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42
출애굽기 20장 7절
십계명의 두 번째 명령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은 당연하거니와 하나님일지라도 하나님을 결코 형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명령하신 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 그를 예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명하지 않았는데도 인간이 보기에 좋다고 여겨 예배하는 것은 자의적 예배(will-worship)일 뿐,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예배가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제2계명이 어떠한 형상도 전혀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은 아닙니다. 피조물에 대해서는 눈에 보이는 형상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런 은사를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예술이라는 측면에서는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을 경배하고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때도 하나님을 예술적인 측면에서 표현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아니 적어도 인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술적인 측면에서 형상화 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2계명은 이것 자체를 금하고 있는 명령이며, 나아가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어떤 형상으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는 인성을 취하셨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며 그분의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시기 때문에 형상을 만드는 것은 그분의 위엄에 결코 합당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러한 형상들을 만들이 둔다는 것은 자칫 미신적인 습성과 연결되어 그것을 신격화 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실제 교회 역사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어떠한 형상이든, 그것이 그림일지라도(화상畫像) 금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가톨릭의 경우 형상들을 평신도들을 위한 책처럼 여겨 교회에서 허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8문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말 못하는 형상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씀의 살아 있는 선포를 통해서 가르침 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명령한 것만으로 그를 예배하되, 특별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통해 가르치기를 기뻐하고 또한 그렇게 배우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이제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을 살피겠는데, 출애굽기 20장 7절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제3계명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54문. 제3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들(마6:9, 신28:58), 칭호들(시68:4), 속성들(계15:3-4), 규례들(말1:11,14), 말씀(시138:1-2), 행사들(욥36:24)에 대해 거룩하고 경건한 사용을 요구합니다. 제55문. 제3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3계명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게 하신 어떤 것에 대해 모든 불경스러움과 남용을 금합니다(말1:6-7,12, 2:2, 3:1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제3계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99문. 제3계명에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답. 저주나(레24:10-17) 거짓 증거나(레19:12) 불필요한 맹세로(마5:37, 약5:12)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남용하지 않는 것과, 다른 이들이 그런 끔찍한 죄를 범할 때에 침묵하거나 묵인함으로써(레5:1, 잠29:24) 그 죄에 함께 참여하지 않는 것이며, 요컨대, 경외함과 높이 우러름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며(시99:105, 사45:23, 렘4:2), 그리하여 하나님을 올바로 고백하고(마10:32-33, 롬10:9-10) 예배하며(시50:14-15, 딤전2:8), 또한 우리의 모든 말과 행위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롬2:24, 엡4:29, 골3:17).
제1계명이 예배의 대상, 그리고 제2계명이 예배의 방식에 대한 것이라면 제3계명은 예배의 자세 혹은 태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게 불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이름에 합당하게 불리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신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실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3:14)고 하시면서 모세에게 ‘여호와’로 알리신 것이 그의 이름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영으로서(요4:24) 무한하시고(욥11:7-9) 영원하시고(시90:2) 불변하시다는(약1:17) 속성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소요리문답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규례와 말씀, 또한 행하시는 일들까지 여기에 속합니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하면 가볍게 부르지 말라, 거짓되게 부르지 말라, 욕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엄숙하게, 신앙적으로, 존귀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르시누스는 하나님의 이름을 엄숙하게, 신앙적으로, 존귀하게 사용하는 것과 관련해 일곱 가지로 분류해서 설명하는데, 요구하는 부분과 함께 반대로 금하는 부분도 있음을 설명합니다. 일곱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뜻과 역사하심에 관한 참된 도리의 전파,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을 돌림, 하나님에 대해 알려진 진리를 고백함, 감사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절,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아룀, 마지막으로 정당한 신앙적 맹세입니다.
먼저 첫 번째로 하나님의 본질과 뜻과 역사하심에 관한 참된 도리를 전파하는 것을 제3계명은 요구합니다. 내용만 보면 교회에서 공적으로 가르치는 직분에 속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요구됩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에 있는 말씀으로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4:9)고 말씀합니다.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신11:19)라고도 말씀합니다. 이런 점에서 공적으로 목사가 성도를 가르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사적으로 부모는 자녀를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무엇인지 가르쳐야 합니다. 신약에서는 다음의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5:11),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골3:16) 그러니까 성도와 성도끼리도 피차 권면하고 가르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 특히 우리의 자녀들을 가르치지 않거나 가르치는 데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기회를 얻는 대로 참된 도리에 대한 지식을 전파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거나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신적 진리들에 대해 대화하기를 삼가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늘로부터 계시된 신앙의 도리를 부패시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한다는 말씀이 있는데(렘14:14),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되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가르침 아래 하나님과 신적 진리들에 대하여 대화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특히 주의 날에는 더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주일 예배 후 점심을 먹으면서도 이런 대화가 오고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든 공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서 쉬다가 가정예배로 모여 예배를 드리고 주일 오전 설교 내용을 확인하고, 혹 모르는 것이 있다면 그 시간에 확인하고, 가정에서 모른다면 주중에 그리고 그 다음 주일에 와서 다시금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면 그것보다 유익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을 제3계명은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뜻과 역사하심에 관하여 전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하여 그를 찬송하고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시편 22편 22절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69편 34절에서는 모든 만물이 그 대상으로 있다는 것도 말씀합니다.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이와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경우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는(롬1:21) 말씀 앞에 설 수밖에 없는데, 십계명이 도덕법이라고 할 때, 믿는 자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에게도 주신 법이라고 할 때 이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무지에서든 진리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미움에서든 하나님의 본성과 뜻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나님께 돌리는 신성모독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나아가 모든 저주 행위도 여기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이웃을 향하여 악담을 하여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악한 복수심을 그대로 시행하시는 분이신 것처럼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데 마치 우리가 주인처럼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움과 우리의 사사로운 복수심에서 나오는 모든 저주는 신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악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성도들이 그들의 원수를 저주하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도 사사로운 복수심으로 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할 때 거기에는 사사로운 복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즉 그 모든 내용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원수들을 향하여 예언적인 형벌을 선언하시는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사로운 복수심으로 인하여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에 대해 알려진 진리를 고백하는 것을 제3계명은 요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해서 성경으로부터 확실하게 알고 있는 바를 선포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한 이웃으로 하여금 구원을 얻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를 고백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은 진리를 부인하고 숨기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만 진리를 나타내면 미움을 받지 않을까란 생각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 때문에, 질책을 받지 않을까란 생각 때문에 진리를 숨긴다는 것입니다. 이때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타내야 할 때 나타내지 않는 것은 진리를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본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신앙 자체를 부인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진리를 적극적으로 부인합니다. 소위 배도(背道)라고 해서 진리를 향해 가다가 그것을 등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두 인물을 비교할 수 있는데, 한 사람은 베드로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진리를 숨기다 못해 부인하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견인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반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자입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배도한 것입니다.
진리를 고백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자유를 남용하는 것도 있습니다. 지난주에 중립적인 문제, 아디아포라(ἀδιάφορα)라고 해서 비본질적인 문제와 관련해 루터주의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입장에 있는 반면, 개혁주의는 우리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그것이 교회와 성도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느냐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술과 담배에 대하여 금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은 중립적인 문제요, 비본질에 관한 문제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남용하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고백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도덕적인 모든 과실과 추문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자신의 말의 고백과 달리 행위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1:16) 문제는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불신자들에게서 모독을 당한다는 데 있습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24)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면 진리를 때에 맞지 않게 혹은 부적절하게 고백하는 것도 진리를 고백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7:6)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는 말씀도 있지만, 무분별해서는 안 됩니다. 공적 사역에 있어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진리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광을 높이는 일과 이웃을 구원하는 일에 아무런 유익도 없고, 또한 그 시간과 정황 하에서 진리를 고백하는 것이 요구되지도 않는 상황에서, 참 신앙의 원수들을 불필요하게 자극시키고 격동시켜서 진리를 업신여기고 경멸하게 하거나 혹은 경건한 자들을 향하여 원한을 품고 잔인하게 행하도록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그의 서신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면 됩니다(벧전3:15). 그러나 우리가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진리를 조롱하는 일이 있다면 주님께서 대제사장과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신 것처럼 침묵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눅22:67)라고 하신 그런 대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이단에 속한 자를 돌이킨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그들을 만나고 설득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교훈하기 때문입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딛3:10-11)
네 번째로 감사함을 제3계명은 요구합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고 권면합니다. 또한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7)고 가르칩니다.
이에 대한 반대는 감사치 않음, 하나님의 은택에 대한 적절한 인식이 없는 것, 나아가 하나님의 은사들을 소홀히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 말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의 말씀처럼 우리 안에 자랑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택에 대한 적절한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취한 행동, 땅에 감춰 두는 행동은(마25:18)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소홀히 하는 것이요, 이것 역시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을 제3계명은 요구합니다. 성경의 예로 하자면 비느하스의 열심이 있습니다.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11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구약 시대 때는 이런 하나님을 향한 열심 때문에 죽이는 일도 한시적으로 허락하신바 되었지만, 오늘날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도덕법으로서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 것을 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 열심이 아닌 소심함, 확고하지 못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때 드러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결핍에 속한 것이라면, 과잉에 속한 것도 있습니다. 오류가 있는 그릇된 열정이 그것입니다. 로마서 10장 3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에 속한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사도 바울의 열심이었습니다.
여섯 번째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아뢰는 것을 제3계명은 요구합니다. 본래 우리는 결핍된 자요, 아무 것도 없는 자입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을 뿐입니다(욥1:21). 그러나 하나님은 풍성할 뿐만 아니라, 그 풍성함으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공급하고 공급해도 그 풍성함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불러 아뢸 것을 요청하십니다. 다만 우리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여호와의 이름 부르기를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불러야 할 때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정당치 못하게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치 다른 신들 중 한 분으로 부르거나 교황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을 대신하여 천사들, 성인들을 부르는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정욕을 위해 구하는 것입니다. 입술뿐인 간구도 있습니다. 마음이 없는 간구, 참된 회개나 기도에 대한 응답의 확신이 없는 간구,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간구,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 간구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으로 정당한 신앙적 맹세와 관련된 내용인데, 이 부분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0문을 보시면 재차 강조하는 바가 있습니다. 99문에서 제3계명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는가 할 때 저주나 거짓 증거나 불필요한 맹세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남용하지 않는 것과 함께 다른 이들이 그런 끔찍한 죄를 범할 때에 침묵함으로써 그 죄와 함께 참여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내 죄는 내 죄요, 다른 사람의 죄는 다른 사람의 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부분에 있어서는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죄를 저지를 때 내가 알지만 침묵한다면 그것은 그 죄에 동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5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증인이 되어 그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의 죄를 져야 할 것이요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그러므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0문은 다시금 강조합니다.
100문. 맹세와 저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 그런 일을 막거나 금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돕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하나님께서 진노를 발하실 만큼 악한 죄입니까?
답. 분명히 그렇습니다(레5:1).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크고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드는 죄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사형으로 벌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레24:10-17).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 하나님 이름을 가볍게, 욕되게, 거짓되게 부르는 것 못지않게 그러한 죄임을 알고도 막거나 금하도록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죄에 침묵으로 동참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모든 일에 있어서 오늘 본문은 결코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죄 없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가 있다는 것이요,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경고로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을 제3계명이 요구하신다고 할 때 우리는 이런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맹세에 대하여 살피려 하는데, 여섯 번째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아뢴다고 할 때 맹세도 포함됩니다. 일반적으로 맹세란 하나님을 나의 마음을 아시는 분으로 여겨, 진실에 대해 증언하고 내가 거짓으로 맹세할 경우 나를 벌해 달라고 그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고린도후서 1장 23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맹세의 정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맹세는 오직 참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무한한 지혜의 소유자요, 모든 피조물과 특별히 인격적 피조물의 마음과 양심을 아시는 분으로써 하나님은 자신만을 두려워해야 할 분으로, 또한 예배해야 할 분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신10:20 참조). 또한 하나님께서는 다른 누구의 이름으로도 맹세하지 말 것을 적극적으로 금하시기 때문입니다(출23:13 참조).
이처럼 제3계명은 일곱 번째로 정당한 신앙적 맹세를 요구합니다. 이러한 맹세와 반대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안전을 위하여 맹세가 필요할 때 맹세를 거부하는 것과 거짓 맹세, 우상숭배적인 맹세, 정당하지 않은 것에 대한 맹세, 경솔하고 가볍게 맹세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1문입니다.
101문. 그렇다면, 경건한 자세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없습니까?
답. 할 수 있습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요구할 경우나 혹은 그런 방식으로 신실성과 진실성을 확증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복지를 위하여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맹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요(신6:13, 10:20, 렘4:1-2, 히6:16),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이 그런 맹세를 올바르게 사용한 것입니다(창21:24, 수9:15, 왕상1:29-30, 롬1:9, 고후1:23).
성경이 맹세 자체를 거절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또한 이웃의 복지를 위해서라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이 정당한 맹세를 인정하는 것이라면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국가의 요청 앞에서도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재세례파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저들은 구약 시대에 살았던 족장들에게는 맹세하는 것이 정당했으나,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맹세가 금지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말씀과 야고보서 5장에 있는 말씀 때문입니다.
우선 마태복음 5장 34절에서 37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다음으로 야고보서 5장 1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그러나 위의 말씀들은 다 맹세 자체를 금하는 말씀이 아니라, 경솔하고 불필요한 맹세만을 금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은 율법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부패한 현상들을 제거하고 그 진정한 의미를 밝히시며 동시에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시면서, 제3계명이 거짓 증거만이 아니라 불필요하고 경솔한 맹세까지 정죄하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이런 경솔한 맹세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명확하게 언급하는 직접적인 맹세도 포함되지만, 피조물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훼손시키는 간접적인 맹세도 포함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일상적이었던지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다음의 말씀을 하기도 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마23:16),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마23:18) 레위기 19장 12절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맹세하면 거짓 맹세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으로 맹세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하지 않는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이요, 네 머리조차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맹세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면 거짓 맹세도 괜찮다는 게 아니라, 결코 거짓 맹세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요리문답은 102문으로 이어집니다.
102문. 성인들이나 다른 피조물로 맹세할 수도 있습니까?
답. 할 수 없습니다. 정당한 맹세는 오직 하나님만을 홀로 마음을 살피시는 분으로 여겨 그를 불러서 진실을 증언해 주시고 또한 내가 거짓으로 맹세할 경우 나를 벌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인데(롬9:1, 고후1:23), 이러한 존귀는 피조물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마5:34-37, 23:16-22, 약5:12).
여기에 대한 반론으로 요셉이 바로의 생명을 걸고 맹세한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42장 15절입니다.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여기에 대해 어떤 이들은 요셉이 피조물들을 걸고 맹세하는 이방인들의 관습을 좇아 죄를 범하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반면 우르시누스는 요셉의 말은 맹세가 아니라, 그저 강한 긍정이었다고 해석합니다.
분명한 것은 맹세가 진실에 대한 증언이요, 거짓에 대하여 벌해 달라는 요청이라고 할 때 우리 마음의 진실과 거짓을 아시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 외에 없습니다. 때문에 맹세의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가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한다고 할 때 표현 자체를 바꾸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의도는 국기 그리고 국기가 나타내는 국가에 대한 나의 다짐을 의미합니다. 혹은 위정자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표현 자체가 자칫 피조물에게 맹세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국기에 대한 맹세보다는 ‘국가에 대한 나의 다짐’으로 바꾸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맹세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고 할 때 어떤 일에 대하여 맹세해야 하는가? 어떤 맹세가 정당하고 어떤 맹세가 정당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어긋나지 않는 맹세만이 정당합니다. 또한 참되고, 분명히 알고, 가능하며, 무게가 있고, 필수적이며, 유익한 것들에 대하여 맹세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안전을 위하여 확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에 준하는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하면 미래와 관련해서는 맹세할 수 있는가? 내가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처럼 하는 맹세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일이 정당하고 올바른 일일 경우,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경우, 그런 목적으로 충실하게 행하겠다는 다짐과 관련해서는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치 못한 일에 대한 맹세, 혹은 실수나 연약함으로 인한 맹세, 양심을 거슬러 부당하게 행해진 맹세에 대해서는 회개하고 취소하여 수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목적을 고수함으로써 죄에다 죄를 더하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헤롯을 보십시오. 자신이 맹세한 바를 지킨다는 것으로 세례 요한을 죽게 하였습니다. 맹세한 바가 악한 것으로 나타날 때 회개하고 취소해야 하는데, 자신의 맹세를 지킴으로 악에 악을 더한 꼴이 된 것입니다.
그럼 강제에 의해서 억지로 맹세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맹세에 부당한 점이 전혀 없거나, 혹은 그 맹세가 정당한 맹세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그런 조건을 지니고 있다면, 혹 그것이 우리에게 불이익과 해가 된다고 할지라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맹세일 경우에는 아무도 지킬 필요가 없고,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강제에 의해 억지로 맹세하는 일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맹세를 하게 된다면 잘못된 맹세이기에 지켜서는 안 되고 오히려 회개하고 그 맹세를 취소해야 합니다.
여러분, 맹세에는 신실성과 진실성이 있습니다. 그런 맹세를 하나님께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실성과 진실성을 판단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모든 것은 정당할 경우 지키도록 해야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