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 때에, 돌싱 으로서 카페가 제 벗 입니다.
맞춤법 틀리고, 장문 이나 향수에.
우리집 스토리 입니다.
98년 타계하신 아버님 고향은 평북 선천, 어머님 고향은 평북 철산,
평화시장에서 남자 성인 바지 도매상을 하셨고.
아버님은 해방 후 먼저 월남 하시고, 어머님은 6.25전에 형님을 업고 38선을 넘으셨다.
선천에서 지주 집안 이라, 공산당이 들어선 후, 지주를 우대해, 지주들은 대부분 월남하지 않았다.
어머님이 아버님 만나러, 시댁을 출발할 때, 할아버지, 할머니, 가족 작별인사 드리고,
월남하는 일단이 안내원에게 돈을 주고, 밤에만 걸어서 소리 안내고 월남 길을 가시는데,
북한군에게 발각됐다.
당시 작은 할아버지가 평양에서 몇 손 꼽는 대지주 셨다.
자제 분들은 김일성 대학 교수하시고, 어머님이 작은 할아버지에게 연락해,
작은 할아버지가 풀어 주라고 해, 다시 38선을 넘어,
당시, 신통하게도 2살 가량이던 형이 엄마 등에서 계속 울지 않았다고 한다.
부산에서 아버님을 만나시고, 부산 국제 시장에서 아버님이 미군 바지 염색해 파시며
생계 이어가시고, 부산에서 큰 누님, 작은 누님이 나셨고,
아버님이 성실하시고,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라 위 장사로 돈을 어느 정도 모았는데,
1차 사기를 당했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남산 밑에, 해방촌 아래,용산동 선천 동내에 정착해,
나와 여동생이 태어 났다.
50평 정도 되는 대지에 허름한 기와집에 앞애는 우리 살림살이, 뒤에는 바지공장으로,
재단사, 미싱기사, 시다, 오바로꾸, 다림질 하는, 사람들이 15명 정도 있었다.
만든 바지를 아버지가 남대문 시장에서 도매 장사 했고, 5남매가 전부 1등하고,
반장하며 인물들이 잘나고, 화기 애애 해 동내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실향민 아버님과 4남매가 , 형님은 고등학, 사춘기니 없었겠죠. 쪽 팔리시 니까.
60 년대 입니다.
그야 말로 별들이 총총, 북두칠성, 오리온 자리, 큰 곰 자리, 밤 하늘 가득히 은하수,
요즘 애들과 달리, 흙, no 인터넷, good old days.
저녁 먹고, 피복 도매 하시던 아버님이 가꾸신 우리 집 정원에, 50평 대지에
맨드라미, 장미, 난초, 코스모스, 아주까리, 해바라기, 국화, 채송화, 옥수수, 등등,
동네 부러움 우리 집.
나중 집 짓고는 나무로, 시집 가신 두 누님이 각각 남기고간 소나무.
매화, 목련, 무궁화, 라일락, 벚꽃,...., 이름이 기억이 안 납니다.
다시 식후 돚자리 깔고, 대장 아버님과 올망졸망 새끼 네 무리.
밤하늘 잔치에, 흘러가는 유성 보며,
지휘자 선창, "별 하나 ", 우리 졸개들 이구 동성으로 " 나 하나",
“별 둘” “ 나 둘”…. 열까지 갔겠죠.
아버님이 즐겨 부르시던 이북 동요, 덜 큰 우리 들이, 똑 같은,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 억양으로
수시로 저희들 입에서.
"김칫국 강낭떡이 마디 있어요, 할아버디 할마니 잡둬 보셔요,
이 빠디가 아파서 못 먹갔다야, 이래두 저래두 잡둬 보셔요"
아버님 저하고 북한산, 인수봉 뒤 계곡으로, 가시면 소주 한 잔 드시고,
넓직한 바위 위에, 아버님 특유의 바지 무릎 까지 걷 우시고,
꿈에 본 내 고향을, 걸걸한 목소리로 부르곤 하셨습니다.
김정호의 “불효자는 웁니다.”를 내가 나중에 그런 경우가 되지 않도록 해야지.
무지가 병으로, 장사 끝 내시고도 근육질, 형님, 누님들 집에 남산서 길어 온 약수물 큰 물통을 등에 지시고,
개포동, 상도동, 화곡동으로 번갈아 나르시 곤, 용산동 그 곳들 까지 물통 지시고, 걸어 가셨던 것.
새벽 세 시에 기상, 약수터 가셔서 운동 하시고, 물 길어 오시고, 배달,
세 분 집 식수는 남산 약수물, 매주 북한산, 천성적 으로 부지런 하셔서,
아버님 보시면, 사람들이 법 없이도 사실 분 이라고.
옥상에 플라스틱 팩들이 옥상 가득히, 북한산, 남산에서 가져온 흙 넣고 상
추, 고추, 깻잎 등 재배, 본가와 세 분집 야채 조달,
자연히 건강 하시고, 60대, 70대 이 신데도 팔뚝에 굵은 핏줄이,
가족 병력 없는 우리 집이나, 프랑스 월드컵 열리던 때 경찰 병원에서 급성폐렴으로
타계 하셨습니다.
그 해 봄에 감기 걸리 셨는데 , 매일 한산도 한 갑 피우시니, 폐가 견뎌내지 못하고,
입원 후에 계속 악화, 나중 백혈병 으로도.
폐만 그렇지 의식은 명료 하시니, 면회 가면 집에 가서 야구도 보고 등등 하셨는 데,
집에는 더 이상.
어머님이 아버님 간호하려 병원에서 기거 하시고, 형수님, 누님 들이 밥, 반찬 갔다 주시고.
무지가 병으로 사위 두 분과 여동생 남편이 데이트 할 때, 나중 결혼 하고도
우리 집에 올 때면 한산도 한 보루를 사오 셨으니.
여담 인데, 제가 긴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제 아들이 사정이 있어 인공 수정으로 태어나 , 또래 보다 약하고 항상 울고 보채곤 했습니다.
둘 째 딸은 자연 임신으로, 토실 토실, 건강.
아버님이 나중 중환자실로 옮겨 졌습니다.
입원 말기 폐 엑스레이 사진이 전체가 하얗게.
병원은 형님께, 굿바이 준비 하라고.
중환자실서도 악화 일로에 폐가 역할을 못 하여, 산소 마스크를.
병원에서 연락, 자식들 다 데리고 와서 작별 인사 해라.
조카들 학교 대신에, 매형들, 동생 남편 출근 대신해, 병원으로 마지막 인사 드리러.
숨을 가뿌게 쉬시는 아버님이 저희들과 각각 눈인사 하시고, 제 아들에게 만은
산소 마스크 벗으시고는 가뿐 숨을 몰아 쉬시며 재호가 96년도에 태어 났으니
"재호야, 귀엽다는 말 인사와 잘 있어" 하셨습니다.
병원에서 오늘 못 넘긴다고 연락이, 네덜란드와 게임 할 때 , 개포동 형님 집에 모두 대기.
병원에서 오라고 전화, 여의도 순복음 교회 집사 이던 어머님이 지역장, 권사님께 전화해
그 분들, 목사님, 저희들 보시는 데 , 저희 찬송가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 목사님 기도 속에,
의식은 명료 하셨던 아버님이 두 눈에 눈물 가득 고이시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통일동산에 삼촌, 삼촌 어머님 옆에서 영면하고 계십니다.
어머니, 전형적인 한국여인, 어머니 였습니다.
아버님이 장사 하시다 보니, A형 이지만, 아침식사 하시다가, 밥상을 통째로 뒤집어 엎으시면,
어머니는 부엌에서 걸레를 들고 오셔서, 말 앖이 닦고, 훔치고, 정리 하셨죠.
또, 아버님 어떤 불만 사항이 있어, 아버님이 안방에서 부엌으로 가셔, 어머님 뺨을 때리 셨습니다. 저희는 보고 있었구요. 어머니는 뺨 맞은 부분이 빨개 지시고, 눈물을 머금고,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조용히 계셨습니다.
남남 북녀 말대로, 생활에서 억척 같이 사셨죠,
일요일 아침엔, 아버지와 5남매가 남산을 가 배드민턴, 공놀이 하며 남산 순환도로를 일주해 운동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아침 밥해놓고, 마당에 돚자리 펴고, 소 불고기 구어 아침을 먹었다.
아버지가 마당에 해바라기, 아주까리, 국화,코스모스, 맨드라미, 채송화 등을 심으셔서, 집이 작은 숲, 화단 같았다.
형이 캐논 카메라로 사진 찍고. 부모님 이북에서 결혼식 날 사진 찍은 색 바랜 사진(엄마가 월남시 품에 넣고)이 있는데,
신성일, 엄앵란 부부 이상 가는 미남, 미녀 이다.
이목구비 뚜렸하고, 코 오똑하고, 등등, 우리 가족 같은 인물만 있다면, 요즘 대세인 성형외과 문 닫아야.
엄마가 5남매 뒤 바라지 하시고, 공장을 혼자서 꾸려나가 셨다.
재단 나라시, 다림질도 연탄이라 연탄 갈고, 연탄가스 마셔, 혼나기도 하시고, 아침에 만든 바지를 아버지와 부모님 키 만한 보따리에 108계단(경사도 있고,쉽지 않음),
아버지는 어깨에, 엄마는 머리에 이고 매일 계단 밑 까지 운반 하셨다.
사춘기 중, 고생 이던 큰누나, 작은 누나는 엄마가 머리에 이고 가시는 것이 창피해 다른 시간에 등교하곤 했다.
엄마가 잠이 모자라(일 하시느 라고, 하루 3~4간 미만, 하루 종일 일 하시고, 얼굴이 많이 여의셧다.
내가 후암 국민학교에서 계속 반장하고, 1등 하며, 축구선수로(천부적인 골잡이).
추첨으로 봉천 중학교에 1회로 들어갔다.
3년간 반장하고, 전교 1,2등 하며, 총동창회 초대 총무를 했다.
신설학교니, 경기중 폐교하며 3명의 주임선생님, 등 명문 중고, 베태랑 선생님들과 반은 사대 그 해 졸업하신 신참 선생님으로 구성돼다.
나는 중 1학년 반장이 군 지휘자 이상으로 반 전체 운동장 집합시켜 뺑뱅이 돌리고,
해이해 지면 반 전체를 몽둥이로 궁둥이를 때리고, 담임 선생님은 지켜 보시기만 하시고,
완전 장악. 리드해, 다른 반 나보다 10cm큰 학우들이 내 카리스마 때문에 나를 똑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국가관, 민족관, 정의감, 효도 등이 중학생 이상 이었다.
입시 있을 때 가르쳤던 베태랑 선생님들(부유 하셨다.)
신설학교 배정 돼, 촌지를 대 놓고 요구 하며, 반장 중에는 나만 공립학교 출신이고,
반 임원 등 모두가 사립학교 출신 이었다,
어머니 들이 부리나케 학교와 촌지, 선물 등. 그러나 엄마는 공장 돌보시고, 5남매 뒷바라지 하느라 졸업식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학교 오셨다.
잠 못 주무시고 일하느라, 잠 부족하고, 이들 이유로 버스만 타시면 4~5 정류장 정도만 가시면 오바이트 하셨다.
그래서 집에서 출발 전에 구토물 담을 손수건을 매번 준비 하셔야 하셨다.
베태랑 선생님들은 내 리더쉽을 인정 하면서도,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돈 봉투를 내게서는 한 번도 없으니,아무 잘못 없는데, 나를 반 앞으로 불러, 반 급우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때리곤 하셨다.
대신 신규 선생님들 한테는 내가 최고 였다,
특히 여선생님들 한테는 완전 최고 였다.
부모님 지원 없고, 특이한 상황있는 신설학교에서, 반 리드 장악하고, 모범생으로 생활 하기 위해,
사춘기 중학생 때 있는 친구들 끼리 2차 성징에 대한 얘기 나누고 하는 것을 나는 일부로 안했다.
이 것이 내 인생 비극 시리즈의 시발점이 었다.
이것을 나 외엔 아무도 모르고, 몰랐다.
졸업식 때는 졸업생, 재학생, 학부모들 다 모인 졸업식장에서 교감 선생님이 연단에서 마이크로 연설 중, 저를 지칭하며, 제가 나중에 최소한 국회의원 이나 장관이 될 거라고 말하셨다.
물론 어머님은 졸업식장 오시면서 버스에서 토하시고.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크리스마스날 결혼 하셨다.
아버님이 장사 하시다가, 잠바 차림으로 오셔서 있는 모습 봤는데, 피로연 즈음에 안 보이셨다.
베태랑 선생님들은 하객들 다 있는데, 큰 소리로 “반장 아버지 어디 있어, 피로연 해야지.”
부반장 어머니만 안절 부절 못하고 분주히 움직 이셨다.
물론 나는 많은 사춘기 갈등을 겪었고.
그렇게 고생 하며 바지 도매 하시며 돈을 제법 모았다.
68년도에 남대문 시장에 대화재가 낳다. 아버지 가게는 전소했고, 보험도 안 들어 났었다.
그 후 평화시장으로 이전해 장사 하셨다.
당시 장사 하신 던 분들이 알부자라, 아버지 가게에 돈 박스(나무 상자)에 현금이 수북이 있었고,
저녁에 귀가 하실 때 보자기에 현금을 수북이 넣고, 5남매 줄 과자류, 장난감들 사오셨고,
대목(구정,추석) 때는 나와 큰 누나가 수시로 바지를 버스 타고 날랐다.
나는 국민학교 저학년 때부터 자주 아버지 가게에 바지 나르고, 아버님 께 돈 받아 자장면 사 먹고, 인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빈번히 갔다. 광 팬 이었다.
당시 실업야구는 관중이 거의 없었는데, 실업 야구장에도 거의 항시 내가 있었고, 고교야구, 대학야구는 물론, 고교야구 빅 게임이면 아버님이 장사 끝내고, 야구장 오셔서 같이 관전하고, 형님과 같이 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국민학생이 실업야구 선수들 프로필을 줄줄이 꾀고 있었다.
형님 친구 분들이 같이 오셔서 관전 시, 내가 줄줄이 프로필 등 얘기 하는 것 보고 혀를 내두르곤 하셨다.
가을에 추울 때, 나이트 게임 할 때, 아버님과 같이 보면서, 추워서 아버지가 보자기로 나랑 아버지 같이 다리에 덮고 관전하곤 했는데, 하루는 급우들이 이런 모습이 tv에 잡혀 봤다고 하고,
연구 주임 선생님도 몇 월 몇 일날 야구장에서 아버님과 제가 야구 보는 모습 봤다고 하셨다.
75년도에 단독 2층을 짓고, 아버님이 버신 돈을 당시,영등포나 강남이 미개발 할 때라,
성남 고등학교 앞에, 4층 짜리 건물을 사려고 하시다가,
(구매 했으면, 대대로 임대 수입으로 편하게, 아주 유복하게 살았겠죠)안 하고,
집 앞에 선남이 아버지란 분이 공동 투자 하자고 해,
우린 버신 돈 전액을 그 분은 절반 정도 투자해,(사업성, 수익성은 실제 있었음),
그러나, 3공에 군사 집권 후 정치 자금이 필요해 기업 등등으로부터 강제 차출이 있었죠,
삼성등 전부 강제 납부,
나는 새도 떨어 뜨린 다는 중정 요원 들이 시행하니, 알면 서도 항의 못하고 그대로 뺏겨야 했죠.
그때 항의 했으면, 아버님은 그때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없어 져야 했겠죠.
이것이 2차 사기(돈 뺏김) 입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죽도록 고생하며, 쓰지도 않고 번 돈인데, 어머니 뿐만 아니고 우리 가족 전부의 희생과 땀이 밴 돈인데 싸그리 빼 았겨야 했죠.
아버님이 연세가 많으셔서 장사 그만두고 집에 계실 때, 어머님은 너무 억울해 선남이 아버지 사는 집 보고 오시곤 하셨고, 공장 안 하시니 버스 타도 그 이 후론 토 하시지 않으셨고.
결국 부모님 월남해 고생고생 하며 돈 버신 것, 단독 2층과 5남매 대학교육 시킨 게 전부 입니다.
아버님 보시면 법 없이도 살 분이라 하셨죠.
성실하고 정직하고, 근면 하시고, 어머님, 5남매가 다 그랬죠.
인물 훤하고, 똑똑하고, 공부 잘 하고, 주변에 부러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우리 가족의 trade mark고.
이상 우리 가족 story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