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6월 12일)은 ‘러시아의 날’이었다. 소련 붕괴 이후에 러시아가 새로 ‘건국’된 것을 기념하는 날인 듯한데, 그렇다면, 현 러시아의 ‘생일’인 셈이다. 나는 인터넷카페에 가던 길에 학교 본관의 중앙통로가 막혀 있는 걸 보고서야 무슨 ‘공휴일’인 줄 알았다(휴일에는 통로를 막아놓는다). 국경일인 만큼 크레믈린 광장에서는 당연히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하지만, 학교 주변은 다른 휴일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조용했다. 그리고, 공휴일이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오늘(월요일)도 자동적으로 휴일이 된다. 차이라면, 이렇게 휴일이 된 날은 중앙통로를 열어놓는다는 것. 본관의 문구점과 북끼니스트(헌책방)도 문을 연다. 물론 대부분의 직장은 쉰다.
아마 서울에서도 잘 알겠지만, 토요일부터 포르투갈에서는 ‘유로2004’가 개막되었고, 포르투갈과 그리스와의 개막전에 이어서 스페인과 러시아의 경기가 펼쳐졌다. ‘러시아의 날’이기도 해서 승전을 기대하는 러시아인들이 많았지만, 경기는 예상대로(!) 스페인의 승리로 끝났다(1:0). 그리고 어제는 예선리그 최고 빅매치로 꼽히던 영국과 프랑스의 경기가 있었다(한국에도 중계가 되었을 거 같다). 룸메이트와 나는 밤 10시 반부터 생중계된 경기를 맥주를 마시면서 즐겼다(여기선 모든 경기가 생중계된다). 룸메이트는 영국을 응원했지만, 경기 종료 3분을 남겨놓고 지단이 연달아 두 골(프리킥과 페널티킥)을 성공시킴으로써 결국 프랑스가 1:0으로 뒤지던 경기를 극적으로 뒤집었다. 전반에 영국의 주장인 베컴도 프리킥으로 한 골을 어시스트하긴 했지만, 프랑스의 주장 지단이 왜 최고의 선수인가를 보여준 경기였다(베컴은 전반에 얻은 페널티킥을 실축했다).
곧 그리스에서도 올림픽이 열릴 텐데, 콘찰로프스키의 예견대로, 21세기는 스포츠의 세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어디인가, 전쟁의 세기였던 20세기에 비한다면 말이다. 콘찰로프스키의 우려대로, 예술이 스포츠로 대체된다 하더라도 그만한 ‘희생’이라면 감수할 만하다. 한편으로, 프랑스가 축구 강국이지만 예술 후진국이 아니듯이, 스포츠에 열광한다고 해서 모두가 문화예술에 문외한이 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콘찰로프스키의 주장에 따른다면, 좋은 예술도 배가 좀 고파야, 발로 걷어차여야 나온다(황동규의 표현을 빌면, 그 발목들이여, 온전할진저!). ‘합리적인 한도’ 내에서라면, 예술이 스포츠에 가려 찬밥이 될수록, 위대한 예술이 나올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고 할 수 있을까? 타르코프스키가 그보다 더 좋은 여건에서 작업한 것은 결코 아니므로, 콘찰로프스키도 투덜거릴 일만은 아니다.
오늘은 요즘 들어 드물게 비가 오지 않았지만, 5월 이후 러시아는 비가 오는 날이 잦다. 그래 봐야 대개는 한두 시간 오고 말지만(2분씩 내리기도 한다), 어제 오후에는 꽤 내렸다. 3일 연휴라는 게 기분상 갑갑해서 외출을 했다가 그 비를 쫄딱 맞았다. 하지만, 여름비라고는 해도 (장마비가 아닌) 보슬비 정도이기 때문에 맞아 봐야 옷이 흠뻑 젖거나 하는 건 아니다. 산책길에 좀 맞으면 오히려 기분이 상쾌해지는 그런 비다. 물론 작정하고 비를 맞을 일은 없고, 날씨가 하도 변덕스럽기 때문에 준비 없이 나갔다가 비를 맞곤 하는 것이다. 토요일도 그랬다. 오후에 바람도 쐴 겸 <루뱐까>역에 있는 서점 <비블리오-글로부스>에 오랜만에 갔지만(교통이 제일 편한 서점이기도 해서), 뜻밖에도 연휴 3일 동안 휴점이었다. 한국의 대형서점이라면 턱도 없는 일이겠지만, 아직 자본주의에 ‘미숙한’ 러시아에서 아쉬운 건 손님이지 가게 주인들이 아니다.
다행인 건, 이전에 두 번 그냥 지나쳤던 <마야코프스키 박물관>을 둘러볼 시간이 있었다는 것. 휴일이라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데, 내가 들른 시간이 4시 15분쯤이었다. 이 박물관은 전철역에서 <비블리오-글로부스>서점쪽으로 가다가 박물관 표지가 있는 곳에서 골목 방향으로 20미터쯤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는 4층짜리 건물이다. 건물로 들어서면, 복도에는 미술과 문학 등의 관련서적들이 판매용으로 비치돼 있고, 책상 앞에 앉은 한 아줌마가 입장료를 받는다. 나는 ‘학생’이기 때문에 6루블(25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블라지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 ‘혁명의 목청’이자 미래파의 기수였던, 러시아 최대의 아방가르드 시인의 박물관답게 전시장 또한 아방가르드적이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의 공간 전체가 마치 미술대학의 창고처럼 각종 철골 구조물로 가득 차 있었고, 시인과 관련된 원고나 포스터 등의 각종 자료들이 사이사이에 배치돼 있었는바, 전시장 자체가 일종의 설치미술 작품이었다. 물론 시인이 남긴 퇴색한 원고들처럼 이 아방가르드 ‘설치미술’ 또한 세월의 두께만큼 쌓이는 시간의 먼지마저 털어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지만. 전시장을 층마다 지키고 있는 점잖은 할머니들도 주름살은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자정이 좀 안돼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새 2시가 다 돼 간다(그러니까 날짜로는 6월 15일이다). 그리고 아까 0시 50분부터 러시아의 대표적인 TV채널인 NTV(엔떼베)에서는 <쉬리>가 방송되고 있다. 그래서, 오랜만에 한석규, 송강호, 최민식, 김윤진 등의 낯익은 얼굴들을 이국 땅에서 보고 있다. 대사를 더빙된 러시아어로 들으면서. 방에 있는 한국산(삼성) 텔레비전에 잡히는 TV채널만 10개가 넘는데, 그 중 ‘엔떼베’는 ‘뻬르브이 까날’(제1 채널)과 ‘까날 러시아’와 함께, 러시아의 3대 방송사이다(이번 ‘유로2004’ 경기중계는 ‘뻬르브이 까날’과 ‘러시아’가 독점하고 있다). 그러니까 좀 엉성하고 잔혹한 영화이긴 해도 ‘엔떼베’에서 <쉬리>가 방송되는 건, 지난번에 ‘꿀뚜라’(문화채널)에서 ‘소름’이 방송됐던 것과는 의미가 좀 다르다(정확하게 시청률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한창 서울 한복판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간식을 먹고 좀 쉬었다가 다시 마야코프스키로 돌아가겠다…
다시 마야코프스키. 30분 정도 둘러본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유언장과 시인의 죽음을 특집으로 다룬 1930년 4월 17일자 <리쩨라뚜르나야 가졔따>(‘문학신문’)이었다. ‘모두에게’라고 제목을 단 이 ‘공식적인’ 유언장은 1930년 4월 12일에 작성된 것인데, 일반노트보다 좀 큰 갱지에 연필로 큼직하게, 그리고 급하게 써 내려간 것이다. 나는 ‘모두에게’라는 제목 때문에 금방 그의 유언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다소 놀란 것은 이 유언장이 아무런 구별이나 표식 없이 다른 자료들과 섞여서 전시돼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의 ‘마지막 말’에 대한 대우로서는 좀 소홀한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이 유언은 내 기억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3권짜리 선집에 번역돼 있다(절판된 책이지만). 그리고, 아마도 각각 ‘역사비평사’와 ‘까치’에서 번역 출간된, <나의 혁명, 나의 노래>와 <마야코프스키>, 두 권의 전기에도 내용이 소개돼 있을 것이다. 그 유언의 시작은 이렇다: “나의 죽음에 대해서 (*나 자신 외에) 아무도 책망하지 마시길, 그리고 바라건대, 크게 떠들어대지도 마시길. 고인은 그런 걸 무척이나 싫어한답니다. 어머니, 누이들, 그리고 동지들, 용서하시길 - 이게 (*옳은) 방법은 아니지만(다른 사람들에겐 권하지 않겠소), 나에겐 다른 출구가 없다오. 릴랴 - 나를 사랑해주오.”(릴랴는 그의 연인이었던 릴랴 브릭을 말한다.)
그리고 다른 페이지에 씌어진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책상 위에 있는 2,000루블은 국고로 환수해주시오. 나머지는 기즈에서 받으시길. V. M.”(‘기즈’는 ‘국립출판사’의 약칭이고, V.M.은 그의 서명이다.) 이 유언을 쓴 이틀 후인 1930년 4월 14일에 시인 마야코프스키는 권총자살하며, 그의 유언장은 다음날인 15일 <프라우다>지에 최초로 공개된다. 그리고, 17일(목)자 <문학신문>은 거의 전 지면을 갑작스런 자살로 전 러시아를 경악하게 한 마야코프스키 특집으로 꾸미고 있다.
사실, 마야코프스키의 자살은 한 시인의 죽음 이상의 시대적 상징으로서의 의미도 갖는다. 1920년대 말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행기로서, 정치적으론 레닌의 사망(1924) 이후 스탈린 체제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경제적으론 레닌이 ‘자본주의로의 전략적 후퇴’라고 부른 신경제정책(NEP) 시기(1921-1928)가 마감됨과 함께 본격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의 전환이 준비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NEP 시기에 허용되었던 문학/예술 분야에서의 창작과 비판의 자유가 차츰 위축되고 검열은 강화된다. 이러한 과정은 스탈린주의라는 ‘정치적 아방가르드’에 의해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대체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보리스 그로이스의 <아방가르드와 현대성> 참조). 그러한 과정이 명시적으로 일단락되는 것은 1934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식 선포됨으로써이지만, 그 기점은 1920년대 말(1927-1930)이다.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 유리 지바고가 거리에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는 1929년은 이러한 정치 사회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1929년은 스탈린이 ‘대전환의 해’라 부른 년도이자,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침묵이 시작되는 해이다. 그리고, 침묵이냐, 자살이냐는 선택에서 우리의 ‘목청’ 마야코프스키는 자살을 택한 것이다(그보다 먼저 1925년에는 ‘농민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자살이 있었다). 국내에 번역 소개된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은 바로 이 시인 마야코프스키와 그의 죽음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어느 시인의 죽음’이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자서전의 원제목은 ‘안전통행증’이다. 영어로는 ‘Safe Conduct’).
<닥터 지바고>로 195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지만(예기치 않은 수상 스캔들로 마음 고생을 하다가 그는 1960년에 ‘일찍’ 죽는다), 파스테르나크는 무엇보다도 ‘시인’이다(그의 초기시는 ‘미래파’로 분류된다). 유리 지바고가 남긴 시편들은(간혹 이걸 ‘부록’이라고 빼먹는 엉터리 번역서들도 있는데), <닥터 지바고>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지만, 파스테르나크의 대표작들이기도 하다. 지바고는 소설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서정적 분신이다. 그래서, 언젠가 <닥터 지바고>의 서평에서도 쓴 바 있지만,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 ‘시로 쓴 소설’이라면, <닥터 지바고>는 ‘소설로 쓴 시’이다(그러니 이걸 ‘소설미학’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곤란하다).
금서이던 <닥터 지바고>가 러시아에서 공식 출판되는 것은 1988년쯤이다. 그래서 1985년에 저명한 러시아문학자 드미트리 리하쵸프의 편집하에 출간된 (내 생각엔) 최초의 파스테르나크 전집(2권짜리)에는 <닥터 지바고>가 빠져 있다. 이후에 새로 나오는 전집에는 당연히 들어가 있을 텐데, 아직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한편, 지난달에는 TV에서도 데이비드 린의 <닥터 지바고>가 방송되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영화속 ‘라라의 테마’는 한국의 애청자가 꼽는 영화음악 베스트에 항상 들어가곤 했는데,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 받는 문학자이자 학술원회원(아카데믹)이었던 리하쵸프에 관한 책도 얼마 전에 나왔다. <리하쵸프와 그의 시대>라는, 화보집을 겸한 책이다. 책값은 당연히 좀 비싸지만(기억에 3만원 가량), 소장해둘 만한 책이다(국내에는 1989년쯤에 리하쵸프의 에세이집이 번역/출간된 적이 있다. 그때는 그가 그렇게 유명한 학자인 줄 몰랐다!).
여기에 와서 구한 책인데, 파스테르나크의 전기에 대한 가장 상세한 자료는 그의 아들 예브게니 파스테르나크가 펴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전기를 위한 자료들>(1989>이다. 68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고, 50,000부가 발행되었다. 특이한 것은 1957년에 파스테르나크가 올가 이빈스카야와 찍은 사진도 책에 들어 있다는 것. 내 기억엔 그녀가 ‘라라’의 모델이고, 아들 예브게니는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그녀를 무척 싫어했다(나는 갖고 있지 않지만, 국내에는 이빈스카야가 쓴 책도 번역 출간됐었다). 이 ‘무뚝뚝한’ 예브게니와의 인터뷰는 한국일보 김성우 기자의 러시아명작기행(매주 한 차례 한 면 전체에 연재됐던 이 기행문을 나는 모두 스크랩했었다), <백화나무 숲에서>에 실려 있다(기억에 의존한 거라서 제목이 확실치는 않다. 제3문학사에서 나왔던가?).
파스테르나크의 저작권은 아마도 예브게니가 갖고 있는 모양으로 최근에 출간되는 <닥터 지바고>에는 그의 ‘소감’이 실려 있다. 어쨌든 러시아문학은 그렇게, ‘최초의 망명작가’ 푸슈킨에서부터 ‘내적 망명작가’ 파스테르나크까지이다(거기에 물론 ‘진짜로’ 망명한 소설가 나보코프와 망명당한 시인 브로드스키가 동급으로 덧붙여질 수 있다). 참고로, 소비에트 문학(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학)은 고리키에서부터 솔제니친까지이다(<밑바닥에서> 시작한 소비에트 문학은 <수용소군도>에서 끝(장)난다)…
하여간에, 파스테르나크가 시인으로서 후배인 마야코프스키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옆길로 갔다. 새벽 4시가 넘었는데, 창밖으론 또 비가 내리고 있다. 여느 때 같으면 이미 환하게 해가 뜰 시각인데, 구름이 잔뜩 껴 있는 탓에 아직은 어스름하다. 체호프와 레프 도진 얘기는 한숨 자고 일어나서 써야겠다. 서울은 아침 9시가 넘어갈 시각이니까 다들 아침인사들을 하며 출근했을 시간이다. 그러니, ‘굿 나잇’(‘스빠꼬이노이 노치’)은 나 혼자 속으로만 속삭여야겠다. ‘굿 나잇!’
오전 10시. 9시 수업이 없는 날은 보통 이 시간에 일어나서 우유와 초코파이로 아침을 때운 다음에(12시에 정식으로 룸메이트와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어제 쓴 걸 조금 고친다. 날씨는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쾌청하다. 하지만, 이러다가 또 오후엔 비가 내리는 게 모스크바의 날씨이다. 하여간에 다른 할일도 많으므로, 레프 도진 얘기까지 빨리 진도를 빼야겠다.
다시 마야코프스키. 박물관의 4층에는 그의 서재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는데, 생각보다는 아주 작은 방이었다(그의 작업실은 따로 있었을 법하다). 고작 내 기숙사방의 두 배 정도. 책상과 소파가 놓여 있고, 서가도 단출하게 하나. 그리고 레닌의 사진이 책상머리에 놓여 있었던 거 같다(레닌은 그를 싫어했다). 하지만, 주인 없는 서재는 그저 허전해 보일 따름이었다. 미래파 시인의 ‘과거’란 그 자체로 모순이기에, 사실 마야코프스키가 자신의 박물관을 좋아했을 거 같지도 않다. “고인은 그런 걸 무척이나 싫어한답니다.” 박물관을 나서면서 바흐친 책 두 권과 푸슈킨 책 한 권을 샀다(그래도 만원이 안된다). 빗줄기가 조금 굵어져 있었다.
우리말로 번역된 마야코프스키 선집 가운데 한 권은 그의 희곡이다. 드라마작가로서의 마야코프스키는 당시 전위적인 연출가였던 메이에르홀드와 주로 작업을 같이 했는데(영화감독 에이젠슈테인이 메이에르홀드의 제자이다), 이 마야코프스키-메이에르홀드 커플은 체호프-스타니슬랍스키 커플의 정통적인 ‘러시아 극장’에 맞서서 새로운 ‘소비에트 극장’을 건설하고자 했다. 혁명 1주년을 기념하여 공연되었던 마야코프스키의 <미스쩨리야 부프>(1918)의 프롤로그에는 제일 먼저 이 ‘구닥다리’ 러시아극장에 대한 풍자가 나오는데, “(이런 극장들에서) 당신은 자리에 앉아서 이런 거나 본다 – 마냐 아줌마와 바냐 아저씨와 소파에 앉아서 콧소리나 내고 있는 걸.”
내가 지난주 수요일에 ‘타간까’극장에서 본 레프 도진의 <바냐 아저씨>가 바로 ‘마냐 아줌마와 바냐 아저씨’ 류의 연극이다(<바냐 아저씨>를 간혹 <바냐 외숙>이라고 옮기는데, 촌수야 그렇지만 ‘정떨어지는’ 번역이다). 그러니까 <바냐 아저씨>는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대표작이면서(나는 ‘체홉’이라고 즐겨 쓰지만, 여기서는 번역 관례대로 ‘체호프’라고 표기하겠다), 러시아 정통극의 상징이다. <바냐 아저씨>를 그의 ‘대표작’이라고 부르면, 약간 서운해 할 사람들도 있겠다. <갈매기>, <세자매>, <벚꽃동산>의 팬들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여전히 <바냐 아저씨>이고, 그걸 감추기는 어렵다.
내 생각에, 체호프의 이 네 작품에는 인생의 사계(四季)가 반영돼 있다. <갈매기>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좌절의 드라마이면서 동시에 봄의 드라마이고, 청춘의 드라마이다. 니나는 물론이거니와 트례플료프도 젊디 젊다. 그의 권총자살은 그 젊음을 웅변한다. 그는 미숙하지만 구차하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바냐 아저씨>와 <세 자매>에는 구차하게라도 삶을 계속 이어나가는, 이어나가야 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삶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진짜 삶, 삶다운 삶을 준비하고 고대하는 데 다 소진된다. 이들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다 비슷한 족속들일 것이다. 그들은 삶을 항상 고대하지만, 삶은 언제나 그들을 그냥 통과해간다. 마치 가구처럼, 무슨 간이역처럼.
그런 꿈이 허깨비였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데 이들의 삶이 가진 비극성이 있고, 진실이 있다(진실은 잔인하다!). <바냐 아저씨>는 그 진실의 남성-버전이고, <세자매>는 여성-버전인바, 드라마에서 이들의 삶은 여름에서 가을로 간다. 어느덧 그들의 젊음은 사라졌거나 대책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한편, <벚꽃동산>은 조락(凋落)의 드라마이자, 장년의 드라마이며, 체호프식의 ‘엔드게임’이다(어떤 연구자들은 <벚꽃동산>에서 부조리극의 ‘원조’를 읽어내기도 한다). ‘벚꽃동산’ 대신에 곧 ‘별장’이 들어서는 것처럼, 한 세대(혹은 한 시대)는 가고 또 다른 세대(혹은 또 다른 시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벚꽃동산>에는 ‘가을’에서 ‘겨울’로의 그러한 이행의 과정이 쓸쓸하게, 그러나 의외로 코믹하게 그려져 있다.
잠깐, 점심 먹을 시간이다. 조금 전에도 또 어김없이 한 차례 소나기가 내렸다. 모스크바의 일기예보는 이제 나도 할 수 있겠다. “오전에 맑다가 갑자기 흐려지고, 한두 차례 비가 온 후에 개이겠습니다.” 그럼, 비싼 예측장비들의 도움 없이도 80%는 맞는다…
다시 체호프. <갈매기>를 무척 좋아했던 한 친구와는 다르게(그 친구는 구차하게 살기를 거절했다), 나는 처음부터 <바냐 아저씨>였고, 아직도 <바냐 아저씨>이다. 그래서, 이대로라면, 마흔 일곱까지는 조숙한(조로한) 편이게 된다. 바냐 아저씨의 나이가 마흔 일곱이므로. 하지만, 그 이후에라도 <벚꽃동산>을 좋아하게 되는 건 꺼려진다. 그건, 나의 분류에 따르면, ‘인생의 무대’에서 곧 퇴장할 사람들이나 ‘절절하게’ 즐길 만한 드라마이므로(‘잔혹극’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레프 도진이 체호프극 연출가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이 달 1일부터 24일까지 타간까 극장(전철역 ‘타간까’에서 나오자 마자 있는데,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했고, 비소츠키가 활동했던 극장으로도 유명하다)에서 열리는 ‘레프 도진 연극제’의 레파토리에도 들어가 있는 <제목 없는 희곡>의 성공에 힘입은 걸로 보인다. 지난번에 언급한 대로, 이 작품은 체호프가 최초로 시도한 장막극이자 실패한 장막극, 그래서 미완성으로 남은 드라마이다. <애비 없는 자식>이란 제목은 체호프의 한 편지에서 언급되며, 공식적인 제목은 아니다. 그리고, 흔히 일컬어지는 <플라토노프>란 제목은 독일인들이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붙인 제목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도진은 이 작품을 새롭게 각색한 모양이다(원작은 공연 분량으론 너무 길다). 도진에 의하면, 우리의 삶 또한 ‘제목 없는 희곡’이다.
이번 연극제에 대한 정보를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비싸더라도) 표를 구해볼 수 있었을 텐데, 룸메이트가 <바냐 아저씨>를 예매하고, 다른 날 다른 작품들을 예매하러 갔을 때 이미 모든 공연의 표가 매진이었다. <체벤구르>도, <악령>도, <제목 없는 희곡>도. 그래서 결국, <바냐 아저씨>만 보게 된 것인데, 다음에 그의 작품들을 보려면, 아마도 페테르부르크에 가야 할 것이다. 레프 도진은 원래 페테르(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에서는 ‘삐쩨르’라고 약칭해서 부른다)의 ‘말르이 극장’에서 활동하는 연출가이다(페테르에는 현대식 건물의 ‘제2 말르이극장’도 곧 건축될 예정이다. 지난번 설계공모에서 프랑스 건축가의 출품작이 선정됐다).
그래서 이번 공연의 원제는 ‘모스크바에서의 레프 도진의 공연들’이며 지난 봄에 있었던 제10회 ‘황금가면’ 연극제에서 <바냐 아저씨>로 도진이 연출상을 받은 걸 기념하여 기획된 걸로 안다. 그러니까 도진의 모스크바로의 ‘화려한 외출’인 셈이다. 배우들은 물론 전부 말르이극장 소속 배우들이며, 무대장치도 페테르에서 공수해 왔다고 한다. 참고로, 모두 7편이 공연된 도진의 연출작(혹은 감독작) 가운데, 제일 첫작품은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의 <모스크바 합창단>이었다. 페르투솁스카야? 지난번에 번역해서 올린 단편 <복수>의 작가 말이다. 그녀는 극작가로서도 상당한 명망을 갖고 있다. 막심네에서 들춰본 그녀의 희곡선집에는 <모스크바 합창단>이 빠져 있어서, 자세하게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도진이 연출한 체홉극 목록에서 <바냐 아저씨>는 <제목 없는 희곡>과 <갈매기>, <벚꽃동산>에 이어진 작품이다. 그러니까 <세자매>가 목록에 빠져 있는 셈인데, 한 잡지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현재 오페라 <엘렉트라>를 준비중인 도진은 기회가 되면 <세자매> 또한 연출해볼 의향을 갖고 있다(그는 올해로 환갑을 맞았다). 한국에서 체호프의 공연을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에(나는 연극을 즐겨보는 편이 아니다), 도진의 <바냐 아저씨>가 어느 정도 뛰어난 작품인지는 잘 가늠할 수 없었지만, 객석이 꽉 들어찬 가운데 배우들이 가구들을 하나 둘씩 날라다 놓으면서 시작된 공연은 상당히 품위 있고 세련돼 보였다.
우리의 ‘바냐 아저씨’를 연기한 배우는 세르게이 쿠르이쇼프인데, 도진의 9시간짜리 <악령>에서는 키릴로프 역을 맡고 있고(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로는 차라리 ‘샤토프’ 역에 더 어울리는데), 이번 <바냐 아저씨>로 ‘황금가면’ 연극제에서 남자연기상을 받았다. 그런 걸로 미루어볼 때, 연기력을 인정 받는 배우이지만, 내가 상상해온 ‘바냐 아저씨’와는 조금 다른 면모의 배우였다. 일단 키가 좀 크고(그래서 어정거리며 걷는다), 갈색 머리는 웨이브의 장발이며, 양복을 아주 단정하게 입었고, 약간 술 취한 듯한, 질질 끄는 말소리에는 콧소리가 좀 들어가 있었다. 다른 배우가 연기한 ‘바냐 아저씨’를 보아야 감을 좀 잡을 거 같다.
바냐 아저씨가 헤프게 어정거리다 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도진의 <바냐 아저씨>에서 두드러지는 건 의사인 아스트로프인데, 이 역을 맡은 배우 표트르 세마크는 단단한 체구에 똑 부러진 말투로 아스트로프의 열정과 냉소주의를 연기했다. 이 세마크란 배우가 도진의 <갈매기>에서는 역시 의사인 도른 역을, <악령>에서는 주역인 스타브로긴 역을 맡고 있다(이런 내용은 당일 70루블(2,800원)을 주고 산 전체공연 팜플릿에는 배우들의 사진과 약력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배우들의 이러한 면면으로 대략 도진 버전의 <악령>을 그려볼 수 있다. 아스트로프와 함께 도진의 <바냐 아저씨>를 끌고 가는 건 늙은 학자 세레브랴코프와 결혼한 ‘미의 화신’ 엘레나 안드레예브나인데, 크세니야 랍포포르트란 여배우가 연기했다. 이 배우는 <갈매기>에서 니나도 맡고 있었는데, ‘아름다우면서 콧대 높고 허영에 찬 젊은 여자’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다(실제로 눈이 크고 콧대가 높은 배우였다. 머리는 곱슬머리. 아니, 파마머리인가?).
도진의 <바냐 아저씨>에서의 클라이막스는 예상과 다르게, 3막에서 영지를 매각하는 게 좋겠다는 세레브랴코프의 발언에 분노한 바냐 아저씨가 그에게 권총을 겨누지만 그마저 제대로 못 맞히는 장면이 아니라, 4막에서 아스트로프와 엘레나가 단둘이 작별의 포옹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둘은 포옹만 하는 게 아니라 열정적으로 상당히 긴 시간 또한 키스를 하는데, 그 바람에 남편 세레브랴코프를 비롯한 다른 식구들이 모두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객석에서는 탄성이 나왔다). 내가 읽은 <바냐 아저씨>에도 그런 장면이 있었나 싶어서 기숙사에 돌아와 확인해보니까 원작은 그렇지 않았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서는 둘이 잠깐 포옹했다가 서로가 화들짝 놀라서 떨어진다(사실 그런 게 ‘체호프적’이다). 즉, 원작에서는 아스트로프가 바냐 아저씨 못지 않은 ‘등신’으로 나오는데(그래서 둘이 친구로서 어울린다), 도진의 <바냐 아저씨>에서는 아스트로프가 나름대로 박력있는 남자로 나옴으로써 ‘배신’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나는 이러한 도진의 해석이 창의적인 것인지 오바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물론 보기엔 더 좋다. 이 ‘한심한 인물들’의 드라마에 그래도 열정적인 키스씬이라도 나오니까 말이다).
엘레나의 남편이자 바냐의 처남이자 소냐의 아버지, 세레브랴코프 역은 이고르 이바노프란 배우가 맡았는데, 그는 <벚꽃동산>에서는 로파힌 역을, <악령>에서는 레뱌드킨 역을 맡고 있었다. 로파힌 역을 맡기에는 너무 젊잖고 완고해 보이는 외모인데(김무생 타입이다), 콘찰로프스키의 영화 <바냐 아저씨>에 나오는 아주 얌체 같은 늙다리 세레브랴코프에 비하면, 나름대로 권위적이고, 젊은 아내 엘레나를 거느릴 만한 세레브랴코프를 연기했다. 그밖에 주요 배역으론 소냐를 연기한 엘레나 카릴니나와 첼레긴을 연기한 알렉산드르 자비얄로프가 있다. 미스터리한 것은 이 배 나온 ‘첼레긴’이 <갈매기>에서 트레플료프를 연기한다는 점. 자비얄로프란 배우는 이고르 이바노프와 마찬가지로 1954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는 51세이다. 나는 (첼레긴 역에나 딱 어울리는) 그가 연기하는 트레플료프를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다!
기타 등등. 이제 마무리이다. 알다시피 <바냐 아저씨>는 “바나 아저씨, 우리, 일을 하는 거예요.”로 시작되는 소냐의 대사로 마무리되는데, 도진 버전에서는 이 마지막 대사가 비교적 절제된 톤으로 담담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룸메이트에 따르면, 한국의 <바냐 아저씨> 공연에서는 이 마지막 대사에 상당히 힘을 준다고(거의 울부짖는 수준으로). 하여간에, 우리들 ‘소냐’나 ‘바냐’들은 남은 여생을 그저 일이나 하는 수밖에 없겠다. 천국에 가서 그간의 노고를 위로 받고 쉬게 될 때까지 말이다. 그것이 냉철한 연민의 작가 체호프가 <바냐 아저씨>에서 내리는 결론이다. 이건 위안일까, 냉소일까? 혹은 낙관주의일까, 비관주의일까? 둘 다이다. 그래서 체호프를 ‘Pessimo-optimist’라고 부르기도 한다. 되는 일도 없고, 굳이 안 되는 일도 없는, 그래서 슬프도록 즐거운, 혹은 눈물 나게 즐거운 삶을 우리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갑시다!(막) 짝짝짝…
04. 6. 14-15.
첫댓글 옛날에는 멜이나 핸펀이 없었걸랑요. 그게 없으면 아마도 편지를 쓸 것입니다. 편지로 소설도 썼잖아요. 도스토예프스키도 역시 꽤나 많은 편지를 남길 걸로 아는데요.
메일이나 휴대폰의 기능을 무시하는 처사는 좀 웃기다고 봅니다, 체홉이 썼던 그 수많은 편지들은 자신의 마음이었을 겁니다, 마음이 없이 소통수단을 이용하는 경우는 절대 없기 때문입니다, 편지가 늘어가도 보낼 수 없고, 메일을 보내도 수신자의 응답이 없으며, 전화를 걸어도 상대방이 받지 않는 무수한 경우,
일방적인 편지는 그저 헛소리, 홀로 떠드는 혼잣말에 불과합니다. 체홉은 그 무수한 편지들에 자신을 담았고, 상대방은 편지를 통하여 그를 알아보았습니다(고 여깁니다). 언제나 보내지 못하는 편지들은 늘어갑니다. 보낼 수 없는 편지와 받지 않는 편지가 한데 어울려서 말이죠. 다음 통신문 기대하겠습니다. 로쟈님.
12 volumes of Chekhov's Collected Works(30 volumes) are letters! Life as a letter is not a talk...
전 그 편지를 언제 다썼을까보다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였을까가 제일 궁금하네요. 모든 편지는(어떤 형식이든) 연애편지가 아닐까요. 전이에 기초한(실제의 수신자이든 아니든)... 자신에게 띄우는 편지라는 것처럼...명답이지만 오답인 것도 드물겠죠. 체홉의 그 많던 편지는 정말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였나요?(아내?)
Of course, to his wife and to his friends...
제가 위에 쓴 답글의 글자량이 제한된 관계로 사실 줄였는데.... 위의 (아내?)의 의미는 (아내와 친구들이란 답은 이미 나와 있지만... 정말 어떤 타자에게 보내는 메시지 였을까라는 의미였습니다.
What is the meaning of '어떤 타자'?.. They are not '자신에게 띄우는 편지'. They are just letters...
"정말...였을까=어떤 타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자신에게 띄우는 편지" 이다라는 것을 의문형으로 물은 게 아니라 "(나는)정말(로) (체홉이 그 많은 편지를)'누구'에게 보낸 걸까' 궁금하다"라는 의미. 답은 이미 아내와 친구라고 나와 있지만. 그 많던 편지 속의 '아내의 이름', '친구의 이름'이 정말 '그들의 이름'
이었을까라는 뜻으로 적었습니다만. 제가 적은 말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니,'아내와 친구'가 아닌 '어떤 타자'라는말이 너무 '뜬금없이' 나온 멘트같다는 것도 사실입니다.(체홉의 속사정도 모르면서) 단지 '편지'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발신인과 수신인의 관계들이 맥락없이 떠올라서 쓴 답글이라고 일단은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