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물은 언젠가는 죽게 되어있으나
물은 그렇지 않다.
물은 영원한 삶을 살지만 산업혁명 이후에 물은 서서히 죽어 간다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그다음 날에 ...
오늘은 상주의 북천으로 가본다.
북천(北川)이 흐르는 상주땅 그곳에는 그 옛날 북방 녹둔도에서 여진족과 싸우다가?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였던 장수이며
임진왜란 1592년 4월 중순 상주 전투에서 왜군에게 완전 개 털렸던 이 일 장군께서 갑옷도 걸치지 않은체 발가벗고
근무지 이탈(도망)했던 북천 전투지역으로 내려가는 맑은 하천이다.
대구 북부 정류소에서 첫차로 상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다시 상주에서 백두대간 지기재로 향한다.
날씨는 엄청 맑고 좋으며 모처럼 대간길에 접어드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나 지난날 20kg의 보따리 둘러 매고 이 길을 지나며
얼마나 즐거워 했던가! 하지만 그때 다친 어깨가 지금은 지독한 통증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만 훈장처럼 달고 다닌다
몸은 그날의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기억하며 마음은 또다시 백두대간길을 요동치며 달린다.
지기재에서 북진으로 꿀봉산(꿀밤 나무가 많아서 지어진 이름)으로
거의 평지길이나 다름없는 대간길을 서서히 오르면 오늘 먼저 지나간 선답자가 없었기에 등산로에는 온통 거미줄이 먼저 반긴다
대간길에서 살짝 벗어난 꿀봉산 정자
작년에 지어진 정자인데 절벽 위에 설치된 4각 정자로 조망이 아주 좋아
신선이 있다면 분명 이곳에서 장기(將棋)를 두거나 막걸리 한잔 기울여 천하를 내려다볼 것 같다.
눈앞으로 보이는 곳 모두가 봉황산에서 흘러온 석천의 물 가두기 산줄기인데
좌측으로 대간길에서 벗어난 지장산과 직지사를 품은 황악산이 우람해 보이고 가운데 정면으로는 백학산의 당찬 모습이다.
우측에는 팔음산의 자태가 보이고 상주시 모동면과 모서면의 넓은 들판 비닐하우스에는 거봉이나 샤인 품종의
비싼 포도가 영글어 출하 대기 중일것 같다
앞은 지기재에서 이어지는 안심산과 멀리 백학산이 보이고 저멀리는 구미의 금오산인듯 하다
대간길 봉황산에서 이어온 팔음산과 우측으로 봉황산이 지척이다
이곳으로 흐르는 물은 모두가 초강천의 최장 발원지인 석천이며 석천으로는 대부분 포도 농사를 짓는 땅으로
상주시에서도 부자들만 산다는 화동면이나 화서면이다.
이제 경치 놀음은 그만하고 오늘 갈길도 멀고 하니 그만 일어선다
꿀봉산 정상에 터잡은 천하 명당터로 보이는 무덤 한기가 벌초를 마치고 있고
묘의 방향은 봉황에서 이어지는 팔음산을 모산으로 잡은듯한데
방향을 우측으로 봉황산 방향 조금만 더 틀었어도 후손들이 삼정승 정도는 했을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조망이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꿀봉산에서 다시 대간길로 돌아와 북, 서쪽으로 진행해서 본 내려갈 계곡과 안심산과 백학산을 보며
멀리 백학산 능선의 조금 파인곳은 상주시 모서면 대포리에서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 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이며
지난날 대간 둘레길을 걸으며 엄청 추운 날 큰 재에서 실명할뻔했던 그 산길이다
330봉 상주시 화동면 어산리 정상에 특별한 특징이 없고
송이가 날 것 같은 굵기의 소나무가 많이 자란다
인증 담고 북천길 시작합니다.
지나간 경로와 157번째 누적거리 9,604km
330봉에서 소나무 잡목을 뚫고 내려서면 묵은 임도길이 나타나고 그 옆으로 북천이 시작된다.
전날 비가 와서 첫 물은 금방 찾았지만 이런 물을 발원지라 하기에는 문제성이 있지만
어쨌거나 물은 흐르고
오늘 길은 편안하지만 발아래는 늘 신경 쓰인다.
사시사철 이렇게 물이 흐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묵은 임도길이 이어지고 끊어지기를 반복하는데
묵은 텃밭이 나오는데 갈수기라면 이곳쯤이 발원지겠다.
물은 아주 많고
올해 여름 지독하게 더웠고 무척 가물었죠
태양이 머리위까지 내려 앉았을 정도의 더위 였는데 이녀석들이라고 그 더위를 온전하게 견뎠을까?
다른 지역은 벌써 추수를 한곳도 있는데 천수답(天水畓)이라 벼들이 아직 30cm도 채 자라지 못하였고 처삼촌 벌초했어도
이 정도는 아닐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벼이삭도 올라오지 않은 모습이다
주인장의 농심(農心)은 얼마나 답답할까! 늦가을에 추수를 한다고 해도 한말이나 나올까 싶다.
계곡으로 내려오면 지기재로 올라가는 도로와 만나는데
길가에 젊은 분이 애처롭게 서있다 무슨 사연인고 하니 커브길에 짐을 싣고 가다가 짐이 한 곳으로 쏠리면서 철판 자제가
모두 길옆에 떨어져 포크레인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저짜~ 트럭이 보이고 가드레일 옆에 떨어진 철판이 보이는군요
애간장 탈때는 음료수가 최고라 삶은 계란 하나와 음료수 하나 건네 드리며 힘내시라 전해드린다.
물은 흐르고
대간길 안심산에서 흘러온 물이 합쳐지는 곳
맑게 흐르지만 아래에 공사를 해서 흙탕물이
물은 1 급수는 아니고 2 급수 정도의 물이다.
멀리 백학산 방향
대간 진행하다가 내려서면 만나는 임도길이 보인다.
태풍이 지나가고 큰 물이 지나가고 힘없는 갈대는 모두 바닥으로 고개를 숙였다.
지방하천 북천
북천은 2 급수의 물이라 수영 정도는 해도되는 맑은 하천이다.
초가을이라지만 한낮에는 뜨거워 좌, 우의 길들 중 그늘이 많은 곳으로 찾아가며
추석맞이 하천 둑 제초작업을 하면서 잘 익은 호박 하나 덩그러니 놔두었고
노루 1리 마을을 지나며
더버라
지나갈 하천길
지나온 하천과 백두대간길의 백학산
지나온 하천과 백학산이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고 눈앞에서 사라진다.
하천 옆으로 뫳선생 못 들어오게 만들어 놓은 철조망이 있고 벚나무 그늘이 이어져 시원하게 이어진다
바람 좋고
코앞으로 갑장산과 더불어 상주시의 진산인 노악산이 보이니 거의 끝나가는 듯
북천은 깨끗하게 흐르지만 공사중인 곳이 있어 흙탕물이 지나간다
물가에 앉아 발 담그고 잠시 쉬었다가
그늘 찾아 지나오다가 보니 저짜 맞은편에 식당이 보이는군요
그늘이 좋은가?먹을것이 좋은가?
한 끼 안 먹어도 더운 날은 그늘이 좋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수중보에서 떨어지는 하얀 포말이 시원스럽게 보이고
이제부터는 상수도 보호구역이다.
이무기가 출몰했다는 그곳인가
저곳에서 천년을 살았던 이무기는 용이되었을까?
아니면 아직 천년이 덜 되어 물속에서 아등바등 코막고 숨 참아가며 웅크리고 있을까?
상주시 연원동의 흥암서원
숙종때 송준길의 학문을 기리지 위해 세웠으며 고종때 서원 철폐령때 헐리지 않은 47개의 서원중 하나다
참고로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으로는
소수서원(풍기),남계서원(함양),옥산서원(안강),도산서원(안동),필암서원(장성),도동서원(달성군),병산서원(안동)
무성서원(정읍),돈암서원(논산)이 있다.
대부분 가본곳이지만 논산의 돈암서원은 아직 가보지 못한곳이다
하천 옆으로 상주시 모습이 보이고
바람 불어도 흔들릴지언정 뽑히거나 꺾이지 않는다던 "여인의 속마음 같을" 갈대가 큰 물이 지나가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북천교
임진왜란 북천 전적지를 찾아서
태평류가 보이는데 건물은 순조 때 상주목사 정동교가 건립했으며 여기저기 이사를 몇 번 거치다가 지금의 자리에 옮겨졌다.
임진왜란 순국비(殉國碑)
첫번째 판관 권길,가운데는 모르겠고 끝에 상주호장 박결의 순국비
비각(碑閣) 이곳은 임진왜란때 싸우다 순국하신 3 충신(종사관 윤섬, 박호 이경류와 2의사 (의병장 김준신, 김일)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충신의사단비"복제본과 '판관권길의사비"가 보호되고 있다.
바로 위에는 충열사가 자리하는데 입장은 오른쪽 퇴장은 왼쪽이고 중앙의 문은 신(神)이 다니는 문이다.
충렬사
아홉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 안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중앙군 판관 권길,사근도찰방 김종무,호장박결,의병장 김준신,김일 무명용사 1인의 위패를 모셨다.
상주 북천 전투에서 최고 책임자였던 순변사 이일장군께서는 부하들이야 죽던 말던 일찌감치 도망쳐서 순국이고 뭐고 없고
방명록에 사인도 하고 충렬사에서 본 상주시와 갑장산의 모습은 아주 좋았는데
그 옛날 이곳에서 싸웠던 군졸과 장수들이 지켜보던 갑장산은 모습이 어땠을지
임란 북천 전적비
임진년 4월 23일 상주에 도착한 조선 중앙군 60명과 권길 박걸이 소집한 장정 800명이 왜군 1만 7천 명과 용감하게 싸웠으나 전원 순국한 곳
멍청한 장수 한 사람이 지랄을 해서 패전한 전투로
1592년 4월 15일 부산 동래읍성 전투를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올라오던 왜군
이 무렵 선조 임금은 크게 당황하여 순변사 이일 장군을 경상도 상주로 내려 보낸다.
하지만, 상주로 내려보낼 병력이 없으니... 가보고 싸울 수 있으면 싸우고, 말면 말라는 식으로 보내 놓으니
순변사 이일이 모병을 하는데 유생들과 지방 서리,사대부 자식들은 몸이 허약하다거나 공부해야 한다고 다 빠져나가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 힘없는 농민들이다.
우여곡절 끝에 상주시 병성천과 북천이 만나는 곳(현, 임란 북천 전적지) 8백여명의 병졸을 만들어 일본군을 대적하는데
4월 중순 어느날 김천에서 농민이 찾아와 왜놈들이 근처에 이르렀다고 보고하자 순변사 이일이 "무슨 헛소리로 부하들의
사기를 꺾느냐"며 농민의 목을 베어 버린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이일은 갑옷도 입지 못한체 도망가고 대부분 전사한다.이일은 훗날 탄금대 전투에서도 도망친다. 도망도 싸움의 기술이라지만 이일의 훗날은 어땟을까
이후의 기록을 보면 1601년도에 부하를 죽였다가 살인죄로 호송되다가 정평에서 죽었는데 임진왜란의 최악의 장수로
신립, 원균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지저분하고 더러운 장수?로 알려져 있다.
신립 장군은 당대 최고의 장수로 충주 남한강이 흐르는 탄금대에서 한방에 모두 거덜 낸 장수이나 도망은 치지 않았고
원균 역시 한방이 있는 장수로 칠전량에서 모든 걸 한꺼번에 말아먹은 장수다
이일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근무지 이탈(도망)과 무고(誣告)를 일삼은 장수
혹시라도 이일의 일가(一家)가 이 글을 읽으신다면 그렇다는 이야기니 너무 욕하지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태평루에 올라와서 본 상주시와 갑장산 모습
북천교 아래에 한 여름철에 운영하는 물 놀이장이 있는데 올해 행사를 했는지 못 했는지
북천의 2 급수 물이 좋아서 5년 전부터 시행했으나 아이들이 수영하는데 물뱀이 자주 나타나 아이들이 기겁을 했다는 곳이다.
북천교에서 본 내려갈곳
시원한 벚나무가 열병하듯 서있는 길 따라
상주시 하수 처리장과 장례식장이 있는 곳
북천이 백두대간 웅이산 남쪽 계곡에서 흘러온 병성천과 만나는 곳에서 하루 일정을 마무리한다.
상주하면 북천 북천하면 상주전투를 생각하게 하는 길이다.
더위가 한풀 꺾였을법도 한데 9월 초의 날씨인데 왜 이리 더운지...
다음 하천은 강원도의 마읍천과 연곡천으로 가본다.
첫댓글 상주하면
전 막걸리가 생각납니다...
청와대에 들어갈정도로...
맛이 일품입니다...
잘지내시죠
상주하면 포도가 아닌가요?
하천길 중에서 상류에는 거의가 포도 밭입니다.
다행입니다 상주 여전히 이름값은 하네요
상주 좋은동네죠
백두대간 산길에서 만나는 산들도 멋지고
드넓은 들판도 아름답구요
조용한날 갑장산에 한번 다녀 오십시요
맑은 물이 흐르는 풍경은
우리가 항상 추구하여야 할 일인데도
왠지 뒷전으로 밀리는 느김입니다.
방장님의 강행기가 널리 알려져 맑은 물을
다 같이 걱정하고 개선하는데 있어서
그 초석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먼길 걷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물길 여행도 이제 갈무리가 다되어 갑니다.
물따라 세상 구경 참 많이 했구요
전국 안가본곳이 없네요
방장님의 후기로 재미난 역사 공부를 합니다.
어쩌면 이리도 박식하실 수 있는지... 특히, 역사의 장면을 생생하게 되살려내시는 힘.
이 참에 조선왕조실록을 뒤적거리며 이일(李鎰) 장군에 대해 찾아 읽었습니다.
읽고나서 방장님의 박식하심에 다시 탄복합니다.
다만, 1)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 이일 장군이 신립 장군과 더불어 북방에서 명성을 떨친 점,
2) 상주 전투에서 혼자 도망친 이후, 강원도와 황해도(해주, 길주, 황주), 그리고 평양에서 큰 공을 세운 점,
3) 임진왜란 이후 민심 수습 과정에서 애쓴 점 등을 감안하여
너그럽게 용서해 주심이 어떨는지요?
이일 장군은 첩보력을 바탕으로 하는 '기마전'에 능했던 분 같은데,
당시에도 곧잘 도망을 친다든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대한다든지 해서 조정에서도 말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던 듯합니다.
상주 전투에서 많은 민관군이 전사를 했죠
유일하게 살아 남은 장수?가 이일이구요
군인은 싸우는게 임무인데 ...
훗날 민심을 수습했다고 하지만 ...글쎄요 입니다.
ㅎㅎㅎ
방장님 사진을보니 북천 주변환경이 상당히 깨끗합니다 하천관리가 잘된것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