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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대 입대와 인천상륙
오승택 용사는 1930년 남원면 위미리 종정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건장한 체구였던 오 용사는 씩씩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만 18세가 되던 해인 1948년 4.3사건이 일어났고 11월 28일에는 무장대 습격으로 큰 피해를 당했다. 그 후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던 1950.6.25.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 때 오승택 청년은 분연히 일어나 국토방위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당시 모병 중이던 해병 제3기생으로 지원하여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 소재 해병 제3대대에 8월 5일 입영하였다. 그 때 오승택 견습수병은 기골이 장대하고 매우 강건하게 보였던지 배치된 곳이 제12중대(중화기중대) 제3소대(박격포소대) 제1분대 81밀리 박격포사수였다. 그 후 제3대대는 제주주둔 해병대 사령부를 비롯한 여타 해병들과 함께 1950.9.1. 오전 10시경 LST(탱크 수송함)에 승선하여 9월2일 진해에 도착했다. 9월 6일 부산항 제1부두로 이동하여 가마니를 깔고 노숙에 들어갔다. 이 때 미해병 제1사단에서 1개연대분의 군수물자를 배정해주어 해병대는 흰 글씨로 왼쪽에는 KMC, 오른쪽에는 해병대 그리고 정면에는 앵커가 그려진 철모, US라고 쓴 국방색 작업복, 누런색의 외투, 군화 및 내복까지 완전 신품으로 보급 받아 착용했다. 그러고 나니 위엄이 있었고 단정한 용모가 되었다. 그 뿐 아니라 배낭, 탄띠, 수통 등과 각종무기가 공급되어 잔뜩 묻은 그리스를 닦아내자마자 동래 사격장에 가서 M1 소총을 가지고 8발씩 실습사격을 해 보았다.
그 때 제3대대 제12중대에는 기관포, 바주카포, 81밀리 박격포 등 중화기들이 공급되어 닦아내고 조작법을 배우느라 더 고생을 했다. 오 수병은 81밀리 박격포를 인수하고 열심히 손질을 했다. 그러면서 ‘미제물자들이 좋기도 하다.’고 감탄했다. 드디어 오 수병이 속한 제3대대는 9월 12일 APA(상륙모함) pikaway호를 타고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작전명 chromite)에 상륙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이 상륙모함은 한반도 남서해안에서 맴돌다가 15일 새벽 만조 때 인천항에 접안하여 상륙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저녁 무렵에 그 높은 군함의 상갑판에서 그물 같은 하선망이 LCVP(상륙주정)에 내려졌다. 제3대대 해병들은 한발 한발 내려 상륙정을 타고 오후 6시 인천시 동구 만석동(작전지명 : 적색해안)에 상륙했다. 한국군으로는 처음으로 육지를 밟았으니 장병들은 벅찬 감회에 사로잡혔다. 제3대대는 인천 시내에 있는 잔적 소탕을 마치고 9월 17일 오전 4시 인천 도화동을 출발하여 경인가도로 전진했다. 그날 오후에 부평역 서북고지에 이르렀더니 경인 국도를 따라 북한군 전차 4대가 뒤에 보병을 이끌고 동쪽에서 오고 있었다. 이를 어떻게 처치하느냐로 고민하고 있을 때 그 부근 고지에 진을 치고 있던 미해병 바주카포가 불을 뿜더니 적 전차들을 보기 좋게 격파시켜 버렸다. 그러자 불시에 전차 4대를 잃은 북한군은 잠시 당황하다가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식으로 공격 태세로 나왔다. 미 해병대는 이 토벌을 해병 제3대대에 인계하였다. 이에 따라 제3대대는 맹호처럼 적진에 좌충우돌하며 돌진하자 적은 영등포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 김포지역 탈환의 효자인 중화기의 위력
9월 17일 밤 제3대대는 김포비행장을 탈환하자 이곳에 미해병 제1사단사령부를 설치했다. 따라서 제3대대는 미해병사단 직할 부대가 되었고 더불어 미해병사단 작전참모의 지시를 받고 행동하게 되었다. 그 이튿날 9월 18일 저녁 무렵에 제3대대는 금단 4거리 옆에 있는 고지에 진을 치고 1개 중대는 신리삼거리 뒷산에 1개 중대는 고촌리 뒷산에 배치했고, 오 수병이 속한 제12중대는 신리를 감제할 수 있는 야산 후면에 배치되었다. 초가을 하루가 지나고 19일, 찬 이슬이 내리는 미명이 되었다. 제3대대는 인근 마을 주민으로부터 유익한 정보를 제공받았다. 그 내용은 지금 북한군이 신리야산 숲속에 집결하여 주먹밥을 먹고 있다는 첩보였다. 김윤근 대대장은 정중철 제12중대장에게 긴급지시를 내렸다. 아직 병사들은 포술이 숙달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신리야산의 적을 박격포로 격멸하라고 하였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즉각 개시하라고 재촉하였다. 그러자 정중대장은 전해만 제3소대(81밀리 박격포)장에게 명령하고 소대장은 또다시 제1분대장과 제2분대장에게 공격토로 하였다. 그러자 제1분대 오승택 사수는 시급히 부사수, 포판수, 탄약수 등과 함께 단단한 땅을 골라 81밀리 박격포를 거치하였다. 분대장의 발사 명령이 떨어지자, 오 사수는 첫발을 쏘았다. 얼마 안 지나 신리야산에 ‘꽝!’하는 소리가 울렸다. 다시 제2탄 제3탄을 날렸다. 제2분대도 역시 81밀리 박격포를 계속 쏘아댔다. 그러자 초년병이 쏜 박격포탄이지만 보기 좋게 적에게 명중되어 적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벼가 무르익은 논두렁을 통해 도망을 쳤다. 이 정보를 미해병대 연락장교를 통하여 접수한 항공모함에서는 즉시 함재기를 출동시켜 도망치는 적에게 지총소사를 퍼부으니 줄줄이 쓰러졌다. 가히 한편의 전쟁영화를 방불케 하였다.
오 수병이 김포로 들어갈 때 일어난 가슴 아픈 일이 하나 있었다. 같은 위미리 출신 동기생인 현주환 수병이 적의 총탄에 명중되어 숨지고 말았다. 아무리 죽고 다치는 게 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병가상사라고 하지만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너무나 허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 정중철 중대장과 북한군 제107연대장의 죽음
신리를 공격하고 정중철 대위가 지휘하는 제12중대는 김포읍으로 노도같이 진군했고 그 첨병소대는 제2소대(바주카포)가 선정되었다. 그 뒤로는 오 수병이 속한 제3소대가 따랐다. 이광수 소대장은 3.5인치 바주카포를 휴대한 서석구 분대장을 선봉에 세웠다. 제2소대가 바야흐로 김포경찰서 가까이 접근해보니 적병이 담 벽에 숨어 아군을 기습하려는 게 관측되었다. 그 순간 서석구 분대장이 바주카포로 2발을 발사하자 명중되어 부서져 내렸다. 그러자 적의 일부는 쓰러졌고 나머지 생존자는 그곳을 빠져나가 그 주변의 콩밭과 무덤이 산재한 야산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적을 놓치지 않고 계속 추격하여 20여명을 생포하고 100여명을 사살했다. 이 와중에 특공대 엄순길 분대장은 북한군 제107연대장(중좌)을 생포했다. 이광수 소대장은 이 북한군 연대장을 포박하고 정중철 중대장의 지휘소(CP)로 연행했다. 그 때 제3소대도 제1.2소대를 지원하기 위해 중대CP근처에 이르렀다. 오 수병이 바라보니 그 중대 지휘소는 40여평 되는 창고 건물로 이번 전투에 지붕이 부서지고, 콘크리트 외벽만 남아있었다. 그 속에서 북한군 107연대장과 압수한 노란색 배낭 몇 개가 있었다. 그 누가 전한 말
인지는 모르나 그 배낭 속에는 북한군들이 서울 등지에서 탈취한 시계가 들어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창고 양쪽 입구에는 집총한 보초를 세우고 있었다.
이 때 정 중대장은 전령을 한 사람 데리고 카빈소총을 옆에 놓은 채 107연대장을 심문했다. “너희들이 후퇴하는 도하지점을 대라!” 그러자 연대장은 “포박을 풀어주면 북한군의 도하지점을 손으로 지도에 표시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거짓말에 속은 정 중대장이 그 자의 포박을 풀어주며 손으로 가리키라고 했다. 그러자 그 자는 손가락으로 그 지점을 가리켰다. 정 중대장이 무전기로 이를 대대에 보고하려고 하자, 그 자가 재빠르게 중대장 옆에 놓아 둔 카빈 소총을 잡고 순식간에 중대장을 향해 발사했다. 이렇게 중대장이 저격당하자, 전령과 양쪽 입구를 지키던 초병이 적 107연대장을 즉각 사살했다. 이 때 총소리를 들은 오 수병이 그 창고로 달려갔다. 도착해보니 정 중대장은 숨이 남아있었으나 중태였고 107연대장은 즉사했다. 즉시 중대장을 차에 태워 인천으로 후송했으나 중도에 운명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정 중대장 후임으로 임동근 중위가 부임해 왔다. 이렇게 김포작전은 중대장이 불의에 전사하는 일이 있었지만 적 연대장을 사살하고 2개 대대를 섬멸하여 생포 350명, 사상 200명이라는 전과를 기록했다.
□ 북진 작전 중 부상
경인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해병대는 10월 17일 인천에서 수송선 빅토리호를 타고 한반도를 남쪽으로 돌아서 10월 26일 원산 명사십리에 상륙했다. 해병 제3대대는 27일 함흥으로 갔다가 다음날 도보행군을 시작해서 남으로 계속 걸었다. 원산, 안변, 통천, 장전, 만물상, 금강산까지 내려갔다. 그 아름다운 경관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그 당시 해병대 사령부는 고성에 있었고 해병대 사관후보생 제3기를 모집 중이었다. 제 3소대장이었던 전해만 병조장이 사관후보생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정들었던 소대장과 헤어지게 되었다. 11월 15일 제3대대는 고성을 출발해서 함남 문천군의 마전리에 이르렀다. 그 다음에는 미군 트럭을 타고 당면한 평원국도를 확보할 목적으로 17일 평남 양덕군 동양면 상석리 양암산성터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진지를 보강하고 수비를 하던 중 아침 8시경 적 박격포탄이 진지에 날아와 제12중대 제3소대 제1분대의 오 수병은 다리에 파편상을 당했다. 애월면 출신 김석호 수병은 목이 거의 잘리는 중상을 당했다. 오 수병이 “아이구, 석호야!”를 연발하면서 김 수병을 붙들고 지혈을 시키며 살아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는 사이 자신의 다리에 뜨거운 감촉이 느껴져 손으로 만지니 빨간 선혈이 묻어났다. 오른쪽 엉덩이에서 피가 쏟아져 다리 전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때야 아픔이 느껴져 신음소리를 내자, 전우들이 달려와 김 수병과 오 수병을 의무실로 옮겼다. 그 당시 동양에는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서 콩밭에 장애물을 제거하고 300여 미터의 활주로를 만들었다. 그 간이 비행장에는 조종사외 1명이 탈 수 있는 경비행기가 운행되었다. 사방이 북한군에게 포위된 상태라 유일한 환자수송 루트였다. 김 수병은 당일에 오 수병은 다음 날 원산에 소재한 미군야전병원으로 수송되었다. 다행이 오 수병은 중상이 아니라 며칠 치료를 받으면 나아진다고 했다. 미 야전병원에는 담배, 비누, 치약, 칫솔, 껌 등을 무진장 쌓여 있었고, 부상병들에게 마음껏 사용하고 가지도록 했다. 오 수병은 양심껏 골고루 챙겨 나와서 인근 동네에 어렵게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도 나눠줬더니 대환영이었다. 5일간 치료를 받고 영양도 보충하고 나니 상처가 많이 나아졌다. 그러던 중 해병 제3대대 본부에서 삼등병조가 찾아왔다. 어제(12월3일) 제3대대는 이미 원산으로 철수했다며 크게 아프지 않으면 퇴원하자고 하여 그를 따라 원대 복귀했다. 그 때 중공군의 압력이 가중되어오자 제3대대는 눈발이 휘날리는 12월 7일 원산항에서 LST845호를 타고 부산을 경유해서 진해로 철수했다.
□ 제2차 출동, 경상북도와 강원도로
동족상잔의 처참한 비극이 시작된 1950년이 저물고 1951년이 되었다. 해병 제1연대는 태백산맥으로 남하하는 적을 소탕하기 위해 1월 29일 경북 영덕의 강구항에 상륙했다. 오 수병은 무거운81밀리 박격포의 포각(포다리 64파운드)과 M1소총을 메고 끝없이 걸었다. 박격포의 포각은 사수, 포열은 부사수, 포관은 포관수가 메고 다니며 탄약수가 뒤를 따른다. 이윽고 행군종대는 청송을 거쳐 안동에 이르렀다. 해병부대 바로 옆에 육군들이 지나가다 서로 손을 흔들었다. 한 500여 미터 더 나아가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 때 동향출신 강도선 수병이 달려오더니, “야, 승택아! 나 승우형님 만났다.” 승우는 오 수병 형님이었다. “아까 지나가는 육군 행렬에 네 형님을 잠시 만나 너도 이 앞을 지나갔다고 말했다.” 나는 형님을 보지 못해서 탄식했다. 승우 형님은 육군소속이었고 그 후 강원도 고성에서 전사했다. 그 때 못 만난 것이 평생 동안 한으로 남았다. 매일 적을 찾아 이동을 계속해서 안동을 지나 여러 날을 설산 위를 걸어 봉화에 이르렀다.
□ 두 번째 부상
봉화를 지나 눈 덮인 산과 계곡을 넘고 넘어 영월, 횡성을 지나 홍천군 두촌면과 춘성군 동면 사이에 있는 가리산 밑에 이르렀다. 이 산에 진을 치고 있는 북한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3월 19일 야간에 물새터에 연대 지휘소를 설치했다. 이 산의 좌일선은 제3대대, 우일선은 제2대대가 담당했다. 이 산 공격을 맡은 제3대대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오 수병은 박격포를 연신 날렸다. 그러나 산 정상에서 방어하던 적군도 아군의 박격포를 받으면 맞대응해 왔다. 그 때 포탄 한 발이 날아와 주변에서 터졌다. 그 파편이 오 수병의 오른팔에 박혔다. 그래서 임무를 부사수에게 맡기고 대대의무실에서 5일간 치료를 받으니,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자청해서 퇴원을 하고 제3대대가 소재한 양구군 동면 팔랑리와 해안면 만대리 사이에 놓인 도솔산으로 갔다. 그 때는 9목표 점령을 준비할 때인데 웬일인지 박격포의 명사수를 제11중대 소총수로 배치시켰다. 입대 이후 박격포만 쏘아오던 오 수병은 이제 소총수가 되어 부분대장을 맡았다. 그날 밤 오 수병의 소대는 북한군과 전투가 벌어져 소대장은 복부에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적개심에 사무친 아군은 적과 부딪쳐 백병전까지 벌이며 적을 물리쳤다.
도솔산 전투가 끝나니 제12중대에서는 왜 우리 중대 출신 유능한 박격포사수를 제11중대에 근무시키느냐며 항의하여 오 수병은 제12중대 제3소대 제1분대로 복귀시켰다. 얼마동안 외유하다 정들은 친정에 왔고 애정이 깃든 박격포를 다시 조작하니 안정을 되찾았다. 해병대는 도솔산 전투가 끝나자, 그 동안 계속된 전투에 너무 지쳐있었고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여 재정비를 위해 휴식이 필요했다. 이에 미육군 제2사단에 인계하고 7월 17일 홍천군 두촌면 철정리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 재정비와 휴식을 취한 해병 제1연대는 양구군 해안면 만대리에 솟아있는 924고지(김일성고지)와 1026고지(모택동고지)를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받았다. 제3대대는 8월 30일 엄청나게 쏟아지는 폭우를 무릅쓰고 924고지 쪽으로 접어들었다. 이때 지치고 지친 미 해병대가 부상자를 부축하며 하산하고 있었다. 그들은 “KMC! KMC!”하고 반기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나갔다. 과히 기분이 좋진 않았다. 8월 31일 아침 여명이 비쳐왔다. 시계는 양호하지 않았고 산 정상만 보이고 8부 능선 아래는 자욱한 안개로 덮였다.
□ 세 번째 부상
그 날 아침 판초우의를 걷고 밖으로 나오니, ‘꽝!!’하는 폭발음이 들려왔고 동기생 강봉염 수병(성산면 신천)이 쓰러졌다. 그 순간 오 수병도 좌측 쇄골부위에 돌메이로 맞은 듯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는 파이프에서 강한 압력으로 물이 쏟아져 나오듯이 피가 콸콸 뿜어져 나왔다. 이를 본 소대원과 위생하사관이 달려와 압박붕대로 지혈을 하고 단단히 묶었다. 너무 조여 숨이 막힐 듯해서 손짓발짓으로 고통을 호소하자, 걱정하던 오대하 수병이 끈을 약간 풀어주었다. 즉시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시키려 하산하려 할 때 오대하 수병이 피복, 모포 등을 챙겨주며 건강을 빌었다. 그 길로 노무자에 들려 하산한 후 미 야전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야전병원에서는 다시 다른 환자와 함께 앰뷸런스에 실려 5시간을 달려 서울 소재 제36한국육군병원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도 치료는 하지 않고 페니실린 주사를 계속 놓아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조치만 했다. 그렇게 며칠 지내다 서울역에 세워진 미군병원 열차로 옮겨졌다. 친절한 미군의관과 간호장교가 배치되어 부상병들을 보살펴주고 있었다. 부산에 도착한 후에는 병원선을 타고 속천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자동차편으로 진해해군병원 제2병동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수술을 받았다. 그 때 담당군의관이 퉁명스럽게 “이놈 봐라, 별놈이 다 있다. 죽을 놈이, 이 모양 이 꼴을 하고 이곳까지 잘도 왔다.”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즉시 마취주사를 놓아주고 숫자를 세라고하고 셋까지 세고 나니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죽음 직전에 소생
대수술을 받고 하루 낮과 밤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고, 그 후 2인용 병실에 눕혀졌다. 마침 1951년 3월 21일 가리산 전투에서 수류탄파편에 왼쪽 눈이 실명된 양문숙 수병이 입원해 있었다. 오 수병과 위미초등학교 동창이며 이웃마을 남원면 신례리 출신이었다. 다행이 한 쪽 눈은 실명이었지만 행동이 자유로웠던 양 수병은 동창생이 걱정되었던지 병실 창가를 계속 와서 살펴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오 수병이 수술부위에 출혈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 수병은 무의식중에 손을 창가에 문지르니 창문이 온통 빨간 피로 물들었다. 이를 본 양 수병은 군의관실로 달려가 다급한 상황을 알렸고, 당직 군의관과 간호장교가 달려와 상황을 확인하고 즉시 수술실로 옮겨 재수술에 들어갔다. 7일간 의식불명 상태로 지내다 아직 명이 다하지 않았는지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보름쯤 지나자 약간의 거동이 가능해져 양 수병을 만났다. 둘은 다정하게 손을 잡았다. 친구가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오 수병은 몇 번이나 감사함을 표했다. “문숙아, 너 아니었으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너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승택아, 너는 더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하필 그 위험한 지경에 나를 그리로 보낸 것을 짐작해 보라, 네 조상이 나를 그렇게 인도한 것 같다.” 둘은 웃으며 기쁨을 나누었다.
해군병원에서 5개월간 입원하니 몸이 회복되었다. 그는 의병제대를 신청하지 않고 다시 해병대로 돌아가서 해병교육단 교수부에 근무하다 해병통신학교에서 2개월 교육을 수료하고 1952년6월 서해대동강 하류에 떠있는 석도라는 섬으로 갔다. 그곳에는 해병도서부대 산하 해병중대가 주둔해 있었다. 그때부터 암호사가 되어 암호번역에 종사하다가 석도에서 1953.7.27.일 휴전을 맞이했다. 휴전이 조인되는 날 저녁에 육지를 바라보니 지금까지는 미군전폭기 때문에 등화관제를 했었는데, 휴전이 되던 7월 27일 저녁에는 진남포 시내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석도는 51.5.7 해병 독립 제41중대가 주둔한 이래 한국해병대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도서였다. 그러나 휴전협정으로 북한에 넘겨주어야 한다니 너무나 분통이 터졌다. 울분을 삭히며 휴전 후 3일째 날에 최후의 철수선은 석도를 떠나 남으로 향했다. 오수병은 남한에 들어와 파주군 금촌의 여단본부를 거쳐 해병대사령부에서 암호사로 근무하다가 1964년 4월 상사로 예편했다. 용사는 14년 동안 젊은 청춘을 조국에 바쳤다. 세 번의 부상을 당하면서도 대한민국해병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훈장 하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는 섭섭함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고 한다.
<발췌> 정수현, [한라의 젊은 영웅들], 제주특별자치도재향군인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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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 많으시고,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