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산 같은 교회 막 9:2-9; 눅 9:28-36
설교: 마경훈목사(비전교회 담임)
구소련 땅에 3대 기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무는 많은데 종이가 없었습니다. 원유는 많은데 휘발유가 없었습니다. 땅은 넓은데 식량이 없었습니다. 왜요?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공산혁명과 함께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땅을 저주하고 그 백성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지금 북한 땅이 그렇습니다. 해방이 된 직후에는 북한이 남한 보다 훨씬 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북한은 해마다 홍수에 해마다 가뭄을 겪는 저주의 땅이 되었습니다. 90년대 고난의 행군 기간에는 300만 명이 굶어죽는 비참한 땅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교회를 폐쇄하고 목회자들을 잡아 죽이고 기독교 신앙을 말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교회를 핍박한 결과는 비참한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6.25를 수습하고 한국을 떠나면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한국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경제의 문제가 아닙니다. 군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앞엔 신학적인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무슨 말을 한 것입니까? 신앙 부흥이 민족의 부흥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부흥이 국가 부흥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부흥이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교회부흥하면 교회의 양적인 면과 외적인 면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 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느냐, 그 교회의 예배당이 얼마나 크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큰 예배당을 건축했으면 부흥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부흥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먼저 숫자로 교회부흥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40년간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설교 중에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면서 ‘광야 교회’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광야교회를 양적으로 생각해봅시다. 교인은 여자와 어린 아이를 제외하고 남자 장정만 603,55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몇 명이었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 단 2명이었습니다. 고전 10:5을 봅시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은 믿음 없는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수가 광야에서 멸망 당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전체 인구에 비하면 지극히 소수였지만 주님은 그들을 기뻐하셨습니다. 소수만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질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당의 크기나 화려함으로 교회부흥을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마 24:2에 보면 주님께서 크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 말씀대로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고 크고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주님의 말씀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졌습니다. 크고 화려하기 때문에 부흥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질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변화산이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헐몬 산이라는 견해도 있고 므깃도 옆에 있는 다볼산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산이었느냐가 아닙니다. 그 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헐몬산 정상에도 올라가 봤고 다볼산 정상에도 올라가 봤습니다. 헐몬산 정상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눈이 채 녹지 않은 정상에서 우리 기도팀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컵라면은 헐몬산 정상에서 먹은 컵라면입니다. 찬 바람이 부는 헐몬산 정상에서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에 김치를 걸쳐서 먹는 그 맛은 최고였습니다. 다볼산 정상은 택시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다볼산 정상은 몇 번 올라갔습니다. 제 작년에 우리 기도팀이 기념예배당에 도착했을 때 하늘에 무지개가 떠서 우리 팀을 반겨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중에 변형 되셨습니다. 주님의 옷에서 광채가 났으며 그 옷은 세상에서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별세 하실 것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기도하던 시간에 졸던 베드로가 깨어나서 주님에게 정신없는 말을 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때 구름이 그 곳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제자들이 둘러보니 엘리야와 모세는 사라졌고 주님과 자기들만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신비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 체험 후에 주님과 제자들은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오늘 설교는 이 사건을 통해서 교회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우리 비전교회가 변화산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주님과 함께 있는 교회(2절)
2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있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계셨기에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일어난 일들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시는가 함께 하시지 않는가 입니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 중에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그것이었습니다. 삼하 5:10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점점 강성해진 이유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불행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심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삼상 16:14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사울에게는 하나님이 떠나셨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점점 망했던 것이고 다윗은 점점 강성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자신이 가시면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하는 교회는 성령에 충만한 교회이고, 주님과 함께 하는 성도는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이고,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은 성령이 역사 하시는 일입니다.
성경 행 10:38과 요일 2:27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기름부음으로 표현했습니다. 마 25장에 보면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 처녀는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등불과 함께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등불은 준비했으나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입니다. 그 이야기는 주님의 재림 직전에 이 세상에 있게 될 두 부류의 교회를 보여줍니다. 성령충만한 교회와 성령을 소멸한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신앙의 형식과 함께 성령의 기름을 준비한 교회와 종교적인 형식은 갖추었으나 성령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교회입니다. 여분의 기름이 준비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이 닫혔습니다. 성령의 기름을 준비한 교회는 신랑 되시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성령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교회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성령으로 사는 것과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지 못하고 육신으로 사는 것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생명과 사망의 차이고 능력과 무능력의 차이입니다.
같은 자동차라고 하더라도 기름이 충만한 자동차는 서울에서 부산까지도 달려갈 수 있지만 기름이 떨어진 자동차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기름 없는 자동차의 유리창을 깨끗이 닦고, 유리막 코팅을 하고, 광폭 타이어로 교체하고, 값비싼 장식을 해도 그 자동차는 달릴 수 없습니다. 그 자동차를 달리게 하려면 기름을 넣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런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신령은 은혜를 받으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삼손이 엄청난 힘으로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칠 때와 힘을 잃어버리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사로잡혀서 눈이 뽑히고 맷돌질을 할 때의 차이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성령님이 삼손에게 역사를 하실 때 삼손은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고, 성령님이 삼손에게 역사하지 않으실 때 삼손은 무능력한 삶이 되었습니다. 삼손의 능력과 무능력은 성령님이 역사하시는냐 역사하지 않으시느냐로 결정된 것입니다.
우리 비전교회는 성령님의 역사를 사모하고 기도하여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 기도가 있는 교회(눅 9:28)
주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무엇을 하러 올라가셨습니까? 눅 9:28절을 보니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주님은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시다가 변형 되셨습니다. 제자들은 깊이 졸다가 엉뚱한 말을 했습니다. 눅 9:32절에 보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으로 졸지 마시고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신비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문제도 해결 받습니다.
창 32장을 보면 야곱이 얍복강에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20년 전에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장자인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가 받을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였지만 말입니다. 그 일로 사냥꾼인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야곱은 형이 두려워서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의 집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에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형 에서가 야곱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에서는 동생에 대한 분노를 풀지 않았습니다. 에서는 군사 400명을 동원해서 야곱을 죽이기 위해서 야곱에게 오고있는 중이었습니다. 야곱은 가족들과 가축들을 먼저 보내고 얍복강에 혼자 남아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야곱은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은 기도한 장소를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신앙의 간증으로 브니엘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야곱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 결과 야곱의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야곱을 죽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오던 에서가 야곱을 보는 순간 마음이 녹아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둘은 서로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기도는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신앙생활에 생수가 충만해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은혜의 생수가 넘치는 교회입니다. 교회에 은혜의 생수가 끊어지게 되면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가뭄이 들어서 걱정입니다. 저수지의 물이 말라버려서 농민들이 큰 어려움을 격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지하수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하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몇 개 펌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간혹 펌프가 고장이 나면 주일에 설거지를 하다고 물이 떨어져서 난처한 경우가 있습니다. 화장실에 물을 내릴 수 없어서 곤란을 격기도 합니다. 우리교회에서는 펌프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교회의 펌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생수를 끌어오는 펌프입니다. 기도는 신앙인의 생수를 공급하는 펌프입니다. 기도가 고장난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가 사라집니다. 기도가 고장난 개인은 하나님의 생수가 끊어져서 영적인 기갈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교회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맑은 물과 같은 은혜와 능력이 넘치려면 기도의 펌프가 강력하게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의 파이프를 통해서 맑고 시원한 생수와 같은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3. 변화가 있는 교회(3절).
2절과 3절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 앞에서 변형 되셨는데 그 옷에서 광채가 나는데 빨래를 해서 희게 할 수 없는 정도의 수준으로 매우 희게 되었습니다. 눅 9:29에 보면 주님이 언제 변화 되셨냐면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었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이 변화되신 것처럼 우리도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었듯이 분명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변화를 간증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가지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창 32장에서 야곱은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기도응답으로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야곱이 변화되었습니다. 기도 중에 만난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한 것입니다. 육신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땅의 것을 추구하던 사람이 하늘의 것을 추가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기 전과 주님을 만난 후의 삶이 분명히 변화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에 분명한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도 변했을 것이고, 언어도, 행동도, 인생의 목적도, 가정생활이나 교회생활 그리고 사회생활에도 분명한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납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중심을 잡아주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뚝이를 넘어뜨리면 다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오뚝이 아래 몸통 밑 부분에 무거운 것이 있어서 그 힘에 의해서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 속에 성령이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이 깨어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의 중심과 일치되는 신령한 기준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중심과 일치 된 말을 하게 합니다. 우리의 생각도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된 생각을 하게하고, 우리의 행동도 하나님의 중심과 일치 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4. 십자가 복음이 있는 교회(4절 눅9:31).
4절에 보면 예수님이 변화되시자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그 대화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눅9:31에 보니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엘리야 그리고 모세의 대화의 내용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빼버린 다면 기독교는 영혼 없는 몸과 같습니다.
주님이 변화되시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대화를 했으니 그 대화의 내용은 굉장하게 신령하고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때 나누신 대화의 내용이 주님의 별세였습니다.
눅 24장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경을 풀어주셨습니다. 주님이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이 어떤 내용입니까? 눅 24:26,27에 보면 구약의 성경으로 주님께서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셔야 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의미하고, 영광에 들어가야 하신다는 것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 등을 말합니다. 주님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자신의 별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전 1:18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과 연합시키기 때문에 십자가를 의지하면 주님의 공로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십자가는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내세를 복되게 하는 능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현세를 복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사와 표적도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고, 약한 자가 강해지는 능력도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계 12:11에 보면 십자가는 마귀를 이기는 능력도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고, 여러분의 신앙이 건강한 신앙이 되려면 주님의 십자가를 많이 말해야 하고, 보혈찬송을 많이 불러야 합니다. 십자가의 공로를 묵상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붙잡아야 합니다.
5.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교회(7절)
베드로는 주님의 변화와 모세와 엘리야의 나타남을 목격한 후에 놀라서 초막 셋을 짓고 거기서 살자고 말합니다. 이 때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베드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들으라는 헬라어로 ‘아쿠오’라는 말인데 청각 작용 뿐 아니라 들려온 내용을 정신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수용하고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교회생활의 기준이고, 신앙생활의 기준입니다. 눈을 감고 1분이 지난 후에 손을 들게 하면 사람들은 속으로 “똑딱똑딱”하면서 시간을 잽니다. 그리고 60초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시간에 손을 듭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했던 1분과 실제 1분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30초 정도의 시간을 1분이라고 생각하고 손을 들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은 자기의 생각이 잘못되었고 시계가 정확하다고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자기가 옳고 시계가 잘못되었다고 우긴다면 어떨까요? 그가 아무리 우겨도 그가 옳은 것이 아니라 시계가 옳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시계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옳다고 우겨도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에 미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려면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기록한 것이 성경 말씀이고,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 안에 불어놓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따라 살고, 우리의 생각을 따라 교회를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 안에 불어놓으시는 성령의 감동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참된 교회이고 그런 교인이 진짜 성도인 것입니다.
6. 세상으로 가는 교회(9절).
베드로는 변화산이 좋아서 그곳에서 초막을 짓고 살자고 했지만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산에서만 하면 안 됩니다.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주님이 산 아래로 내려가셔야 했던 이유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가야 하는 이유는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해서 주님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영혼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해서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도 세상으로 가서 우리의 친구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주님은 복음을 들고 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제 전도 주일이 몇 주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가고 있습니까? 누구를 인도하실 것입니까? 주님의 소원은 우리의 가족이 구원 받는 것이고, 우리의 친구가 구원 받는 것이고, 우리의 이웃이 구원 받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는 전도대상자를 만나십시오. 그리고 초청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에서 교회생활을 잘하는 것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정생활도 잘해야 하고, 사회생활도 잘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빛이 아니라 세상의 빛입니다.
어떤 처녀가 시골에서 버스를 타고 통학하다가 믿지 않는 총각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안 믿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뜻에 맞추어 살기가 무척이나 힘들고 교회 간다고 얼마나 구박을 하는지 나중에는 교회도 못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좋아서 결혼했지만 남편 된 사람도 아내를 구박하고, 술 먹으면 구타를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남들 다 잘 낳은 아들도 못 낳고 딸만 낳는다고 얼마나 구박을 하는지 도저히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 중에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대화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떠나야겠습니다. 이렇게 구박 받느니 떠나야 되겠는데, 친정으로는 못 가겠고, 서울로 가야겠습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떠납니까?”, “아이들은 할머니가 기르겠죠.” 극구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서울 가서 무얼 하시려구요?” 물으니 “낮에는 일하고 야간에는 신학교 다녀서 전도사를 할 겁니다.”, 목사님이 못을 박았습니다. “시집살이도 못하는 사람을 누가 전도사로 오라고 한답니까? 여기서 잘해야 전도사도 하는 것이지 여기서 못하는 사람이 무슨 전도사를 합니까? 시집에서 소금이 되십시오. 소금처럼 녹아져서 가정에 소금의 맛을 내야 다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조언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자매님이 새벽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하며 자기를 완전히 깨뜨렸습니다. 남편이 때리면 맞고, 시어머니가 구박하면 어머님 마음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울면서 자기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1년 동안 이렇게 사니까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소금된 행동을 보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시아버지와 남편까지도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살펴봅시다. 소금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나 때문에 가정, 직장, 이웃, 사회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나의 가정이 나 때문에 변화되고 직장이 나 때문에 변화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나 때문에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변화 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문헌에 보면 유대인들이 배교했다가 다시 돌아오면 그가 참회하는 의미에서 회당에 누워서 사람들이 들어갈 때 밟고 들어가게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자기 잘못을 용서 받기 위해서 교회 문에 누워서 사람들이 들어갈 때 “나는 맛 잃은 소금이니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라고 말하도록 했습니다. 맛 잃은 소금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으로 가십시오.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교회건축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그냥 하늘에서 벽돌을 떨어뜨려주시고 필요한 돈 다발을 떨어뜨려주시면 좋을 텐데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하시면 하루만에도 예배당이 생길 텐데요. 왜 힘들게 저희들에게 헌금하고 수고해서 예배당을 짓게 하십니까?” 주님이 응답을 하시더랍니다. “내 집은 너희들이 지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대로 살아서 변화산 같은 교회를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