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사도행전(28) 스크랜턴 선교사(6)
정동 여학교의 첫 번 째 학생
학교는 지어 놓았지만 학생의 확보가 문제였다. 봉건적 사회 분위기 속에 지체가 번듯한 가정의 여아를 선뜻 신식 학교에 보내려는 학부형은 없었다. 차라리 과부나 고아, 가난한 집 아이들을 데려다 먹이고 입혀주면서 가르치는 방식이 더 현실에 맞았다. 이런 가운데 의외로 찾아오는 학생이 있었다.
첫 학생은 한 관리의 첩으로서 남편은 이 여인이 영어를 배워 후에 왕비의 통역이 되기를 바라고 정동 여학교에 응모하였다. 이 첫 학생은 석달 만에 그만두기는 하였지만 이화 학당은 이 첫 학생에 대한 첫 번째 영어 수업이 이루어진 이 날 즉 1886년 5월 31일을 학당의 창립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한 달 뒤에 한 소녀가 다시 찾아 왔다. 이 소녀는 가난 때문에 정동 여학교에 들어와서 양육되기를 바라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 후 어머니가 찾아와서 차라리 굶을 지언정 외국인에게 딸을 맡길 수가 없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딸을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소문도 냈다.
스크랜턴 부인은 그 학생의 어머니에게 딸을 외국으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써 주고 그 학생을 입학시켰다. 서약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미국인 야소교 선교사 스크랜턴은 조선인 박(朴)씨와 다음과 같이 계약하고 이 계약을 위반하는 때는 어떠한 벌이든지 어떠한 요구든지 받기로 함. 나는 당신의 딸 복순(福順)이를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당신의 허락이 없이는 서방(西方)은 물론 조선 안에서라도 단 십 리라도 데리고 나가지 않기를 서약함. 1886年 月 日. 스크랜튼”
복순이는 처음에는 대책 없는 학생이었으나 1년 만에 통역을 돕는 유능한 학생으로 육성되었다.
또 한사람의 초창기 학생은 고아 출신의 12세 여학생이었는데 이름은 음전이였다. 그는 미국 학생들에 비하여도 뒤지지 않는 학업 성취도를 보여 주었다.
또 한사람 간난이는 윌리엄 스크랜턴 박사가 병원 건물을 짓고 처음 받아들인 환자의 딸이었다.
편액(扁額)이 내려지다
이렇게 해서 정동 여학교의 수업이 시작되었고 1887년 학생이 7명으로 늘어났을 때, 고종황제는 스크랜튼 부인의 노고(勞苦)를 알고 친히 ‘이화학당(梨花學堂: 배꽃 배움집)’이라는 교명을 지어주고 외무독판(外務督辦) 김윤식(金允植)을 통해 편액(扁額)을 보내와 그 앞날을 격려했다.
당초에 스크랜턴 부인은 교명(校名)을 전신학교(專信學校, Entire Trust School)라 지으려 했으나, 고종황제의 은총에 화답하는 마음으로 ‘이화’로 택하였다. 당시에 황실을 상징하는 꽃이 순결한 배꽃[梨花]이었는데, 이는 여성의 순결성과 명랑성을 상징하는 매우 적합한 교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