 백발이었지만 내게는 언제나 산 같은 존재였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지팡이에 대해서 여쭈었더니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져서 넘어진 일이 있어서 놀랐다고 하셨다. 그래서 지팡이를 의지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날 아버지 앞에서는 웃었지만 설거지를 하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시간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부지런히 일했다. 까르르 웃던 소녀를 중년의 여인으로 만들었고 하늘 같은 아버지는 지팡이를 의지해야 했다. 그날 아버지께서는 잠을 자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당신 몸이 편찮으셔서 자식들이 힘들어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셨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천부당만부당이라고 말했다. 내가 사회복지학 공부를 하고 있다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역설했다. 그렇게 아버지께 힘이 되어드리고 싶어서 몸부림치면서 지냈다.
유난히도 봄 햇살이 빛나는 날에 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셨다. 늘 내가 전화를 드렸고 아버지께서는 출타할 때 행선지를 알리는 전화를 하곤 했었다. 언젠가 아버지께 전화했다가 온종일 통화가 안 되어서 울면서 달려갔던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아버지께서는 멀리 외출하는 일이 있으면 이런저런 이유로 어디 다녀오마고 전화를 하셨다. 그날 아버지 전화번호를 보고 웃으면서 가장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의 다급한 목소리는 이웃집 아주머니였다. 아버지께서 쓰러져서 구급차로 모셔갔다고 했다. 아버지 전화기 옆에 내 전화번호가 있어서 전화했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이 당신 때문에 힘들어할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슬픈 동화처럼 홀연히 먼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나는 꽃들이 다투어 개화하는 찬란한 계절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을 했다. 나의 하늘이었고 산이었던 아버지께서 다시는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셨다. 아버지와 이별하고 8년이 지났다. 내 휴대전화에는 아직도 아버지 전화번호가 있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 기일을 달력에 적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남매들에게 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부모님 기일이 되면 산소를 다녀가라고 하셨다. 산소에서 울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 남매들 추억을 얘기하면서 웃다가 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들은 부모님 기일이 되면 산소에서 만나서 유년시절 에피소드를 꺼내고 하하 호호 웃고 있다. 청개구리들 아닌가!
내일이 아버지 기일이다. 나는 지금도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울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나야 눈물 없이 아버지를 말할 수 있을까.
<추천사>
별을 헤며 늘 꿈꾸는 소녀 -김인희-
수필이라는 말은 중국 남송 시대 홍매(洪邁 )가 용재수필(蓉齋隨筆)에서
“나는 게으른 탓으로 책을 많이 읽지 못했으나 그때그때 뜻한 바 있으면 곧 기록하였다. 앞뒤의 차례를 가려 갖추지도 않고 그때그때 기록한 것이기에 수필이라고 하였다. (붓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
라고 한 것에서 시작하였다. 특정한 형식을 갖춘 것이 아니라 붓이 가는 대로 편하게 기술하는 형식이다. 그래도 교양이 있어야 하고, 교훈적이어야 하며 누군가 읽고 감동을 받을 수 있으면 더욱 좋다.
김인희 작가를 만난 것은 꽤 오래되었다. 덕향문학 모임에서 특선 시인으로 상을 받을 때 필자가 심사위원장을 했던 기억이 있다. 특별히 순수한 시어에 감동을 받아서 문학상을 수여하였는데, 이번에는 그동안 모아놓는 수필을 출간한다고 하였다. 교정을 봐달라는 것으로 알고 꼼꼼히 맞춤법과 문장부호를 확인하고 몇 가지 수정을 해서 보내주었다. 원고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참으로 순수한 영혼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 속에는 유난히 별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윤동주의 별도 있고, 최태호의 별도 있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그림이고 꿈(이상)의 세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함으로 도배되어 있다. 작품을 읽음에 부담이 없다. 수필은 이렇게 써야 한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생각의 흐름에 걸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중학교 시절의 국어 선생님에 대한 회상도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수불석권(手不釋卷)’하라는 말씀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아오면서 아직도 실천하고 있음에 감탄을 자아낸다. 누군가의 일생에 큰 지침을 마련해 준 국어선생님도 참으로 대단한 분이다. 사실 김 작가는 시문학을 공부할 때부터 지금까지 필자와 학문의 세계에서 같이 노닐고 있다. 박사과정이면 연구실에 앉아서 편하게 강의하고 토론해야 하지만 우리 학교는 대학원생이 조금 많아서 강의실에서 수업을 한다. 김 작가는 항상 가장 앞자리에 앉고, 예습을 철저히 하고, 질문에 제일 먼저 답하고, 토론에 활발하게 임하는 사람이다. 자기 관리에 소홀함이 없다. 늦게 오는 경우도 없지만 부득이 수업에 참석할 수 없으면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하는 성격이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는 것이 인생이지만 김 작가는 특별히 국어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천득의 <인연>과는 또 다른 맛을 보여준다. 선생님을 찾지 못해서 가슴은 멍이 들어 있지만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사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문화해설가로, 독서 논술 교사로, 혹은 사회복지사로 많은 경험이 삶에 무르녹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이 피곤하고 힘겨울 만도 한데, 김 작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축복이 감사일 따름이다.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할 정도로 감사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다. 글은 마음의 거울이다. 글은 사람의 지문과도 같다. 그래서 문체론이라는 것이 있을 정도로 작가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김 작가의 수필에는 잘 익은 홍시를 먹는 맛이 있다. 오랜 세월 많은 경험을 통해서 들려주는 소탈한 이야기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박한 꿈을 꾸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송통신대학을 거쳐 박사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궤적이 이를 대변한다. 이렇게 가녀린 소녀도 꿈을 이루고 사는데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음성을 들려준다.
이제 김 작가도 원숙한 나이에 접어들었다. 자녀들도 잘 성장해 주었으며, 문학의 꿈도 이뤄 시인으로, 수필가로, 평론가 겸 칼럼니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장미꽃을 깐 탄탄대로만 갔으면 좋겠다. 주변의 모든 환경이 이미 작가로서 글과 사랑에 빠진 소녀(?)를 축복하고 있다. 더욱 정진하여 거벽(巨擘)이 될 것을 기대한다.
2022년 10월 24일
만인산 기슭에서
최태호 씀(識)
최태호 (崔台鎬)
단국대학교 한문교육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한국어교육학과 졸업(교육학 석사)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문학박사)
현. 한국대학교수협의회 공동 대표
현. 한국대학교수연대(노동조합) 공동 위원장
현. 대한민국 교육정상화네트워크 공동 대표
현. 중부대학교 교수
저서 : 『한국문학의 제양상』 외 40여 권
논문 : 『구지가고』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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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인희 작가님 수필집 발간을 축하 드립니다 약속대로 수필집10권을 구매 하겠습니다.작가님의 싸인을 하셔서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