菡萏香連十頃陂, 小姑貪戲采蓮遲.
맑은 연꽃(菡萏)향기 드넓은 연못(陂)에 가득한데
소녀는 노는데 정신이 팔려 연꽃따는 일은 더디기만 하네.
晩來弄水船頭濕, 更脫紅裙裹鴨兒.
날이 저물도록 물장난하느라 뱃전까지 흠뻑 젖었으니
붉은 치마 갈아입고 오리(鴨兒)잡으러 가야지.
당나라때 시인 황보송(皇甫松)의 칠언절구 <채련자(采蓮子)> 첫번째 수입니다.
『천룡팔부』에서 구마지(鳩摩智)가 단예를 납치해서 쑤저우(蘇州)에 도착하고 나서 모용씨의 연자오(燕子塢) 참합장(參合莊)를 찾아나설 때 아벽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오면서 부르는 노래죠. 아벽은 조연급으로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지는 캐릭터죠. 드라마에서도 왕어언, 아주, 아자로 출연하는 연기자들의 미모(?)에 가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詩를 읊으며 등장한다고 생각하면 꽤 깜찍발랄 귀여운 소녀인 것 같군요.ㅎㅎ 황보송은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는데, 한유(韓愈)의 제자로 그의 묘지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한 황보식(皇甫湜 777~835)의 아들이고, 우이당쟁(牛李黨爭)에서 우파(牛派)의 영수였던 우승유(牛僧孺 779~847)가 외삼촌이었다는군요. 이 <채련자(采蓮子)> 첫번째 수 못지않게 두번째 수도 많이 알려진 작품이죠.
采蓮子 其二
舡動湖光灩灩秋, 작은배 저어 나가니 일렁이는 물빛에도 가을은 완연한데,
貪看年少信舡流. 넋을 놓고 소년을 바라보고 있으니 배는 물결따라 흘러간다.
無端隔水抛蓮子, 괜히 뱃전 너머로 연밥(蓮子)을 던져놓고는
遙被人知半日羞. 멀리 남들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을 부끄러워하네.
採蓮曲
秋淨長湖碧玉流, 가을은 너른 호수를 맑게하니 옥돌같이 푸른 물결 흐르네.
荷花深處繫蘭舟. 연꽃(荷花)피어 깊은 곳에 목련(木蓮 木蘭)으로 만든 배를 매어두었네.
逢郞隔水投蓮子, 님이 보여 넌즛이 물건너로 연밥을 던졌는데
或被人知半日羞. 혹시 남이 보지는 않았을까 반나절을 부끄러워했네.
<채련곡(採蓮曲)>은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姫 1563~1589)의 작품입니다.
허난설헌은 허균(許筠)의 누이로 박복한 그녀의 인생이 재능을 압도해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조선시대 여류시인이죠. 그녀 사후에 허균이 정리한 그녀의 작품들이 중국에서 출간되면서 시쳇말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고, 중국뿐아니라, 일본에서도 널리 읽혔다죠. 그런데, 황보송의 <채련자(采蓮子)>두번째 수의 3,4구와 허난설헌의 <채련곡(採蓮曲)>이 비슷한 것 같군요. 허난설헌의 작품에 표절혐의가 있다는군요. 진회팔염의 한 사람인 유여시(柳如是)가 허난설헌의 작품이 중국시인들의 작품과 흡사하다고 지적한 적이 있고, 이수광(李晬光)의『지봉유설(芝峯類說)』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표절이 문제되었던 모양이더군요. 물론 허균이 표절하여 그녀의 시집에 실었다는 설도 있다는데, 아무튼 살아서는 불우했고 재능을 펼치지도 못한 허난설헌이 죽어서 표절혐의까지 받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0-;;
二社良辰, 千秋庭院.
토지신(社神)에 봄제사(春社)지내는 좋은 날 (二社=春社, 秋社)
뜰에서는 그네(秋千)를 타네.
翩翩又見新來燕.
가볍게 날으는 모습에 다시보니 새로 온 제비로구나.
鳳凰巢穩許爲鄰, 潚湘煙暝來何晩.
봉황은 이웃을 위해 둥지마저 순순히 허락하는데
소강(潚江)과 상수(湘水)의 안개와 구름(煙暝)으로부터 날아옴이 이렇게 늦는가.
亂入紅樓, 低飛綠岸. 畵梁時拂歌塵散.
제비는 붉은 누각으로 날아들어 깃들거나, 푸른 언덕으로 낮게 날아가네.
화려한 대들보(畵梁)위에서도 노래를 불러 먼지를 털어내는구나.
爲誰歸去爲誰來? 主人恩重珠簾卷.
누구를 위해 돌아가며, 누구를 위해 찾아오는가
주인의 은혜 무거우니 주렴(珠簾)을 걷어 올리네.
진요좌(陳堯佐 963~1044)의 사(詞) <답사행(踏莎行) - 연사(燕詞)>입니다.
단예일행이 아벽의 배를 타고 연자오(燕子塢) 참합장(參合莊)으로 향할 때, 단예가 '모용씨가 거처하는 곳이 연자오라고 했으니 아마 제비가 많을 것'(慕容氏所在之處叫做燕子塢, 想必燕子很多了)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벽이 이 사(詞)를 읊지요.^^ 연자오(燕子塢)라면 제비마을이겠죠. 장쑤성 쑤저우에서 서쪽으로 30리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실재하는 마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쑤저우 서쪽에는 광활한 태호(太湖)가 위치하고 있으니 왕부인의 만타산장(曼陀山莊)도 그 부근에 있겠죠.^^
모용박(慕容博), 모용복(慕容復). 모용씨는 선비족(鮮卑族)이죠. 선비족은 몽골동쪽과 만주일대에 분포하던 유목민족이었다는데, 그 중 모용씨는 선비족의 6부족중의 하나로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朝陽)일대에 터전을 잡고있다가 서진(西晉)이 몰락하는 시기부터 중국내에 세력을 형성하여 5호16국시대(五胡十六國 304~439)에 연(燕)을 국호로 하는 나라를 여럿 세웁니다. 모용황(慕容皝)이 전연(前燕 337~370)을 건국하고, 모용황의 아들 모용수(慕容垂)가 후연(後燕 383~407)을, 모용황의 손자 모용홍(慕容泓)이 서연(西燕 384~394), 모용황의 아들 모용덕(慕容德)이 남연(南燕 398~410)을 세웁니다. 그리고 모용황의 숙부인 모용토욕혼(慕容吐谷渾)이 칭하이성, 깐수성일대에 건국한 토욕혼(吐谷渾 283~663)이 있고, 후연이 망하고나서 고운(高雲)을 추대해서 세운 북연(北燕 407~436)도 있는데, 고운은 고구려 왕족출신이라죠.^^ 모용복이 소봉에게 패하고 자결하려고 할 때, 잿빛승복을 입은 스님(灰衣僧) 모용박이 나타나 모용씨 조상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너의 조상들은 모두 아들을 두었는데, 너는 아들도 두지못하고 죽을 거냐고 다그치죠. 모용각(慕容恪 ?~366), 모용수(慕容垂 326~396), 모용덕(慕容德 336~405)은 모두 모용황(慕容皝 297~348)의 아들들입니다.^^
395년 모용수(慕容垂)의 후연(後燕)은 역시 선비족인 척발씨(拓跋氏)부족이 세운 북위(北魏 386~534)와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양가오(陽高)인근 참합피(参合陂)에서 일전을 벌이는데, 이 전투의 패배로 모용씨의 후연은 쇠퇴하고, 척발씨의 북위가 중국의 북부를 지배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4세기 요동의 지배권을 확보한 모용씨세력은 고구려와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모용황의 부친 모용외(慕容廆)는 285년 부여(扶餘)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부여왕 의려(依慮)를 자살하게 만들었고,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 331~371)때인 342년에는 전연의 모용황에게 미천왕(美川王)의 시신이 탈취당하기까지 하죠.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91~413)이 후연의 모용희(慕容熙)의 침입을 격퇴하고 후연정벌에 나서기까지 고구려는 수없는 모용씨의 침입을 받는데, 후연이 참합피에서 패하여 망하면서 고구려가 요동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겠죠.『천룡팔부』의 모용씨들이 연자오(燕子塢)에 참합장(參合莊)를 세운 것이나 모용씨의 가전무공 참합지(參合指)에서의 '參合'은 연(燕)의 후예로서 그 참합피(参合陂)의 패배를 잊지말자는 의미인 것 같군요. 그리고 모용복의 두전성이(斗轉星移)는 모용룡성(慕容龍城)이 창안하여 모용씨가문 대대로 전해오는 무공이죠. 그 모용룡성이 실존인물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름이 '龍城'이죠. 모용씨들은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朝陽)에 근거를 두었고, 전연과 북연은 이곳에 도읍을 정하거나 적어도 중요한 거점으로 여기며 전연, 후연, 북연의 소위 '三燕'의 문화를 꽃피웁니다. 이 삼연고도(三燕古都) 차오양(朝陽)의 옛이름이 용성(龍城)이었다는군요. 그러니까 모용룡성은 모용씨(慕容)들의 근거였던 용성(龍城)이라는 지명에서 차용한거죠. 아무튼 김용선생의 작명은 참 독특합니다.ㅎㅎ
그 참합피전투에서 승리한 북위(北魏)는 439년에는 강북을 통일해서 5호16국시대(五胡十六國)를 종식하고 남북조시대(南北朝 420~589)을 엽니다. 물론 그후 북위는 동위(東魏), 서위(西魏)로 분열하고, 다시 동위는 북제(北齊)로, 서위는 북주(北周)가 되는데, 양견(楊堅)이 북주의 권력을 찬탈하여 수(隋 581~618)를 건국하여 남북조시대를 종식하면서 세번째로 천하통일을 이루죠. 양견도 순수 한족이라기보다 선비족과의 혼혈인 듯하고, 황후인 독고가라(獨孤伽羅 543~602)의 독고(獨孤)도 선비족의 성씨죠. 양견은 후궁을 들이지않은 유일한 황제였으며, 독고가라는 첩을 들인 대신들을 실각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죠.ㅎㅎ 독고가라의 부친인 독고신(獨孤信)은 7번째 딸 독고가라를 양견에 시집보내 황후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장녀는 북주의 명제(明帝) 우문육(宇文毓)에게, 넷째딸은 이병(李昞)에게 시집보내는데, 이병의 아들이 당(唐 618~907)을 건국한 이연(李淵)이죠. 그러니까 이연과 수 양제(煬帝) 양광(楊廣)은 이종사촌간이 되는거죠. 이연의 가문도 한족이라 하기는 어렵다니까 소위 수(隋)와 당(唐)의 왕실가문은 선비족과는 뗄 수 없는 관계였겠습니다. 612년, 613년의 수 양제의 고구려침입당시 지휘를 맡았던 우문술(宇文述)이나 그의 아들로 수 양제 양광의 목을 졸라 숨지게한 우문화급(宇文化及)같은 우문씨(宇文氏)도 선비족 부족이며, 612년 살수대첩(薩水大捷)을 이룬 을지문덕(乙支文德)도 고구려로 귀화한 선비족이라는 설이 있다면서요.『신조협려』에 언급되는 최고수 독고구패(獨孤求敗)도 선비족이겠지요. 그럼 독고탁도...ㅋㅋ 아무튼 그 참합피의 패전으로부터 거의 천년가까이 지났어도 대연(大燕)제국을 복국하겠다고 다짐하는 모용복을 보면 역사의 주역이 되지못한 모용씨의 슬픔(?)이 이해될 것도 같은데, 이문열의 소설『황제를 위하여』의 주인공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수는 없네요.ㅎㅎ
아벽이 위의 <답사행(踏莎行)>을 단예일행 앞에서 읊는다고 생각하면, 모용복은 봉황이라서 제비들이 얼마든지 찾아와도 환대하는 주인이며, 구마지나 단예는 제비에 불과하다는 뉘앙스로 읽히기도 하죠.ㅎㅎ 진요좌(陳堯佐 963~1044)는 <답사행(踏莎行)>을 통해 여이간(呂夷簡 978~1043)이 재상으로 천거해준 은혜에 감사하며, 여이간이 은퇴한 것은 재능있는 후배들에게 길을 터준 것이라며 예찬하고 있는 것이죠. 여이간은 송(宋) 인종(仁宗 1022~1063)때 권력의 핵심에 있으면서 범중엄(范仲淹 989~1052)과 소위 '경력당의(慶曆黨議)'라는 10년간의 당쟁을 벌인 인물입니다. 경력(慶曆)은 송(宋) 인종이 1041년부터 1048년까지 사용한 년호죠. 1033년 곽황후(郭皇后)가 후궁을 질투하다 인종에게 손찌검을 하여 목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으로 황후를 폐비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여이간의 적극 폐립주장에 인종이 동조하는 분위기였는데, 범중엄이 이에 반대하다가 좌천당하죠. 이로부터 범중엄을 옹호하는 구양수(歐陽修), 한기(韓琦)등과 여이간일파간의 당쟁(慶曆黨議)이 10년간 지속됩니다. 1043년 여이간이 신병을 이유로 은퇴하고 사망하자, 범중엄은 중용되어 소위 '경력신정(慶曆新政 慶曆之治)'로 불리는 개혁정치를 의욕적으로 추진하는데, 물론 좌초되긴 하지만 후일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이 추진하는 개혁의 토대가 됩니다. 아무튼 김용선생이 여이간을 찬양하는 이 작품을 구태여 인용한 것은 모용복을 마지막까지 주인으로 모시는 아벽의 맹목적인 충성심을 엿보일 생각이 아니었나 싶군요.
波渺渺, 柳依依.
안개를 드리운 수면은 그지없이 아득하고
물가의 버들은 치렁치렁 늘어졌네.
孤村芳草遠, 斜日杏花飛.
외딴 마을에도 향기로운 풀은 끝없이 무성한데,
해는 지고 살구꽃(杏花) 흩날리네.
江南春盡離腸遠,
강남의 봄이 다하고나면 애간장 끊일듯 한데,
蘋滿汀洲人未歸.
물풀(蘋) 가득해도 모래섬(汀洲)의 그 사람은 아직 돌아오지 않네.
구준(寇準 961~1023)의 사(詞) <강남춘(江南春)>입니다.
이 사(詞)는 아벽이 읊은 것은 아니고, 단예가 구마지에 납치되어 장쑤성 쑤저우(蘇州)에 도착했을 때 봄날의 풍광에 도취되어 읊지요. 해석을 제대로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강남의 그림같은 의경(意境)이 멋지게 표현된 것 같습니다. 쑤저우는 오자서가 건설했다고 하고 서시의 안타까운 설화들이 전해지는 오(吳)나라의 도읍(姑蘇)으로 서쪽으로는 태호(太湖)를 끼고있으며 양쯔강 삼각주에 위치하고 있어서 운하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물의 도시죠. 원림(園林)문화도 발달해서 명말에 조성되어 중국의 조경문화를 대표하는 졸정원(拙政園)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는 말은 워낙 유명하죠.『녹정기(鹿鼎記)』에서도 마초흥(馬超興)이 유주(柳州)의 기원(妓院)에서 오륙기(吳六奇)를 접대하면서 이자성의 행적을 전해듣는 대목에서 '住在蘇州, 著在杭州, 吃在廣州, 死在柳州.(쑤저우에 살면서, 항저우에서 입고, 광저우에서 먹으며, 류저우에서 죽는다)'라는 속담이 언급됩니다. 그만큼 온화한 기후와 수려한 자연풍광으로 예로부터 인간이 살아가기 좋은 환경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중국 강남미녀들의 대부분은 쑤저우출신이라 할만큼 미인들이 많은 지방이죠. 연기자와 가수로 활동하는 한쉬에(韩雪 1983) 그리고 1984년판 드라마<신조협려>에서 최고령 소용녀를 연기했고 여전히 나이와는 상관없는 듯한 미모를 자랑하는 판잉즈(潘迎紫 1945)도 쑤저우출신이라죠.^^
『천룡팔부』의 말미인 1093년, 선인태후(宣仁太后 1032~1093)는 요(遼)와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냐며 진종(眞宗)도 친히 원정을 나가서 겨우 전주지맹(澶州之盟)을 맺을 수 있었다(當年真宗皇帝如此英武, 御駕親征, 才結成澶州之盟)며 손자인 철종(哲宗 1085~1100) 조후(趙煦)를 꾸짖는 대목에서 1004년 북송과 요가 맺은 전연지맹(澶淵之盟 澶州之盟)이 언급되죠. 5대10국시대 후당(後唐)의 석경당(石敬瑭 892~942)은 936년 반란을 일으키고 후진(後晉 936~947)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요(遼)에 원군을 청하고 그 댓가로 지금의 베이징과 따퉁등 산시, 허베이성일대의 유운십육주(幽(燕)雲十六州)를 넘겨주는 바람에 두고두고 반역자(漢奸)로 욕을 먹는 인물이죠. 북송은 이 유운십육주의 수복을 위해 여러차례 북벌을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하여 요(遼 907~1125)와는 지속적인 갈등과 긴장상태를 유지합니다. 북송의 986년 북벌에는 북한(北漢)이 망하고 북송으로 귀순한, 민간전설에서는 양가장(楊家將)으로 알려진 양업(楊業 ?~986)도 참가하죠. 그러던 1004년, 소태후(蕭太后 蕭綽 953~1009)가 성종(聖宗 983~1031) 야율융서(耶律隆緖)의 섭정이던 시기에 강성해진 요(遼)는 북송을 전격적으로 침공합니다.
'부인을 구하는데 좋은 중매가 없음을 한탄하지마라. 책 속에는 저절로 옥같은 미인이 있다'(娶妻莫恨無良媒, 書中自有顔如玉)며 결혼도 하지말고 공부만하라고 권하는 것 같은 <권학문(勸學文)>이 있죠.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부인의 얼굴(or 남편의 직업)이 바뀐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소태후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는 가운데, 당시 이 <권학문>의 저자 진종(眞宗 997~1022) 조항(趙恒)이 집권하고 있던 북송의 조정은 전의를 상실하고 어디로 수도를 이전할 지를 고민하는 분위기였답니다.ㅎㅎ 이런 상황에서 구준(寇準 961~1023)이 나서서 항전을 독려하고 진종을 끌어오다시피 출정시켜서 겨우 군대의 사기를 진작해서 전주(澶州 澶淵) 지금의 허난성 푸양(濮陽)에서 대치하며 요(遼)와 강화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전연지맹(澶淵之盟)에서 체결한 내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북송은 매년 은(銀) 10만냥과 비단 20만필을 세폐(歲幣)로 보내고, 요와 북송은 야율융서가 형, 조항이 동생이 되는 형제국이 되며 진종은 소태후를 숙모로 칭하게 하고, 양국의 국경을 유지한다는 겁니다. 이 조약으로 유운십팔주는 합법적으로 요(遼)에 귀속이 되었지만 북송은 수십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고, 거란족을 문화적으로 동화시키는 등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명분론의 입장에는 이 조약에 대한 비판이 많죠. 재미있는 것은 전연지맹을 지난 정권때의 햇볕정책과 비교하는 시각도 있더군요.ㅎㅎ 역사적 평가는 역사교과서 집필자가 정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여걸 소태후 소작(蕭綽)은 남원대왕(南院大王) 소봉(蕭峰)과 같은 집안이 아닐까싶군요.^^ 소봉의 의형제 도종(道宗 1032~1101) 야율홍기(耶律洪基)는 성종 야율융서의 손자죠.『천룡팔부』에도 나오는 것처럼 1063년 야율융서의 아들 야율중원(耶律重元)이 반란(灤河之亂)을 일으키기도 하고, 아율홍기때부터 국운이 기울어 아들 아율연희(耶律延禧)에 이르러 1125년 금(金)의 침공을 받고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917년에 건국한 요(遼)는 218년만에 막을 내립니다.
나는 청산을 바라보면 너무나 사랑스럽네.
청산을 헤아리면, 나를 보더라도 역시 그렇지 않겠어.
신기질(辛棄疾)의 <하신랑(賀新郞 - 甚矣吾衰矣)>중에서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