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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기 251 - 중국 서안 진시황릉, 화청지(華淸池)
. 13개 왕조의 도읍이자 한때 당나라의 수도 장안이기도 했던 이곳에는 진시황의 유적인 병마용갱을 비롯해 양귀비가 노닐던 화청지, 실크로드를 증언하는 회족거리 등 찬란한 중국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병마용갱의 발견은 중국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은 병마용을 관람 후 “현존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가 진시황
병마용의 발견으로 인해 8대 불가사의가 됐다”며 “피라미드를 보지 못했으면 진정으로
이집트를 여행한 것이 아니고, 병마용을 보지 못했다면 진정으로 중국을 여행한 것이
아니다”라고 극찬했습니다.
병마용갱의 발견은 우연이었다. 1974년 3월 29일 시안 시 외곽, 양신만(楊新滿)이라는
사람은 우물을 파다가 ‘쨍’ 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소리가 이상해 땅을 더 파고 들어가니
토기 파편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진시황의 병마용 종장갱
(從葬坑, 부장품을 넣어둔 구덩이)이었습니다.
2,200년 동안 땅속에서 잠자고 있던 진나라 대군들이 깨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1976년
1호갱의 북쪽에서 2호갱과 3호갱이 연이어 발견되었습니다. 1~3의 숫자는 발굴 순서에
따라 붙인 것으로 가장 큰 1호갱은 길이 230m, 넓이는 62m에 이릅니다.
병마용갱에서 나와서 진시황릉으로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 곳에 진시황 조각상이 있습니다.
진시황 조각상 밑에 병마 입니다.
그 옛날 한, 위, 초, 연, 조, 제 등의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중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진시황제의 정예부대의 병사들은 병마용갱에서 모두 전방을 향해 서 있는데, 특이한 점은
이들의 손에 무기가 없다는 것. 한나라 항우가 진나라를 침범했을 때 무기를 모두 가져가
자신들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병마용의 배치와 배열은 중국 고대 병종의 배치 및 병기장비, 전략과 전술을 잘 보여주는
사료로서 가치도 매우 크다고 합니다. 1호갱에서 2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2호갱은 보병,
기병, 궁노수, 전차 등 각종 병과가 모두 모여 있는 모습이며, 1호갱과 마주한 3호갱은
지휘부대가 회의하는 모습의 병마들이 있습니다.
진시황릉은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 시황제의 묘지입니다. 여산, 또는 역산(酈山)은 산시 성
시안에서 30 km 떨어진 동현의 원산원(驪山園)에 있는 야산입니다. 기원전 246년에서
208년까지 39년간 공사를 했으며, 지금의 황릉의 무덤은 76m로 무덤이 있는 야산은
옛 진나라의 수도 함양의 동쪽 부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본기 편에 따르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여산(酈山)에 무덤을 착공하여
통일 후에 최대 70여만 명까지 동원하였다고 합니다.
현재의 진시황릉은 병마용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며 발굴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이 정확한 위치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지금의 진시황릉은 다분히 황릉의 위치와
역사적 의미만을 알려주는 전시용이며, 입구에서부터 정상까지 가는 200m 정도의 계단을
설치하고 규모만 파악할 정도의 의미 밖에 주지 못합니다. 지금도 넓은 산에 발굴이 계속
중이며, 언젠가는 발굴이 끝나 실체를 밝힐 것으로 예상할 뿐입니다.
진시황의 사후 함양으로 들어온 항우가 30만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도굴을 했다는 기록과
황소의 난 때 이곳을 도굴하여, 외부로 노출된 쇠붙이는 모두 도굴해 갔다는 기록이 있어
여러 번 외벽의 도굴이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내와 강을 이뤄 바다가 형성될 정도로 엄청난 양의 수은을 이용하여,
지하궁전을 지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수은으로 인해 지하궁전은 완전한
도굴이 힘들었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1974년 3월 29일에 한 농부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1987년에 병마용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진 시황제(중국어: 秦始皇帝, 병음: Qín Shǐ Huáng Dì,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7월 22일)는 전국 칠웅 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중국 최초의 황제입니다. 본 성은
여(여), 이름은 정(政) 입니다. 혹, 씨는 진(秦), 조(趙)입니다. 성명은 영정이고, 혹 씨명은
진정(秦政), 조정이며, 장양왕의 아들이라는 설대로 영정이라고도 합니다.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은 정사가 아니며, 당시 세도가 대단하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의 승상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입니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정확히 등재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여불위(呂不韋)가 섭정을 하였고 기원전 241년부터 기원전 21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습니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 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습니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습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영정은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공자 영자초와 그 부인 조희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원래 조희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습니다. 여불위는 조희를 영자초에게 바쳤고, 영자초는 조희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사기》 여불위열전에서는 이 과정에서 원래 조희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이를 숨기고 정치적 목적에서 진시황제를 숨겨주었다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여불위열전의 기록이 사실인지에 대한 논의는 분분합니다.
어쨌건, 영정은 줄곧 조나라에서 자라다가 기원전 250년, 영정의 증조부인 소양왕 영직이
주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소양왕은 얼마 후, 사망하였고 그 아들인 효문왕 영주가
즉위했습니다. 이에 영자초는 처자와 여불위를 데리고 진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효문왕은 즉위한 지 3일만에 사망하고, 태자 영자초가 즉위하니, 이가 장양왕입니다.
영정은 곧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몸이 매우 허약하였다. 3년 뒤에 아버지 장양왕이 훙서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국왕의 자리에 즉위하였습니다
전국 통일 과정은 이미 시황제가 즉위 하기 이전인 장양왕때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 장양왕이 기원전 250년 주나라 정벌, 즉 진주전쟁에서 승리하여 정복 병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기원전 230년부터 시황제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 통일을 위한
통일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진나라는 가장 세가 약했던
소한부터 멸망시켰습니다.
기원전 228년에는 조나라까지 멸망시켰고 그 때, 연나라의 태자 희단이 자객 형가를 시켜
잔치 자리에서 영정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이어,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
기원전 223년에는 진나라 다음으로 세가 가장 세었던 초나라, 기원전 222년에는 연나라,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드디어 마지막 남은 제나라까지 멸망시켜 시황제의 나이 40세에
전 중국 땅을 마침내 통일하였습니다.
시황제는 국왕(國王)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와 왕관 등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칭호를 정하게 됩니다. 처음에 정은
도교에서 나오는 신비한 칭호인 태황(太皇)과 천황(天皇)과 지황(地皇) 중에서 어느 칭호를
정해야 할 지 고민이었습니다. 이사와 왕관 등은 태황과 천황과 지황 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
인 태황의 칭호를 바쳤습니다. 결국 고심 끝에 시황제는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하기로 하였고, 자신은 황제의 자리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시황제로 시작하여,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이
2세, 3세 등 만세까지 진 제국이 지속되기를 바랫습니다.(통일 후, 진시황은 뒤의 신하나
자식들이 아버지나 선군의 시호를 짓는 것이 품위에 맞지 않는다 생각하고 자신의 후대
황제들을 이세, 삼세황제등으로 부르게 지시하였습니다
화청지(華淸池) 역시 시안을 찾은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입니다. 당나라의
왕실 원림이던 화청지는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눈 곳으로 6,000년 동안 마르지않고
43℃의 온수가 나오는 온천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화청지는 또 다른 중국 근대사의 큰 사건인 1936년 시안 사건(서안사변)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시안에 주둔하던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이 같은 해 12월 12일 이곳에 머물고
있던 총통 장제스를 급습해 체포한 뒤 홍군 토벌 중지 및 항일전쟁을 위한 제2차 국공합작을
종용했던 것입니다. 당시 장제스(장계석)가 머물던 관저에는 시안 사건 때 벌인 총격전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화청지는 서안 동쪽 여산 기슭의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온천지로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온천을 즐겼던 휴양지로 유명합니다. 화청궁은 주나라 때부터 황실의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와 자주 찾아와 대규모로 전각을 짓고 정원을 만들면서 유명해진
곳으로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현종은 당나라의 6대 황제로 27세에 즉위하여 '개원(開元)의 치(治)'를 열고 개혁과 선정을
베푼 총명한 황제이었으나 경국지색 양귀비를 만나면서 총명함을 잃게 되었습니다.
현종이 자기 며느리를 취한 폐륜을 저지른 때문인지, 사랑은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국사를
내팽개치고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에 탐닉하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길을 가던 중 양귀비를 비단 줄에 목매달아 죽게 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종말을 가져 왔습니다.
화청궁은 중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서안사변(1936년)이 일어난 오간청도 역사 유적으로
유명합니다. 중국 북서지방 서안의 동북군(만주군) 지휘관이었던 장학량이 장개석이 중국
북부를 침략한 일본군에 대항하는 대신 반공 내전을 지속할 방침을 세우자, 장개석을 연
금했던 사건이 바로 서안사변입니다.
서안사변에서 장개석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 송미령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참 역설적입니다. 장학령과 송미령의 젊은 시절 로맨스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장학령은 그가 사랑했던 송미령이 혼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장학령 역시 서안사변 후 장개석에 의해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게 되는데, 말년에 연금에서
해제된 것도 송미령의 역할이었다고 전합니다.
화청궁에는 장학령과 송미령의 로맨스도 얽혀 있는 것으로 보면, 화청궁이야말로 세기의
로맨스의 산실이 아닌가 합니다.
화청지(華淸池, 중국어: 华清池 화칭츠[*])는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시안 시의 동쪽 35km
떨어진 '여산' 아래에 위치한 곳으로, 북으로는 위수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온천이 있어서, 43도의 온천수가 샘 솟습니다. 온천이 드문 지역이다 보니
3,000년 전인 주나라 때부터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나라 때는 '여궁', 진나라 때는
'여산탕', 한나라 때는 '이궁'으로 당나라 때는 '화청궁'으로 불렸습니다.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지어준 '해당탕'이 있는 곳이며 이때 전성기를 맞게 죕니다.
그러나 당 현종 말기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화청지는 대부분 불타고 후에 청나라와 중국 정부
에서 30%만 복원하는데 그쳤습니다.
화청궁 앞 광장의 현종과 양귀비의 영원한 사랑을 기약하는 형상. 백거이의 <장한가>는
궁궐 장생전에서 현종과 양귀비가 하늘을 가게 되면 비익조가 되고 땅에 나무가 되면
연리지가 되자고 영원한 사랑의 기약을 한 것으로 노래합니다.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뜨거운 사랑을 노래한 시 '
장한가(長恨歌)'에서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夜半無人和語時 야반무인화어시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次恨線線無絶期 차한선선무절기
7월 7일 장생전에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건만
이 한은 끝없이 계속 되네
이렇듯 한날한시에 같이 죽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현종이 양귀비에게
푹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한 탓에 나라가 흐트러지고, 결국 안록산이 '안사의 난'을 일으켜
궁지에 빠졌었습니다.
당시 서안에는 왕의 근위병 4천여 명이 있을 뿐이었기에 현종은 서쪽의 사천성으로 도주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지금의 마위파 부근에 왔을 때, 이번엔 같이 가던 호위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호위병사들은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일 것을 강요하고 결국 현종은 사랑하는
양귀비에게 스스로 목을 맬 비단천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양귀비의 나이는 37세였습니다. 지금도 마위파의 그 자리엔 양귀비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흥미있는 사실은 흙무덤의 높이가 예전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이 양귀비 무덤의 흙으로 팩을 하면 피부가 좋아지고 예뻐진다는 믿지 못할 소문을
듣고 무덤의 흙을 마구 가져갔기 때문이랍니다. 하는 수 없이 지금은 돌로 봉분을
싸버렸습니다
지금도 장한가를 공연합니다. 이것을 보려고 관광객이 몰립니다.
한편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양귀비지만 지금의
미인의 기준과는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당시 왕실의 시인으로 있었던 이태백은 양귀비에
대하여 '허리가 굵어 몸매가 아름답지 못하고 용모도 그리 신통하지 못하다'는 내용의 시를
썼습니다. 이 시를 읽고 발끈한 양귀비가 현종을 충동질하여 이태백을 먼 나라로 귀양
보내 버렸습니다. 귀양까지 보낼 정도면 이태백의 시가 아마도 맞았던가 봅니다.
화청지는 서안에서 동쪽으로 30여㎞ 떨어진 여산 기슭에 세워진 일종의 별궁입니다.
뛰어난 자연환경과 천연온천으로 인해 서안에 도읍을 정한 중국의 역대 제왕들은 모두
이곳을 좋아했습니다.
전해지는 역사에 의하면 서주 시대에 이곳에 여궁(驪宮)을 세웠으며, 진대에는 여산탕
(驪山湯)이라 하였습니다. 당나라 현종 시대에는 이곳을 더욱 크게 넓혔고 이름을
화청궁(華淸宮)이라 고쳤습니다.
현종은 745∼755년 사이에 매년 10월이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양귀비 자매와 측근 대신들과
함께 화청지로 와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야 장안으로 돌아갔습니다. 당나라의 시
중에는 화청지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비일비재할 정도로 중요한 문학적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모습은 화재로 불타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양귀비에게 비운을 안겨준
안사의 난은 이곳을 지나면서 화청지를 황폐화시켰습니다. 지금의 것은 예전의 크기의
7분의 1 정도만을 복원한 것이라 하니 당시의 화려함이 상상이 됩니다
화청지 온천의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수온은 항상 43℃를 유지하며 다량의 광물질을
포함하고 있어서 관절염,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 합니다. 양귀비가 장기간 미모를
유지한 것과 당태종이 육칠십에도 여전히 정력이 왕성했던 것은 화청궁에서 장기간
약수로 목욕을 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음력 7월 7일 양귀비의 생일잔치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놓았으며. 주변 각국의 사신들이 선물을 바치고 있는 모습이 그녀의 높은 지위를 짐작하게 합니다.
양귀비(楊貴妃, 719년 6월 26일 ~ 756년 7월 15일)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입니다.
서시, 왕소군, 우희와 함께 고대 중국 4대 미녀들 중 1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녀의 성은 양(楊)이고 이름은 옥환(玉環)이며, 귀비는 황비(후궁)로 순위를 나타내는
칭호입니다.
당 현종 이융기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그것이 과도하여 끝끝내 안녹산과 사사명이라는 두
호족 세력 무장 대표가 공동 주도하여 반란을 획책한 이른바 안사의 난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 역사적 사건의 배경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도 부릅니다.
양옥환(楊玉環)은 719년 당 현종 집권 초기에 쓰촨성 촉주(蜀州)(현 두장옌 시)에서 태어나
포주(蒲州)의 영락(永樂)(현 산서성 융지 시)에서 자랐습니다. 양옥환의 고조부인 양왕(楊汪)
은 수 양제 양광이 통치하던 시대에 중신이었습니다. 수나라의 멸망 이후 정나라의 왕세충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621년 당에 의해 왕세충이 패배할 때 양왕도 살해됐습니다. 양왕은 원래
산서성 화현(현 웨이난 시) 출신이었는데, 양왕 일가는 용락(현 윈청 시)에 이주해 기반을
다졌습니다.
양옥환의 부친 양현염(楊玄琰)은 촉주에서 호구를 조사하는 하급관리였고, 양현염의 가족은
양현염과 촉주로 이사했습니다. 양현염은 아들이 없었고, 양옥환과 양옥환의 언니를 세 명
낳았습니다. 양현염은 양옥환이 어렸을 때 죽어서 양옥환은 하남성 낙양에서 하급관리로서
근무하던 숙부 양현교(楊玄璬)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숙부는 가정교육에 엄격해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많은 시문을 외우게 했는데, 총명했던 양옥환은 숙부 집에 있던 기생 출신 하녀
에게서 호선무(胡旋舞)를 몰래 배웠습니다. 당시 감찰어사를 맡던 양옥환의 친척 양신명
(楊愼名)과 양신명의 처는 양옥환을 자신들의 집에서 열리는 연회에 자주 초청했는데,
연회의 손님들 중에는 당 중종 이현의 딸 장녕공주도 있었습니다
장녕공주의 첫 번째 남편 양신교는 본래 양옥환과 같은 홍농 양씨 출신이었는데 마침
장녕공주와 양신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양회가 당 현종 이융기가 가장 총애하는 딸
함의공주(咸宜公主)와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장녕공주는 이 혼례에서 빼어난 미모로
소문난 양옥환에게 들러리를 부탁했고, 양옥환은 함의공주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함의공주처럼 혜비 무씨(惠妃 武氏)의 소생이었던 제18 황자 이모(李瑁)는 양옥환의
미모에 매료됐고, 함의공주의 주선으로 무씨도 양옥환을 마음에 들어 해 이융기에게
양옥환을 이모의 비로 달라고 청했습니다. 무씨는 측천무후 무조(武曌)의 조카라는 이유로
황후에는 봉해지지 못했지만, 이융기에게서 가장 큰 총애받는 후궁이었기에 이융기는
무씨가 한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733년 개원 23년 16세 양옥환은 이모와 혼인했습니다. 이모는 무씨와 이임보의 후원으로
황태자에 추천됐으나, 무씨 사망 후 익년 환관 고력사(高力士)의 추천으로 이여(李璵)가
황태자로 책봉됐습니다.
무씨 사망 후 실의에 빠진 이융기를 위로하고자 고력사는 무씨와 닮은 양옥환이 이모와
화청지(華淸池)로 피서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융기에게 화청지로 가라고 권했습니다.
그 날 이후로 무씨를 닮은 미모에 시와 노래까지 능한 양옥환에게 감정이 생긴 이융기는
고력사와 이 일을 상의했습니다. 고력사는 양옥환을 만나 이융기의 의중을 암시했고,
이융기는 양옥환을 화산의 도사로 출가시켜 아들인 이모에게서 떼어놓고 궁내에 도교
사원인 태진궁(太眞宮)을 짓고 양옥환을 다시 이곳을 관리하는 여관(女冠)으로서
불러들였습니다. 이때 양옥환은 22세, 이융기는 57세였습니다.
745년 양옥환이 27세에 귀비가 되면서, 당은 서서히 끝자락을 달리게 됩니다. 이융기가
재위한 초기에는 개원의 치를 이룩할 정도로 어질게 정치했지만, 양옥환이 등장한 후
양옥환 일가의 전횡이 시작되면서, 당은 힘을 점점 잃게 됩니다. 양옥환의 세 오빠에게
모두 높은 벼슬을 주었고, 언니 세 명을 국부인에 책명할 정도로 이융기는 양옥환을 총애
했습니다. 그중 양옥환의 사촌 오빠인 양소는 이융기에게 이름 ‘국충’을 하사받고 승상까지
올라 국정을 전횡한 인물로서 환관 고력사와 담합해 이융기를 정치에서 관심을 멀어지게
합니다. 양옥환에게 셋째 언니인 괵국부인 양옥쟁이 있었는데, 미모가 아름다웠습니다.
이융기는 괵국부인을 보고 반해 양옥환에게 입궁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양옥환은 질투해서
이 명령을 거절했고,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되어 이융기는 양옥환을 퇴궁하게 했는데,
고력사와 양국충이 두 사람을 화해하게끔 해서 두 사람은 사이가 다시 좋아졌습니다.
747년 절도사 안녹산이 등장해, 양옥환은 안녹산과 친해집니다. 새로운 권력자의 등장에
위기를 느낀 양국충은 견제하는데, 이것은 안사의 난이 일어나, 당이 멸망하는 원인이
됩니다.
756년 지덕 원년 가서한은 안녹산에게 대패하면서 잡혔고 동관도 함락되었습니다.
이융기는 수도 장안을 빠져 나가, 촉(현 쓰촨성)으로 피난했고, 양옥환 및 양국충, 고력사,
이형(李亨)도 동행했습니다.
756년 7월 15일 섬서성 마외(馬嵬)에 이르러, 전란 원인이 된 양국충을 증오하던 진현례
(陳玄禮)와 병사들은 양국충과 국부인들을 처형했으며, 현종에게 ‘도적의 근본’인 양옥환을
죽이라고 요구했습니다. 현종은 “양옥환은 심궁에 있었고 양국충의 모반과 무관하다”라고
옹호했지만, 고력사의 진언에 따라 양옥환에게 사세부득이 자살을 명했습니다. 고력사에
의해 양옥환은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이융기는 양옥환을 안장하고 장안에 돌아간 후 이장을 명했지만, 예부시랑 이규가 반대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융기는 내시에게 은밀히 이장을 명했습니다.
양귀비의 신장은 155cm이고 체중은 65kg의 건강한 체형이었다 합니다.
화청지에는 지금도 온천수가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관광객들에게 온천탕 입장권을 팔고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양귀비의 피부를 가지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이곳에 지하철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화청지 앞에 옛거리가 있습니다.
이곳이 려산(여산)입니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서안시내로 들어갔습니다.
초대소는 옛날 옛공산당시절에 공산당원들이 출장다닐때 묵었던 숙박시설입니다.
지금도 매우 싸다고 합니다.
시안에 도착했습니다.
“장안(시안)의 풀로 태어나는 것이 변방의 꽃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던 도시, 시안.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은 그리스 아테네, 이탈리아 로마, 이집트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로 꼽히는 도시이다
시안은 우리에게 당나라의 장안(長安)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당시 당나라는 세계 최강제국
으로 인구가 20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번성했습니다. 온 세계에서 사신과 상인들이 몰려
드는 국제도시였고, 외국에서 방문하는 사신만 해도 연간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구중궁궐 대문이 활짝 열리니, 만국 사신들이 황제에게 절을 올리네(九天開宮殿
萬國衣冠拜冕旒)”. 당나라 전성기인 8세기에 활동한 시인 왕유가 수도 장안을 묘사한
시구입니다.
미국의 Subway 체인점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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