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 연구실 연수도 있고, 아이들 개학일이라 '어린이와 문학' 여름연수를 못가지요...
그래도 자료를 나눠 읽으면 좋겠다 싶어 올려봅니다....
월간 <어린이와 문학> 창간 2주년 기념 여름 토론회
주제 : 한국 어린이 문학에서 새로운 경향으로 등장한 ‘어린이 문학과 대중문화’에 대하여
발제 : 박숙경 (어린이 문학 평론가)
토론 :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유영진 (어린이 문학 평론가)
사회 : 염희경 (문학 평론가)
날짜 : 8월17일(금)-18일(토)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명진리 안동문화답사촌 안동캠프
(자세한 설명 : http://www.andongcamp.com에서 대표 김창년 011-569-6178)
참가비 : 5만원(서울에서 전세버스 이용자는 7만원)
국민은행 365201-01-022497(예금주 : 이재복)
참가신청 : 참가비 입금하신 뒤 어린이와 문학 카페 http://cafe.daum.net/childmagazine의 <2007여름토론회방>에 참가신청 글을 올려주시고 전화 주세요.(011-9038-6757 박미혜)
<발제문>
보다, 읽다, 사귀다
― 대중문화 시대의 아동문학
박숙경
1. 이야기 공급원으로서의 아동문학
어린이책, 그중에서도 창작아동문학이 본격적 호황을 맞은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다. 90년대 전반만 하더라도 동화책은 이렇게 화려하지도 않았고, 유력한 출판사도 손에 꼽고, 시내 대형서점의 어린이책 코너도 한눈에 들어오는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저학년 동화 영역이 분리되고, 이전 시대와 변별되는 작가군이 등장하고, 학교에서는 논술고사를 대비한 독서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아동문학 시장은 몸집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아동문학의 양적․질적 성장은 이른바 386세대의 헌신 속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작가로, 제작자로, 책을 골라주는 부모나 교사로, 시민활동가로서 아동문학이라는 새 영역을 찾고, 자신의 성장과 아이들의 성장을 거의 동일시하다시피하면서 우리아동문학을 키워왔다. 최근 들어서는 경제적 불황 심리가 가중되면서 각 가정이 어린이책을 사들이는 비중이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는 학교 도서관이나 지역 도서관 확충에 대한 시민의 목소리가 높고, 지각 있는 어른들이 도와준다면 아이들은 책을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 사회에는 아직 남아있는 듯하다.
그러나 책으로 된 아동문학에 대한 ‘믿음’과 ‘희망’의 시기가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문자로 된 ‘이야기’, 또는 ‘책’은 이미 마이너한 매체가 되어버렸음에도, 아이들 주변의 어른이 그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어린이가 아동문학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실은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런 때가 오면, 과연 우리 아동문학은 지난 10여년, 길게 잡아 20년 간 곳간에 무엇을 쌓아놓았을까 점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곳간에 쌓아놓는다는 것은 바로 ‘이야기’를 말한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5,6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아동문학의 황금기를 맞이했으나, 그 이후에는 텔레비전, 만화, 애니메이션에 압도되어 ‘이야기계’의 왕좌, 다수파로부터 밀려났고 그 사실을 아동문학인도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그 시기에 일본은 자기네 아동문학의 주요한 클래식을 다수 내놓았고, 그 중 상당수는 지금까지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남아있다. 시기의 차이는 좀 있을 수 있겠으나 우리 아동문학도 조만간 짧은 활황기를 마치고 겨울에 들어갈 수밖에 없을 텐데, 과연 그 이후까지 가져갈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꼽아보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과연 우리 아동문학은 어린이와 직접 마주섰을 때, 그들에게 사랑받고, 지지받을 수 있는 이야기를 충분히 생산해왔을까. 그리고 어린이가 책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이 대세가 되고, 휴지만큼 이야기가 펑펑 낭비되는 세상에서 아동문학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의의를 증명해야할까.
2. 보는 아동문학
평범한 영화 관객인 나조차도 최근 헐리우드 영화계의 흥미로운 변화가 눈에 들어온다. 이야기감이 떨어진 헐리우드가 만화와 아동문학으로 열심히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각종 맨(Man)류의 영웅물은 비주얼과 캐릭터가 확실하니 영화화하기 쉽겠고, 아동문학은 역시 스토리가 발군이기 때문일 것이다. 금방 기억나는 것만 해도 해리 포터 시리즈, 나니아 연대기, 샬롯의 거미줄, 찰리와 초콜렛 공장, 닥터 수스,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 판의 미로, 구덩이, 트리갭의 샘물 등이 있고, 동화는 아니지만 그림책 슈렉이 애니메이션화되었고, 모리스 센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도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아동문학과는 직접 관련이 없을 수 있으나 가까운 일본의 예도 흥미롭다. 최근 우리 출판계에서는 ‘일류(日流)’라 하여, 젊은이들이 일본 소설에 매료되는 현상을 걱정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 ‘일류’는 단지 소설, 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TV드라마,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 여러 매체에 녹아서 수용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나 또한 개인적으로 2년 전부터 일본의 드라마, 영화, 소설을 조금씩 즐겨왔는데, 그것들이 각각의 매체로 갈라지지 않고 그냥 일본적인 ‘이야기’를 즐겼을 뿐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렇듯 일본의 문학(굳이 말하자면 ‘대중문학’)과 TV드라마, 영화, 만화 사이의 ‘미디어 믹스’ 경향은 그 역사적 뿌리가 깊어서, 각 매체 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이미 오래 되었고,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가리기가 어려울 경우다. 아동문학 역시 다르지 않아 영화화되거나, TV드라마가 된 작품은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우리나라에 최근 번역된 작품 중에서 사소 요코(笹生揚子)의 쿨보이(원제 : 천국을 만드는 방법)은 NHK에서 드라마화 되었고, 유모토 카즈미(湯本香樹實)의 여름이 준 선물(원제: 여름의 정원)은 우리나라에서도 판권을 사서 영화화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문학적으로 깊은 감동을 주거나, 작품이 좋아서 영화화하는 것이 순서였지만, 요즘은 거꾸로 문학이 영화와 친연성을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아직 일본은 ‘문학을 원작으로 하면 투자 받기가 좋다’고 할 정도로, 적어도 영화나 TV드라마의 이야깃감을 문학에서 찾는 예가 많다. 영화화하면서 원작이 훼손, 왜곡되는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래도 아동문학을 비롯한 문학 전반이 다른 매체의 이야기 공급원으로서 어느 정도 기능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베스트셀러 아동문학을 영화화하는 것은 이미 확보된 독자층에 일정부분 묻어가려는 전략이 있음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에 앞서, 영화계가 아동문학 영역을 기웃거리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곳에 먹음직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특한 설정과 인물, 변덕스런 어린이 독자의 흥미를 끝까지 붙잡는 이야기의 흥미진진함은 다른 매체의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는 기껏해야 인구가 5천만도 안되니 미국의 헐리우드나 1억2천에 육박하는 일본의 영화, 드라마 시장만큼의 규모를 갖추기에는 한참 멀고, 그런 까닭에 다양성 또한 그만 못할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는 동화에서 다른 매체(TV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로 넘어간 작품의 예를 많이 들 수 없다. 권정생의 몽실 언니야 너무도 유명하고, 강아지똥도 단편 애니메이션화되었다. 위기철의 아홉 살 인생과 정채봉의 오세암도 뒤이어 떠오르고, 아직 완성은 안되었으나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도 현재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중이다. 문선이의 양파의 왕따일기는 EBS TV드라마로 방영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최근에는 ‘청룡열차를 탄 것처럼 속도감이 있고 변화무쌍한 로드무비형 이야기’로 상찬 받은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가 나오자마자 영화감독 두 명에게 대쉬를 받았다는 소식도 들린다.
내가 만일 영화나 TV드라마 제작자라 가정하고 우리 동화를 본다면 어떨까? 애석하지만 ‘어린이물’이란 딱지를 붙인다면 모를까, 일반 독자로서는 썩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가 아직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편의상 영화나 TV드라마 제작자를 가정했지만, 사실 요즘 독자들(어린이를 포함)의 대체적 경향이란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즘 독자는 그 누구라도, 초반부터 자신의 흥미를 빼앗아 끝까지 쉼 없이 달려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원한다. 그런 이야기라면 문학이건, 영화건, 드라마이건 어떤 매체로 접하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내가 영화 제작자라면 당장 영화화 하겠다’고 감탄할 만한 아동문학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흥미진진하고 가슴 졸이는, 속도감 있는 이야기가 적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황선미의 샘마을 몽당깨비와 마당을 나온 암탉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었고,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TV드라마로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위기철의 무기 팔지 마세요는 TV애니메이션 시리즈로, 권정생의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계시네요는 드라마로 보고 싶었다. 김우경의 수일이와 수일이, 안미란의 씨앗을 지킨 사람들도 실사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판단의 경계가 모호한 작품들이 종종 나온다. 이야기로 보면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도록 흥미진진하고, 읽는 동안 눈앞에서 영화나 TV드라마로 곧장 바뀌어 보여지는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들은 그야말로 ‘이야기성’이 빈곤한 허다한 동화들 속에서 돋보이고, 다 읽고 난 뒤에 ‘아, 재미있다’는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까 말한 것처럼 ‘내가 제작자라면 반드시-’ 이런 생각까지 도달하는 작품이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런 경우는 아동문학이 영화나 TV드라마 같은 다른 매체의 영향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수용한 예에 해당될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우리가 주목해왔던 작가, 작품 중에서도 그러한 예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최나미의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 걱정쟁이 열 세 살에는 홈드라마에서 익숙한 템포의 회화, 다소 전형적이기도 한 가족간의 갈등이 작품을 읽는 재미를 북돋는다. 남찬숙의 받은 편지함과 안녕하세요는 당장 다음주 ‘드라마시티’ 단막극으로 나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김남중의 붕어 낚시 삼총사는 김수현의 사랑과 야망을 보는 듯한 선 굵은 드라마가 있었다. 이현의 단편 「삼일 간」이나, 박관희의 「다복이가 왔다」, 배봉기의 겨울날 같은 작품은 영화 쪽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시도된 다중 시점/ 화자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정도상의 돌고래 파치노는 첩보영화와 성장영화, 청춘물의 문법이 하나로 녹아들어 상당히 멋지고 흥미진진한 영화 한 편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위에 든 작품들은 모두 드라마와 영화를 책보다 더 즐겨보는 나 같은 독자의 눈에 쏙 들어오는 이야기들이다.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대사는 귀에 쟁쟁 울리고, 극적 긴장감이 있고, ‘읽는다’기보다 ‘보는’ 문학의 느낌이 강하다. 동시대의 여러 이야기 장르와 섞여가며, 주제면에서나 형식면에서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우리 어린이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 가치를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아동문학’이라는 일종의 게토에서 나와, 그 이야기성만으로 무한 경쟁을 벌여야한다면 과연 그 독자적 상상력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인정받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 나아가 다른 매체들이 ‘아동문학은 우리가 미처 모르던 이야기의 보고로구나’ 하는 동경과 감탄을 품어줄지도 의문이다.
문자 언어인 문학과 영상 언어인 영화, TV드라마, 이와는 별개로 영상과 문자가 합쳐진 만화는 사실 대립도, 경쟁도 아닌, 서로 다른 종목의 경기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한다는 점에서는 필시 공통분모가 생길 수밖에 없고, 또 그 공통분모의 영역에서 다종다양한 미디어 믹스가 일어난다. 이쪽저쪽을 가리고, 상호 영향 받은 부분을 골라내거나 분해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동문학 역시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제공하는 주요 매체인 이상, 다른 매체가 만들고, 제공하는 이야기에 함몰되지만은 않겠다는 긴장감, 독자인지 관객인지 분간 못할 이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독자적인 이야기를 내놓겠다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존심은 끊임없이 환기해야할 것이다.
3. 문자로 읽는 아동문학
시대적 대세는 이미 영상의 시대, 또는 멀티미디어 시대로 들어선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좋건 싫건 문학은 다매체 시대의 이야기 공급원으로서의 기능을 도외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앞장에서는 비교적 다른 매체로 쉽게 환원될 법한 문학 작품을 다뤄본 것이다.
그러나 엄연히 영상과 문자는 다른 매체이다. 아무리 대세가 영상시대로 갔다 하더라도, 문자 언어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영역은 존재한다. 영상이나 만화, 게임 등으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고, 읽는 보람과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 영역이 분명 있는 것이다. 영상 매체를 볼 때처럼 수동적이지 않고, 남들과 쉽게 공유하며 이게 내 감동인지 당신의 감동인지도 모를 그런 세계가 아니라, 온전히 작가와 나만이 은밀하게 나눠가질 수 있는, 그리고 외국어로도 번역되지 않을 특별한 경험은 문학만의 것이다.
영상이 만드는 이야기는 수용자가 자신의 상상력을 적극 개입시킬 여지가 거의 없는 일종의 기성품이다. 그러나 문자가 만드는 이야기 세계는 독자가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한 줄 한 줄을 놓치지 않고 상상력을 작동시키며,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구축하고 전개시켜야만 한다.이 과정을 습득하기까지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 이것이야말로 영상이 만드는 이야기와 문자가 만드는 이야기의 근본적 차이점이다.
물론 대부분의 쉽고 명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문자를 읽고 곧장 머리 속의 드라마마나 영화로 바꾸는 메커니즘이 쉽게 작동한다. 거의 자동이다 싶을 정도여서 내가 지금 문자를 읽고 있다는 자의식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문장이 투명해서 거의 느껴지지 않고, 곧장 머리 속에서 영상이 펼쳐지는’ 동화 문장을 바람직한 산문 문장으로 평가하곤 한다. 대개의 경우 이 말은 옳지만, 요즘처럼 ‘내 안에 텔레비전과 영화를 돌리는 자동재생기가 있는’ 경우에는 이 정의도 약간은 의심해보는 것이 좋다. 쉽고 명쾌한 것도 좋지만, 때로는 너무 손쉬운 이야기여서 금세 다른 이야기에 묻혀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문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영역을 지키고 개척하는 작가들의 존재는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 그리고 의미 있는 문학적 도전을 하는 작가․작품을 가려보고, 토론할 시야를 갖는 것, 정말 좋다고 판단된다면 그 세계로 아이들을 초대할 의지 역시 아동문학 주변의 어른들에게 요구된다. 대개의 경우 이런 작품들은 ‘스타일의 과잉’, ‘일반 어린이 독자로부터의 괴리’를 지적받는 경우가 많고, 또 정반대로 ‘문학성’이 높다는 이유로 일부 평단의 주목을 받아 (결과적으로) 평범한 독자들로부터 더 경원시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문자를 보고 상상력을 잘 작동시키는 어린이가 꼭 우수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자칫 ‘책을 읽는 아이는 뛰어나다’는 속물적 결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자 언어에 예민하게, 즐겁게 반응하는 아이가 있을 수 있고, 또 그런 즐거움과 호기심은 연습해서 익히면 그 맛을 더욱 잘 아는 것이기도 하다.
한 예로 김기정의 해를 삼킨 아이들이 있다. 이 작품은 칡넝쿨처럼 휘감기는 문체에, 옛이야기와 역사적 사실, 만화 속 인물까지 자유분방하게 패러디하면서, 단선적으로 드라마틱한 이야기와는 무언가 다른, 우리 근대사의 벽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벽화라는 것이 그렇듯 이 작품은 독자가 자신의 상상력, 배경지식이 되는 역사적 사실을 적극적으로 보충해가며 읽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이야기다. 이 작품이 처음 나왔을 때 논란의 초점이 되었던 것도 ‘어린이들이 혼자 읽기 어려워한다’, ‘작품 바깥의 지식이 없으면 이야기가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직 이러한 논란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쉽게 읽을 수는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스꽝스런 해학과 매력이 있고, 독특하고, 보통 다른 이야기책과는 다른 독법, 속도, 호흡을 요구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했기 때문에, 그전까지 조용했던 아동문학판에 신선한 질문을 던졌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반응한 독자와 어린이책 주변의 어른들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천천히 읽고 토론하거나, 즐겁게 빈틈을 채워 넣는 책읽기를 했더니 효과가 좋더라는 풍문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그의 도전이 헛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토종 해학에 대한 작가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어서 창비어린이 2006년 봄호에 실린 단편 「두껍 선생」과 최근 나온 고얀 놈 혼내주기로 이어지고 있다. 도무지 번역 불가능한 순토종 의뭉스러움을 보고 있자면 ‘내 모국어가 한국어라서 참 좋다’는 느낌을 종종 받곤 한다.
유은실은 예민한 언어 감각으로 어린이의 복잡한 심리를 잡아내는 단편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만국기 소년에 실린 단편들은 그야말로 한 줄도 허투로 쓰지 않고, 철저히 골라진 어휘와 문장이 촘촘히 엮어, 모호하지는 않으나 줄거리를 딱 이거라 간추릴 수 없는 독특한 문학적 경험으로 독자를 이끈다. 평소 습관처럼 휘익 읽어버린다면 필경 마지막에 가서 ‘앗, 내가 뭘 놓쳤지?’ 싶어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어야할 것이다. 꼼꼼히 행간까지 다 찾아 읽어야 비로소 작가가 의도했던 문학적 경험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다. 아버지의 파산 때문에 지하방으로 이사 간 아이가 오랜만에 손님이 온다는 엄마의 말에 즐거움 반, 기대 반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손님」이나, 낯선 외국 이름과 수도를 줄줄줄 외워 섬기는 같은 반 친구의 슬픈 이면을 응시하는 「만국기 소년」은 독특한 스타일이 곧 내용이 되고, 문자로 쓰여졌으나 단순한 말로는 쉽게 환원되지 않는, 단편문학만이 도달할 수 있는 이미지를 전한다.
최진영의 땅 따먹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례에 없을 법한 문학적 시도를 감행한다. 수다쟁이 참새 가족이 아침에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그것이다. 아빠 참새, 엄마 참새, 아기 참새가 각자 몇 장에 걸쳐 말을 쏟아내는데, 나중에 맞춰보면 그게 다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 거의 문자로 이루어진 서커스 수준이다. 땅 따먹기는 작품 전체로 보아서는 평가가 들쭉날쭉하고, 수다가 너무 시끄러워서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는 독후감도 들리곤 하지만, 부분부분 그야말로 문자만이 보여줄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을 새로이 열어젖혔다는 점에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영상언어로 쉽게 전환되지 않고, 문자 언어만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하는 작품들이 종종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은, 대개 이런 작품들이 독자를 가리기 때문이다. 아동문학은 대부분의 어린이들에게 친절히 열려있어야 한다는 사회 일반의 합의는 ‘독자를 선택하는’ 이런 이야기들에 그리 너그럽지 못하다. 그러나 무엇이든 빨리 빨리, 손쉽고 편한 쪽으로만 향해가는 세상에서 부러 느림의 가치를 찾는 사람의 존재가 귀하듯, 조금은 애쓰고, 긴장하고, 노력하여 익히면 더욱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문학의 세계는 소중하고 존재 가치가 있다. 문자 언어로 구축되는 이야기 세계는 이전보다 영역이 좁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보여줄 세계는 아직도 무궁무진하다.
<토론문>
동화는 자본의 이야기 곳간이 아니다
유영진
1. 들어가며
발제문을 보면 발제자 박숙경은 <어린이와 문학>이 기획한 대중문화와 어린이문학의 접변, 삼투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보다는 이른바 ‘대중문화 시대’에 어린이 문학은 어때야 하는가? 혹은 대중문화 시대에 어린이 문학은 어떻게 살아남을까에 대해 더 관심이 많은 듯 하다.
흔히 대중문화 하면 영화, 드라마, 스포츠, 가요, 만화, 광고, 인터넷 채팅이나 게임, 비보이 댄스, 장르소설 등을 떠올린다. 별다른 문화적 훈련 없이 대중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르와 매체는 모두 대중문화로 볼 수 있으리라.
무차별적으로 쏟아 부어지는 이런 가볍고 감각적인 대중문화 앞에 이른바 자신의 내면과 사회 체제와 이데올로기의 문제 나아가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깊이 들여다 볼 것을 요구하는 본격 예술은 그 설 땅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박숙경은 제목에 딸린 부제를 통해 지금을 ‘대중문화 시대’로 규정한다. 7~80년대의 민중 문화, 90년대 이후 대중문화 시대에 이어 현재 ‘매니아 문화’가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음도 덧붙이고 싶다.
박숙경은 1, 2장을 통해 대중문화 시대에 서사성의 확보를 통해 타 매체에 대한 이야기 공급원의 역할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1) 그리고 3장에서는 문자 언어만의 특성을 좀 더 강화해 낼 것, 4장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할 것을 주문한다.
물론 우리 동화의 서사의 힘이 강해져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주장에는 필자도 동의한다. 하지만 이 발제문에는 따져 보아야 할 것들이 꽤 여럿 있다. 일단 다른 매체의 이야기 공급원이 되기를 자처했을 때 생기는 위험성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자.
2. 동화가 자본의 이야기 공급원이 되어야 하는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아도르노에 따르면 현대 예술은 아름다움과 조화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물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대 예술은 아름다움과 조화를 거부함으로써 물화된 사회 밖에 존재할 수 있고, 이렇게 밖에 존재함으로써 현대 사회를 비판할 수 있다고 한다. 아도르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형상과 의미를 알 수 없는 현대 미술의 추상화 경향, 쇤베르크 같은 현대 음악의 불협화음, 베케트의 부조리 연극처럼 현대 예술이 난해해지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에 대항하여 추상화되고 의식적인 재현과 조화, 아름다움을 거부한 현대 예술은 ‘전위’화 되고 대중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필자 같은 범부들의 눈에는 “저게 예술이면 나도 하겠다.” 혹은 “저것도 예술이냐?”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그러한 비판마저도 체제의 품안으로 끌어들이고 상품화한다. 오히려 그런 현대 예술의 특징을 역이용하여 자본주의와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척’하면서 자본의 단맛을 즐기는 ‘예술가’들이 수두룩한 것도 사실이다.
어떤 시대든 그 시대는 자기 체제를 유지할 ‘신화’를 필요로 한다. 그 신화는 시대에 따라 시베리아 길리악 족의 곰 신화 같은 동물 조상신 신화일 수도 있고, 단군 신화 같은 건국 신화일 수도 있고, 조선 시대의 용비어천가일 수도 있고, 땡전 뉴스일 수도 있고, 노사모와 한반도 대운하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역시 자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신화를 필요로 한다. 이 신화는 황우석 같은 과학자의 모습으로 혹은 반기문 같은 관료의 모습으로, 박세리나 박찬호 같은 스포츠 영웅으로, 이명박 같은 건설업자의 청계천 신화, 한반도 대운하 건설의 신화로, 가수 비나 동방신기 같은 아이돌 스타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드러난다.
신화는 고정 되지 않는 유동성으로 인해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다. 신화는 서사시로, 오페라로, 소설로, 판타지로, 피억압민족을 단결시키는 응집소로, 파시스트의 이데올로기로, 애니메이션과 인터넷 게임의 소스로 끊임없이 변신할 수 있다. 마치 덩어리 상태의 점토처럼 빚는 이에 따라 이 에너지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분출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체제 하의 대중들은 자신의 체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보다는 자본주의적 신화를 통해 체제의 순응자가 된다.
신화는 서사를 갖고 있다. 동화는 어린이들의 신화, 어린이들의 서사 문학이다. 자본은 이런 신화를, 서사를, 스토리를 필요로 한다. 해리포터 시리즈와 같은 판타지야말로 자본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공급원’으로서의 서사 문학의 한 극한을 보여준다.
해리 포터 같은 작품은 영화, 게임, 레고, 캐릭터 산업 등으로 이윤의 무한 자가 증식을 해낸다. 문학의 상업화를 넘어서 아예 산업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 공급원’으로서의 동화는 거꾸로 더 위험하다.2)
여기서 박숙경이 언급한 『샬롯의 거미줄』이나 『나니아 연대기』나 『찰리와 초콜렛 공장』이나 『위험한 대결』 모두 이런 현상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다. 이런 서양 어린이문학의 클래식 혹은 베스트셀러라 할만한 작품들은 자본주의 문화 산업의 이야기 공급원의 역할을 충분히 해냄으로써 체제 유지에 충실하게 기여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린이문학은 독자를 끊임없이 의식해야 하는, 독자와 소통하지 못하면 존립 근거를 잃어버리는 장르적 특성 때문에 자본 앞에 한없이 가볍게, 비무장의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현대에 들어 예술 장르들은 ‘자기 지시성’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즉 자신이 예술 작품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외부에 ‘앞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작품 내부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술에서의 다다이즘이나 팝 아트, 미니멀리즘 등이 바로 그런 예일 것이다.
예술가로 명명된 이들이 ‘이게 예술 작품이요. 이게 예술인 이유는 바로 이러이러한 철학과 사상 때문이요.’ 라고 말하면 이미 공장에서 만들어진 변기를 갖다 놓아도, 전광판에 글씨만 새겨놓아도 예술 작품이 되는 시대가 현대인 것이다. 앞서 아도르노의 말처럼 대중과 소통이 어려워질수록, 소통을 거부할수록, 예술의 본질에 접근하게 된다는 게 현대 예술이다.
그러나 어린이문학은 어린이들과의 소통을 전제로 성립된 장르이다. 어린이가 없으면 어린이문학은 더 이상 어린이문학이 아닌 그냥 ‘문학’이 되고 만다. 어린이문학만의 고유한 독자성은 소실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독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매자로도 존재한다. 더군다나 구매자는 독자인 어린이 보다 어린이를 ‘양육하는 어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같은 괴기스런 삽화가 담긴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어린이에게 건네줄 어른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동화는 현대 예술이 지향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동화 작가의 머리 속에는 독자, 구매자가 사전 검열자로 무의식화 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이야기 공급원’이라는 부가가치가 어린이문학 동네에 활발히 생성된다면 처음에는 신나는 잔치판이 벌어질지 몰라도 결국은 우리 어린이문학을 고사시키는 심각한 독약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서사를 강화함으로써 타 매체의 이야기 공급원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발제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린이문학을 자본주의 문화 산업 체계의 한 부속이 되겠다는 선언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서사를 담고 있는 동화 장르의 특성상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좋은 작품은 「강아지똥」3)처럼 다른 산업으로 부가가치를 생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서사 장르가 갖고 있는 원죄와 다름없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결과일 뿐이지 목적이어선 안 된다.
이제는 1~2장에 담겨있는 글에서 단순지엽적인 딴지를 걸어볼까 한다.
1장에서 “이러한 아동문학의 양적 질적 성장은 이른바 386 세대의 헌신 속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라고 했다. 필자도 이 견해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헌신이 과연 긍정적 역할만 한 것일까? 그 당시 ‘386 세대’들은 틀림없이 시대의 진보를 위해 어린이 문학에 헌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헌신 속에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을 경험한 자기 자신은 속물적인 ‘대중’과는 다르다는 자부심, 그리고 자기 아이에게 좀 더 좋은 것을 주겠다는 이기적 욕심이 무의식중에 자리 잡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무의식들은 IMF 사태 뒤 갑자기 밀어닥친 어린이책의 활황기를 통해 또다른 형태의 상업주의로 휘발하지는 않았을까?4)
어린이문학과 출판 문화, 어린이 도서관 운동 등을 몇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도서시민단체의 활동과 역할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은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도서시민단체들 및 앞서 말한 ‘386 세대’들은 자신들이 의도와 무관하게, 혹은 자각하지 못한 채 교육상업주의 혹은 진보상업주의의 하수인 노릇을 하진 않았는지 한번쯤 뒤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자신은 오류가 없다는 무오류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어린이문학의 융성을 이룬 ‘386 세대’들에게 진지하게 되물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박숙경은 일본의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도 ‘겨울’이 오기 전에 곳간에 이야기를 쌓아야 한다고 한다.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필자는 이 견해에 대해 흔쾌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일본이 어린이문학 활황기에 ‘주요한 클래식을 다수 내놓았고, 그 중 상당수는 지금까지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남아있다.’는 말은 출판 자본이 해야 할 말이지 비평가가 해야 할 말은 아니다. 이런 곳간론은 자칫 동화의 산업화를 촉구하는 발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어떤 시대가 와도 꾸준히 아이들에게 ‘읽히고 팔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상품화와 산업화에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는 어린이문학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든 중심을 잃지 않도록 예술성과 비판적 인식력을 확보하는 일일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예술성과 비판적 인식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토론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2장에서는 ‘이야기감이 떨어진 헐리우드가 만화와 아동문학으로 열심히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썼다. 물론 그런 면도 있으리라. 1급 시나리오를 쉽게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높아져 가는 스타 배우들의 개런티,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영화 제작 비용 때문에 이른바 ‘안전빵’으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이미 대중으로부터 검증받은 만화나 동화와 같은 ‘레디 메이드’ 매체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리라.
하지만 동화의 영화화에 대해서는 이야기의 고갈 보다는 상업적 대상으로서 ‘아동’의 재발견이 더 큰 요인이 아닐까? 동화가 갖고 있는 이야기성 때문에 헐리웃이 동화를 주목하기 보다는 블루오션으로서 ‘아동’을 발견하고 그 아동을 적극적으로 시장으로 불러들이려는 기획 속에서 동화가 영화의 소재가 된 것이 아닐까?
어떤 글에서 우리나라 영화인들은 ‘아동’을 발견하고 있지 못하다고 애석해 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영구와 땡칠이』같은 영화도 백만을 돌파했는데, 『트랜스포머』같은 영화는 우리 여름 영화 시장을 초토화하고 있는데, 우리 충무로는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말이다. 여기서 ‘아동’이란 예술적 탐구의 대상이 아닌 걸어다니는 이황이나 세종대왕의 현현이리라.
그리고 박숙경은 또다시 일본의 예를 들며 “예전에는 문학적으로 깊은 감동을 주거나, 작품이 좋아서 영화화하는 것이 순서였지만, 요즘은 거꾸로 문학이 영화와 친연성을 보이기도 한다.”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간다. ‘거꾸로’ 라면 ‘문학이 영화와 친연성을 보이기도 한다.’라고 하지 않고 “거꾸로 영화가 깊은 감동을 주거나 좋으면 문학화 된다.”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이런 영화를 먼저 만들고 소설이 되는 경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바 영상소설 혹은 기획소설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바로 그런 예이다.5) 하지만 상상력의 특성상 소설이 영화가 되었을 때는 성공 확률이 높아도 영화가 소설이 되었을 때는 성공 확률이 낮아서 이런 시도는 더 이상 이뤄지지 않고 있지 않나 싶다.
3. 문체나 스타일 보다 더 중요한 것
3장 <문자로 읽는 아동문학>에서 박숙경은 똑같은 이미지를 무차별적으로 제공하는 영상 장르와 달리 적극적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발동시켜야 하는 문자 예술의 특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어쩐지 이 글에서는 문자 예술로서의 문학의 본질에 대한 탐구 보다는 단지 문학의 한 요소에 불과한 문체와 스타일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박숙경은 이런 문체와 양식상의 독자적 성취를 이뤄낸 작품으로 김기정의 『해를 삼킨 아이들』과 유은실의 『만국기 소년』을 높이 평가한다. 김기정의 장기라 할 수 있는 ‘번역 불가능한 순토종 의뭉스러움’이라는 해학적 문체의 성과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동의한다.
그러나 박숙경은 김기정의 『해를 삼킨 아이들』을 평가하며 ‘아이들과 함께 천천히 읽고 토론하거나, 즐겁게 빈틈을 채워 넣는 책읽기를 했더니 효과가 좋더라는 풍문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그의 도전이 헛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라며 배경 지식 없이는 온전히 이 작품을 소화하지 못한다는 기존의 비판을 감싸 안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좋은 어린이문학 작품은 배경 지식 없이 그 자체로도 완결되어야 하고, 배경 지식이 있으면 좀 더 풍요롭게 해석될 수 있는 열린 구조를 갖고 있어야 한다. 마치 클라인씨의 병처럼 말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읽었을 때, 그리고 청소년기에 읽었을 때, 어른이 되었을 때 각각 새로운 감동과 기쁨을 줄 수 있는 문학이 진정 뛰어난 작품인 것이다. 오히려 이런 문체와 양식상으로 대중 문화와 구별되는 작품으로 더 적절한 예가 되는 작품은 고재은의 『강마을에 한번 와 볼라요?』가 아닐까?
한 때 권정생의 『몽실 언니』를 한국전쟁에 대한 배경 지식 없이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있을까? 내가 느낀 감동을 아이들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역사적 배경 없이도 ‘몽실이’라는 한 아름다운 인물에 매료되어 작품에 몰입했고 나와 같은 차원의 감동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어른과 함께 하는 ‘빈칸 채워 넣기’ 없이도 그 스스로 완결된 것이다. 그리고 어른과 함께 하는 ‘즐겁게 빈틈을 채워 넣는 책읽기’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들은 자칫 동화를 교육과 계몽의 도구로 보는 교육상업주의로 함몰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짚어두어야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탐구해야 할 문자 예술로서의 문학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이런저런 견해가 존재하겠지만 결국 문학이란 자기 자신,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 민족, 국가를 그리고 우리가 늘 옳다고 여겨왔던 시스템과 가치 체계를 의심하고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이 아닐까? 문학은 인간학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예술 장르가 아닐까?
문체나 스타일 같은 형식과 기법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대중 문화 시대의 현실 어린이문학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는 아니다. 더 중요한 건 끊임없이 ‘이 시대에 과연 문학은, 어린이문학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아닐까 싶다.
4. 담장 위를 걸어가는 동화 작가
4장 <캐릭터를 사귀는 아동문학>에서 박숙경은 “아이들 스스로 찾아내어 정신없이 빠져드는, 어른이 우려할 정도로 인기 있는 아동문학이 우리에게 없었다는 것은, 높은 문학성의 작품이 그간 한편도 없었다는 것만큼이나 걱정스런 노릇이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린이문학의 문제라기보다 어린이를 교육의 대상으로 ‘제압’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구조적 한계가 아닐까? 아이들 스스로 찾아내어 정신없이 빠져드는 ‘책’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각종 귀신 이야기들 책이 있고, 우리 반 학급문고 책꽂이에 꽂아두면 한 학기 만에 너덜너덜해지는 ‘동화책’이 있다.
이어서 박숙경은 “문턱이 낮고 친절한 대중예술이 적절히 공존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아야 건강성을 유지하듯, 아동문학 역시 ‘진실’과 ‘깨달음’을 일러주는 진지한 문학의 영역과 특별한 목적 없이도 즐겁고 신나는 오락적 이야기가 공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어서 “지난 10여 년 간 우리 아동문학도 나름 대중 아동문학 선언을 하고 시리즈를 표방한 작품들이 나오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플루토 비밀 결사대』를 평가하며 각 주인공들의 개성적 캐릭터를 확보하지 못하면 ‘대중 아동 문학은 계속 답보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며 순수 아동문학과 대중 아동 문학을 구분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 독자와 쉬운 소통을 전제로 하는 어린이문학 자체가 이미 ‘대중 예술’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대중 아동문학 선언’이나 순수 아동 문학과 대중 아동 문학과 같은 이분법적 구분은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다.
아마 필자의 이런 생각에 대해 어린이문학은 ‘대중문학’이 아니다 라고 화를 낼 작가분들이 여럿 있을 거라 생각된다. 어린이문학이 대중문학이냐 아니냐, 어디에 더 가까이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민중문화와 대중문화가 대척에 서 있던 시절에는 대중문화 자체에 부정적 개념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중문화의 시대가 만개하며 대중문화란 말은 가치중립적 개념이 되었다. 이제는 좋은 대중문화와 덜 좋은 대중문화, 그리고 타락한 대중문화만이 존재할 뿐이다.
동화 작가는 대중문화, 특히 타락한 대중문화 쪽으로 바람이 심하게 부는 담장 위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걸어가고 있는 존재이다. 담장 위의 길이 넓고 평안할수록, 담장 앞으로 찬란히 빛나는 황금의 길이 펼쳐져 있을수록 중심을 잃고 타락한 대중문화로 떨어지기 쉬운 모순된 존재가 바로 동화 작가들인 것이다.
박숙경은 『해리 포터』시리즈 인기의 비결은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역시 캐릭터’에 있다고 하며, 우리 어린이문학 또한 ‘허구를 모방’하는 ‘캐릭터 소설’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한다.
극단적으로 개성화 된 ‘캐릭터’ 창조는, 박숙경이 <프렌즈>나 <거침없이 하이킥>의 예를 직접 들어 설명해주듯, 대중문화의 전형적인 전략이다. 과연 이런 ‘성공적인 캐릭터’들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캐릭터 소설’로서의 ‘캐릭터’의 강조는 앞서 말한 ‘이야기 공급원’으로서의 어린이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개 ‘이야기 공급원’이 되는 동화나 그림책은 서사의 힘 뿐만 아니라 구매자의 지갑을 열게 할 매력적인 캐릭터를 갖고 있다.
거대 자본의 힘에 맞서기 위해 자본의 전략을 빌리고자 했던 이른바 80년대의 ‘저항적’ 출판사들이 결국 자본의 힘에 먹혀버린 것처럼 대중문화 사회에서 꼼꼼하고 세밀한 반성적 성찰 없이 섣불리 대중문화의 전략을 빌리고자 하는 것은 그 위험성이 매우 크다.6)
물론 자본의 나팔수로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 어린이문학의 지나친 무거움과 엄숙주의에서 우리 어린이들과 어린이문학을 좀 더 자유롭게 풀어주고자 하는 박숙경의 선의를 부정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해리 포터』가 결코 우리의 역할 모델이 될 수는 없다. 이 시리즈의 성공은 이야기 자체와 캐릭터의 매력도 있겠지만 대중문화의 특징인 쏠림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특히 이 쏠림 현상, 냄비 현상이 지극히 심한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하나 더 생각해 보자. 만약 조앤 롤링이 동남아 작가였다면, 해리 포터 시리즈가 동남아 국가의 베스트셀러였다면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이만큼 잘 팔릴 수 있었을까? 해리 포터의 성공은 간접화 된 욕망, 수십 년간 서구를 이상적 대상으로 욕망하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물은 아닐까?
대중문화는 문화의 다양성과 쉽게 양립하기 어렵다. 대중은 각성된 개별자들의 집합이 아니라 수동적 군중의 덩어리이다. 마치 양은 냄비가 끓어오르듯 한 순간에 달아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 대중문화의 특징이다. 우리는 그 허상에 속지 말아야 한다.
5. 나오며
발제자의 귀한 노고와 진정성을 외면하고 이것저것 말꼬리만 붙잡고 늘어진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창조적 오독이란 말이 있듯, 내 오독이 더 풍요로운 토론을 생산해낼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문학의 본질은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반성적 사유가 제거된 문학 비평은 더 이상 문학이 아니다. 나 역시 내 생각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 그러면 발제자가 언급하지 않은 타 대중문화 장르와 어린이문학의 접변, 삼투 현상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이에 대해 섬세한 논의를 펼칠 능력이 내게 있었다면 토론자가 아니라 발제자가 되었을 것이니, 그저 나는 짧은 생각을 간단히 정리하고 이 글을 마무리 짓겠다.
이미 소설은 영상 매체의 영향으로 빠른 장면 전환, 기괴하거나 강렬한 이미지의 차용, 속도감 있는 단문, 캐릭터 과잉 현상 등이 오래전부터 드러났다.
작품 외적으로는 출간 단계에서 기획과 홍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고뇌와 주름이 가득한 고독한 작가의 모습이 아닌 뽀샤시하게 포샵 처리된 훈남, 훈녀 작가의 사진은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필요조건 중 하나로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아예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작품이 쓰이기도 한다.
현재 어린이문학의 현실은 어떨까? 내가 보기에 아직 타 대중문화와의 삼투 현상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 듯 하다.7) 호러 영화나 호러 소설의 영향을 받은 듯한 방미진의 『금이 간 거울』, 컴퓨터 게임을 중요한 모티프로 차용하는 김종렬의 『노란 두더지』, 비보이 소년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담아내고자 한 신여랑의 『몽구스 크루』, SF소설의 계보를 이어보고자 한 박용기의 『64의 비밀』, 인터넷 메일이나 개인 홈페이지를 아이들 소통의 수단으로 활용한 남찬숙의 『받은 편지함』이나 최나미의 「진휘 바이러스」같은 작품들이 그 예들일 것이다.
물론 이 작품들 사이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단순히 소재나 기법의 차원에서 대중문화적 요소를 빌려다 쓴 작품이 있는가 하면, 대중문화 그 자체가 작품의 주요 모티프가 된 경우도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할 작가는 방미진이 아닌가 싶다. 그의 동화는 기존의 서사와 사뭇 다르며,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통해 인간 내면의 어두운 곳을 들춰내고 있다. 장르소설적인 냄새를 풍기면서도 단순한 통속물로 그치지 않고 인간에 대한 또다른 방식의 탐구를 이뤄내고 있다.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문화는 유동적인 것이라 본격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경계는 무 자르듯 잘라지지도 않고, 시대에 따라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남미의 통속 춤곡이었던 탱고는 피아졸라와 같은 작곡가를 통해 본격 예술의 경지에 올랐고, 미국의 전형적 대중 예술이었던 재즈는 마일즈 데이비스와 같은 연주자를 통해 고급 예술로 대접받게 되었다.
서로 다른 장르들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문화가 변해가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화적 순혈주의는 결국 자기 목을 스스로 조르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 소설가, 정신과 의사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동시나 동화를 발표하고 출간하는 것은 아주 반가운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이렇게 반듯한 이들만 동시나 동화를 쓰는 건 좀 유감이다.)
자, 이제 두서없는 이 글을 마무리 짓자. 어떤 대중문화적 요소들을 어린이문학 속으로 받아들이든, 혹은 대중문화 시대에 어린이문학의 생존을 걱정하고 살아남기 위한 이런저런 처방을 내리든,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문학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이 어린이문학의 본질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동화가 자기 자신과 자기 체제를 끊임없이 비판해야 하는 문학예술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잃고, 자본주의 문화 산업 체계 속으로 완전히 편입될 경우 어린이문학의 쇠락은 매우 급격하게 진행될 것이다.8) (67장)
--------------------------------------------------------------------
1) 토론자는 응당 발제자의 의도를 자기 마음대로 재단해 읽지 않고 최대한 섬세하게 발제자의 의도에 접근해서 읽어내야 된다 생각한다. 나름대로 발제자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아둔한 필자인지라 발제문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오독은 이 토론회 자리에서 바로 잡혔으면 한다.
2) 박숙경의 발제문에서 가장 위험한 생각은 바로 이 부분이다. 발제문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동화가 다른 매체의 이야기 공급원으로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굳이 월트 디즈니판 그림 동화 이야기를 꺼내는 건 독자를 무시하는 일이리라.
3) 『강아지 똥』이 아닌 「강아지 똥」인 이유는 원작이 동화집 속에 실린 단편 동화였고, 이 단편이 그림책 『강아지 똥』으로 그리고 애니메이션 <강아지 똥>으로 부가가치를 생성해 가며 모습을 바꾸어갔기 때문이다.
4) <어린이와 문학> 2월호에 실린 필자의 졸고「주변부 것들의 귀환」-『니가 어때서 그카노』(남찬숙) 서평에서도 언급했던 이야기이다.
5) 이 영화는 1989년 7월에 개봉되었고, 책은 표지에 ‘임정진 기획소설’이란 부제를 달고 6월에 출간되었다. 표지 뒷면에는 이 영화의 주연이었던 이미연의 사진이 배경으로 처리되어 있다. 영화와 소설의 상업적 시너지 효과를 노린 당시로서는 성공적인 기획이었다.
6) 여기서 가장 대중적인 ‘만화’ 장르로 가장 진보적인 담론을, 그것도 ‘철없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펼쳐내고자 하는 토론자 김규항의 생각이 매우 궁금하다.
7) 대중문화의 영향은 어린이문학 보다는 지식정보책 분야에서 매우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듯 하다.
8) 어린이문학에 대한 타 대중문화의 영향은 아직 작품 내적으로는 그다지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TV 홈쇼핑이라는 대중 매체의 등장, 유통 구조상의 외적 변화들은 어린이문학의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기에 이를 더욱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어른들 책은 홈쇼핑에서 요구하는 적절한 가격의 세트로 구성되기도 어렵고 판매도 어려운데 반해, 청소년을 위한 논술 대비 교양 시리즈라든가 그림책 시리즈 등은 세트 구성도 용이하며, 어린이 책을 교육적 도구로 생각하는 통념이 강하고 전집 시장이 여전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홈쇼핑의 파괴력은 만만치 않다. 특히 그림책 분야에서의 이런 변화는 창작 그림책의 심각한 위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믿을만한 도서시민단체들이 추천해온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들이 가득 담긴 우수한 그림책 수십 권이 3-40퍼센트 할인된 가격으로 텔레비전 화면 위에 어른거릴 때 흔들리지 않을 부모들이 몇이나 있을까?
4. 캐릭터를 사귀는 아동문학
우리 아동문학이 활황을 맞은 지 10여년이 지났다지만, 그 동안 아동문학 주변의 어른이 개입하지 않고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황선미, 이금이, 이상권, 채인선, 김중미, 박기범 같은 작가들의 베스트셀러들은 아무래도 어른들이 먼저 읽고, 아이들에게 권했는데 아이들도 마침 좋아했다는 보는 것이 아마도 옳을 것이다. 그 역시 화목한 풍경이긴 하나, 그래도 아이들 스스로 찾아내어 정신없이 빠져드는, 어른이 우려할 정도로 인기 있는 아동문학이 우리에게 없었다는 것은, 높은 문학성의 작품이 그간 한편도 없었다는 것만큼이나 걱정스런 노릇이다. 어른의 중매가 없으면 아이들의 사랑을 스스로 얻지 못하는 아동문학이란 끔찍하다. 아동문학 작품이 모두 어린이 일반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린이 독자 대중의 전반적 사랑과 지지를 얻는 이야기는 적게나마 꼭 있어야 한다. 일반 문화계도 상업성, 대중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는 순수예술과, 문턱이 낮고 친절한 대중예술이 적절히 공존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아야 건강성을 유지하듯, 아동문학 역시 ‘진실’과 ‘깨달음’을 일러주는 진지한 문학의 영역과 특별한 목적 없이도 즐겁고 신나는 오락적 이야기가 공존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외국산이긴 하지만 해리 포터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은 눈여겨볼만하다. 해리 포터는 그야말로 세계의 아이들이 스스로 세운 베스트셀러이고, 아이들은 그 세계의 일원이 되기를 갈망했다. 어른의 개입이나 추천 없이 자신들끼리 돌려보고, 주인공들에 대해 밤이나 낮이나 이야기를 나누고, 일년이 짧다 하면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기다린다. 해리 포터의 인기 비결에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더욱 불이 붙는 인기의 비결은 역시 캐릭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신기한 마법만으로,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스토리만으로 이만큼 긴 시간 동안 인기를 끌기는 어렵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독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만큼이나 해리, 헤르미온느, 론 같은 캐릭터의 안부를 기다리는 것이다.
물론 진지한 소설에서도 등장인물의 성격이 잘 살았는가 아닌가를 두고 ‘캐릭터’란 말을 쓰긴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캐릭터’는 그와는 약간 구별을 해야 한다. 전자가 상대적으로 스토리에 종속되며 스토리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등장인물’ 이라면, 후자는 이야기가 ‘캐릭터’로부터 나오는 식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캐릭터와 ‘캐릭터 소설’은 구분해야한다. 이 때의 ‘캐릭터’란 다분히 일본화된 영어다. 일반적인 근대 소설과 캐릭터 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 근대 소설이 현실을 모방한다면, 캐릭터 소설은 허구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을 오히려 낯설게 여기고, 허구 속 인물을 더 친숙하게 느끼는 현세태를 반영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인간 배우가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연기한다) 이 캐릭터는 현실적 인물 그 자체가 아니라, 등장인물의 특정한 성격적 측면을 기호화한 것이다. 시트콤 프렌즈나 거침없이 하이킥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미국의 인기 시트콤 프렌즈가 10시즌을 마지막으로 종영했을 때, 미국인들은 정말 자신의 십년지기 친구를 떠나보낸 듯한 상실감에 시달렸다 한다. 웃고 즐기는 오락물이되, 단순히 웃어넘기고 소비해버릴 수만은 없는 찐득한 친근감은 잘 만들어진 캐릭터물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이고 즐거움이다.
아동문학 역시 그래야하지 않을까? 아동문학은 어린이의 친구가 되어야한다면서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정작 우리 아동문학은 어린이 독자들이 ‘허구 속 내 친구’로 느낄만한 캐릭터를 만드는 데 지독히 인색하거나 형편없이 서툴렀던 것이 사실이다. 근대 아동문학사를 통틀어 봐도 그나마 기억에 남는 건 방정환의 ‘창남이’와 현덕의 ‘노마’ 연작, 조흔파의 고교 얄개 정도가 전부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고민, 자기 성찰의 계기를 얻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는 일상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오락용으로 읽는다. 어린이 독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언가를 배우고 깨닫기 위해서만 아동문학을 읽는다면 아동문학은 또 다른 이름의 족쇄가 될 것이다. 딱히 의미가 있지는 않아도 그냥 순수하게 오락적인 이야기, 자신을 투영하거나 혹은 동경할만한 캐릭터가 있고, 그렇게 그 세계의 일원이 되어 즐기는 가운데 심신의 피로를 덜 수 있는 대중적 아동문학은, 우리 아동문학이 꼭 애써서 성취해야할 분야이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 아동문학도 나름 대중 아동문학 선언을 하고 시리즈를 표방한 작품들이 나오곤 했지만, 여전히 어린이 독자들에게 사랑을 흠뻑 받는 캐릭터는 만들어내지 못한 형편이다. 고양이 학교는 최근 2부에 이르기까지 긴 호흡을 이어오고 있으나, 신화와 역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스케일의 무대 설정, 화려한 무협적 판타지에 비해 캐릭터는 빈약한 편이어서, 캐릭터의 매력이 독자를 2부까지 기다리도록 만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플루토 비밀 결사대도 추리소설의 오락성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으로 1권에 이어 2권도 상당히 호평을 얻었다. 그러나 정작 추리물임에도 범인 맞추기가 너무 쉽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비밀 결사대’의 캐릭터들이 두루뭉실해서 도통 구별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밀결사대’가 한 자리에서 말하면 누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이니, 이런 상태로 이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모처럼 개척된 우리 대중아동문학은 계속 답보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여섯 살의 어린이 독자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는 시리즈물의 매력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새로운 이야기책을 읽는 것은 모르는 사람들만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 같지만, 친숙한 시리즈라면 내 친구들이 잔뜩 모인 방에 들어가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고 말이다.
마법을 쓰고, 신기한 세상을 보여주는 것만이 어린이의 흥미를 끄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들이 각자 마음에 드는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는 것, 그러면서 진짜 현실에서도 마음이 맞는 새 친구를 만드는 것. 이 또한 이야기가 독자에게 줄 수 있는 마법일지 모른다.
5. 그래도 끝까지 문학이 갖는 힘
아이들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인터넷의 세계로 가버렸고, 시대적 대세 역시 문학을 외면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문학은 멋있고 힘 있는 매체임에 틀림없다. 문자만으로 구축되는, 다른 매체로 환원되지 않는 문학적 경험은 인류가 문자를 포기하지 않는 한 영원히 개인의 은밀한 즐거움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꼭 ‘문학’이란 멋지고 진중한 이름에 메이지 않더라도, 글을 써서 이야기를 구현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직업적 작가가 된다면 출판사와의 관계 때문에 조금 번거로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문학만큼 남의 눈치 덜 보고, 자본의 개입을 덜 받는 매체도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글이란 복잡다난한 이야기의 세상에서 민첩히 대응하기 좋고, 모험을 감행하기에도, 고독한 작가의 길을 걷기에도, 독자들의 전폭적인 애정을 얻는 인물을 만들기에도 아무 문제가 없는 환상적인 마법 지팡이다. 이 마법 지팡이를 갖고 무엇을 얻어내는가는 전적으로 펜을 쥔 작가의 몫이 될 것이다. (*)
<토론문 2>
영혼을 파괴하는 시절의 아동문학
김규항
아동문학에 대한 식견이라곤 아이에게 동화책을 골라주는 정도인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아동문학 자체보다는 아동문학을 둘러싼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삶이 현명함을 잃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주요한 것 하나는 우리가 사는 현실이 중립적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현실은 대개 어떤 쪽으로든 편향적이며 그걸 제대로 인식하지 않을 때 거꾸로 우리 삶이 편향에 빠지게 된다. 나름대로 열심히 진지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거대한 지배체제의 시스템에 놀아나는 ‘불쌍한 바보들’이 되는 것이다. 군사 파시즘이 폭력과 권위주의로 지배하는 시대엔 웅크리고 있어도 정신은 함락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자본의 시대엔 어느새 우리 영혼까지 파고든 자본의 가치관들이 우리를 스스로 굴종하게 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아이들에 관한 모든 활동이나 생산물들은 그 양식이나 외형과는 상관없이 독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이른바 ‘민주화’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다.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절차로 보는가 분배나 계층 같은 좀더 구조적인 차원으로 보는가에 따라 의견이 좀 다르긴 하지만, 적어도 개인의 자유가 몰라보게 진전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어디를 가든 무슨 말을 하든 함부로 제한받거나 구속받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옛 군사독재 시절보다 오히려 더 퇴보한 사람들이 있다. 누구일까? 바로 아이들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아이들에게만은 자유가 있었다. 마음껏 뛰어놀고 어른들의 강제가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느리고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아 보이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정서와 인간적 면모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을 보라. 그들은 감옥에서 지내는 수인들과 다를 바 없다. 평균적으로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이른바 교육열이 높은 지역에선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아이들은 경쟁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지내게 된다.
과거식 어린이 탄압, 즉 폭력이나 권위주의적 방법을 통해 아이들의 자유와 인권을 구속하는 일은 이제 적어졌고 누구나 비판적이다. 이를테면 아이들을 심한 매로 다스리는 교사는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이른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훨씬 더 강도 높은 구속이 이루어지는 오늘의 어린이 탄압은 전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 탄압은 이른바 ‘아이의 미래’라는 강력한 명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 이후, 특히 IMF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무한경쟁 체제로 변화하면서 아이들이 경쟁의 감옥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경쟁의 감옥에서 중요한 건 인간적 면모가 아니라 경쟁력이다. 아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상품으로 길러지는 것이다. 옛날엔 아무리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부모라 하더라도 아이들에겐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너 하나만 잘났다고 되는 게 아니다.” “너보다 약하고 불쌍한 동무를 보살펴야 한다.” 그러나 이젠 진보적인 부모들도 아이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못한다. 가르친다고 해도 초등학교 고학년쯤이면 끝이다. 동무는 곧 경쟁자이며 경쟁자를 존중하라는 말은 패배하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치 온 세상이 다 그런 줄 알지만 세계 어디에도 아이들을 이렇게 키우는 사회는 없다. 군사 파시즘에서 빠져나와 민주화의 기쁨에 취한 우리는 급격한 자본화의 바람에 별다른 경계가 없었다. 불과 일이십년 사이에 한국인들을 돈과 외형적인 가치에 미친 사람들이 되었고 아이들은 아예 처음부터 경쟁 기계로 키워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교육을 말하고 아이들과 대중문화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아동문학의 현실과 전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 한국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좋은 아동문학도 재미있는 아동문학도 아닌 자유다. 아동문학을 포함, 그들을 위한 어떤 가치있는 활동이나 생산물도 그들을 경쟁의 감옥에서 구출해내는 것보다 훌륭하진 않다.
발제자 박숙경 선생님은 90년대 초반부터 뚜렷한 아동문학의 양적 질적 성장이 이루어졌으며 그 주요한 원인이 그 시기에 아이들의 부모로 등장한 386세대 때문이라고 했다. 대체적으로 동의하지만 “386세대의 헌신”이라는 표현은 절반의 사실만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386세대는 오늘 아이들을 인간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일 또한 가장 헌신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가장 열심히 좋은 아동문학을 읽히고 생산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아이들을 가장 열심히 상품으로 키운다.
단적으로 말하면, 오늘 좋은 아동문학은 아이를 상품으로 키우는 데 아이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사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말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지나친 것처럼 느껴진다. 그 시기만 해도 좋은 책은 좋은 뜻으로 읽혀진다. 다시 말해서 그 시기만 해도 좋은 책이 좋은 책으로만 읽히지 않을 결정적인 긴장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무렵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좋은 아동문학은 달라진 교육문제(라는 말은 실은 ‘학벌 문제’를 듣기 좋게 바꾼 말이다)에 대처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지는 것이다. 사지선다형 시험에서 수능과 논술 등으로 입시가 변화하면서 텍스트를 읽고 제 생각을 쓰는 능력이 중요해졌는데 386세대 부모들은 그런 능력이 대학입시에 닥쳐서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이 아이에게 좋은 책을 사주기 시작했고 수요의 급증이 다시 아동문학의 활황으로 이어졌다. 마치 옛날 부잣집에서 운동권 과외선생을 구하는 풍경(데모하는 걸 가르치지만 않는다면 똑똑한 운동권 대학생이 좀 더 제 아이를 잘 가르칠 수 있다는 노회한 판단에 의한)과 비슷한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에게 좋은 아동문학을 읽히되 그 안에 담긴 가치가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갖은 노력을 다 한다. 권정생이나 박기범의 책은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책에 담긴 가치대로 사는 건 반대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아동문학에 담긴 가치나 감동이 실제 삶과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거나 상업적으로 사용되기만 하는 거라면 우리가 아동문학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건 매우 무망한 일일 수밖에 없다. 막막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정신적 가치들을 빨아들이는 이 자본의 시스템에 긴장해야 한다.
근래 교사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게 되면 꼭 빠트리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지배체제가 달라졌고 이제 진보적인 교사상도 달라져야 합니다. 단지 권위주의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아이들과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교사상은 군사 파시즘 시절엔 진보적인 교사상이었지만 이젠 교사의 당연한 요건일 뿐입니다. 오늘 진보적인 교사는 자본의 가치관과 긴장하는 교사입니다. 오늘 아이들에게 자본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교사, 경쟁력을 이야기하고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같은 사람을 위인이라 가르치는 교사는 옛날에 아이들을 억누르고 때리며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가르치던 교사와 같습니다.”
외람된 말이나 오늘 아동문학계 전반이 갖고 있는 소박한 현실 인식이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되새겨야 한다. 물론 훌륭한 사회적 태도가 훌륭한 아동문학을 만드는 건 아니다. 문학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같은 현실에서 훌륭한 사회적 태도가 결여된 아동문학이 훌륭하게 소구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가장 인간적인 내용이 가장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말이다.
아동문학이 다른 장르와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는 현실은 아동문학업계의 성원들에겐 매우 중요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들이 문학에 더 관심을 갖게 하는 일, 혹은 아이들이 향유하는 정신적 생산물들의 분배와 균형을 갖추는 일보다 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아동문학은 대체 왜 존재하는가? 아동문학은 아동문학가나 아동문학계를 위해 존재하는가, 어린이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런 고민을 통해서만 우리는 모든 속물주의적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몇 권이나 팔리는가, 얼마나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가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그런 외형적인 가치들에 집착하게 된 우리의 모습이다.
아이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작품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아무 죄도 없이 자본의 가치관에 빠진 부모와 어른들을 만나 수인처럼 살아가는 그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위로를 주는 작품은 얼마나 훌륭한가. 사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어린이책의 주인은 어린이가 아니다. 좋은 어린이 책은 '어른이 보기에 아이게 좋다고 여겨지는 책‘인 것이다. 그래서 ’좋은 어린이책‘은 아이들이 따분해하고 아이들이 흥미로워 하는 책은 어른들이 마땅치 않아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어린이 책의 주인은 어린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며 그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작품을 존경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작품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혹은 종종 의도적으로 담겨있는 상품으로서 욕망에 대해 우리는 성찰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시절에 걸맞은 죄책감과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발제자가 말한 “마법 지팡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끝)
첫댓글 어, 이제서야 봤네.. 자료실로 옮겨놓을게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