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진목사/부림절 (에 9:20-10:3)
주요내용:성령 충만론
(요약)
부림절 제정과정은 성령 충만의 구체적인 예표이다. 위기는 끝났지만 계속하여 지키게 함에서 성령강림은 단회적이지만 성령 충만은 계속적임을, 절기를 성의 안팎을 달리하여 지킴에서 성령의 내적충만과 외적충만을 함께 받아야 함을, 절기의 날에 온갖 잔치를 베풂에서 성령 충만은 기도와 금식과 감사와 찬양과 말씀과 사랑 등이 없이는 안됨을, 부림절이 폐해져서는 안된다는 규정에서 성령 충만은 언제든지 유지되어야 함을, 먼 나라와 섬까지도 조공을 바침에서 성령 충만 받아야 비로소 온전히 하나님께 순복하고 도구되어짐을 보여준다.
(설명)
☆ 부림절
- 성령 충만의 예표 -
① 지속적으로 지키게 함 - 성령 충만의 반복성
② 양일을 따로 지키도록 함
14일 성밖 - 성령의 외적충만 (은사)
15일 성안 - 성령의 내적충만 (생명)
③ 금식 잔치 예물 구제 - 충만함 유지법 시사
④ 폐해서는 안됨 - 폐하면 시험 옴
⑤ 모든 나라가 조공을 바침 - 전 인격의 순복
☆ 성령강림과 성령 충만 비교
성령강림 - - - - - - 성령 충만
단회적 - - - - - - 반복적
객관적 - - - - - - 주관적
전체적 - - - - - - 개인적
과 거 - - - - - - 현 재
항구적 - - - - - - 소멸가능
(강 해)
오늘은 "부림절"이라는 제목으로 에스더서 강해를 마치고자 합니다. 에스더서를 시작한지 오늘이 12번째인데 에스더서를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바벨론에 잡혀간 무명인사 몇 사람이 어떻게 파사 왕궁과 그 큰 나라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지배하고 장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심겨진 보이지 않는 겨자씨보다 작은 믿음이 어떻게 발전하여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과 우리의 삶 전체를 정복하여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영성의 모습으로 이끌고 가는가를 보여주는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부림절을 하나님의 절기로 정착시키는 과정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부림절이 과연 무엇이기에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이토록 강력한 파사의 왕권을 입어 편지를 두 번이나 반복하여 쓰게 하였는지 우리는 그 동안 성령강림과 성령 충만과 결부시켜서 이해하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성령 충만에 관한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1. 성령강림은 단회적이지만 성령 충만은 반복적이라는 접입니다.
20-21에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아하수에로 왕의 각 도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무론 원근하고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그랬습니다.
이 말씀은 유다 민족이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날을 기념하여 매년 대대로 지키도록 제정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위기에서 벗어난 사건은 단 한 번 있었던 일이지만 이 행사가 계속하여 지켜야 하는 행사로 규정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강림의 사건은 한 번의 일입니다. 학자들 중에 오순절 성령강림을 단회성과 반복성이라는 두 주제를 가지고 토론한 적도 있지만 우리 전통적인 주장은 성령강림은 단회적이지만 성령 충만은 반복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4:16-18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은 이제 다시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와 함께 영원토록 계시는 것이지 다시 되돌아가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령 충만에 있어서 만은 한 번의 충만으로 그치지 않고 언제나 충만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엡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루스데'는 현재수동태 명령형으로 현재 시제인 것은 성령 충만은 일회적이 하니라 계속해서 채워져야 함을 암시하며, 수동태임은 성령 충만은 인위적인 체험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채워져야 하며, 명령형은 성령 충만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누구든지 받아야만 하는 필수사항임을 의미합니다.
2. 성령의 내적충만과 외적충만 역시 계속하여 충만함을 받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21절에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 사일과 십 오일을 지키라" 그리고 27절에 "뜻을 정하고 자기와 자손과 자기와 화합한 자들이 해마다 그 기록한 정기에 이 두 날을 연하여 지켜 폐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했습니다.
여기 십사 십오 양일이 나타나는데 이는 이틀을 연이어 지키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행사를 하루만 지키되 수산성 사람들은 15일에 나머지 사람들은 14일에 지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부림절 규례를 보면 이 두 날만이 아니라 13일, 14일, 15일 세 날을 모두 지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서의 규정은 14일과 15일 두 날입니다.
부림절이 파사의 교포 유다인들에게서 지켜지다가 나중에는 이스라엘 본토에서 지켜졌는데 그 본격적인 시기가 기원전 2세기경의 마카비시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기록을 따르면 아달월 그러니까 12월 13일은 에스더가 금식하며 왕에게 나아간 것을 기념하여 이 날은 기도와 금식하는 날로 지키고, 14일은 모르드개의 날이라하여 새벽에 에스더서를 읽고 아침에 다시 예배를 드리고 그 시간 이후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선물을 주며, 나머지 15일에는 금식 혹은 아이들의 가장무도회를 비롯한 각종놀이를 즐기며 하루를 축제의 기분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본래는 14일은 일반 백성들이 15일은 수산성민들이 하루씩 지킨 절기였습니다. 절기를 지키되 수산성의 안팎을 달리하여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14일을 지켰다고 15일이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둘은 각각 지켜져야 했습니다.
이처럼 이 두 날은 성령의 내적충만과 외적충만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내적인 충만도 받아야 하고 외적인 은사적 충만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신자의 유형은 약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심령의 변화보다는 외적인 은사충만에 치우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은사에는 관심이 없고 심령의 변화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고, 혹은 이 두 가지 함께 노력하는 형태의 신자가 있습니다. 이 셋 중에서 세 번째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인의 특성상 혹은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어느 한편이 더 앞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편에 편중되어 시작했든지 간에 나중에는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에 치우친 사람은 이제는 심령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심령에만 관심 가졌다면 이제는 은사에도 관심을 가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사가 부족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나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부족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여쭙는 일에도 은사가 부족하면 얼른 포착하기 어렵습니다.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심는 일에도 은사가 부족하면 누구를 도와야 할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합니다. 신앙상담을 할 때도 은사가 풍성하면 대단히 유익합니다. 이것은 문명의 이기와도 같아 있는 것과 없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반면 은사는 충만한데 심령의 변화에 무관심하면 마7:21-23절의 경고와 같은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즉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그런가 하면 은사의 실수를 통해서 많은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아주 안 맞으면 차라리 좋은데 맞을 때는 잘도 맞고 유익할 때는 아주 유익합니다. 그러다가 은사 따라 행하다가 엉뚱한 일을 저질러서 수치를 단단히 보게 됩니다. 이것은 이제 은사에만 치우치지 말고 심령을 돌아보라는 싸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적충만과 아울러 성령의 외적충만을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3. 성화 방편의 지속적 이행 없이는 성령 충만을 지킬 수 없습니다.
22절에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했고 31절에는 "정한 기한에 이 부림일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의 명한 바와 유다인이 금식하며 부르짖은 것을 인하여 자기와 자기 자손을 위하여 정한 바가 있음이더라" 했습니다.
여기 부림절을 지키는 법이 나타납니다. 즉 성령 충만이 우리에게 임하고 지속되려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기도와 금식과 감사와 찬양과 말씀과 구제의 사랑이 없이는 성령의 충만하심을 지킬 수가 없다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경험했다고 그 충만함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늘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충만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도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충만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부림절에 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즉 먼저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기도해야 성령의 충만을 받습니다. 또 금식했습니다. 금식은 기도의 간절한 표현임과 동시에 회개와 겸손의 표시입니다. 이처럼 진실로 회개하고 자기를 낮추어 겸손해야 성령의 충만함이 옵니다. 또 감사와 찬양을 했습니다. 늘 하나님을 예배하며 높이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강건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강건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그 다음에 부림절에는 에스더서를 낭독하며 지켰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묵상하므로 성령 충만이 옴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구제했습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부림절은 이제 신령한 의미에서 열심 있는 신앙생활로서 지켜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성령 충만의 부림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4. 이 부림절은 결코 폐해서는 안됩니다.
28-29절에 "각 도, 각 읍, 각 집에서 대대로 이 두 날을 기념하여 지키되 이 부림일을 유다인 중에서 폐하지 않게 하고 그 자손 중에서도 기념함이 폐하지 않게 하였더라 아비하일의 딸 왕후 에스더와 유다인 모르드개가 전권으로 글을 쓰고 부림에 대한 이 둘째 편지를 굳이 지키게 하되" 했습니다.
이 부림절이 얼마나 귀한 것이면 이토록 강조하여 지키게 하는지 그러나 신령한 의미에서 성령 충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지고 지켜져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성령 충만이 사라질 때 성도는 남는 것은 추하고 악한 인간성뿐입니다. 은혜 떨어지면 모든 것에 시험이 오고 풍지박산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을 보면 성화는 고집적인 성화의 방편을 지속함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도 부림절의 축복이 떠나지 않도록 잘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성령 충만을 입을 때 인격 전체는 하나님께 순복하게 되고 하나님의 귀한 도구가 되어 귀한 사역에 쓰임을 받게 됩니다.
10:1-3절에 "아하수에로 왕이 그 본토와 바다 섬들로 공을 바치게 하였더라 왕의 능력의 모든 행적과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케 한 사적이 메대와 바사 열왕의 일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존대하여 그 허다한 형제에게 굄을 받고 그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했습니다.
이 기록은 모르드개의 권세와 영예와 유다인들의 위상이 얼마나 크고 높아졌으며 또 모르드개가 나라를 잘 다스려 왕에게 커다란 이익과 영광을 안겨다 주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면 우리의 생각과 잠재의식과 희망과 소원까지도 다 하나님께 바쳐지고 쓰임 받으며 나아가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더 나아가 죽어 가는 뭇 심령을 살리는 귀한 도구가 되어집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무명의 인사들이 메데 파사를 영적으로 지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듯이 은혜받아 영성으로 변화를 받으십시다. 성령강림은 단회적이지만 성령 충만은 반복적입니다. 그러므로 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내적인 충만도 중요하고 외적인 충만도 중요합니다. 둘 다 힘써야 합니다. 그 방법은 기도와 회개와 겸손과 감사와 찬양과 말씀과 사랑입니다. 이것을 잘 할 때 부림의 성령 충만은 지켜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이 귀한 영의 부림절을 잘 지키므로 하나님께서 더욱 사랑하시고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