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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봇의 절개 / 은혜목회정보
본문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뒤 북왕국 이스라엘왕 아합 때에 있었던 일이다. 아합은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혼인하여 그 아내의 취향 따라 바알종교를 성원하였고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였던 사람이다. 아합은 성경 기록에서도 악한 자로 한 몫을 하였다. 이세벨은 간악한 일을 저질렀던 여인으로 본문의 나봇을 간교한 계략으로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으며 나봇은 조상적 부터 물러 받은 포도원을 지키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1. 기업으로 만족하였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약속된 땅을 제비뽑아 각 지파와 가정에서 물러 받게 되었다. 그들은 물러 받은 그 땅을 사람의 터전으로 귀중하게 여겼고,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믿어왔던 것이다.
아합 처럼 탐내지 않았다. 나봇은 욕심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왕이 타락하면 백성도 그러하고 왕이 물질적인 습성을 가지면 백성도 그러하기 마련이다. 애꿎진 백성만 가옥에 잡아 넣지 말고 감옥이 비좁으면 왕이나 지도자가 회개하여야 한다. 아합처럼 물질에 탐내는 왕이나 지도자가 있다면 나라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 누가 무질서해지는 백성을 견책하겠는가? 하지만 나봇은 탐심이 없이 산 사람이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만족으로 생각한 사람이었다. 사람이 자기의 분량보다 초과하는 것을 맘에 둘 때에 세상은 타락의 길로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 자기의 그릇이 있고, 그 그릇에 따른 분량이 있다. 나봇은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다.
더욱 좋은 것을 준대도 바꾸지 않았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이 자기 왕궁에 인접해 있으므로 흡수하여 정원을 꾸미고 싶었다. 아름답게 하여 육신을 즐기고 싶었다. 백성은 백성대로 분수가 있고 왕은 왕대로의 분수가 있다. 부자는 부자대로의 분수가 있고, 빈자는 빈자대로의 분수가 있다. 가난한 자는 가난하게 보이지 않게 살고 싶어하는 것이 그 분수요, 부자는 부자인척 하지 않고 청빈하게 사는 것이 그 분수이다. 세상에는 부자가 있는 척하므로 가난한 자가 밤잠을 자지 못한다. 부자는 정원을 만들고, 무덤을 꾸미고, 사라진지 오랜 오두막을 성역화 하는데 혈안이 된다. 아합은 나봇에게 비싼 값과 좋은 대물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나봇은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기업으로 물러 받은 그것과 의미나 가치가 같을 수가 없었다. 바꿀 수가 없었다. 오늘 성도가 쉽게 하늘의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을 바꾸려 드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기업으로 만족하였다. 기업가는 그대로의 만족이 있고 학자는 그 나름대로의 만족이 있으며, 정치가는 그 나름대로의 만족점이 있다. 기업가는 기업을 확장하고 키워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그 목적이고, 학자는 비록 가난하여도 깊은 연구에 박학하여 풍성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며, 정치가는 최고의 정점인 대통령의 자리에 앉고 싶어지는 것이 목표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한 손에 쥐고자 하는 데 문제가 있다. 천하 유아독존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권세도, 재물도, 부귀도, 영화도, 심지어는 주색잡기까지도 손에 쥐려고 하는 데 문제가 있다. 나봇은 그런 사람이 아내였다.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기업으로 만족하였고 조상이 남긴 유업을 지킴으로 임무를 다하는 사람이었다. 참으로 애국자였다.
2. 기업을 지켰습니다.(3)
나봇은 받은 기업을 끝까지 간수하여 지켰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은 믿음입니다.
왕의 명을 거절하면서도 지켰다. 왕의 제의에 거절하였다. 당시 왕의 명령에 거절하는 것은 살기를 거역하는 것과 동일하였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하였던 것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였지만 그것으로도 나봇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결심은 하늘아래서 누구도 겪을 수 없는 결심이었다.
우리는 주님으로 부터 믿음을 유산 즉 기업으로 물러 받았다. 믿음에 대하여는 어떤 무엇도 양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좋은 조건이 미혹한다고 할지라도 일보의 양보도 있어서는 안된다. 믿음은 마치 정조와 같은 것이다. 한 번 결심한 정조를 버릴 수가 없는 것처럼 하늘이 무너져도 믿음의 양보에 타협이 있을 수가 없다. 설사 생명을 앗아 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것을 더 중요히 하였다. 나봇은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왕의 대물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것을 더욱 소중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즉 하나님 제일 주의로 산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믿음의 향기는 하나님의 것을 얼마나 소중이 여기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존경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에게 속한 것을 헌신짝처럼 버린다면 그의 존경의 질을 알만 한 것이다. 이조 말엽에 왕이 상궁 하나의 손목을 잡아 준 적이 있었다. 그 상궁은 이조가 망하고 새로운 시대가 펼쳐졌지만 왕이 잡아준 그 손목을 천으로 감싸 죽을 때까지 보존하였다고 한다. 하물며 하나님이 주신 것을 소홀히 하는 그를 믿음이 있다고 해서야 쓸 말인가?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에 대하여 자세가 다르다. 나봇은 더 좋은 것이 제시되었다해도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 대한 자세는 바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합은 근심하여 식음을 전폐하였다. 아합은 일개 백성인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지 못하므로 근심이 되었다. 소인의 마음이다. 대인 군자의 마음은 사소한 그런 것으로 근심 할 리가 없고 심려할 것이 못된다. 아합의 근심은 식음을 전폐하는 데로 발전하였다. 못난 왕의 심사를 보는 것이다. 이 보다 중대한 국사가 만을 텐데 이로 인하여 식음을 전폐하기까지 하다니.
뛰어난 군주는 멀리보고 넓게 보지만 하찮은 군주는 자기 뜰만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밤마다 나봇의 포도원이 자기의 정원으로 바뀌는 꿈만 꾸었으니 말이다. 집권자여 그대의 기분을 즐겁게 하는 것이 정말 무엇이란 말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심사숙고해 보라.
3.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9)
이세벨의 흉계는 꾸며지고 있었다. 악이 성하고 횡포가 극에 달할 때에 순교자의 피가 진하게 흐른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흉계는 꾸며지고 있었다. 악랄한 정치는 언제나 국무회의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뒷방, 즉 내실에서 계획되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세벨에게서 나봇의 포도원은 바로 자기의 것이었다. 약자의 소유는 강자의 후식 감이다. 양심을 저버린 이세벨에게는 나봇의 포도원을 두고 근심하거나 식음을 전폐할 조건이 못되었다. 이세벨의 정치는 오늘도 하늘 아래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그리고 만 천하에 공포하는 것이다. 백성은 나봇을 향하여 침을 뱉으면서 고개를 저으며, 사가는 붓에 먹을 묻혀 한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이다.
전국에 금식이 선포되어 졌다. 음흉한 흉계는 종교의 매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가장 추한 것이 가장 거룩한 것으로 포장되어 나오고, 가장 악한 것이 가장 선한 것으로 위장되어 나온다. 역사적으로 매우 드문 금식의 선포가 국가적으로 내려졌던 것이다. 추악한 술수는 지엄한 종교적인 권위를 덮어쓰고 전개되어져 갔다. 왕은 어인을 찍었다. 국가의 권위를 첨가하였다는 말이다. 국민의 마음을 붙잡아 놓고 악을 행하려는 찰나였다. 아벨의 생명은 제단 앞에서 해할 계획이 세워지고 예수의 공번되지 못한 재판은 대제사장의 아문에서 이미 판결 났던 것이다.
하지만 나봇은 거기에 굴할 사람이 아니었다. 어떠한 위협이 그에게 가해져도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가장된 종교에 대한 그의 절개는 진실로 심오한 것이었다.
그는 기업을 지키려다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끝내 굴복치 않은 결과 순교의 종점이었다. 땅에서는 그를 죄인으로 몰아 세웠지만 하늘에서는 그를 의인으로 접수하는 순간이었다. 세상과 타협하면 잠시 생명을 유지시킬 수가 있다. 하지만 하늘에서 면류관을 받쳐들고 기다리던 천사가 쓸쓸하고 섭섭하여 돌아선다. 주를 향한 절개를 지켜야 한다. 스데반처럼,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주가 계신 갈보리 언덕을 향하여 피묻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
성도는 주의 귀한 기업을 지켜야 한다. 나의 세운 바된 자리가 무엇이며 위치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그리고 합당하게 지키고 살아야 겠다. 믿음을 팔아먹고 헌신짝처럼 팽개쳐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자. 주께서 달려와서 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주시면 영광스러운 몸으로 치료되리라. 나봇은 끝까지 기업을 지키려다가 죽음을 당한 구약의 순교자였다. 오늘도 나봇과 같은 절개의 사람이 요구된다.
나봇은 구약의 순교자이다. 아벨이 제단 아래서 부터 시기를 사서 들로 유인되어 죽음을 당하였던 것처럼 그는 이세벨과 아합의 정권아래서 죽임을 당하였다. 성도는 최후까지 믿음의 절개를 지키는 주님의 사람이 되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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