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혜자 시집 <쇠비름의 집> 발간***
-시와소금 시인선 162-
❙백혜자 약력
강원도 춘천 출생으로 1996년 《문학세계》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초록빛 해탈』 『나는 이 순간의 내가 좋다』 『저렇게 간드러지게』 『구름에게 가는 중』 『귀를 두고 오다』 『민들레 틈새에 앉아서』가 있다. 강원여성문학인회장, 춘천여성문학회장, 삼악시동인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2017년 강원여성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시인의 에스프리
산은 나의 안식처였다. 살면서 받은 상처가 산을 오르다 보면 모두 호흡에 섞여 구름처럼 날아갔다. 어쩌면 이 산행 시절이 내 인생의 전성기였을지도 모른다. 산에 올라 도나 닦았어야 할 운명은 아닌 듯 세속적인 것에 몸을 담그고 지지고 볶으며 그 와중에도 늘 산행했다.
산행하다 보면 늘 가슴 찡한 것들이 나를 지켜본다. 돌아와 그것들을 생각하며 시를 쓰다 보니 자연이 주는 위로에 더 깊은 감동을 느꼈고, 사람들과의 모듬살이의 시적 사유가 적었다. 아마도 그게 나의 한계인 것 같다. 그동안 여섯 권의 시집을 내며 무명 시인임을 즐겼다. 누구에게 조명받는 것은 지금도 부담스럽다. 무명을 즐기며 마음 다치는 평가를 두려워하며 나는 그냥 시를 쓴다.
나에게도 뜻하지 않은 인생 최고의 불행이 찾아왔다. 췌장암으로 남편을 떠나보내며 이런 불행은 나라고 비켜 가지는 않는구나, 탄식했다. 내 직업이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사람들을 만나며 많은 죽음을 돌보는 간호사였음에도 내가 당한 그와의 사별은 마냥 슬프기만 했다. 내 존재의 반이 날아갔으며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나 또한 저렇게 한 줄기 연기로 사라지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꼈다.
❙차례
제1부 꽉 찬 울음
호박꽃 13/ 혜자의 전성시대 14/ 여우에게 16/ 억새 17/ 작은댁 음전 언니 18/ 솔잣새 20/ 현호색 21/ 강나무 22/ 꿀꽃 23/ 목련나무 등을 걸고 24/ 헛것이 보이나? 26/ 배롱나무 27/ 쇠비름의 집 28/ 귀뚜라미 30/ 꽉 찬 울음 31/ 마녀갈빗집 32/ 호숫가 은사시나무 34/
제2부 구름 여인숙
오목눈이 37/ 굴참나무에 스며들어 38/ 시인 나무 39/ 나는 봉이다 40/ 찌르륵 찌르륵 42/ 자전거 44/ 오늘은 비 45/ 김치찌개 끓이는 저녁 46/ 시가 써지지 않는 날 47/ 잠 오지 않는 밤 48/ 귀신 50/ 아모레 파티(Amor Fati) 52/ 강씨가 죽나보다 53/ 구름 여인숙 54/ 화자 55/ 등나무 아래서 56/ 우주로 낸 문 58/
제3부 천국의 오후
집에 가자 61/ 안개역에서 62/ 춘희 63/ 제임스 본드 바퀴벌레 64/ 이 공주 65/ 천국의 오후 66/ 시집온 날 67/ 용수메기소 68/ 연분홍 화엄 69/ 참새야, 눈 온다 70/ 달은 죽지 않는다 71/ 해운대 갈매기 2호 72/ 잡아서 구워 먹자 73/ 좋은 하루 74/ 나비점 76/ 거미 77/ 당간지주에 기대어 78/
제4부 화투판 풍 약
가을이 81/ 소 몰던 소리 82/ 그믐달 84/ 빠글 파마 85/ 바람귀신 86/ 하늬바람 87/ 라디오 시절 88/ 화장로 89/ 떡갈나무 90/ 대추나무와 능소화 91/ 낙상홍 92/ 돛단배 93/ 꿀 같은 미움 94/
시인의 에스프리 | 백혜자
무위자연과 함께하는 나의 시___97/
❙자전적 작품해설
무위자연과 함께하는 나의 시
백혜자
나의 시적 질료를 설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살아온 편린들을 들춰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동안 발표했던 나의 시집 속에 있는 시편을 끌어내려 한다.
나는 대가족 속에서 성장했다. 집안은 늘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로 복작대고 어느 곳 하나 내 자리가 없이 섞여 있었다. 정리 정돈을 못하는 내 성격은 아마도 이런 영향이 컸을 것이다.
아버지는 춘천시 북산면 오항리(그 당시 오지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일정시대 말에 학교를 다니셨으며 대동아전쟁, 한국전쟁을 지나오면서 그 모든 게 공허하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셨는지 우리에게 공부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리 형제는 아들 여섯 딸 둘의 팔 남매였는데 나는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누가 신경 쓰지 않아도 소리 없이 잘 자라는 아이였던 것 같다. 단지 복작대는 집이 싫어 나만의 공간을 찾아 봉의산에 올라가 혼자 앉아 있거나 소양강에 나가 혼자 놀다가 저녁 먹을 때나 돌아왔었다. 할 일 없이 배를 타고 서면으로 건너갔다 돌아오기도 했다. 당연히 일에 치인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돕지 않아 야단을 도맡아 맞았고 부엌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빨리 자라서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 이유 중 또 하나는 늘 붙어있던 가시 돋친 성격의 내 바로 위 언니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처음 고백하는 말이다). 내 시 속에는 혼자라는 단어 산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다.
산을 내려와 산을 볼 때마다
산이 금방 나를 낳은 것 같다
누가 나를 초록 탯줄에서
뚝 떼어 놓은 것 같다
미루나무에서
매미가 나 대신 악쓰며
울어댄다
―「산」 전문 (제2시집 『나는 이 순간에 내가 좋다』에서)
혼자 가는 이슥한 가을 길이
어찌 그리 환하십니까?
―「달」 전문 (제2시집 『나는 이 순간에 내가 좋다』에서)
산속에 집 짓고 살고 싶은데 뭘 해 먹고 살지 공상하면서 고교 시절 백일장에 당선되어 배운 적도 없는 시를 쓰며 문학소녀가 되었다. 내 시에 산 혼자 이런 말이 많이 들어간 것을 뒤늦게 발견하며 어린 시절이 이렇게 나에게 영향을 끼쳤구나, 생각했다.
고요히 흩어지는
나의 날숨을 바라본다
폐 속에 나뭇가지를 지나
긴 혈맥의 강줄기를 감돌아
내 생애의
나이테를 늘이며
흩어지는 날숨들의
구름송이들
(중략)
오늘은
내 숨결이 숲의 향기에
오래 물들도록
날숨의 구름을 날리며
초겨울 숲길을 종일 걸어갔다
―「나의 날숨에게」 부분 (첫 시집 『초록빛 해탈』에서)
거울 보면
내 쇠골 아래
소양강 새파란 물줄기가 흐른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음 상하면 달려가 듣던
나를 다독이던 물소리 다정하고
여름밤 강에서 바라보던
빨갛게 익어가던 별 밭이 있다
(중략)
소양강은 언제나 내 몸에 흐르는
새파란 어린 강이다
―「내 쇄골 아래」 부분 (제3시집 『구름에게 가는 중』에서)
대학을 휴학하고 있을 때 다방 <여로>에서 시낭송회가 열렸다. 함박눈이 오던 밤이었다. 강원일보 기자로 있던 선배의 부름으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낭송하면서 나도 시인이 되어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지만 얼마 후 영화 속에서 본 간호사의 유니폼을 보고 그만 반하여 간호사의 길을 선택하여 간호전문대학에 들어갔다. 세상이 학벌을 따지자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야간대학을 나왔고 대학원까지 마쳤다.
처음에는 스칸디나비아 삼 개국이 세우고 운영하던 현대시설을 갖춘 메디칼센타(중앙국립의료원)에 근무했고, 후에 강릉간호고등학교의 부름을 받아 교사를 거쳐 춘천간호전문대학에 교수가 되어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건 성실성이었다. 어머니는 아무리 아파도 그 많은 형제, 군식구들에게 밥을 해주셨다. 아버지 역시 춘천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시다 갑작스럽게 쉰두 살에 뇌출혈로 돌아가실 때까지 직장을 지각하거나 결근한 적이 없었고 늘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가 귀가할 때까지 잠들지 않고 기다렸다. 아버지가 가끔 들고 오시는 호떡이나 막국수를 얻어먹으려고…….
나는 소원대로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로 전전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직장과 직장으로 이어지는 바깥사람으로 살았다.
빨랫줄에 널린
어머니가 남기고 간
손때 묻은 베자루에
어머니의 손길이
아직도 남아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
오이지며 김치 짜며
한 생애 밥 지으시던
어머니 생각
추운 어느 겨울날
꼭두새벽 나보다
더 먼저 일어나 밥 지어 놓아
뜨거운 밥 뜨거운 국에 말아 먹고
어두운 길 나서서 첫차 타고 출장 가던 일
언제나 나를 달리게 한
어머니의 성실한 밥 짓기
그 뜨거운 유산인 나의 생애를
이제야 가만히 안아본다
―「어머니의 뜨거운 유산」 전문 (제4시집, 『저렇게 간드러지게』에서)
세월이 가면서 세상도 변하고 친척들도 멀어지고 형제들이 자라서 차례로 집을 떠나고 홀로 남게 된 어머니는 직장생활 하며 가사도우미를 찾지 못해 아이들과 쩔쩔매는 나를 도와주셨다. 어머니 아니면 어떻게 아이들을 다 키웠을까? 역설적으로 집안일을 돕지 않던 나를 도와주신 어머니가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다.
일에 달인이셨던 어머니 덕에 편히 직장에 다닐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어머니가 돌아가고 남긴 살림살이의 흔적들이 오래 나를 슬프게 했다. 연세가 점점 많아지자 어머니는 우리 집 장 담그는 걱정을 하셨다. 딸을 잘 아는 어머니는 아범(남편)에게 가르쳐줘야 한다고 벼르시다 끝내 어머니의 장 담그기는 맥이 끊기고 말았다.
어머니의 장독대에
직녀의 날개옷 같은
앵두꽃이 피었다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가
갓 담근 장항아리를
모두 열고
봄 햇살을 넣으시다
고운 앵두꽃을 바라보신다
항아리 속에 장을
채우고 비우는 사이
민들레 갓털처럼
여물어
가벼워지신 어머니
세월에 밀려나는
장독을 홀로 돌보시며
날개옷 속에 묻혀있다
한결 목청 높아진
참새와 봄을 나누시며
햇살 속에 섞이신 어머니가
곧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어머니의 장독대」 전문
어린 날 아플 때면
아랫목 아버지 곁에서 잤다
죽은 듯 자는 잠을 들춰보며
죽었나? 하고
농을 거시던 아버지 생각
그 겨울의 아랫목
아버지 곁에 누워 열에 들떠
풋잠 속으로 잠행하던
따뜻하고 아늑한 잠!
―「아랫목」 전문 (제6시집 『민들레 틈새에 앉아서』에서)
약간 괴팍하고 사람 사이에 섞이기를 싫어했지만 다행히 좋은 남편을 만났다. 내가 마음 놓고 밖에 나가 활동할 수 있었던 건 그의 협조가 컸다. 남녀의 일을 가리지 않고 아이도 함께 키우고 친정어머니와 가사일 힘든 일을 도맡아 도와주었다. 이 두 분이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나도 없었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산을 좋아했다. 일요일이면 무조건 금병산으로 향했다. 원시림 같았던 산을 그렇게 십 년을 오르내렸다. 그러노라니 그곳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송전탑이 들어섰고 김유정 문학촌을 비롯해 예술인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향한 산이 강원대학 연습림인 구월산을 끝으로 모든 것이 변했고 함께하던 동행도 이사 가면서 먼 산으로 가는 것을 그만두고 예전처럼 봉의산을 날마다 오르내렸다. 어머니 말씀대로 그곳에 한 살림 차린 듯 하루라도 못 가면 마음이 불편했다.
한 떨기 꽃나무인 줄 알았나?
하산하는 나를
나비가 부지런히 쫓아오네
―「하산」 전문 (제2시집 『나는 이 순간에 내가 좋다』에서)
무심코 산모롱이 돌아가다
소식 없이 온 애인 같이
활짝 핀 산동백과 마주친다
파릇하게 달아오른 나의 두 볼
겨울 풀리는 여울 소리에
들썩이는 산
달려와 내 품에 쓰러지는
알싸한 향기
―「산동백」 전문 (제2시집 『나는 이 순간에 내가 좋다』에서)
산은 나의 안식처였다. 살면서 받은 상처가 산을 오르다 보면 모두 호흡에 섞여 구름처럼 날아갔다. 어쩌면 이 산행 시절이 내 인생의 전성기였을지도 모른다. 산에 올라 도나 닦았어야 할 운명은 아닌 듯 세속적인 것에 몸을 담그고 지지고 볶으며 그 와중에도 늘 산행했다.
아이들은 모두 자라 제 갈 길로 가니 나는 아이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때부터 묵혀두었던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단풍 든 떡갈나무 숲도
새 울음도
땀에 젖은
이마를 스치는 바람결도
떨어지는 낙엽까지
모두 금싸라기
지천으로 쏟아진 금을
밟으며 돌아오는 일확천금의 저녁은
하느님이 나에게 무조건 내리시는
은총의 로또복권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로또복권」 전문 (제4시집 『저렇게 간드러지게』에서)
태풍에 꺾여 내동댕이쳐진
솔가지 다듬어
아픈 다리 의지하고 간다
지팡이 곁가지에 아직 윤기 나는
생솔가지 하나 붙어 쫄랑쫄랑 따라온다
죽은 줄 모르고
쫄랑쫄랑 따라온다
―「지팡이」 전문 (제4시집 『저렇게 간드러지게』에서)
산행하다 보면 늘 가슴 찡한 것들이 나를 지켜본다. 돌아와 그것들을 생각하며 시를 쓰다 보니 자연이 주는 위로에 더 깊은 감동을 느꼈고, 사람들과의 모듬살이의 시적 사유가 적었다. 아마도 그게 나의 한계인 것 같다.
그동안 여섯 권의 시집을 내며 무명 시인임을 즐겼다. 누구에게 조명받는 것은 지금도 부담스럽다. 무명을 즐기며 마음 다치는 평가를 두려워하며 나는 그냥 시를 쓴다.
나에게도 뜻하지 않은 인생 최고의 불행이 찾아왔다. 췌장암으로 남편을 떠나보내며 이런 불행은 나라고 비켜 가지는 않는구나, 탄식했다. 내 직업이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사람들을 만나며 많은 죽음을 돌보는 간호사였음에도 내가 당한 그와의 사별은 마냥 슬프기만 했다. 내 존재의 반이 날아갔으며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나 또한 저렇게 한 줄기 연기로 사라지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매일 산을 오르내리며 혼자서 지냈다. 그렇게 애도의 과정을 지날 때 시를 쓰는 시우들이 나를 불러냈다. 그중에 나보다 먼저 그런 아픔을 지나온 친구가 김유정문학촌에서 시 교실을 운영한다며 나를 끌어냈다. 금병산은 내가 십 년이 넘도록 오른 산이고 그곳에 많은 추억이 있어 선뜻 나섰다.
그리고 시 교실에 들어가 강사로 온 전윤호 시인을 만났다. 전 시인을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다.
「서른 살 즈음에」, 그리고 「도원」이란 작품이었나? 시가 좋아서 기억하고 있었던 이름이 나중에야 떠올랐다. 전 시인에게서 시는 역설로 이루어진다는 것, 의인법은 실패가 없다는 것, 시는 다큐가 아니라는 것,
시도 이야기라는 것 등을 다시 배웠다.
금병산을 보는 위안에 매주 그곳에 갔다. 그리고 시련의 와중에도 다시 시를 쓰는 게 삶의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산을 오르는 것은
오래된 기도
(중략)
숨찬 성깔은 바람에 실려 흩어지고
어깨를 내주던 상수리나무
눈물에 섞이던 바람
헐벗은 나무에 무게도 없이 쏟아져 내리던 햇살
겨울 가면 떠나간 것이 다시 돌아오곤 했지
―「내 오래된 기도」 부분 (제5시집 『귀를 두고 오다』에서)
들판에 풀이 파릇파릇 해 질 때
나도 파릇해진다
마파람이
앵두꽃 봉오리 만질 때
내 가슴도 봉긋봉긋 부풀고
잎눈 뾰족이 끌어올려
연둣빛 새 눈 뜬다
―「다시 봄」 부분 (제5시집 『귀를 두고 오다』에서)
날 저물면
불 켜고 기다리는 등대
비릿한 바람 속 풍물장은 비어가고
한눈에 보이는
날 기다리는 별 한 채
춘천은 항구다
―「춘천항」 전문 (제5시집 『귀를 두고 오다』에서)
지금은 춘천 항에 정박 중이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시인 네루다와 어부의 아들 마리오의 대화가 생각난다.
“선생님 어떡하지요. 전 사랑에 빠져 버렸어요. 거기엔 약이 있다네. 아니요, 약은 필요 없어요. 저는 계속 아프고 싶어요.”
시 쓰기는 낫고 싶지 않은 병인지도 모른다. 이번 일곱 번째 시집을 엮으며, 나를 위해 몸을 내준 나무를 생각하며 종이에 고마움을 느낀다.
시집왔니?
친구의 문자
살구나무에서 새소리 쏟아진다
시가 저렇게 쏟아지면 좋겠다
시가 좋아서
시집가잖아
하며 창문을 닫는다
창 앞까지 달려온 안개가
어느덧 걷히고
새신랑
시집왔다
―「시집온 날」 전문 (제7시집 『쇠비름의 집』에서)
남겨진 시간 속에 내 유일한 무대가 되는 시 쓰기가 있는 것이 기쁘다. 보아주는 관객 단 한 사람이라도 박수 쳐주길 기대하며 시를 쓴다. 바로 그 단 한 사람이 나겠지만….
벚나무 올려다보니
우주로 문을 낸 까치집에
하얀 꽁지가
꼼지락 꼼지락거린다
집수리하는지
낮달도 따라와 서 있다
봄이 나무속으로 와
꽃망울이
어린 소녀 젖꼭지만 해졌다
저 꽃 만발할 때
터지는 황홀
꽃 속에 앉을 날
멀지 않구나
―「우주로 낸 문」 전문 (제7시집 『쇠비름의 집』에서)
날마다 펼쳐지는 구름과 바람의 향연과 햇빛의 마술. 산책길에 기다리는 나무들, 새 땅을 찾아 떠나려고 날개를 짓고 있는 억새. 나는 그 길에서 애기똥풀처럼 번성하는 시를 노랗게 피우고 싶다.
요양병원에서 집에 온 오빠
천국에 온 것 같구나!
마누라가 천사같이 보여
모처럼 통증 없는 시간이
늦가을 바람에 흔들린다
어쩔 수 없이 가는 가을
하루를 천년처럼 살아보려 해
바나나 한 쪽을 드리니
집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오래 잡수신다
낡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태평가처럼 들리는
천국의 오후였다
―「천국의 오후」 전문 (제7시집 『쇠비름의 집』에서)
지금 나도 천국의 오후를 지나고 있다. 언제나 한계에 부딪히는 시 쓰기. 세상은 변하고 새로운 세대들의 시는 낯설어 쫓아갈 수 없고, 나는 나의 시대 나의 말의 시를 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시를 쓰는 것은 낫고 싶지 않은 병이고 나의 텅 빈 하루를 채우는 노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