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1장. 새는 둥지를 떠나지 않으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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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방이었다. 문도 하얗고 창틀마저도 하얀, 그 방은 백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서도 숨쉬기가 불편할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그 방에는 별 다른 가구나 장식물이 일체 없었다. 다만 중앙에 대리석 원탁과 열두 개의 대리석 의자가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하얀 대리석 문이 열리면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들 가운데는 중의 모습을 한 자도 있고 도사의 형색을 한 자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백의를 입은 노인들이었다. 그들이 의자를 하나씩 차지했다. 오직 두 자리, 문을 마주보며 창을 등지는 자리와 그 맞은편 자리만이 공석이 되었다.
그들끼리도 서로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 듯, 옆 사람과 가볍게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고 수인사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시 방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일제히 말을 멈추고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쟁반을 든 백라의 차림의 네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다시 시선을 돌려버렸다.
여인들은 원탁을 둘러서서 사람들 앞에 찻잔을 놓고 들어올 때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일 각 후 또 다시 문이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문으로 옮겨졌다.
백견삼을 입은 선풍도골의 노인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들어섰다.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노인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접었다.
“좌상을 뵈옵니다.”
노인은 두 손으로 앉으라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무도 착석하지 않았다. 노인이 빈 자리에 가서 먼저 앉은 후에야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노인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두 시선을 주고 눈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음! 두 사람 빼고는 모두 모였군. 공사다망할 텐데 별 것도 아닌 일로 불러서 미안하구먼. 파불(破佛)이나 음도(陰道)는 그간 다른 이들과 교류가 없었으니, 지금쯤 서로들 얼굴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사람들은 송구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특히 얼굴에 긴 상처가 난 중과 뼈밖에 없는 듯한 도사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이 특별히 그들을 주시하며 다시 말했다.
“이왕 왔으니 천군을 배알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천군께서는 아직 폐관 중이시네. 아! 우상도 자네들을 보고 싶어 했네만 아쉽게도 천기신사(天璣神師)와 함께 점창의 일을 마무리하러 갔다네.”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음양의 조화가 깨져있는 문양의 도포를 입고 있는 차가운 눈빛의 초로인이 말했다.
“드디어 시기가 무르익은 것입니까?”
노인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음도,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사천 무림을 상대로 우리가 승산이 있을까?”
초로인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만, 이렇게 쟁쟁한 분들과 함께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석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좌상이라는 노인마저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자네들이 제각기 역량을 키웠고, 파불과 음도가 가세한데다가, 여기 오행신문에서도 오행신마를 셋이나 키웠네. 이제는 능히 붙어볼 만은 하지. 하나 천군께서는 다만 이기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으시네. 사천 무림을 도모한 후에도 그대들이 여전히 보필해 주길 바라시네. 천하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순간 사람들은 감격한 눈빛이 되어 일제히 허리를 접으며 소리쳤다.
“천군께 영광을!”
노인은 사람들이 감격을 모두 발산할 충분한 시간을 주고 나서 말했다.
“그렇다고 상대를 얕잡아 보는 건 곤란한 일이야. 당금의 사천 무림은 강하네. 청성의 기세는 오십 년 전 그때의 일 이후로 오히려 욱일승천(旭日昇天)하고 있고, 아미는 여전하며, 당가 역시 그 숨은 힘이 미지술세. 운가는---. 운가와의 그 일이 언제 적 일이었지?”
노인이 그의 좌측에 앉아있는 적포노인에게 물었다. 적포노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십사 년 전의 일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났더라?”
노인은 모두가 알기를 바란다는 듯 좌중을 쓱 둘러봤다. 적포노인이 대답했다.
“당시 본문에서 그래도 최강이라 할 수 있었던 금혼기가 운가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금의대와 맞붙어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멸지경에 이르렀지요. 겨우 서른 명에 불과한 금의대를 몰살시키기 위해 본문은 세력의 오할을 잃어야 했습니다.”
노인은 조금은 과장된 놀라움을 드러내며 어떠냐고 묻는 듯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익히 아는 사실이라는 듯 별 동요가 없었다.
노인이 다시 적포노인 오행신문주에게 물었다.
“그게 벌써 이십사 년 전의 일이었군. 허면, 지금 부딪친다면 승산이 있겠는가?”
오행신문주가 되물었다.
“운가를 본문이 단독으로 상대할 때의 승산을 물으십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행신문주가 잠시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오행신마를 셋 얻었다 하나 승산은 여전히 전무하다 할 것입니다. 저희들이 전멸이면 기력 여전한 늙은이들이 많은 그쪽 이할 이상이 남을 것입니다. 다섯 모두가 성공했다면 승산은 저희 쪽에 있었을 것인데, 죄송합니다.”
노인이 손을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자네는 충분히 노력했어. 많아야 둘 정도 얻을 것이라 짐작했네. 셋이면 기대 이상이지.”
적의노인과 그 옆의 초로여인이 동시에 고개를 숙여보였다. 노인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여전히 냉철하구먼. 양패구사할 것이라 말할 줄 알았더니 이할은 남을 것이다? 흠! 내 보기에도 그래.”
노인은 좌중을 훑어보다가 비대한 승인에게 눈길을 멈춰 세우고 말했다.
“파불이 도우면 비세는 겨우 면할 거라 예상하고 있네.”
모두들 침중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도 반론을 펴지 않았다. 노인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승률은 무식하게 대놓고 싸울 때나 나오는 것이고---. 싸우게 된다면 전장은 사천이 아니라 일단은 이곳 운남일세.”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치떴다. 모두들 사천공략만을 생각했지 불러들인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는 눈빛이었다.
파불이라 불린 중이 얼굴의 상처를 실룩이며 물었다.
“언제부터 시작할 계획이십니까?”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파불을 응시했다.
“투기가 느껴지는군. 조급해 하지 말게. 내 나이 올해로 아흔 둘이네. 천군께서 족하(足下)에 천하를 두시는 것은 보지 못하더라도 청성에 천궁(天宮)이 들어서는 것만은 보고 싶으니, 급하다면 내가 더 급하지. 머지않았어. 점창이 수습되면 시작할 게야. 일단 시작하면 파불당을 가장 먼저 쓸 생각이니 각오해야 할 게야.”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하자 파불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슴 설레는 것은 파불만이 아니었다. 기나긴 기다림이 곧 끝이 난다고 생각하니 모두들 격동을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허! 이러라고 불러 모은 것이 아니야. 나도 자네들 근황이 궁금하고, 또 장차 한 몸이 되어 대업을 이룰 사람들끼리 인사나 하라는 것이었어. 자, 자! 다들 일어나세. 지금쯤 주연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 모두들 가서 흠뻑 취해 보세나.”
노인이 먼저 일어서자 다른 이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섰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흥분의 찌꺼기가 남아있었다.
* * *
마운은 곤륜의 초입 돌계단 앞에 이르자마자 말을 아무렇게나 풀어놓고 옷소매로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이마를 훔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까마득한 돌계단들을 올려다보았다.
“삼천육백 개라 했었지? 에휴! 여기를 도대체 어떻게 올라가누?”
세상 누구도 마운을 무인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마운 그가 자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운은 한때 곤륜의 장문 운상진인에게 사사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보상이었다. 한때 천하를 떠돌았던 운상자가 서녕부를 유랑할 때 마운의 아비가 비렁뱅이 같은 운상자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것에 대한 답례였다.
당시의 마운은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열과 성을 다하여 가르침에 부응하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인연은 일 년 뿐이었다. 나이가 문제였다. 이미 약관이 넘은 나이. 아무리 노력해도 굳은 뼈와 단련되지 않은 힘줄은 마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운은 자질을 보이고 운상자의 기명제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깨끗이 포기했다. 그는 오직 그가 배운 것만을 평생 갈고 닦아 건강을 유지하고, 나아가서 그의 가업을 잇는데 보탬이 되는 정도로 만족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는 곤륜이 그의 사문이며 운상자가 그의 스승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곤륜의 이름에 누가 될까 저어하여 곤륜속가라 자칭하지는 않았지만, 마운이야말로 곤륜에 약간이나마 경제적 보탬이 되는 세 명의 곤륜속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겉은 평범한 상인이면서 마음은 항상 무인인 마운은 쉰을 바라보는 지친 얼굴에 결의를 드리우고 아예 상의를 벗어 들었다.
“스승을 뵙는 일,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거늘, 이 다리가 부서진들 어찌 주저하리오?”
마운은 한 걸음에 여섯 계단씩을 건너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운의 나이는 그의 마음을 배반했다. 건강은 자랑해도 무공을 자랑할 수 없는 그로서는 채 반도 오르지 못하고 두 손으로 다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빙빙 돌고 헛구역질이 나려 했다. 눈앞이 흐릿해져가고 있었다. 마운은 여전히 까마득하기만 한 남은 계단들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크게 호흡하며 터질 것만 같은 심장을 쓰다듬어 억지로 가라앉혔다.
그때였다. 계단의 좌측 숲에서 망태기를 사선으로 멘 청년이 기척도 없이 튀어나왔다. 청년은 마운을 발견하고서 무표정한 얼굴로 목례해 보였다.
마운은 쌩쌩한 젊음을 드러내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제 약관이나 지났을까. 너무 깊어 슬프게 느껴지는 눈빛과 이마의 굵은 주름이 인상적이었다.
마운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청년의 얼굴을 벗어나 전신을 살폈다. 낡은 도포를 입었으되 속발을 짓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정식으로 도적에 오른 청년은 아닌 듯싶었다.
마운도 겨우 한숨 돌리고 청년에게 목례로 화답했다. 청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운을 지나쳐 계단 위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순간 마운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어 청년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이보게, 젊은이.”
청년이 돌아섰다. 마운은 급히 말했다.
“좀 도와주게나. 내 예전에는 문제없이 올랐는데, 이제는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구먼.”
마운은 서글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청년은 마운의 표정이나 말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얼굴로 마운에게 손을 내밀었을 따름이었다.
마운은 체면불구하고 청년의 손을 잡았다. 청년은 마운의 손을 잡는 즉시 힘을 가하여 잡아당겼다.
마운은 깜짝 놀랐다. 그저 부축이나 받아가려니 했었다. 그러나 마운의 작지 않은 몸은 이미 청년의 등에 업혀 있었다.
“이-이보게.”
마운은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청년의 신형이 이미 허공을 날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부드럽게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마운은 한기를 느꼈다. 벗어 등에 진 포삼을 입고 싶었다. 그러나 청년의 신형은 한 번 땅을 짚기 전에 십수 개의 계단을
오르고 있어 감히 멈춰 달라 말할 수 없었다.
마운은 과연 청년이 펼치고 있는 신법이 그가 알고 있는 비붕불명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비붕불명이 아닐 수는 없었다. 그가 본 적은 없지만 운룡대팔식은 이동에 중점을 둔 신법이 아니라 했다. 이토록 부드럽게 움직일 수는 없다고 들었다.
그러나 비붕불명치고는 지나치게 빠른 이동이었다. 그렇다고 대붕무영일 리도 없었다. 대붕무영이라면 그의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애무하듯 흘러갈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마운이 아주 작은 의문에 대한 답을 궁리하는 동안 주변의 경관은 휙휙 바뀌었고 어느 순간인가 눈앞에서 더 이상의 계단을 볼 수 없었다.
청년의 신형이 멈춘 지도 모르게 멈춰 있었다. 마운은 전신을 옥죄던 한기가 누그러졌음을 느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칠이 벗겨진 낡은 산문 뒤로 한 때는 고색창연하다는 말이 어울렸을지도 모를 낡은 건물들이 보였다.
청년은 아무런 말도 없이 마운을 내려놓았다. 마운은 미처 내려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그때 청년이 돌아서서 마운에게 건성으로 포권을 취했다.
“그럼.”
청년은 멍한 눈빛의 마운을 남겨둔 채로 돌아섰다. 마운이 정신을 차리고 청년에게 답례를 하려 했을 때 청년은 이미 태상궁의 좌측 벽을 따라 사라져 버린 뒤였다.
“허! 바람 같은 젊은이로구먼.”
그때 마운의 전면 우측 전각에서 도사 한 사람이 나타났다. 도사는 마운을 발견한 순간 눈에 이채를 띄었다가 곧 웃음기를 드리우며 다가섰다.
“아니, 이게 누구요? 마형이 웬 바람이 불어서 예까지 왔소이까?”
마운도 도사를 알아보았다. 그보다 세 살이 어리나 굳이 항렬을 따지자면 사형이 되는 사람, 청인자였다. 마운은 청년의 일을 잊고 금새 반색을 하며 포권을 취했다.
“오호라! 하는 일 없는 청인 도장 아니신가? 오랜만이오.”
청인자는 마운의 포권 쥔 두 손을 반갑게 감싸 쥐었다.
“하는 일이 없다? 하기야 맞는 말이지. 나 아니면 누가 있어 마형을 마중 하겠소? 안 그래도 곧 하산하여 마형에게 손을 벌리러 가려던 차에, 이렇게 직접 오셨습니다 그려.”
청인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순간 마운은 자신이 왜 곤륜까지 찾아왔는지를 떠올리고서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청인도장! 큰일 났소이다.”
청인자가 눈을 둥그렇게 치떴다.
마운이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곡마래에서 오는 길이오. 은담비 털을 구하러 갔었는데 마을이 완전히 거덜이 났더이다. 흑풍사(黑風社) 놈들이 휩쓸고 간 모양이오. 십여 명의 청년들을 죽인 것은 물론이고 어린 처녀들과 젊은 아낙들마저 데리고 사라졌다 하오.”
흑풍사라 함은 청해성 북부에 기반을 둔 마적단이었다. 몽고족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흑풍사는 주로 청해성 동부의 성시 외곽을 노리며, 세력이 강성해질 때마다 성시를 넘어 감숙성(甘肅省) 서녕부(西寧府)까지 약탈을 일삼는 흉포한 무리들이었다.
“흑풍사가 틀림없소? 그들이 이곳 남부까지 내려온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인데---.”
청인자의 물음에 마운은 한 점 의문도 없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들은 바가 있소이다. 들리는 풍문으로는 홍라교(紅喇敎)가 여러 교파들을 힘으로 누르고 서장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오. 그 동안은 서로 물어뜯느라 백성들을 돌볼 여가가 없었으나 이제 하나가 되었으니 장족들을 보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흑풍사가 감히 장족들을 건드리지 못하고 마다와 곡마래로 남하한 것이 아닌가 싶소. 그래도 설마 하여 나 또한 묻고 살피기를 거듭했소이다. 틀림이 없었소. 검은 깃발하며 북쪽으로 난 말발굽 자국, 곡도에 난자당한 시신들, 거기다가 쉰이 넘는 도적들이 대부분 몽골포를 입었다 하니 그들이 아니라면 과연 누구겠소? 더구나 두목인 듯한 자가 독안의 칠척 거한이라 했소.
그 자야 말로 독안혈랑(獨眼血狼)이라 불리는 흑풍사 사주의 둘째 아들 차카무르일 테니,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소?”
청인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물었다.
“언제 벌어진 일이오?”
“엊저녁의 일이었소. 새벽녘에 떠난 것 같소이다. 반 시진 만 일찍 도착했더라면 나도 청인 도장을 다시 못 볼 뻔 했소.”
청인자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필이면 곡마래인가? 어쨌든 여덟 시진 정도 차이니 잘하면 잡을 수 있겠구나.”
홀로 중얼거린 청인자가 고개를 들고 마운에게 말했다.
“갑시다. 사부님께 고하고 바로 뒤쫓아 가야겠소. 내가 추격대를 모으는 동안 사부님께 상세히 고하도록 하시오.”
청인자와 마운은 종종걸음으로 태상궁으로 향했다.
청인자는 싫다는 사제 청현은 물론이고 사형인 청학과 청우의 일곱 제자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불러 모았다. 거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청학과 청우, 본인들은 달랐다.
별 달리 할 일이 없어 마주앉아 차를 홀짝이던 두 사람이었다. 간만에 출타할 일이 생긴 터라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검을 챙겨 들었다.
청학자가 문득 생각난 듯 드문드문 회색빛이 감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음, 조카를 대동할 생각이냐?”
청인자는 문득 운청산의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리며 주저 없이 대답했다.
“일단 말이나 꺼내보렵니다.”
청학자는 검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돌아앉았다. 청우자도 검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일단 말부터 꺼내보고 안 간다면 다시 오게.”
청인자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무공으로 따지자면 감히 넘볼 수도 없는 두 사람이었다. 태악도인에게 직접 사사한 운청산 역시 자신보다야 낫다고 하지만, 근 오십 년을 일로매진한 두 사람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리라. 운청산을 데려 가려면 두 사람을 놔두고 가야한다 생각하니 전력의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청인자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도인인 청인자가 생각하기로도 운청산이 사는 세상은 너무나 좁고 재미없었다. 청인자는 일단 운청산에게로 먼저 가보기로 작정했다.
청인자는 마음을 굳혔으면서도 방을 그냥 나서지 않았다.
“사질들이 다쳐도 책임 못 집니다. 죽을지도 모른다구요.”
순간 청우자가 움찔 하고서 슬며시 손가락 끝을 꼼질거려 검파의 구석을 짚었다. 그때 청학자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럴 운명이겠지.”
청우자가 슬며시 손을 탁자 밑으로 거두는 것을 보면서 청인자는 방을 나섰다.
“쳇! 젊을 때는 호방한 척 들 하더니만, 이제 완전히 고리타분한 늙다리들의 본색들을 드러내시는구먼.”
방안에서 청학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들려. 이놈아! 너는 젊은 줄 아냐?”
청인자가 문을 닫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나 늙었어요. 그래서 난 일의 경중을 압니다. 껄끄럽다고 촌각을 다투는 일에 몸을 빼다니---.”
청학자가 소리쳤다.
“너는 네 조카니까 그렇지. 그리고 너도 일의 경중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야. 도대체 누가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난 자발적으로 가겠다는 사람에게만 부탁해요. 쳇! 배분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사실은 대수였다. 차라리 태악도인이 나서지 않았다면 좋았으리라. 그랬다면 청인자가 자신과의 관계를 강조하여, 대충 막내 사제나 자신의 제자로 들였으리라. 하지만 태악도인은 모습을 보였고, 운청산이 제자임을 밝혔다.
운상자로서는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자리를 떠넘기려 해도 받아주지 않는 첫째 제자 청학이 이미 환갑에 이른 때였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열아홉 살 소사숙이 쉽게 받아들여지겠는가.
고민을 거듭하던 운상자는 문득 운청산에게 도인이 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운청산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자, 운상자는 그때서야 겨우 미소를 지으며 운청산을 속가제자로 받아들였다.
배분으로야 소사숙일 수밖에 없지만 속가제자라면 엄격한 도가의 항렬에서는 조금 자유로울 수 있으니, 고민을 반으로 줄인 격이었다.
그러나 운청산이 곤륜제자들로부터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속가제자라 하나 엄연히 태악도인의 제자였다. 운상자를 제외하고는 그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은 없었으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으리라.
문을 나선 청인자는 자신도 경중을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청인자는 믿는 바가 있었다.
운청산이 귀곡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것도 벌써 사 년이 지났다. 그 사 년 동안 운청산은 단 한 번도 곤륜의 삼천육백 계단을 다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산에서 살았고 혼자 살았다.
그가 처음부터 그리할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 어떻게 살겠다는 계획은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경의상을 찾아갈 것이라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인자의 단 한 마디가 그를 산에 묶어 놓았다.
“네 할머니는 팔 년 전에 돌아가셨다.”
슬픔이 하늘에 닿은 그날, 운청산은 끝내 울지 않았다. 한 동안 하늘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너무나 환해서 오히려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였을 따름이었다. 그날 운청산은 곤륜산에서 평생을 살리라 작정했다.
그날부터 그는 곧 곤륜의 경내를 떠나 작은 신당에서 홀로 살기 시작했다. 청인자가 동현당에서 자신과 함께 살기를 원했지만 운청산은 거절했다. 그라고 청인자와 함께 사는 것이 싫을 까닭이 없었지만, 곤륜파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것이 여간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 아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운청산은 그가 거처로 쓰고 있는 버려진 전각의 좁은 마루에 망태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긴 마포를 꺼내어 펼치고 그 위로 망태기 안에 든 약초들을 조심스레 꺼내 펼쳤다. 몽둥이 같은 산약(山藥)도 있고 겨우 한 뼘이나 될 듯한
산삼 세 뿌리도 있었으며 특히 황기(黃芪)가 많았다.
운청산은 백 년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산삼들을 보면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두고 올 걸 잘못했나?”
운청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몇 년 더 둔다고 해서 약효가 부쩍 느는 것도 아닌 이상, 보일 때 캐는 것이 낫다고 자위했다.
“근데 이것들이 돈이 되는지 모르겠군.”
사 년 전까지만 해도 운청산은 돈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돈이란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혼자 살기를 원해도 벽곡단이 없는 이상 밥은 어울려 먹어야 했다. 처음에야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박찬에 퍼석퍼석한 밥이었지만 벽곡단과는 비할 수 없는 맛을 느끼며 즐기기까지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인자가 출산을 한다며 같이 갈 것을 권했고, 운청산은 출산의 이유를 물었다. 청인자는 솔직담백하게 대답해 주었다.
밥을 먹고 옷을 입고 검을 사는데 적지 않은 돈이 든다는 사실과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운청산은 그의 의지대로 청인자를 따라가지는 않았지만, 청인자와 더불어 많은 말을 나누었다. 주로 운청산이 질문하고 청인자가 대답한 그 대화의 주제는 오직 한 가지 돈에 관한 것이었다.
그날 이후, 하루 종일 검과 책을 장난감 삼아 놀던 운청산의 일과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일 년의 반, 그러니까 태령봉에 눈이 걷히는 동안은 늘 약초를 찾아 산을 헤매고 다녔다. 반선에게 배운 것도 있고 청인자가 약초도 돈이 된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모르고 있었다. 그가 지금껏 캐고 다듬어 청인자에게 건네준 약초만으로도 능히 곤륜의 삼분지 일 살림을 책임졌다는 것을.
“모르는 걸 생각해 보면 무엇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외숙이 알아서 하시겠지.”
운청산은 약초에서 눈을 떼고 들보에 검갑은 걸어둔 채 검을 쥐고 좁은 마당으로 내려섰다. 운청산은 마당 한 가운데 서서 오른쪽에 잔뜩 세워져 있는 통나무를 응시했다.
특이한 모양새였다. 일정하게 한 자 반 정도 되는 통나무들이었는데, 보통은 쌓아두는 것을 일일이 세워서 늘어놓았다. 운청산은 호흡을 가다듬고 뚫어져라 통나무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오른발을 굴렀다. 순간 그 많은 통나무들 가운데 유독 앞쪽에 있는 통나무 하나만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운청산은 통나무가 가슴 높이로 튀어 오르자 왼손을 뻗어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통나무가 직각으로 꺾여 운청산의 전면 일 장 앞으로 딸려왔다.
운청산은 검을 수평으로 가볍게 휘둘렀다. 검은 어처구니없게도 통나무에 닿지도 않았다. 그리고 통나무 역시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고 그저 아래로 처질 따름이었다.
운청산은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통나무 아래로 검을 찔렀다가 빼냈다. 순간 통나무는 미약하게 회전하며 다시 가슴어림까지 솟아올랐다.
다시 몸을 빼낸 운청산이 또 다시 검을 휘두르고 앞으로 이동하여 검을 찔렀다 빼기를 한 번 더 반복했다. 마지막 세 번째 베기를 끝낸 운청산은 더 이상 통나무 아래로 검을 찔러 넣지 않고 대신에 왼손을 뻗어 손바닥을 휘감으면서 오므렸다가 다시 왼쪽의 빈 공간을 향해 내뻗었다.
운청산의 손놀림에 따라 통나무는 빈 마당으로 날아가 꽂히듯 떨어졌다. 순간 통나무가 여섯 조각으로 쪼개어지면서 여섯 방향으로 흩어졌다.
운청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역시 안 되는군. 땅에 닿기 전에 다시 당겨보면 어떨까?”
무공을 아는 사람이 보았다면 눈을 휘둥그렇게 떴으리라. 진각을 이용해 원하는 물체에만 영향을 주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대접인신공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더구나 검기가 일지 않는 것으로 보아 통나무를 여섯 조각 낸 것은 검의 기세만으로 이룬 일이리라.
무인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실력으로 장작을 팬다는 것은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부러워하고 아쉬워했으리라.
그러나 운청산에게 있어서는 장작을 패면서 펼치는 무공 정도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태악도인의 도움으로 운청산은 이미 구전태허신공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칠전과 구전이 차이가 나면 얼마나 나랴 했지만 결과는 크게 달랐다.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칠전의 네 배 정도에 달한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두 번, 세 번 연이어 힘을 써도 진기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이 끊임없이 보충되었다.
그리고 꾸준히 수련했던 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운청산은 같은 성질임에도 이질감이 느껴지던 태악도인의 공력을 온전히 그의 것으로 만들었고, 태청구전금액고의 남은 약력마저 완전히 소화시켜 버렸다.
결국 운청산의 공력은 겨우 사 년 전에 구전을 이룬 사람에게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다고 보아야 했다.
그러니 공력을 자유자재로 수발한다는 것이 무슨 어려운 일이겠는가.
만약 태악도인이 운청산의 수준을 살폈다면 오히려 크게 아쉬워했으리라. 진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태악도인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천지자연의 기운까지 훔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양신이 생성되지 않았다.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단계이거늘 수련을 거듭해도 공력만 조금씩 늘어날 뿐 더 이상의 진전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운청산은 초연했다. 할 일이 없어 수련에 전념 하였으니 적어도 태악도인의 부탁은 들어주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인연이 닿지 않는다는 귀곡산인의 말이 떠올라 더 이상의 진전을 기대하지 않는 탓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비록 장작 패는 일에 불과하지만 배운 바를 유용하게 써먹는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리라.
더구나 그 장작들이 장차 곤륜제자들의 가슴까지 따뜻하게 덥혀 줄 것이니 무공의 남용이라고 말하면 오히려 실례가 되리라.
운청산은 같은 일을 반복했다. 이번에는 마지막 순간에 공력의 수발을 전환했다. 그러나 힘이 끊어지는 순간 통나무는 버티지 못하고 다시 여섯 조각으로 분리되고 말았다.
운청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눈에 이채를 드리웠다.
“그렇군. 아예 찍어 누르면 되겠어.”
운청산이 다시 같은 일을 반복했다. 통나무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비스듬하게 땅에 꽂혔다. 고개를 끄덕인 운청산은 정밀한 기계처럼 같은 동작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슈슉!
퍼퍼퍼퍼퍼퍽!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통나무가 땅에 꽂히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교차했다. 백여 개의 통나무를 순식간에 반대편으로 이동시킨 운청산은 돌아서서 검을 던졌다. 검은 정확하게 검갑 안으로 꽂혀 들어갔다.
운청산은 통나무들을 확인했다. 처음 두 개의 통나무들만이 바닥에 흩어져 있고 나머지 통나무들은 촘촘하게 땅에 박혀 있었다.
운청산은 마루 아래서 둘둘 말린 칡 나무 밧줄을 꺼내 들어 장작들을 단으로 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