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 일본의 해양정책과 비교된다. 2015년 6월 중국이 남중국해에 인공섬 조성. 무장을 기정사실화하자 미국이 총력 저지하며 일본은 남중국해에서 태평양으로 나서는 길목에 오키노토리 확장으로 중국의 대양진출 저지 속셈. 찰떡궁합 미일(美日).,우호 혈맹관계. 오키노토리는 일본 도쿄에서 남남서쪽으로 약 1,740㎞ 떨어진 태평양 해상에 위치한 암초. 높이 70㎝, 가로 2m, 세로 5m 규모의 산호초다. . 산호초를 배양하는.,오키나와현 쿠메지마 연구센터. 오키노토리 산호초에서 작은 크기의 산호초를 가져와 1년간 금속판에서 크게 배양한 후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머지 않은 장래에 세계 최초 3 헥타아르 정도 ‘인공 산호섬’이 조성될 수 있다.” - 마코토 오모리- 3 헥타아르(9075평) 산호초 인공섬. 일본이 산호초 형성에 열을 올리는 것은 오키노토리가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인 때문. 섬이 되면, 국제적으로 200마일 경제수역이 형성. 자원의 보고인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오키나와에서 대만 해역까지 일본의 해상 영토를 크게 확장. 미군 괌 잠수함기지 설립지원 용이. 특히, 중국의 핵잠수함 이동 경로와 일부 겹쳐 향후 미국과 중국이 충돌할 경우, 군사적 요충지. ‘오키노토리’ 산호초 인공섬 조성에 성공할 경우, 중국의 ‘인공섬’과는 달리 국제적 비난을 피하면서 일본은 영토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국제적으로는 일본정부의 친환경 정책으로 평가되면 국제법 상 섬으로 인정받겠다는 것이 일본의 계산이다. 오모리 교수는 우호적인 국제여론을 끌어내고 있는 발언. “산호초 영역을 점점 넓혀가고 있지만, 이식된 산호초 망실률이 높은 것도 사실. 이식된 산호가 자연 확장력을 갖고 있는지 산호섬이 커지고 있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
산호초 재배로 인공섬을 만들어 배타적 경제수역을 확장할 속셈 아닐까? ............................ ............................. |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서해바다 거친 풍랑 속에서
암초 또는 여(汝)를 보았다면
그 뱃사람은 십중팔구 물고기밥.
여자 물귀신을 뜻하는.,여(汝).
'산제물 처녀 물귀신'.,汝.
공양미 삼백석에 팔린.,심청.
인신공회 산제물 처녀였던 것.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한.,인신공회 풍습.
산제물 처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부인당.
인신공회 풍습에서 비롯된.,해신당 무녀 풍습.
삼척 신남 해신당.
섬의 남근 숭배 토템, 당산, 당집, 해신당, 부인당.
유배지, 사찰, 마을 숲, 전설의 고향, 잃어버린 역사.
고인돌, 문화유적, 토속음식 맛보기, 섬의 특산물 구매 등.
지금까지 400여 섬을 걸었고
여전히 걷고 있는 강제윤 시인.
국내 유인도 여행 전문가 강제윤.
지난 10년간 400여 섬을 찾아다니며
섬의 문화를 기록해 온.,그의 발자취.
장차, 해양정책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
굳이, 섬으로 떠나지 않더라도
그가 쓴 책들은 읽어볼 만 하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 국토.
대한민국 5천만 국민들이 모두 다
섬에 깊은 관심을 갖어야 할., 싯점.
조선시대 정조는
'정약용' 등과 함께
적극적인 해양정책을
펼치려고 시도하다가 운명.
결국, 조선시대 내내
국제사회에서 폐쇄된 채
해양정책 한번 펴지 못한채
'조선왕조 519년' 역사를 마감.
........................
........................
조선시대는 공도정책 및 해금정책으로 자멸.
신라~고려시대는 동아시아 해상왕국.,"코리아"
우리나라 미래는 해양 정책에 달려있지 않을까?
현재, 남한 지도 상.,무인도 2,689개, 유인도 464개
그리고, 지적 공부에 추가 등록할.,섬이.,약 1400 개
3153 섬 + 1400 섬 + (바다 속에 산처럼 솟은., 암초들)
"바다가 육지라면~" 잠재적인 무한자원 보고.
남한 육지 면적보다 5배 이상 넓은.,三面의 공해.
서해 남해.,평균 수심은 모두 약 100m 정도에 불과.
연육교
해저터널로
섬과 섬을 연결하면
육지와 다름 없는 서해.
미래 어느 시점에는
해상도시 건설도 가능.
현재, 인천 송도신도시가 들어선 곳은.,송도(松島).
인천 송도해수욕장 앞바다에 송림 우거졌던.,무인도.
인천경제자유구역( IFEZ)이자 인천경제 중심이 되었다.
인천.,송도 신도시.
인천앞바다 약 1200 만평을 매립.
홍콩 또는 싱가포르 도시국가와 비슷한 규모.
1971년 인천 송도해수욕장.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은
무인도서 보전 및 관리 법률에 따라
옹진군 영흥면 외리 산 261 무인도 소어평도에
2015년 5월 14일 주택(건축)개발사업계획 승인 발표.
휴식처 제공을 위한
'인천해수청'의 무인도
개발계획 국내 최초 승인.
영흥도와 자월도 사이.,무인도.
소어평도 규모는 2만5천785㎡이며
주택개발사업 승인 면적은 4천482㎡다.
영흥도에서 3.6㎞ 거리
뱃길로 1시간~1시간 반.
인천 해수청은
이번 사업승인이
인천 앞바다 무인도
휴양시설 개발에 있어
기폭제가 될 것으로 기대.
인천해수청 관할에는 현재 95개 무인도가 있으며,
절대보전 10, 준보전 32, 이용가능 45, 개발가능 8 곳.
개발가능한 섬 8 곳은 소어평도,
상공경도, 사승봉도, 부도, 작약도,
장구도, 선미도, 사렴도 등이다.
“우수한 지형,지질, 생태환경
무인도에 대해서는 보전·유지하되
8곳은 해양관광 레저자원으로 활용.
지역경제 활성화 도모." - 인천해수청 -
..............................
..............................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 이작도(伊作島).
'옛 이름은 이적도(伊賊島)였다.'고 전한다.
서해, 남해 여러 섬처럼 고려 말., 왜구의 거점.
"고려 말 왜구들이 이 섬을 점거하고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을 약탈하던 근거지라 하여 이적(夷賊)
또는 이적(二賊)이라 불렀다" - 고려사 '변광수전(邊光秀傳)' -
통상, 왜구란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이
일본 열도 침략에 실패한 이후인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연안부나
일부 내륙 지역을 약탈하고 밀무역을 행하던 무리.
그 전에도 왜구는
존재했다는.,기록.
한반도, 중국 남부와의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대마도, 이키 섬 주민과 규슈 주민들은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 침략후 무역로가 차단되고 뱃길마저 끊기게 되자
복수심과 생계를 위해 해적질을 시작한 것이 왜구의 시초.
이처럼 초기 왜구들은
가난한 규슈의 농민들.
한국에서의 이들의 활동 시기는
고려 말~ 조선 전기에 이르는 사이.
왜구는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현물세를 운반하던 배가 이 섬 근처에서
왜구 습격을 자주 받자 전선 80여척을 동원
수송케 했다.' - 고려 공민왕 13년(1364년) -
조선시대에도 '소규모 해적 집단이
이작도를 은신처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육로보다는
뱃길이 주요 운송 수단이었다.
특히, 세곡미 운송은 뱃길에 의존.
............이작도 가는 길..................
인천연안부두 여객선(인천 ~대이작도)
안산 대부도 방아다리선착장(이작도 행)
.........................................................
대이작도로 향하는 대부도 방아다리선착장.
오전 8시 10분 대이작도로 향해 카페리호 출발.
배의 3층 선상 위에서 바라보는 인천 옹진군 섬들.
장차, '서해안의 지중해'
세계적인 보트(뱃길) 트래킹 명소.
국제적인 해양관광지로 부상할., 해역.
'수도권에서 가까운 뱃길에
이렇게 섬들이 많았던 것일까?'
지도에 없는 섬들이 더 많은듯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암초, 여'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얼마나 될까?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두 섬이 마주 보는.,이작도.
두 섬의 선착장도
약 200m 남짓 떨어져
마주 보는 위치에 있다.
소이작도 휘청골에는
임진왜란 이후에 정착했던
해적들의 집터, 무덤이 있다는 곳.
소이작도 가파른 고갯길 넘어.,휘청골 해변.
큰 무리 해적들이 살기에는.,작고 비좁고 옹색.
더 큰 무리 해적들은 대이작도에 숨어 살았을까?
조선시대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공도정책과 잦은 전란 등으로 인해
도서지방 해양 유민들이 많았던 시기.
임진왜란, 병자호란 국가 혼란기에
전란, 노역, 수탈을 피해 온 해양 유민들.
전란이 끝난 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섬에 정착.
조선시대 우리나라 섬의 역사는
대부분 임진왜란 후, 약 삼사백년.
1592년(선조 25) ~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이라고 하면
보통 정유재란까지 포함.
숲속에는 돌무더기들만 더러 남아 있으며
또 무덤 몇 기가 있지만 관리 상태로 보아
그리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오늘날까지 해적의 무덤이 남아있다고 한들
비석에 해적의 묘라고 새겨지지 않은 바에야
어찌 조선시대 해적의 묘를 찾을 수 있겠는가?
소이작도 끝에 위치한
'벌안해수욕장' 일대가
해적들의 은둔처 아닐까?
웅진군 자월면 이작리.,'벌안마을'
배낚시, 갯바위낚시, 그물체험, 보트,
쭈꾸미 꽃개잡이, 해산물참숯구이, 풀등.
특히, 소라껍데기를 이용한
벌안 '쭈꾸미잡이'.,그물 체험.
다시 찾아오고 싶을 만큼 인상적.
자월도까지 이어진 광활한.,풀등.
바지락, 골뱅이, 어폐류 황금어장.
썰물에는 사막처럼 끝이 없는 모래밭.
전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나라가 자랑할.,해양 관광자원.
........................
.........................
과거 동북아에서 가장 위협적인 해적은
대마도에 근거지를 두었던 왜구라 하지만
왜구가 아니라도 섬에 숨어산 해적은 많았다.
이들 해적을
조선시대에는
'포작'이라 불렀다.
원래 양민들이었으나 관청의 수탈을 피해
섬에 숨어 살며 불법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
가끔 왜구와 결탁해 노략질하기도 했던.,포작.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해상 지리에 밝았던 포작들을
왜군과 전투에 활용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부 포작 만 양민으로 환원.
대부분 해적으로 남았다 전한다.
<성종실록>과 <선조실록>등을 살펴봐도
포작은 해양 방위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1485년 4월 12일 성종 실록에 따르면,
포작은 일정 거처 없이 섬 장막에 살며,
배안에서 주로 생활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포작들은 행동이 재빠르고 사나우며,
그들의 배들은 가볍고 민첩하고 빨라서
폭풍이나 거친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적을 만나도 왜적이 두려워 피할 정도.
포작들은 배에 큰 돌 수십 개를 실고 다니며,
왜적들을 만나면 돌을 던져 왜선을 파괴하였다.'
'이들 바닷가 고을에서 진상하는 해산물은
모두 이들 포작이 채취한 것이라 하고 있다.'
'포작들은 바다 위를 떠돌며 조개나 미역을 채취.
정처없이 이섬 저섬을 떠돌며 어업으로 생계 유지.'
왜구가 출몰하면 포작은 수군에게 바닷길을 안내.
배를 조종하거나, 전투병, 정보원으로도 활약했다.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장계에도 등장하는 포작선.
이순신의 함대는 전선(戰船) 판옥선 & 포작선.
그 숫자를 보면, 판옥선 보다 포작선이 많았다.
전라좌수영 이순신 함대 1차 출전
1592년 5월 4일에서부터 5월 8일까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등.
“포작으로 배를 능히 조종할 수 있는 연해 사람들”
(1593년 3월 22일 이후 메모는 포작의 특징을 언급)
임진왜란은 수군과 포작들과 함께 승리를 이끌어냈다.
당시 제주도는 토질이 척박해 농사가 어려웠다.
각종 수탈에 시달린 16세기에 자연재해도 심했다.
그런 까닭으로 전라도나 경상도로 많이 이주했는데
이날 일기는 제주에서 도망쳐 나온 포작이 그런 경우.
이순신은 이들을 세는 단위로 ‘구(口)’를 썼다.
이는 양인의 숫자를 세는 단위 ‘명(名)’과 다르다.
조선시대 ‘구(口)’라는 단위는 노비를 세는 단위다.
이로 보면 제주도에서 나온 사람들의 신분이
천민 ‘포작(鮑作, 보자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제주를 떠나 섬을 유랑하는 무리.,포작.
구한 말, 포작들은 배에
해녀 여러 명씩 싣고 다니며
우리나라 섬들을 떠돌며.,조업.
울릉도 독도 등은 물론이고
일본 동남아 러시아까지 진출했다.
특히, 독도 오키섬은 안방을 드나들듯.
오키섬은 독도로부터 약 157,5km거리.
오늘날, 독도를 겨냥한 일본의 전진기지.
제주해녀가 원정조업을 하던 독도, 오키섬.
원래, 제주에서 바닷물 속에 들어가는 역할은
남자 ‘포작(浦作)’이 맡았으나 진상용 전복 수탈에
시달리다 대부분 도주하는 바람에 여자 몫이 된 것이다.
오늘날, 해녀는 한국과 일본에만 있다.
일본 해녀 ‘아마’는 5∼9월에 일하지만
제주 해녀는 추운 겨울도 마다하지 않는다.
조선 영조 재위 때 기록에 의하면
부력을 줄이기 위해 알몸 조업도.,강행.
세계에서 가장 생활력이 강한 제주 해녀들.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목적이기 보다는
가족을 굶어죽지 않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한겨울에도 물질해야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제주해녀는 물때를 가려 한 달에 절반쯤 물질.
그외에도 집안일, 밭일, 장사일로 쉴 틈조차 없다.
뉴욕타임스는 제주 해녀를 ‘한국 최초 워킹맘’이라 소개.
제주 해녀는 우리나라 국가중요어업유산 제1호로 선정되었다.
조선시대 내려진.,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
제주 도민들은 뭍으로 나가 살 수 없었기에
제주도는 고유한 언어와 전통문화가 보존된 것.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온 적이 있는 여인은
정조 때 제주도 객주집 여주인인 김만덕이 처음이었다.
제주도 기근 때 전 재산을 털어 수천명 아사자들을 구휼.
제주 도민의 1/3 굶어죽고
돌림병으로 죽어갈 때였는데
나라님도 못한 일을 그녀가 한 것.
하여, 정조때 왕의 부름을 받아
그 공로로 김만덕이 상경을 하자
마치, 외국인이 표류하여 온듯.,관심.
왕의 배려로 한양 궁궐을 구경하고
설악산을 유람했던.,의녀반수 김만덕.
그것이 합법적인 기록으로는 처음이다.
그외 제주 포작인 및 해녀들이
독도, 울릉도, 일본 해외 원정 등
비공식 기록은 모두 불법이었던 셈.
소이작도 선착장 동쪽 몽돌해변 옆에는 데크 산책로.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의 바닷가에 우뚝 선 ‘손가락바위’
바라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관음보살'로 보이기도 한다.
정기여객선을 타고 가다보면
소이작도 콩돌해변 끝에 선바위.
소이작도 큰마을 왼쪽 웃목섬 끝바위.
이 바위는 대이작도 선착장을 출발,
인천이나 대부도로 향할 때 갑판에서
쉽게 감상할 수 있는.,이작도 랜드 마크.
서해 항로를 오가는 배들에게는
이작도 선착장을 알리는.,항로 좌표.
.......................이작도..............................
인천 시청에서 남서쪽으로 약 55㎞ 떨어져 있고
인천 연안부두에서 뱃길로 44km 떨어진.,유인도.
임진왜란 이후 '해적들이 살았다.'고 하여.,이적도.
면적이 큰 섬.,대이작도
서쪽에 작은 섬.,소이작도.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긴 섬.
최고 지점은 동쪽의 188m이며,
맞은편 북서쪽 산지 사이에는
농경지와 취락이 분포한 평지.
곳곳에 만과 갑이 이어져 드나듦이 심하다.
기후는 한서의 차가 크며, 겨울에 눈이 많다.
농작물로는 쌀·보리·콩·고구마·땅콩 등이 생산.
연근해 일대에서는 갈치·조기·민어·새우·꽃게 등.
취락은 남동쪽 해안가와
북쪽 만안 게넴이· 이작 마을.
인천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자연경관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장골해수욕장은 모래가 많고 고와
여름철에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든다.
면적 3.7㎢, 해안선 18㎞,
인구 157, 가구 82(2003).
..................................
소이작도
해군 인천해역 방어사령부
해군기지가 있는.,소이작도.
2015년 10월 인천해역방어사령부는
해군본부 및 2함대사령부의 지원을 받아
도서지역 주민 위로 및 격오지 근무 장병 격려.
옹진군 소이작도를 방문해 위문공연을 실시했다.
주민 100여명을 초청해 이뤄진 이날 공연은
해군홍보단의 사물놀이, 마술쇼, 밴드공연 등.
해군 장병 및 관람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소이작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해 항로 상에서 전략적 요충지.
인천 앞바다 해역를 아우르는 위치.
소이작도는 자월도(紫月島) 곁에 위치.
자월도는 인천 앞바다에서 가까운.,위치.
영종도~자월도~ 이작도~소야도~덕적도.
......................영종도........................
고려시대 개성 예성강 벽란도 포구에서부터
고군산군도·흑산도 등을 경유해 중국의 명주까지
연결되는 항로의 거점으로 객관이 세워졌던 영종도.
조선 숙종 때는 교동수영에 속했고,
영조 때 진을 설치하는 등 군사요충지.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 항로.,영종도.
.....................................................
....................자월도(紫月島).......................
2010년 인구 579명(남 306명, 여 273명)이 거주.
인천 시청에서 서남쪽으로 약 34.8km 떨어져 있다.
주위에 영흥도, 대이작도·승봉도·대초지도·소초지도 등.
조선시대 이곳으로 귀양온 사람이 첫날 보름달을 보며
자신의 억울함을 한탄하니 달이 붉어지고 바람과 폭풍우.
하늘도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듯 달이 붉다고 하여.,자월도.
.............................................................................
소이작도 바로 곁에 위치한.,자월도.
조선시대 자월도는 악명 높았던.,유배지.
'피눈물이 흘러 달이 붉게 보인다.'는.,뜻 지명.
조선시대 자월도 유배인들은
주변 일대에 영향을 끼쳤으리라.
당시 해적 근거지.,소이작도 휘청골.
자월도에 귀양온 유배인들은
국영 말목장에서 노역했던듯..
자월도는 조선시대 남양도호부.,목장 터.
큰말해수욕장과 장골해수욕장 등이 있다.
장골해수욕장은 썰물 때 소이작도와도 연결.
그러나, 밀물이 소리없이 들이닥치면
해안가 사막과 같이 광활한 모래사장이
서서히 물속으로 잠겨., 조난 당하기 십상.
'아!~ 언제부터 내가
바다 가운데 있는걸까? '
원래, 유배지란 원주민들도 살기 어려운 곳.
하물며, 유배인은 제명대로 살기 더욱 힘든 곳.
자월도는 '피눈물이 흘러 달이 붉게 보인다.'는 뜻.
'황진이(黃眞伊)' 삼행시(三行詩).
"黃" 황망한 휘청걸음으로.,자월도 유배길.
"眞" 진한 슬픔 풀어놓을 한잔의 술이 그립다.
"伊" 이제는 술잔 기울일 친구마저 곁을 떠났네.
자월도에서 배 타고 소이작도로 건너간다.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 대이작도 소이작도.
이작도(伊作島) 옛 이름은 이적도(伊賊島)였다.
옛 해적 근거지.,소이작도 휘청골.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전쟁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섬에 숨어서 살며
해적질을 한데서 유래된 지명.,이적도(伊賊島)
옛 해적들의 집터와 무덤이
남아있다는.,'섬 북쪽' 휘청골.
가파른 고갯길 넘어 들어간 휘청골 해변은 작고 옹색.
아무래도 큰 무리의 해적이 숨어 살기는 좁아 보인다.
해적들의 집터였을까? 숲속에는 돌무더기들만 남았다.
숲에는 무덤 몇 기가 있지만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 해적의 무덤은 아닐 것이다.
숲 속을 뒤져봐도 해적의 무덤은 찾을 길이 없다.
오랜 세월 돌보지 않았다면, 비바람에 사라졌을듯.
'세곡선을 노린 해적들이 신출귀몰 들락거린 섬일까?'
▲ 소이작도 휘청골 해변.
서남해의 여러 섬처럼 이 섬 또한
해적 섬이 되기 전에는 왜구의 거점
< 고려사 > 에는 고려 공민왕 13년(1364년)에
현물세를 운반하던 배가 자주 왜구의 습격을 받자
무장과 전선 80척을 동원해 수송했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 동북아에서 가장 위협적인 해적은 대마도에 근거지를 둔 왜구.
왜구가 아니라도 조선시대에는 해도에 숨어 살던 소규모 해적집단들.
평상시 양민도 기근이 들면 굶어죽지 않으려고 해적으로 돌변했으리라.
조선시대 서해, 남해 도서지역
농산물 자급자족율은 약 50% 전후.
대기근이 들면 굶어죽는 주민들이 절반.
대기근 여파로
돌림병까지
돌기 때문.
이들 해적을 포작이라 했는데 이들은 원래 양민들이었으나
관청의 수탈을 피해 섬에 숨어 살며 불법 어업으로 생계 유지
가끔씩 왜구들과 결탁해 노략질을 했던.,관청 수탈이 키운 도적.
과도한 세금
과도한 부역.
관청의 수탈을 피해
외딴 섬으로 숨어들어
살 수 밖에 없었던 유민들.
관청의 제도권 밖으로 벗어났으니
외딴 섬에서 '삶' 자체가 불법이었고
기근 때는 오직 살기 위해 약탈도 자행.
충무공은 해상 지리에 밝은 포작들을 임진왜란 전투에 활용.
임진왜란 이후 일부 포작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양민으로 환원.
이작도 해적들은 전란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을 것.
그들은 언제까지 해적질을 했을까?
그들은 해적으로 생을 마감했던 걸까?
해양왕국의 역사는 곧, 해적의 역사이다.
해적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 만큼이나 길다.
해양사에서 해적과 비해적의 구분은 무의미.
강한 군사력으로 침략하고 노략질하고 땅을 빼앗고
양민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해적질과 무엇이 다를까?
역사가들은 이를 정복이라 미화하지만
해양왕국의 역사는 바로 해적의 역사다.
동아시아 해상왕국 "코리아"의 옛 명성은
왕건이 무역로 뱃길을 열고 세운 고려의 역사.
즉, 동아시아 해적들을 소탕하고 지배한 고려 역사.
먼저 세력을 키워 나라를 세운 해적 두목은 왕이 되고
뒤에 나타난 세력은 해적으로 이름이 남겨졌을 뿐이다.
중세 유럽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해적은 바이킹들이었다.
이들은 잉글랜드 섬과 러시아를 침략
노르만 왕조와 키에프 공화국을 세웠다.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의 악명 높은 해적이자
노예 상인 호킨스나 드레이크 등은 국가에서 공인을 받은 해적.
해군제독이 된 해적두목 드레이크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영 제국의 세계 지배에 일등 공신.
삼국시대 이후 고려, 조선시대까지
한반도에 가장 큰 위협은 해적 왜구.
일본 왜구는 단순한 도적이 아니었다.
지방 호족 사무라이들이 통솔한.,수군.
왜구들은 중국 해안을 비롯
한반도 연안의 각 고을을 노략질.
강간과 납치, 방화와 살인을 일삼고
조정의 세곡선을 약탈해 가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포도청 종사관과 포졸을 사칭한
해적은 중국이나 일본 해적들에 비해 미미한 편.
'관리가 되려면 먼저 도적 수령이 되라' 중국 격언
소이작도에서 대이작도는 코 앞이다.
뱃길 5분거리지만 배는 하루 세 차례.
대이작도로 건너가는 막배를 기다리며 걷는.,콩돌 해변
해의 끝에 주먹쥐고 검지를 하늘로 치켜든., 손가락 바위.
동자승을 품에 안고 서있는 '문수보살' 형상으로도 보인다.
무슨 까닭으로
손가락 하나 들고
그곳에 있는 것일까?
................손가락 바위., 전설..............
구지선사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이었다.
선사는 불법에 대해 물으면 손가락 하나만을
세워 보일 뿐 일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한다.
선사를 시봉하는 동자승은 그 모습을 늘 옆에서 지켜봤다.
하루는 구지선사가 출타 중인데 어떤 스님이 법을 물으러 왔다.
객승은 동자승에게 물었다. "선사께서는 법이 무엇이라 생각 하는가?"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객승은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고 한다.
구지선사가 돌아오자 동자승은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러자, 구지 선사가 물었다 한다.
"그 스님에게 했듯이
나에게도 대답해 보거라.
불법이 무엇이냐?" - 구지선사 -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구지선사는 동자승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
동자승은 비명을 지르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구지선사가
동자승을 불러.,
다시 물었다고 한다.
"그래 불법이 무엇이냐?"
동자승은 순간적으로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아차, 그런데 손가락은 이미 잘리고 없지 않은가?
그 순간 동자승은 퍼뜩 깨쳤다고 하는.,벽암록 기록.
.......벽암록에 나오는 이야기.......
동자승은 대체 무엇을 깨우쳤을까?
'무아(無我)'를 깨우쳤다는 것일까?
나를 내려놓을 때, 나의 주장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깨달음.
.............................................................
벽암록(碧巖錄)은 송(宋)나라 때의 불교서적.
손가락바위 전설은 송나라와 무역이 융성했던 고려때
소이작도 앞바다로 무역선들의 왕래가 잦았음을 대변한다.
즉, 손가락바위 앞바다는
'고려 ~ 송나라' 무역 항로.
인천 정기여객선 막배는
이곳 소이작도에 닿지 않고
대이작도로 곧장 가기도 한다.
손님이 없는 비수기에는 흔한 일.
주민들이야 자기 배로 건널 수 있지만
나그네는 200m 거리 바다에 갇히기 쉽다.
뱃길이 끊기면
하룻밤을 더 묶고
배를 기다려야 한다.
지척 눈앞에서 갈 길을 가로막는 바다.
건너 뛰고 싶지만, 건너 뛸 수 없는., 몸.
그러나, 머리 속은 온갖 잡념이 오락가락.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리는걸까?'
우편 배달부는 우편선을 타고
소이작도와 대이작도를 왕래한다.
그 배를 얻어 타고 건너온.,대이작도.
대이작도.
대이작도에는 큰풀안, 작은풀안, 계남, 풀등 등
크고 작은 해변들이 있어 해수욕을 즐기기 좋다.
작은풀안에서 큰풀안으로 이어지는 해변산책로는
목재 데크로 조성되어 있기에 누구나 걷기에 편하다.
또 길다랗게 이어진 부아산과 송이산은
섬 속에서 트레킹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선착장에서부터 반대끝 계남마을까지 총 4km.
대이작도 선착장에는 '영화의 섬'이라는 빛바랜 글귀.
'섬마을 선생님'을 영상화 한 1967년 김기덕 감독 작품.
선착장 지나 큰말 부근에서 대이작도 부아산(해발 159m)
대이작도 선착장에 도착하게 되면
보통 부아산 구름다리부터 올라간다.
구름다리 ~ 삼신할미약수터~ 장승공원.
대이작도에서 명물은
부아산 산정.,구름다리.
'이른 새벽에 부아산 신선들이
천상으로 오른다.'는.,구름다리.
구름다리를 건너 송이산 방향으로
이동하면, 삼신할미약수터가 나온다.
삼신할미가 아이를 점지해준다는 전설.
옛날부터 명성이 높았다는.,삼신할미 약수.
고려시대에는 병을 치료해준다는 약수로 유명.
정한수로 사용하면, 아들을 점지 또는 소원성취.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이 좋아
항로 상에서.,식수 보충 약수터.
산 정상 전망대에 오르면
주변 섬들이 발 아래 펼쳐진듯.
서면 인천 시내, 승봉도, 소이작도,
사승봉도, 덕적도, 소야도, 굴업도 등.
이작도가 해적섬이 된 연유를
이제야 비로소 조금 알 것 같다.
가수 이미자
가요 '섬마을 선생님~'
가사로 잘 알려진.,대이작도.
"해당화 피고 지는 섬 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70m 구름다리가 있는
정상은 충남 서해 전망대
동쪽은 옹진군의 승봉도,
서북쪽은 자월도, 소야도, 덕적도,
서쪽은 문갑도, 굴업도, 각흘도,
남서쪽은 선갑도, 백아도, 울도.
동남쪽으로는 풍도, 육도, 대란지도
장승공원을 지나면
대이작도에서 최고봉
송이산(188m) 정상까지
팔각정과 전망대 등 시설물.
섬 주변의 바다를 볼 수 있다.
그래서, "하늘공원"으로도
부를 만큼 전망좋은 등산로.
송이산은 25억년전
화산 열기에 의해 형성된
국내에서는 '최고령 암석층'.
'작은풀안해수욕장' 데크 산책로 옆에는
25억 년 전 땅속 깊은 곳에서 암석 일부가
뜨거운 열에 의해 녹을 때 만들어진.,혼성암.
땅속 깊은 곳에서 암석 일부가
뜨거운 열에 의해 녹을때 생성되는
암석층은 '지각변동 진화사' 연구자료.
이작도는 풍화작용에 약한 고생대 암석층
덕적군도와 더불어 지질이 가라앉고 있는 곳.
한강이 오랜 세월 간 토해낸 모래를 쌓아두는 곳.
인천 앞바다에는 왜 풀등이 많을까?
조수 간만의 차이가 10m를 넘어서일까?
인천 앞바다로 나온 모래는 하루 두 번씩
거칠게 밀고 써는 조류를 따라 바닥을 배회.
인천 앞바다 크고 작은 섬 근처에 쌓였으리라.
썰물로 하루에 두번 해수면이 낮아질 때
부끄러운 속살을 드러내는 인천 앞바다 풀등.
풀등은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는 모래섬이 아니다.
해류에 따라서 움직이는 모래섬.,풀등
바다 위로 나왔다가도 사라지는.,신기루.
거대한 해류에 쓸리거나 태풍에 밀려 조금씩 이동.
베태랑 선장이라고 해도 여간 신경 쓰이는게 아닐듯..
썰물 때 풀등에 얹히면 밀물 때까지 꼼짝달싹 못하는 탓.
그래도 풀등은 '여(汝)'보다 안전.
바다 속에 바위를 감추고 있는.,여.
조심성 없는 배는 여지없이 부서진다.
해안의 갯벌이 넓은 인천 앞바다
풀등도 많지만, 곳곳에 여도 많다.
여를 감싸는 풀등도 더러 볼 수 있다.
'풀등'은 바다의 천연 정화장치.
아울러, 바다 생물의 '인큐베이터'.
한강이 토해내는 육지의 영양 염류는
모래 틈 치자어의 훌륭한 먹이가 되니
어패류들이 산란을 하기 최적지인.,풀등.
개흙이 많은 인천 앞바다지만 풀등 주변은 맑다.
갯벌 검은 입자가 모래 틈으로 배어들어가는 까닭.
해양수산부가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한 것은 당연.
서해는 태평양 어류의 산란장.
풀등 어패류 산란장이 사라지면
그만큼 태평양 어류 산란장이 줄고
서해 어민의 어획량이 감소되게 된다.
모래가 사라지면서 김양식이 사양화
옹진군의 어획고는 형편없이 낮아졌다.
모래에 산란하는 새우가 드물어지게 되고
어폐류 산란장인 풀등의 조개들이 집단폐사.
어민들의 수입이 타격을 받게되면
주변 섬의 경제적인 상황도 시들해지고
섬처녀 총각들은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다.
섬에 대한 미래와 희망이 없어지면
고향에 대한 미련도 없어지게 마련.
모래채취로 돈을 버는 군청을 그렇다 치고,
바다 어장을 잃고 관광객마저 잃은 주민들은
세금 낼 돈도 없어지고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다.
최근 3년간 웅진군이 해변 백사장에 쏟아부은 40억원,
20년간 공유수면 점용 사용료로 걷어들인 돈은 1400억.
웅진군은 산술적으로 큰돈을 벌고 주민은 손해를 입은 격.
웅진군의 ‘밑 빠진 백사장에 모래 붓기.’
명목 상으로는.,'관광객 유치사업'의 일환.
주민들은 떠나가는데 언제까지 계속할건가?
'누드 비치' 개발로 섬주민 소득증대.,案.
골프장 개발사업 등 섬주민 소득증대.,案
섬주민을 위한 핵폐기물 유치 등.,탁상공론.
서해안은 동해안보다 2~3도 추워
해수욕장의 성수기 기간이 짧은 편.
바람이 심해 골프장이 부적합한 환경.
태평양 어류 산란장인 서해에
웅진군 핵폐기물 유치장 탁상공론.
주민소득 및 관광객 유치에 도움될까?
옛부터 국가기관이나 민간기업이나
인재 하나가 백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하지만
어설픈 리더를 만나면, 그 아래는 손발 만 바쁜 법.
예산 만, 축을 내고
성과 없는 경우.,허다.
서해 자연환경이 더 이상 훼손되기 전에
정부가 앞장서서 서해 도서 주민들을 위해
바람직한 해양정책을 찾아내야 할 때 아닐까?
인천 옹진군 자월면 이작리.,이작도.
요즘 섬마을 초등학교 분교들이 사라지고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대이작도의 계남분교도 폐교.
순정을 다 바쳐 총각선생님을 사랑 할 섬처녀는 없다.
'이섬 처녀들이 도시로 떠나서일까?'
아니면, 결혼 연령이 늦어져서일까?
어린아이들이 뛰어 놀지 않는.,운동장.
'폐교되어 인적이 끊겨 텅빈.,계남분교.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
대이작도.,계남분교 전경.
1967년 김기덕 감독이 연출한 영화
'섬마을 선생'의 주요 촬영지인 계남분교는
문을 닫은 뒤 빈터에 폐교 건물만 남은 상태다.
"총각 선생님.~~"
<섬마을 선생> 영화도
이미 옛 이야기가 되었다.
그 대신에 백 패킹, 캠핑카
연인 또는 가족단위 여행객이
피서철에 주로 찾는 정도.,외딴 섬.
젊은 사람들이 이미
떠나가 버린.,섬마을.
대이작도 보물은 섬 안에 없다.
큰 풀안 해변 건너 바다 속에 있다.
밀물 때 숨었다 썰물 때 보이는 모래섬.
'바지락, 골뱅이' 서식처.,풀등.
'명주조개' 등도 지천인.,보물섬.
사승봉도에서 자월도 서남단까지 펼쳐진 모래밭., 풀등
고기잡이 없는 여름철에 피서객을 태운 어선들이 운항
봄가을 겨울에는 풀등으로 가는 배를 타기가 쉽지 않다.
낚시배 10분 남짓 거리 바다 위., 모래섬
'조금'에 장대한 모래섬의 일부만 보이지만
'사리' 때면 동서 2.5km, 남북 1km의 모래 평원.
마치, '바다의 신기루' 같은.,모래섬.
예전에는 썰물 때면 풀등 웅덩이에 갇힌 꽃게, 새우, 광어 등
주어 담을 수 있었다지만 서해에 물고기들이 넘치던 때 이야기.
겨울에는 풀등을 떠나 있던 거주자들 대부분은 돌아오지 않는다.
수온이 높아지는 5,6 월이면 다시 몰려온다.
그 때는 깊은 바다 속에서 추위를 피하던 골뱅이도
풀등으로 올라오고 방게도 무리지어 다니기 때문이다.
부아산성에서 썰물 때에만 드러나 보이는., 모래섬 풀등.
1980년대부터 20년간 인천 앞바다에서 사라진 모래는 2억㎢
원래, 50만평 풀등이 모래채취 후 지금은 30여 만 평만 남았다.
큰풀안해수욕장 500m 앞바다에 떠있는.,'풀등.'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섬'이라 부르는.,모래섬.
12시간 주기로 나타나는 물도 바다도 아닌 모래톱.
동서 2.5km, 남북 1km 크기. ,'풀등.'
연인들이 이곳에서 반지를 교환하며,
언약을 맺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곳.
1990년대 중반까지도 덕적도 서포리 해수욕장에서
굴업도로 가는 작은 배에서 보던 풍경은 파라다이스
망망한 바다 가운데에서 난데없이 일어나는.,하얀 포말.
썰물에 장엄하게 드러나는 드넓은 모래섬.,풀등.
바다 밑에서 모래섬이 서서히 솟아오르는듯 보였다.
대자연이 연출하는 신비로움 앞에서 말문이 막힐 정도.
“오늘은 풀등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지요.
백중사리 때는.,길이 5마일, 폭 1마일." - 선장 -
그러나, 난생 처음으로
입소문으로만 듣던 풀등을
눈앞에서 드디어 처음 만난 감회.
떠오르는 모래섬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는 배.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드넓게 펼쳐지는 풀등.
냉큼 뛰어내려 한없이 걷고 한없이 뒹굴고 싶은 마음.
진도나 무창포에서 바다가 갈라지는 현상과 또 달리,
바다 한가운데에서 떠오르며 뭍이 되는 풀등을 만나면
피안의 세계나 파라다이스가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은 천국.
포말이 부서지며 펼쳐지다
포말과 함께 사라지는 풀등은
신기루가 아닌 환상적인 무릉도원.
물이 썰 때 잠시 나타났다가
물이 밀 때 자취를 감추는 풀등.
풀등에 들어서면 세파에 찌든 때와
숱한 오해와 편견 따위를 모두 잊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곳인 것 같다.
풀등에 남아 차오르는 바다에 몸을 맡기면
세상만사 시름을 다 녹여낼 수 있지 않을까?
가슴까지 밀려오는 바닷물을 끌어안는 짜릿함.
'풀등'이란, 강 한가운데에 상류에서부터
흘러 내려 온 모래가 쌓여 형성되는 모래섬.
그 크기는 물의 유속 또는 흐름에 따라 다르다.
대이작도 '풀등'은 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 가운데 위치해 있어 보존가치가 높다.
자손만대 후손에게 물려 줄.,유산이 아닐까?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군 앞바다
홍콩 선적 유조선 '허베이 스피릿 호'와
삼성물산 '삼성 1호' 충돌로 인한 원유 유출.'
'12,547킬로리터(78,918 배럴).
원유가 태안반도 해역으로 유출.
서해를 검게 물들였던 최악의 사건.'
'자원봉사에 나선 온 국민이
기름 묻은 자갈 하나 하나까지
닦아내어 살려낸 태안반도 해역.'
아직까지는 넓고 아름다운 대이작도.
승봉도, 덕적도 섬 해변 등 모래 채취가
환경을 볼품 없을 만큼, 훼손하지는 않았다.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신비로운.,천혜의 풀등.
......................
풀등 外 볼거리
......................
큰 풀안 해수욕장
작은 풀안.,해수욕장
......................................
큰풀안 해수욕장 & 야영장.
.......................................
장애인도 다닐 수 있는.,해안 데크.
대이작도.,비박, 야영장.
대이작도 계남해수욕장 캠핑장.
궁합 바위,
영천 바위,
5 형제 바위,
코뿔소 바위 등.
'보물찾기' 놀이를 하듯
찾다 보면 알 수 있다는데.,
'궁합바위'는.,어디에 있는걸까?
'영천바위'는.,하늘나라 가는 길(?)
'5형제 바위'는.,신선들의 5개 공기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