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인 투어: 메타버스 단편소설
김상균 지음, 이야기나무, 2022
작가의 말
이 책은 메타버스의 미래를 보여주는가?
형철과 미선(아무도 없었다), 현아 아빠(올드보이의 악몽), 시우(브레인투어), 주연(나는 나를 해고했다), 영애(당신은 사랑받았습니다), 김상균(언아더월드), 기수(연애인), 다은(핑크빛 평등), 규연과 주선(원더풀데이), 이들 외에도 이 책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당신은 그들 중 누구인가요? 오늘의 당신은 누구이며, 내일의 당신은 누구를 향하고 있나요?
많은 분들이 메타버스가 무엇인지, 현재 어디까지 왔으며, 그 미래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지에 대해 제게 물어옵니다. 저는 답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오늘의 당신은 누구이며, 내일의 당신은 누구를 향하고 있나요?’라는 질문에 관한 여러분의 대답들이 모인 곳에 메타버스의 오늘과 내일이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왜 작가가 실명으로 이야기에 등장하는가?
이 책의 여러 군데에 제가 실명으로 등장합니다. 자기애가 넘쳐서 그렇게 저를 등장시킨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제게 있어 메타버스는 인간의 마음을 연결하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제게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런 기대와 두려움을 이야기 속 김상균에게 투영했습니다. 제가 느끼는 두려움에 메타버스의 미래가 닿지 않기를 바라기에, 제가 하는 연구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스스로 돌아보기 위해, 저 자신을 그렇게 독려하기 위해 김상균을 등장시켰습니다.
제가 실명으로 등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 학술논문도 일부 인용하고 있습니다. 소설 속 스토리가 그저 헛된 망상이 아님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작가가 꿈꾸는 메타버스는 무엇인가?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 노인과 바다에서 주인공이 남긴 말입니다.
메타버스를 도피, 기만의 세상이라 걱정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걱정과 비판이 맞는다면, 메타버스는 인간을 패배시키는 디스토피아일 뿐입니다. 저는 메타버스가 그저 한없는 따듯함, 행복, 평화만을 전해주는 세계가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저는 메타버스가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는 또 다른 세계이기를 희망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처받고, 아프고 때로는 파괴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헤밍웨이가 남긴 문장처럼, 여전히 우리가 패배하지 않는 세계이기를 꿈꿉니다.
작가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찾아 현실 세계와 메타버스를 오가는 여정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찾아내고,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는 과정, 그게 앞으로도 제가 가려는 길입니다. 그 길에는 인간의 마음에 관한 제 호기심과 집착이 늘 함께하리라 예상합니다.
학술논문, 전문 서적, 소설, 제가 짓는 모든 글들은 독자들이 읽고 사고해주는 과정을 통해 완성됩니다. 제 길이 조금씩 완성되도록, 제가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도록 빛을 비춰주시는 독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당신은 제게 빛입니다.
브레인투어
“시우야, 이번 기회에 한 몫 챙기고 다 접자.”
“진짜 싫다니까! 내 머릿속을 남들이 헤집고 돌아다니게 내가 놔둘 것 같아?”
“내가 이런 말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너 광고도 이제 다 끊겨가고 팬클럽 멤버 수도 뚝뚝 떨어지고 있어. 솔직히 이번에 낸 싱글도 반응이 엉망인 건 너도 알잖아?”
퇴물이 되어가는 아이돌 시우와 소속사 대표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식회사 브레인투어의 정 실장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대략적인 수익을 말씀해주셨겠지만, 제가 한 번 더 정리해드리면 대략 이렇습니다. 1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골드티켓은 한 장에 29만 원, 시간당 50명분의 티켓을 판매하는데, 하루에 8시간을 자니까 하루에 총 400명에게 판매합니다. 30분을 여행하는 실버티켓은 한 장에 19만 원이고, 시간당 100명, 하루에 8시간을 자니까 하루에 총 800명에게 판매하고요. 이렇게 한 달 동안 여행을 돌리면 총매출이 대략 80억 정도 됩니다.”
“그래 시우야. 80억을 브레인투어와 반씩 나누고, 거기서 회사 몫으로 10억 떼고 나면, 네가 한방에 30억을 당기는 거야. 이런 장사가 어딨냐? 너는 그저 한 달 동안 하루에 8시간씩 편하게 잠만 자면 되는 건데.”
잠든 사이, 누군가의 머릿속에 접속해서 그의 과거 기억을 낱낱이 둘러보며 탐험하는 브레인투어가 시작된 지 일 년여가 지났다. 탐험 대상자의 건강을 고려해서 동시접속을 100명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하루에 8시간 동안 운영이 가능한데, 1시간 탐험이 가능한 골드티켓, 30분 탐험이 가능한 실버티켓으로 나눠서 판매되고 있다.
“그게 문제라고! 그 말대로면 하루에 1,200명, 한 달이면 3만 6천 명이 내 머릿속을 다 뒤지고 다니면서 내 기억을 죄다 들여다보는 거잖아.”
“시우야,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근데 뭐 그게 대수냐? 네 개인정보나 일상생활은 이미 관찰카메라다 뭐다 해서 팬들에게 다 공개됐잖아. 거기에 네 기억을 좀 얹어서 보여주는 게 뭐 어때서 그래?”
“말이면 다야. 형이면 자기 머릿속을 생판 모르는 남들에게 다 까발릴 수 있겠어?”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나라고 꼭 이게 좋아서 그러겠냐. 그리고 그 뭐야 메모리 커튼이라고 했나요? 일부 기억을 못 보게 막을 수 있다고 하셨죠? 그것 좀 설명해주세요.”
“네. 시우 씨께서 분명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있으실 겁니다. 그런 부분을 메모리 커튼으로 가릴 수 있습니다. 대략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브레인투어 준비 단계에서 저희가 시우씨의 뇌를 스캔할 텐데 그때 시우 씨가 감추고 싶은 기억에 관한 단어를 집중해서 떠올리시면 됩니다. 단순하게 보자면, 그때 활성화되는 부분을 체크했다가 저희 쪽에서 여행객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식입니다.”
“그래 시우야. 너 지난번에 마약 스캔들 터졌던 거, 마약 관련된 기억을 팬들이 들춰보지 못하게 막으면 되지 않겠어?”
“뭔 소리야! 나 마약한 적 없는데, 형도 나를 못 믿고 있었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얼마 전에 저희 브레인투어에서 히트했던 여배우 J씨의 경우는 부모님에 관한 기억을 메모리 커튼으로 막으셨었어요. 시우 씨도 그런 식으로 막아두시면 됩니다. 무엇을 막으시는지는 저희도 알 수 없으니 안심하시고요.”
“그래 시우야 그렇게 하자. 네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잖아. 이번 기회에 네 빚도 다 해결하고 너도 그냥 나랑 헤어져서 너 하고 싶은 음악 편하게 하고 그렇게 지내면 좋잖아.”
*한 달 뒤*
“대표님, 티켓은 예상대로 다 판매되었습니다.”
“아이고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VIP 티켓은 어떻게….”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말씀드렸던 대로 한 장당 2억, 총 10명에게 판매되었고요, 저희 측과 대표님이 반반 나눠서 10억씩 가져가면 됩니다.”
“그게 팔리네요. 아니 어떤 사람이 시우의 기억을 한 시간 동안 들여다보는 데 2억이나 낸 거죠?”
“뭐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메모리 커튼으로 가려진 기억까지 은밀하게 다 들춰본다는 게 큰 매력이죠. 그래서 저희와 대표님이 이면으로 비밀 계약을 한 거고요. 물론 VIP 티켓은 100% 현찰로만 판매하고, 구매한 고객분들도 저희 브레인투어와 거래한 사실은 비밀로 하실 겁니다. 안 그러면 저희도 그렇지만 그 고객분들도 골치가 아프게 되니까요.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이면 계약 내용은 시우씨에게 절대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야 당연하죠. 그런데 지난번에 얘기했던 그 여배우 J는 VIP 티켓이 더 비싸게 팔렸다면서요?”
“네, 그때는 좀 경쟁이 붙어서 한 장당 3억씩 나갔습니다.”
“대체 J가 감췄던 게 뭐 길래…. 하긴 나는 우리 시우가 뭘 감췄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부분은 다음 주에 브레인투어가 시작되면 알 수 있겠죠. 늘 그래왔지만, VIP 투어에는 제가 동행하거든요.”
정 실장의 눈가에 무겁고 서늘한 미소가 어둡게 감돌았다.
*한 달 뒤*
“이 대표님. 입금된 건 확인하셨죠? 이제 다 정리되었네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정 실장님 덕분에 시우나 저나 한몫 단단히 잡았네요.”
짙게 깔린 구름에 가려 달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밤이었다. 45층 스카이라운지, 아이돌 시우의 소속사 이 대표와 브레인투어 정 실장은 둘만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실장님, 지난번에 얘기하신 VIP 투어는 어떻게…”
“아무래도 그게 궁금하셨나 보네요. 말씀드릴까요?”
“…”
정 실장은 팔짱을 낀 채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고개를 조금 돌려 초점 없는 눈빛으로 창밖을 내려다보며 VIP 투어, 시우의 메모리 커튼에 가려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8년 전, 시우의 데뷔 무대는 엉망으로 끝났다. 생방송의 압박 때문이었는지 어렵게 얻은 큰 무대에서 시우는 노래 가사도 잊어버리고 안무를 끝까지 연결하지도 못했다. 방송이 끝난 늦은 저녁. 강남 모 술집의 밀실에 시우와 이 대표, 그리고 시우의 대뷔 무대를 허락했던 방송사의 안미정 국장이 앉아있었다. 시우는 몇 잔의 양주를 받아먹고는 정신을 잃은 듯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안 국장의 화는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던 이 대표는 곁눈질로 잠든 시우를 보더니, 안 국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안 국장은 꼬았던 다리를 풀고는 몸을 숙여 이 대표의 뺨을 여러 차례 세차게 때렸다. 이 대표의 양쪽 볼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안 국장은 비아냥대는 표정으로 이 대표의 얼굴에 얼음물을 끼얹었다. 이 대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안 국장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후 안 국장은 이 대표가 내민 봉투를 받아서 핸드백에 넣고는 방을 나갔다. 이 대표는 잠든 시우를 보며 깊은 한숨을 쉬고는 시우 곁에 앉았다. 안주로 나온 견과류와 과일을 삼키듯 입에 쑤셔 넣었다. 정신없었던 데뷔 무대 날, 이 대표는 밤 10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
“아 시우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때 분명 시우는 안 국장, 그 마녀가 주는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몇 잔 먹고 뻗어있었는데요.”
“시우 씨가 메모리 커튼으로 가렸던 기억 속 이야기입니다. 시우씨는 잠든 척하고 있었을 겁니다. 다 알았던 거죠. 그러니 VIP와 제가 그 상황을 볼 수 있었던 거고요.”
“그, 그렇군요. 시우 녀석,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그걸 그렇게 가려두려고, 이 바닥에서 뭐 그런 일이야…”
“이 대표님, 이야기가 거기서 끝난 건 아닙니다.”
“네? 그 다음에는 제가 시우를 집에 데려다 준 게 다인데요.”
정 실장은 탁자 위에 놓인 잔에 맺힌 이슬을 잠시 바라봤다. 맺힌 이슬을 한 손으로 움켜쥐듯 닦아내고는 한 모금에 잔을 비웠다.
“시우 씨가 취한 척을 했었잖아요. 이 대표님이 시우 씨를 숙소에 내려주고 떠난 뒤, 시우 씨는 전화를 한 통 하고는 다시 숙소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디론가 갔습니다. 아마도 그걸…”
“네? 시우가 그 밤에 혼자 어디를 갔는데요?”
“안미정 국장에게 갔습니다. 안 국장이 혼자 있는 오피스텔로.”
“아니 시우가 왜, 그 시간에 안 국장에게 왜…”
아무런 대꾸 없이 정 실장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이 대표의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한번 두드리고는 멀어져 갔다. 정 실장이 떠난 것도 모른 채 멍해져 있던 이 대표는 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이 대표는 소파에 몸을 숨긴 채 멍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려다봤다. 굽어진 한강을 따라 수많은 불빛이 영롱하고 평화롭게 무언가를 찾아 떠가고 있었다.(24~31)
핑크빛 평등
“다은 씨? 김다은 씨, 이제 일어나셔야죠. 자, 눈을 뜨고 저를 보세요. 제가 보이시나요?”
오랫동안 얼어있던 다은의 몸에 조금씩 온기가 감돌았다. 심장을 출발한 피의 온기가 발끝, 손끝 그리고 눈꺼풀에까지 다다랐다. 수십 년 만에 열린 다은의 눈꺼풀, 쏟아지는 불빛 사이로 다섯 명의 사람이 보였다.
“어… 여, 여기가 어디죠?”
“다행이네요. 바이탈도 모두 정상이고 의식도 다 돌아왔어요. 한동안 머리가 좀 멍하기는 할 겁니다. 기억이 잘 안 나실 수 있겠지만, 다은 씨는 2025년에 백혈병 말기 판정을 받고 그동안 동면 상태로 지내셨어요.”
2025년, 백혈병, 동면, 잠들어있던 수많은 기억이 다은의 머릿속에서 일시에 깨어나고 있었다.
“백혈병을 완벽하게 치료하는 약품이 개발되고, 또 동면 상태에 있던 환자를 안전하게 회생시키는 기술이 상용화되어서 이렇게 다은 씨를 다시 깨웠습니다. 조금 전에 백혈병 치료 약품도 투여했으니 이제 아무 걱정 없이 건강하게 다시 살아가시면 됩니다.”
“축하드립니다 다은 씨.”
“혈색이 돌아오니 더욱 예쁘시네요. 와, 신기하다!”
“그러게요. 실제 사람 모습을 이렇게 보는 게 정말 신기하네요.”
다은의 침상 곁에 서 있는 이들, 백색 가운을 입고 있는 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건넸다. 다은은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무언가 몹시 이상했다. 다은의 눈에 들어온 그들의 모습은 핑크빛 피부에 모두가 똑같은 얼굴이었다.
“놀라셨을 겁니다. 잠시 후에 레슬리가 설명해줄 테니, 일단 한숨 주무세요.”
두어 시간이 흐르고 다은은 다시 눈을 떴다. 가슴에 레슬리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가 침대 곁에 앉아있었다.
“다은 씨, 지금부터 제 얘기 잘 들으세요. 많이 혼란스럽겠지만, 뭐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닐 겁니다.”
동면에서 깨어난 세상은 많이 변해있었다. 오존층 파괴로 인해 쏟아지는 태양 방사선, 녹아버린 영구동토층에서 깨어난 고대 바이러스를 피해 모든 인간은 지하 시설에 각자 분리되어 격리된 채 숨어 지내게 되었다.
지하에 숨은 인간을 대신해서 각자가 조종하는 아바타들이 지상의 삶을 대신 사는 세상, 다은이 만났던 핑크빛의 다섯은 모두 누군가의 아바타들이었다.
“레슬리 씨, 그런데 왜 모두의 아바타가 같은 모습인 거죠? 가슴에 차고 있는 이름표, 입고 있는 옷이나 액세서리 정도 말고는 모두 같은 모습인데요.”
“차별 없는 세상, 완전히 평등한 세상을 위해 아바타를 그렇게 만들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꽤 오래전의 일이죠. 성별, 인종, 나이를 알 수 없도록 모두 핑크빛 피부에 똑같은 키,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언어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모국어로 말하면, 상대방에게는 듣는 이의 모국으로 변환되어서 들리는 식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국적도 모릅니다. 저도 같이 일하는 둉료들의 성별, 나이, 국적, 인종 등 아무것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런…”
“다은 씨도 며칠만 여기 머문 후에 다은 씨에게 배정된 지하 벙커 하우스로 이동하실 겁니다. 그런 후에는 아바타가 배정되고요. 아, 이제 다은이라는 이름을 쓰실 수는 없습니다. 성별이나 국적을 추측하기 어려운 이름으로 개명하셔야 합니다. 아바타를 조종하시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
다은은 레슬리의 설명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온몸이 침대 속으로 녹아들 듯 다시 잠이 들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곁에 다른 이가 앉아있었다. 처음에 다은을 깨웠던 피닉스였다. 그는 작은 안경을 건네주었다.
“다은 씨 부모님께서 다은 씨 앞으로 남겨준 유산이 어마어마하네요. 그분들이 투자하셨던 자산이 다은 씨가 동면하는 동안 수십 배로 불어났어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 특수 안경을 사실 생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게 어떤 안경이죠?”
“일단 그 안경은 불법입니다. 다만 걸릴 일은 전혀 없습니다. 부유층들 가운데 그걸 쓰는 이들이 적잖거든요. 아바타가 안경을 쓰고 있으면 상대방 아바타의 성별, 나이, 국적, 인종 등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아바타의 학력, 재산, 종교, 직업까지 바로 게임 속 상태 바(bar)와 같은 형태로 뜹니다. 다은 씨가 만나는 아바타, 아니 그 아바타를 조정하는 이들이 누군지 모르면 좀 그렇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데 이 안경을 쓰고 있으면 바로 다 알 수 있어요. 저도 갖고 싶기는 한데, 그만한 돈은 없거든요. 대신 다은 씨가 안경을 구매하시면 제가 커미션을 좀 받을 수는 있죠.”
“다른 아바타들은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나는 다른 아바타들이 누구인지 알게 된단 거죠?”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이해가 빠르시네요. 어떻게, 구매하실래요? 떠나시기 전에 결정하셔야 합니다.”
다은은 다시 깊은 꿈속에 빠져들었다. 동면에 들기 전, 20대 시절에 친구 여럿과 카페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모두 핑크빛의 같은 얼굴이었다. 핑크빛 아바타가 없던 세상, 그 시절 다은에게 친구들은 이미 핑크빛 아바타였다.(10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