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 중요한 이유
갈라디아 5:7~12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저의 큰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아빠 씌우개가 영어로 뭐예요?”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으~응 Cover?”라고 하였더니 이 아이가 고개를 저으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마요네즈 김다혜가 무엇인지 알아요?”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더니 저를 무시하는 미소를 지으면서 “아빠는 대학원까지 나왔으면서 내가 아는 영어도 모르냐?”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See you again”을 씌우개로 “My name is Kimdahye”를 마요네즈로 알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일까요? 소통에 대한 것입니다. 나는 A를 말하는데 상대는 B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잘못된 오류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참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류를 범하기 쉬운 예가 이런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나는 진리로 받아들이며 그것에 매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갈5: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진리를 잘 받아들이고 순종하여 신앙의 달음질을 잘하였습니다. 진리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믿음의 길을 가며 열매 맺는 신앙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신앙은 하나님과 제대로 소통을 할 때 가능합니다. 그것이 진리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들어오면서 비뚤어진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갈5: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을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성을 갖춘 것이라도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순종하고 따르게 되면 믿음이 성장할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즉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의로 다시 살아남에 대한 것을 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고 행하신 놀라운 일에 대하여 은혜로 받아들이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지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의 행보를 잘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이 단순한 진리를 따르지 않고 벗어난 그것은 진리가 너무 단순하고 합리적이 아니라는 것에 있습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율법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들의 고정관념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고 따름으로 거룩함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벌거벗겨 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할 때 구원을 얻으며 거룩함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율법이 말하는 할례도 받고 안식일도 엄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교훈이 설득력이 있어 온 교회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갈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누룩’은 ‘거짓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룩에 비유한 이유는 적은 죄악을 용납하면 큰 죄악으로 확대하는 뜻과 누룩이 소리 없이 은근히 떡 반죽에 퍼짐과 같이, 적은 죄악도 사람의 생활을 지배하기까지 은근히 그의 마음을 점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마귀의 술책은 별 것 아닌 것같이 작은 것으로 사람의 영혼을 틈타고 들어와서 죄를 퍼뜨리고 타락하게 만듭니다.
이런 주장이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율법도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주며 사람의 모습이 어떠함을 일깨워 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뤄 선물로 주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나 스스로 하나님처럼 거룩하며 온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준비하신 복음인 예수님의 죽음과 사심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내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하시고 이를 통하여 거룩함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율법을 지키는 수고를 하더라도 성령이 임할 수 없습니다. 율법 시대에도 성령님은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었습니다. 영어로 ‘upon’과 ‘dwelling’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율법 시대에는 성령이 특별히 구별된 사람의 위에 머무셨습니다. 마치도 삼손에게 임하였던 성령이 그와 함께 머물렀을 때는 힘을 쓸 수 있었지만, 성령이 떠나서는 힘을 쓸 수 없었던 것처럼 율법 시대의 성령은 일시적으로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십니다. 즉, 잠시 머물다 떠나는 ‘upon’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dwelling’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예수님은 이 땅에 성령으로 태어나셨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 각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목사님들이 예배를 마치고 축도할 때 쓰이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교통의 영’이십니다.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영이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영원히 함께하셔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이 내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소통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 바른 소통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데 이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람과 사림 사이에서 소통이 되지 않으면 그 관계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소통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소통을 이루기 위하여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 삶의 목표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께 대한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내 삶의 목표를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신앙생활을 달음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는 바울 사도가 살았던 시대에 있었던 고린도 지역의 매 2년 열리는 경기를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
당시에는 운동 경기에서 승리하면 상금을 주지 않고 명예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수여했는데, 모든 경주자는 이러한 명예를 획득하기 위해 경기에 참여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세상의 사람들은 잠시 있으면 사라질 것이라도 이것을 얻기 위하여 달음질을 힘써 하였다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상을 얻기 위하여 목표를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달음질에서 등수를 매겨서 상을 줍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이것과 다릅니다. 내 길이 있습니다. 나만이 갖는 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성령과 더불어 완주(完走)할 때 하나님은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믿음의 사람들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주어지는 것이 있고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상이 있습니다.
내 인생의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상급인 자유가 주어집니다. 여기서 자유란 죄에서, 저주에서, 죽음에서 풀려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주어진 상은 누림의 분량이 따로따로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성령으로 거듭나 천국의 능력을 누리며 산 사람은 그 분량이 다릅니다. 그래서 똑같은 천국에 존재하더라도 누림의 분량이 다릅니다. 다만 경쟁하지 않기에 모두가 만족할 수는 있습니다.
내 인생에 주어진 이 달음질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여기서 실패한다면 영원한 실패가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성공자는 천국에 이릅니다만 실패자는 지옥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생의 달음질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합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 대한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자처하더라도 진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가치가 사라지게 됩니다. 진리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는 진리, 냉랭한 진리는 가짜입니다.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랑을 인식하고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갈 5: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다른 마음’이란 바울이 이때까지 가르친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즉,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는 의미의 교리가 아닌 다른 사상을 의미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들에게 엄하게 훈계하였지만, 그들에게 처음 전한 복음이 담겨 있음을 알고 소망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막에 번제단을 세우고 제물을 드렸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불살랐습니다. 이 불을 끄지 않는 것이 성막을 관리하는 제자사장의 사명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할 때 내 안에 성령의 불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인정하게 하십니다. 내 신앙이 어두워지고 식었다면 주님께 나와 회개하십시오! 다시 내 안에 성령의 불이 일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첫사랑을 불러일으킬 때 우리는 하나님과 바람직한 관계를 이루는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갈 5: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이 말씀을 쉬운말 성경에서는 “할례를 주장하면서 여러분을 선동하여 혼란에 빠뜨리는 사람들은 차라리 할례의 대상인 자기들의 그 물건을 잘라버리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베어버림’이란 말은 몇 가지 해석을 하고 있는데 ‘스스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하고 또 하나는 ‘이방의 풍속대로 아주 생식기를 잘라버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유대인에게 공격적, 풍자적으로 아예 할례가 아니라 거세해 버리라는 뜻으로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유대인에게 아주 중요한 의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복음을 어지럽게 하는 걸림돌입니다. 할례는 하나의 상징이지 그 자체가 구원은 아닙니다. 할례의 근거는 창세기 12:10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합니다. 성경은 당일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다고 전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나이가 99세였고, 이스마엘은 13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들어 할례를 받느라 고생했을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말하면 할례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언약이며, 하나님의 온전함을 본받아 세상에서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하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율법적으로는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라면, 십자가는 할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만으로 충분히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되시며 구원을 온전하게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어 소통의 현장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께 나갈 수 없고 하나님 역시 죄인에게 손을 내밀 수 없습니다. 그런 장벽을 십자가에서 허물었고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언제든 하나님과 성령으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할 때 하나님의 누리는 안식의 기쁨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고 비록 육신으로 살지만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