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거란 전쟁... 귀주대첩 龜州大捷
" 기습과 매복으로 거란의 허를 찌르다. "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이듬해 현종이 나주로 파천했다.
1015년 흥화진, 영주성에 침입한 거란군을 격퇴하다.
1018년 소배압을 비롯한 10만 거란군이 세 번째로 고려를 침공하다.
거란은 2차 전쟁 당시 고려에서 철수해 회군하는 조건으로 고려 국왕의 거란 입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제시했다.
하지만 고려가 2차 전쟁 이후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거부하자 강동 6주를 무력으로
차지하겠다며
박진 충주호장
1014년부터 통주와 흥화진 등을 여러 차례 공격했다가 매번 고려군에 패퇴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015년 4월에는 거란의 장군 야율행평(耶律行平)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 강동 6주를
반환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고려는 그를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거란은 9월에 감문장군 이송무(李松茂)를 다시 사신으로 보냈으나,
고려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거란은 또다시 대대적인 전쟁을 일으켜 고려를 압박하게 된다.
하지만 거란은 3차 전쟁 초반부터 고전했다.
거란군이 동경 요양부에서 출정 준비를 할 즈음, 고려에서는 서북면 행영도통사
(行營都統使)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관격인 부원수로 임명하고, 20만 8,000명의 군사를 청천강
남쪽의 영주(寧州, 평남 안주) 일대에 배치하였다.
1018년 12월, 압록강을 넘은 거란군은 흥화진의 삼교천(三橋川)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과 첫 전투를 벌였다.
삼교천은 흥화진성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이었다.
당시 강감찬은 기병 1만 2,000명을 미리 주변 산골짜기 안에 매복시켜 놓고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삼교천 물을 막고 기다리다가 적이 삼교천을 건널 때,
막아 두었던 물을 터놓고 매복해 있던 군사들을 일으켜 거란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첫 전투에서부터 기세가 꺾인 거란군은 아예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직행하기 위해
계속 남하했다.
그러자 강감찬은 강민첨을 보내 거란군을 추격하도록 했고, 강민첨은 자주(慈州,
평남 순천) 내구산(來口山)까지 뒤쫓아 가서 적을 패퇴시켰다.
또 시랑(侍郞) 조원(趙元)이 군사를 이끌고 대동강 가의 마탄(馬灘)에서 거란군
1만여 명을 죽였다.
그럼에도 거란군이 개경을 향해 남쪽으로 달리자
강감찬은 병마판관 김종현을 비롯해 1만 명의 군사를 개경으로 보내는 등 개경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다. 동북면에서도 지원군 3,300명이 개경에 도착했다.
이러던 중 거란군은 마침내 개경에서 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신은현(新恩縣, 황해 신계)
에 이르렀다.
그러자 고려 현종(顯宗)은 개경성 바깥의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옮기도록 하고,
거란군이 개경 주변에서 식량과 군수품 등을 조달하지 못하도록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모두 철거했다.
이처럼 고려가 개경 방어에 힘을 쏟고 있을 때 소배압은 신은현에서 더 진격을 멈추었다.
그리고 야율호덕(耶律好德)을 사신으로 보내 개경 외성(外城)의 통덕문(通德門)에서
거란군이 회군할 것이라고 거짓으로 알리고는,
한편으로 척후기병 3,000명을 개경 쪽으로 몰래 보내 동정을 살피도록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고려군 100명이 금교역(金郊驛, 황해 금천) 일대에서
개경으로 향하는 거란의 척후병들을 야간에 습격해 모두 죽였다.
압록강을 건넌 뒤 고려군에게 잇따라 패배하며 탈진한 거란군은
마침내 개경 진격을 포기하고,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려야 했다.
이에 강감찬은 곳곳에 고려군을 매복해 퇴각하는 거란군을 기습하도록 했다.
연주(漣州, 평남 개천)와 위주(渭州, 평북 영변)에서는 거란군 500여 명이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전사했다.
그리고 거란군은 압록강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귀주에서 강감찬의 고려군에게 마지막
일격을 당한 것이다.
바로 귀주대첩(龜州大捷)이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판을 덮고, 사로잡은 군사와 말, 낙타, 갑옷, 투구, 병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었다.
거란군 10만 명 가운데 살아 돌아간 자는 지휘관인 소배압(蕭排押)을 포함해
겨우 수천 명뿐이었다.
거란의 성종이 대노하여 소배압에게 사자를 보내
상원수 강감찬 : 젼군을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 - 대해전을 준비하시오!
“적을 깔보고 깊이 들어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볼 것이냐.”
하며 질책하고,
거란에 도착하자마자 소배압을 파면해 관직에서 쫓아낼 정도였다.
고려는 993년 이래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에서 모두 이겼지만,
이 가운데 가장 큰 승리를 거둔 것이 3차 전쟁 때였다.
거란은 1차 전쟁 당시 고려에 내준 강동 6주를 돌려받기 위해
집요하게 고려를 침공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압록강 연안을 장악해 고려와 만주 지역을 평정하고 뒤이어 송나라를 치려던
계획도 무산됐다.
거란 황제 야율융서
반면 고려는 거란을 물리치고 압록강 연안의 고토(古土)를 수복함으로써
거란 도통 소배압
건국 100년 만에 민족적 자긍심과 국가로서의 자신감을 드높일 수 있게 됐다.
또 고려의 승리를 계기로 고려와 송, 요(遼, 거란) 삼국이 동아시아의 강자로
세력 균형을 이루게 됐다.
3차 전쟁이 끝난 뒤 고려는 추가 전쟁에 따른 희생을 막기 위해 거란에 대한
사대 관계를 회복했다.
고려는 전쟁 직후 사대의 예를 갖추지 않다가, 거란이 다시 고려를 침공하려 하자
사신을 보내 무마했다.
이로써 양국은 화해 국면으로 들어섰고,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는다.
양국 간의 문물 교류도 활발해졌다.
송나라도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해 나갔고,
이 과정에서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경제적,
문화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뒤 거란인의 투항이 급증했으며,
전쟁 포로를 포함해 거란인 수만 명이 고려에 정착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수공업이나 농업에 종사하거나 노래와 춤, 광대 등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본국과 멀리 분리시킨다는 고려의 정책에 따라 주로 남쪽 지역으로
이주해 집단으로 마을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고려는 북쪽 국경과 수도에 대한 방어 태세를 꾸준히 강화해 나갔다.
우선 1029년에는 거란과의 2차 전쟁에서 함락된 수도 개경의 외곽에 나성(羅城)을
축조했다.
또 거란과 여진 등 북방 민족의 압록강 연안에 대한 침입을 막기 위해
덕종(德宗, 재위 1031~1034) 2년에
동해 도련포(都連浦, 함경남도 함주 부근)에서 압록강을 잇는 북방 지역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짓기 시작해 정종(靖宗, 재위 1034~1046) 때인 1044년에 완공하였다.
애국충절 " 강감찬 " 상원수의 탁월한 대회전 작전 귀주 대첩과
화살을 고슴도치 처럼 온몸에 맞고 함께 산화한 " 양규와 김숙흥 " 을 기리며...
이름 없이 산화한 백성들 아픔을 함께하며...
고려 거란 전쟁... 재탕 또 보고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