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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중
e-mail : sm546@hanmail.net
경남 창녕 출생
2015년 『경남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2017년 『에세이스트』 신인상
에세이스트 작가회의 이사
경남문협, 진해문협 회원
진등재문학회, 가락문학회 회원
낙동강 하구
몰운대 전망대에서 바다를 본다. 오월 첫 주라 봄이 절정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오후 5시의 태양은 잘게 부수어져 파랑에 흩뿌려진다. 온통 번들거린다. 은빛 물결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정적에 빠지게 한다. 반짝이는 바닷물이 먼저 닿는 곳에 도요등, 장자도, 진우도가 도열하고 있다. 모래섬이 강의 완결을 마중하고 있다. 여기는 천 삼백 리 물길을 흘러 내려온 낙동강이 처음 바다를 만나는 곳이다. 몰운도라는 섬에 낙동강이 실어 온 흙과 모래가 쌓여 육지와 연결 되고 몰운대로 불리게 되었다는 표지판 안내문에서 낙동강의 마지막 흔적을 본다. 몰운대의 곰솔이 끝가는 데를 모르고 곧게 뻗어 하늘을 받치고 있는 듯하다. 그 사이로 난 산길은 고즈넉이 깊은 산속을 걷고 있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 온 연유는 낙동강이 긴 여행 끝에 바다를 만나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이다. 이왕이면 아름답기로 소문난 다대포 낙조와 더불어 만난다면 더 좋을 것이다.
백사장 멀리 나가 있던 사람들이 차츰 뒤로 물러서고 있다. 밀물이 백사장을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는 모양이다. 물이 들어오며 내는 나지막한 파도 소리는 대숲에서 이는 바람 소리를 닮았다. 모래 위의 선명한 물결무늬와 쇠제비갈매기의 비상이 조화롭다. 다대포 백사장에 세워진 거대한 조각상 옆에서 일몰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린다. 만 조와 일몰의 시각이 비슷하다. 그믐이라 희고 고운 모래가 바닷물 속으로 잠기면 일몰의 장관이 펼쳐지리라. 밀려드는 물결에 석양의 붉은 색감이 조화롭게 담기면 긴 시간을 기다린 보람은 충분할 것이다.
오래전부터 낙동강 전체를 훑어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낙동강이 내 몸속에 존재하고 있음이다. 태어나면서 만나고 그 속에 서 자라왔다. 지금도 그 물을 마시고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물며 내가 키우는 농작물도 낙동강 물을 흡수하며 자라고 있다. 내 의식 깊숙한 곳에는 늘 강물이 흐르고 있다. 낙동강을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낙동강의 모든 것이 하구에 있다. 강물이 싣고 온 사연들이 오랜 세월 쌓이고 쌓여서 모래섬이 되었다. 저 모래섬은 강이 모으고 모 아서 가져온 육지의 아픔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흐르는 강물을 따라 모래섬은 자라고 있다고 한다. 바다 밑에서 모래섬이 되려는 속등이 물속에 희미하게 드러난다.
태백산, 지리산, 가야산, 덕유산, 소백산, 팔공산, 가지산 이름만 들어도 웅장함이 절로 드는 산이 강을 따라 하구에 와 있다. 흙이나 모래로 긴 여행을 왔다. 여기서 모든 산이 만나 하나가 된다. 그렇다. 여기 삼각주 충적평야와 모래섬은 산이 고향이다. 본디의 그곳을 그리 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번 흘러온 강물은 다시 역류할 수가 없다. 내가 그 그리움을 담아 모천 회귀하는 역동적인 물고기처럼 낙동강 물길을 따라 하구에서 시원을 찾아 발원지로 거슬러 올라 보리라. 옛날 명지 갯벌 염전에서 구운 소금을 싣고 상류로 떠나는 황포 돛단배처럼 비장하게 올라가 보련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의 황지연못이 발원지라 알려져 있다. 강의 최초 시작된 곳이라 의미가 크다. 거기에다가 하루 5천 톤의 물이 솟아난다니 발원지의 위엄을 더 추켜세운다. 그러나 강물은 영남지방 전역에서 내와 하천을 이루며 모여들었다. 낙동강이 영남의 동맥인 이유이다. 천여 가닥의 물줄기가 실핏줄처럼 모여서 이루어낸 강이 다. 강가에 앉아 가만히 들어보아서 심장 박동하는 소리가 들려야 된다. 강은 그렇게 강하게 살아있어야 한다. 강물이 맑아야 하는 것도 자명하다. 사람과 강물이 마침내 물아일체가 된다.
낙동강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과 강이 품고 있는 문화를 만나고 싶다. 생채기를 크게 당한 강이 스스로 복원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이 신라이고 서쪽이 가야라고 했다. 우 함양 조식, 좌 안동 이황이라고도 했다. 거대하고 긴 강줄기만큼 많은 이 야기가 있을 것이다. 경계를 지날 때마다 나루가 있었다. 사라진 나루터에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지금도 흩어져 있을 것이다. 강이 휘감아 도는 지역의 사연을 알고 싶은 것이다.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천천히 찾아가련다. 『연금술사』에서 주인공 산티아고가 피라미드의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정처럼 가고 싶다. 흐르는 강물에 자아를 비추고 반문하고도 싶다.
물이 들고 물이 빠지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나타낸다. 달의 힘을 빌려서 바다는 수줍어하는 강물을 끌어 당기고 거침없는 강물을 막아 세우기도 한다. 그렇게 흐르는 사이 낙 동강 강물은 이름을 잃어버리고 짠물이 되어 남해 바닷물이 된다.
백사장을 향해 파도는 점점 세게 몰아쳐 온다. 『그림자의 그림자』 조각상 긴 다리의 그림자가 더 길어지고 주위는 적막 속에 파도 소리만 남았다. 석양이 구름에 숨어 하늘과 바다를 붉게 명멸하며 물들 인다. 황홀감이 기다림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한다.
정일근 시인은 “몰운대의 저녁놀을 보지 않고 내게 사랑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시로 말하였다. 능히 그렇다. 바다를 만난 강이 노을에 취하는 동안 어둠이 내려앉는다. 그 순간 여행자의 쓸쓸함이 밀려든다. 둥지를 향해 날아가는 도요새의 군무를 따라 나도 집으로 향한다.
새가 많고 물이 맑은 섬이라는 뜻의 을숙도에서 낙동강 종주를 시작하려 한다. 자전거도 새로 샀다. 필요한 용품도 준비하였다. 이제 내가 좋아하는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낙동강 하구를 나의 출사표로 삼고자 한다.
처사
처사는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를 뜻하는 말이다. 아버지는 사후 비석에 처사를 새기고 싶어 하셨다.
“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꼭 새겨 넣겠습니다. 요즘 돈만 주면 멋있게 새겨 줍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버럭 역정을 내셨다. 공식으로 처사를 인정받아 비석에 새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장남이 미웠음이다.
본향의 고을에는 향교가 있으며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대부분이 나이 많으신 유생이다. 이 시대의 교육방식에 멀어져 힘겹게 존재하고 있다. 아버지도 사십 년을 넘게 다니시며 배우고 익히셨다. 전교는 지방 문묘를 수호하는 향교의 책임자이다. 전교의 직분을 마치면 사후에 처사의 직함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전교가 되고 싶어 하셨다.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었으리라.
젊은 시절 아버지는 마을 이장과 새마을 지도자를 이십 년 넘게 하셨다. 하시는 동안 선거 한번 없이 추대되셨다. 그만두시려 해도 한사코 마을 어르신들의 신망에 계속 이어 맡으셨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되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가 살아생전 처음으로 선거에 나가 보려 한다”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합의 추대로 전교가 되지 못할 상황이 생긴 것이 분명하였다. 애초에 이번 향교의 전교는 아버지가 되셔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인정한 터라 벌써 전교가 된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변수가 생긴 것이다. 공직에 근무하시다 정년퇴직을 하신 분이 향교에 입교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교에 출마 선언을 한 모양이었다.
사람 상대를 업으로 살아온 사람이 농사를 천직으로 살아온 사람을 이기는 방법은 쉽고도 간단했다. 몸에 밴 설득의 기술이 자금력과 더하여 급속히 판세를 뒤집어 버렸다. 졸지에 뒤로 밀려난 형국이 되신 아버지는 분한 마음에 강한 도전 의지를 다졌다.
단독 후보가 되어 당선되실 거라 믿고 있던 아버지는 그만 마음 깊숙이 잠자고 있는 사람의 욕망을 끄집어내셨다. 팔십 평생을 넘게 살아오시면서도 성취를 위해 도전하는 일이 없으신 아버지가 과감하게 도전하시겠단다. 아들에게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표정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마음껏 해보십시오. 제가 힘껏 돕겠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처음으로 지원자가 되었다. 아버지의 비장한 선거 운동은 시작되었다. 모든 향교 유생 어르신 에게 일일이 전화하고 필요하면 직접 만나셨다. 아버지 앞에서는 모두 찍어주실 거라고 언약했고 순진한 농부는 믿었다. 몇십 년 같이 공부를 함께 한 분들이 하시는 말을 믿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 믿음은 당신이 살아온 평생을 만족하게 하였다.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선거를 위해 아버지는 향교에 가셨다. 신경이 한쪽으로 온통 쏠려있으니, 나의 회사 업무가 오전 내도록 손에 잡히질 않았다. 마음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빌었다.
선거 결과가 나올 즈음 떨리는 가슴으로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가 집에 오셔서 이불을 덮고 몸져누웠다고 하셨다. 퇴근하고 곧장 본가로 달려갔다. 그제야 부스스 일어나신 얼굴에 상실감이 그득 하였다. 내 안에서 왈칵 슬픔이 밀치고 나와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근 일 년을 향교 출입을 삼가셨다.
배움을 향한 열의가 결국 노구를 다시 향교의 문턱을 넘게 하였다. 그 후 삼 년을 빠지는 날 없이 열심히 다니셨다.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한 논어 책이 선비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비석에 처사를 새기시려는 꿈을 포기한 아버지는 쓸쓸히 세상을 떠나셨다. 슬픔으로 물든 장례식장에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 향교에서 총무를 맡고 있는 분이었다. “내일 빈소에 조문 갈 예정인데, 모든 유림이 참석하여 회의할 수 있도록 낮에 장소를 준비해 놓아라”라고 주문하셨다. 장례식장에서 무슨 회의를 하시려나 궁금한 하루가 지나자 연세 지긋한 어르신 스무 명 정도가 오셨다. 달필로 쓰인 진행 순서에 따라 회의하시는데, 요지는 아버지께 처사로 직함을 내리는 데, 찬반의 의견을 모으는 것이었다. 여기서 회의한다는 것은 요식행위가 되겠지만 엄숙하고 공정하게 보였다.
붉은 천위에 ‘아천처사벽진이공지구’의 흰 글씨가 써졌다. 명정을 고이 받아들고 영정 옆에 놓아드렸다. 비록 알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저세상에서는 아셨을 것이다. 급하게 석재상에 전화했다. 비석에 새겨질 학생을 처사로 고쳤다.
그 가치를 중히 여기는 이가 없는 현실에서 비석만 홀로 외로움을 견디고 있다. 자랑스러운 성취감보다 한발 먼저 가버리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삶일 것이다.
아무 미련 없다
여름 한낮 감나무가 마당 한쪽에 그늘을 만든다. 그 아래 앉아 눈 을 감아본다. 뒷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가 구슬프다. 이맘 때 고향에서 늘 듣던 뻐꾸기 소리가 그리움을 자아낸다. 문득 어머 가 그리워진다.
아내와 같이 반찬거리를 준비해 고향 집으로 갔다.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날, 어머니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당연히 들에 나가 있으리라 여기며 짐작이 가는 밭을 향해 잰걸음을 쳤다. 고추와 콩이 심어진 밭 언덕배기에는 연분홍 메꽃이 군락을 이루고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 옆에 어머니가 계셨다. 하지만 호미를 손에 쥐고 뜨 거운 햇볕이 쏟아져 내리는 밭고랑을 하염없이 긁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하얀 수건 한 장을 머리에 두른 것이 전부인 채로 더위에 맞서고 있었다. 순간 화가 스멀거리며 오르는 답답한 생각이 가슴을 가득 채웠 다. 아들에게 듣게 될 된소리를 사전에 차단하듯 “괜찮다. 이제 들어가려고 했다”라고 말하며 아들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코끝이 찡했다. 늘 일하는 뒷모습만 보여주고 살아온 어머니다.
어머니 비장의 무기인 호미는 쟁기가 되고, 낫이 되고 또 어떨 때는 가지를 치는 가위도 되었다. 호미에는 기쁨이 담겨 있고, 슬픔의 눈물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하지만 죽마고우 같은 닳아서 작아진 호미를 손에서 놓아야 하는 일이 생겼다. 일해야 건강이 유지된다는 당신의 신념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평생 농사 일을 하며 살아온 어머니의 몸은 세월에 떠밀려 지탱하기 힘든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병원에 입원한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무작정 집으로 가시려고 했다. 평생 그 자리를 지키며 당신을 기다렸을 안식처였으니 오죽이나 가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런 바람은 자꾸 희미하게 멀어져 갔다. 몸의 상태는 날마다 내리막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한겨울의 앙상해진 나뭇가지처럼 핏기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회복되어 퇴원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우리 형제자매는 돌아가면서 간호했다.
어느 주말 밤, 혼자서 간호하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머뭇거리다가 비장함이 설핏 들어있는 음성으로 말하였다. “내 이제 아무 미련 없 다. 미련 없데이”라고 하시며 돌아누운 뒷모습은 너무 작아 보였다. 야위어진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보며 “어머니! 미련이 있어야 빨리 회복됩니다. 마음 강하게 잡수세요”라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 씀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날이었다. 낮에 간호하던 막내 여동생으로 부터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가 급성폐렴 증세가 있어 더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하였다. 아침 문안한 지 반나절 사이에 일어난 예상치 못한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급히 이송된 병원의 응급실에서 검사받는 동안에도 급격히 상태가 나빠졌다. 바닥난 체력 으로 받아야 하는 검사가 무리였나 보다. 일주일쯤 더 요양하시다 퇴원하여 시골집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건강을 회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사라지고 있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산소마스크가 씌어졌 다. 회복할 것이라고 매달렸던 한 가닥 빛마저 스러져갔다. 의사 선생님은 며칠을 견디기 힘들겠다고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지고 세상의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시골집으로 갔다. 회복한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영정과 수의를 가지러 가는 길이었다. 장롱 깊숙이 꼭꼭 숨겨져 있던 수의를 꺼내는 아내를 바라보며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았다. 마당에는 어머니가 좋아했던 장미, 모란, 라일락, 포도나무가 주인의 위급함을 모른 채 밝기만 했다. 보자기에 꽁꽁 싸매어 차에 싣고 있던 수의는 사흘을 견 디지 못하고 매듭을 풀어야 했다.
어머니를 선산에 모시고 온 날, 고향 집 마당에서 바라보는 밤하늘 은 여전히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유독 별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아스라이 작은 별 속으로 어머니를 그려 넣었다. 하나의 별이 어머니 별이 되었다. 그날 저녁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아무 미련 없다”라는 말이 어머니가 세상에서 하신 마지막 말이 되었다.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그 말은 노승이 열반에 들며 하는 화두처럼 두텁고 무겁게 뇌리에 침잠하였다. 장남에게 자책의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마지막 배려라 여기고 싶었다. 유언처럼 남긴 그 말을 반추해 보며 삶의 미련이 남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도 해보았다. 아무 미련 없다는 말씀은 분명 겉으 로 드러난 표현과 실제 진실 사이에 괴리가 있을 것 같다. 그런 말씀 을 하신 어머니의 진심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고향 집에서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한다. 안방 옷장에서 입지 않고 모셔둔 새 옷과 패물이 나온다. 주방 찬장에는 한 번도 쓰지 않은 그릇들도 마루로 쏟아진다. 아껴만 두고 한 번도 쓰지 못한 그것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이 세간 살이는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언젠가는 사용하려고 했을 그 물건 들에서 어머니의 미련을 보는 것 같다. 아무 미련 없다는 말씀은 삶에 애착이 많다는 역설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콧 잔등이 찡하고 두 볼이 뜨거워진다.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미련이 당신의 미련과 뒤섞여 회한이 밀려온다.
이장중 론
어제를 향해 걷는 물의 작가
김종완
이장중은 백남오 교수의 충실한 제자다. 불교적으로 보면 상좌라고 할까. 백남오 교수는 명실공히 지리산의 작가다. 이장중은 그의 제자답게 낙동강의 작가임을 첫 장에 밝히고 있다.
낙동강이 내 몸속에 존재하고 있음이다. 태어나면서 만나고 그 속에서 자라왔다. 지금도
그 물을 마시고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물며 내가 키우는 농작물도 낙동강 물을 흡수하며
자라고 있다. 내 의식 깊숙한 곳에는 늘 강물이 흐르고 있다. 낙동강을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낙동강 하구」
낙동강으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이번 수필집은 제1부를 물의 이야기로 이끌고 있다. 낙동강은 그의 고향이면서 생의 배경이고 무대이며 근원이다. 그 물을 마시며 살았고 그 물로 기른 농작물을 먹고 살았다. 아마도 강이란 우리 모두에게 그럴 것이다. 고향이 반드시 태어난 고장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 와서 “고향이란 산이 있고, 강이 있고, 평야가 있고, 바다가 있고, 거기에 사람이 끝없이 이어서 사는 것을 이르는 말에 다름없다(야마오 산세이)”라는 정의가 더 적합해 보인다. “내 의식 깊숙한 곳에는 늘 강물이 흐르고 있다”와 “낙 동강이 내 몸속에 존재하고 있음이다”는 누구나 공감할 문장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강으로 달려가 강을 사유하진 않는다.
과학이 미래를 향해 빠르게 달린다면 예술과 문학은 과거를 향해 천천히 걷는다. 이장중 수필의 특징은 바로 이렇게 어제를 향해 걷는 것인 데, 그 걸음이 느리고 진중하여 깊이를 더한다. 그는 개인의 고독에 천착하기보다 모두 함께하는 인간의 삶을 포착하여 따뜻함을 전하며, 낙동강이라는 오브제를 통해서 우리의 상실과 망각을 일깨운다.
낙동강의 모든 것이 하구에 있다. 강물이 싣고 온 사연들이 오랜 세월 쌓이고 쌓여서
모래섬이 되었다. 저 모래섬은 강이 모으고 모아서 가져온 육지의 아픔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흐르는 강물을 따라 모래 섬은 자라고 있다고 한다. 바다 밑에서 모래섬이 되려는
속등이 물속 에 희미하게 드러난다. ―「낙동강 하구」
강 하구 모래섬을 작가는 ‘육지의 아픔’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모 래섬이 자라는 것은 육지의 상처가 자라는 것일 터이다. 실제로 강과 바다의 오염은 심각한 수준이다. 가벼운 것은 그대로 바다로 떠가고 그나마 무거운 알갱이가 쌓여 삼각주를 이룬다. 강은 너른 바다에 이르러 유속은 느려지면서 흩어진다. 마치 생을 다 마친 생명체처 럼. 도도하게 흘러오면서 제 안에 품었던 온갖 부유물들 중 무거운 것들을 차례로 하구에 내려놓는다. 그런 다음 바다로 흘러들며 자 취를 지워버린다. 그러므로 모래섬은 강의 전 생애가 집적된 것이다. 작가는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강의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태백산, 지리산, 가야산, 덕유산, 소백산, 팔공산, 가지산 이름만 들어도
웅장함이 절로 드는 산이 강을 따라 하구에 와 있다. 흙이나 모래 로 긴 여행을
왔다. 여기서 모든 산이 만나 하나가 된다. 그렇다. 여기 삼각주 충적평야와 모래섬은
산이 고향이다. 본디의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번 흘러온 강물은
다시 역류할 수가 없다. 내가 그 그리움을 담아 모천 회귀하는 역동적인 물고기처럼
낙동강 물길을 따라 하구에서 시원을 찾아 발원지로 거슬러 올라 보리라. 옛날 명지
갯벌 염전에서 구운 소금을 싣고 상류로 떠나는 황포 돛단배처럼 비 장하게 올라가 보련다.
―「낙동강 하구」
천 년 만 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거대한 산들, 그 산들도 알고 보면 흙이나 모래로 부서져 강물을 따라 긴 여행을 하고 바다에 이르기 직전 이곳에 모인다. 퇴적된 그것들은 다시 역류할 수 없고, 거기 모여 낮은 평야를 만들어 가지만 그들이라고 그리움이 없겠나. 하여 그는 그 퇴적물들이 품고 있을 그리움을 대신하여 시원을 향하여 거슬러 오르기로 했다. “낙동강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과 강이 품고 있는 문화를 만나고”, “생채기를 크게 당한 강이 스스로 복원하는 모습도 보고”, “거대하고 긴 강줄기만큼 많은 이야기”를 찾아도 보고, “사라진 나루터에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지금도 흩어져 있을 것”이므로 그것을 찾아가고자 한다. 그야말로 과거를 향한 여행의 시작이다.
새가 많고 물이 맑은 섬이라는 뜻의 을숙도에서 낙동강 종주를 시작하려 한다.
자전거도 새로 샀다. 필요한 용품도 준비하였다. (…) 낙 동강 하구를 나의 출사표로
삼고자 한다.( ―「낙동강 하구」
인생의 의미나 행복을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인간은 쉬지 않고 또 그걸 물어왔다. 그것은 인간이 이루어낸 문명 속에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자연 안에 있다고 많은 동서양 성인들은 일러왔다. 우주의 진실과 인간 객체가 어떻게 조화를 이뤄 융합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오래도록 문학과 철학이 추구해온 과제이다. 작가는 “강에 인접한 마을에서 태어나 계절에 따라 변하는 풍광 을 강물과 주고받으며 성장”했고 오십이 넘은 지금까지 “낙동강이 내 마음인 양”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와 긴 대화를 나누던 시절인 어릴 적, 큰집에 설날 차례를 지내기
위해 새벽에 아버지와 집을 나섰다. 도천면 송진에서 길곡면 아동까지 강을
따라 만들어진 삼십 리 길을 함께 걸었다. 아버지는 걷는 동안 원래 강바닥이
저기 있었는데 지금은 이리로 옮겨와서 여기에 살고 있던 집들도 사라졌다며
강줄기가 살아 움직이는 사행천을 설명하였다.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이쪽 창녕의 땅이 사라지면 저쪽 함안 땅은 생겨났었다. 오랜 시간 동안
되돌려지기를 반복하며 강물은 흘러갔다. 강 유역 정비로 가장자리가 잘 정돈된
지금은 강 줄기가 춤추는 일도 강둑을 넘쳐흐를 일도 없게 되었다.
( ―「낙동강 하구」
강은 살아 움직여야 건강하다. 살아 꿈틀대는 강은 장년기 이후에 이르면 경사가 완만하고 수량이 많아지면서 수로가 굽은 곳에서는 물흐름이 바깥쪽이 빠르고 안쪽이 상대적으로 느리다. 물흐름이 빠 른 바깥쪽은 침식되고 깎인 퇴적물은 물흐름이 느린 안쪽에 쌓이게 되어 굴곡은 더욱 심해지다가 어느 순간 휘어지는 부분에 지름길이 생기면서 이전의 하천을 버리고 새로운 물의 흐름을 만든다. 일테면 강물이 창녕 땅을 깎아다 함안에 쌓아놓은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자리바꿈하면서 흘러가는 것이 강인데, 이제 보강토를 쌓으며 단단 하게 정비된 강은 더 이상 그 줄기가 움직일 수 없다. 그 길에서 아버지는 큰고모를 떠올린다. “열다섯 나이에 가마를 타고 여기 길곡면 오호리 밀포 나루에서 나룻배로 강을 건너 시집을” 간 큰고모는 한국 전쟁 때 남편을 잃었고 자식도 없었는데 평생을 홀로 살았다. 나루에는 “빈 배가 모래언덕을 기대고 무심하게 정박해 있었다.” 이쪽 강변과 저쪽 강변의 삶이 또한 다 무심하다.
이렇듯 강과 사람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망우당 곽재우(郭再祐 1552~1617)는 노년을 이곳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강가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기거하였다. 근심을 잊는 집이란 뜻의 망우당. 곽재우가 이윽히 바라보았을 강물을 작가가 굽어보고 있다. 망우당은 “북으로는 산기슭을 깎아서 베고/ 남으로는 낙동강에 임하였다. /푸른 절벽은 병풍처럼 빙 둘러쳐 있고/ 앞 강과 모래는 눈처럼 펼 쳐져 있다./ 사방은 막힘없이 틔어서/ 멀리 보이는 산과 산에는/ 구름이 감돌아 빛나고 있으니/ 진실로 하늘이 빚어낸 절경이로다”라고 노래했지만 작가의 눈앞에 펼쳐진 강물은 같으면서 다르다. 강은 쉼없이 지류를 맞아들이고 또 지류를 통해 흘러나가기도 하면서 흘러간다. 더러는 “또 다른 곳에서 엄숙하게 발원한 물줄기가 고이고이 흘러와 하나로 합쳐지”기도 한다. 작가는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합수머리 기강으로 갔다. 한양에서 경상도를 바라보면 낙동 강을 경계로 왼쪽을 경상좌도라 하고 오른쪽을 경상우도라 했다. 경상좌도인 안동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났고 경상우도인 합천에서 남명 조식이 태어났다. 이황은 벼슬을 하면서 학문 연마에 최선을 다하여 대학자로 우뚝 섰고, 조식은 절개와 지조를 지키며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한평생을 보내면서 역사적 의인이 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둘은 같은 해(1501년)에 태어나 한 해 차이를 두고 죽었다(퇴계 1571년, 남명 1572년). 퇴계는 이론적인 면을 중시하고 현실을 긍정하는 성리학자였고, 남명은 의를 중시하며 곧은 성정으로 현실과 타협을 하지 않으며 초야에 묻혔던 실천적 학자다. 둘은 생전에 만난 적은 없으나 서간으로 여러 차례 왕래했다고 한다. 작가는 “영원히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 ‘기강’의 자리”라고 본다. “낙동강 상류 퇴계 사 상과 남강 상류 남명 사상이 만나는 곳”이며 남명의 제자 곽제우가 “ 여기 두 강이 만나는 ‘기강’에서 보급 물자를 가득 실은 왜선을 물리 치며 첫 승리”를 거둔 것을 언급한다.
초여름의 따사로운 바람이 간헐적으로 불어오고 있었다. 나는 ‘개비 리길’ 입구에서
둘레길로 가지 않고 두 강이 만나는 옛 ‘창 나루’ 지점으로 갔다. 바람이 불면 물 흐르는
소리가 따라 들렸다. 흐르고 있는지 멈추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강물에서 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세세히 귀 기울여 듣는다. 바로 갈대숲에서 나는 소리다. 눈을 감고 소리를
들어보았다. 바람이 약하면 사르사르 사르사르 간질이는 낮은 소리를 내 다가, 바람이
세게 불면 촤르르 촤르르 잎들은 서로 비비며 물소리를 내었다. 물 옆에 산다고 물소리를
닮은 것일까. 흐르지 않는 강물을 대 신해 소리로 흐르고 있었다. 갈대 뒤편에 서서 아직은
작아서 얼른 알 아볼 수가 없던 여린 물억새도 스르르 스르르 화음을 맞추고 있었다.
―「강이 만나는 곳에서」
갈대숲이 강을 대신하여 사르사르, 촤르르 촤르르 서로 잎을 비비 며 물소리를 내고 있더라는 이 문장은 메타포가 강렬하다. 인간의 입장에선 깔끔하게 정비되어 아름답고 편리하지만, 강 자체로는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강물은 이제 호수처럼 고였을 뿐 흐르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
이윽고 작가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을숙도에서 안동댐까지는 자전거로, 그다음 태백의 황지까지는 차량을 이용하고 “강이 곁 을 내어주는 곳만 골라 도보로” 이동했다.
허벅지 근육이 마비되도록 페달을 밟았다. 그래도 상심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강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투듯 달리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중간에 휴식
하며 풍광을 바라보며 즐기는 시간이 늘어났다. 무조건 달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아슴푸레하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충분히 두루두루 살펴보며 달리는 여유가 더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단단히 붙어 있어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암울한 시간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자전거로 달리는 동안 삶의 엄숙한 의미를 찾기보다는 마음을 비우고
단순해지려는 여정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구문소 그리고 회룡포」
물의 여정은 느리지만 유장하다. 물을 따라가는 여정도 속도보다는 깊이여야 할듯하다. 오래 바라보면 닮아가는 것인가. 여행은 풍경을 즐기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몸을 움직이며 몸을 느끼는 일이다. 여행의 제일 조건이 건강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페달을 힘껏 밟으며 달리던 작가는 “마음을 비우고 단순해지려는 여정으로 되어가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담백하면서도 진솔하다. 달려본 사람만이 안다. 단순함과 느림, 그것은 몸 의 요구다. 강물의 흐름은 느리기에 유장한 것처럼.
대지는 산과 들판과 시내와 강물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 저 강물의 모체도 결국은 대지다. 우뚝 솟은 산, 그 산기슭을 휘감으며 흘러 가는 강줄기, 거기서 그가 들은 목소리는 대지의 것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질 만큼 아름다운 만남을 우리는 얼마나 경험하며 살고 있을까. 이 대목에서 내 눈시울도 젖어 들었다. 작가의 숨구멍마다 솟아나는 땀방울이 보여서이고 그의 벅찬 숨결이 느껴져서다. 건강하고 활기찬 삶의 순간은 늘 이렇듯 단순성 속에서 불쑥 나타난다.
강은 물이다. 물은 생명이다. 물이 존재하지 않으면 생명도 존재하 지 않는다.
내 몸 안에도 물, 몸 밖에서도 물과 더불어 살고 있다. 그야 말로 물속에 살면서
또 물을 바라보아도 나는 그냥 좋다. 종주 도중 수시로 강변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모두 바다를 향해서 내려간다. 태초 모든 생명체가
바다에서 탄생 되었듯, 물은 환생을 위해 되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 ―「구문소 그리고 회룡포」
절창이다. 이렇듯 물에 천착한 사유는 이장중의 수필 전체를 관통 한다. 하여 그의 글들은 부드럽고 유연하다. 가히 물의 작가요 물의 철학자다. 제1부의 마지막 편 「물꼬」에서의 결구도 그냥 흘려보내기 아까운 문장이다.
내 안의 물 조절을 위해 물꼬 사용을 잘하였을까. 잠시 돌이켜 보아도
잘하였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 넘쳐 흐르게 할 때, 가두어야 할 때,
완전히 비워야 할 때를 물꼬에서 배운다. ―「물꼬」
삶이 물꼬 조절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물로 이뤄진 몸둥이를 물꼬 조절 없이 어떻게 영위할 것인가. 예부터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늘 물가였다. 최초 정치의 형태도 치산치수였다. 우물은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마을 공동체의 기반이었다.
한 마을에 우물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중심에서 공동체를 지켜내는
일을 오래 해왔다. 그 물을 통하여 태어나고 또 자라났다. 맑은 날 우물 속을
가만히 고개 숙여 들여다보면 아득히 먼 곳에 내 얼 굴이 푸른 하늘에 떠 있었다.
겉모습은 나를 닮아있지만 다른 세계의 소년을 만나는 것 같았다. 또 다른 나를
우물 안에서 만나고 있었다. ―「우물」
「우물」이란 제목의 수필은 이렇게 시작된다. 깊고 둥그런 우물 저 안 창에 하늘이 있고 그 하늘가에 함께 떠 있는 소년의 얼굴, 신화처럼 신비롭다. 그 소년은 자신이면서 다른 세계의 또 다른 타자이다. 물이라는 투영물을 통해서 또 우물이라는 좁고 깊은 그늘을 통해서 소년은 자신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곤 했다. 어쩌면 이장중에겐 그때 부터 이야기의 신, 즉 문학적 영감이 깃든 게 아닐까 싶다. 우물은 또 한 어머니의 비손과 겹쳐진다.
차가움이 어둠보다 무겁게 머무르고 있는 정월 대보름날 첫닭이 울 때쯤이다.
어느 집보다 먼저 ‘뒤 새미’에서 길어온 물로 정화수를 장독 대에 마련하고 두
손으로 비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의 갈구하는 모 습은 화살처럼 단단하게
내 가슴에 박혔다. 그 생경한 장면이 살아오 는 동안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주었다.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는 어머 니의 강한 믿음도 어쩌면 우물에서 나왔을 것이다. ―「우물」
이른 새벽이라는 특정한 시간대에는 우물물도 더 정갈하고 맑아진 새물이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애니미즘적인 이런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 당연한 윤리이기도 했다. 모두가 사용하는 우물을 신성시해야 그 물은 정갈하게 관리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과학적으로도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채 긴 밤을 지낸 새벽에는 더 정화된 물이었을 게 분명하다. 장이 저장된 장독대는 가족의 식생활과 직결되는 공간으로 어머니의 공간이다. 장맛으로 그 집안의 모든 음식 맛은 결정되었다. 따라서 장맛은 어머니의 자존심이면서 동시에 집안의 자존심이었다. 어머니는 정화수를 매개로 가족의 건강을 빌고 장독대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었다. 그 어머니의 기원은 어린 소년의 가슴에 단단하게 박혔다. 언어를 떠난 느낌 공동체인 가족의 모습이다. 온종일 사용할 물을 물지게로 져 나르는 일은 가장의 몫이다. 겨울 아침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우물물은 그대로 신령스럽기만 하다. 물독인 오지독에 가득 채워진 물로 집안의 아침은 시작된다. 소년은 물을 져 나르는 아버지를 동경했다. 어른의 세계를 동경한 것이다. 어느 때 소년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소년은 물지게를 지고 새벽길을 나섰다.
‘뒤 새미’를 가려면 야트막하지만 에움길인 고개를 넘어야 한다. 아마도
이 고개가 나를 시험에 들게 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시험을 이기고
고개를 감당해 낼 수 있는 무게인 물동이의 반만큼만 담아지고 걸어갔다.
물지게가 자유로이 움직여 허방에 빠진 듯이 몸이 비틀거 렸다. 그때마다
멈추어 서며 물통을 달랬다. 걷는 동안 그 변덕스러운 흔들림의 불규칙 박자를
몸으로 느끼며 알맞게 따라 움직이면 걷기가 편해진다는 걸 터득하였다.
그래도 집으로 가는 흙길에는 물이 출렁이 며 방울방울 동그란 무늬를 만들었다 . ―「우물」
이장중의 문학은 여기서 태동되었다. 물동이를 지고 뒤뚱거리며 흙길에 방울방울 동그란 무늬를 만들며 걷던 물의 소년은, 훗날 강을 거슬러 오르며 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물의 작가가 되었다. 우물물을 길어 나르던 시절은 소년에게 결핍이 없는 유토피아였다. 소년은 성장하여 세상으로 걸어나왔지만 여전히 부모는 고향을 지켰다.
고추와 콩이 심어진 밭 언덕배기에는 연분홍 메꽃이 군락을 이루고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저리도록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 옆에서 어머니 가 호미를 손에 쥐고
뜨거운 햇볕이 쏟아져 내리는 밭고랑을 하염없이 긁고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하얀 수건 한 장을 머리에 두른 것이 전부 인 채로 더위에 맞서고 있다. 화가 나고
가슴이 답답하다. 아들에게 듣게 될 말을 사전에 차단하듯 “괜찮다. 이제 들어가려고 했다”
라고 먼저 말하며 아들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코끝이 찡해졌다.
―「아무 미련 없다」
그렇게 어머니는 일하는 뒷모습만 아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어머니가 고향을 떠나신 것은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면서다. 한평생 쥐고 살아오신 호미를 내려놓은 것도 그때였다. 병원에서 투병하면서 어머니는 줄곧 집으로 돌아가길 간청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혼자서 주말 밤에 간호하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머뭇거리다 비장함이
설핏 들어있는 음성으로 말하였다. “내 이제 아무 미련 없다. 미련 없데이”
라고 하시며 돌아누운 뒷모습은 너무 작아져 보였다. 야위어진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보며 “어머니! 미련이 있어야 빨리 회복됩니다. 마음 강하게
잡수세요”라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씀을 하지 않았다.
( ―「아무 미련 없다」
헌신과 희생의 아이콘인 어머니, 그녀는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 자신을 다 내려놓고 오직 가족을 위해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다 해냈다. 그것은 충만하고 행복한 일이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본 사람, 어머니에겐 자식들의 성가와 평안 이상으로 바랄 게 없다. 자식들은 다 잘 되었다. 미련이 있을 턱이 없다. “아무 미련 없다”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그 말은 노승이 열반에 들며 하는 화두처럼 두텁고 무겁게 뇌리에 침잠하였다.
장남에게 자책의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마지막 배려라 여기고 싶었다.
―「아무 미련 없다」
자식에게 삶의 거울은 부모다. 부모의 생활 태도가 자식에겐 도덕률이 되고 윤리의 틀이 된다. 삶의 종착에서 아무 미련이 없으려면 어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그는 어머니를 메꽃에 비유한다. 아무 땅에서나 슬며시 움이 터서 무더운 여름 아침을 환하게 밝히는 메꽃, 어떤 보살핌을 받지 않아도 연분홍 티없이 맑은 빛으로 다소곳이 피는 꽃이다.
누구에게도 쉬이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이 있어 넋두리처럼 하소연 하면
어머니는 늘 엷은 미소를 띠셨다. 고해성사처럼 말하는 것으로 번민은 해결되었다. ―「메꽃」
우리는 이렇게 만나고 또 이렇게 헤어진다. 작별 후에 사랑의 존재는 좀 더 깊고 이윽하게 되돌아온다. 정작 사랑은 작별 후에 완성되는 것, 그 사랑은 누군가를 향하여 뿌려지는 또 다른 사랑의 씨앗으로 여물 것이다. 우리 문화는 제사에 생일에 명절에 조부모와 부모를 통해 구전되어 오던 가족사가 있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우리의 정체였다. 허나 그 모든 의식이 간소화되거나 사라짐으로써 이제 가족의 이야기도 사라져가고 있다. 어떤 사람은 할아버지의 성함도 모르고 어떤 이는 사촌이나 육촌을 만나 본 적도 없이 사람들은 핵분열하여 일인가구가 전 국민의 30%에 육박해가고 있다. 우리의 정체 중요한 축 하나를 우리는 스스로 폐기해버렸다. 첨단과학 시대에 우리 스스로를 고아처럼 내팽개치고 고독만을 외치고 있는 꼴이다.
아마도 우리는 수필을 쓰기에 후대에 가족사를 남길 수 있을 것이 다. 이 기록들은 우리 문화와 풍습에 중요한 자료로 그 역할을 떠맡을 것이다. 혹자는 가족 이야기는 지겹다, 그것이 문학일 수 있느냐, 수필의 흐름을 우려하지만, 그런 우려 때문에 인간을 향한 탐구를 포기해선 안 된다. 가족은 우리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깊이 관찰하고 인간에 관해 탐구할 수 있었던 중요한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작가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던가. 고향의 향교에 사십 년 넘게 다닌 유학자시다. 그토록 오래 다니셨으므로 지방 문묘를 수호 하는 향교의 책임자인 전교라는 직분을 맡을 적임자였다. 전교의 직함을 가지면 사후에 비석에 ‘학생’이 아닌 ‘처사’라고 새겨넣을 자격이 된다. 당연히 전교가 되길 희망하셨다. 젊은 시절에는 “마을 이장 과 새마을 지도자를 이십 년 넘게 하셨다.” 지방의 누구도 아버지가 전교 직함을 맡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뜻밖에 변수가 생겼다. 공직에서 정년퇴직한 사람이 향교에 입교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전교에 출마 선언을 해버렸고, 합의 추대로 이어져 온 마을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깨지고 말았다. 사실 아버지의 소망은 전교보다도 사후 비 석문에 ‘처사’라는 신분으로 새겨지길 바랐던 것이다. 아버지는 출마 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근 일 년을 향교 출입을 삼가셨다. 배움을 향 한 열의가
결국 노구를 다시 향교의 문턱을 넘게 하였다. 그 후 삼 년 을 빠지는 날 없이
열심히 다니셨다.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한 논어책이 선비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처사」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그 꿈은 무산된 듯 보였다. 그런데 향교의 간부들이 빈소로 와서 회의한 결과 아버지를 ‘처사’로 추존했다. 일반적으로는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든 현고처사부군신위(顯考處 士府君神位)든 같다고들 한다. 요즘 인터넷에서 한지에 인쇄된 지방을 주문해 쓰는 집도 많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처사는 벼슬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서 사는 선비의 존칭이고, 학생은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 묻혀서 사는 선비의 존칭이다. 작가의 아버지 비문은 현고처사부군신위(顯考處士府君神位)로 새겨졌다.
어머니가 떠나신 후에도 아버지는 홀로 고향을 지키셨다 혼자 계시는 아버지의
안부를 살피려고 본가에 갔을 때다. 옆집 아주머니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버지가 가끔 새벽녘에 소리 내어 우신다고 했다. 그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오히려
새벽에 잠이 없으시면 경전을 낭독하실 것이라며 일축했다. 사실 아버지의 논어책은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하였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지만, 삶에 긍정 적이며 밝게 사시는
아버지께서 그러실 것이라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 다. 바로 잊어버렸다.
―「울음의 단상」
그런 일이 있고 얼마 뒤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셨고 결국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사태에 직면했다. 마지막을 예감하신 아버지는 동생들 (숙부와 고모)을 찾으셨다.
연락받고 병실 문을 들어서는 숙부와 고모를 보신 아버지는 입만 크게 벌리고
안면의 모든 근육이 일시 마비된 듯 정지하였다. 몇 초가 지나서야 눈을 바르르 떨며
거칠고 가라앉은 울음이 힘겹게 목을 넘 어 나왔다. 영원한 이별의 인사를 차가운
울음으로 대신하신 것이다. ―「울음의 단상」
아버지의 유토피아도 어린 시절 고향의 풍경이었을까.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없이 천진했던 어린 날 같이 뛰놀았던 형제를 만나서야 드러내 놓고 처음으로 오열하며 울고는 눈을 감으신 아버지의 그 마 지막 풍경은 많은 의미를 시사한다. 인간은 결국 어제를 향해 걸어 가는 존재다. 아버지를 잃은 작가는 그 자리에서 울지 못했다.
누구나 남몰래 울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럼 울면 되지만 감정만으로 울음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오롯이 나만 존재한다는 공간에서 심상 의 평정을 허물어야 한다. ―「울음의 단상」
남모르게 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맘 놓고 울 수 있었던 것은 뜻밖에도 청춘 시절 들었던 음악에 기대서다.
잔잔한 파동의 음악은 깊은 어둠을 타고 심장으로 훅 들어온다. 감정과 음악이 변곡점에서
동시에 만나면 순식간에 울음이 폭발한다. 마음껏 운다. 삼키지도 않고 절제하지도 않는다.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은 따 뜻함을 넘어 포근하다. 울음은 어느새 실존의 고독을 부드럽게
치유해주 고 있다. 과도하게 쌓여 주체 못 하는 감정의 곳간을 비워 개운하게 재정 비한다.
나만의 유토피아에 거닐다 돌아온 느낌마저 받는다. ―「울음의 단상」
울음은 위로이며 치유다. “나만의 유토피아에 거닐다 돌아온 느낌 마저” 드는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인 것이다. 여리고 예민하며 풍부한 감성을 간직한 작가다. 그는 이제 아버지 가 남기신 고향 땅을 가꾸고 있다. 그 땅이 생산성이 있을 리 없다. 요즘 시골 땅은 가꾸면 가꿀수록 비용만 발생할 뿐이다. 그럼에도 왜 그 땅을 처분하지 않고 가꾸어야 하느냐?
생산성이 처지더라도 애틋한 정이 가는 땅이 있는 법이다. 경작하는 농부의 마음과 땅의 호흡이 맞으면 마치 명당을 만나는 듯 정이 갈 수 있다. 그곳이 여기다. 이 밭에는 어른들이 그토록 땀 흘리며 쏟아부었던 삶이 고스란히 스며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그리움의 섬」) 경제성이 제일인 시대, 시골 땅에 땀을 흘리는 것은 어리석은 낭만 인가. 곧 지치고 말겠지, 혀를 차는 사람들도 흔하다. 그러나 그는 작가다. 미래를 향해 달리기보다 과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진정한 작가, 이장중! 그와 함께한 시간은 아주 충만했다. 첫 수필집 출간을 축하드린다.
kjw2605@hanmail.net
문학평론가,
에세이스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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