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복오씨(同福吳氏)
【시조】오현좌(吳賢佐)
【인구】55,517명 (2000년 현재)
【주요파】▲귀은공파 ▲감천공파 ▲의제공파 ▲상서공파 ▲판전공파 ▲주서공파
▲만취공파 ▲묵제공파 ▲감찰공파 ▲매암공파 ▲금위공파 ▲승지공파 ▲소윤공파
▲재신공파 ▲호위공파 ▲장사랑공파
시조 오현좌는 고려 고종 때 동복군에 봉해졌다.
그의 선대는 중국에서 신라 지증왕 때 우리나라로 건너온 오첨이다.
그의 후손 오수숙은 고려 고종 때 거란군이 침입했을 때 오현보. 오현좌. 오현필 등 세 아들에게 이를 격파케 했다.
그 공으로 ▲오현보는 해주군에, ▲오현좌는 동복군에, ▲오현필은 보성군에 각각 봉해진다.
그래서 오현좌의 후손들은 동복을 본관으로 삼았다. 동복은 전남 화순군 동복면의 지명이다.
동복군 오현좌는 두 아들을 두었다. 맏이 오영도 아버지에 이어 동복군에 봉해졌으며 1세조가 된다.
한편 둘째 오숙귀는 ▲군위오씨로 갈라진다.
3세손 오대승은 고려 원종 때 시중을 지냈으나 후에 지금의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 낙향, 여생을 보낸다.
그는 이곳에서 석등 48개를 만들어 밤마다 점화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후손들의 융성을 기원했다.
이 석등은 현재 원형대로 보존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동복오씨의 대표 인물은 대장군 오광찰의 10세손 오세현의 아들 억령. 백령 형제다.
이때부터 동복오씨는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다.
오억령은 조선조 선조 15년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40여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청백리에 올랐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만취문집을 남겼다.
그의 아우 오백령도 문과에 급제, 도승지,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 집안에서만 8판서를 배출했다. 동복오씨의 인물은 거의가 이들 형제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