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대통령이 그렇게 만만한가?
국회의원 월급을 '세비'라고 합니다. 연봉 1억5천만원입니다. 그리고 정말?할 정도의 특권을 누립니다.
다 국민들이 뼈빠지게 벌어 낸 세금입니다.
그런데 그 돈받고 한 일이 윤석열대통령 부부 나체사진 전시회를 국회에서 열은 겁니다.
국회사무처도 '어이상실'전이 심각한 사회윤리와 개인비방이라고 판단하고 거센 저항끝에 간신히 철거했답니다. 주최한 '패륜의원'이름, 국민이 만든 '블랙리스트'에 올립시다.
강민정·김승원·김영배·김용민· 양이원영·유정주·이수진· 장경태·최강욱·황운하 그리고 위장탈당 민형배, 위안부할머님 등골빼먹은 윤미향입니다.
내년 4월 반드시, 모조리! 떨어뜨립시다. 그래서 이 나라 국민이 바보멍청이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줍시다.
국회의원들 수준이 생양아치, 좌빠시위꾼보다 더 심하네요. 하긴 저출산 부위원장 요구하며 국민세금'법카'까지 쓴 사람도 윤대통령을 아주 우습고 만만하게 보니까요ㅜㅜ [출처] 윤석열대통령이 그렇게 만만한가?|작성자 꿀단지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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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발자취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서독을 방문했을 때 아우토반을 달리면서 고속도로 건설 결심을 굳혔다. 귀국한 박 대통령은 지도 위에 서울에서 부산‧목포‧인천‧강릉을 잇는 선을 그으며 관계 장관들에게 고속도로 건설 의지를 밝힌 뒤, 1965년 3월 고속도로 건설 타당성 조사를 지시했다.
고속도로는 국토의 대동맥으로서 장차 경제개발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할 터였다. 박 대통령이 제6대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고속도로 건설계획을 내걸자 야당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심지어 공화당 국害의원들조차 반대에 동조했다. 야당에서 고속도로 건설 재원을 만들기 위한 석유류세법 개정안에 반대하여 국회에서 농성을 벌이자, 박 대통령도 지친 기색으로 육영수 여사에게 물었다.
“야당은 물론 공화당 의원들조차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하는데, 임자는 어떻게 생각해?” “누가 뭐라든 각하께서 국가를 위해 옳다고 확신하시면 밀고 나가셔야지요.”
1968년 2월 1일에 착공된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7월 7일 서울에서 부산까지 429㎞ 전 구간이 완공되었다. 세계 고속도로 건설 역사상 최단기간인 2년 5개월 만에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함으로써 국내외에 한국의 기술력과 근면성을 과시했다. 고속도로 건설에는 태국에서 고속도로 건설경험을 축적한 현대건설의 공로가 가장 컸다.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은 불철주야 공사현장에 상주하면서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수시로 공사현장을 찾아 현황을 살피고 일꾼들을 격려했다. 야당은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된 뒤에도 헐뜯기에 바빴다.
국害의원 김영삼은 ‘경부고속도로를 똑바로 세워놓으면 금세 와르르 무너진다’며 시비를 걸었다. 세계에서 가장 탄탄한 독일의 아우토반도 똑바로 세워놓으면 와르르 무너진다. 경부고속도로는 준공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절대적으로 기여해오고 있다.
다목적댐 건설은 국토종합개발사업 가운데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다목적댐이란 수력발전, 홍수조절, 상수원 확보, 농‧공업용수 공급 등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댐을 말한다. 1967년 4월 소양강댐 착공을 앞두고 단일목적댐과 다목적댐을 지지하는 공직자들 간에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건설비와 효용 면에서 두 댐 다 장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도 선뜻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저울질을 계속하던 박 대통령은 경제기획원 황병태 국장을 청와대로 불러 단도직입적으로 그의 생각을 물었다. 박 대통령은 이처럼 장‧차관을 제치고 실무에 가장 밝은 국‧과장들을 불러 의견을 물을 때가 종종 있었다.
“국가경제 전체를 고려한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다목적댐이 바람직하다고 사료됩니다.”
“그렇지? 우선은 비용 부담이 되더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효율적인 다목적댐이 낫겠지?”
박 대통령은 임석해 있던 경제기획원‧재무‧건설 등 세 장관에게 소양강댐을 다목적댐으로 지으라고 지시했다.
단일목적댐을 지지하는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은 부하직원인 황병태를 노려보았다.
1968년 포항제철 설립을 결심한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을 사장에 임명하고 재원 조달책임까지 떠겼다. 박태준은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제철차관단과 협상을 벌였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한국은 기술과 경험이 없어 실패할 것이라는 게 거절 사유였다. 낙담한 박태준은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하면 어떨까 싶어 박 대통령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의사를 타진했다.
“기막힌 아이디어군. 마침 청구권자금이 1억 달러쯤 남아있어. 일본정부는 임자가 설득해.” 일본은 청구권자금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제공하면서, 용도를 농수산 지원에 한정했던 것이다. 박태준은 그길로 동경으로 건너가 모교인 와세다대학교 동문들의 도움으로 일본정부를 설득하여 포항제철 설립을 시작했다.
신일본제철은 설비 및 기술을 제공해주었는데, 포항제철이 그처럼 단기간에 기술력‧품질‧생산량‧수출량 등 모든 분야에서 일본을 앞지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이후 포항제철은 자동차‧조선‧플랜트 등 우리나라 중공업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포항제철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다.
1973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발표했다. 제철‧조선‧자동차‧플랜트 산업을 국가의 핵심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의지와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IMF와 IBRD는 한국의 기술력 및 자본 부족을 이유로 즉각 반대 입장을 밝혔다. 박 대통령은 1973년 12월 국민투자기금법을 제정하여 국내 가용자금으로 중공업을 육성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같은 달 한국산업기지개발공사를 설립하여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창원‧여천‧온산‧안정‧구미‧포항‧북평‧아산 등지에 순차적으로 국가산업단지를 건설하도록 했다.
이후 경공업 위주의 우리나라 산업구조는 빠르게 중공업 위주로 개편되어 국가경제 발전을 선도해오고 있다. 이때도 김영삼‧김대중 등 야당 정치인들은 기를 쓰고 중화학공업정책을 반대했다. 그 자들의 주장을 따랐더라면, 오늘날 우리의 국민소득은 1만 달러를 밑돌고 있을 터.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달성을 국가경제정책의 새로운 목표로 설정했다. 1970년의 수출액은 8억 4천만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54달러였으니, 대부분의 국민들은 박 대통령의 이 목표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1977년 우리나라는 목표를 3년이나 앞당겨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수출액이 10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로 증가하는 데 서독이 11년, 일본이 16년 걸린 데 반해 우리나라는 7년 만에 이를 달성한 것이다. 1977년 1인당 국민소득도 1000달러를 넘어섰다.
박 대통령은 다시 수출 1천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라는 보다 원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매진했었지만, 1979년 10월 26일 모든 게 끝장나고 말았다.
이후 나는 우리나라가 수출 1천억 달러, 2천억 달러, 3천억 달러, 4천억 달러, 5천억 달러, 6천억 달러를 달성할 때마다, 그리고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 2만 달러, 3만 달러를 넘어설 때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목표를 설정해놓고 온 국민을 독려하여 함께 매진했던 위대한 영도자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했다.
2016년 말 우리나라는 세계 5대 중공업 국가, 세계 7대 수출 및 무역대국, 세계 13위 경제대국이다. 박정희 소장이 5‧16군사혁명을 일으킨 1961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로 UN 경제통계 대상국 가운데 87위였다.
북한은 126달러로 74위였다. 아시아의 태국(110달러 80위), 캄보디아(116달러 78위), 아프가니스탄(124달러 75위), 필리핀(268달러 49위)도 우리보다 높았다.
오늘날 세계 최빈국으로 꼽히는 아프리카의 수단(102달러 83위)과 차드(106달러 82위)도 우리보다 잘살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나라를 생애 마지막 해인 1979년에 이미 1인당 국민소득 1734달러로 세계 59위에 올려놓았다. 2018년 대한민국이 수출 6천억 달러를 달성했을 때, 세계 각국의 사려 깊은 지도자들은 그게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영도력 덕분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문재인 등 이 나라 좌파들만 모르고 있다.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온 국민과 함께 국가 발전을 위해 매진할 때, 동참할 의지도 능력도 없이 민주화 투쟁이라는 미명하에 뒷전에서 반대만 외치던 백해무익한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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