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산상수련회)
송선주
“어머나! 밖이 하예요.”
룸메이트가 커튼을 활짝 열며 소리쳤다. 새벽 다섯 시. 아직 사위가 깜깜 할 텐데. 그녀의 고함소리에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삼층에서 내려다본 세상이 희다 못해 푸른빛이 감돈다. 전나무가지에도 밤새 하얀 꽃이 피었다. 사박사박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만든다. 살포시 눈을 손안에 느껴본다. 온몸의 세포가 전율한다. 눈꽃무게에 나무 가지들이 늘어졌다.
여섯 시 새벽기도에 참석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어제 이어 목사님의 설교내용이다. 교회 2박 3일 산상수련회에 참여 중이다. 빅 베어 중턱에 자리한 camp cedar falls.
숲속에 사 층 목조건물이 자연을 닮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란 아름드리나무가 뿜어내는 정기로 속세에 찌든 내 몸과 마음도 연초록이다. 숲 속 군데군데 작은 암자 같은 목조건물이 개인 기도처다.
첫날 우리일행은 다른 이 들 보다 늦게 도착했다. J 장로님 부부가 일을 마치고 중간에 내려 나를 데리고 왔다. 금요일 오후 세시, 한 시간이면 오는 거리를 91 프리웨이로 세 시간 반이 소요됐다. 꼬불꼬불 숲 속 길을 돌아오니 어느 듯 어둠과 함께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식당 마감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누군가의 배려로 세 사람 음식이 테이블에 준비되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모임장소에는 이미 사회자의 재치 있는 진행으로 박장대소, 건물이 들썩거렸다.
내 룸메이트와 만리장성을 쌓는 밤. 언니가족을 따라 왔다는 그녀는 참새처럼 조잘 됐다. 밝고 귀여운 소녀 같았다. 그녀의 얘기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어느새 잠이 들었나 보다. 눈을 떠니 아침 여덟 시다. 아뿔싸. 다른 이들은 벌써 산책을 끝내고 식당으로 가고 있었다. 식당은 사방 유리창을 크게 하여 자연 속에서 식사하는 분위기로 매끼 다른 음식이 나왔다.
예배를 드린 후 숲속 길을 걸었다. 잣나무 소나무 상수리나무 등 잡목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계곡 아래서 물 흐르는 소리가 아련히 들린다. 개구리 소리도 들릴까 귀를 쫑긋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름드리 고목이 뿌리째 뽑혀 비스듬히 산 아래로 걸쳐 누워있다. 장난기가 발동해 흔들어 보지만 꿈쩍 않는다. 언젠가 우리도 풍화되어 저 나무처럼 자연으로 돌아가겠지.
‘산들은 눈치 채지 못하게 자란다’
산들은 눈치 채지 못하게 -자란다.
그 자줏빛 모습은 시도도, 피로도 없이,
도움이나 박수갈채도 없이 일어선다.
그 영원한 얼굴 속에
태양은 넓게 퍼지는 즐거움으로
오래 바라본다 - 그리고 금빛으로 변할 때까지 머문다
밤에-친교하기 위해서-
미국의 은둔시인이라 불리는 <에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의 시 .
에밀리는 내 가 좋아하는 자연시인이다.
이곳은 이민 초 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찾던 곳이다. 산 아래는 사막으로 건조한 나머지 스프링클러로 물 닿는 곳 외에는 황무지인데 반해 이곳은 산을 오를수록 숲이 우거졌다. 겨울 우기에 동네에 비가 내리면 여기에는 어김없이 눈이 내려렸다. 바람이 불면 우수수 눈꽃을 뿌리던 풍경에 매료되었지. 해발 8,805피트(2,684미터) 산 정상에 오르려면 수없이 뱅글뱅글 고개를 넘어야 해 비위가 약한 딸은 멀미를 했다. 장난기 많은 남편이 학교 운동장에 쌓인 눈 속으로 트럭을 몰다 빠져 나오느라 아이들이랑 고생도 했던 추억도 있다. 고드름이 아이키만 했다. 큰 곰의 형상을 닮아 빅 베어라 불린다. 여름은 레이크 낚시, 겨울에는 스키장으로 사철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알밤만한 도토리가 지천으로 깔려있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 만들어 둔 구멍구멍에 다람쥐들이 겨울양식인 도토리가 들어있다. 나무도 동물도 서로 공존한다. 마른 고목꼭대기에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낯선 이들의 방문에도 초연히 앉아있다.
비가 오락가락한 오후, 계곡 아래로 조심스레 내려가니 공중다리가 있었다. 한사람씩 줄을 잡고 살금살금 건넜다. 정자를 내려가니 검은 바위에 푸른 이끼로 덮여있다. 낙엽이 물속에 침전해 있고 물은 가지들이 떨어진 곳을 돌아 바위 위로 맑게 흐른다. 태고의 신비가 그대로다. 건너 오라고 손짓을 했지만 내 룸메이트는 얼어붙은 듯 다리 입구에 서 있다. 옛날 설악산 수학여행 때 울산바위를 지나 808 계단을 오르다 무서워 주저앉아 울던 친구가 떠올랐다.
마지막 날 자기가 하고 싶은 버켓리스트를 말했다. 어떤 이는 유럽여행을, 성지순례를, 성경통독을 천천히 해보고 싶다고, 만년 소녀 같은 집사님이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어요.” 라고 해 폭소를 터트렸다. 나는 자고 나면 하얀 눈이 왔으면 했는데 소원성취 했다. 윷놀이도 했다. 윷을 즉석에서 생솔가지로 만들었다. 편을 나누고 윷이요 걸이요 이곳저곳에서 환호와 응원 소리로 떠들썩했다. 가지런히 움켜쥔 윷가락에서 솔향기가 묻어나고, 우두둑 우박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밤은 깊어갔다.
땅위에 하얀 솜을 깔아 놓은 듯 포근하여 우리를 설레게 했다. 길이 막혀 어쩌면 더 머무를 수 있을라나 하는 기대를 제설차가 매정하게 앗아갔다. 짧았지만 자연과 동화되어 사랑하는 이들과 평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낸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아쉬움에 뒤 돌아보며 다시 오마 손을 흔든다.
첫댓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듬뿍 받고 오셨네요.
얼마나 좋았을까 글을 보며 느낄 수 있었어요.
송샘의 버킷리스트는 무엇이었을까요?
삶의 터전을 옮기게 하시고 새로운 교회로 인도하신 주님의 축복으로
많은 벗들을 만나게 되어 그곳애서 누리는 많은 기쁨속에서 행복한
송샘을 보며 덩달아 좋답니다.
주님안에서 허락하시는 많은것을 누리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시기를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