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47년 12.7(음)충남 논산 연무읍에서 태어나 6.25 전쟁 때 가난한 시골 동네
(전북 익산 성당면으로 피난가 그곳에서 자랐다.
봄이 되면 우리 마을은 춘궁기로 곤란을 겪었다. 보리밥은 그나마 여유 있는 사람 얘기였고,
보리고개를 간신히 넘기면 또다시 어려운 시기가 다가왔다.
하지만 공해도 없는 시절이라 산과 들에는 꽃이 피고 나무들의 열매는 빠알갛게 익어있기에
그 열매를 따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에 가 꿀꿀이 죽을 받아 먹고 집에 올 때는
그 도시락에 분유를 받아 가지고 와 집에서 물에 끓여 먹었다.
그것이 공부하러 학교가는 것보다 더 즐거웠고 재밋었다.
5학년 때 부터는 진짜 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에 갔다.
어머님은 집에서는 꽁보리밥을 먹으면서도 도시락 만큼은 쌀밥으로 싸 주셨다.
친구들에게 기죽지 말고 도시락을 먹으라는 배려였을 것이다.
집에 올 때는 그 도시락에 분유(우유)를 가득담아 가지고 왔다.
중학생 시절부터는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학교에서 분유를 나눠주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집에 와서는 늘 배가 고팟다. 그래도 배고프다고 말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제대로 밥을 먹지 않고서도 늦게까지 많을 일(노동)을 하셨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의 어느 여름날이 었다.
통학열차를 타고 집에 오후 7시쯤 도착했는데 집이 텅비어 있었다.
저녁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뒤져 쌀과 보리를 찾아 불을 지펴 저녁밥을 지었다.
그때까지도 부모님은 오시질 않는다. 저녁밥을 다 지어 놓은 후
옷을 갈아 입고 부모님이 오실길로 마중을 나가 아버님의 지게를 받아지고 집에 왔다.
어머님은 나더러" 배가 고플텐데 어떻하나" 하고 걱정을 했다.
나는 " 엄마 내가 저녁밥 다 지어놨어"
어머니는 "네가 밥을 다 지어 놨다고" 하니 얼굴이 환해 지셨다.
지금이야 쌀만 씻어 밥통에 넣으면 알아서 밥이 되지만 그때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지어야 했기에 나무를 때는 시간과 가마솥에 물을부어 맞춰야 하는 등 밥짓는
기술이 필요했다.
찢어지는 가난속에서도 막내 아들을 고등학교에 보내놓고 미치도록 괴로워도 그 내색을
나에게 보이지 않으시려고 했으니 그 안타까움이 오죽하셨을까?
엄마는 가끔씩 나에게 이런말을 하셨다.
"밟히면 죽는다. 넘어지더라도 훌훌 털고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단다."
그러시던 어머니가 내가 떳떳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내가 5급(사무관) 공무원(48세) 때 돌아가셨다
나는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하여 3급공무원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2008년도에 정년퇴직을 했을 때 부모님 산소에 홍조근정훈장증을 올려 놓고
"어머님 말씀 대로 밟히지 않고 떳떳하게 살다가 이젠 공직을 은퇴했습니다".하고
인사를 드렸고 지난 봄에는 부모님 산소를 전면 재 보수를 했다.
지금은 쌀밥에 소고기가 지천인 세상이고 그 정도 음식은 모두가 다 먹는 세상이 되었건만
부모님은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나만 호위호식하며 살고 있다.
금년 추석에는 코로나19때문에 산소조차 찾아갈 수 없으니 너무나 서럽고 눈물이 난다.
(자식들 차는 많지만 나는 자동차 운전면허가 없기에 혼자 갈 수가 없다)
이제 내 나이74세이니 부모님 곁에 묻힐 날도 멀지 않았나 봅니다.
아버지,어머니 금년 추석에 찾아뵙지 못하더라도 편안히 계세요.
그리고 부모님 생전에 어렸던 손주들도 서울땅에서 잘 버티고 서 있답니다.
그 손자들과 증손자까지 데리고 곧 찾아 뵙겠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36C9495CCECC9D1E)
(장관,총리 대통령 훈,포장 다 받고 밟히지 않고 살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C55B465CF2FF5D1F)
(재 보수된 부모님 산소)
![](https://t1.daumcdn.net/cfile/cafe/2324F94A51D90A891C)
(딸, 아들도 모두 독립해서 잘 살고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54D64856B7FB3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