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 . 42
윤강로 시인
윤강로(尹崗老) 시인을 우리 문인들은 ‘혜화동 백작’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혜화동 로타리 혜화우체국 옆 ‘엘빈’이라는 까페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생활 무대가 혜화동이라서 붙여진 작위(爵位) 같은데 상당히 오래 전부터 그는 혜화동 백작으로 지내오고 있다.
내가 윤강로 시인을 만난 것은 필연적인 운명이다. 내가 늦깎이로 『心象』지에 등단하면서부터 그와의 만남은 이제 30년을 넘어가고 있다. 그는 고풍스런 베레모를 즐겨 착용하고 문학청년들과 후배들을 만나 정담을 나누는 인자한 선배이다.
그와는 혜화동소재 까페 ‘카사’에서 ‘보혜미안’으로 옮겨서 차를 마시거나 생맥주를 마시고 담배 연기 자욱한 구석자리에서 원고지를 메우거나 독서를 하고 아니면 아릿다운 미녀들과 마주 앉아서 무엇인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매일 대할 수 있었다.
너의 깊이는 깊다 / 하늘 깊다 / 흔들리우며 / 보우리 가르는 불꽃 / 꽃필 때 아픔을 / 함성한다 // 아우성의 요정들 / 분신하여 허공을 할퀴는 / 손톱의 신랄(辛辣) // 꽃색등 / 찰라를 춤추고 / 조각난 / 날들이 / 가슴 에인다 // 빛은 생명으로 태어나 / 정밀(靜謐)의 구석을 / 밝히면서 // 잠자는 / 천둥을 부른다 // 차디찬 일별(一瞥)로 달리는 / 너, / 하늘 깊은 잠적 // 긴 것은 없나니
그의 당선작품「불꽃놀이」전문이다. 그가 데뷔하고 몇 년 뒤에 첫 시집『불꽃놀이』를 상재했다. 거기에 수록된 위의 작품은 우선 언어의 간결성 그 함축미에 빨려들고 있다.
이토록 깊이 있는 인간의 내면적인 생명의 근원을 서정성으로 추구하는 시적 성숙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인간의 간결한 언어의 아름다움과 함께 빛남을 볼 수 있다. 불꽃은 곧 그의 아픔에 대한 아름다움일 것이고 그 아름다움은 가슴 에이는 조각난 날들을 측정하는 것으로써 그가 추구하는 탐미적 세계는 지적 자양을 서정과 결합시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나는 즉각 그의 작품에 대한 촌평을 붙였다. 그가 1993년 10월 23일, 강남 소재 까페 ‘랑데부’ 시낭송 모임의 초대시인으로 참석하여 시를 읽고 시창작 강의를 하는 자리에 나도 동석했다. 나에게 주어진 이야기의 주제는 ‘윤강로의 시와 인간’이었다. 아마도 내가 그와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절친한 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주최측의 요청이었다.
이 다리에서 당시 그의 작품「불꽃놀이」「발성법」「벌레소리 단상」에 대한 독후감과 그와의 친분관계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후에 이 글을 정리해서 「혜화동에서 부서지는 언어-윤강로 시인 탐색」이라는 제목으로 나의 시론집『화해의 시학』에 수록하기도 했다.
그는 193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 중앙중고와 고려대 구구문과를 졸업하고 1976년『心象』지에 박목월, 박남수, 김종길 시인의 심사로 신인상에 당선하여 문단에 나왔으며 그동안 시집『불꽃놀이』『피피피 새가 운다』『오늘도 피피새가 운다』『비어 있음의 풍경』『별똥 전쟁』『사람마다 가슴에 바람이 분다』『작은 것들에 대하여』등이 있으며 2011년,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을 수상하고 현재는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과 목월문학포럼 중앙위원으로 있다.
한편 그는 시집 해설을 상당수 집필했는데 내 첫 시집『서울허수아비의 수화』에 대한 해설을 써주어서 나의 인생과 작품에 관련된 문학성을 심도(深度)있게 해석하여 둑자들의 공감을 유로(流路)하는 매체 역활을 해 주기도 했다.
김송배 시인은 명실상부한 시인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데뷔 이전부터 시를 살아온 인간형의 적나라함을 보여주었고 그가 시인이 되지 않고는 삶이 성립되지 않을 것 같다는 강한 인상을 받아온 것이 김송배 시인에의 인상이었다. 그의 시에 대한 열망은 진지하고 겸손했다. 그러한 김 시인의 시집의 삶을 구체화시킨 또 하나의 탄생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영원과 통하는 순간의 생명성」중에서
이렇게 그의 고차원의 비평을 겸한 해설을 수록함으로써 내 작품이 더욱 빛을 내뿜게 되고 나의 인생관이나 가차관이 한층 진일보하는 사유(思惟)의 범위가 정립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후 내가 예총에 근무할 때에는 대학로에서 자주 만났다. 인생과 문학이 비약하는 대화의 장이 생맥주집이나 찻집에서 교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만남 속에서 문학이 숙성하고 지적 저양으로 축적된 시업을 서로의 개성으로 이해하고 격려하는 우정은 언제나 깊숙이 내 가슴에 자리하는 선후배로 영원한 존재의 등불로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혜화동에서 ‘분수동인’ 활동을 계속하면서 기성 시인들과 독자들과의 교류를 즐기고 있었는데 이생진, 박희진, 신 협, 신용대, 홍해리 시인 등이 동인으로 있으면서 매월 시낭송과 문학 초청강연, 독자들의 질의응답 등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동인연간집『분수』를 정기적으로 발간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물론 나도 정기 모임에 참석해서 경청하거나 직접 시낭독도 한 기억이 새롭다.
그의 시적 경향이나 주된 주제의 접근은 ‘삶을 바탕으로 한 주지주의와 서정성의 융합 그리고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복하는 존재론적 규명과 우주관적 확대를 통하여 자아와 인류의 사회성과 복합적인 인간속성을 가치관에 접근한다’는 요지로 어느 글에서 피력하고 있어서 그가 추구하거나 탐구하는 주제는 고차원의 주지적인 가치관 탐색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그와 나는 1980년 이후 매년 ‘심상해변시인학교에 동참했다. 우리들은 담임시인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낮에는 독자들을 반별로 생활과 창작을 지도하고 밤에는 전국에서 모인 시인들과 술잔을 나누면서 회포를 풀거나 문학토론이 계속된다. 어떤 독자는 너무 감상적이어서 혜화동 백작을 개인 면담하고 인생과 사랑과 시를 포괄적으로 교감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해변을 떠나온 후에도 혜화동에서 지속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심상시인회 회장과 『心象』지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그가 회장 재임시에는 내가 사무국장을 맡아서 업무를 보좌했다. 그는 전국에서 시행되는 심상맨들의 행사에서는 그 인기가 단연 우위를 차지한다. 그는 시이면 시,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와이담이면 와이담 등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그의 재담과 정감은 일품이라는 칭송이 더높았다.
그는 최근 시집『작은 것들에 대하여』를 발간하면서 ‘여덟 번째 시집을 펴낸다 / 내 시의 꽃잎이 / 우리들 고단한 삶 위에 나려 무겁지 않기를, / 내 시의 햇살이 소중한 생명의 의미를 환히 밝히기를, / 꿈꾸고 상상하면서 / 부끄럽고 떨리는 마음으로 시를 드린다’고 ‘시인의 말’에서 다시 겸손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사 그가 고교 교사 시절에 동료들은 대학으로 진출하는데 왜 거절하고 남아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평범한 교사로 정년을 했는지 이해할 것 같다. 그가 천성적으로 간직한 선비기질의 시인으로 살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먼저 너의 물 한잔이 되어, 너의 / 갈증을 축여주고 싶다는 속내를 들켜라 / 그러면 출렁이는 생명의 충만함으로 / 같이 흘러가리라’고 작품 「동행」에서의 어조와 같이 그의 간결한 언어 속에서 분사하는 ‘나’와 ‘너’의 ‘동행’이 깊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지금도 혜화동 로타리 까페 ‘엘빈’에 가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레드 와인도 한 잔 할 수 있다. 그는 지금도 이렇게 여유만만으로 세월을 살아가는 낙천주의자이며 낭만주의자의 대표로 남아 있다. 다만, 이 시간에 마주 앉은 묘령의 여인(혹은 문인)은 누구일까가 항상 긍금한 대목이다. 영원한 백작이여. 건강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