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1737-1805)을 중심으로 한 서울에서 활동하던 북학사상가들의 모임을 ‘연암학단(燕巖學團)’이라 일컬을 만큼 그는 북학사상가들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44세(1780)에 북경에 처음 여행하였는데, 이 때 그는 청조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던 북경 동북쪽 장성 바깥의 열하까지 갔으며, 이 여행의 기록인 『열하일기(熱河日記)』는 그의 실학사상을 집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저술이며, 그 문체가 패관잡기(소설)류의 것이라 하여 정조(正祖) 임금의 질책을 받았으며, 또한 임금의 요청에 따라 농사기술에 대한 문제를 다룬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저술하여 농업생산을 위한 그의 해박한 실학적 지식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박지원의 실학정신은 ‘이용후생론(利用厚生論)’으로 집약할 수 있다. 이용후생론은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생산을 향상하는 ‘이용(利用)’을 먼저 해야 민생을 두텁게 하는 ‘후생(厚生)’을 할 수 있고, 이러한 이용후생의 말단을 먼저 함으로써만이 근본이 되는 도덕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선말후본(先末後本)’의 실학적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당시 북경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웅장한 건축물로 노구교(蘆溝橋)나 산해관(山海關)을 웅장한 볼거리라 여기는 데 반하여, 그는 생산기술과 민생의 실용에 관련된 기와 조각이나 거름 더미가 진실로 볼 만한 것이었다 하여 실용에 관한 실학적 관심을 제시하였다. 실제로 그는 북경으로 오가는 여행 도중 민가에 머물 때 숙소의 부엌 아궁이까지 들여다보며 효율적인 난방제도를 관찰할 정도로 당시의 관습이나 체통에 얽매이지 않는 세밀한 관찰을 하였다. 또한 그는 청조의 수레제도를 소개하면서 국가의 가장 큰 이용 도구가 수레라고 지적하고, 우리 나라의 부강을 위하여 수레는 필수적인 것임을 역설하였다. 그는 청조에서 활용되고 있던 수레의 응용기구로서 논에 물을 대는 ‘용미차(龍尾車)’, 물을 총 쏘듯이 하는 ‘수총차(水銃車)’, 방아를 찧는 ‘아륜(牙輪)’, 제분기의 역할을 하는 ‘요거(搖車)’, 고치를 켜는 물레인 ‘소거(繅車)’ 등의 효용성을 관심 깊게 소개하며 도입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는 선비의 역할에 대한 철저한 재인식을 하여, 사(士)는 농(農) · 공(工) · 상(商)의 위에 있는 지배계층이 아니라 각각의 직업에 따른 직분으로 구분된 것이라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농 · 공 · 상으로 하여금 그 생산의 산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이치를 연구하여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도와 주는 것이 선비(사, 士)의 임무요 선비의 학문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만주족인 청조를 오랑캐로 보고 배척하는 도학의 배청론 내지 북벌론이 지닌 허위의식을 비판하면서,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배척을 하고 북벌을 하려면 맹목적 비난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을 인식하고 적의 뛰어난 점을 배워 우리의 강점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청조 현실에 대한 그의 예리한 인식은 『열하일기』의 「심세편(審勢編)」에서 ‘오망(五妄)’과 ‘삼난(三難)’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오망’은 우리 나라 인물들이 청조 인물들을 만날 때 망령된 행동을 함부로 하는 점으로서 자신이 높은 문벌인 것처럼 내세우는 것, 상투를 튼 것을 자랑하는 것, 청조 인물에게 거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 우리의 문장 수준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볼 만한 문장이 없다고 깔보는 것, 청조에 복속한 한족(漢族)을 보고 절의 있는 선비가 없다고 비난하는 것을 지적하여 우리의 망령된 허세를 반성하고 우리가 선입견에 사로잡혀 객관적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제시한 것이다. ‘삼난’은 중국 선비들의 어려운 점으로서 많은 문헌에 박식해야 하는 어려움, 큰 나라로서 예법을 준수해야 하는 어려움, 엄격한 법률을 두려워하는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황교문답(黃敎問答)」에서도 ‘육불가(六不可)’와 ‘오심(五審)’을 들고 있다. ‘육불가’는 사신 행렬이 중국에 머무는 3-4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중국의 정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음을 지적한다. 곧 갑작스럽게 깊은 문제를 질문하기 어려움, 언어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어려움, 의관이 달라 형적이 쉽게 드러나서 관찰하기 어려움, 깊은 질문이 국가의 금기 사항에 저촉되기 쉽다는 어려움,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으면 정탐하는 혐의가 있다는 어려움, 금법을 어길 수 없다는 어려움을 들고 있다. ‘오심’은 중국 정세의 내부적 현실을 살핀 것으로서, 그는 황제가 여름 별궁을 북쪽 변경의 사막인 열하에 지어 놓고 머무는 것은 몽골족의 강성함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방어이며, 황제가 서번(西番, 티베트)의 승왕(僧王, 라마)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은 서번의 강성함을 관리하는 위무정책이며, 한족 선비들이 청조 황제를 칭송하는 이면에는 한족들이 억압받고 있는 마음의 괴로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며, 한족 선비들이 필담한 뒤에 필적을 불태우는 것은 청조의 법령이 엄혹함을 보여 주는 것이며, 골동품과 사치품의 가격이 높은 것은 승평세의 보물 구하는 괴로움을 보여 주는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박지원의 이러한 분석은 청조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객관적으로 심화시키는 중요한 시각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박지원은 자신의 실학사상을 구현하는 독자적 방법으로서 소설을 통해 그 시대의 허위성을 비평하는 풍자문학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그는 문장론에서 고문(古文)을 높이는 존고(尊古)와 모방의 태도를 배격하고 사실에 입각하여 진실한 것을 드러내려는 탈고(脫古)의 사실주의적 입장을 보여 준다. 그는 18세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처럼 인분(人糞)을 치우는 하층민의 직분에 충실한 인격성을 재발견하거나 「광문자전(廣文者傳)」처럼 거지의 의로운 인격성을 드러내어 신분계급적 질서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으며, 「양반전(兩班傳)」처럼 양반의 도덕적 위선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후기 작품인 「호질(虎叱)」과 「호생전(許生傳)」은 『열하일기』에 수록되어 있는데, 「호질」에서는 호랑이의 입을 빌어 “선비란 아첨하는 자이다.”(유, 유야, 儒, 諛也)라고 선언할 만큼 도학자의 위선과 비굴함을 비판하고 있으며, 「허생전」은 화이론적 의식의 허위성을 비판한 것으로서 북벌론을 주도하는 이완(李浣) 대장이 북벌을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허생이 제시한 사항을 하나도 시행할 수 없을 정도로 명분론적 형식주의에 빠져 있는 허구성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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