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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2년간 오랜 병을 앓으면서 자기 장례식을 일체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유언했지만...
40년이 넘는 세월을 힘든 간판 노동으로 땀 흘리고 힘들게 살면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도 없는 7형제 중의 장남이었기에, 어깨에 진 책임이 무거웠고 묵묵히 그 일을 해내었다. 자기 모와 형제들을 위해서 52년동안 긴 세월을, 그가 40세일 때부터 내가 낳은 자기 자식은 뒷전으로 제쳐두고, 그 전부터 해왔던 자기 가족 희생양(아버지도 다른 동생들)으로 살았던 그의 삶을 서러워하면서 긴 세월 아픈 가슴으로 지켜보았다. 우리 세 식구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평생을 최저식비만 겨우 주어서, 내가 필요한 돈을 달라고 하면 "나는 니한테 줄 돈이 없다"고 냉정하게 잘라 말했었다. 해서 포기하고 42년 세월을, 내 병원비와 약값, 용돈은 친정 동생 도움을 받으면서 정도 없었고 부부가 아닌 남남처럼 살았다.
80대까지 힘든 간판 일을 하면서 마치 삼손처럼 몹시도 건강했던 사람인데... 1년 전부터 아파트 관리소에 젊은 소장이 오고난 뒤부터 나쁜 사람들 음모(곳곳을 고의적으로 터뜨려서 수리업체에 소개해주고는 돈을 받아먹는 수법)로, 수돗물 속에다 여러가지 건축재료, 페인트 등을 넣은 온갖 독수를 배수관을 통해서 개인집으로 넣는 무서운 보복을 당했다. 옥상의 물탱크를 직수로 바꾸는 공사를 하면서, 직수의 강압으로 우리집 보일러를 터뜨리고는 근 일년이 되도록 변상해주지 않아서 남편과 관리소가 그일로 크게 싸웠기 때문이다. 우리집 외에도 많은 집들이 강압으로 보일러가 터졌다. 참다참다 못해 그 사건을 경찰과 검찰에 신고 했었지만, 여러 증거들이 뚜렷이 나타나 있음에도, 가해자가 큰돈을 쓰고 빠져나가니까 아무 소용없었다. 아파트 사람들은 강압으로 곳곳이 누수되고 광장 바닥도 여기저기 터지는 것을 눈앞에서 번히 보면서도, 집값이 떨어질까봐 쉬쉬하면서 모른체하고, 관리소장 편이 되어서 우리 부부를 왕따시키고 외면하면서 입을 굳게 닫았다. 오히려 관리소장 비위를 맞추었다.
그런 물을 만나면서 나도 병이 들었고 신체 곳곳에서 몸이 마비되고 굳어지는 증상이 나타나서,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해보니 석회질이 나왔다. 수도국의 수질검사에서도 가지가지 건축재료 성분들이 <식수 부적합>으로 나타났다. 그런 물을 접한 우리 둘 다 같은 증상으로 체중이 13Kg이나 급격하게 줄어들고, 장기들을 해치는 온갖 병들이 동시에 나타났다. 피부가 쪼글쪼글해지고 어지러워서 비틀거렸다. 물 속에 든 갖가지 중금속들 건축재료 성분 때문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이상한 물을 피해서 나는 자주 시골 친정으로 도피하기도 했는데, 집에 혼자 있던 남자는 나날이 크게 병들어갔다. 내가 지난날 신문기자 출신이었고, 너무나도 놀라고 답답해서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관리소장과 수리기사가 출근하기 전 새벽마다 통로를 다니면서 집집마다 현관 옆 복도의 사각스텐 박스 속에 있는 배수관을 조사해보니, 200세대 개인집으로 들어오는 수도 배수관들이 원래는 일자형 한덩어리인데, 거의 대부분 일부러 토막내어서 잘려 있었다. 200세대 중 20여 집은 배수관을 자르거나 손대지 않고 멀쩡했는데, 임원들 집이거나 소장과 친한 사람들 집이었다.
배수관이 다르게 변한 집들은, 두꺼운 플래스틱 배수관을 둥글게 불로 태워서 그 구멍에다 혹을 붙여 놓았다.
배수관을 몰래 열고는 자기들 마음대로 찌꺼기와 이물질을 넣고, 누수를 발생시키면서 조종할 수 있도록 배수관에 수도꼭지를 달았고, 안쪽에 전기선까지 감추어서 설치해 놓았다. 그것을 보고는 너무나도 기가 막히고 아연했다. 계획적으로 행한 무서운 음모였다. 근 200세대를 그렇게 변형시키는 데는 한 두 사람의 힘 만으로는 안되었다. 열 명이 넘는 인부들을 동원했을 것이다.
배수관을 변형시킨 모양새도 각기 달랐다. 보기좋게 일자형으로 혹을 붙여서 개조한 것, 구불구불하게 호스를 뱀처럼 꼬아서 보기싫게 변형시킨 것, 또 다른 여러 가지 모양새. 여러 인부들이 그 공사에 동원되었고, 인부들 취향대로 만들었다는 증거였다. 복도의 벽 아래 스텐 문안에 무서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도대체 이런 공사를 언제 했단 말인가? 한번씩 복도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기는 했었다. 날마다 출근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몰랐고, 바쁜 세상에 낮에도 집에 있는 여자들이 드물었다. 그런 것을 노린 것이다. 작가인 나는 거의 대부분을 낮에도 외출하지 않고 집에 있었기에, 우리 통로는 우리집과 몇 집 외에 불법 공사한 집들이 적었다. 그들 악인들에게는, 신경이 예민하게 나쁜 행위를 관찰하고, 그런 불법을 용납하지도, 그런 것을 알고는 결코 비겁하게 참지 않는 정의감으로 뭉쳐진 내가 요주의 인물로 경계 대상이었고 그들에게는 미운 눈의 가시였다.
서울에서 그런 행동을 똑같이 따라서 행하던 어느 아파트에서도, 비오는 날 몰래 배수관 불법 전기공사를 하다가, 서투른 사설 전기공 3명이 빗물에 감전사해서 죽는 사고까지 생겨났다. 그당시 뉴스에도 났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비오는 날 전기공사를 하지 않지만, 죄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비오는 날도 숨어서 무자비하게 공사를 강행했다. 해서 하늘이 분노하듯 불법 전기공사하는 인부들을 3명이나 동시에 감전사 시켰다. 전기를 연결해서 일자형 플래스틱 배수관을 둥글게 표시해서 불로 태워내고는 그 자리에 다른 배수관 혹을 갖다붙이는 수법이었다. 그 혹은 관리소의 비밀장소와 호스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우리 아파트 누수사고를 조사하던 그당시 같은 시기였다. 대책 없는 악인들이 곳곳에서 설쳐대고 있었다.
내가 복도의 불법 배수관 공사를 조사하고 발견하기 전에, 나도 병이 나서 남자에게 말했다. 이런 물로 생활하면 큰일을 당할 거라고, 피신해서 나와 같이 친정이 있는 시골로 가자고 권했지만, 언양의 남동생도 그런 이상한 물을 아파트에서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면 어찌 살 수 있느냐면서 같이 오라고 내게 말했지만, 고집센 남자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우리집에 들어오는 이상한 물이 무서워서 아파트를 급매로 팔려고 내놓은 상태라서, 부동산에서 우리집을 보러 올지도 모른다면서 자기는 집에 있겠다고 했다. 하루 빨리 이사를 나가야 한다고.
범띠 남자로서 승부근성이 강한 그는 끝까지 악인들과 싸울 태세였다. 병든 후에 그는 관리소에도 찾아가서, 온갖 더러운 물을 집안으로 보내는 것은 살인행위라면서 소장을 공격하고 다투었다. 그의 고집을 이길 수가 없어서 물을 조심하라 얘기하고, 병든 나는 혼자 시골 친정으로 떠났었다. 멋모르고 그런 독수를 남자가 집에서 근 두 달간 마시고 생활하면서, 그때부터 생겨난 피부병과 급격하게 온몸이 마르면서 피골이 상접해졌다. 내가 근 열흘을 친정에 있다가, 예약해둔 부산의 병원에 가야 해서 집에 돌아와보니, 그날도 집안에 독한 염소 냄새가 온집안에 가득했다. 화장실 수도꼭지로 독한 염소도 강하게 넣은 것이었다. 약물 테러였다. 계속 당하면서 남자는 신경까지 마비되었는지 독한 염소 냄새의 위험수위를 별로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다. 우리집에 자주 흙찌꺼기가 수도꼭지로 쏟아지면서 누수가 발생하고, 그것을 관리소의 박우록 수리기사에게 전화로 얘기하면, 그는 총알처럼 우리집에 나타났다. 그때는 그도 악질 소장과 한패인 줄 미처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관리소장의 하수인이었다. 찌꺼기를 넣은 것은 그의 소행이었고, 검은색 폐수를 우리집에 올린 것도 마찬가지였다. 악동이 재미로 장난하듯이, 소장이 시키는 대로, 또 소장이 하는 수법을 보고는 따라한 것이었다. 그들이 장난으로 변기가 누수되었기에 변기를 우리가 사고, 설치비가 없어서 관리소의 박우록 기사가 무료로 설치를 해주었는데, 그 변기와 세면기도 고의적으로 빼딱하게 달아서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변기도 줄줄줄 새도록 고무박킹 부속을 빼고 설치해놓았다.
설치작업을 하는 중에 핸드폰으로 전화가 와서 장시간 받더니만, 악질 관리소장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일부러 찌꺼기들을 넣어서 변기가 누수되도록 만들어 놓더니, 우리가 돈을 주고 산 변기와 세면기를 두번째로 망쳐놓았다. 박우록 기사가 우리집이 누수된다고 하면 총알처관럼 나타난 것은, 자기가 넣은 찌꺼기들이 배수관을 통해서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지 확인차 달려온 것이었다. 우리집은 그들의 악마적 행동을 대변하는 실험실이었다. 우리집 남자는 점점 폐인처럼 건강상태가 악화되고 더 크게 병들어갔다. 해서 그런 중에 우리는 아파트를 시세보다 5천만원이나 다운시켜서 급매로 팔고 작은집으로 이사했다.
우리가 이사할 때, 인부들을 시켜서 우리 이삿짐들 중에서 귀중품들을 수없이 도둑질하게 시킨 것도 관리소장이었다. 내가 검찰에 고발한 것을 앙심을 품고는, 자기가 뇌물로 낸 큰돈을 내게 보복하려는 행위였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이사를 열 번도 넘게 했었지만, 이사하면서 인부들에게 도둑을 당한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해서 이삿짐 속의 물건들을 잃어버릴 것은 상상도 못했고, 일하는 사람들을 믿었는데 크게 당했다. 처음에는 이삿짐 계약할 때 인부들이 3명이 온다고 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5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남자는 몸을 잘 못쓰는 환자이고, 늙은 내가 혼자서 이사하니까 온통 자기들 세상이었다. 통장도 현금도 훔쳐가고 핸드백 속의 루비스타 결혼반지, 내가 그린 유명인들 그림들도 훔쳐가고, 20년 넘게 사용하던 내 장부까지 훔쳐갔다. 한솔 대형매트 전열기도 두 개나 훔쳐가고, 자기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싹쓸이 하듯 온갖 것을 많이도 훔쳐갔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 며칠 후에 짐들을 하나하나 풀어보고는 놀라서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추석연휴를 앞두고 이사를 했기에, 추석연휴가 끝나자말자 가장 먼저 여러 은행과, 20년째 내 전부를 기록한 장부를 통째 훔쳐가서, 여러가지 정보를 도둑 맞은 신고부터 해야 했다. 해킹족들에게 여러 정보를 팔아먹을 수도 있으니까. 전세계약서도 사라졌다. 이사 때문에도 과로해서 더 아픈 몸으로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쫓아다녔다.
대형 냉장고도, 냉장실 안의 김치통들을 꺼내지도 않고 포장해서, 베란다에서 내릴 때 냉장고를 눕히고 뒤집어서 옮기면서 냉장고 안을 붉은 김치국물로 엉망으로 만들어놓았고, 유리 장식장 가구들도 일톤차에 실으면서 짐칸에서 이리 끌고 저리 끌면서 나무로 된 아랫부분을 다 망가뜨리면서 일부러 부숴놓았다. 해서 폐기물로 가구 두 개를 또 버려야 했다. 나중에 그런 것을 항의해도 일체 변상해 주지도 않았다. 한통속이 된 그들의 보복은 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싫어지고 사람이 무섭다.
남자의 건강이상이 나중에는 상피암으로 발전하고, 1년이 지나자 상피암이 점점 크게 퍼지고, 꼬리뼈 부분에서 살이 썩는 환부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면서, 자기를 그렇게 만든 가해자를 밤낮없이 저주하다가, 살이 썩는 고통을 더는 견딜 수 없자, 더 살아보았자 나을 거라는 기대도 할 수 없게 되자, 남자는 생을 포기하고, 나 몰래 수면제를 많이 처방받아서 모았다가 다량으로 털어먹고는 자진으로 죽음을 맞았다.
그 전에 이사 나오기전 그가 아파트에 살면서 그런 일을 당하고, 밤마다 수면제를 먹고는 환각과 환청 증상으로 이상한 행동을 하기에, 내가 수면제를 빼앗기도 하고, 그가 가는 병원(영인의원)에도 찾아가서 수면제를 처방해주지 말라고 부탁하기도 했었다. 그러자 그는 수면제를 숨긴 나를 원망하면서 나 몰래 병원을 바꾸었다. 한빛내과로.
딸에게 전화해서, "내가 수면제를 먹는 것은, 너무나도 몸이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그 고통을 잊고 잠들기 위해서"라고 딸에게 하소연했다. 그런 그가 일년이 지나면서 상피암의 고통이 점점 심해지자 결국 수면제를 과다복용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작년 6월경부터 그당시 관리소장(박종권)과 수리기사(박우록)가 공모해서 그런 무서운 일을 합작으로 벌렸는데, 교회 목사인 장애인(휠체어를 타고 다님) 운영위원장도 관리소장을 감싸고 비호했었다. 내가 운영위원장(회장) 집에 찾아가서, 배수관 불법공사와, 우리집에 빨간색, 검은색, 회색의 이상한 물이 자주 들어온다고, 내가 찍은 증거사진들을 보여주면서 간곡하게 진정해도, 처음에는 놀랐지만 나중에는 나를 피하고 멀리하려 했다. 전부 한통속이었다. 관리소장도 기독교였다. 이상하게 소장, 기사, 회장, 경비원,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박씨들이었다. 박씨 종친회를 보는 듯했다.
경찰에서도 3개월이 다 되도록 조사를 나오지도 않아서, 우리 부부가 병든 몸으로 비틀거리면서 경찰서에도 찾아갔다. 담당형사가 우리 말은 전적으로 무시하고, 관리소장을 비호하면서 딴소리만 하고 냉담해서, 너무 억울해서 감사실(감사실 앞에서는 내가 어지럼중에 비틀거리면서 쓰러지려 하기도 했다)과 사하경찰서 서장실에도 찾아갔지만, 일층 입구에서 여경이 우리를 제지하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자동문을 닫아둔 채로 우리가 열 수도 없었다. 경찰서장을 만나지도 못하게 했다. 진정서 사유서를 써놓고 가라고 했다. 여경이 말하는 진정서를 써놓고 왔지만, 아무리 며칠을 기다려도 연락도 없었다. 해서 피해당한 약자는 너무나도 억울하고 서럽다. 돈만 쓰면 살인을 해도 가해자가 빠져나가는 세상. 한국 경찰의 모습이다. 돈없는 서민은 끝까지 구제받지 못하는 피해자다. 거꾸로 가해자로 둔갑하기도 한다. 악질 가해자를 보호해주기 위해서.
이 나라에 법이 있는가? 정의가 존재하는가? 신성을 가진 예언자인 나는 피울음으로 통곡한다. 나도 당했지만 오래도록 약을 먹었고, 기도하는 나는 신의 보살핌으로 죽지 않고 살아났다. 피신을 자주 했으니 남자보다는 그 독수를 적게 당한 꼴이다.
가해자인 악인(관리소)들을 한없이 미워한다. 돈을 쓰고 빠져나간 그들은 결국 아파트에서 떠나갔고 멀쩡하게 살고 있다. 운영위원들도 그 사건을 계기로 다 그만두었다. 이제는 아무도 그 아파트에서 운영위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그 가해자들을 끝까지 비호했던 경찰서 사건 담당도 너무 밉다. 공무원이 아닌 장사꾼들 같았다. 고발을 한지 3개월이 다 되도록 조사도 하지 않았고, 엉터리로 검찰청에 보고해서 <각하>란 결과가 나왔다. 돈이 없는 우리에게는, 뇌물을 쓰지 않는 우리에게는 늘 그런 식의 결과였다. 건강했던 피해자가 독수로 암이 되고, 자살해서 죽었으니, 수돗물을 독수로 만든 그 나쁜 업을, 관리소장과 수리기사, 그들과 그 자손들도 똑같이 받을 것이다. 아니 더 크게 받을 것이다. 내 증언에 거짓은 없다.
온갖 건강식품들을 스스로 챙겨먹고, 노동을 하면서도 병원 출입은 평생 안하고 살만큼 80대까지 더없이 건강했던 사람이, 악랄한 원수를 만나서 죽음을.
불쌍한 사람이여. 이제 더는 독수로 살이 썩는 암의 통증으로 고통받지 말기를...
내 아들딸과 우리들 힘으로 작고 조촐한 장례식을 치렀다. 아무리 험한 세상일지라도 우리는 <인간의 도리, 조건>을 알고 있다.
평생을 열심히 일했지만, 자기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불행하게 산 고인을 죽은 후까지 외롭게 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의 참담하고 억울한 한을, 살아있는 내가 피울음으로 대변하고 있다. 나는 성격이 무서운 남자 옆에서, 평생을 눈물 삶을 살면서 행복하지 못했지만, 그도 불행한 삶을 살았고, 늙어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참혹하게 떠난 사람을 모른 체 외면할 수 없다.
갑자기 사진을 찾아보니 오래전 옛날 사진이 나왔다. 한창 건강할 때라서 좀 더 젊었고(70대 때 사진) 고인의 얼굴에 부티가 난다.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는 평생동안 별로 한 일이 없었지만...
무거운 업을 지고 태어나서, 아버지도 없이 살면서 자기 집안 큰형 노릇하느라고 평생을 힘들었던 사람.
평생을 무후봉사로 자기집 형제들을 위해서, 다섯 동생들을 고등학교까지 공부시키면서, 죽은 남동생의 아들 조카까지 돌짜리 어린애를 부양하고 학비를 대고 먹여살리면서 말없이 희생했지만...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평생 고맙다거나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고, 큰형이 가진 전재산을 다 빼앗다시피 하면서도 걸핏하면 반항으로 욕하고 기피했었다. 고인은 1938년 무인년생 범띠로 성격이 사나워서 주변에 친구도 없었다. 자기집 가족들을 위해서 평생 번 돈을 다 빼앗기고 52년동안 희생하고는 그들에게 결국 배신 당한 꼴이었다. 그들을 부양하느라고 평생 돈고생하고, 내 아들딸도 고학으로 힘들게 공부하면서, 아버지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못한 우리 세 식구만, 늙고 병든 불쌍한 그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켰다. 저가의 아파트도 내가 장만한 것이었다.
자기 몸보다 더 큰 무거운 돌을 등에 지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던 시지프스의 형벌적 운명처럼, 그가 떠난 후에 그의 고독하고 슬픈 생을 끝없는 눈물로 애도하다. 동아대학 병원에서는 80대 환자의 저혈압으로 수술도 불가하다고 했었다. 커져가는 암의 고통으로 몇 달 전부터는 수면제를 계속 먹고 잠자면서 너무나도 힘들어 했기에, 사후에는 부디 고통없는 나라에서 편안해지기를 기도한다... 내 뜨거운 눈물이, 형벌같은 당신의 무거운 죄를 씻어낼 수 있다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우리 집안 친정식구들 7,8명이 다녀간 가장 조촐한 장례식. 그는 내게 자기가 간 후에 두 아들딸 외에는 아무도 부르지 말라 했었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이었기에, 장례식을 하면 큰돈이 든다는 것을 미리 알고 걱정했었다. 먹는 것 외에는 자기를 위해서는 돈을 안 쓰고 평생을 지독한 자린고비로 살았던 사람. 자기 생일날도, 생일이 무슨 필요 있느냐면서 일체 장도 못보게 했었다. 해서 우리 가족 모두는 긴 세월 생일을 모르고 살았다. 나는 자식들에게 그것이 너무 미안했다. 내가 죄인 같았다. 80대 남자가 대학 영문과 공부까지 했으면서도 3천원짜리 남방, 5천원짜리 운동화만 쓰면서 살았다. 상인이 팔다가 오래된 그런 옷들은 몇 번 씻으면 금방 삭아서 철철 떨어졌다. 생일날 내 아들딸이 아버지에게 고급 옷을 선물하면 마구 화를 내었다. 왜 돈을 낭비하느냐면서. 그런 옷을 외면하고 입지도 않았다. 자식들은 별러서 선물을 하고서도 욕을 먹었다. 해서 아버지를 안좋아했다.
온집안에 전기도 한 곳 외에는 꺼놓고 살았고, 수돗물을 아낀다면서 화장실에서는 구정물을 통마다 모았다. 그가 사는 집은 늘 지저분하고 냄새로 퀴퀴했다. 말려도 듣지 않았다. 그런 행동들을 보면서 한 집에 살 때 나는 숨이 막히기도 했었다.
이제 알고 보니 그것은 검박한 수도자의 삶이었다. 낭비와 사치를 평생동안 몹시도 싫어했었다. 해서 주변 사람들도 나도 성격이 사나운 그 옆에서 허리띠를 졸라매어야 했고, 정신적으로도 슬프고 괴로웠고 다들 살아내기 힘들었다.
살아서는 긴 세월 지배자로 살면서 강자로 보였던 그가, 2년간 투병생활을 하면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는 외롭고 서러운 약자였다.
우리는 몇 년 전에 법적으로 타인이 되었지만, 그때부터 난데없이 남자가 환자가 되어서, "이런 나를 버릴 거냐?" 하면서 강제로 붙잡는 손을 뿌리치지도, 훌훌이 떠나지도 못하고, 불행한 그를 돕기 위해 가까운 곳에 살면서 간병하고, 반치매 환자의 온갖 투정과 트집들도 눈감고 참아내는 나를 보고는 얼마전에 내게 말했다. "나는 패자이고 너는 승자다."라고.
그 말에 나는 침묵으로 웃었다. 너무나도 건강했던 남자가, 중병으로 병들어서 불쌍하다는 연민이 끝까지 남아 있었다.
목디스크 수술후에 장애인이 된 그를, 법적인 독거인으로 혼자 사는 그를, 간병을 위해서 내가 가까운 지역에 살면서
오며가며 2년 넘게 간병하면서, 원래 천식으로 허약체질이었던 나도, 오래된 우리집 아파트(1992년 분양)를 작은방 누수로 인해서 벽을 파내면서, 뿌우연 연기가 온집안에 퍼지고 진동하면서 얻은 석면폐증, 그 후에 당뇨, 백내장 등, 환자를 간병하면서 천식과 과로로 더 괴롭고 힘들었지만... 장기간 집에서 노인환자를 간호해본 여성들은 그 고통을 알 것이다.
측은지심으로 떠난 사람이 한없이 불쌍해서 견딜 수 없다. 아직도 정신이 멍~하다. 시도때도 없이 눈물이 흐르고...
처음부터 보쌈하듯 납ㅊ로 잡혀와서 살았기에 긴 세월 가슴속 사랑은 없었지만... 내 아들딸의 친아빠니까... 내 인생은 없는 거라고 일찌감치 포기했었다. 타고난 보살 운명이다. 점술가가 내 운명 속에 남자는 없다고 하면서도 자식복이 있다고 했었다.
그런 아이러니를 처녀 때인 그때는 웃으면서 점술가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지나고 보니 결국 내 운명이었다.
빈소에서도 밤늦게 한 두 시간을 눈을 붙이고는 잠이 안 와서, 밖에 혼자 나가서 인적 없는 어둠속을 몇 시간씩 배회하면서 서성거리기도, 비내리는 날 어두운 새벽임에도 나는 산언덕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산소들과 주검들이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정신적 초월과 관조의 세계를 알고 있다. 빈소에 들어와서는 또 그의 영단을 지켰다.
잘 가오. 선량하신 우리 부모님과 영혼으로 만나서, 부디 즐겁게 잘 지내시오. 더는 외롭지 않게.
몇 달 전부터는 그는 사람이 순해지고 내 걱정을 많이 해주었다. 나도 오며가며 순해진 그를 간병하면서 더 열심히 노력하고 봉양했는데...
그의 고통이 좀 가벼워지라고 지장경 긴 경문을 끝까지 다 쓴 것을 유리테프로 코팅해서, 약사여래경과 함께 환자의 방에다 걸어주고 기도하기도 했었는데... 그의 마지막 순간이 부디 편안하기를 빌기도 했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내 기도처럼 그의 마지막 얼굴 표정은, 암 투병 환자가 아닌 듯이, 발끝까지 한 일자로 길게 엎드려서 이마에 두 손을 포개고는 이상하리 만큼 단정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도 마지막 순간에 두 손을 모으고 혼자서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했었나 보다. 불가의 스님처럼.....
내가 정성으로 사경한 지장경 전문(오른쪽)을 환자의 방에다 붙여 주었었다. 약사여래 다라니경도 사경해서 방에 붙여주고.
아래의 반야심경도 환자의 방에 걸어주었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 죽음을 부처님 가호로 편히 했다면 참 좋은 일이다.
고인이 떠나간 후에는 불경들을 걷어서 내 집(방)으로 옮겨왔다.
영락공원에서 3일장을 치르고 화장한 뒤 추모공원으로 모셔왔다.
자비로우신 관세음보살님이 고인의 사후를 지켜주시기를... 언니가 오면서 관음보살 그림을 가지고 왔다. 고인도 불교재단 학교인 해동중 해동고교를 나온 불연이다. 절에서 삼천배를 하는 불제자인 언니가 불경 염불도 열심히 해주고. 탈상 날도 오고 두 번이나 다녀갔다. 영가를 위해서 열심히 불교식 염불을 스님처럼 해주었다.
나하고는 평생을 물과 기름처럼 떠돌았지만, 여장부형 내 어머니하고 그는 생전에 서로 잘 통하고 친한 사이였기에, 어머니 제삿날을 지나고 바로 떠난 그를, 우리 어머니가 나타나서 사후세계로 인도해주신 거라고 믿었다. 납골당의 내 어머니 바로 아랫방도 수년을 계속 비어 있었다. 그것을 우연이라 할 수 없다. 별난 성격으로 평생을 외롭게 살았던 그는 이제 내 어머니 옆에서 더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시외 병원의 친정아버지 임종간호도 내가 혼자 했었고, 긴 세월 병을 앓으면서 어머니가 계셨던 시외의 형주병원, 양산도립노인요양병원 문병과 출입도 내가 도맡아 했었다. 나도 어머니도 부모님께 효성스러운 같은 차녀였다.
"전서방 내 따라가자" 하면서 장모가 제삿날 자정 넘은 시간에 웃으면서 나타나서인지, 그는 내게 사망 전날 낮에 전화를 걸어서 이상한 말을 했다.
"내 오늘 갈란다. 니 고생 많았는데 미안하다. 미안하데이~~~" 전씨 목소리가 너무나도 밝고 경쾌해서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엄마, 내 나가서 동무하고 좀 놀다가 오께." 하고 달려나가는 경쾌한 어린이 목소리 같았다. 아직도 그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사나운 남자인데, 그런 밝은 목소리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 전에도 오늘 내일 하면서 위기의 순간들을 열번도 넘게 지났기에, 전화 속 말을 나는 믿지 않았었다. 그날 저녁과 밤에도 내가 찾아갔었고, 밤9시가 넘도록 얘기를 나누고 함께 있다가 오면서, 그 전처럼 내일 아침이면 또 예사롭게 식탁에 앉아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는 자기 소지품(도장, 카드, 교통카드, 명절에 아들딸이 와서 준 서랍 속 용돈)들을 전부 내게 주었다. 극심한 통증으로 위기를 느낄 때마다 마지막처럼 그랬던 적이 얼마 전에도 여러번이었기에, 나는 예사로 받았다. 하루이틀 지나고 통증이 우선해지면, 또 자기가 내게 준 것들을 전부 다시 달라고 했었다.
그는 늘 죽음을 두려워했었다. 마음속 종교도 없었고, 기도한 적도 없었고, 사사로운 욕심과 욕망에 휘둘리면서, 잘 살아오지 못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십수년 전 담석 수술 받을 때도 그랬었고, 죽음을 몹시 두려워하던 그였는데, 먼저 가신 보살형 내 어머니가 눈앞에 나타나서, 그를 인도하듯 다정하게 가자고 하자, 그는 그리도 기분이 좋았나 보다. 가슴을 조이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이 일시에 가시고, 마음이 편해지고 안심이 되었나 보다. 무뚝뚝해서 말이 없으면서도, 법관의 딸인 내 어머니(장모}를 경애하더니. 내가 맞선 자리에서, 사나워 보이는 남자의 첫인상을 보고는 첫눈에 거부하고 싫어하는 남자를, 내게 억지로 강요하듯 붙여준 사람도 어머니였다. 그는 내 어머니를 믿고는 친구까지 동원해서 나를 강제로 납치했나 보다.
그 다음날 아침(8시40분쯤)에 내가 떡국을 준비해서 전씨 집에 갔다가, 똑바르게 일자로 엎드려서 잠든 것 같은 그의 모습을 보았다.
진주에서 유명 판사(김병규 법관)의 딸이었던 내 어머니도 불자의 집에서 태어났고 운명적으로 타고난 보살이었다. 평생을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서 무후봉사하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약사여래의 손으로 환부를 만져주고, 자비로 약을 만들어주고, 무료봉사하고 정성껏 돌보시다가, 84세에 양산도립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아! 고인도 같은 나이 84세에 가는구나. 두 사람은 같은 여름시기 출생이었다. 고인은 1938년(무인년) 음력 윤7월 24일(팔월하순) 출생이고, 어머니는 1927년(정묘년) 음력 9월 28일. 해서 두 사람 다 같은 다혈질이었다. 내가 본 사주의 별자리도 어머니는 가슴별이 용고성, 전씨는 가슴별이 옥당성으로 같았다. 여름 출생은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다. 여름, 가을 출생은 욕심도 많다. 겨울 출생은 성격이 차분하고 침착하다. 성품이 맑고 청수하며 두뇌가 명석하다.
어머니는 아들 넷과 딸이 셋이었지만 둘째딸인 우리집에만 자주 오셨다. 두 딸은 어머니가 오시는 것을 반대하고 안 좋아했다.
우리집에 오신 어머니는 사흘간, 일주일간씩 묵었다 가시곤 했다. 내가 쉬었다 가시라고 했다. 우리집이 가장 맘 편하다 하셨다.
장모와 사위가 우리집에서 만나면 같이 맥주를 마시기도 하면서... 그래서 서로를 좋아하고 이해하고 통했었나 보다.
전생에 두 사람은 모자지간으로, 그는 우리 어머니의 아들이었나? 두 사람은 자아가 몹시 강한 고집장이로서 정의로움을 사랑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방식도 비슷했었다. 해서 서로 죽이 맞는 상대였다. 어머니는 여성처럼 얌전한 아버지와 평생을 살면서 너무 착한 아버지가 때로는 답답했던지, 소리지르고 화를 잘내고, 화가 나면 집안 살림살이들을 던지고 부수기도 잘하는 사위를 남자답다면서 좋아했었다. 어머니의 오빠인 둘째외삼촌도 의성김씨 애국자이고 성격이 호방한 영웅 기질이었다. 일제시대부터 일본에 저항한 가슴 뜨거운 애국청년이었고, 해방후에도 긴 세월 검찰 공직자로서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그 오빠(김정기)를 어머니는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했다. 어린 자식들을 키우면서 위인형 외삼촌 얘기도 많이 해주었다.
착한 우리 아버지 아랫방도 비어 있다. 영가가 들었다가 이장으로 떠나간 자리. 나는 그런 것을 별로 개의하지 않는다. 그곳은 내가 들어갈 자리일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님 옆이면 좋다. 몇 년 전에 전씨하고 이곳에 올 때마다 "이곳은 내 자리"라고 얘기했었는데.... 세월이 몇 년간 흘렀음에도 아직 그대로 비어있는 자리가 참 고맙고 안성맞춤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추석 지나고 음력 8월 18일이 되면 추모공원에 가자면서 나를 채근했다. 추석 명절에는 추모객들로 복잡해서 차가 추모공원 광장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기에, 3일 지난 후에 운전해서 추모공원의 부모님을 뵈러 가곤 했다.
그는 우리 어머니를 좋아해서 해마다 잊지 않고 같이 갔다.
"나는 당신이 첫인상이 무서워서 싫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당신을 좋아해서 내 인생이 이 꼴로 망했다" 하고 얘기하면,
그는 오히려 어머니를 고마워했다. 희생당한 나는 불행했지만, 여자를 보는 눈이 예리하고 자기가 꼭 원하는 여자(나)를 40년이상 붙잡고 산 자기는 승리자라고, 어머니(장모)를 가장 은혜로운 사람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동상이몽이었다. 말은 안해도 속으로 더없이 고마워했다.
"너 같은 여자는 세상에서 두번 다시 만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평생 너를 놔줄 수 없다. 나는 욕심이 많다. 내곁을 떠나면 니는 어딜 가나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래서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했었다. 그는 거짓을 혐오하고 솔직한 남자였다.
처녀성 별자리에 해당하고, 여자들이 남자를 속이는 것을 못견디게 싫어했다. 그런 여자들은 자기가 다 내쫓았다고 했다.
술 마시지 않았을 때 평생을 욕설하지 않았고, 지저분한 음담패설도 하는 것을 못보았기에, 그런 것은 내 맘에 들었다.
나는 남자들이 음담패설을 하는 장소에서는 견디지 못하고 역겨워서 피하거나, 관광버스 안에서는 바로 화를 내었다.
여행을 같이 다니면서 그는 그런 내 성격을 알았다. 내가 평생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서 여행을 좋아하는데, 그도 같았다.
"니는 성품이 반듯하고 근검절약하고, 자식을 잘 키우고, 말과 행동이 정직해서 좋다"고 했다.
단하나 우려되는 것은 여자가 자존심이 너무 강하다고 했다. 자기가 술 취해서 한 실수에 크게 상처받고 용납하지 못한다고.
전씨 얼굴이 보름달처럼 둥글고 인물이 훤하네. 범띠 사주처럼 윗자리 지도자 상이다. 1938년 그 시절에 태어난 사람치고는 귀하게 대학 영문과 공부도 했고, 진주시청 공무원도 했었고, 군대에서는 헌병수사대에 있었다. 5.16 혁명 시기에 서울 정동에 있는 헌병감실에서 근무하다가, 5.16이 발발하자 서울을 사수하는 입장으로, 한강 철교 다리에서 5.16 혁명군을 막았다고. 5월이라서 군인들이 여름 반팔 옷을 입었는데, 그날 새벽에는 마치 혹한처럼 무지하게 추웠다는 말도 했다. 범띠생 군인들이 총을 들고, 같은 나라 군인들이 반대편이 되어서 대적하면서 죽기살기로 싸웠으니, 그 새벽시간에 살기가 등청했나 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5.16 혁명군에 동조하기로 마음을 바꾼 김진기 헌병감의 지시를 받고 반대로 새벽에 그도 남산 중앙방송국에 출두했다고.
두뇌가 좋고 아이큐가 높아서 헌병 시험에 합격하고 헌병이 되었다고 했다. <제5공화국> 드라마를 같이 보면서, 그 시절에 깃발 날리던 얘기를 내게 종종 들려주었다. 군대에 가기 전의 일화도 내게 얘기했다.
친구를 만나서 둘이서 시간을 보내다가, 같이 간 친구가 용두산공원 입구에서 역술가에게 사주를 보는데,
"제가 경찰에 들어가서 꼭 수사관이 되고 싶은데, 수사관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역술가는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면서, 따로 떨어져 서있고 사주보기에는 별로 관심도 없는 전씨 청년을 가리키면서
"저 청년이 바로 수사관 얼굴이요." 했다면서 세월이 흐른 후에 웃으면서 내게 말했었다. 그 후에 그는 군대에서 헌병수사대에 합격하고 헌병이 되었다고. 바로 헌병수사대에 투입되었고 수사학을 배웠는데, 그때 그 역술가의 말이 생각나더라고 했다.
보통 군인들은 병장으로 제대하는데, 그는 하사 제대였다. 사격 훈련에서 총쏘기를 하면 매번 과녁에 명중하고 총을 잘 쏘아서 특등사수로 진급된 것이라고 했다. 바로밑 남동생(전정길)은 서울대학교를 나온 수재였다. 월남전에 참전했고 계급이 대위였다. 월남전에서 돌아온 뒤에 얼마 안 가서 고엽제 병으로 사망했다. 수재인 그 남동생을 대학 졸업할 때까지 공부시키려고, 그는 형이었지만 먼저 양보하고 대학 영문과를 2년 중퇴했다.
전씨는 여러가지 재주가 빼어난 남자였다. 시청 공무원을 하면서도 사나운 성격 때문에, 헌병수사대에 있으면서 부정한 공직자들을 조사한다면서 잡아간 경험으로, 진주시청에 근무하면서, 부정을 행하는 진주시장을 찾아가서 직원들 앞에서 사납게 공격한 사건으로, 더 있지 못하고 사직서를 쓰고 나왔다고 했다. 상명하복의 공무원 체질이 아니었다. 그 후에 광고업을 시작했다고. 40세가 넘어서 나와 늦은 결혼식을 할 때는, 광고협회 어느 사장의 소개로 국회의원(한석봉 의원)이 주례를 서주셨다.
광고업 경력 50년이 넘었다. 네온 간판을 전문으로 했다. 교회 네온 간판을 제작 설치하고 나면, 아무리 강한 태풍이 불어도, 그것을 설치한 지 30년이 지나도, 네온 십자가가 한번도 고장나지 않았고, 오래된 네온 전구만 갈아주면 불이 환하게 켜지고 멀쩡했기에 목사들이 "전사장 재주가 국보급이고 희한하다."면서 볼 때마다 고마워하고 칭친하더라고 했다. 시내, 시외 할것 없이 가는 곳곳마다 그가 만든 교회의 네온 십자가들이 많았다. 주말마다 같이 여행하면서 그는 내게 말했다.
"저것도 내가 만든 것이다. 사각형 뾰족한 탑위라서 공사할 때 바람이 불면 몹시 위험한 작업이고 추위 때문에도 크게 고생했다. 설치한 지 30년이 지났는데 한번도 고장이 안났다." 의심이 많은 성격 만큼 일을 철저하고 단단하게 했었다. 십자가 철제 테두리가 강풍에 떨어질까봐, 삼손 같은 거대한 힘으로, 나사를 이중 삼중 박고 또 박았다고 했다. 그래서 긴 세월이 지나도 떨어지지 않고 단단했던 것이다. 그 업계에서는 신화를 창조하는 사람이었다. 신성을 가진 예언자인 나도 그렇지만, 그에게서도 때로는 강인한 신의 기운을 느꼈다. 사람을 내면까지 꿰뚫어보는 눈이 있었다. 그랬기에 자기를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나를 평생 놔주지 않았다. 예리한 눈으로 상대의 그릇을 정확하게 판단했다.
나를 아는 분(예전에 문단의 이석 회장님)이 관심으로 내 글과 나를 지켜보시다가 말씀하셨다.
"하선생, 그리스 신화를 읽어 보세요. 그 속에 하선생 모습이 있어요."라고. 그때까지 나는 그리스 신화를 몰랐다가, 그분의 얘기를 듣고는 찾아서 읽어보았다. 그 후에도 그림으로 만들어진 만화로도 보았다. 여러 신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땅 지하의 신 하데스가 어느날 땅위로 놀러 나왔다가, 아름다운 꽃밭에서 놀고 있는 여신을 납치해서 잡아가는 이야기가 있었다. 여신은 꽃밭에 혼자 있다가, 난데없이 하데스에게 땅속의 궁전으로 잡혀가서 평생을 감시당하면서, 눈물로 살았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헤어나려고 발버둥쳐도, 몇 번이나 죽음으로 저항해도, 강한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평생을 구속당하고 살았던 내 인생이 그 신화와 비슷했다. 삼손 같은 남자의 무서운 힘도, 그의 가지가지 남다른 실력도 신화 속 이야기와 같았다. 그는 과거 전생이 그리스 신화 속의 하데스였나?
맞선을 보는 장소에서, 범띠에다 차가운 인상이라서 첫눈에 나는 그남자가 너무 싫었는데, 맛선 한번 보고 싫다는 여자를 강제납치해서 평생을 나를 뒷조사하던 남자였다. 지배자처럼 그런 남자라서 여자들이 다 도망가 버렸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다.
사회인이 되어서는 광고협회 단체의 회장도 맡았었다. 광고협회 서울 중앙 시험에서 전국 일등 수석을 차지하기도 했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응시자들 중에서 가장 최고령자(70대)였다고, 서울신문의 신문기자가 부산까지 전씨를 취재하러 왔었다.
학구파여서 평생 일간신문을 낱낱이 다 읽었고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었다. 라이프 영자신문도 줄줄줄 읽고 다 해석했다.
범띠라서 술을 고래처럼 마시고는 집에 오면 주사도 심했다. 범띠들은 남자나 여자나 술을 좋아한다. 인생의 반을 술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천성이 깨끗한 수도자 체질인 나하고는 맞을 수가 없었다. 주사를 견디다 못해서 어린 아들딸을 데리고 절로 많이 도피하기도 했었다. 남자가 수사학을 배웠으니 가는 곳마다 수없이 잡혀왔다. 죽지 못해 사는 내 고통을 보면서... 사람이 되어 보겠노라 수없이 다짐했고, 그 약속이 공수표도 많았는데... 65세가 넘으면서 차츰차츰 술을 적게 마시고 자중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수없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쌓인 한 때문에 나는 작가가 되었나 보다. 철학도 공부했다.
그는 늘 메모하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사주의 가슴별이 옥당성(교사 체질)으로 교육자가 되었으면 좋았을 사람이었다.
우리 아버지처럼 선량하고 어질고 착한 사람을 좋아하는 나하고는 절대 상극이었다. 나는 평생을 피해자로 살면서 불행했고 그가 한없이 무서웠다. 타고난 보살의 운명이라면서... 내 인생은 없는 것으로 포기했다. 나를 평생 놔주지 않는 그를, 이혼한 후에 중병환자가 되어버린 그를, 그사람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병들어서도 나를 눈물로 붙잡으니, 떠나지도 못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헌신봉사했다. 그나마 착한 성품의 두 자식이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 내 아들딸의 친아빠니까, 내가 참아야 할 한 가지 이유였다. 병든 그를 볼 때마다 그의 고통이 너무 불쌍했다. 내 눈물로 그의 무거운 업장을 씻어내주고 싶어서 부처님께 기도했다.
이 사진은 점잖아 보이고 표정이 선량해 보인다. 그 시절 사진을 보니 군대에 있을 때도 인물이 좋았었다. 키는 크지 않았다.
고교 때 체육부에서 기계체조를 하고 운동을 많이 해서 어깨가 딱 벌어진 사람. 힘든 간판 광고업 50년. 평생을 열심히 일했다.
머리 위가 스님들처럼 삼각으로 솟아있네. 전생이 승가의 사람이었을까? 턱의 하관이 둥글면 승가의 불연이라던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거룩하신 부처님이시여, 과거세에서부터 불연으로 온 그의 고독한 영혼이, 사후에는 부디 평안하도록 지켜주소서.
집에서 내가 삼우제, 49재를 지내고 있다. 납골당 명패는 제작중이다. 집안을 뒤져서 가장 잘나온 사진을 찾아서 바꾸었다.
독거인이면서 환자가 된 고인에게, 나는 지난세월의 고통과 아픔들 섭섭함을 던져버리고, 우리가 타인이 된 후에도 최선을 다해서 환자를 간병하고 인간적인 도리를 다했기에 그것을 한가닥 위안으로 삼는다.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보살은 이타심으로 살면서 불행한 사람을 보면 결코 외면하지 못하기에...............
겨울여자 보살의 운명이 그러하기에. 타고난 내 운명 대로 살아왔다.
지난한 고통과 눈물 속에서도 세상의 향기로 살기를 원했기에... 세향이란 예명을 내가 지었다.
마음이 내킬 때는 한 자리에서 원고지 100매 분량의 글도 순식간에 써버리는 여자. 쌓인 한이 많아서일 것이다.
2021년 10월 9일 / 하늘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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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라졌던 사진들이 한 시간 후에는 다시 나타나는구나. .
10.18(월) 오늘이 삼재날이다. 추모공원에 혼자서 다녀왔다.
고인의 명패가 붙어 있었다.
12/9(목) 혼자서 운전해서 추모공원에 다녀왔다. 그곳에 가면 아버지, 어머니,
아들딸의 아버지를 한 방에서 같이 볼 수 있어서 좋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받았다면 미안한 일이다.
너무 입바른 소리를 잘해서 미움을 사기도.
그래서 문자를 찍어도 글자가 안 되는 불편을 겪었다.
불이익을 주는 사항을 찾아서 삭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