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인식의 전환? 이게 진실인가?
모든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게 진실인가?'이다.
'그게 우리 그룹에서 나온 것인가?' '그게 나를 기분 좋게 하는가?'
'그게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가?' '그게 우리가 쓰는 용어와 명제에 어울리는가?'
이런 것들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그게 백 퍼센트 진실인가?' 하는 것도 아니다.
성인聖人은 '백 퍼센트 진실인가 아닌가에 누가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라고 말하고,
불교에서는 '에고만이 그것에 관심을 갖는다'고 말한다.
에고는 진실이나 하느님에 관심이 없고 오직 통제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성인들은 겨우 십 퍼센트만 진실이라도, 그 선물에 감사하고 행복해할 것이다.
13세기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했다.
"그게 진실인가? 그러면 성령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오늘날보다 이슬람교를 더 악마처럼 대하던 13세기에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만일 우리가 코란의 한 페이지만 읽었어도
그것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입을 맞추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그리스도교 진리는 두려움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느님과 거룩함을 만나는 곳이라면, 거기가 자기네 체제 밖이라 해도
아무 데서나 능히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
이 땅에 진실로 하느님이 한 분만 계시다면
그분이야말로 모든 시대 모든 문화를 관통하시는 분임이 틀림없고,
유일신을 믿는 자들은 진리는 하나이며 (에페 4, 4-6),
그 하느님이 '모든 것 안의 모든 것'임을 가장 먼저 인정했어야 한다.
그런데도 유일신을 주장하는 자들이 오히려 이런 생각들을 두려워하며 반대한다.
아마도 그들을 키운 종교가 변화보다 종족을 지키는 일에 더 기울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우리는 배타적인 무엇, 종교적 컨트리클럽 같은데 속하기를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쯤 되면 하느님은 자꾸 졸아들어 마침내 우리보다 더 왜소해지는 것이다.
루미(이란의 신비주의 시인-옮긴이)가 말하듯이,
"무릎 꿇어 바닥에 입 맞추는 방법은 수천 가지도 더 된다:'
o 초기 그리스도교의 저술가들 대부분은
판단하는 분리된 자아로부터의 철저한 의식의 전환을 '관상'이라고 불렀다.
o 불교는 그것을 명상, 참선 또는 수행修行이라고 불렀다.
o 신비주의 정교회는 그것을 마음의 기도라고 불렀다.
o 수피 이슬람은 그것을 황홀경이라고 불렀다.
o 하시드 유다교는 그것을 '안에 있는 신성한 불꽃'으로 사는 삶이라고 불렀다.
o (가장 초기의) 베다 힌두교는 그것을 비이원적 앎 또는 그냥 호흡이라고 불렀다.
o 토착종교들은 그것을 춤, 제사, 그리고 성性을 통한 자연
또는 '위대한 영'과의 합일에서 발견했다.
이는 오언 바필드가 '본래적 참여original participation '라고 부른 것이다.
신의 현존은 생각하는 마음 바깥에서, 서로 동참하는 관계 안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마음은 본디 보고 맛보고 사랑하기보다 판단하고 분석하고 통제하는 경향이 있다.
마음이 '벌거벗은 지금'에 현존하거나 머물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은 일거리를 원하고 사물을 가공 처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게임을 멈추는 열쇠는 아주 간단하다.
침묵 또는 그냥 가만히 있음이다.
토머스 키팅 신부가 지혜롭게 보았듯이,
침묵만이 하느님의 첫째가는 언어이며,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서투른 번역"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실질적 차원에서 '침묵'과 '하느님'은 동시적으로. 차라리 동일한 것으로 경험될 것이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당신은 더 깊은 침묵으로 들어가고 싶을 것이다.
지난 5백년 동안 말로써 말이 많았던 종교는 이 비결을 전혀 이해 하지 못한 것 같고,
결국 침묵 자체를 겁내게 된 것 같다.
그래서는 말할 것도, 증명할 것도, 생각할 것도, 방어할 것도 없는
광야 40일 속으로 예수를 따라서 들어갈 수 없다.
'마음의 평화'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실제로 그런 건 없다.
당신이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한 당신은 결코 참 평안을 누릴 수 없다.
당신이 참 평안을 누린다면 당신은 마음 안에 있는 게 아니다.
위의 어느 쪽 말도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지 말고
그냥 정직하게 당신 자신을 관찰하라. 그때 당신은 알게 되리라.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앎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