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뒤바뀐 여자와 남자 김불환이 깜짝 놀라 몸을 돌이키는 순간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주칠칠, 네 년이었구나!"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도망갈 생각이에요? 심랑! 심랑! 이 녀석들이 모두 여기에 있어요. 빨리 오세요." 그녀는 이렇게 소리치며 바람처럼 손을 뻗더니 수 장을 공격해 들어갔다. 김불환은 사실 그녀의 출현이 놀랍기도 했지만 내심으로는 기뻤다. 그는 그녀가 호랑이 굴속에 들어온 양무리라는 생각에 순간적으로나마 기쁜 생각이 들었으나 주칠칠의 입에서 심랑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의 손에는 갑자기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의 머릿속에 번개 같은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 주칠칠 네가 이곳에 나타난 이상 심랑이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겠지.) 주칠칠이 대갈을 터뜨렸다. "김불환! 도망갈 생각은 버려라!" 김불환이 중얼거렸다. "도망갈 생각을 버리라고?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맞아 죽으라는 말이냐?" 그는 더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번쩍 손을 들어 옆에 있는 문을 활짝 열고 그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 석실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던 것이다. 그 문은 얼핏 보기에도 묘 밖으로 통하는 지하통로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칠칠이 말했다. "좌공룡! 저 녀석은 도망을 갔지만, 네 녀석은 도망갈 생각을 버려라." 좌공룡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김불환 그 녀석이 도망을 갔는데, 내가 왜 도망을 가면 안 된다는 말이냐? 내가 바보인줄 아느냐?) 그는 발바닥에 기름이라도 바른 듯 김불환보다도 더 매끄럽게 도망을 가버렸다. 주칠칠이 크게 소리 질렀다. "사내 녀석들이라면 도망가지 말아라! 네 녀석들은 도망갈 수 없을 거야!" 그녀는 쉬지않고 도망가지 말라고 계속 소리를 질러댔으나 자신은 뒤쫓아 가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입으로는 그렇게 소리쳤지만 속으로는 그들이 더 빨리 더 멀리 도망가기를 바랐다. 왕련화는 주칠칠이 문을 열어 제치고 나는 듯이 들어오는 순간,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심랑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주칠칠이 꼼짝않고 선 채 김불환과 좌공룡에게 도망가지 말라는 소리만 지르는 것을 보자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웃음이 삐어져 나왔다. 주칠칠은 여전히 소리치고 있었다. "심랑! 저 녀석들이 그쪽으로 갔어요. 빨리 쫓아가세요." 왕련화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왕련화는 아직 도망가지 않았으니 더이상 쫓아갈 필요없소!" 주칠칠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바로 심랑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이때, 채 무덤밖으로 뛰쳐 나가지 못했던 김불환이 심랑의 목소리를 듣자 더욱 재빠르게 무덤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때 왕련화가 목소리를 낮춰서 웃으면서 말했다. "주 아가씨, 본인을 위험에서 구해주셔서 매우 고맙소." 주칠칠이 몸을 돌려 날카롭게 외쳤다. "입 닥쳐요!" 왕련화가 말했다. "심 형께서는 어떻게 주 아가씨와 같이 오시지 않으셨죠?" "당신, 무슨 얘기를 하는거죠? 그 사람은 바로 밖에 있어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심 형께서 만약 문밖에 있다면 주 아가씨께서는 고의로 그들을 도망가게 소리를 질러댈 필요가 없었소. 그리고 본인도 아가씨를 도와서 심랑의 목소리를 흉내내서 그들을 더 빨리 도망가도록 쫓아버리지도 않았을거요." 주칠칠이 말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얘기 하는군요." 왕련화가 말했다. "상황을 보고 사세를 판단하는 것은 본인의 장기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소."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심랑이 비록 오지 않았다고 해도 나 혼자의 힘만으로도 당신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해요." 왕련화가 말했다. "사실이오. 지금 본인은 닭모가지 하나 비틀 힘이 없소. 아가씨는 당연히......." 주칠칠이 말허리를 잘랐다. "상황이 그렇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당신은 기뻐할 수가 있어요? 당신은 내가 당신을 구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생각하세요? 흥, 천만의 말씀! 나는 다만 당신이 다른 사람 손에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제 손으로 직접 당신을 죽이고 싶었던 거예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당신은 방금 김불환을 위협해서 당신에게 손을 쓰지 못하게 했죠? 그러나 지금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나는 김불환보다 더 큰 고통을 맛보게 할거예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이순간, 아가씨께서 나를 죽인다면 나는 기쁘게 그 죽음을 받아들이겠소. 아가씨처럼 아름다운 미녀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김불환과 같은 그런 애꾸눈의 병신에게 죽는 것보다는 훨씬......."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내 손아귀에 사로잡힌 게 김불환에게 사로잡힌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시나 보죠? 틀렸어요! 김불환은 기껏해야 당신을 쉽게 죽이고 말겠지요. 그러나 나는, 나는 당신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려 죽일 거예요." 그녀의 뇌리에 왕련화가 종종 그녀에게 했던 못된 짓들이 스쳐갔다. 그녀는 가슴에 응어리진 분노가 폭발한 듯 한달음에 왕련화가 누워있던 침상으로 달려가더니 손을 들어 세차게 그의 따귀를 몇 대 올려붙였다. 왕련화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 같은 아름다운 미녀의 섬섬옥수에 따귀를 맞는 기분도 과히 나쁘지는 않군요. 아가씨게서 손이 아프지 않으시다면 몇 대 더 때리셔도 좋소이다." 주칠칠은 어이가 없어하며 입을 열었다. "진심에서 하는 말인가요? 좋아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손을 들어 따귀를 대여섯 차례 올려붙였다.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기분이 좋군요, 아주 기분이 좋아요." "기분이 좋다니 다시 몇 대 더 때려 드릴까요?" 그녀는 다시 일곱,여덟 차례 세차게 왕련화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왕련화의 얼굴은 마치 썩은 돼지간처럼 검붉은 색깔로 변했으며 퉁퉁 부어 올랐다.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따귀를 맞는 기분이 좋으신가보죠? 더 때려 드릴까요?" 왕련화는 놀란 듯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주 아가씨, 당신...... 당신......." 그는 당신 소리만 연발할 뿐 그 유창한 말솝씨가 어디로 갔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여전히 그 곳에 남아있던 두 아가씨는 주칠칠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들은 꿈에도 이처럼 선녀와 같이 예쁘게 생긴 소녀의 마음이 이처럼 독랄하고 수단이 악독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주칠칠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말을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더 때려 달라는 의사인가요? 좋아요, 더 때려 드리지요." 그녀는 비록 공력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따귀를 올려 붙이고 있었으나 그녀의 손은 매우 빠르고 매서웠다. 왕련화가 마침내 탄식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언제부터 이렇게 독한 여자로 변하게 되었소?" 주칠칠이 말했다. "이제 그만 때리라는 건가요?" 왕련화가 재빨리 말했다. "제발 부탁이오. 그만 때리시오." 주칠칠이 말했다. "따귀를 맞는 게 억울한가요?" "아니오, 아니오! 조금도 억울하지 않소." "왕련화, 당신이 만약 나를 예전의 주칠칠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에요. 나는 옛날, 당신에게 희롱을 당하던 그때의 주칠칠이 아니에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나는 완전히 변했어요." "아가씨께서는 혹시 화난 일이라도 있으시오? 누가 아가씨를......."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또 주칠칠이 손을 들어 그의 따귀를 두 차례나 올려붙였다. 주칠칠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만약 더이상 허튼 소리를 하면 지금 당장 당신의 한쪽 귀를 잘라버리겠어요. 당신이 믿든 말든 그건 맘대로지만, 흥, 당신은 똑똑히 알아두어야 해요. 나 주칠칠은 그렇게 호락호락 가볍게 보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에요." 왕련화가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알았소, 알았소!" "당신, 내가 저번에 당신 손에 얼마나 처참한 몰골이 되었는지 기억하고 계세요" "기억하오. 예, 기억합니다. 아니오, 아니오. 기억하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가씨께서는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서 무엇을 하시려고......." 왕련화는 매우 당황한 듯 횡설수설 했다. 주칠칠이 말했다. "지난 일을 다시 꺼내서 무얼 하냐구요? 흥! 나는 평생 그 일을 잊지 못할 거예요. 하느님께서 내 마음을 알고 당신을 내 손에 보내준거라고 생각해요. 더이상 할 말이 있으세요?" 왕련화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본인은 더이상 할 말이 없소. 주 아가씨께서 나를 어떻게 하든 나는 달갑게 받아들일 뿐이오." 주칠칠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아요. 먼저 이리 주세요." "뭐, 뭣을 말이오?" 주칠칠이 노갈을 터뜨렸다. "모른 척 시치미 뗄 건가요? 나를 속여서 빼앗아간 물건을 돌려달라는 거예요." 왕련화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알았소, 돌려드리리다." 그의 팔은 과연 가볍지 않은 듯 얼굴을 여러 번 찡그리며 용을 쓴 다음 겨우 주칠칠에게서 빼앗아간 귀걸이 한쌍을 꺼냈다. 귀걸이를 보는 순간, 주칠칠은 재빨리 달려들어 왕련화의 손에서 그것을 낚아 챘다. 그리고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왕련화, 당신은 오늘 같은 날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죠?" 왕련화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또 다른 분부라도 있으신지요?" 주칠칠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쓸어올려 귀걸이를 다시 귀에 꽂으면서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기 시작했다. 그녀가 서쪽으로 걸어가면 왕련화의 눈도 그녀를 따라 서쪽으로 가고, 그녀가 동쪽으로 걸어가면 왕련화의 눈도 그녀를 따라 동쪽으로 옮겨졌다. 그는 전심전력을 다해 주칠칠의 현재의 마음과 고민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듯했다. 이때, 붉은 옷을 입은 아가씨가 의자를 끌어다가 주칠칠의 옆에 놓으며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 그만 화내시고 이곳에 앉아서 좀 쉬세요. 왕 공자께서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것은 왕 공자가......." 주칠칠은 그녀의 말을 가로채고 노한 소리로 말했다. "잔소리 그만하고 멀찍히 물러서요. 저 녀석이 나한테 잘못을 했다고? 흥, 저 녀석은 나한테 잘못을 할 자격도 없어요. 아가씨는 한쪽 구석에 얌전히 서 있으세요. 그러면 제가 결코 아가씨를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지 않고 만약 이 일에 끼어들어 이러쿵 저러쿵 얘기를 한다면, 흥!" 붉은 옷을 입은 아가씨는 재빨리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결코 아가씨 일에 끼어들지 않겠어요." 그녀 자신도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가 화가 나면 남자보다도 더 악독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과연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한쪽 구석으로 물러섰다. 이때 왕련화가 얼굴에 득의에 찬 기색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남자들이 변심하는 것은 아주 나쁜 짓이오. 주 아가씨께서 만약 변심한 남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마땅한 사람을 찾는다면 본인이 가장 적임자라고 할 수가 있을거요." 주칠칠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날카롭게 그의 말을 잘랐다. "닥쳐!" 그녀는 흉악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으나, 그녀의 눈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왕련화의 이 몇 마디 말은 확실히 그녀의 아픈 곳을 건드렸던 것이다. 왕련화는 속으로 암암리에 기뻐했다. 그는 주칠칠이 지금 당장 결코 그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 잘 모면하면 틀림없이 주칠칠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주칠칠은 다시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왕련화의 두 곳의 혈도를 제압했다. 그리고 이불로 그를 둘둘 만 다음 옆구리에 끼고 방 밖으로 벗어났다. 붉은 옷을 입은 아가씨가 얼른 물었다. "아, 아가씨! 왕 공자를 어디로 데려 가시려고 그러는 거죠?"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만약 누가 돌아와서 아가씨들에게 묻거든 아가씨들은 왕련화는 주칠칠에게 납치되어 갔다고 애기해 주세요. 그리고 또 한 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마세요. 만약, 왕련화의 부하들이 나 주칠칠을 찾아서 왕련화를 구해낼 생각이라면 나 주칠칠이 먼저 왕련화의 목숨을 빼앗고 나서 그들을 상대할거라고 말이에요." 그 아가씨는 눈망울을 몇 번 굴리더니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수하들이 돌아올 때면, 아마 우리도 이 자리에 없을 거예요." 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왕련화는 탄식하면서 말했다. "웃음을 파는 여자들은 정말 믿을 게 못 되는군." 그 말을 들은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강호상의 남자들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왕련화가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그렇소. 강호상의 남자들도 믿을만 하다고는 할 수 없지요." "흥, 내가 당신을 안 후로 처음으로 당신에게서 사람다운 말을 들어보는군요." 그녀의 경공은 비록 약하지 않았으나 어깨에 다 큰 남자를 떼메고 먼 길을 걷는다는 것은 확실히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왕련화의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왕련화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본인을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시는 거요?" "이곳에서 명령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에요. 바로 나, 주칠칠 한 사람 뿐이라고요. 아셨어요? 내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든 당신은 입닥치고 가만히 있기나 하세요." 왕련화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알았습니다." 주칠칠은 눈을 들어 사방을 쳐다봤으나 사람이 사는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약간씩 조급해져 갔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여자가 다 큰 남자를 어깨에 떼메고 이리저리 돌아다닌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칠칠이 한쪽 방향을 택해서 한참을 걸어갔을 때 마차들이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마 큰 길로 접어든 듯하였다. 사방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자신이 큰 길 로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주칠칠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말라 비틀어진 나무 둥지를 찾아내어 그곳으로 다가가 큼직한 바윗덩이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어깨에 메었던 왕련화를 눈덩이 위로 팽개쳤다. 왕련화는 확실히 사태파악을 잘하는 남자였다. 주칠칠이 아무리 그를 험악하게 대해도 그는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얼굴에 웃음을 띤채, 주칠칠이 하는대로 자신을 내맡길 뿐이었다. 한참이 지났을 때, 마차 한 대가 멀리서부터 천천히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마차가 그들 앞에까지 바짝 다가왔을 때 주칠칠은 벌떡 일어나 마차의 앞을 가로막았다. 천천히 달려오던 마차는 주칠칠이 그 앞을 가로막자 멈춰섰다. 말을 몰던 마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차 안에서 고개 하나가 쑥 밖으로 삐어져 나오더니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빨리 가게. 빨리, 빨리! 이 마차는 전세낸 것일세. 다른 손님은 태워줄 수 없어." 주칠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뻗쳐 마차의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마차 안에는 세 명의 장사꾼 비슷한 차림을 한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매우 눈에 익은 듯하기는 했지만 주칠칠은 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날카롭게 외쳤다. "내려! 빨리 마차에서 내려!" 얼굴이 둥그스런 남자가 깜짝 놀란 듯 말했다. "내리라고? 무엇 때문에 내려?" "당신들은 강도를 만났어요. 아셨어요?" 얼굴이 둥근 남자가 대경실색한 물었다. "강...... 강도가 도대체 어디에 있소?" "내가 바로 강도예요." 그녀는 그 남자가 허리께 쯤에 단도를 차고 있는 것을 보더니 번개같이 손을 뻗어 그 단도를 뽑아내어 무릎에 단도의 면을 대고 밑에서 내리쳤다. 그에 따라 단도가 두 동강이 나버렸다. 그 세 명의 장사꾼 모습을 한 장한들은 그 모습을 보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렀다. 그들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둥지둥 마차에서 내렸다. 주칠칠은 길옆에 쓰러져 있는 왕련화를 안아올려 마차 속으로 팽개쳐 넣으며 말했다. "마부, 빨리 가요." 그 마부도 주칠칠의 기세에 놀란 듯 우물쭈물 했다. "아, 아가씨...... 아니, 대, 대왕님! 어디로 가는거죠?" "앞으로 곧장 가면 되요. 내가 세우라고 할때 세우세요." 주칠칠의 명령에 따라 마차는 다시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를 타고 왔던 세 명의 대한들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들판에 버려둔 채.......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대왕이라구요? 하하! 아가씨가 대왕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겠구려." 주칠칠은 눈을 들어 앞만 바라볼 뿐 그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방금 자신이 했던 행동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마차를 가로채던 그 모습을 생각하자 그녀 자신의 얼굴에 고소가 떠올랐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방금과 같은 일은 그녀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뇌리에 심랑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심랑이 방금 그녀가 해치웠던 일을 보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틀림없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지금 심랑은 어디에 있을가? 일순간 주칠칠의 얼굴에는 희비가 엇갈리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든 왕련화가 지금 내 손아귀에 잡혀 있으니 내 뜻대로 할 수 있겠지. 저 녀석은 똑똑한 녀석이니까 틀림없이 내 말을 들어야만 자기에게 이롭다는 것을 알고 있을거야. 저 녀석이 내 손아귀에 있는 이상, 나는 틀림없이 그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큰 일을 할 수 있을거야. 아마 심랑도 비록 지금은 내 옆에 없지만 내가 큰 일을 해치웠다는 것을 알게 되면 깜짝 놀라겠지......?) 여기까지 생각을 한 주칠칠은 갑자기 용기 백배하여 대갈을 터뜨렸다. "마부! 마차를 멈춰요. 이 부근에서 가장 큰 마을로 가서 가장 큰 객점을 찾으세요. 시키는대로만 해요. 말은 하지 말고. 그러면 당신에게 큰 상을 내릴테니까." 마차는 주칠칠이 시키는 대로 규모가 큰 객점 앞에 멈춰섰다. 주칠칠은 왕련화의 몸을 더듬어 왕련화가 갖고 있던 은표를 찾아냈다. 그 은표를 살펴본 결과 가장 적은 것이 오백 냥 짜리였다. 주칠칠은 아무 생각없이 그 오백 냥짜리 은표 한 장을 마부에게 건네주었다. 주칠칠의 손에서 은표를 받아든 마부는 그 은표를 살피는 순간, 깜짝 놀라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이어서 마부 의 표정에 기쁨에 찬 표정이 떠올랐다. 주칠칠이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일에 대해서 한 마디도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지 마세요. 만약, 한 마디라도 누설했다가는 당신은 내 손에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마부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하였다. 앞에 본 것은 악몽이고, 뒤에 본 것은 좋은 꿈인 듯했다. 주칠칠이 건네준 오백 냥짜리 은표 한 장이면 그의 나머지 여생은 마부 노릇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한 돈이었던 것이다. 주칠칠은 마부의 그러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소리없이 객점 안으로 들어가 계산대 위에 천 냥짜리 은표를 올려 놓으면서 말했다. "이 천 냥짜리 은표로 우리가 여기에 묶을 동안의 숙박비를 계산하세요. 그리고 먼저 이곳에 있는 모든 점원에게 각각 이십 냥씩 나눠주도록 하세요. 그리고 좋은 방을 찾아서 저 마차 속에 있는 환자를 먼저 그 방으로 옮겨 놓도록 하세요." 천 냥짜리 은표는 주인에서부터 말단 점원까지 수십 명의 사람들을 주인을 쫓는 충실한 개의 모습으로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주칠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객점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왕련화가 옮겨졌다. 그 방에는 좋은 차와 술, 그리고 눈처럼 희고 푹신한 침대, 눈처럼 하얀 손수건이 이어져 나왔다. 그 방의 화로에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객점의 모든 점원의 얼굴에는 웃음이 감돌았다. 주칠칠이 점원 한 사람을 붙잡고 말했다. "방금 내가 계산대에 놓은 돈 중에서 일부를 떼어서 남녀 옷을 몇 벌씩 사오도록 하세요. 그리고 다시 크고 쓸만한 마차를 한 대 구해다가 밖에서 대기시키도록 해 주세요. 그리고 내가 부르지 않는 이상 결코 이 방에 들어와서는 안 돼요. 알았어요" 밥 한끼 먹을 시간도 못 되어서 그가 주문한 옷이 들어왔다.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의 씀씀이가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어떻든 내 돈을 쓰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괜찮아요. 왕련화, 당신이 마음이 아프다는 건가요?" "아니오, 아니오! 결코 조금도 마음이 아프지 않소. 내 목숨마저도 아가씨의 것인데 내가 지니고 있는 돈 몇 푼을 아가씨가 맘대로 쓴다고 해서 내 마음이 아플 리가 있겠소 ? 돈만이 아니라 내 살가죽을 벗긴다 해도 나는 달갑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소?" 주칠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처지를 알기는 아는군요?" "당연히 알고 있죠." "좋아요. 당신이 당신 처지를 알고 있다면 당신에게 몇 가지 물어볼 테니까 솔직히 말을 하세요. 먼저, 내가 당신에게 시킬 일이 한 가지 있는데 내 말을 들을 건가요? 얌전히 말을 듣기만 한다면 당신의 목숨은 그래도 살아날 희망이 있을텐데......." "아가씨께서 어떠한 명령을 내린다해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시키는대로 따르겠소." "좋아요. 첫번째, 당신은 먼저 당신의 모습을 바꾸도록 하세요. 눈살을 찌푸리지 말고 시키는대로 하세요. 나는 이미 당신이 언제나 역용술에 필요한 도구들이 들어있는 상자를 몸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아가씨께서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기를 원하시는거요?" 주칠칠은 잠깐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여자로 변장하세요." 왕련화는 깜짝 놀란 듯 입을 벌리고 한참 동안 주칠칠을 쳐다보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자로요? 그것은...... 그것은......." 주칠칠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왜요? 싫다는 건가요?" "나는, 나는 여자로 변하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여자로 변하면 그 모습이 여자다울지 그게 걱정이 되어서......." "여자다울 거예요. 어쨌든 당신의 생김새는 여자와 같은 모습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좋아요, 그 상자를 꺼내세요. 내가 당신의 상반신 혈도를 풀어드릴 테니까 빨리 손을 쓰도록 해요." "아가씨께서는 내가 어떤 모습의 여자로 분장하기를 원하시는 거요?" "하얀 얼굴에 가는 눈썹, 그리고 눈가에 약간 그늘지게 하세요. 아주 오랫동안 병상에 있었던 사람처럼...... 음, 그리고 머리는 봉두난발을 하게 만드세요. 아주 풀어헤쳐진 그런 모습 말이에요." 여자의 모습으로 변장한 왕련화는 과연 그럴듯해 보였다. 하얀 얼굴에 가는 눈썹, 그리고 눈가에 진 그늘은 오랫동안 병을 앓은 미인의 모습이었다. 주칠칠은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옴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왕련화는 울고 싶은 심정인 듯해 보였다. 주칠칠은 옷을 한 벌 집어들고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이 옷을 사면서 점원은 틀림없이 내가 입을 옷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에게 입히려고 이 옷을 사오도록 했던 거예요." 왕련화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눌러 참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다른 시킬 일이 또 있으시오?" "내 모습도 다른 모습으로 분장시키세요." "아가씨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하고 싶은 거요?" "나는 남자 모습으로 분장시키세요." 왕련화는 또 멍청해진 듯 우물쭈물 말했다. "어, 어떤...... 어떤 남자 모습으로 분장하라는 거요?" 주칠칠이 눈을 몇 번 굴리더니 말했다. "아주 우아하고 말쑥한 귀공자의 모습으로 분장시키세요. 그 모습을 보면 모든 여자들이 다시 한 번 보지 않고는 못배길 그런 귀공자의 모습을 말이에요. 당신이 알다시피 내가 말하는 방법이나 행동은 남자와 비슷하니까 별 이상은 없을 거예요." 왕련화는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차라리 역용술을 몰랐다면 좋았겠소." "만약 당신이 역용술을 몰랐다면 내가 진작 당신을 죽여 버렸을거예요." 주칠칠은 드디어 우아하고 말쑥한 귀공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녀는 거울을 들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자 우습기도 하고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어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심랑, 아! 심랑! 만약 지금 당신이 나와 한 여자를 놓고 다툰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나에게 질 거예요." 그녀의 머리에 심랑의 생각이 떠오르자 잠깐 동안 떠올랐던 웃음이 사라지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나 길거리를 오가는 마차 소리와 말발굽 소리는 열려진 창을 통해 여전히 들려왔다. 주칠칠은 벌떡 일어서서 방문을 열어 젖히고 점원을 불렀다. 그에 따라 점원 한 명이 허리를 굽히고 얼굴에 웃음을 띤채 뛰어 들어왔다. 그러나 그 점원은 문 입구에 서있는 것이 남자임을 발견하자 깜짝 놀란 듯 우물쭈물 말했다. "공...... 공자, 공자의 병이 이미 나으신 모양이죠?" 주칠칠은 그의 말을 듣고 점원이 자기를 방금 이불에 둘러싸여 방 안으로 운반되어진 왕련화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내 병이 나아서 안 됐다는 거요?" 점원은 재빨리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는 다만 병이 낳으셔서 축하 드리려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침상에 누워있는 왕련화를 보더니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아, 방금 그 아가씨가 도리어 병이 들었군요." 주칠칠은 얼른 둘러댔다. "그녀가 병이 낫소. 그런데 이 객점이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요?" "저희 객점은 장사가 매우 잘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며칠 동안은 평상시에 비해 손님이 특별히 더 많습니다. 심지어 공자께서 묶고 계신 이 방만 하더라도 어렵게 구했던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주칠칠의 얼굴에 긴장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점원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오?" "뭐 장사치들도 있고 지방의 하급 관리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그 인간들은 공자처럼 많은 교양을 쌓지 못한 사람들이라서 약간 시끄러운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 알았소. 가 보시오." 그 방에서 빠져나온 점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별 이상한 사람들을 다 보겠는데...... 도대체 저 두 사람은 어떻게 된거지? 병든 남자의 병이 그렇게 빨리 낫고, 멀쩡하던 여자가 또 그렇게 빨리 병이 들다니 말이야. 그리고 또 돈을 물처럼 쓰고...... 아이, 어떻든 내가 남의 일에 그렇게 상관할 바가 아니지. 은자를 이십 냥이나 받았는데 이상한 점이 있더라도 모른 척 해줘야지." 주칠칠은 점원이 나간 후 문을 걸어 잠그고 고개를 돌려 왕련화에게 물었다. "왕련화, 이곳에 갑자기 이렇게 많은 강호의 인물들이 나타난 것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무슨 큰 일이 발생할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이죠? 말해봐요." 왕련화가 말했다. "나도 모르는 일이오." 주칠칠이 탁자를 내리치면서 말했다. "당신이 모른다구요?"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강호에는 매일 많은 일들이 발생하죠. 그런데 본인이 어떻게 그 일들을 모두 안단 말이오?" 주칠칠이 코웃음을 쳤다. "흥!" 이때 주칠칠은 갑자기 또 한 가지의 일을 생각해내고 질문을 던졌다. "전영송 그들이 인의장에 들어서자마자 모두 동시에 죽었소. 도대체 그건 어떻게 된 일이죠?" 왕련화는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아, 그게 사실이오 ? 그러나 본인도 그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는데......?" 주칠칠이 날카롭게 말했다. "왕련화, 당신의 짓이 아니란 말인가요?" 왕련화가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본인은 지금 이미 아가씨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몸이오. 생사마저도 아가씨의 손에 달려있소. 아가씨가 본인에게 무엇을 시키든지 그대로 따를 뿐이고, 아가씨가 무엇을 묻는다면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 솔직히 대답할 수밖에 없소. 그러나 아가씨는 본인도 모르는 일을 말하라고 하니...... 아가씨가 나를 죽인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구려."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흥, 언젠가는 당신의 입에서 모든 비밀들이 솔직히 나오도록 만들고 말거예요. 그렇지만 지금은 잠시 덮어두기로 하죠." 그녀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더니 또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소리를 질렀다. "점원!" 이번에는 점원이 아까보다도 더 빨리 나타났다. 점원이 웃음을 띠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 "가서 들것 하나를 구해오세요. 그리고 또 두 명의 힘센 여자를 구해다가 그 들것을 들도록 하세요. 내가 내 조카딸을 데리고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게 해 주어야겠어요." 점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점원이 사라진 후 왕련화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조카딸이라고? 내가 당신의 조카딸이라고 한다면 너무 내가 크다고 생각하지 않소? 차라리 당신의 누나나 동생이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겠소? 그리고 또 제일 좋은 건 당신의 처라고 말하는 게 제일 나을거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혹시 더 많이 믿지 않을까요?" 주칠칠이 노한 기색을 띠고 눈을 부릅뜬 채 말했다. "왕련화! 당신의 얼굴이 또 근질근질해지는가 보죠?" "내...... 내 말뜻은 다만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봐서 한 말이었소." "내가 당신을 내 손녀딸이라고 얘기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세요." 잠깐 말을 멈췄던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내가 당신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데 당신의 기해낭혈(氣海囊穴)을 짚어서 꼼짝을 못 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혈(啞穴)까지 짚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할거예요." 왕련화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주 아가씨께서 하시고 싶으신대로 하시면 되지 나에게 말을 해 줄 필요가 있을까요?" "당신이 만약 얌전히만 있는다면 당신에게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제일 좋은 방법은 눈알마저도 이리저리 굴려서 구경할 생각을 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똑똑히 기억해 두세요.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당신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 일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더 쉽다는 걸 말이에요." 점원이 구해온 들것은 조그맣고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불에 둘둘 말려진 왕련화가 그 들것 위에 비스듬히 앉자 두 명의 여자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그 들것을 번쩍 들어 올렸다. 들것에 앉은 왕련화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왕련화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고 주칠칠은 속으로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왕련화야, 아! 왕련화! 남을 그렇게 괴롭히더니 이번에는 네 녀석이 씁쓸한 괴로운 맛을 좀 보거라.) 사실 왕련화는 떫더름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들것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 갔으며 주칠칠은 그 뒤를 따라서 천천히 쫓아갔다. 그 도시는 매우 번잡했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렸는데도 여기저기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물건을 흥정하는 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왔다. 그리고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중에는 과연 적지않은 무림호걸들이 섞여 있었다. 다만 주칠칠은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길거리를 오가는 무림호걸들의 얼굴에서 모두 기쁜 기색이 넘쳐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이 발생한다해도 결코 흉악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갑자기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길모퉁이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왼쪽에 서있는 사람은 남자였는데 붉은 얼굴에 사자코, 짙은 눈썹에 큰 눈, 그리고 당당한 기세를 띤 전신을 붉은 옷으로 감싼 장한이었다. 오른쪽에 선 사람은 여자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키가 매우 작아 그 붉은 얼굴의 대한의 가슴께에까지도 차지 않았다. 그 여자는 키가 작아 고깃덩어리 같았을 뿐만 아니라 얼굴에는 커다란 혹이 달려 있었다. 만약 그 붉은 비단옷을 입은 대한이 못생긴 남자였다면 그녀는 그런대로 참아줄만 했으나, 그 대한이 기세가 당당하고 훤칠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옆에 선 여자를 더욱더 초라하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자 자연히 길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놀랍다는 기색과 우습다는 기색이 동시에 나타났다. 그리고 두런두런 소곤대는 소리도 들려왔다. "어떻게 까마귀가 대붕의 짝이 될 수 있지?" 그러나 길거리를 오가던 무림인들의 얼굴에는 이 두 사람을 보자 결코 우습다는 기색이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을 알아본 무림호걸들은 공손히 허리를 굽혀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주칠칠도 그 두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웅사 교오와 교수란심 여제갈 화사고가 동시에 이곳에 나타난 거지?) 웅사 교오는 사방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수근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나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들을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고개를 쳐들고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의 옆에 있는 화사고는 모든 마음을 교오 한 사람에게 기울이고 있는 듯 다른 사람이 그들을 보든 말든 수근대든 말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예전과 마찬가지로 못생겼으나 그 차림은 이전에 비해 훨씬 단정해져 있었다. 특히 그녀의 얼굴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기쁨이 넘쳐 흐르고 있어, 지난 날의 그녀보다 훨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반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게 하고 있었다. 주칠칠은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보자 곧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기쁨이 바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도 심랑과 같이 있을 때 가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얼굴에 그러한 애정의 기쁨이 나타나 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던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화사고가 교오와......!) 그녀는 속으로 놀라기는 했으나 그들 두 사람을 향해 마음 속으로부터 축복해 주었다. 화사고는 비록 미녀는 아니었으나 재녀였다. 재녀가 영웅을 짝으로 맞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진심으로 축복했다. 그들 두 사람은 주칠칠 앞으로 곧장 걸어왔으나 주칠칠의 얼굴을 힐끗 한 번 바라본 다음, 그대로 지나쳐버렸다. 왕련화의 역용술은 과연 천하무쌍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가자 주칠칠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때 교오와 화사고는 마침 술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술집의 간판에는 열빈루(悅賓褸)라고 씌여 있었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 길거리에는 아까보다 더 큰소리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방금 술집으로 들어간 그들이 누구인지 아시오? 현재 무림계에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무림계의 칠대 고수에 끼어있는 사람들이오." "내가 어찌 모르겠소?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저 두 사람을 모른다면 장님이라고 밖에 할 수 있겠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저 두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그만 두시오. 몇 마디 더 했다가 괜히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좋지 않소." 주칠칠은 속으로 탄식을 하면서 생각했다. (칠대 고수의 이름이 과연 널리 알려지긴 했구나. 다만 애석하게도 이 칠대 고수 중에 김불환처럼 나쁜 인간도 끼어 있으니.......)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얼른 앞서가던 두 명의 들것을 든 여자에게 말했다. "우리도 열빈루에 가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해요. 수고스럽지만 아가씨를 부축해서 같이 올라가도 록합시다." 이때 왕련화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마치 이상한 인물을 발견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다만 그는 주칠칠에게 아혈을 제압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