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三空先生 自敍傳
한 인생실기의 제 2 장
5. 8 15 해방과 함께 광복은 왔는데
6. 짧은 군인 생활
7. 교단으로 돌아온 태호(泰鎬)
5. 8.15 해방과 함께 광복은 왔는데!
8.15 해방
1945년 8월 18일 입암시장(立岩市場=面所在地) 에서 ‘8. 15 해방 광복 면민대회’(解放 光復 面民大會)를 한다는 벽보가 곳곳에 나붙었다. 대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앞으로 전개될 사건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면민대회 주최자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죽장면민의 분포는 면소재지인 입암리에 향반(鄕斑)으로 안동 권씨(權氏) 70여 호가 집단가문을 이루고 있었고, 마을 앞 시장에 각성상인(各姓商人)들이 30여 호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면내(面內) 각 이동(里洞)에는 특별히 집단씨족 마을은 없었으나 각 동리에 살고 있는 손씨(孫氏)들이 20여 호가 있었다. 그 외에는 각성(各姓)으로 된 면민(面民) 분포였다. 그러다 보니 면민 대회는 자연히 권씨 청장년들이 주축이 되어 거행하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손씨들의 친 인척 중 몇 사람이 왜정관료로 있었기에 이번 광복대회에 자연히 불참하게 되었다.
그러면 면민 대회 이야기로 들어가서 그날 동원인원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백 명이 운집하였다. 죽장면이 생긴 이래로 그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했다.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개가 옥양목 두루마기에 중절모자를 쓰고 있었으나 갓을 쓰고 나온 사람도 간혹 있었다. 그런데 수백 명 대회참석자 중에 특별히 눈에 띄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앞에서 말한 총각노인과 태성이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은 머리를 빡빡 깎았기에 지금과 같은 장발머리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총각 노인은 언제부터인가 길러온 머리가 엉덩이에 철렁거렸고 6개월이 넘게 길러온 머리를 이발을 하고 포마드까지 발라 가리마를 하고 나온 태성이를 모든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태성이를 아는 사람은 손에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태성이는 정말 기뻤다. 그때서야 거짓으로 미친척했다는 것을 알게 된 온 마을 사람들도 기뻐했다.
그러나 그러한 해방의 기쁨이 가라앉으면서 무정부 상태의 치안유지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면사무소에는 ‘죽장면 인민위원회 사무소’라는 간판이 붙고 지서에는 ‘죽장 인민위원회 치안대’라는 간판이 걸리면서 지방 청년들 몇 사람이 치안대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주동자들은 대부분 입암 권씨네 젊은이들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얼마동안 유지되었다. 체계가 잡히면서 정식 치안대원이 상부로부터 임명을 받아 경찰로서 치안을 담당하게 되면서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으나 사회불안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러한 와중에 태성이는 그해 9월 어느 날 그 당시 유학자(儒學者)로 명망이 높으시고 특히 성리학(性理學)과 역학(易學)에 능통하신 응도 최석기(應道 崔碩基) 선생을 찾았다. 40여 리가 되는 영천군 자양면 용화촌으로 응도 문하(應道門下)에서 한문수학을 위해 떠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봄에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도우면서 본격적으로 한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47년 봄 태성이는 외할아버지의 중풍을 치료하기 위해 외가댁으로 가서 침구(針灸)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기를 며칠이 지나 이웃 마을에 소문이 나면서 4,5명의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라면 어떠할는지 몰라도 그 4,5명의 중풍 환자 중 한 사람이 태성이가 걸식 첫날 문전박대(門前薄待)하던 그 기와집 아들이었다. 환자 집에 들어선 태성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방에 앉아 있는 노인은 그때 그 자리에서 ‘밥 다 먹고 없데이’ 하던 그 노인이 아닌가! 정말 이상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태성이는 그런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모르는 척하고 침을 놓기 시작했다. 외가댁에서 20리 가까이 되는 그곳을 하루 한 번씩 내왕하면서 한 달 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치료를 했다.
어느 때는 환자친구들이 놀러 와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 “작년 이때쯤 미친 듯도 하고 그렇지 않은 듯도 한 그 젊은 친구 말이야 아무래도 이상해! 지금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자 옆에 있던 또 한사람이 그 말을 되받아 “글쎄, 그 사람은 미친 것이 아니야. 미친 척 하면서 오늘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일거야” 이렇게 주고받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태성이는 이분들이 ‘나를 알아보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낯이 달아 오르기도 했다.
외할아버지는 노환이라 완치는 어려울 것 같았고 호정(戶庭) 출입을 할 수 있을 정도에 대소변을 보시는 데에는 크게 불편하시지 않을 정도가 되셨다. 치료를 그만하기로 하고 다른 사람도 한 달 가까이 치료를 하다 보니 완치는 아니더라도 이웃집을 다닐 수 있게는 되었다. 태성이는 그분들에게 탕약처방(湯藥處方)을 해주고 적절한 운동과 물리적 치료방법을 가르쳐 주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10월 1일 소위 대구 10.1사건은 경북 곳곳에서 그 규모가 미미하게 일어났으나 영일군과 영천군에는 약간의 인명 사상자도 생겼으며 물질적으로는 많은 손실을 보게 되었다. 그러한 폭동의 주동역할을 한 사람들이 1년 전에 죽장 인민위원회 치안대에 관여하던 사람들이었다는 것 때문에 태성이네 마을의 폭풍의 불씨가 되었다.
10월 13,4일 새벽으로 기억이 되는데 경찰지서 앞에 전조등을 끈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그리고는 완전 무장한 경찰 수십 명이 온 마을을 수색하고 폭동용의자를 연행하여 떡메 치듯 몽둥이질을 하니 잡혀온 그들의 비명소리는 온 마을을 소름끼치게 하였다. 그 후로도 그러한 일이 여러 번 있으면서도 태성이네 집에는 한 번도 들른 일이 없었다.
그 10.1 폭동사건 이후로 민심은 좌(左)․우(右)로 갈라져 ‘빨갱이’의 시초가 되었다. 태성이네 마을에서도 소위 좌익계열이라는 사람들 수십 명이 목숨을 잃게 되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몇 년 동안 기피생활을 하면서 고초를 감내해야 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태성이 형제들은 이러한 악순환을 무사히 이겨 나왔다.
태성이 아버지께서 ‘적선지가에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하시며 그 말씀을 따라 사셨기 때문에 그 아버지 음덕(陰德)의 그늘로 많은 인명살상의 와중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1947년 봄 태성이는 고향집에서 10 여리길 되는 합덕리(合德里)로 분가(分家)하여 살림을 차리고 2년 가까이 아버지 슬하에서 습득한 한의(漢醫)로서 한약방을 개업하였다.
왜정 때의 한의는 별도의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약종상(漢藥種商)의 면허증을 가지고 의술(醫術)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해방이 되면서 1년에 한 번씩 치르던 한약종상 면허시험이 없어졌기에 한의학도들은 개업의 기회가 없어졌다. 그러나 태성 이는 그의 아버지 음덕으로 경찰지서와 면사무소에서 묵인하였고 뿐만 아니라 합덕리에는 한약방이 없었기에 마을 사람들이 환영하는 형편이어서 무난히 개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면허 한약방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여가가 있을 때면 오후 방과 후에는 죽북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 선생님들과 정구를 친다던가 하면서 교사들과 친교를 가졌다. 그러면서 자기도 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에 틈나는 대로 국민학교 교사에 필요한 공부를 했다.
해방 후 일본 교사들이 본국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교사가 태부족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죽북국민학교도 마찬가지였었다. 태성이가 교사지망을 위해 공부한다는 것을 알게 된 죽북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이 하루는 태성이를 불렀다.
“권 선생. 한의원 선생도 선생은 선생이지만 진짜 선생님 노릇 안 할래요” 하고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운을 뗐다. 태성이는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의아해 했다. “권 선생께서는 요즈음 한글공부를 많이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은 우리학교에 선생님이 부족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년 봄에는 교사 채용시험도 있을 모양이니까 지금부터 준비를 하시는 것이 어떨까 해서 임시교사로 모실까 합니다.”
태성이는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지망하던 직업이고 명년쯤 교원채용시험도 있다고 하니 무엇보다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1949년 4월 1일부로 교단에 선 태성이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애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 생남(生男)도 했다. 부모님들은 무척 기뻐하셨다. 물론 태성이도 기뻤다. 혼인한지도 어언 4년여가 되었는데 가정낙과 부부애를 모르던 그였으나 새 생명이 태어남에 거기서 조금은 안정을 찾는 것 같기도 했다.
다음해인 1950년 2월 경상북도 채용교원 시험에 합격한 그는 그해 5월 1일부로 같은 면내에 있는 두마 국민학교로 발령을 받고 그 임지에서 6. 25동란을 맞게 되었다.
6. 25동란 후 한 달 가까이 인민군 점령 하에 들어간 그곳은 대개의 젊은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갔으나 태성이네 형제들은 얼마쯤 피난을 가다가 밤사이 선발대 인민군 치하가 되어버렸기에 부득이 되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 만에 되돌아오면서 집에 들렀을 때는 이미 집은 폭격에 맞아 큰 웅덩이로 변하고 흔적도 없었다.
그 길로 죽북국민학교에서 얼마 안 되는 곳에 있는 ‘총각노인’댁으로 가서 피난생활을 했다. 낮에는 주먹밥 한 덩어리로 산 속으로 들어가 나무덩굴 밑에서 지내다가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서 새우잠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같이 아침밥을 먹고는 산으로 가는 생활이 되풀이 되었다. 이러한 나날이 한 달여 동안 계속되다가 마침내 국군이 수복하였기에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집이 폭격에 맞아 없어졌기에 입암서원(立巖書院)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일제당(日躋堂)에서 살림을 꾸리고 3년여 동안 살다가 옛터에 지금의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일제당에서 3년여 동안 살림을 꾸리고 살게 된 것은 우연 아닌 어떠한 인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인연이란 야화(野話)가 아닌 실화(實話)이기에 여기에 적어 본다.
일제당은 서원 서편 약 200m 거리에 있는 탁입암(卓立巖)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기 1600년 경자(庚子) 선조 33년에 건립한 정자(亭子)로 서기 1907년 정미(丁未) 순종 원년에 왜구(倭寇)의 침입으로 소실하게 되었던 것을 그 후 7년이 경과한 1914년 갑인(甲寅)에 복원하였다.
우연이 아닌 인연이라고 한 것은 그 복원역사(復原役事)의 주역(主役)을 태성이의 할아버지(휘 丙烈)께서 하셨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때 그의 할아버지 연세가 40세였으니 한창 일하실 나이였었다. 그 후 할아버지는 1938년에 별세 하셨는데 12년이 경과한 그날에 그 자손의 피난처가 되었다는 것은 그 무슨 야릇한 인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국군이 수복한 후에 한 달 여 동안은 인민군 점령 하에서 피난을 안 나간 사람 또는 못나간 사람 중에서 젊은이들이 부역(附逆)하였다는 이유로 많은 희생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태성이네 형제는 그 피난도중에 인민군에 잡혀서 한두 번 짐을 날라준 사실도 있었으나 그 역시 그의 아버지 음덕으로 무사히 피해갈 수 있었다. 여기서 웃지 못할 한 가지 이야기는 태조가 교육공무원이었기에 그것이 탄로 날까봐 침통(針筒)을 항상 가지고 다녔는데 그것이 피난의 한 방편으로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침통 덕을 봤다는 것이다.
태성이는 피난 후 직장에 복귀하여 그 이듬해 1951년 8월 징집영장을 받고 제주도로 육군 제 2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6. 짧은 군인 생활
1951년 8월 25일 육군 제 2훈련소(제주도)에 입대한 태성이는 1주일도 못되어 이질(痢疾)에 걸렸고 그 후 15일 만에 부산 5육군병원으로 후송하게 되었다. 제 2훈련소 훈련병 생활 20여 일을 끝으로 육지로 건너온 사연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때의 제주도 경관을 태성이가 보고 느낀 대로 적어보고자 한다.
그때의 제주도야말로 말 그대로 삼다도(三多島)였었다. 첫째가 풍다(風多=바람이 많다)로 사방(四方)이 바다로 되어 있으니 때도 없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황소도 넘어진다는 태풍이 수시로 불어 닥치니 지붕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제주도 집들은 높지가 않고 지붕은 팔뚝 굵기의 새끼줄로 바둑판 모양으로 엮여 있었다.
둘째가 석다(石多=돌이 많다)로 집집마다 돌담이요 밭마다 돌담이었다. 한라산에서 뿜어 올린 현무암으로 가는 곳마다 검은 돌담을 쌓아 놓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삼다 중에 석다가 제주도의 명물 아닌 명물이라 할 것이다.
셋째로 여다(女多=여자가 많다)다. 옛날부터 제주도에서는 남자는 집안에서 아이를 기르며 가사를 돌보고 여자는 들과 바다에서 농사꾼으로 또 해녀로 일하면서 가계를 꾸려왔다 한다. 만일 남자가 바깥에서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이 큰 흉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지면 남편을 바깥일 시켰다는 것이 큰 욕이 되었다고 한다. 그와 같은 풍속에다 8. 15 해방 후 좌우익 사상전에서 공비토벌로 남자들 가운데 젊은 남자는 전멸이 되다시피 하였으니 그야말로 여다가 되지 않으려야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삼다(三多) 외에 또 한 가지 진풍경이 있었다. 식수(食水)를 구하려 여자들이 목이 가느다란 항아리를 짊어지고 10리 20리를 걸어서 물을 길으러 다녔는데 처음 보는 사람으로서는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와 같이 식수가 귀한 제주도에서 물을 잘못 마시다가는 이질에 걸리기가 일쑤였다. 육군훈련병치고 운수 좋은 사람이 아니면 이질에 걸리는 것이 다반사였으니 태성이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질에 걸린 태성이는 곧바로 의무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나아지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농변(濃便)이 혈변(血便)으로 변하여 탈항(脫肛)이 되었고 음식을 먹으면 먹은 그대로 설사를 하게 되니 기진맥진해서 걸음을 걸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의무실이래야 천막 안에 1자로 된 판자마루 위에 모포를 깔고 그 위에 환자 두 사람이 모포 한 장을 같이 덮고 지내야 할 형편이었다. 약이래야 ‘마이신’에 지설제 약간이 고작이었으니 전란 중(戰亂中)에는 열악한 훈련병의 처우도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날 같은 모포를 덮고 있던 이질 환자가 새벽이 되면서 두세 시간 극심한 통증으로 앓다가 두 다리를 쭉 뻗으면서 고요히 영면(永眠)에 들고 말았다.
같은 담요 밑에서 십여 일을 같이 지내던 사람이 죽어가니 태성이에게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담요에서 나올 수도 없었다. 시체가 된 그와 함께 그날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지 두세 시간이 지난 새벽 다섯 시경에 시신은 들것에 얹혀 실려 나갔다.
그때 태성이는 속으로 다음차례는 자기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15일 이상이나 설사에 혈변을 하다 보니 탈수에 하체는 피골이 상접하여 걸음을 걸을 수 없게 되고 항문은 그대로 바깥에 내놓고 있어야하니 그는 운명의 시간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기다리던 운명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태성이에게는 호운(好運=좋은 운수)이 다가왔다. 늘 오던 위생병이 하루는 바뀌어왔다. 새로 온 위생병이 태성이의 명패를 보고는 첫마디 묻는 말이 “고향이 안동이오.”하는 것이 아닌가! 겨우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계급은 중사이고 성은 권씨였다.
바다건너 타향에서 그것도 육군훈련소 의무실에서 권가(權哥)라는 일가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병세를 자세히 물어보고 돌아갔다. 한참 후에 그는 직접 주사 한 대를 가지고 와서 놓아주고 ‘구와니찡’ 몇 알을 주면서 네 시간마다 한 알 씩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네 시간마다 와서 약 먹은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런지 이틀이 지나면서 설사는 멈춰지고 식욕이 조금은 회복되었으나 하체가 떨리면서 어지러워 걸을 수는 아직 없었다. 그러나 시일이 하루 이틀 지나면서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권 중사가 이런 말을 했다. “내일 환자후송은 끝이 났고 다음 주에 또 부산으로 환자후송이 있는데 그때 육지로 나가겠소? 나가겠다면 보내 줄 테니!” 하고는 태성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태성이는 눈물이 핑하고 눈언저리를 적셨다. 권 중사는 따로 대답이 없어도 그의 눈시울을 보고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돌아갔다.
운명의 그날이 다가왔다. 아침 일찍 위생병 한 사람이 태성이가 있는 병동으로 들어서면서 ‘권 태조’ 하고 이름을 불렀다. 그는 손을 들면서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병 두 사람이 담가(擔架=들것)를 들고 들어와서 태성이를 싣고 의무실 앞으로 갔다. 벌써 수십 명의 환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권 중사는 보이지 않았다. 인원점호를 끝으로 중환자와 일반 환자를 구급차 두 대에 나눠 싣고 출발하기 시작했다. 태성이는 차에 오르면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권 중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을 끝으로 권 중사, 아니 지금쯤은 영감이 되었을 그 권 영감은 이 세상에서는 지금껏 만나지 못했다 아마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사람의 인연이란 그렇게 허무하게 맺어지고 끝날 수 있기 때문에 인생무상이라는 숙어(熟語)가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태성이를 실은 차는 어딘가 이름 모를 자그마한 부두에 도착했다. 그리고 환자들은 자그마한 배에 올랐다. 그럭저럭 몇 시간이 지나 어둠이 만경창파를 검게 물들게 하고 저녁식사가 나오면서 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성이는 만감이 교차하였다. 20 여일 제주 생활은 정말 악몽(惡夢) 같았다. 그 권 중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기도 의무병실에서 같이 있다가 실려나간 그와 같이 실려 나가 한줌의 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그런 생각 끝에 눈앞을 스쳐 가는 권 중사의 모습은 만날 수 없는 환상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바깥을 모르고 배 안에서만 있었던 그는 밤낮을 분별할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부산에 도착한 것은 아침 해 뜰 무렵이었다. 그로부터 부산 3.1 육군병원에 도착하니 아침식사가 나왔다. 훈련소 의무대 병실에 비하면 식사와 부식은 말할 것도 없고 병실 환경에서부터 모든 질서가 잡혀 있었다. 군의관에서 간호여군들의 친절함 또한 병원생활을 처음 해보는 태성이로서는 훈련소 의무병실에 비해 너무나 감사했다.
어느덧 3.1육군병원에 온 지도 두 달이 넘어 이질 병은 완치가 되었고 수척하던 몸도 살이 붙어서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5육군병원으로 전속명령이 떨어졌다. 주위에서 말하기를 5육군병원으로 가게 되면 원대복귀를 곧 하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대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두 달이 넘게 3.1 육군병원에서 목격한 것은 매일 두, 세 트럭씩 실려 오는 일선(一線) 환자들이었다. 팔 없는 사람, 다리가 없는 사람, 심지어 화상으로 얼굴형체가 없는 사람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 실려 왔는데 그 비참한 모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한 환경에서 건강이 회복된 태성이로서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원대복귀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5육군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5육군병원으로 오게 된 태성이는 며칠 동안 병실내무반 생활을 익히면서 그 병실실장이라는 전(田)중사(경남 진주)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계급적으로 본다면 이등병이 감히 일등 중사와 가깝게 지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소리 같지만 그때 태성이의 나이는 25세가 되었으니 전 중사와는 연배(年輩)가 되었고 병실 내에서 대화상대가 되었던 모양인지 전 중사는 태성이를 무척 좋아했다.
5육군병원으로 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넘어 되었는데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 했다. 대부분 병세가 호전되어 비교적 건강이 회복된 사병들이라 대개는 원대복귀하고 간혹 제대(除隊)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병원 내에 ‘장티푸스’ 환자가 발생하여 비상이 걸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 두 사람씩 전염이 되면서 죽어 가는 사람도 한두 명 발생했다. 그러한 와중에 마침내 태성이도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다.
1차에서 15일 정도 앓다가 신열(身熱)이 내리는 가 했더니 음식 조절 등으로 재발하였다. 1차 때보다도 신열이 높아 체온이 40도를 오르락내리락 할 때 태성이를 면회하려 오신 분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였다.
3. 1육군병원에서 5육군병원으로 전속하면서 안부편지 보냈는데 한 달 후에야 떡과 엿을 가지고 면회를 오신 것이다. 면회실로 업혀간 태성이는 의자에 앉기조차 어려웠다. 몇 분 동안 아버지 얼굴만 보고는 아무 말 조차할 수 없이 그냥 업혀서 병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나중에 들은 말인데 그때 면회 오신 그의 아버지는 “그때 그 걸음이 마지막 걸음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병실로 돌아온 태성이는 그날 밤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신열이 오르면서 밤새도록 헛소리를 하였다. 전 중사는 의무실로 드나들면서 군의관과 간호원에게 간곡히 치료를 부탁하였다고 한다. 전 중사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그날 밤을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그 후에 주위에서 전해 들었다.
아무튼 한고비를 넘기면서부터 차차 신열이 내리고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으며 점차 회복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전 중사는 태성이를 주보(酒保=P.X)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이번 파수에 올릴 제대명단에 권형도 들게 되었으니 그리 알고 있어요.”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뜻밖의 소리에 태성이는 의아해하면서도 “그러면 언제쯤 제대하게 되는 거요?”하고 물었다. “아마 다음 주 내로 올리면 2월 중순경에는 특명이 내릴 것이요”라고 했다. 병실로 돌아와서 달력을 보니 아직 20여 일이 있어야 2월 중순이 되는 것이었다.
그 지긋지긋하던 이질과 장티푸스라는 병마를 벗어나면서 원기와 건강이 회복되어 갔다. 그러나 태성이는 그것이 불안하기도 했다. 혹시나 건강회복으로 제대 내신이 취소되지나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고 드디어 바라던 그날이 다가왔다. 1952년 2월 16일부로 제대특명이 났다. 6개월이라는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는데 태성이로서는 군인생활이라기보다는 병마 속에서 생사를 넘나들다가 살아난 시련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으로 극적인 인생역정의 한 장면이었다.
지금부터는 태성이는 호적상 이름이 태조(泰錯)가 아니라 태호(泰鎬)로 개명이 되었기에 그 경위를 약간 부언하고자 한다. 군에서는 호적 이름을 사용해야했기에 태성이가 아니고 태조로 사용해야 했다. 그런데 태성이의 제대증에 그 태조라는‘조(錯)’자가 ‘호(鎬)’자로 기재되어 하루아침에 태조(泰錯)가 ‘태호(泰鎬)’로 개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군번은 0642563번에 본적과 가족 인적사항도 그 밖의 모든 사항들은 틀림이 없었고 다만 ‘조(錯)’자의 ‘석(昔)’이 고(高)로 바뀌어 호(鎬)자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제대증으로 합법적 개명이 되어 그 후부터 현재까지 태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다음 장부터는 태호로 칭호하게 된다.
7. 교단으로 돌아온 태호(泰鎬)
1952년 11월 15일자 교사로 복직이 되면서 두마국민학교(斗麻國民學校) 근무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53년 12월 23일 둘째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 손자를 보현산(普賢山=태백산맥의 한 봉우리로 두마 마을의 앞산) 정기를 받아서 사주(四柱)가 특히 좋다 하시면서 귀여워하시고 영목(寧睦)이라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 이듬해인 1954년 4월 1일부로 모교인 죽남국민학교(竹南國民學校)로 전근발령이 났다. 그는 모교의 후배를 교육한다는 자부심에서 열심히 후배교육에 열을 올렸다. 6학년을 담임 했을 때는 방과 후에 집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밤이 늦도록 과외지도를 했다. 그 결과 죽장중학교 수석합격은 죽남국민학교가 차지했다.
1954년 7월 14일(甲午 6월 15일) 태호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오는데 갑자지 경찰지서에서 ‘사이렌’ 소리가 연속적으로 요란하게 울렸다. 보통 무슨 행사나 공지사항이 있을 때는 한 번 또는 두 번만 울리고 화재나 큰 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연속적으로 울리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지금 울리는 사이렌 소리는 틀림없이 화재나 사고의 사이렌 소리로 짐작이 되기에 여러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운동장으로 나와 동네 쪽을 바라보았지만 연기 나는 곳은 없었다. 그런데 지서 앞쪽에 있는 시장 쪽 사람들이 지서 뒤쪽에 있는 태호네 집 쪽으로 뛰어 가고 있었다.
그때 태호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쳐갔다. 태호는 500여m 거리를 뛰어서 집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이 마당에 모여 웅성거렸고 집 옆에 새로 짓고 있는 집 쪽에서 누군가의 등에 두 팔이 늘어진 채로 업혀 오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아직 호흡은 있었으나 의식은 전혀 없고 사지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 마을에 의원(醫院)이라고는 한의원 두 집이 있을 뿐 신(양)의원은 없었다. 한의원 중 한집은 약간의 신약을 갖추어 놓고 있었다. 응급치료로 그러한 약을 가지고 외상치료를 하였으나 그것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다. 대구나 포항에 나가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포항이나 대구로 나가려면 차편이 없었다. 지금 같으면 구급차라던가 택시 등 차편이 많지만 그때는 포항이나 대구에서 자동차가 와야 하는 형편이었으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주위 사람들은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오늘은 집에서 한약을 쓰라고 하였다.
태호는 그의 형에게 연락하는 것이 우선 급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의 형은 그때 병역을 기피하는 형편에 있었기에 집에 오는 것이 그리 용이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매부(妹夫)에게 연락을 하고 집으로 올 수 있는 조치를 취하게 연락하였다. 그날 밤 늦게 매부 내외는 왔으나 그의 형은 그 다음날에나 올 것이라고 하였다. 태호 바로 밑의 동생은 그 때 포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포항에 있는 의사를 데리고 오라는 연락도 취했다.
그날 밤을 지새우면서 그의 아버지는 점점 절망스러운 상태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조해맥(照海脈)을 비롯해서 사지말초가 차지면서 역맥(逆脈)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황한 태호는 한의원들을 불렀다. 그들 역시 진맥을 하고는 침통한 표정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오후 2시가 지나면서 무엇인가 말씀을 하시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마 마지막 유언인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가며 물었으나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태원아’ 하시면서 태호의 형을 찾는 것 같았다. 아마 마지막 가시는 길에 병역을 기피하고 있는 맏아들에게 무엇인가 하실 말씀이 있었던 것 같다.
태호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포항에서 의사를 데려 오라고 연락한 동생은 아직 기별이 없었다. 3시가 넘어서면서 목에서는 가래가 끓기 시작하였고 조해맥은 단맥(斷脈)상태가 되기 시작했다. 조해맥이 단맥이 되면 길어야 3시간 아니면 한두 시간을 넘기지 못하는 것쯤을 알고 있는 태호로서는 초읽기를 하는 마당에 무엇보다도 외로움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가슴에 아버지를 기대어 안은 체 몇 번이고 대문 쪽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형과 동생 그리고 의사는 오지 않았다.
1954년 7월 15일(陰 : 甲午 6월 16일) 오후 4시에 그의 아버지는 유언 한 말씀 없이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겨우 요수(夭壽)는 면했으나 7남매 중 4남매는 성취(成娶) 시키고 나머지 나이 어린 3형제를 남겨 놓았으니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태호의 가슴이 더욱 미여졌다.
그의 동생은 의사를 데리고 오다가 아버지의 운명소식을 전해 듣고 의사는 돌려보내고 저녁때가 되어서 왔다. 그리고 그 날 밤늦게야 남의 눈을 피해 그의 형은 누님 내외와 함께 왔으니 장남으로 임종(臨終)을 못함이 또한 가슴에 한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병역문제는 주위의 협력으로 기피해제를 받게 되었다. 그 역시 그의 아버지 음덕이 아니었더라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발적 사고로 불과 하루 만에 이 세상을 떠나시게 된 사연은 대략 이러했다. 태호의 아버지는 3형제 중 둘째로 그의 동생이 혼인한지 얼마 안 되어 아들 하나를 남겨놓고 나이 27세가 되던 해에 이 세상을 떠났다. 태호의 아버지는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되는 조카를 데리고 28세 청춘과수인 제수씨가 집 한 채 없이 이 집 저 집을 셋방살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리었다.
그러다가 그해에 태호네 집 옆에 있는 7,80여 평의 밭에 집을 지으려고 기둥을 세운 다음 알매를 받다가 집이 넘어지는 바람에 그 밑에 깔려서 참변을 당한 것이다. 그 때 태호의 재종숙(再從叔)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또 한 분은 약간의 타박상을 입었다 한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더 큰 참변을 당했을 것이다.
갑자기 당한 사태에 집안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그 형의 병역문제는 해제가 되어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나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부득이 가업을 이어 한의원을 해야겠는데 한약종상 허가제도가 없어졌기에 1년여 동안은 그냥 할 수 있었으나 주위에서 말썽이 일어나기 시작하다 보니 문을 닫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태호 본인의 가족만 해도 1956년 5월 4일(음 3월24일) 셋째 아들 영석(寧石)을 낳아 5명으로 늘었는데 형님 댁은 어머님과 동생들 셋에 조카들이 셋으로 모두 9명이고 보니 그 대가족의 의식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동생들이 중학교도 제대로 갈 수 없게 되었다.
태호는 여러 가지로 고심하기 시작했다. 첫째 생계가 문제인 것은 말할 것도 없겠으나 이렇게 국민학교 선생노릇이나 해서는 자신의 영달도 영달이려니와 아이들의 교육문제와 여러 형제들의 앞날 등이 걱정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교직에 안주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에 공감하면서 서울로 가기로 결심을 하고 회계학(會計學)과 부기(簿記)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1년을 넘게 공부를 하다 보니 주산실력도 1. 2급은 되었다. 그 전해부터 학교 기성회 회계 사무를 맡고 있었으므로 단식부기에 겨우 수지 계산서를 작성할 정도는 됐었다. 그러나 지금은 재무제표에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를 작성할 수가 있었으니 자신이 붙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 3년 대상(大喪)을 끝내고 그 다음해인 1957년 3월 25일 담임을 맡았던 6학년의 졸업과 동시에 학년말 방학을 이용해서 무작정 서울을 향해 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