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J샾, 혜숙은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아 한층 예뻐진 자신의 얼굴에 한껏 기분이 업 됐다. 핸드폰에 시간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 급히 일어선다.
“김 원장 나 간다. 내일은 10시 시간 비워 놔”
“그럼요~ 어쩜, 내 솜씨지만 오늘은 더 예쁜 것 같아요! 오호호~” 과한 손동작과 함께 안면 근육을 부채꼴 모양으로 활짝 편다. 혜숙이 급히 나가고 문이 닫히자 의자에 털썩 주저 앉는다.
“아휴, 저 싸가지… 향미야, 나 물 좀...“
택시가 한국대학교 음악대학 입구에 멈춘다. 택시에서 내린 혜숙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찰랑거린다. 연한 핑크 빛 블라우스에 짧은 블랙 스커트, 족히 10센치 이상 될 것 같은 붉은 하이힐을 신고 다소 느리고 우아한 걸음으로 음대 건물을 향해 걸어간다. 걸을 때 마다 찰랑거리며 빛나는 티파니 브랜드의 귀걸이와, 같은 디자인의 팔지가 여러 개의 작은 다이아몬드를 품고 있다. 양손에는 두 잔의 아메리카노 캐리어와 색색의 파스텔 톤 마카롱이 투명 상자 안에 들어 있다. 유일하게 어깨에 멘 캔버스 가방만이 그녀가 학생임을 말해 준다.
한국대학 성악과 강건우 교수실, 목덜미까지 내려선 곱슬머리를 쓸어 올리며 벽시계를 쳐다본다. 뚜렷한 이목구비, 오랜 시간 아침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은 브랜드를 알 수 없는 민무늬 화이트 라운드 셔츠와 체크무늬 청바지, 다크 블루 재킷을 입고 있어도 런 웨이다. 일명 한국대학교의 ‘아이돌 교수’로 통하는 이유다. 40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30대 초반으로 보인다. 아침 6시면 일어나서 1시간 이상을 조깅으로 시작하는 건우는 오늘 레슨 할 학생들의 곡을 훑어본다. 건우의 악보에 빼곡히 곡을 분석한 흔적이 보인다. 한 번 더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거리며 한숨을 쉰다. 레슨 시간 1시간 중 30분이 지났다.
‘얘는 대체 뭐지? 레슨시간에 연락도 없이 안 오고… 허, 참’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설 때 교수실 문이 열린다. 혜숙은 급히 왔는지 숨을 헐떡이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다. 건우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다.
“헉... 헉 … 교수님 죄송해요, 헉… 헉… 오다가 제가 탄 택시가 사고가 나서… 제가 너무 늦었죠…죄송해요”
“아니…뭐… 근데 어디 다치진 않았고? 전화를 하지…병원에는 갔니?” 속으로 짜증을 냈던 게 미안하다.
“아뇨, 전 괜찮아요… 택시만 좀 많이 파손됐어요. 아무리 다른 택시를 잡으려 해도… 죄송해요”
“아냐… 안 다쳤으면 됐지. 그런데 오늘 레슨은 가능 하겠어?” 풍부한 바리톤 음성이 잘생김을 부추긴다.
“레슨 준비 많이 했는데…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담는다. ‘난 왜 이리 연기를 잘할까’ 속으로 연신 쾌재를 부른다. 오늘 레슨받아야 할 곡은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다. 놀기도 바쁜데 공부는 무슨… 지난 밤, 클럽에서 놀다보니 집에 들어온지 몇시간 만에 다시 학교를 가야 할 상황이 되었다. 학교 수업보다 외모가 더 중요한 혜숙은 그와 중에도 청담동 미용실에서 헤어 메이크업을 완벽하게 장착했다. 일주일은 왜 이리 빨리 돌아오는 건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생각해낸 게 오늘의 상황극이었다. 그런데 이 순진한 교수님이 속아 넘어 간다. 아이돌 같은 외모에 순진하기까지 하니 좀 귀엽다.
“교수님 드리려고 마카롱이랑 커피 사왔어요… 사고만 안 났으면 시원하게 드셨을 텐데…”
아마 상상도 못할 거다. 이를 대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미리 얼음을 빼 달라고 했다.
얼른 커피와 마카롱을 받아 들고 티테이블에 올려 놓는다.
“혜숙아 서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앉아.”
건우는 혜숙이 걱정스럽고 고맙다. 아무리 그래도 교통사고인데 병원부터 들르지… 레슨 시간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생각하니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정말 병원 안가도 되겠어?”
“괜찮을 것 같아요. 병원은 수업 끝나고 갈께요.”
“그럼 오늘은 레슨 하지 말고 네가 부를 곡만 들어보자. 혹시 지난 학기에 김애령 교수님께 받은 아리아 있니?
“아뇨, 그냥 교수님이 주세요”
“그럼 Vissi d’arte, vissi d’amore,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이 곡이 가능 한지 한번 해보고 아니면 바꾸자 괜찮지?” 몇개의 LP판을 빼서 두개를 고르고 나머지는 다시 넣는다.
“마리아 칼라스를 먼저 들어 보자 이 곡을 마리아 칼라스는 어떻게 소화해서 부르는지 커피 마시면서 감상해 볼까?” 오래된 레코드 판을 턴테이블에 얹는다.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중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Vissi d'arte, vissi d'amore)’
풍부하고 애절한 감정을 담은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가 오디오 스피커를 타고 흐른다.
Vissi d’arte, vissi d’amore,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non feci mai male ad anima viva!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았어요
Con man furtiva 남들 모르게
quante miserie conobbi aiutai. 다른 불쌍한 사람도 도왔어요
Sempre con fè sincera 항상 진실한 마음으로
la mia preghiera 나의 기도를
ai santi tabernacoli salì. 성인들에게 드렸답니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무슨 트로트 가사 같다. 짜증이 꿈틀거린다. 뭐 이런 칙칙한 곡을 주는 건지. 칙칙하다 못해 질척거리기까지 하다.
혜숙은 지난 3년동안 김애령 교수의 제자였다. 어찌나 돈을 밝히던지, 공부도 싫은데 그 교수는 정말 짜증 그 자체였다. 뭐 그래도 나름 예쁨은 받았다. 아빠가 여러 개의 병원을 소유한 스팩은 가장 큰 재능이었다. 교수를 바꾸고 싶어서 3년을 짜증나는 교수한테 알랑거렸다. 이제 그 수확으로 일명 ‘아이돌’ 교수의 제자가 되는 첫 시간이다.
들리는 음악엔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교수실 문을 들어서면 서너 걸음 앞에 마주보며 그랜드 피아노가 교수실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랜드 피아노를 중심으로 오른쪽벽에는 올리브색 책장이 벽을 차지하고 있고 수많은 음반과 악보들, 음악 서적 들이 보인다. 책장 앞에는 평범한 라이트 브라운색의 서랍이 있는 책상과 위로 연한 그레이 톤의 책상 매트가 단정하다. 책상위에는 가족 사진으로 보이는 은빛 프레임을 두른 액자가 정면에 있다.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강교수와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옆으로 책갈피가 꽂아진 책 두 권이 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고 큰 특징 없는 검은 등받이 의자도 열을 맞춰 있다. 피아노 왼쪽으로 빛 바랜 그레이 톤의 4인용소파가 마주보고 있다. 소파 옆에 미니 냉장고 위에 티팟과 머그컵 2개가 작은 쟁반에 다소곳이 올려져 있다. 소파 뒤 위 벽면에는 3장의 큰 포스터에 강건우 교수의 개인 음악회와 출연 오페라 포스터가 붙어있다. 그랜드 피아노 뒤로는 넓은 창문이 있다. 창문 너머로 키 큰 나무들의 가지와 나뭇잎들이 싱그럽다. 이곳에서 봐줄만한 건 창밖 풍경뿐이다. 두리 번 거리는 시선이 강건우 교수 얼굴에 머문다. 아니, ‘강건우 교수’ 뿐이다.
“혜숙아”
“네…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니? 어디 아프니?”
“어머, 아니 예요 교수님.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깊이 빠졌었나 봐요”
“그렇지!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심금을 울리지”. 음악 이야기를 하자 생기가 더해진 미소가 클로즈업된다.
“다음 들을 가수는 키리테카나와 어떄?” 새 레코드 판을 들고 바꾸려다 혜숙을 본다.
“혜숙아 다치지 않았다고 해도, 병원에 지금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레슨 보강은 다음번에 시간 내서 다시 정 하자. 연습하다 모르겠거나 잘 안되는 부분은 악보에 표시해서 가져오고. 다음 레슨 시간에 보자. 괜찮지?” 속상한듯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혜숙은 너무 아쉬운 듯 꾸벅 인사를 하고 뒤 돌아선다. 교수실 문을 닫고 나오는 혜숙이 소리 없이 웃는다. 아무래도 올해는 좀 재미 있을 것 같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강건우 교수의 수업일정을 꿰고 있는 혜숙이 교수실에 들어온다. 작은 케익 상자와 함께 두 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티테이블에 내려 놓는다.
“응 혜숙이구나. 이런 건 뭐 하러 사 들고 오니?” 요즘 개인적인 공연 준비로 피곤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 피곤한 건우는 갑작스러운 1시간의 빈시간이 생겼고 잠시 잠을 청할 요량이었다. 귀찮지만 제자의 열심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래 오늘은 또 어디가 문제야? “혜숙이 건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마신다.
“이 곡은 전혀 감이 안 와요. 감정도 안 살고…교수님, 제가 이번 교통 사고 후유증으로 계속 아파서 레슨을 못 받았잖아요. 그래서 교수님 시간 되실 때 자주 뵈야 할 것 같아요. 부탁드려요.” 수업을 못한 게 아니라 몸이 아프다며 먹을 것을 사 들고 와서 주로 레슨받는 곡들을 감상하며 곡 분석을 했다.
“그래, 너도 기말 시험을 봐야 하니 수업 끝나고 몇 번 레슨 하면 되겠다.” 다이어리에 가능한 시간을 확인한다.
“일주일에 1시간씩 4주만 더 하면 되겠지?” 자꾸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아뇨, 일주일에 1시간씩 두번 8주는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올해가 대학 마지막 해인데 졸업 연주 준비도 해야 하고…”
“시간은 내 보겠지만… 나도 바쁘고…네가 내야 할 레슨비와 반주비도 부담스럽지 않겠니? 방학 동안에 하지 그래?”
“비용은 괜찮아요. 교수님… 부탁드려요”
“우선 몇 번 해보고 결정하자. 괜찮지?” 더 이상 졸음을 참을 수가 없다.
“오늘은 미안하지만 내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내일 오후5시 30분에 여기서 보자.” 건우가 소파에 몸을 기댄다
“네… 그럼 케익은 냉장고에 넣어 둘까요?”
“그래 고마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다시한번 마신다. 마시는데도 졸음이 밀려온다. 나오는 하품을 손으로 가린다. 케익을 들고 냉장고로 가는 혜숙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 간다. 디 카페인 아메리카노에 수면제가 들어있다. 냉장고에 케익을 넣고 뒤 돌아서니 강건우 교수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 흔든다.
“교수님. 교수님” 대답이 없다.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다. 핸드백에서 립스틱을 꺼내 강건우 교수의 입술 주변에 바른다.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도 푼다. 혜숙 자신의 입술도 립스틱이 번지게 한다. 단발머리 가발을 쓴다. 콧등에 점을 그려 넣는다. 아이셰도우를 진하게 바른다. 강교수의 오른쪽 팔을 들고 혜숙의 어깨에 둘러 얹고 딱 붙어 앉는다. 얼굴을 가까이하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클렌징 티슈를 꺼내 건우의 얼굴을 닦는다. 건우의 옷 매무새와 머리를 정리하고 S사의 N.5 향수를 꺼내 셔츠에 바른다.
혜숙의 아버지는 가정이 있는 상태로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일명 첩이었다. 고작 한달에 몇 번 집에 오던 아버지는 엄마가 나이를 먹을수록 발길이 뜸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이유는 아버지에게 다른 젊은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외식을 해보지도 못했고 학교에 찾아온 일도 없었다. 뜸한 아버지의 방문에 엄마도 애인을 바꿔가며 사귀었다. 아버지의 죄책감은 돈으로 메꿔졌다.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가능했다. 돈으로 친구를 살수도 있었다.
그래서 무료 할 때면 선생님이나 친구의 음료에 수면제를 탔다. 조직적인 전투 게임처럼 플랜을 짰다. 혜숙은 행복한 가족에 알레르기가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일명 ‘무너뜨리기 게임’을 한다. 약한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을 을 찾아, 자존감을 바닥으로 만들어 스스로 좌초하게 만드는 것이다.
윤희는 남편의 학교 앞 모처럼 대학 동창들과 점심 먹고 커피숍에 왔다. 오랜만에 모교 앞에서 만나서인지 대학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도무지 헤어지려고 하질 않는다.
“그때 대단했지 우리 아이돌 교수님”
“4학년 봄에 강 교수님이 처음 출강 하셨잖아. 어쩜 그리 잘생겼는지 모든 음대를 넘어 미대, 체대 여학생들까지 눈에서 하트 뿅뿅이었지 아마?”
“고럼, 고럼! 하트 만 뿅뿅이었니? 여학생들 선물공세도 연예인 급이었지!”
“그해 남학생들 연애와 썸은 다 망했지 아마?”
“왜 아니겠니! 우리 건우 교수님 옆에만 서면 다 오징어가 되는데”
“맞아 어느 날 내가 교수님께 눈도장 찍으려고 검나 비싼 꽃을 사 들고 교수실에 갔더니, 이미 너무 많은 꽃들이 있어서 꽂을 데가 없더라. 그때 내가 포기했잖니!”
“뭘?”
“우리 아이돌 교수님께 들이대는 것 말이야. 얘들아 그날 나 겁나 예뻤다!” 헐~ 얘네들 웃다가 운다. 멀쩡하게 차려 입고 나와서 시장 통 장사꾼들 마냥 볼륨 조절이 안된다.
“근데, 저 얌전한 윤희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갈 줄 누가 알았겠어!”
“모태솔로 윤희가 우리 중 제일 먼저 결혼하다니. 그것도 우리 아이돌 교수님과 말이야”
꺅꺅 대며, 양손 하이 파이브에 깍지 끼고 흔들고 난리가 났다.
“윤희야 어때? 우리 아이돌 교수님과 사는 기분이? 날마다 심장 뛰어서 어떻게 사니?” 과하게 눈을 깜박이며 묻는다.
“넌 분명히 전생에 나라 아니, 세계를 구했을 거다!”
“점심은 더치페이였지만 커피는 네가 사라! 우린 지금도 배가 아파서 안되겠어!”
“알았어…” 윤희는 자꾸 시계를 쳐다본다. 아이들을 옆집 아주머니께 몇시간만 봐 달라고 부탁해서 빨리 들어가 봐야 한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아이들에게 가 있다.
아무래도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다. 우선 결제를 먼저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 핸드폰을 들고 일어서서 카운터로 간다. 무심코 든 시선이 통 창너머의 두사람에게 엉긴다. 인형처럼 예쁜 여자와 나란히 걷고 있는 건우. 뭐가 재미 있는지 웃음꽃이 만개했다. 건우의 팔을 톡톡 치며 예쁘게 웃는 앳된 여자를 보니 망부석이 된 것처럼 몸이 굳는다. .
“윤희야, 뭐해? 네가 계산하려고?”
“으…응”
“아니야 하는 소리지. 이제부터 무조건 n 분의 1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래야 한번이라도 더 만나지. 너 졸업하고 오늘 처음 보는거잖니. 얼굴만 자주 보여줘
“으…응””
“윤희야, 너 얼굴색이 창백해. 어디 아파?”
“아냐, 나 지금 가봐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을 옆집에 부탁해 놔서 아무래도 걸려”
“내가 가방 가져올 게. 너 지금 얼굴 되게 안 좋아”
“고마워” 정연이가 가방을 가지러 간 사이 카운터에 기대 있다가 뒤 돌아선다.
“저 물 한 잔만 부탁해요. 약을 먹어야 할 것 같아 서요…”
혜숙은 아르바이트로 목소리 예쁜 여성 몇명을 고용해 강건우 교수가 집에 없는 시간에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게 했다. ‘여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어머… 사모님?... 죄송…합니다’ 놀란 듯 그리고 느른하게 말하고 끊으라고 했다. 혜숙은 짧은 단발 가발을 쓰고 짖은 눈화장과 함께 콧등에 점을 그린다. 강교수에게 발랐던 향수를 바르고 강 교수 와이프가 자주 다니는 길목에서 우연을 가장하고 부딪친다.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이 땅에 떨어지고 사진 속 남편을 본 윤희는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같은 모습을 하고 매주 두번씩 강 교수 와이프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 날 초췌한 몰골로 혜숙 앞에서 남편과의 관계를 묻는 윤희에게 비수를 꽂는다.
“꼴에, 그 꼬라지를 하고 다니니 네 남편이 내가 좋다고 하지! 아이들 데리고 멀리 떠나는 거 어때? 필요하면 내가 돈도 조금 줄 수도 있고. 건우씨가 그러던데… 아이들 때문에 사는 거라고” 혜숙이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냥 애들 놓고 너만 사라지는 것도 괜찮고” 위아래로 흩어보는 눈에 비아냥거림이 걸려있다.
“그렇게 살아서 뭐하니? 나 같으면 안 산다!”
혜숙은 주중에 하는 레슨을 주말로 바꾼다. 강교수도 개인 연주회 일정 준비로 바빠서 수락한다. 일주일에 두 세번, 향수를 잘 사용하지 않는 건우가 집에 들어갈 때 N.5의 향도 옷 끝에 살짝 묻혀 보낸다. 감사하다는 명분으로 향수, 넥타이, 넥타이핀, 셔츠, 아이들 장난감 등 소소한 선물을 자주 한다.
윤희의 부모님은 윤희가 중학교 1학년때 이혼했다. 아빠의 잦은 외도에 지친 엄마는 더 이상의 용서는 안 한다고 했다. 돈을 좀 모아서 데리러 오겠다는 엄마는 약속만을 덩그러니 남긴 채, 돌아오지 않았다.
그동안 아빠 옆자리는 여러 번 바뀌었다. 원하지도 않은 관심을 생색내듯이 건네는 아빠의 여자들은 서로 부지런히도 싸웠다. 대학 4학년 7월 어느 날 일주일 된 여자친구와 술을 마시고 음주 운전을 하던 아빠는 고속도로에서 과속을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물려받은 오래된 집과 사망 보험금을 정리해 통장에 넣고 학교근처의 작은 옥탑방을 얻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임용고시를 보려면, 학교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5층 옥탑에는 대문 같은 작은 철 문이 있다. 주인 아주머니는 아가씨 혼자 사는데 안전하고, 사생활 보호가 된다며, 철문의 효용성과 안전성을 침을 튀기며 설파했고, 윤희도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주인 아주머니의 허락으로 옥탑 대문에 열쇠도 새로 바꿔 달았다. 윤희의 옥탑은 마당처럼 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화분들을 사서 상추도 심고, 꽃과 허브도 심었다.
그러나 애초의 생각과는 다르게 원인 모를 몸살 감기는 끝나지 않았고, 몸은 젖은 솜 뭉치 마냥 늘어져 힘을 낼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점점 아침에는 일어날 수 없었고, 먹고 싶지도, 아무 와도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살고 싶지 않았다. 한학기면 졸업하는 학교도 휴학했다. 새롭게 잘 살아보겠다고 심었던 허브와 화초들은 화석이 됐고, 작은 정원이 있는 집을 만들 거라 생각 했던 옥탑방은 귀신 나오는 집처럼 을씨년스럽게 변모했다. 그렇게 1년을 옥탑에서 말라 비틀어진 식물들과 살았다. 옥탑 출입문은 견고한 성의 빗장이 되었다.
“윤희야, 윤희 있니? 윤희야” 쾅쾅쾅 누군가 출입문을 두드린다. 시끄럽다. 빨리 갔으면 좋겠다. 몸을 뒤틀어 벽을 보고 누웠다. 암막 커튼을 비집고 작은 햇살이 줄기를 이루며 벽에 닿았다.
눈을 감는다. 이대로 깨지 않았으면… 음식을 먹지 않은지도 몇일이 지났을까? 세어보지 않았다.
끽끽 거리는 소리. 누 군데 저렇게 문을 흔드는 걸까? 빨리 갔으면…
“윤희야, 엄마야. 문 좀 열어봐. 윤희야”
엄마? 누구? 내 엄마? 화들짝 일어서다 힘없이 침대에 쓰러진다. 머리가 핑 돈다. 일어나야 하는데 어지럼증이 내리 누른다.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기어가 미닫이 문을 열었다. 부엌과 현관이 이어진 좁은 공간을 지나 출입문을 잡고 일어섰다. 잠시 눈을 감고 어지럼증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햇살이 눈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다.
“윤희? 윤희야, 윤희야” 쾅쾅쾅 엄마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려는 듯 쉬지 않고 소리를 내고, 만들고 있다. 철문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다. 겨우 문을 열자 엄마는 들어서며 윤희를 잡고 주저 앉는다. 고개를 든 엄마의 얼굴에 눈물이 가득하다. 40키로도 안 되는 미라 같은 딸을 보는 엄마는 죄의식 떄문인지 고개를 들지 못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집에 들어온 윤희는 냉장고를 연다. 냉장고 안은 형체모를 뭔가가 곰팡이에 둘러 쌓여 있다. 바닥의 생수병을 하나 엄마에게 건네고 힘겹게 앉는다.
엄마를 만나면 뭐라 말 할까를 무수히 생각 했지만, 막상 맞닥뜨리니 입술은 강력 본드를 붙인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윤희야… 윤희야…” 손을 잡고 손바닥을 쓸어내린다.
“미안해…엄마가 정말 미안해…그동안 오지 못해서…엄마가…” 목이 메이는지 가슴을 친다. 엄마를 보고 있는 윤희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낯선 냄새에 윤희가 눈을 떴을 떄, 하얀 천장과 주위로 어두운 베이지색 커튼이 둘러 있었다.
“여긴…”
“윤희야 정신이 드니? 어쩌자고 그랬어! 영양 실조에 탈수라니…” 엄마도 많이 놀랬는지 얼굴이 창백하다. 그런데 엄마가 왜 여기 있지? 그제서야 찬찬히 엄마를 살펴본다. 엄마는 10년전이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세월이 엄마만 비켜갔나 보다. 입고 있는 보라색 정장은 왠지 고급스럽게 보인다. 그냥 먹기 싫어서 안 먹었다는 윤희의 대답에 머리가 하얀 의사 선생님은 한차례 호통을 치고 가셨다. 다이어트도 좋지만 그러다 죽는다고. 다이어트? 어이가 없지만 거식증을 의심하는 의사선생님께 그냥 극단적 다이어트였다고, 다음부턴 안 그러겠다고 했다.
다음날 퇴원 수속을 하고 집에 왔다. 엄마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윤희도 딱히 묻지 않았다. 잠시 떨어졌다 만난 것처럼 함께 시장을 보고 밥을 먹었다. 엄마는 냉장고 안을 청소하고 집안을 쓸고 닦고 정리하고, 밖에 있는 화분들도 모두 정리했다. 쓰레기들을 분류해서 빌라 1층 입구에 모아 두느라 여러 번을 내려가고 올라오기를 반복한다. 유리창 너머의 엄마의 분주함을 보고 있던 윤희는 깨끗 해져가는 밖의 풍경이 낯설다.
‘띠링 띠링’ 엄마의 전화벨이 울린다. ‘’자기야”라는 글자가 보인다. 전화벨 소리가 몇 분간 이어지더니 잠잠해졌다.
‘깨톡 깨톡 깨톡’ ‘어디야?’ ‘왜 안 와?’ ‘그 아이랑 있어?’ ‘그 얘기는…해봤고?’
다시 어지러워진다. 침대로 가서 누운다. 엄마는 그 동안 새로운 가정을 꾸렸나 보다. 벽을 향해 돌아 누워 있다가 엄마가 들어오는 소리에 눈을 감는다.
“윤희야” 대답이 없다.
“윤희야, 얘가 자나?” 메모지를 찾아 쓴다. ‘엄마 간다. 내일 다시 올께” 핸드폰을 챙긴다. 미닫이 문을 조용히 닫고 현관 문도 소리 나지 않게 천천히 닫는다. 빌라를 나와 삼거리 24시 편의점 앞, 핸드폰을 연다. ‘자기야’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누르자. 첫번째 통화음이 떨어지기 바쁘게 전화를 받는다.
“왜 이제야 전화해!”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꼭 무슨 일이 있어야 돼?”
“어젯밤에 윤희가 아팠다고 말했잖아요”.
“그렇다고 집에도 안 들어와? 나는 그렇다 해도 한수는? 한수가 밤에 엄마 찾는 거 몰라?”
“그럼 어떡해요. 윤희가 쓰러져서 정신도 못 차리는데, 그런 애를 두고 그냥 집에 가요?”
“알았어…미안해… 빨리 들어와. 한수 기다려”
“알았어요. 지금 가는 중이예요”
한달이 지나도록 엄마는 매일 아침 윤희 집으로 출근했다. 9시반쯤와서 오후 4시쯤 옥탑방을 나선다. 냉장고 안에는 반찬들이 층층이 쌓인다. 윤희가 좋아하는 사과와 오렌지도 냉장고 서랍 한켠에 가득하다. 한달 새 윤희는 살집이 조금 오르고 까맣던 안색도 뽀얀 모습을 되찾았다. 마당에화분도 화훼용 거름을 섞어 70여가지 믹스된 야생화 씨앗을 심었다. 언제 나올지 모르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고 한다는 문구에 혹해서 샀고, 파종도 끝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한창일 때까지 엄마와의 소소한 일상으로 바쁘게 보냈다. 엄마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마냥 좋았다.
“윤희야, 엄마야! 문열어!” 빠르게 슬리퍼를 신고 뛰어나가 문을 연다. 5층까지 걸어서 올라온 엄마는 크게 숨을 쉰다. 손에는 장바구니가 터질 듯 부풀어 있다.
“엄마, 뭐야 무거운데… 마트는 나랑 같이 가지”
“아냐, 운동도 되고 좋지 뭐.”
“엄마 미안해. 엘리베이터 있는 집 구할 걸 그랬어.”
“근데… 윤희야…”
“응?” 넘겨받은 장바구니가 보기보다 더 무겁다. 얼른 집에 들여놔야겠다. 온갖 신경이 터질 것 같은 장바구니에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걸 들고 5층까지 올라왔는지… 두손으로 받아 든 장바구니를 집안에 들여놓는다.
“엄마 좀 전에 뭐라고 했어? 장바구니가 무거워서… 엄마 손 좀 봐. 이것 봐, 다음부턴 혼자 장보지 마” 엄마의 손에 난 자국에 울컥한다.
“근데, 윤희야… 너 아빠 보험금이랑 집은… 어떻게 했어?”
“응, 그거…왜?”
“아니 네가 잘 처리했나 싶어서 그러지…”
“여기 전세 값만 빼고 은행에 넣어 뒀어…”
“어…얼마나…돼?”
“… 왜… 엄마가 그게 왜 궁금한데?”
“아니… 그냥…”
옥탑방의 여름은 유난히 덥다. 오후2시, 차라리 산책을 나가는 게 낫겠다. 운동복을 입고 카드지갑만 챙긴 뒤 집을 나선다. 편의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걷다 보니 윤희가 다니던 대학교까지 왔다. 저도 모르게 음대 건물로 발이 움직인다. 전공 과목과 교양과목 이수로 분주히 뛰어다니던 때가 왠지 까마득한 옛날 같다. 4학년을 편하게 보내기 위해 3년 동안 학기마다 만땅 채워서 학점을 이수했었다. 맞다! 마지막 학기와 졸업연주회를 해야 졸업하는데…
가을학기 복학을 신청하고 음대 강의실과 연습실을 둘러본다. 음대는 방학 중에도 조용할 날이 없다. 피아노가 있는 빈 강의실은 연습실보다 경쟁이 심하다. 좁은 공간 보다는 넓은 공간을 선호하는 윤희도 수업이 끝난 강의실을 선점 하려했다. 아무래도 장시간을 연습하려면 넓은 공간이 피로감이 덜하기 때문이다. 연습실을 둘러본다. 역시 만원이다. 혹시나 싶어서 안쪽 끝 가장 협소해서 가끔 비어 있는 연습실을 살펴본다. 누군가 연습하다 잠깐 나간 모양이다. 피아노를 두드려 본다. 주위의 소음과 맞춰 발성 연습을 한다. 오랜만에 내는 소리는 매끄럽지 않다.
“도~레~미~파~솔~파~미~레~도~, 아~ 아~아~아~ 아~아~아~아~” 옥타브를 넘나들며 30분쯤 워밍업을 했지만 1년 전보다 소리 내기가 힘들다.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 생각했는데 극단적 근손실을 다 잡으려면 장시간의 꾸준한 노력과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자꾸 비틀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일어선다. 이번학기 졸업 연주를 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연습실을 나와 계단을 올라 간다.
‘깨톡’ 엄마다 한층 계단 중간 즈음 올라 오른쪽으로 계단을 선회한다.
‘딸~ 어디?’
‘나 학교 왔어. 복학 신청도 했고.’ 😊’엄만 어디?’ 카톡에 집중하며 계단을 선회하는데 뭔가와 부딪쳤다.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
“미안합니다” 무조건 반사로 튀어나온 말이다. 핸드폰을 얼른 주으며 망가졌으면 어쩌나 빠르게 확인한다.
상대방도 떨어진 책을 집는다. 책 제목이 특이하다. ‘성인아이와 음악치료’
“괜찮아요?”
“네… 안 부셔졌어요.”
“아니, 그쪽 괜찮냐구요”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다. 그때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든 윤희가 상대 남자를 빤히 쳐다본다.
“아…예…” 빨개지는 얼굴, 당황스러운 표정, 윤희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괘…괜찮으세요?”
“하 하 하” 웃음 소리가 부드러운 스타카토(staccato)처럼 감미롭다. 건우는 자신 보다 20센티는 족히 작은 키의 여자를 유심히 본다. 조금 전보다 더 빨개진 볼은 홍시가 되었다.
“네… 그 … 그럼…” 윤희는 이 상황을 빨리 벗어 나고 싶다. 뛰다시피 계단을 올라와 음대 건물을 나와서야 건물 앞 화단 가장자리에 풀썩 걸 터 앉는다.
‘그래 내가 사람 구경을 너무 오랜만에 한 거야’ 달아오른 볼에 두 손을 갖다 댄다.
2학기 첫번째 개인레슨 시간, 윤희는 자신의 담당교수실을 찾고 있다. 3년 반 동안 김애령 교수의 제자였지만, 담당 교수와 아무런 상의 없이 휴학을 했다는 건 ‘괘씸죄’에 해당됐고, 김애령 교수는 다시 제자로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개인 레슨 30분 전에 연습실에서 발성연습을 했다. 강건우 교수실 문 앞, ‘테너도 아닌 바리톤 교수 괜찮을까…’ 1년의 공백 기간은 윤희의 자신감도 가져갔다. 잘해야 할 텐데… 졸업은 할 수 있을까…머릿속이 시끄럽다.
‘똑 똑 똑’
“네, 들어오세요” 부드러운 바리톤… 아이스크림 같다. 교수실에 들어간 윤희는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안녕하세요. 이윤희입니다.”
“안녕, 반가워. 난 강…어…넌?” 건우는 재밌다는 듯 웃는다. 고개를 든 윤희는 난감하다. 순간 휴학을 한 번 더 해야 하나를 생각 한다.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건우는 손을 내민다.
“반갑다. 난 강건우다 우리 서로 잘 해보자! 이번학기가 마지막 학기라고?”
“네…” 얼떨결에 손을 맞잡는다.
“그럼 소리 한번 들어 볼까?”
“…”
“워밍업부터 하자. 입모양은 아, 입술은 힘 빼고, 호흡을 깊게”
“아~아~아~…”
“이 윤희 너 노래 잘한다 던데, 왜 소리를 안내?”
“네…네”
“대답은 한 번만 하자”
“네…네” 이전과 똑 닮은 웃음 소리
“하 하 하” 경쾌한 스타가토… 으악 … 최악이다.
“미안 하 하… 미안” ‘한 번만 대답하라더니… ‘내가 휴학 한 번 더한다! 아니, 김 애령 교수의 진상 성질을 받아내는 한이 있어도 담당교수…. 기어이 바꾼다’.
“졸업 연주는, 오페라 아리아 하나랑, 독일어나 불어 가곡 하나, 그리고 듀엣 곡 하나하자. “
“세 곡이나요? 두 곡만 하면 되지 않나요?”
“올해는 졸업생이 많지 않아, 휴학한 애들이 좀 많네. 너도 휴학 했었쟎아”.
“네…”
“그래도 시간이 많지 않으니깐 네가 곡을 선정해봐. 네 의견을 먼저 반영하게. 듀엣만 빼고, 알았지?”
“너 혹시 푸치니 곡 해봤니? 넌 리릭 소프라노(Liric밝은 음색의 소프라노)에 감성도 괜찮은 것 같고…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네…o mio babbino caro(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랑, vissi d’arte, vissi d’amore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요”
“그럼, 아리아는 둘 중 불러 보고 선택하자”
“가곡은 부르고 싶은 곡 있니?”
“… 글쎄요”
“그럼 프랑스 가곡 보다는 독일 가곡으로 하는 것 어때? 베토벤 곡 Der Kuss(입맞춤)나 Ich Liebe Dich(당신을 사랑해요) 가 좋을 것 같은데 둘 중 하나 네가 선택하고.” 듀엣은 고양이 이중창으로 재미를 더 하는 게 좋겠다”.
“네…”
“오늘은 아리아 먼저 불러 보고 선택하고, 다음주엔 독일 가곡 두 곡 다 준비해와라. 될 수 있는 한 빨리 결정해야 하니 열심히 연습해오고.”
“네…” 레슨시간은 윤희의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교수님의 실력도 좋았고, 윤희의 소리를 이끌어 내는 실력도 탁월 했다.
“윤희야, 이 곡의 배경이 되는 오페라 토스카의 내용을 간략하게 말해볼래?”
“네…”
“토스카의 애인 카바라도시는 성당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정치범 안젤로티를 숨겨주고, 이를 바람피우는 것으로 오해한 토스카는 괴로워합니다. 경감 스카르피아는 애인 카바라도시의 목숨을 담보로 토스카를 향한 육욕을 채우려고 하고, 토스카는 카바라도시를 살려주고 같이 떠날수 있는 통행증을 조건으로 허락하지만, 자신의 연인도 살리고 싶지만 스카르피아에게 자신을 주는 것 또한 괴로워서 깊은 고통을 느끼는 토스카가 부르는 아리아가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입니다. 그 후 토스카는 겁탈하려 달려드는 스카르피아를 죽입니다. 그러나 스카르피아는 이미 카바라도시를 죽이고 토스카를 차지하려고 계획했었고, 카바라도시를 총살 당헤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애인의 죽음에 이어 토스카도 성위로 올라가 몸을 던져 자살합니다.”
“그래, 그럼 이 곡은 예쁘게만 부르면 안 되겠지? 하나님한테 따지는 거야.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왜 날 이렇게 비참하게 버리십니까? 처음엔 조용히 읍조리고, 감정이 점점 격해지는 거지. 다시한번 불러 볼래?
윤희는 이전의 목소리를 되 찾으려고 날마다 수업이 끝나면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너무 많은 시간을 연습하면 오히려 목(성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장시간의 연습으로 이어졌다. 목이 부어서 레슨 시간 조정을 하려고 교수실에 갔다. 강교수는 화를 냈고, 그런 식으로 연습하면 노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고 다그쳤다.
너무 많은 시간을 연습실에서 보내는 윤희의 목에 문제가 생길 까봐 건우는 윤희를 찾아 연습실 창문을 기웃거린다. 손에는 따뜻한 유자차를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3층 빈 강의실을 둘러보는데 윤희가 피아노 앞에서 악보를 노려보고 있다.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간다. 피아노 뚜껑위에 유자차를 올려 놓자 윤희가 놀라는 눈으로 본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 무슨 일로…”
“이럴 줄 알고 왔지. 근데 뭐가 잘 안 풀려?”
“네… 이부분이요. Perche, Perche, signor. Ah~Ah~ fortessimo(매우세게)와 이어서 diminuendo(점점여리게), pianissimo(매우여리게) 부분이 아무리 연습해도 잘 안 되요”
“이부분은 이 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야 감정도 강하게 쏟아 내야하고 Pianissimo 부분은 소름 끼치게 잡아줘야 해. 아주 여리게 소리를 내지만 느낌은 작지 않게... 소리내기도 어렵고 그 만큼 연습도 해야 하지만 근육도 잘 받쳐줘야 하지. 내가 피아노 칠 테니까, 한번 불러 보자”
“네... Perche, Perche, signor. Ah~Ah~”
“윤희야 피아노 의자에 앉아봐. 지금 네가 얼마나 턱을 잡고 있는지 모르지? 호흡은 위로 올라 갔고...” 윤희를 피아노 의자에 앉혀두고 어깨 승모근을 주무른다. 목에서 귀 뒤로 이어지는 임파선도 풀어준다.
“아야...” 너무 아프다.
“오늘 그만하고 내일 연습하는 게 좋겠다. 고기 먹고 힘내면 내일 점심 시간에 30분 정도 시간 내서 레슨 해 줄께. 점심은 김밥으로 네가 사 들고 와. 대신 오늘 고기는 내가 사줄꼐
“네? ...네.” 졸업 연주가 얼마 남지 않아 불안하다. 도와주신 다니 고맙지만, 둘이서 밥 먹는 건 부담스럽다.
“내 제자 졸업연주도 못하고 골로 가실 까봐 그런다! 너 연습을 해도 너무 심하게 하는 것 아니? 그러다 목나가!”
“그래도...졸업 연주가 얼마 안남아서...”
“괜찮아,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리고 내가 있쟎아. 하 하“건우가 너스레를 떤다.
건우는 고기를 구워 부지런히 윤희의 접시위로 나른다. 윤희를 집에 바래다주는 길,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씩 들고 걷는다. 걸음 걸음 건우의 다정한 시선이 윤희의 정수리를 향한다.
그날 이후 건우는 7시이후 학교 연습실과 빈 강의 실을 둘러보며 윤희를 찾아 다녔다. 윤희를 찾으면 연습하던 것을 당장 멈추게 하고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노래할 때 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어이 아침에 30분씩 운동을 하게 도왔다.
대학 재학중 교수와 제자라는 굴레는 서로에게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했다. 건우는 늘 간격을 유지했고, 최선을 다해 졸업 연주 준비를 도왔다. 윤희는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졸업 연주회가 끝나고 무대의 흥분이 사라지지 않았을떄, 공연자 대기실 안 윤희의 가방 위에 화려한 꽃다발과 하트 목걸이가든 작은 상자를 올려 두었다. 대기실 밖, 졸업생들과 한바탕 씨끄러운 찬사도 벌였다. 졸업생들과 연주회에 참석한 재학생들은 뒤풀이 장소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떠났다. 건우는 대기실 입구에서 윤희를 기다렸다. 모두 떠난 대기실 안 윤희는 선물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고, 소음으로 가득 찼던 대기실에 고요가 머무를 때 건우가 들어왔다.
“윤희야 오늘 최고로 잘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덕분입니다.”
“선물은 마음에 들어?”
“네? 이것 교수님이 주신 거예요?”
“응. 상자안도 봤어?”
“네…하트 목걸이…” 하트 목걸이는 두개의 하트가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하트 하자고…”
“…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윤희는 부담스럽다. 빌린 무대용 드레스와 신발을 커다란 쇼핑백에 담았다. 오늘 받은 꽃다발이 무려 여섯 개다. 이렇게 많은 꽃다발을 받을 줄은 몰랐다. 대학 졸업 연주회는 대부분 가족들이 꽃다발을 준다. 엄마에게 받을 꽃다발 하나만 생각하고 꽃다발을 위한 쇼핑백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엄마는 연주회가 끝나자 늦었다며, 꽃과 칭찬을 안겨주고 떠났다. 생각지도 않은 네 명의 후배로부터 환호와 함께 꽃을 받았다. 거기에 강건우 교수까지… 버릴 수도 없고… 무대 올라 가기 전까지 보던 악보도 챙겨야 하는데…
“내가 들어주면 안 될까? 그러고 싶은데….” 어쩔 수 없다. 도움을 받는 수밖에.
“… 감사합니다.”
건우는 윤희의 졸업 연주회 이후 6개월을 쫓아다녔다. 하루도 쉬지 않고 꽃을 선물했다. 6개월만에 윤희의 짜증 섞인 투정을 들었다. ‘이제 꽃은 그만 달라고, 꽃향기에 질식할 것 같다고’ 당분간 꽃을 끊기로 한날 미뤄뒀던 고백을 했다. 하트 목걸이를 살 때 미리 사둔 커플 링이었다. 윤희 것은 두개의 링을 이은 하나의 하트. 건우는 붙어있는 두개의 링 위에 하트가 견고히 붙어있다.
그해 겨울, 윤희의 졸업 연주회가 있었던 날과 같은 날 둘은 결혼했다. 하늘도 둘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 그해의 첫눈이었다. 그것도 무려 함박눈으로. 첫눈의 행운은 허니문 베이비로 이어졌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1년뒤 연년생으로 둘째가 태어났다. 둘째가 태어나고 두달 후, 윤희 엄마는 돈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살기가 힘들어서 그러는데 도와 달라고 했다. 유산으로 받은 돈의 반을 기꺼이 엄마에게 줬다. 이후 엄마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윤희는 연년생의 육아에 지쳐갔다. 하루에 몇시간이라도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해도 윤희는 잠시도 아이들과 분리를 원치 않았다. 심리 상담 예약을 해도 화를 냈다. 자기를 미친 사람 취급하냐는 둥,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다.
말수도 줄었다. 퇴근 후 집에 올때마다 다정히 안아주며 ‘수고했어’라고 등을 토닥여 주던 행동도 더 이상은 하지 않는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고 둘째도 유치원에 들어갔다. 윤희에게 개인적 여유 시간이 많아지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퇴근 후 돌아오면 아내의 눈이 조금 부어 있는 날이 많아졌다.
“울었어? 얼굴이 왜 이래?”
“울긴 누가 울어, 자다 일어나서 그래. 왜 내가 울었다고 생각해?” 아내는 쏘아붙이며 아이들 방으로 들어간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학교에선 최선을 다해 제자들을 가르치고, 이를 위해 다른 누구보다 몇배 더 연구하고 수업준비도, 철저히 했다. 그 결과 3년만에 전임을 달았고 교수로서 평가도 좋다. 수업이 끝나면 아내의 독박육아를 분담하려고 최선을 다해 도왔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 까? 아무리 생각해도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좀더 잘하면 돼. 좀더… 아내가 힘들어서 그런 걸 거야.“
날이 갈수록 예민해지는 아내를 본다. 아내의 분노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집에 들어오면 분주한 뒷모습만 보인다. 그렇다고 아내가 할 일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아이들을 살 뜰이 챙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그래도 아이들 앞에서 웃는 얼굴로 대해 줬지만, 아이들이 기숙학교로 들어간 후 아내의 웃는 낯을 볼 수 없다.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부엌에는 아침에 먹은 설거지거리가 그대로 있다. 청소는 언제 했는지 어질어져 있고, 빨래 바구니에는 세탁물이 가득하다. 저녁이 다 되어 집에 들어온 아내는 기진한 상태로 씻지도 않고 아이들 방에 들어가 눕는다.
“여보 어디 다녀왔어?”
“여보? 윤희야?”
“잠깐 바람 쐬고 왔어요”
“저녁은? … 얼른 씻고 나와 저녁 해 놨어… 밥 차리고 있을께…”
“네…” 등지고 누운 윤희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토요일 오후 아내가 말없이 나갔다. 핸드폰도 집에 두고 가서 연락이 안된다. 시장 보러 나간 줄 알았는데 4시간이 지난 지금도 오지 않는다. 초인종 소리에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연다.
“도대체 어디를 갔다… 무슨 일로?”
“파출소에서 나왔습니다. 아내분께서 집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계셔서 모시고 왔습니다. “
“그게…무슨…”경찰관 뒤에 서 있던 아내가 경찰관을 밀치고 집으로 들어선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시선은 아내를 쫓는다.
“네? 저기…아내 분…” 경찰관은 아내의 상황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려고 했지만 이미 문이 닫힌 후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내는 씩씩거리며 신발을 신은 채 집안을 돌아다닌다.
“그년 어디 있어?”
“그년? 누구?” 아내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본다. 이런 험한 말을 쓸 줄 모르는 아내다.
“그년이 그년이지 누구 야! 그년 어디 있냐고?” 확신에 찬 아내는 집안의 문들을 확 열어 제 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누굴 찾아? 집을 못 찾았다는 말은 뭐고?” 아내는 분주히 돌아다닌다. 옷장과 화장실까지 확인한다.
“어디다 감췄어? 어디다 감췄냐고?”
“뭘?... 누굴?” 악을 쓰던 아내가 갑자기 조용해진다. 멍하니 앞을 바라본다.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난 윤희는 부산스럽게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작게 조각 낸 양파와 토마토, 버섯, 시금치를 볶는다. 야채를 팬의 한쪽에 몰아두고 계란을 부어 흩는다. 야채와 계란을 섞고 위에 치즈를 넣고 섞는다. 접시에 예쁘게 올리고 다른 팬에서 노릇하게 구원 둔 닭가슴살을 오믈렛 위에 얹는다.
“식사하세요” 식탁에 앉은 건우는 윤희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어젯밤과 너무 다른 아침이다.
“어서 먹어요. 출근해 야지”
“오늘 일요일인데… 교회에 조금 일찍 가지 뭐. 교회 마당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어때?” 윤희는 핸드폰 홈화면에서 날짜와 요일을 확인한다.
“네… 그러던 지요…” 오늘이 일요일?
“여보, 그런데 어젯밤에 누굴 찾았던 거야?”
“누구? 무슨 말이예요? 누굴 찾다니? 꿈꿨어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황당한듯 웃는다.
“당신 요즘 너무 피곤한가보다. 이상한 꿈을 다 꾸고”
“그러게…” 윤희는 기분이 이상하다. 지난 이틀 간의 기억이 끊긴 필름처럼 군데 군데 잘 사라졌다.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애써 생각을 지운다.
예배시간, 목사님이 설교 끝에 회중 기도를 한다. 기도를 하고 눈을 떠보니 아내가 없다. 핸드백이 자리에 있는 걸 보니 화장실 갔나 보다. 예배가 끝나도 오지 않는 아내에게 전화를 한다. 부르르 떠는 진동음이 핸드백에서 울린다. 교회 안에 아내가 갈만한 곳을 모두 찾아본다.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교회지만 핸드백을 두고 말도 없이 집에 가지는 않았을 텐데… 두시간이 지나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는다. 경찰서에 아내가 예배 중에 사라졌다고 했더니, 알만 하다는 듯 쳐다보며 그냥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집으로 돌아온 건우는 아이들에게 전화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아빠의 전화에 마냥 기분 좋은 모양이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여긴 한길 파출소 장지호 순경입니다. 이 윤희씨 아시죠?”
“네 제 아내입니다. 혹시…무슨 일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윤희씨가 자연 마트에서 물건을 훔쳐서 저희 파출소에 있습니다. 이쪽으로 좀 나와 주셔야 하겠습니다.”
“네? 무슨… 그런 말도 안 돼는 소리를… 네, 지금 출발했습니다. 제 아내 좀 바꿔 주 시겠 습니까?” 급히 차를 타고 달린다.
“네. 이윤희씨 여기... 전화…”전화기를 건네 받은 윤희의 손이 떨린다.
“여보세요…흑흑...”
“여보, 내가 지금 가고 있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알았지?”
헐레벌떡 파출소에 도착한 건우는 힘없이 앉아 있는 아내를 보자 속상한 마음에 화가 난다.
“여보 대체 어디를 갔던 거야?” 건우를 발견한 윤희가 달려가 안긴다. 참았던 눈물을 쏟는다.
“안녕하세요. 연락 드렸던 장지호 순경입니다. 이윤희씨가 물건을 훔쳤는데...”
“아니 이 사람이 무슨 말도 안 돼는 소리를”
“여보 아니예요. 난, 훔치지 않았어요. 정말이예요. 흑흑…” 아내가 서럽게 운다.
“이윤희씨는 훔치지 않았다고 주장하시지만 CCTV 확인해 봤는데 훔치신 게 맞습니다. 그런데 같이 CCTV를 보시고서도 훔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순경은 절도 상황이 담긴 CCTV 화면을 보여준다. 훔친 물건은 아이스크림 콘 모양의 열쇠고리 두개였다.
“여보, 윤희야, 어떻게 된 거야?”
“몰라요.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예배 중에 어디를 갔어?
“정말 몰라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요…” 몸을 바들 바들 떠는 아내가 가엽다. 뭔가 아주 잘못된 것 같다. 마트 주인은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내의 뻔뻔한 태도에 화가 났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아내를 차에 태우고 집에 가는 길, 아내는 피곤했는지 깊은 잠이 들었다.
월요일, 학교에 양해를 구하고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왔다. 뇌 엑스레이, MRI PET 검사를 비롯해 피검사, 소변검사, 인지 테스트를 했다. 의사는 집에서의 아내의 행동을 여러 각도로 질문했다.
“아내분은 피크병 인 것 같습니다.
“피크병이 뭐죠?”
“치매의 일종입니다. 뇌의 신경세포가 점진적으로 파괴되는 신경퇴행성 질환입니다. 뇌의 중심부에서 생긴 병변이 점점 확산되며 가까운 과거부터 먼 과거까지 점차 지워질 겁니다. 혼자 두지 마세요. 순간 시공간 인지기능이 상실돼 짧게는 몇 분에서 몇시간 동안 기억을 잃을 수 있고, 폭력적인 언어나 물건을 훔치는 등 이상 행동을 할 수 있으니 늘 보호자가 옆에 있어야 합니다. 이윤희씨 경우는 이미 진행이 어느 정도 된 상태입니다.”
주로 50대 중반 남성들에게 발병하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절망, 무력감, 건우는 자신의 머리에 병변이 생긴 것 같다. 울컥하는 마음을 누른다. 여기서 건우가 울면, 아내는 더 불안해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비집고 흐르는 눈물은 막을 수가 없다. 고개를 하늘로 쳐든다.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깊게 숨을 쉬어 본다.
아내를 위해 매일 아침과 저녁 영양제와 약을 챙겼다. 손목에는 스마트 와치를 채워준다. 목에는 예쁜 하트 펜던트 목걸이에 건우의 연락처를 새겨 걸어 주었다. 지난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내와 함께 아침 운동을 했고, 저녁에는 아내의 발을 맛사지 했다. 발 맛사지를 하는 시간은 건우의 기도하는 시간이다. 아내의 병을 고쳐달라는 하늘을 향한 간절한 시위다.
건우의 서양 음악사 수업이 한창인 405호 강의실은 6월의 이른 더위와 점심 식사후의 노곤함에 몇몇 학생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웅성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림이 되어 건우의 강의실까지 들린다. 졸던 학생들도 고개를 기웃거린다. 밖의 소란이 강의실까지 전염된다. 학생들이 동요한다. 건우도 수업에 집중할 수 없다.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계단을 내려와 1층 건물 입구 쪽으로 빠르게 걷는다.
“네가 내 남편 꼬셔서 붙어먹었지!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나도 다 알고 있어. 이 여시 같은 년, 이 못된 년”
“아- 악, 누구세요? 왜 이러세요? 아파요. 아- 악, 살려주세요” 19살 새내기 대학생의 긴 머리채를 잡은 여자는 눈에 독기를 품고 손아귀에 힘을 쓴다.
“네가 꼬리 쳤잖아. 내 남편과 헤어지라고 협박 했잖아. 네가 우리 아이들 학교에 그 몹쓸 사진들을 보내서 우리 애들이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만든다고 했쟎아. 내가 너 못 찾을 줄 알았어?”
머리채를 잡힌 새내기는 공포에 질려 있다. 주위의 남학생들이 두 사람을 겨우 떼어 놓는다. 여기, 저기 웅성거리른 소리, 새내기의 울음소리, 여자의 욕지거리가 섞인다. 영문을 모르는 학생들이 소란한 소리를 찾아 모여든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더욱 커지고 새내기의 억울한 울음소리도 커진다.
“여보?”
사건은 지역 신문에 실렸으며, 몇몇 뉴스 체널에도 보도됐다. 소문은 부풀려져 요상한 이야기로 변했다. 대학총장과 이사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건우를 불러 세웠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며 목에 핏대를 세운 총장과 이사들에게 윤희의 병원 진단서를 보여주며, 머리 숙여 사과했다. 그러나 험한 꼴을 당한 학생은 학교를 휴학했고, 부모는 건우와 윤희를 상대로 고소를 했다. 고소는 심신 미약으로 종결됐지만, 건우의 사생활은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바람둥이로 재단됐다. 다시 총장실로 불려간 건우에게 교수 행동과 품위 유지를 이유로 사직을 권유 받았다. 진실은 사람들의 입속에서 추하게 왜곡되었다. 죽임을 당했다.
아내를 데리고 두개의 이민 가방만을 가지고 미국 텍사스 달라스에 왔다. 덥다 못해 뜨겁고 건조한 공기,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이곳은 그래도 눈을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많다. 가십은 사실이 되어 건우와 윤희를 타국으로 몰아냈다. 어떻게 든 살아야 했고, 가족을 살려야 했다. 초등학교 동창의 소개로 달라스에서 청소일을 배웠다. 미국에 오고나서 낮에는 일주일에 한번 한인타운에 가서 시장 보는 것 외에는 집안에 머물고 밤에는 청소일을 한다. 집 출입문은 안에서 자물쇠로 채워둔다. 윤희는 건우가 집안에 함께 있을 때는 다소 안정적으로 보인다.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윤희의 상태가 많이 호전된 것 처렁 보인다. 처음에는 월급쟁이 생활을 하다가 유학생 한의 도움으로 마음 편하게 청소일을 할 수 있었고 지금은 12명의 직원을 가진 작은 청소 회사가 되었다. 청소일은 밤 10시를 시작으로 새벽 4시에서 6시까지 한다. 윤희가 자고 있는 시간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 ‘한’에게 방 한 칸을 공짜로 내주며 밤 10시부터 건우가 올 때까지 거실 소파를 침대 삼아 자 달라고 부탁했다. 한은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 S대학의 Professional Degree 과정에 피아노 전공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순둥이 한의 아버지는 우리나라 국회의원이라고 한다. 아무리 아버지에 대해서 물어봐도 이름을 알려 주지 않는다. 한은 성 정체성 때문에 미국에서 정착하고 싶어한다. 섬세한 성격에 배려심이 많아 윤희 와도 잘 지낸다.
일주일에 한번 한인 타운에 가서 일주일치 장을 보고, 쇼핑을 하는 것이 윤희에게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쇼핑 카트를 밀 때도 윤희의 손을 거머쥔 채 움직인다. 이날도 다른 날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만 한인 마트 주차장이 만원이었다. 주차장을 몇 번이나 돌았지만 자리가 나지 않았다. 마트 입구 쪽을 돌 때 사람들이 차 앞을 지나간다. 급히 차를 멈추고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차가 멈추자 윤희가 재빠르게 조수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정말 찰나에 일어난 일이다. 윤희는 거침없이 마트 안으로 돌진한다. 뒤에서 빵 빵 거리를 경적음이 들린다. 이대로 차를 두고 들어갈 수 없다. 마트 반대편에 주차 공간 하나를 찾았다. 대충 주차하고 뛰어간다. 마트 안으로 들어간다. 윤희를 찾는 눈이 바쁘다.
“이년! 내가 너 못 찾을 줄 알았어? 네가 내 남편 꼬셨잖아. 네가 그 사진 보낸다고 했잖아. 내가 오늘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끝을 보고 말거야. 나쁜년! 이년!” 이 목소리… 웅성거림… 많은 사람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윤희가 있다. 손에는 어떤 여자의 머리채를 쥐고 있다. 두 사람을 떼어내려 하지만 윤희는 손을 꼭 쥐고 풀지 않는다. 오래전 대학 새내기의 얼굴과 지금 머리채를 잡힌 여자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 윤희에게 다가가자 윤희의 손이 스르르 풀린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내가 치매입니다. 죄송합니다. 어떤 보상이라도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머리채 잡힌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
“도대채 얼마나 바람을 피우고 다녔길래 와이프가 저래…”
“그러게… 얼마나 고통을 당했으면…쯧쯧”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얼굴만 다를 뿐 생각은 같은 가 보다. 작은 조각을 가지고 당사자야 상처를 받든지 말든지 말을 만드는 걸 좋아하나 보다. 처절한 절망에 앞이 캄캄하다. 이대로 사라졌으면…죽었으면... 이 절망의 늪에서 왜 하나님은 말이 없는지. 왜 나를 돌아보지 않는 것인지! 왜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지. 기어이… 기어이 나를 버리신 것 인지…
일하러 가는 길, 누군가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매어 달아 둔 것처럼 발 걸음이 무겁다. 건우의 청소회사 직원 두 명이 부지런히 끝층부터 내려오면서 모든 사무실의 쓰레기를 수거해서 1층 입구에 내려 놓는다. 건우는 1층부터 청소기를 돌린다. 쓰레기를 내려놓는 일을 마친 두 직원 중 한 사람은 모든 책상을 정리하고 먼지를 제거한다, 또 다른 사람은 다 쓴 사무용품을 채워준다. 청소기를 돌리던 건우의 걸음이 멈춘다. 청소기의 소음은 계속된다. 가슴속이 뿌연 청소기의 필터안처럼 답답하다. 에어컨이 쉼 없이 돌고 있는 실내에서 셔츠에 땀이 흥건하다. 답답하다. 누군가 숨통을 옥죄는 것 같다. 청소기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빌딩 꼭대기 층을 누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걸어서 마지막 층을 올라 옥상 문을 연다. 검은 세상에 빛을 머금은 키 작은 건물들이 무대에서 객석을 볼 때 보던 관객들의 빛나는 눈동자 같다. 살아있는 그 기분…조금 숨이 쉬어지는 것 같다. 옥상 난간에 올라선다. 까마득한 밑을 내려다본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끝나지 않은 이 고통에서 해방이 될까? 눈을 감는다.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보인다. 윤희와 다정히 걸으며 먹던 아이스크림이 생각난다. 토스카의 간절한 아리아를 부르는 윤희의 목소리가 귀에 들린다.
Sempre con fè sincera 항상 진실한 마음으로
diedi fiori agl’altar. 꽃을 제단에 바쳤어요
Nell’ora del dolore 그런데 내가 고통 받을때
perchè, perchè, Signore, 어찌하여, 주여
perchè me ne rimuneri così? 왜 저를 이렇게 내버려 두시나요?
Diedi gioielli della Madonna al manto, 성모님 앞에 재물도 드리고
e diedi il canto agli astri, al ciel, 나의 노래도 별들이 빛나는 하늘 높이
che ne ridean più belli. 더욱 아름다운 미소로 바쳤건만
Nell’ora del dolor 그런데 내가 고통 받을때
perchè, perchè, Signor, 어찌하여, 주여
ah, perchè me ne rimuneri così? 왜 저를 이렇게 내버려 두시나요?
밤 12시가 넘은 시간, 식은땀을 흘리며 뒤척이는 윤희의 모습 갑자기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기억나지 않는 꿈, 그러나 엄습하는 한기는 악몽이었던 것 같다. 입안이 텁텁하게 마른다. 가디건을 걸치고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간다.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한 컵 내려 긴장완화에 좋다는 라벤더 티 백을 넣는다. 찻잔을 들고 거실 소파로 간다. 거실 큰 소파에는 한이 잠들어 있다. 윤희가 다가가자 실눈을 뜨고 필요한 것이 있냐는 한의 질문에 괜찮으니 계속 자라고 한다.
소파 귀퉁이에 앉아 TV 리모컨을 들고 한국 방송을 튼다. 뉴스 채널에 정치인 A 씨의 미투 사건과 그 와이프의 기행이 이슈다. 20살 이상 나이차이로 결혼 당시에도 큰 이슈가 됐었다. 발단은 정치인 A 씨의 미투 문제로 시작했다가 와이프의 문어발식 남자 관계까지 밝혀지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최근까지 무수한 남자들과 부적절한 관계, 수면제를 섞은 음료를 건네고 사진을 찍고 음성을 조작해 그들의 가족들을 괴롭혔으며, 심지어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과 사모는 이혼과 더불어 자살했다고 한다.
뉴스 중간 그녀가 다녔던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흐릿하게 보여준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앵커의 담백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최근 풍문으로 떠도는 정치계의 미투 사건을 취재하던 중 정치인 A 씨와 와이프의 악한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방송국으로 제보가 이어졌고 집단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녀는 목표로 찍은 사람들의 비참한 종말을 위해서 어둠의 세력들과 손잡은 일도 크게 조명됐다.
윤희는 마시던 찻잔을 급히 내려 놓고 방에 들어가 핸드폰을 집어 든다. 검색을 하는 손이 떨린다. 정치인 A 씨와 그 와이프 사건을 찾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시절 그녀의 사진을 찾았다. ‘의학의 발전, 문어발녀의 외모 변천사’라는 제목이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비아냥거리던 목소리, 깔깔거리며 고소해하던 그 표정, 짓 뿌린 S사 N.5 향수의 숨막히던 향… 핸드폰을 든 채 거실로 나가 TV앞에 선다. 무겁게 처벌해 달라는 국민 청원이 100만을 넘겼다는 앵커의 보도가 이어진다. 눈물이 난다. 소파위에 다리를 올려 모으고 끌어안는다. 윤희의 소리 죽인 흐느낌이 이어진다.
새벽 여명이 밝아온다. 따뜻한 햇살은 온 집안 창문을 통해 넘어온다. 소프라노 가수의 간절한 노래소리가 오디오 스피커를 통해 흐른다.
la mia preghiera …… 나의 기도를……
perchè, perchè, Signor, 어찌하여, 주여
ah, perchè me ne rimuneri così? 왜 저를 이렇게 내버려 두시나요?
윤희가 부엌에서 흥얼거리며 분주히 움직인다.
‘건우를 위한 아침을 차릴 것이다.’ 윤희의 얼굴이 새벽 여명처럼 밝게 빛난다.
*Madonna*의 의미는 노래 속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뜻하지만, ma는 '나의' donna는 '여성' 또는 가정의 주인님'을 뜻하기도 합니다. 라틴어 domina ‘에서 유래되었고, 부인(wife)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첫댓글 수고했어요!
잘 읽었습니다~~
추억의 오페라...
[오페라] 2021 제12회 대한민국 오페라페스트발 "토스카"(21.5.23)를 기타게시판에 올려보았습니다.
한 편의 오페라 감상하시며 좋은 주말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사랑,허영,경쟁, 시기와 질투 그리고 삶,비극적 결말을 향하다가 반전과 훈훈함까지
사람냄새가 가득한 세계에 산다는것을 실감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추가의견
강교수와 같은 사람을 기대하지 마세요
사람냄새가 없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
그 할아버지를 향한 제 위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