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수필 김 완묵
도봉산 둘레길
2010년 북한산 둘레길 44km가 조성된 후로 1년 만에 도봉산 둘레길 26km마저 완공되어 북한산국립공원 둘레길 70km가 완공되었으니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다. 새로 조성된 그 길이 보고파 안달이 나지만 애꿎은 장맛비에 속을 끓이다 우이동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도선사 입구는 평일임에도 국립공원을 찾는 인파로 만원을 이룬다. 왕실묘역 길로 命名된 이 길은 강북구와 도봉구가 경계를 이루는 고개 마루에서 나무계단을 따라 오름길이 시작된다. 우이암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내려선 곳이 원당마을이다. 이곳에는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어 수령이 자그마치 1,000년이나 되는 거목으로 서울시에서 지정보호수 제1호로 선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은행나무를 바라보는 언덕에 자리 잡은 연산군 묘는 이조의 波瀾萬丈(파란만장)한 역사를 조명할 수 있는 현장이다. 성종의 큰 아들로 태어나 19세에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서예와 시문학에 능통한 어진 임금으로 사치풍조를 근절하기위해 금제절목을 만들고 변방의 여진족을 회유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국조보감을 편찬하는 등 정사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생모 윤씨의 폐출경위를 알게 된 후로 패륜적인 정치로 국정을 문란케 하여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재정을 탕진하는 등 폭정을 일삼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출되어 강화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31세의 나이로 病死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유배지인 교동도에 안장되었다가 7년 후인 1513년 연산군 부인 폐비신씨가 중종에게 간언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성장기의 불운했던 가정환경이 성군의 기질을 타고난 연산군의 행로에 엄청난 역사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파국을 맞게 되었으니 조선의 역사에도 크나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우이동 길(2차선 포장도로)을 건너면 곧바로 정의공주 묘가 나온다. 세종대왕의 둘째딸이며 문종의 여동생이자 세조의 누이이다. 왕세자인 문종과 함께 훈민정음창제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은 정의공주 묘를 뒤로하고 시작되는 방학동 길은 울창한 수림 속으로 오솔 길이 열린다. 신갈나무, 굴참나무, 산벚나무, 상수리나무 등 키가 큰 활엽수가 주종을 이루어 한여름 시원한 그늘 속에서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구간이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 어느 임금이 도봉서원의 터를 정하기 위해 도봉산 중턱에 앉았다가 鶴(학)이 평화롭게 노는 것을 보고 放鶴(방학)이라 불렀다고 하며 방학동의 지형이 학이 알을 품고 있는 金鷄抱卵(금계포란)형이라는 설도 있다.
당 단풍나무와 팥배나무 그늘 속을 지나노라면 알알이 영근 포도송이가 하얀 봉지 속에서 탐스럽게 익어가고 청미래 덩굴과 다래넝쿨이 엉 크러진 계곡을 건너 진달래와 철쭉이 군락을 이루는 동산에 오르면 쌍둥이 전망대가 반겨준다. 나선형계단을 따라 올라선 전망대는 울창한 숲속에서 땅만 보고 걷는 답답함을 한꺼번에 씻어주는 청량감으로 선인봉, 자운봉, 만장봉이 아침햇살에 눈이 부시고 도봉동과 방학동의 아파트 숲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도봉동 주민들이 즐겨 찾는 산책코스를 내려서면 도봉옛길이 시작되는 십자로 안부가 나온다. 이곳에서 무수 골 가는 길은 좌측방향이다. 수백 년 간 무수한 사람들이 왕래하며 다져놓은 이 길은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골짜기를 이루어 호젓한 오솔길이 열린다. 성신여대 생활관 담장을 따라 내려서는 무수 골은 도시민들이 잠시 짬을 내어 자연과 어우러지는 주말농장이 펼쳐진다.
세상사 근심걱정을 버리고 편안히 쉬어갈수 있어 무수골이라 불렀다는 전설대로 완만한 오솔길에는 아름드리 고목들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풀 한포기 없는 무덤을 지나면 영의정을 지낸 晉州柳氏 무덤이 반겨준다. 班常의 차이는 死後에도 이어진다는 교훈을 증명이라도 하듯 너무도 대조적이다.
竹杖芒鞋單瓢子(죽장망혜단표자)로 千里江山을 돌아보는 流浪人들의 발자취가 묻어나는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도봉산의 진수가 펼쳐진다. 신선들이 도를 닦았다는 신선봉, 수많은 봉우리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만장봉, 상서로운 구름이 머문다는 자운봉, 백옥같은 암봉들을 바라보며 유서 깊은 도봉사를 내려서면 황금기와로 치장한 능원사와 조선시대 후기 조대비 신정왕후의 별장 터였던 광륜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암자들이 도봉산의 계곡마다 자리를 잡고 있다.
名山大川을 찾는 시인묵객들의 발자취가 완연하여 조선중기의 학자인 송시열선생이 도봉서원을 참배하고 서원입구 계곡에 남긴 道峯洞門(도봉동문)이 지금도 선명하다. 광륜사 뒷담을 돌아 올라서는 둘레 길은 寂寞空山(적막공산)이다. 수많은 인파들이 도봉서원 쪽으로 몰려가고 호젓한 사색의 길이 열린다. 제법 가파른 계단을 숨 가쁘게 올라서면 의정부와 도봉동이 경계를 이루는 다락능선이다.
의정부시경계를 따라 오른쪽으로 하산 길을 따르면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땀방울도 사그라진다. 다락원길로 접어들면 청소년들의 메카인 YWCA 다락원 캠프장이 반겨준다. 다락원이란 조선시대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팔았던 곳이라고 한다. 미군부대 잭슨캠프 뒤편으로 울창한 잣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강원도의 오지를 걷는 기분이다. 도심 속의 별천지에서 만단시름이 녹아나고 세파에 찌든 때가 말끔히 씻겨 내린다.
수도권내부순환도로와 의정부시외곽도로가 지나는 고가차도에서 망월사유원지까지 도심지의 인도를 따라 진행한다. 망월사역 3번 출구를 나오면 산악인 엄홍길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1960년 9월 14일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엄홍길은 167cm의 키에 66kg의 아담한 체구로, 世界의 高峰 히말라야의 8,000m 가 넘는 14좌를 세계에서 8번째로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등정한 자랑스러운 山岳人이다.
둘레 길은 망월사 중간지점에서 보루 길로 시작된다. 망월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해호화상(海浩和尙)이 왕실의 융성을 기리고자 창건한 절이다. 대웅전 동쪽에 토끼 모양의 바위가 있고, 남쪽에는 달 모양의 월봉(月峰)이 있어 마치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울창한 숲속에 들어서면 기분이 좋아진다. 나무는 산소를 만들어내고 그늘을 드리워준다. 떨어진 낙엽이 포근한 오솔 길을 만들어주니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우리의 몸은 활기찬 피스톤운동을 하고 노폐물을 걸러낸다. 숲속을 파고드는 햇볕과 피톤치드로 샤워를 하고나면 거뜬하게 가벼워진 몸이 양탄자 위를 걸어가듯 가뿐해지고 십년은 젊어진다.
원심사 뒤편으로 오르는 계단 길은 숨이 차도록 가파른 곳이다. 몸속에 노폐물을 쥐어짜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능선에 올라서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사패산 제3보루가 반겨준다. 보루라 함은 국경지대에 설치한 견고한 진지를 말하며 적의 동태를 살피고 비상시에는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시설이다. 천보산의 보루와 함께 삼국시대 고구려가 쌓은 성으로 사패산에는 3개의 보루가 있는데 그중에서 규모가 가장커서 둘레가 250m에 이른다.
모처럼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전망이 좋아 호원동과 수락산의 정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회룡탐방지원센터로 내려서는 왼쪽으로 천년사찰 회룡사가 보인다. 회룡사는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전설이 깃들여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고 부근에 있는 석굴암은 김구선생이 은거하던 곳으로 바위에는 친필서각이 남아있다. 또한 관북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의정부는 태조 이성계가 태종 이방원과의 불화로 함흥차사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지고 이성계의 환심을 사기위해 정승들이 이곳까지 행차하여 정무를 본 후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국립공원에 자생하고 있는 수많은 동식물 중에 생태적,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장 상징적인 것을 깃대종이라 부르며 이곳 북한산 국립공원에서도 산개나리와 오색딱따구리를 깃대종으로 선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산개나리는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극소수의 품종으로 북한산 국립공원이 유일한 자생지로 멸종위기에 있어 자생지조사와 복원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오색딱따구리는 한국전역에 살고 있는 텃새로 검은색, 붉은색, 흰색 깃털이 있으며 나무에 구멍을 뚫고 긴 혀를 집어넣어 해충을 잡아먹거나 호두, 옻나무열매를 먹고 산다.
배달민족인 우리나라가 다문화 국가로 변화하면서 동식물세계도 외래종의 범람으로 순수혈통이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에서도 황소개구리가 대표적이라면 단풍잎 돼지 풀 또한 예사롭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하지 않던가. 번식이 왕성한 외래종에 침식당하는 우리의 순수혈통을 보호하여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싶다.
안골길이 시작되는 회룡탐방지원센타는 회룡역으로 내려설 수가 있고 회룡사를 경유하여 사패산으로 도봉산으로 오르는 길목이라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다. 의정부 시내를 바라보며 걷는 안골구간은 모처럼 탁 트인 공간속에서 지루한줄 모른다. 인구 42만 여명에 82㎢의 면적을 가진 작은 도시 이지만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곳이기에 한수이북의 행정 도시로 제2도청을 중심으로 법원과 병무청, 교육청이 자리 잡고 있다.
예술의 전당, 의정부시의회, 시청, 세무서가 자리를 잡고 있는 행정타운 뒤편으로 조성된 직동공원은 면적이 92만여㎡에 이르며 보금자리 숲, 마루정원과 야생화정원, 산책로가 있는 휴양의 숲으로 조성되어 중앙로에 조성된 로데오거리와 함께 의정부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모처럼 직동공원의 깔끔하게 조성된 공원길을 지나 체육시설이 있는 부라운 아파트 뒤편으로 올라서며 다시 숲속으로 들어선다.
사패산으로 오르는 능선을 따르면 不老藥水(불로약수)가 반겨주고 시원한 약수로 목을 축이고 안골계곡으로 내려선다. 계류를 따라 올라서는 길목에는 작은 암자들이 극락정토를 이루고 안골교를 건너며 산너미길이 시작된다. 완만한 둘레 길을 걸어오며 싫증이 났다면 본격적인 오름길에서 비지땀을 흘릴 차례다. 삼복더위의 열기 속에서 한 걸음 한걸음 올려 딛는 발걸음에 만단시름 녹아나며 가슴이 터질듯 숨이 차오른다.
수없이 올려 딛는 나무계단이 징그러워 한숨이 나오고 苦盡甘來(고진감래)의 수식어가 머릿속을 맴돈다. 사패산의 턱밑까지 올라서는 시련도 전망대의 소나무 그늘아래서 고생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된다. 힘든 고비를 넘겼다는 자부심에 환호성이 절로 나고 개운하게 머릿속이 맑아진다. 오름길의 고생은 내려서는 즐거움이라. 휘적휘적 걷는 발걸음에 생기가 돌고 부드러운 산길을 헤엄치듯 걸어가는 발걸음에 신선이 따로 없다.
사패산은 선조의 여섯째딸인 정휘옹주가 유정량에게 시집갈 때 하사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만큼 사패산은 빼어난 명산이다. 북한산이나 도봉산의 그늘에 가려 숨어 지내지만 정상에서 바라보는 도봉산의 화려한 연봉들과 한북정맥의 중심축을 이룬다. 숨은 비경 울대 골은 강원도 첩첩산중에나 있을법한 오염되지 않은 청정계곡으로 다리품을 팔지 않고는 찾아갈 수 없는 심산유곡이다. 가는 길이 멀지 않다면 웅덩이 속으로 풍덩 빠져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무명봉을 넘어서면 산너미길도 끝이 나고 송추 마을길이 시작된다. 공릉천의 발원지인 울대계곡은 사패산의 맑은 물이 백옥 같은 암반위로 쏟아져 내리는 절경을 이룬다. 상류로 올라가면 원각사가 자리 잡고 원각폭포가 있어 한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시원한 그늘을 찾는 인파들로 절정을 이룬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사패산 터널입구가 나온다. 광폭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차량들의 굉음소리가 귀청을 파고드는 오솔길 휘적휘적 걷는 발길에 거침이 없다. 송추 마을에서 유원지 쪽으로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많아 송추라고 부르는 계곡은 송추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이 2.5km를 흘러오는 동안 양옆으로 식당들이 즐비하여 계곡이 오염되고 있다. 국립공원에서 이주단지 조성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하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해 본다.
충의 길과 함께 군부대가 많은 곳. 오봉 탐방지원센타를 지나며 구불구불 철조망을 따라 반원을 그리며 내려선 교현리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멍멍이가 꼬리를 흔들고 아름드리 고목나무가 동구 밖을 지키는 텃밭에는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들이 풍년가을을 예고한다. 솔 고개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 따분하지만 새로 조성한 도봉산둘레길 26km가 눈앞에 보인다. 제주도의 올래길과 지리산의 둘레길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시간이 날 때 마다 찾아 갈 수 있는 북한산 둘레길이 우리 곁에 있으니 더없이 행복하다.
❮연 재 ❯
종주하는 한북정맥 .2
제 4 구간 노채고개(370m) - 큰 넓고개( ) 24.3km
노채 고개에서 서쪽으로 종주 길이 열린다. 원통산 정수리를 바라보며 절개지 배수로를 타고 주능선에 올라서면 일동 레이크 골프장이 내려다보인다. 수 십 만평의 산과 계곡을 갈고 다듬어 그린을 만들고, 시원하게 펼쳐지는 녹색의 광장을 누비는 골퍼들의 모습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540봉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안부로 내려섰다 올라서면 원통산(567m) 정상이다. 가평군 하면과 포천시 일동면, 화현면의 3개면 경계지점인 정상에는 번호 없는 삼각점과 나무둥치에 매달린 정상표지판이 반겨준다.
정상을 뒤로하고 잰걸음으로 솔밭을 달려가노라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운악산. 우람하게 솟아오른 기암괴석이 가슴속을 후련히 쓸어내린다. 한바탕 된 비알을 내려서면 舊 노채 고개에 도착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가평과 포천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며 통성명을 하고 물물교환을 하던 곳이다. 하지만 일동고개로 도로가 생긴 뒤로는 오가는 인적도 없이 다래 넝쿨에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으니 세상의 무상함을 탓하여 무엇 하리.
노채 고개 산마루에 솔향기 그윽하고 유순한 능선 길에서 날렵한 춤사위로 680봉에 올라서면 운악산이 지척에서 반겨준다. 속살을 훤히 드러내는 운악산. 한북정맥 170km에서 가장 위험하고 스릴 넘치는 마의 구간이다. 집채만 한 바위들을 포개놓은 수직절벽아래서 사방을 둘러봐도 만만하게 올라설 곳이 없으니 난감한 지경에 빠지고 만다.
지옥문의 험상 굳은 나찰 앞에서 어설픈 객기는 금물이라. 이 한 목숨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우회로를 찾아가지만 그 또한 만만치가 않다. 우람한 바위틈새를 비집고 860봉에 올라서면 경기5악(운악산, 송악산, 관악산, 감악산, 화악산)에서도 으뜸인 기암절벽에 산수화가 그림 같고 한북정맥 제일의 절경에 감탄사가 절로 난다.
혼령비와 입석대, 남근석을 뒤로하고 궁예성터를 지나면 서봉(935.5m)의 정수리에 오른다. 천년고찰 현등사(신라 법흥왕때 창건)가 있어 현등산 이라고도 부르는 운악산은 삼각점(일동11 1983년)이 있는 서봉과 동봉(937m)으로 나뉜다. 정수리에서 바라보는 조망 또한 일품으로 백운산(904m), 국망봉(1,168m), 강씨봉(830m), 청계산(849m)으로 이어지는 지나온 길 따라 청아한 하늘아래 달려가는 한북정맥 수원산(705m)이 정겹기만 하다.
운악산에는 궁예성터, 궁궐터, 만경대, 신선대, 병풍바위, 미륵바위, 코끼리바위, 눈썹바위 등이 있고 주봉 만경대를 중심으로 산세가 험하여 기암절벽을 이루고 포천이 자랑하는 봉래 양사언은 "꽃 같은 봉우리가 높이 솟아 은하수에 닿았다고” 노래하였으니 운악산은 이름그대로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구름을 뚫고 솟아올라 그 모습이 마치 瑞記(서기)를 품은 한 떨기 향기로운 꽃과 같다고 칭송이 자자하다.
蓬萊 양사언은 조선 중종12년(1517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서 아버지 양희수와 어머니 문화유씨 사이에 태어났다. 요산요수의 대가답게 가는 곳마다 시가 흘러나오고 지나는 곳마다 풍류의 흔적을 남겼으니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 이 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 만은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 만 높다 하더라.
현등사 갈림길을 지나 835봉에 올라서면 운악산을 갉아먹는 채석장이 흉물스럽게 내려다보이고 대원사로 내려서는 철암재를 지나면 가평군 하면. 상면, 포천시 화현면의 경계지점인 730봉에 오른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아기봉(772m)이 갈리지만 정맥은 서북쪽으로 선회하여 639봉에 이르고 운악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조망 터가 반겨준다. 서쪽으로 가파른 비알 길을 내려서면 47번 국도가 지나는 지하차도를 통과하며 운악산과 작별하고 443봉을 향한다.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을 지나며 단단한 껍질 속에서 봄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부드러운 속껍질을 비집고 피어나는 잎 새들. 애벌레의 식탐 속에 용케도 벗어나 고사리 손의 천진스러운 몸짓으로 신록의 계절을 맞이한다. 숲은 사색의 바다다. 숲에 들어서면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 진다. 살가운 봄바람에 솔바람이 불어오는 오솔길. 발걸음이 경쾌해 진다.
130m의 고도를 극복하는 힘든 고행 끝에 443봉에 올라 북쪽으로 직진하면 아치산(494m)으로 연결된다. 건너다보이는 운악산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험준한 암릉 길을 무사히 자나왔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47번 국도와 어깨를 나란히 남진하는 정맥은 서쪽으로 명덕온천이 내려다보이고, 가평군 상면, 포천시 화현면. 내촌면 경계인 390봉을 지나 명덕 삼거리에 이른다. 포천에서 서파를 지나 현리로 가는 56번 국도를 가로질러 숲속을 헤치며 수원산에 오르려면 390 여m의 고도를 극복해야 한다.
명덕 삼거리에서 서파 검문소로 내려가는 줄기가 천마지맥의 분기점이다. 47번 국도를 넘어 주금산(812.7m), 철마산(709m), 천마산(810 m), 백봉(587m), 고래산(528m), 갑산(547m), 예봉산(683m)을 거쳐 팔당호까지 50여 km의 여정이 이어진다. 또 한 천마지맥의 주금산에서 분기하는 축령지맥은 조종천의 서쪽 벽을 따라 서리산(825m), 축령산(879m)을 거쳐 오독산(624m), 은두봉(678m), 깃대봉(623m) 직전에서 청평대교로 내려서는 20여 km에 이른다.
좌측으로 보이는 축사를 지나 묘지 우측을 통과하여 맥 빠지는 비알 길을 한동안 올라서면 굴 고개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만나고 잠시 후에 수원산(710m) 삼거리에 도착한다. 수원산의 정상은 민간인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기에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하고 기수를 남쪽으로 돌린다. 포천시 내촌면. 화현면. 군내면이 경계를 이루는 수원산을 뒤로하고 널널하게 이어지는 정맥을 따라 헬기장을 지나 군내면과 가산면, 내촌면이 경계를 이루는 3개 면봉에 오른다.
585봉을 지나 두 번째 헬기장에 도착하면 좌측으로 울창한 잣나무 조림지가 나온다. 햇볕도 숨을 죽이는 그늘 속에는 바람마저 활갯짓을 멈추고 서늘한 냉기가 온몸을 파고든다. 산새 우짖는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바다 속처럼 고요하다. 사각사각 밟히는 솔가비의 경쾌한 리듬 속에 사색의 경지로 빠져든다.
송전탑이 있는 641봉에서 우측으로 가산노불골프장과 우금저수지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국사봉 너머로 도봉산과 수락산의 모습이 선명하다. 지루하던 종주 길도 삼각점이 반겨주는 국사봉(547m)에 올라서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남쪽으로 내려오던 정맥이 서쪽으로 선회하여 가파른 비알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십자로 안부를 지나 펑퍼짐한 봉우리에 올라서면 좌측으로 수직 절벽을 이룬 채석장이 전모를 드러낸다.
시끄러운 굉음소리와 뿌옇게 날아오르는 분진을 피해 달려가는 주능선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속절없이 파괴되고 수종개량을 위한 작업현장에서 수 십 년씩 자라온 나무들이 잘려나가는 모습이 보기에도 안쓰럽다. 좌측으로 빙 돌아 묘지 앞에 이르면 육사생도 6・25 참전 기념비가 세워진 큰 넉 고개에 도착하며 4구간의 종주도 마감한다.
「육사생도 6.25참전 기념비」 1950, 6, 25 미명에 북괴 공산군이 불법 남침하자 수학 중이던 육사생도 1기(현 육사10기)312명과 생도2기 330명은 육사기간장교 및 교관들과 함께 출전하여 초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이를 기리기 위해 최초의 전적지인 이 자리에 기념비를 세운다. 1979.12.1 당시 사관생도 참전자 일동. (경기도 포천 가산면 우금리 산 89-1)
제 5 구간 큰 넉고개 - 샘내 고개(145m) / 24.5km
포천시 가산면과 내촌면이 경계를 이루는 큰 넉고개는 고도가 별로 없는 낮은 언덕에 불과하다. 십여 년 전만해도 조용하던 마을이 개발의 붐을 타고 가내공장과 4차선도로 확장공사로 황량한 벌판위에 마루금도 실종되고 만다. 건너편의 산줄기를 겨냥하여 숨바꼭질하듯 시설물을 피하여 산등성이에 오르면 당산나무가 있는 작은 넉고개에 도착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고 257봉을 지나며 서서히 고도가 높아진다.
오른쪽으로 금현소류지와 고모지가 내려다보이고 왼쪽으로 47번국도와 건너편으로 천마지맥이 사이좋게 남진을 한다. 한 줄금 땀을 흘리고 나면 포천시 내촌면과 가산면 소홀읍(송우리)이 경계를 이루는 530봉에 오른다. 듬성듬성 바위들이 있는 571봉을 넘어 가파르게 내려서면 좌측으로 송전철탑이 나온다. 이곳부터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임업시험장 경계지점을 통과하게 된다. 상당히 가파른 오름길의 좌측에는 질서정연하게 자라고 있는 잣나무 수림이 울창하고 우측은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소 삼각점이 있는 600봉을 지나 솔밭 사이로 살짝 내려섰다 헬기장을 거슬러 오른다. 오늘의 구간 중에 가장 높은 죽엽산(622m). 잣나무 숲이 울창한 정수리에는 나무 판때기의 표지판이 덩그러니 걸려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운악산(235m)과 용암산(476m)이 있는 직동리 일대 총 1,118ha의 면적을 국립수목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수목원내에는 목본식물이 1,863종류, 초본식물이 1,481종류로 모두 3,344종류의 식물이 보존되고, 수목의 특징이나 용도와 기능에 따라 침엽수원, 활엽수원, 관목원, 외국수목원, 고산식물원, 만목원, 관상수원, 화목원, 습지식물원, 수생식물원, 약용식물원, 식용식물원, 지피식물원, 시각장애인을 위한 식물원, 난대수목원(온실)등 15개의 전문수목원으로 나누어 조성되어있다.
그리고 수목원중앙에는 우리나라산림과 임업의 역사와 현황, 미래를 설명하는 각종 전시품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연면적 4,628㎡ 규모의 산림박물관이 있으며, 바로 인접한곳에 연면적 3,967㎡ 규모의 산림생물표본관이 국내 최초로 2003년 11월에 완공되어, 식물의 석엽건조표본을 비롯하여 곤충, 버섯, 산림동물 등의 표본을 소장하고 계통분류에 관한 자체연구는 물론 관련분야 연구에 필요한 기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조선7대 임금인 세조와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능이 있어 광릉이라 부르기도 한다. 광릉자리는 원래 다른 이의 묘 자리였으나 풍수상 吉地라 하여 묘자리의 주인이 세조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며 일부 풍수가들은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1468년(예종 즉위) 11월 28일 주엽산 아래 세조를 예장하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483년(성종 14) 3월 30일 정희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6월 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하였다고 한다.
포천시 내촌면과 소흘읍의 경계능선을 타고 운악산 방향(남)으로 조금 진행하다 노송의 그늘아래 가파른 비알 길로 내려선다. 임도를 가로질러 우측 산길을 지나 묘지 위를 통과하여 숲속을 빠져 나오면 비득재(210m)가 반겨준다. 383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비득재는 광릉수목원에서 송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모리 라이브 카페가 성시를 이룬다.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고모리 까페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친구나 가족나들이 코스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분위기 좋은 공간속에서 차 한 잔에 정다운 대화를 나누고 마주치는 눈빛 속에 사랑이 무르익는 곳. 저수지와 숲이 어우러진 길을 따라 30여개의 까페들이 저마다 특색 있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고압전신주가 있는 서쪽 절 개지를 치고 오르려면 거리는 짧아도 급경사 비알 길에서 비지땀을 흘려야 한다. 20여 분간 사투를 벌인 끝에 노고산(380m) 정상에 올라선다. 화창한 봄 날씨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후줄근하게 흘러내린 땀방울이 잦아든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조망 속으로 수락산과 도봉산의 자태가 선명하다.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남하정책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쌓은 성으로 알려진 고모리 산성은 우물과 연못의 흔적을 제외하고는 성곽의 대부분이 붕괴되고 이동통신 시설물이 정수리를 차지하고 있다.
앞으로 지나야 할 구간은 마루금의 훼손이 심한 곳이다. 공동묘지, 군부대, 도로, 골프장이 산줄기를 가로 막아 마을의 뒷길을 통과해야 하는 산마루는 자칫 방심하다가는 정맥에서 이탈하기 쉬운 곳이다. 정상에서 3분정도 진행하면 좌측으로 급경사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마을 뒤편의 능선을 따르면 작은 고개를 지나 공동묘지와 만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좋아 서남쪽으로 물푸레봉과 소리봉(536m)이 야호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선명하다.
공동묘지가 끝나는 지점에 군부대 철조망이 가로막고 좌측으로 따라가면 후문이 나온다. 이 낙석의 묘를 지나 철조망을 버리고 솔 푸더기 무성한 좌측으로 들어서면, 축석고개에서 광능내로 가는 314번 지방도로를 건너는 다름고개와 만난다. 길 건너“소나무전문 판매전시장〞의 소나무 정원수가 가득한 쉼터에서 진행코스를 살펴보면, 집 뒤로 올라서야 하지만, 철조망과 맹견들의 울부짖음에 지레 겁을 먹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 능선으로 올라서면 낮 익은 표지들이 반겨준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임도를 따라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의정부시와 포천시가 경계를 이루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넓은 농로를 따라가면 수락지맥이다. 수락지맥은 남동쪽으로 용암산(475.4m), 수락산(640.6m), 불암산(508m)을 지나 망우리고개, 아차산(316m)으로 이어지는 43.8km의 산줄기를 일컫는다.
우측으로 참나무가 무성한 오솔길을 따라가면 또다시 군부대 철조망이 나타난다. 별생각 없이 걸어가는데 느닷없이 발밑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발밑을 보니 털 복숭이 삽살개가 달려든다. 스틱으로 으름장을 놓아보지만 앙칼지게 대거리하는 모습이 물러날 기세가 아니다.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는 폼이 잘 훈련된 맹견임에 틀림없다. 작은 몸집으로 철조망을 들락날락하며 덤벼드는 데는 속수무책이다.
뒷걸음질 치며 부대안의 병사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못 본 척 돌아서는 모습이 야속하기만 하다. 意氣揚揚(의기양양)한 삽살개는 끝까지 따라오며 울부짖고, 魂飛魄散(혼비백산)하여 뒷걸음질을 치다 가시덤불 속으로 밀려나고 능선하나를 넘고 나서야 되돌아가는 삽살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허무하게 무너지는 내 모습이 너무도 한심스럽다.
허탈한 마음으로 가시넝쿨을 헤치며 30여 분간 생고생을 하고나서야 산마루에 올라서니 낮 익은 표지기가 바람에 나부낀다. 생각지도 못한 봉변으로 종주의 사명감도 상실한 채 통행이 빈번한 도로(민락동으로 가는 4차선)의 절개지를 가로질러 건너편 마루 금으로 올라서니 축석 령이다. 천혜의 요새처럼 육중한 방호벽이 수도권을 지켜주는 든든한 보루가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의정부에서 외지로 나가려면 4곳의 대로를 경유하게 된다. 서울 도봉동 방면의 다락원길, 송추로 빠지는 울대고개, 양주로 빠지는 비석거리와 이곳 축석령이다. 이 고개를 분수령으로 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물이 포천천을 거쳐 한탄강에 이르고, 남쪽은 중랑천을 거쳐 한강으로 유입된다. 철원과 서울까지의 거리가 2백리가 된다고 하여 2백리 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내천(川)과 뫼산(山)을 형상하는 역동적인 모습.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통일조국의 중심지로 21세기를 준비하는 미래 지향적인 포천시의 정신을 표현한 상징물 옆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축석교회 앞마당으로 올라선다. 별로 험한 산길도 아니건만 조금 전 개와의 사투에서 몸도 마음도 지친 나머지 천근만근 무너져 내리는 몸이 힘에 겨워 구슬땀 흘리며 발걸음을 이어간다.
포천시. 의정부시. 양주시가 경계를 이루는 287봉은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이제 광덕산에서부터 오래도록 걸어온 포천 땅과 작별을 한다. 또한 이곳은 왕방지맥의 분기점이다. 우측으로 어야고개를 지나 천보산(423m), 해룡산(660m), 왕방산(737m), 국사봉(754m), 개미산(453m)을 지나 연천군 청산면 영평천까지 37km의 산줄기가 이어진다. 중랑천 상류의 비석거리에서 시작한 천보지맥은 백석이 고개를 따라와 이곳에서 왕방지맥과 합류하여, 칠봉산(506m)을 지나 동두천까지 20여 km를 이어간다.
또한 부근에 있는 회암사는 고려 때의 대 사찰로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1328년(충숙왕15년) 인도에서 원(元)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화상(指空和尙)이 인도의 아라난타사(阿羅難陀寺)를 본떠서 창건한 266칸의 대규모 사찰이었다. 그 후 폐사되었던 것을 1821년(순조 21)에 지공, 나옹, 무학 등 세 승려의 부도와 비(碑)를 중수하면서 옛터의 오른쪽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의 절 이름을 계승하게 되었다.
15분간의 꿈같은 휴식시간을 보내고 오늘의 산행 중에서 유일한 암릉 길을 내려서면 그윽한 솔향기 속에 백석이 고개를 만난다. 의정부시 자일동과 양주시 삼승동을 오가는 백석이 고개는 그 옛날 보부상들이 넘든 고개로 무성한 잡초 속에 허물어진 돌무더기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완만한 능선 길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꽃길 따라 정상을 향하여 무심코 달려가다 알바하기 쉬운 곳이다.
무명 봉에서 우측으로 리본들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오솔길로 내려서야 한다. 로얄 골프장 좌측 그린을 따라 걷는 발걸음은 푹신한 양탄자 위를 스치듯 경쾌하지만, 노는 물이 달라서 인지“소 닭 처다 보듯” 곁눈질한번 주지 않는 골퍼들을 바라보며 달리기에 여념이 없다. 주내 삼거리에서 삼송리로 향하는 지방도로를 만나 건너편 숲길로 들어서면 낮 익은 표지기 들이 바람결에 나부낀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은 낮은 봉우리의 연속이라 그런대로 등산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지만, 이제부터 가야할 길은 산이라는 개념이 실종되고 해발50-100m의 낮은 구릉지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뒷담을 타고 넘는 숲속의 산책길이다. 개념도를 따라 10여 분간 진행하면 삼거리가 나오고 한양공예, 형제 공업사를 바라보며 제대로 진행하고 있다는 안도감에 휴식도 할 겸, 시원한 캔 맥주 생각이 간절하여 구멍가게를 찾아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70년대의 모습을 보는 듯 낡은 건물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는 미니슈퍼, 그래도 시원한 맥주의 맛은 변함이 없어, 툇마루에 걸터앉아 김밥을 안주삼아 점심을 해결하고, 한양공예사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 숲속으로 들어선다.
이곳에서 삼호식품이 있는 막은이 고개까지가 종주 팀들에게는 미로 속을 헤매는 난코스다. 자칫 방심을 하다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구간으로, 끊어질듯 이어지는 미로에서 애를 먹는다. 처음 묘지가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진행하다 무성한 숲속에 널찍한 길을 버리고 곧바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마을로 내려서는 것 같지만, 능선자체가 마을안의 담장으로 이어진다. 5분간 사이 길을 빠져나오면 혜인사 입구가 나오고, 자동차가 다니는 마을길을 따라 예은교회를 지나 덕현 초등학교가 있는 덕고개 사거리에 도착한다.
농협슈퍼 앞에서 휴식을 하며 곰곰이 생각해도 신기한 것이 한북정맥의 5구간까지는 높은 산맥의 능선을 따라 진행을 하다 보니 계곡물을 만날 염려가 없었다. 로얄 골프장에서 덕고개까지 이어지는 주위로 논밭이 펼쳐지고 그사이로 도랑물이 흘러가지만 실낱같은 마루 금을 넘지 못하고 길을 틔워 주고 있으니 분수령을 이루는 정맥의 신비한 모습에 매료되어 종주를 고집하는 산 꾼들에게 큰 보람을 안겨준다.
신작로를 따라 서쪽으로 마을길을 벗어나자, 길섶에 낮 익은 리본이 반색을 한다. 동구 밖 능선에 올라서면 덕정리에서 의정부 외곽으로 연결되는 우회도로공사가 한창이라 수 십 길 절개지가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제 건너편의 능선과는 영영 단절되어 장애물 을 비껴가는 농로에서 개울을 건너는 수난을 당하며 소나무 숲길로 찾아들면 삼호식품이 있는 막은이 고개로 올라선다.
천보산맥에서 북쪽으로 달려오던 정맥은 막은이 고개를 지나며, 남서쪽으로 기수를 돌려 평탄한 길을 유지한다. 군부대의 삼중철조망 앞에서 우측으로 육중한 성벽을 따라 한없이 오르면 지도상에도 없는 큰 테미산(219m) 정상이다. 널찍한 헬기장에는 간단한 운동시설도 있고 주위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지금까지 걸어온 정맥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서쪽으로 오늘의 종점인 샘내 고개가 3번 국도를 가로 지르고 그 너머 불곡산이 고운자태로 손짓을 한다. 빽빽한 소나무 숲을 뚫고 서북쪽의 등산로를 따라 내려서면 양지바른 산기슭의 아담한 묏등에 피어나는 자주색 제비꽃 한 송이, 앙증맞은 모습에 눈길이 머물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본다.
숲을 빠져나오면 너른 벌판위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한승아파트. 경내를 통과하여 비상 쪽문이 있는 왼쪽으로 내려오면 경원선 철도를 건너는 간이 횡단보도가 반겨준다. 가내공장들이 밀집한 좁은 길을 빠져 나와 샘내 고개(G.S 칼텍스 주유소)에 도착하며 5구간의 종주도 마감을 한다.
제 6구간 샘내 고개 - 울대고개 / 18.5km
3번 국도가 지나는 샘내 고개는 양주시 산북동과 덕계동을 이어주는 4차선으로 주유소 건너 버스 정류장 뒤편으로 들어서며 산행이 시작된다. 전국의 중요도시와 지정항만, 비행장을 연결하는 국가의 간선도로망을 국도라 부른다. 2005년 말 현재 56개 노선에 14,224km가 전국을 종횡으로 누빈다. 참고로 3번 국도는 경남 남해군 미조면에서 시작하여 평안북도 초산군 초산면까지 1,100km에 이르지만 현재는 연천군 신서면 신탄리를 지나 휴전선까지 555km까지 이어진다.
완만한 능선사이로 오솔길이 이어지고 붉게 물든 아침노을이 저녁 비를 예고한다. 하지만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 맞으며 경쾌한 리듬으로 30여 분간 진행하면 가파른 비알 길이 시작되고 로프를 잡고 한바탕 후줄근하게 땀을 흘리고 나서야 330봉에 올라선다. 군 작전 비상도로가 능선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다. 북쪽으로 유순한 도락산(440m)이 자리 잡고 있지만, 남쪽으로 마루 금 따라 진행하면 산불 감시초소가 나타나고 정면으로 임꺽정 봉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군 유격장이 시작되는 곳에 산허리를 깎아 내리며 사찰(정불사)을 짓는 대공사가 한창이다. 정맥의 마루 금이 잘려나가는 현장을 바라보며 씁쓸한 마음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창업 굴 고개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군부대유격장 철조망이 마루 금을 가로막고 부흥사로 돌아가라는 서슬 퍼런 경고문에 맥이 풀리고 만다. 일요일 아침이라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주위를 살펴보니 철조망에는 친절하게도 정맥 팀의 리본이 살랑살랑 손짓을 한다. 용기를 내어 서슴없이 철조망을 넘어 숨 가쁘게 경사면을 치고 오르는 유격훈련이 시작된다.
주위를 굽어볼 수 있는 암 봉은 유격장의 지휘소를 겸하고 있어 울창한 수림 속을 빠져나온 해방감으로 가슴속이 후련하다. 하지만 잠시 후, 굳게 잠긴 후문에 도착하자 민간인 접근금지 경고판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독안에든 쥐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이 일을 어찌한다. 하늘로 솟을 수도 땅속으로 파고들 수도 없는 進退兩難이다. 그래서 군부대는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콩알만 해진 간을 쓸어내리며 느슨해진 철조망의 개구멍을 비집고 유격장을 벗어나면서 고통의 순간을 모면한다.
부흥사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합류하며 긴장도 풀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암릉을 올라서면 임꺽정 봉 바로 밑이다. 정맥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지만 유서 깊은 임꺽정 봉(445m)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동아줄이 걸려있는 수직절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하다. 10여m의 암벽에는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고 가까스로 정상에 올라서면 양주고을을 중심으로 도봉산까지 시원하게 조망이 터진다.
이조시대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3대 의적으로 알려진 임꺽정이 태어난 곳이 양주고을이요. 한양으로 들어가는 양반들의 봉물짐을 급습한 곳도 이곳 양주 땅이다. 이조 명종시대에 황해도 구월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임꺽정은 가렴주구에 눈이 어두운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털어 헐벗은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의로운 행동으로 백성들의 인심을 얻은 의적이다.
불곡산이 임꺽정의 본거지로 짐작할 수 있는 것도,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산이요. 험준한 산세가 은신처로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가 있다. 높이야 400여 m에 불과하지만 스릴 넘치는 암릉 미와 아기자기한 능선을 오르내리는 재미로 주말이면 많은 인파들이 이곳을 찾는다.
“대동여지도”에 양주의 진산으로 나와 있는 불곡산은 산의 규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산세와 교통의 요지에 있는 탓으로 양주목사가 400여 년간 행정을 펼쳤던 동헌과 어사대비, 양주향교, 양주산성등 문화재가 모여 있다. 근세에 들어와 양주시청이 남쪽 기슭으로 이전해 오며 인근의 도봉산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하던 불곡산이 새롭게 각광을 받는다. 국가 무형문화재 제2호인 양주 별산대놀이 전용공연장에서는 전통문화를 계승하려는 후학들이 4~10월까지 매주 토. 일요일 상설공연을 하며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주능선 삼거리로 내려온 뒤 서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30 여m 쯤 되는 암벽이 기다리고 있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동아줄이 절벽 끝에 걸려있어 스릴만점의 슬 랩 지대에서 간이 콩 알 만하게 오그라든다. 아슬아슬한 암릉 구간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서면 ← 대교아파트 1.1km , ↓ 임꺽정봉 0.7km 이정표가 반겨준다. 이곳에서 마루금은 270봉으로 이어지지만 군부대의 철조망이 가로막아 좌측의 계곡을 끼고 내려선다.10여분 후 공동묘지를 돌아 간이매점이 있는 과수원을 지나 대교 아파트가 있는 98번 국도에서 왼쪽으로 100여 m 떨어진 오산삼거리로 이동한다.
주내읍과 백석읍이 분기점을 이루는 갈림길에서 금강석재 맞은편의 도로를 건너 동쪽에 있는 마을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서면, 낮 익은 리본들이 반겨준다. 곧이어 아담한 양주산성(218m)이 송림 속에 자리 잡고 있다. 허물어진 성터에는 푸른 이끼가 역사의 무상함을 전해준다. 부지런한 사람들의 손놀림으로 두릅나무의 새순이 잘려나가고 가시넝쿨 헤치며 앞길을 재촉하면 의정부 녹양동에서 가업리로 넘어가는 작 고개(일명 어둔리 고개)로 내려선다.
군부대의 삽살개에게 혼이 난 후로는 개들만 보면 오금이 저려오니 이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사납게 짖어대는 개를 피해 우측 능선으로 들어서니 이곳으로 표지기가 걸려있다. 고압선 철탑이 줄줄이 이어지는 호명산 오름길은 밤나무와 굴참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그사이로 호젓한 오솔길이 열린다. 메마른 대지에 새순이 돋아나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철쭉의 향기 속에, 춘정을 못 이겨 짝짓기에 여념이 없는 노루 한 쌍이 산기슭을 내달리며 희롱을 한다.
무성한 숲길을 숨 가쁘게 오르면 복지리에서 호명산으로 오르는 갈림길과 만난다. 잔디가 깔려있는 철탑의 광장은 임꺽정 봉과 함께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이다. 백석읍과 광적면의 너른 평야가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이 황홀경속으로 빠져들고 방금 지나온 불곡산과 임꺽정 봉의 암릉 길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목울대를 넘어가는 막걸리 한 잔술에 정신이 몽롱하여 모든 사물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 세상만사가 모두 내 세상이다.
단 걸음에 올라선 호명산(423m)은 아무런 표시가 없다. 서운한 마음을 뒤로하고 정상을 내려서면 삼거리 갈림길이 나온다. 남쪽으로 내려서면 공군부대가 있는 흥복산이고, 정맥은 오른쪽으로 90도 방향을 틀어 계곡으로 내려선다. 인적도 없이 호젓한 시멘트 포장길 바로 이곳이 송추에서 복지리로 넘어가는 흥복고개다.
건너편 철조망 사이로 낮 익은 표지기 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가파른 비알 길에서 옷이 흠뻑 젖도록 땀을 흘린 뒤에야 한강봉(475m)에 올라선다. 한북정맥을 지나오며 처음으로 한강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 한강봉이라 했던가? 정상은 울창한 숲속의 너른 공터에 정성들여 쌓아올린 아담한 돌탑이 표지 석을 대신하고 1992 재설된 문산 470번의 삼각점이 반겨준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 또한 장관이다.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끝자락에 첼봉이 우뚝 솟아있다.
이곳에서 또 하나의 지맥이 분기하고 있으니 서쪽으로 주능선을 따라 감악지맥이 은봉산(380m)을 지나 노고산(401m), 감악산(674.9m), 마차산(588.4m)을 넘어 연천군 전곡읍 한탄강까지 39.6km의 산줄기가 이어진다. 굴참나무 사이로 첼봉을 바라보며 한강봉을 내려딛는 발길이 속절없이 곤두박질치고 무성한 숲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만다. 그 흔한 리본도 자취를 감추고 그동안 잘 참아주던 비까지 조용하던 숲속을 마구 흔들어대니 마음이 다급해진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대로 우장으로 갈무리하고 숲길을 찾아가니 오른쪽으로 낯익은 리본들이 반겨준다. 이곳이 바로 꾀꼬리봉(430m)이다. 서쪽으로 분기하는 오두지맥이 계명산(621m)을 지나 박달산(369m), 월롱산(229m), 기간봉(245m), 통일전망대의 오두산(119m)까지 40km가 이어진다.
이곳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한강봉산사랑산우회”에서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울대고개로 이어지는 정맥을 도봉지맥이라 지칭하고 오두지맥인 계명산 방향을 정맥으로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무시 한 채 첼봉 쪽으로 정맥을 이어간다.
오두지맥의 분기점인 꾀꼬리봉에서 양주시 백석읍과 장흥면의 경계를 따라 15분간 진행하면 첼봉(521m)의 정수리에 오른다. 예전에는 제일봉으로 불렀지만 6.25전쟁시절 미군들이 주둔하며 제일봉이란 발음이 어려워 체일봉 체일봉으로 부르다 첼봉이 되었다고 한다. 시원하게 터지는 공터에는 산불감시 카메라와 헬기장이 자리 잡고 사패산과 도봉산의 불꽃같은 봉우리들이 추파를 던지며 수락산의 줄기 따라 의정부시가지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이 옷 속으로 파고들며 온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토치카 속으로 들어서니 켜켜이 쌓인 먼지와 거미줄이 뒤엉켜 음산한 기운이 감돈다. 그래도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보니 떨리던 몸도 진정이 되고 시장기가 감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던가? 협소한 토굴이지만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민생고를 해결하고 피어오르는 운무 속을 하염없이 걸어간다.
선각자 김정호선생은 이런 일을 당할 때 마다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春夏秋冬 사시사철 삼백육십오일 산속을 누비며 별의 별 험한 꼴을 다 당했을 테지만 불굴의 정신으로 대 서사시를 이루어냈으니 후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 것이 아닌가. 나의 하찮은 일을 비유한다는 것이 語不成說이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가슴 벅찬 일이다.
425봉을 지나 우측으로 진행하면 너른 분지위에 감시카메라까지 설치된 양주항공 무선 표시국 건물이 마루 금을 가로막는다. 철조망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서며 어느 신문에서 본 기억을 더듬어본다. 바다를 밝히는 등대가 있다면 하늘에는 비행기가 다니는 항로가 있고 안전하게 통제하는 무선국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9개의 무선국이 있다고 하니 이곳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산에서 가장 기분 좋은 것이 하산길이다. 그 어려운 고비를 다 넘기고 목적지가 가깝다는 안도감도 있겠지만, 내려딛는 발걸음에 여유가 묻어나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행복감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호젓한 산길로 접어들어 산 하나를 넘어서면 공동묘지가 나타난다. 죽은 자의 신분에도 차이가 있는가?
금잔디에 망부석까지 화려하게 치장한 묘소가 있는가하면, 돌아보는 자손 없이 봉분마저 허물어진 무덤에서 구천을 떠도는 망자들의 한숨소리가 들리는듯하다. 경적소리도 요란한 울대고개를 넘는 차량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또한 구간을 마감한다.
「 초대 시인 」
방랑자이고 싶다 오 희창
과녁을 맞힌
화살은
더 나르지 못한다.
마음을 사로잡은
바람은
더 흐르지 못한다.
바위를 부셔
조약돌을 만드는
파도처럼
바람에 하늘을 날다가
뿌리를 내리는
민들레처럼
오직
그리움하나 가슴에 품고
시공을 넘나드는
방랑자이고 싶다.
눈물이
바다처럼
흐를지라도
천지창조의 산실 오 희창
햇살에 돛단배를 띄우고
광속(光速)으로 우주를
유람(遊覽)하는 날이
눈앞이라면...
상상의 세계를 유랑(流浪)하는
시인이 만들어낸
형상(形象)이
실현(實現)됨이라
순수한 영혼이 아니면
텅 빈 공간에
이 엄청난 사변(事變)을
그려 낼 수 없는 일...
떠돌이 혜성이
땅으로 떨어지며
사르는 한줄기 불빛
시인의 머리에 꽂혀
깃발처럼 날리면
얼어붙은 겨울밤
화려한 별자리를 그리는 시인의
“머리 통”은
천지창조의 산실(産室)
그냥 그대로 오 희창
자궁을 나오면서
엄마가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몇 술을 더 떠야
이 세상 내려놓을지 아는 사람 없다
천재는 다 알고
둔재는 다 모르는 건 아니다
안다고 행복하고
모른다고 불행한 건 아니다
살다보면
한숨도 웃음도 흘러가려니
그런대로
그냥 그대로...
밀 래 오 레 - 동대문 야시장 오 희창
뻥 - 뚫린
공간
어둠만큼 밝다.
몰려드는 발길
밤바람 가르면
가슴은 풍선
머리는 콩알되지
체면 벗고
지성마저 풀어헤친 몸
요염이 감싸면
전(錢)을 사이에 두고
힘겨루기 시작
입심 팽팽이 당겨
끊어지려는 수간
주머니는 비고 허영은
별무리로 뜬다.
오늘도
동대문 야시장은
감성의 불길이,
원시의 연기가 치솟는가.
오 희창 시인 프로필
호: 삼호당(三乎堂) 시인. 수필가
청주대 법대 졸
법무부 이사관
대전지방 교정청장
서울시문인협회 이사
양천 문학회장 역임
문예사조 문학상. 양천 문학상 수상
저서 - 삼호당 문집
수필집: 아들하나 점지하고 오게나.
시 집: 하늘이 기울 때 더 큰 가슴으로 온 그대에게 묻는다.
「초대시인」
밤 열차 이 영희
빗물에 어둠이 잠기는 시간
기적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더 길고
차창에 어리는
옛 친구의 얼굴
친구가 권하는 술잔이
창에 부딪는 듯
빗소리에
가슴도 빗물 되어 흐른다
미소를 짓고 술잔을 주며
오래 전 떠난 친구
기적소리 그침이 없고
흔들리는 빗소리에
밤 열차는 차창에 묻혀가네
두 레 박 이 영희
흔들리며 내려가는 길
목마름이 간절하다
돌층계 부딪힌 상처
멍들고 아플 때
흘렸던 눈물은 물거품이 된다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길
온몸을 적시며 위로 향한다
비우지 못한 것
비우고 버려야만
샘을 담아 퍼 올릴 텐데
올라올 때는
물방울 춤사위로
우물이 환하다
장 작 불 이 영희
사랑방 아궁이에
장작불을 댕기며
삼겹살을 굽는다
동트기 전 일어나시어
집 처마 안에 쌓인 장작더미
한겨울 우리집 땔감
아버지 부지런함을
대신 답하고 있다
손마디 갈라진 손바닥
나온 못들이 나를 아프게 한다
뜨거운 불이 내 눈물로
삼겹살 위로 떨어지고 있다
선 유 도 이 영희
파란 여름이 돋아나는
양떼구름
바다에 빠져든다
뱃머리 선상에
타오르는 태양도
바다 속으로 빠져
바다를 빛낸다
파도는 물새로
시간 시간 곡예하며
연인들 물꽃 피는 입술
하얀 물수건으로 닦아준다
해변의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면
모래사장 눈물로
연서(戀書)의 흔적을 남기고
텅 비어버린다
새벽 가로등 이 영희
삶의 흔적
덜 깬 눈이
외발로 서 밝힌다
골목 부딪고 나온 바람은
새벽잠을 깨워
양동이 물소리가 아침을 연다
일잠을 다 털지 못한 눈들
골목에 나가 서 있는 가로등
아무 일 없다며 밝힐 뿐이다
아픔을 모르는 외다리
먼동이 트는 신문 던지는 소리
우유 아줌마 발자욱 정겹게 듣는다
이 영희 시인 프로필
크리스찬
인천광역시 거주
한국문학예술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양천문학 회원
시마을동인 회원
시샘문학 회원
계룡대 백일장 차상 수상
양천문학 특별상 수상
저서: 시집(고려산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