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시인>>
<<황인찬 시인의 약력>>
*출생 : 1988년, 경기 안양시
*학력 : 중앙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데뷔 : 2010년 '현대문학' 등단
*수상 : 2021. 제66회 현대문학상 시부문
*시집 : 『구관조 씻기기』『희지의 세계』
<<황인찬 시인의 대표 시>>
마음/황인찬
너는 멀리 떠나기로 결심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그러나 주말이 끝나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만 먼 곳으로
가서는 제철 음식을 먹기로 했다 초봄에 어울리는 여리고 어린 쑥과 향기로운 더덕 살이 오른 어류들, 평소에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많이 먹어 본 적 없는 것들을 너는 떠올렸다
너는 인적 없는 바다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다는 데 놀라며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새삼 감탄하며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쁨은 이렇게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찾아온다
멀리 떠난 너는 죽음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너는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숨을 쉬었다 여전히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너는 주말이 끝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다
슬픔은 바닥을 뒹구는 깨진 유리병 사이에 앉아 돌아올 너를 상상하고 있었다
통영/황인찬원문고개 지나면거기부터 통영이에요외지 사람들은원문고개 지나면 보이는 좁은 만이하천처럼 보이나봐요다들 그걸 두고강이야 바다야 이야길해요외지 사람도 통영 사람도버스가 그곳을 지날 때는모두 오른쪽에 펼쳐진 바다를 봐요거기부터 통영이에요그것은 너무 고단해오는 내내 잠들어 있던 내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그렇다면 나는 아직 통영에 온 것이 아닌데나쁜 일은 아니었다나 자신의 죽음을 구경하기 전까지는 그랬다통영 사람들과 밤 부둣가를 걸었을 때바닷바람이 불어와 그것이 너무 포근하다고 느꼈을 때무슨 일이 있었습니가일어난 것은 무엇입니까대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통영의 모든 것이 아름답군요!나는 말했고돌아가는 버스에서는왼쪽으로 펼쳐진 바다를 보았다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말차/황인찬하얗고 작은 잔에서김이 피어오릅니다기억나는 것은인간을 그만두기로 마음먹던 때의 서늘한 공기와 말차의 씁쓸함눈떴을 때에 옆에 누운 것은죽은 사랑의 얼굴그런데도 그와 입을 맞추고 아침을 먹고그를 보내는군요시간이 없다며 그가 떠난 이곳에는 시간만 남아 있고하얗고 작은 물 위에는 찻잎이 서 있습니다찻잎이 서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누가 말했지만……부서집니다산산이깨져나갑니다그것은 발등이 뜨거워도움직이지 않던 사람의 기억사람의 목에 매달리던 사람의목이 매달리던 날의 마음전력을 다해그만두고 싶습니다화단의 철쭉에는꽃망울이 매달려 있습니다너무 많군요마음은 너무나 작고기억은 거의 부서져 있어서이 시는 도약을 모릅니다부엌 바닥에서깊이 피어 오릅니다발등은 너무 분홍빛이라사진을 찍을 수도 있겟군요이 시는 바닥에 흩어진 것이 모두 식고다 말라 증발할 때까지 여기 한동안 머무르겠습니다아프거나 슬픈 사람이 없어 다행이군요
희지의 세계/황인찬
저녁에는 양들을 이끌고 돌아가야 한다
희지는 목양견 미주를 부르고
목양견 미주는 양들을 이끌고 목장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생활도 오래되었다
무사히 양들이 돌아온 것을 보면
희지는 만족스럽다
기도를 올리고
짧게 사랑을 나눈 뒤
희지는 저녁을 먹는다
초원의 고요가 초원의 어둠을 두드릴 때마다
양들은 아무 일 없어도 메메메 운다
풍경이 흔들리는 밤이 올 때
목양견 미주는 희지의 하얀 배 위에 머리를 누인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익힌 콩과 말린 고기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것이 희지의 세계다
희지는 혼자 산다
오수/황인찬
그 아이를 개로 만들고 싶어서 나는 쓰기 시작했다 쓰다 보니 그것은 소설이었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그 아이는 개였다
하얗고 털이 많고 항상 혀를 내밀고 있다
그 아이는 운전을 잘하는 개여서
우리는 차를 타고 어디든 갔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개였다
나의 품에 안겨서 자주 낑낑거렸다
석양이 질 때면 우수에 찬 개였고
머리를 기대어 앉으면 두 심장이 뛰는 밤이었다
어느 날 나는 나의 영혼을 견딜 수 없었다
그 아이가 너무 좋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개에게 고백했다
사, 랑, 해
너무 떨려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며
한 음절씩 끊어 말했다
그 아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꾸 짖었다”
그것을 다 썼을 때, 어디선가 불이 났다 그것은 소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나는 나의 아름다운 소설을 보여 주고 싶었으나
그 아이는 개가 아니다
종로사가/황인찬
앞으로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다정하게 말했지 하지만 나는 네 마음을 안다 걷다가 걷다가 또 걷다가 우리가 걷고 지쳐 버리면, 지쳐서 주저앉으면, 주저앉은 채 담배에 불을 붙이면,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보았다고 믿어 버리고, 믿는 김에 신앙을 갖게 되고,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깊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겠지 우리는 이 거리를 끝 없이 헤매게 될 거야 저것을 빛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고 그러 면 나는 그것을 빛이라 부르고 사람이라 믿으며 그것을 하염없이 부르고 이 거리에 오직 두 사람만 있다는 것, 영원한 행인인 두 사람이 오래된 거리를 걷는다는 것, 오래된 소설 같고 흔한 영화 같은, 우리는 그러한 낡은 것에 마음을 기대며, 우리 자신에게 위안을 얻으며,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 너는 손을 내밀고 있다 그것은 잡아 달라는 뜻인 것 같다 손이 있으니 손을 잡고 어깨가 있으니 그것을 끌어안고 너는 나의 뺨을 만지다 나의 뺨에 흐르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겠지 이 거리는 추워 추워서 자꾸 입에서 흰 김이 나와 우리는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 느끼게 될 것이고, 그 느낌을 한없이 소중한 것으로 간직할 것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런 것이 우리의 소박한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 것이고, 우리는 추위와 빈곤에 맞서는 숭고한 순례자가 되어 사랑을 할 거야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야 그것이 너무나 환상적이고 놀라워서, 위대하고 장엄하여서 우리는 우리가 이걸 정말 원했다고 믿겠지 그리고는 신적인 예감과 황홀함 을 느끼며 그것을 견디며 끝없이 끝도 없이 이 거리를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그러다 우리가 잠시 지쳐 주저앉을 때,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거기에 담긴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알아 버리겠지 그래도 우리는 걸을 거야 추운 겨울 서울의 밤거리를 자꾸만 걸을 거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서 그냥 막 걸을 거야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아직도 나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나는 너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이것이 얼마나 오래 계속된 일인지 우리는 모른다
이미지 사진/황인찬
아름다움 하나
나무 의자 둘
잠시 찾아와서 내려앉는 빛
이 장면은 폐기되었고
이해하자 좋은 마음으로 그런 거잖아 하나
서양 난 화분이 쓰러진 모양이 둘
너는 그런 걸 어떻게 다 기억하나(다 날아가고 눈 코 입만 남은 사진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날들의 기억)
사진관에 모이는 것으로 마음을 남기던 시절의 기억 속으로 내려오는 저녁이 하나 휘어지는 빛이 둘
(이 순간을 어떤 영화에서 본 것만 같다고 잠시 느꼈을 때, 그것이 어떤 시절에만 가능한 착각이라는 점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나서의 부끄러움)
죽은 아름다움 하나
부서진 나무 의자 다섯
자꾸 뭘 기억하려고 그래(여전히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빛) 예전에는 이렇게 많이들 날려서 찍었지?
(작은 강의실이 젊은 옛날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미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귀를 기울이세요 말하는 사람과 이미지인데 왜 귀를 기울여요 말하는 사람)
웃으세요
친구끼리 왜 그렇게 멀찍이 서 있어요
그 말을 듣고 그냥 웃는 사람의 얼굴이 하나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의 사라짐
그 장면은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빛이 들어가면 다 상하니까
어둡고 서늘한 곳에 보관하세요
불 꺼진 실내에 웅크리고 앉은 빛
받아쓰기/황인찬
바다 쓰기가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이거 삼십 년 전 필름인데 인화할 수 있나요?”
“뽑아봐야 알 것 같은데요”
사진관에 앉아 기다리는데 그런 말이 들려왔다
나는 바다를 쓰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만
“이 사람 멋있네요”
“죽었어요”
겨울 바다는 너무 적막해서 아무것도 받아 적을 말이 없었다 바닷바람은 자꾸 뭐라고 떠드는데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쓰기요
받아쓰기
매년 바다가 넓어진다고 했다
“이 사람은 친구 동생인데 죽었어요”
나는 흰 벽을 뒤로 두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턱을 당기세요 이쪽을 보세요 미소, 아주 조금만요
지시를 따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죽은 사람이 웃고 있으면 너무 이상해”
터지는 소리가 나고
빛이 보이고
화면 위로 보이는 얼굴은 모르는 사람
바다를 어떻게 써요
왜 쓰는데요
바닷가에서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겨울 바다 위를 물새들이 돌고 있었고
“조금 돌아갔어요 이 사진은 안 되겠어요”
그런 말을 들었다
흐리고 흰 빛 아래 우리는 잠시/황인찬
조명 없는 밤길은 발이 안 보여서 무섭지 않아?
우리가 진짜 발 없이 걷고 있는 거면 어떡해
그게 무슨 농담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너는 어둠 속에서 말했지
집에 돌아가는 길은 멀다
가로등은 드문드문 흐리고 흰 빛
이거 봐, 발이 있긴 하네
흐린 빛 아래서 발을 내밀며 너는 말했고
나는 그냥 웃었어
집은 아주 멀고, 우리는 그 밤을 끝없이 걸었지
분명히 존재하는 두 발로 말이야
발밑에 펼쳐진
바닥없는 어둠은 애써 모르는 척하면서
사랑과 자비/황인찬
맞아, 그 여름의 바닷가에선 물새들이 끊임없이
울고 있었어 젊은 사람들이 해변을 뛰어다녔고
맞아, 우리는 개를 끌고 나왔어
그런데 그 개는 어디로 갔지?
쌓인 눈을 밟으면 소리가 난다
작은 것들이 무너지고 깨지는 소리다
우리는 그때 맨발로 뜨거운 아스팔트를 걷고 있었어
물놀이에 정신이 팔려 신발을 잃어버리고도
서로를 보며 웃었고 그때 우리는 두 사람이었지
한 사람의 발자국이 흰 눈 위로 길게 이어져 있다
아주 옛날부터 그랬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웃고 있는 서로를 보며 우리가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무엇을 보고 또 알았는지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을 보며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마음을 주고받았는지
"이런 삶은 나도 처음이야"
그렇게 말하니 새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고
그때 우리는 사람으로 가득한 여름의 도시를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젖은 발이 뜨거운 지면에 남긴
발자국이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도 모르는 채로
겨울 호수를 따라 맨발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