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삼청리와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사이에는 해발 380여미터의 작은 山이 있는데, 이가 곧 朝鮮朝 太祖大王이 親히 세번이나 납셨다는 데에서 有來한 御來山입니다. 이는 다름아닌 개국공신 裵克廉 先生을 모셔가기 위하여 태조대왕께서 삼고초려한 古事에서 유래가 시작되는 흔치않은 사연을 담고있는 山이지요. 이산의 주변에는 배극렴 선생의 행적과의 관련으로 생긴 地名이 많습니다. 차근차근 찾아나서보겠습니다. 또 이 御來山에서 멀지않은 곳에 頭陀山이 있는데요. 배극렴선생께서는 이 頭陀山 南麓 癸坐原에 幽宅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을 다녀온지는 아마도 한달은 넘었을것 같은데요.그간 整理를 못해서 올리지를 못했는데...며칠간 이런저런 事由로 山을 못가고보니 이제서 정리하여 올립니다.
墓所入口로 들어섰습니다. 子癸方의 봉우리가 아주 淸秀합니다. 중부고속도로 증평 IC를 나와 증평읍내로 들어오면서 좌측을 보니 병풍처럼 두른산이 아주 멋이 있습니다. 이 보이는 산이 두타산인듯한데, 병장한후 맨 끝으로 뚝떨어짐이...멀리서 보아도 분명 대단한 결인처로 느껴졌는데 다시 起峰하여 멋있는 貪狼을 만들매 아하!! 저쪽에 結穴했으면 大穴이겠구나!하고 중얼거리며 운전하고 가는데...중도에 行人에게 길을 물으니 바로 그쪽으로 가라는 겁니다. 느낌이 오늘 아주 대혈을 구경할거 같습니다.
안으로 들어와서는 뭐 별로 물어볼것도 없이 感이 여기 같습니다. 늘 墓를 찾아 다니다보니...더구나 오래된 舊墓는 요즘 地官이라 하는 이 들이 써주는 거와는 달리 一定한 룰이 있습니다. 전혀 생소한 지역의 묘를 찾아 다니다보면 그걸 자주 느낄수 있는데요. 저기쯤이면 있겠다 싶어 올라가보면 틀림없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옛날 地師들은 아무리 엉터리라 하더라도 일정한 眼目은 트여 있었다는 얘기지요. 실제로 어느 宅의 墓를 찾아간다 할때 워낙 有名한 분의 墓라던지... 저지대에 있어서 금새 눈에 띈다던지...하면 그래도 괜찮은데 高地帶에 있는경우는 참으로 힘든것이 그 墓를 찾아가는 길을 자기네 後孫들이나 알지 남이 알수가 있어야지요. 그래도 한마을에서 오래 사시는분을 만나면 도움이 되는데 또 요즘 우리네 農村이 뭐 사람을 구경이나 할수가 있어야지요. 老人들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그럴려면 여름엔 老人亭...봄,가을,겨울엔 마을會館에나 찾아가야 겨우 몇분 만날 수 있으니....그것도 혼자 다니기에 보통의 熱情을 갖지않고서는 솔직히 어렵습니다. 또 이렇게 다녀와서는 밤늦게까지 作業을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웬만한 熱意로는 안됩니다. 다행이도 저는 地理書,醫書,易學,相書,史書,譜學等에 심취한지가 30여년되니 별 資料없이 그저 머릿속에 들어있는것으로 그냥 써내려 가다가 年度等 기억하기가 좀 뭐한것 정도를... 그내용은 어느책에서 봤다 기억하니까 다시 자료를 찾아서 올리니 좀 쉬운편이지요. 여기 올리는 간산사진들이 이런 여러 과정을 거치며 올리는것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올려놓으면 어느분들은 아주 왼종일 컴퓨터를 열어놓고 살다시피 하며 들낙날락 하면서도 체면없이 잘보았다는 인사 한마디없이 그냥있는것을 보면...나는 오늘은 누가 다녀갔다하는것을 잘알고있는데도.... 솔직히 내가 이런일을 왜 하느냐? 뭐 오랬동안 공부해서 남만 알려줄려하는거냐? 하는 자괴심을 가질때도 많지요. 제가 생각하는 학문은 爲己學이냐? 爲人學이냐? 했을때 爲己學이어야하고, 즉 자신을 닦기위한 학문....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힘써왔다고 생각하는데요. 요즘은 저역시 유행하는 세태에 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남에게 내보일려는 爲人學이 되어가고있는것 같아서 솔직히 좀 걱정이됩니다. 이런저런 생각이나서 말씀드려봅니다.
저기 보이는 봉우리가 玄武峰인듯한데 격침해보니...癸方입니다. 癸峰若太高卽吉虛卽落馬死雷雨之敗有天馬峰卽出公候라. 癸方의 봉우리가 매우 높은것 같으면 吉하고 虛하면 곧 낙마하여 죽으며 우뢰와 비로인하여 실패하고 천마봉이 있으면 곧 공후가 나온다.... 대단한 위세입니다. 어떤 역할을 했을지...
星山伯에 봉해진 배공의 묘가 잠시 失傳하였다가 찾는 과정을 후일 조선조말 고종때 撰해 세운 神道碑는 적고있습니다.
여기 잠시 이 배극렴 선생에 대해서 먼저 설명하고 간산을 하겠습니다. 1388년 5월...이 땅에는 엄청난 대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른바 역성혁명.... 요동정벌에 나섰던 우군도통사 이성계 장군이 명령을 어기고 남으로 회군하여 우왕과 팔도도통사 최영장군을 죽이고 새로운 권력자로 나타나는 일을 우리는 위화도 회군이라고 합니다. 이 위화도 회군에 대하여 잠시 배경을 살펴보면...격변의 시대를 맞고있던 극동지역....고려에는 공민왕이 죽고 아들 우왕이 즉위하자 고려의 외교는 親明에서 다시 親元으로 바뀌며 명나라와의 관계가 더욱 악화됩니다. 1388년 明이 쌍성총관부 관할지역을 영유키 위하여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高麗에 통고합니다. 이에 고려는 최영을 중심이 되어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明의 대전진기지였던 요동정벌에 나섭니다.
묘로 올라왔습니다. 裵克廉公은 묘소로 존재하고...부인 順興安氏는 지단비인데 造墓를 해놓았군요. 쌍분이나 합장을 하질않고 이렇게 해놓은 이유를 조사해보니 순흥안씨의 족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 星州裵氏譜에 배극렴 선생이 순흥안씨 3파 文簡公 安宗源 先祖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고 배씨가문에서 안씨족보에도 등재하여 달라는 요청이 있어도 陽村 先生이 지은 문간공의 墓誌에 일등공신인 배극렴 선생이 빠져있으며 더구나 문간공과 배극렴선생의 나이차가 1년 밖에 안되어 수긍하기 어려워 족보에 등재를 못하고 있다. 아마 宗源先祖의 형님인 宗基先祖의 따님이 아니었나하는 조심스런 생각이지만 아드님인 思祖先祖가 우왕4년 무진14년(1388년)참화로 인하여 돌아가시고 후손이 절손되어 그런지 아무런 근거 자료가 없다. 배극렴 선생이 나이68세에 卒하자 아들이 없어 누이의 외손인 정숙공 安純先祖가 主喪이 되었다"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우왕은 팔도도통사에 최영장군을...좌도도통사에 조민수 장군을...우도 도통사에 이성계 장군을 각각 임명하여 최영장군은 평양에...좌우도 도통사들은 직접 요동정벌에 나섭니다. 때는 장마철...압록강 하구의 위화도(이 위화도가 압록강하구가 아니라는 설도있음)에 주둔하고 있던 정벌군의 이성계장군은 좌도 도통사 조민수 장군을 설득하여(?) 소위 4대 불가론(以小逆大 一不可,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공격함은 첫째 불가요, 夏月發兵 二不可,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킴은 두번째의 불가요, 擧國遠征倭乘其虛 三不可, 나라를 멀리 하며 정벌을위해 군사를 일으킴은 왜가 더욱 기승하니 헛점을 보이게 되어 세번째 불가요, 時方暑雨 弩弓解膠 大軍疾疫 四不可 . 때가 덥고 雨期라서 弩와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대군이 돌림병을 앓을수 있으니 이 네번째 불가입니다.)을 들어 요동정벌의 부당성을 上書로 회군을 청합니다만, 우왕과 최영장군이 불허합니다. 이에 기수를 남으로 돌려 회군을 하지요....맞서 싸우기 위하여 평양에서 개경으로 옮긴 최영장군은 결국 高峰縣(고양)에서 잡혀 유배후에 죽고,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나고 아들 창왕을 내세웁니다. 역사는 이로써 새로운 시대 새인물의 등장을 효시합니다. 여기서 많은 학자들이 논란을 하지요. 과연 이때 뜻한 바 대로 요동을 정벌했으면 우리가 만주를 빼앗기지 않았을것이라구요.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적인 얘기일 뿐...
來龍은 癸丑으로 들어옵니다. 당시의 배경설명은 이정도로 하고...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주인공 배극렴 선생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배극렴 선생의 자료는 정사와 야사가 조금 다릅니다. 정사는 본관은 京山 또는 星山이고, 고려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상주의 목사등 여러관직을 거치고 특히 왜구를 토벌하는데 공을세웠으며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서 더욱 여러차례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1388년 위화도회군시에는 助戰元帥로 참여하여 舊勢力을 추방하고 이듬해 양광도찰리사등을 역임하였으며 1390년(공양왕2년) 중군총제,판삼사사를 거쳐 수문하시중에 올랐으며 1392년 우시중으로 조준, 정도전등과 모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개국공신1등에 책록되어 星山伯에 봉해지고 문하좌시중이 된걸로 되어있지만....
야사에는 공민왕이 宦者 최만생의 시역사건으로 죽으니 배극렴 선생은 政事의 의지를 잃고 부인과 더불어 충주로 낙향 ...주덕의 동혈에 은신처를 정하고 부인은 굴앞에 베틀을 놓고 베를 짜고, 자신은 나무를 하여 野人生活을 하는데...1388년 5월 이성계장군이 위화도 회군을 감행 , 6월에 우왕의 아들 창을 세우고, 다시 1389년에 정창군을 공양왕으로 옹립하는데, 이 때는 이제 廢假立眞이라는 참으로 묘한 이론으로 우왕과 창왕은 王氏가 아닌 신돈의 씨라하여 정창군을 옹립 공양왕을 세웁니다. 민심은 고려를 이미 떠나고 있지만 이를 한데모으자면 신망이 높고 국정에 경험 많은 분들의 자문이 필요했던 이성계는 이색,우현보,정몽주,배극렴등을 찾게 되는데... 결국 자신의 뜻에 동조하지않는 정몽주선생은 선죽교에서 주살하고, 이색,우현보 선생은 옥에 가뒀으며, 배극렴 선생은 행방이 묘연하여 전국8도에 명을하여 찾으니.... 우연히 충주고을에 거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癸坐丁向을 놓았네요. 실제 내광은 어찌하였는지 모르겠지만 비문과 봉분상으로 보면 癸坐입니다. 용미를 아주 길게 조성했네요.
결국 세번을 찾아오는데, 첫번째 왔을때는 배극렴 선생이 외출로 못만나고, 두번째 왔을 때는 팔봉산에 가서 만나지 못하고...세번째 방문해서야 동혈에 낮잠을 자는 배극렴선생을 만나 솔직한 심정으로 집권계획을 설명, 협조를 부탁하니, 결국 밖으로 나온 배극렴 선생이 대왕대비를 만나 공양왕의 무능과 국운쇠퇴를 설명하고...조준, 정도전등과 거사를 도모하여 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즉위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는데...태조가 세번이나 찾아온곳을 三訪里, 부인이 베틀을 놓고 베를 짜던곳을 베틀골, 임금이 세번방문했다고 하여 갈미봉을 御來山, 처음 태조와 국사를 議論한 山을 국사봉이라 한다고 野史에는 傳합니다. 또 배극렴 선생은 가는곳마다 치적이 대단했는데요. 따라서 지명으로 전하는곳이 여럿입니다. 관향인 성주 관하리에 살고있을때는 근처의 황무지를 개간해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게하니 백성들은 그의 공을 고맙게 생각해 그곳의 땅과 하천을 裵川, 裵野라 부른다합니다. 또 공민왕 12년(1363년) 진주목사로 부임해서는 산에서 잣나무를 북쪽 관아에 옮겨 심으니 진주사람들은 선생을 추앙하여 이 나무를 侍中栢이라 하엿다 합니다. 또 우왕 4년에는 왜구의 침법을 막기 위하여 합포성(현재 마산시 합성동 위치)을 쌓았는데 성의 원형은 소실되고 석벽일부와 근처에 돌만 남아잇지만 경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고려말에는 떠도는 풍문마저 "菲衣君子의 지혜로 삼한을 바로 잡는다"하였는데 "菲와 衣를 합하면 裵" 字로 이는 배극렴 선생을 지칭한것으로 결국 선생의 도모에 힘입어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니 선사들의 예언은 참으로 신통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사를 믿어야할지 아니면 야사를 믿어야할지 헷갈리지요. 하지만 정사란 항상 승자에 의해서 기술된것이고. 야사는 이를 직접 경험한 민초들에 의해서 전하고 전해온것이니...일장일단이 있을것으로 생각되는데 우선 정사를 근간으로 야사는 참고로 알면 된다 생각합니다. 야사에 전하는 얘기도 전혀 사실과 다르다면 어찌 지명같은것은 그렇게 생겼는지..이 또한 납득이 안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룡도 아주 좋고...丙,午,丁 三方이 三起했네요, 용호의 생김새,크기, 내명당, 조산등이 아주 좋은데요. 案山之圓峰有子孫之封君입니다. 兩得水는 바로 穴前에서 合水하고, 인위적으로 저수된 물을 이동시키고자 만든 수로마저 횡대 환포수로 되어 있지만...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자손이 없어 양자했다 하는데요. 이런 경우는 양자 발복이 내룡에서 나오던지...아님 사격에서 양자 발복의 사격이 보이던지 해야 합니다만...그런게 안보이니....별무 소용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랬는지 한때 산소를 실전하여 조선후기에 와서야 찾았다 합니다. 그래서 신도비도 1888년(고종25년)에 세운것이라 하네요.
來龍 後屛帳으로 되어있습니다. 乾方의 봉우리가 아주 좋습니다. 잠시 乾峰이 좋으면 어떤지 한번 보실까요? 乾峰有二卽出宰衡之臣及分野州郡之官應於辛辰年太高卽爲武權虛卽爲賊將亡家 乾峰이 두개가 있으면 宰衡(재상과 문형)의 신하가 나오며, 分野에 미치는 州郡의 官이 辛辰年에 應한다. 매우 높으면 곧 武權을 쥔자가 나오며 虛한즉 반역의 장수가 되어 집이 망한다. 또 乾峰龍眞穴的造化工定登台閣位三公 용진혈적 한곳의 乾峰은 조화공을 구비하면 반드시 台閣의 位가 三公에 오른다. 壬峰도 어떤지 한번 볼까요? 壬方太高卽吉虛卽火災子孫流離爲蠻夷之人有蛇頭形出癎疾....壬方이 매우 높으면 吉하고 虛한즉 화재로 자손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오랑캐의 사람이 되며, 蛇頭形이 있으면 간질하는 자손이 나온다. 亥方을 보면, 亥峰太高卽無妨虛卽蚯蚓滿棺. 해방의 봉우리가 매우 높으면 방해함이 없고, 虛한즉 지렁이가 관에 가득하다.
이토록 여러 방위의 峰이 뛰어나게 좋은데요. 뭐 후손이 없으니....뭐 죽은자식 거시기 만지기지....
子方의 봉우리가 아름답고 뛰어난데 또 子峰한번 볼까요? 子方而後峰高而有六出御使及輔翼天子之官分野州官應於丙年太高卽吉虛卽子孫流離敗亡 子方의 뒤봉우리가 높으면 6 어사가 나오며 輔翼天子의 官에 미치며 分野의 州官이 丙年에 나오고 매우 높은즉 吉하고, 虛한즉 자손이 뿔뿔이 흩어져 敗하여 亡한다. 또 坎峰沖天秀入雲乾峰獨步黃金門 坎峰이 하늘을 찌를듯 빼어나 구름에 들어갈 정도이거나, 乾峰이 獨步면 황금門에 든다. 이토록 좋은데요. 자손이 없어 아무 소용이 없으니 너무나 안타깝네요. 벌써 새벽두시반이네요. 내일 이어서 계속 쓰겠습니다.
艮得입니다. 依水所立에 대한 문제는 우리 학회와 배치됨으로 여기서 자세히 논하지는 않겠습니다만 丁破라면 山澤이 通氣한 少陽少陰이 만난 격으로 아주좋은 국이며, 錦囊秘藏에는 艮有圓峰長子科.... 간방에 둥근봉이 있으면 장자가 과거에 합격한다로 되어있습니다.
靑龍砂도 一字文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방향을 좀 바꾸어서 백호의 발룡지를 다시한번 본 모습입니다.
내백호가 외면을 하네요. 일부는 안아줬지만 본신이 외면했으니...지손들이 뛰쳐나가고...집을 보살피지 않겠네요. 이거 하나가 혈이 안고있는 태생적 큰 결점입니다.
위에 서술한 내용들의 근간은 이 비문에서 옮긴것입니다. 壬申年이라함은 1392년 이성계가 처음 등극한 해이고 12막료들이 처음으로 왕에게 아뢰어 일을 도모함(등극)을 말하며, 이때에 배극렴 선생이 左侍中으로 개국 1등의 원훈이 있고....태종은 上(태조)이 세번 찾아왔다하여 그곳을 三訪里, 그 山을 御來山이라 부르라 했다는 내용과 太祖 개국시에는 순충적덕병의보조정사공신으로 성산백에 봉해지고 식읍으로 천호 丹書를 철권하여 실어 보냈음을... 기록했고(정난 공신은 후일 다시 추증한것으로 보임), 공이 辛巳年 (1401년 태종 1년)9월8일에 67세로 돌아가심을...이에 禮로 葬하니 청안현 서쪽 가까이 두타산 대아봉 남쪽 기슭을 뒤로하여 癸坐의 언덕에 모심을 기록하였습니다.
태종은 公이 上(태조)께서 세번 찾아와도 不起..쉽게 일어나지 않다가..天意 즉 하늘의 뜻임을 알고 일어났다하여 御來山, 三訪里라 부르게하고, 이를 칭찬 공신을 더 올려줌을... 公이 67세로 卒하니 조정에서는 3일간 조회를 철하고, 7일간 음식을 간소하게 먹게 하였음을... 사후에 내린 시호가 貞節公이고,禮에 따라 葬하니..... 上(태조)이 더욱 비통해하며 친히 접빈차 장지에 와서 문하시랑 김사형에게 祭를 行하도록 명하는 내용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수 없는 성은인데...이는 公께서 그만큼 朝鮮開國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함에 비롯된것으로 보입니다.
첫댓글 올리신 글 내용들이 더욱 풍요로워지군요. 정사와 야사, 가문의 족보의 기록까지........ 사격에 대한 발응은 입지안서의 발복론인가요?
예!! 入地眼의 글과 卜舊墳法이라 하여 송곡선생님께서 주신 내용의 글이 일부 들어있습니다. 오래된 묘를 찾아서 간평을 한다는것은 참으로 어려워 신중을 기해야하는데요. 이는 초청해서 가는일도 아니고...그 후손분들께 자칫 결례를 범하는 일이다 보니 여간 조심스럽지를 않습니다. 지난번 경북 예천의 지보리 동래정씨네 묘를 간평함에도 제가 그저 그묘의 결함으로만 표현했을 뿐인데요. 그것이 맞는지 그 후손되시는 분께서 항의성 전화가 왔었습니다. 구태여 지금에 와서 왜 그런일을 거론하느냐는 내용이였지요. 때문에 충분한 자료가 있지 않고는 어떤 이야기도 할수없기에 더욱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때문에도 소산님의 열정이 돋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객관적인 자료를 구하는 것조차도 어려우니말이죠. 풍수지리는 학문의 결과를 증명하는 데 너무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때문에 당대확인이 거의 불가능하지요. 그로인하여 미신으로취급되거나 간사한자들이 혹세무민하여 기인취물하는 핑계가 되기도 하구요 소산님의 열정의 열매가 모아져 후학들이 공부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풍수는 그 길흉의 결과도, 또 지사의 실력도 절대로 당대에 결과가 나올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고 하기 어려운일이지요. 그러나 예전에도 葬宅記를 써서 주는 지사가 있었는데요. 그 지사가 바로된 명사입니다. 자신이 하고있는 地術이, 또 판단이 맞는다는 확신이 서야만 장래에 대한 예언을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지술도 그 지사가 죽고난후에야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있는데, 그래서 좋은 방법은 영명한 지사들이 몇대를 내려가며 사제간에 검증을 한후에 틀림없이 맞는다는 결론을 내린 그런 문서를 가지고 공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을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풍수공부 몇년하고 거들먹 거리는... 이런 세태...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지요. 그런 실력으로 자기네 묘를 한번 직접 점혈,재혈해서 써보라고 해보지요. 집안이 한번 뒤집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수 없습니다. 그런걸 경험해 보아야 이 지술이 무섭다는것을 알게되지요. 그런 경험도 없이 무슨 자신이 최고 실력자인양 떠들고 다니는 행동은 정말 망발입니다. 제가 아는 몇분도 그런 일을 직접 당하는것을 보았습니다. 평소에 자기는 이제 풍수를 다배웠고 자기위에 선생 없는것처럼 행동했는데... 그런일을 연속 당하고나니 아무소리 못하고 그냥 화장해버리고,
다른 지관의 힘을 빌어 이장을 하고나니 조용한 것을 보았습니다. 60여년간 용사를 계속한 스승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풍수는 아무리 입으로 잘 떠들어도 소용없다. 그가 하는 법이 맞는지 안맞는지 판단하는것은 아주 간단하다. 그가 풍수를 오래했다면, 그집 산소를 보면된다. 그리고 그 후손들의 싹을 보면 안다. 왜냐? 남의 묘는 사기치더라도 제거는 잘한다고 했을거 아니냐? 그러면 발복이 되어야지...그걸보고 그사람이 올바른 법을 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면 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이즈음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임을 또한번 깨닫고 있습니다.
좋은 곳을 편하게 감상 잘 했습니다.
잘 보셨다니 즐겁습니다. 이제 가을이니 산행도 가끔 같이 하시자구요.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보셨다니 감사합니다.
바쁘신중에 늦은시간까지 후학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공부하시는데 작은 도움이라고 되었다면 즐겁습니다.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좋게 보시니 고맙습니다.
늘 감사히 보고 공부합니다, 감사합니다
공부에 도움이 되신다면 즐겁습니다. 반복하여 보심이 더좋을것이구요. 올리는 사진에서 제가 별도의 표시를 한 부분은 뭔가 있는 것이니 주의깊게 살펴보세요. 여기서는 제가 사격을 주로 논할수 밖에 없으며, 공공성이 있는 이런 매체에서는 논할 일들이 아니기에 체크만 하는것입니다. 사격도 그렇지만 수세,수법이 논할일들이 더 많습니다만, 거론하지 않습니다.
고맙게 잘 보았습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