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장
아마 살아오면서 이보다 바쁜 날이 없었을 것이다.
삼 일.
신방을 치른 날짜를 말한다. 신부가 셋이나 되다보니 삼 일에 걸쳐서 합방을 해야 했고, 신부들 또한 처음도 아니었기에 힘든 사람은 백산밖에 없었다.
눈 아래가 검게 변하여 피곤한 표정이 역력함에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혼례란 이래서 좋은 것인지,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몸뚱이지만 안았을 때의 느낌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소속감. 더욱더 잘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솟아나면서 그녀들을 대하는 손길도 한층 더 정성스러웠다.
그러나 그러한 즐거움도 잠시 마을에 나타난 한 방문자로 인하여 광풍대원 전원이 긴장감에 빠져들었다.
금령이었다.
석숭과 함께 흑막 살수를 치러갔던 금령 중의 한 명이 거의 피투성이가 되어 홍안리에 나타난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의 상처는 심했다. 복부가 쩍 갈라져 그곳으로부터 내장이 삐져나오고 있음에도 손으로 막고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영감, 어서!"
백산이 다급한 목소리로 갈태독을 채근했다. 빨리 치료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으나 갈태독은 조용히 금령을 지켜보기만 했다.
"할 말을 하게."
이미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시기가 지났던 터였다. 웬만하면 손을 써보기라도 하겠지만 대라신선이 와도 방법이 없는 상황이기에 마지막 유언이나 들어주고자 하였다.
"금의위가 포위되었습니다. 영반을 포함해서요. 도와주십시오."
이어지는 금령의 말에 일행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흑막의 살수를 쫓아간 금의위가 오백이었다. 무림인으로 치자면 일류 고수 소리를 들을 정도의 수준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절반 이상이 당했다는 말이었다. 금령이 떠나올 때 당한 숫자가 그 정도였다는데 지금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지금 어디에 있나?"
정신을 잃어가는 금령의 몸에 진기를 불어넣으며 갈태독이 소리를 질렀다. 도와 달라는 말만 했지 그들이 있는 장소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팔달령…… 도와주……."
팔달령이란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금령이 고개를 떨궜다.
죽음이었다. 평생을 석숭의 그림자가 되어 움직이던 그가 결국 주인의 옆에서 죽지 못하고 그들의 위험만 전하고 숨을 거두었다.
"팔달령이면 북경 외곽에 있는 곳 말이오?"
북경에서 북쪽으로 이백 리 정도 떨어진 장성이 있는 곳을 말한다.
주변 산세가 험하고 팔달령을 거쳐 거용관을 지나면 바로 북경에 진입하게 되는 전략적 요충지로 북경의 북문이라고도 불린다.
그곳에 석숭을 비롯한 금의위 잔여 인원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갈태독이 난처한 얼굴로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가장 빠른 시간에 그곳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백산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가봐야 시간 안에 도착할지도 의문이지만 설사 도착한다 해도 살수들이다. 특히 오대흑객이란 자들은 백산도 간신히 감지해낸 초극의 고수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백산은 이제 혼례를 치른 지 삼 일밖에 안 된 새신랑이다. 그런 사람에게 먼 길을 떠나라 함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기에 하는 말이었다.
"도우러 가야지요. 그 양반이 무슨 목적으로 우리 일행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를 도왔던 것은 확실한 사실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 되었다는 거요."
"나하고 남궁아우랑 어르신, 이리 세 사람이 가면?"
"사부, 이미 끝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옥샌가 뭔가 하는 것도 사라질 거고요."
"옥새가 그곳에 있단 말이냐?"
남궁세우와 팽무도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천자(天子)의 상징인 옥새가 그곳에 있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현 황제는 조카로부터 황위를 찬탈한 사람이기에 더욱 문제가 컸다.
"그래도……!"
"사부, 제가 이 황실을 좋아해서 가려는 게 아니오.
석대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옥새가 아니라 황제의 목이 떨어진다 해도 안 가오. 석대인이 있기에 가는 거요. 아울러 무욕인들도."
석숭과 무욕인 세 명, 그들의 목숨이 위험하기에 가고자 하는 것이다.
어차피 나라야 잘난 놈들이 다스리는 곳이고 그들이 사는 것까지 신경 쓸 일도,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다만 광풍대원들이 힘들 때 목숨 걸고 도와준 사람이 그였기에 도우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세, 산이랑 나랑 가면 적어도 하루는 앞당길 수 있을 거네."
갈태독도 백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꼭 석숭이 아니더라도 무욕인 세 명이 있기에 더더욱 가야 한다. 그들은 냉추렴의 작은아버지가 되는 사람들이기에.
"일 끝내고 대동에서 보세나."
"백랑!"
세 여인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백산을 불렀다.
"걱정 마, 비도는 절대 사용 안 할게."
그녀들이 무얼 걱정하는지 백산도 잘 알고 있다. 또다시 변할까봐 걱정하고 있는 게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 있다. 다시는 변하지 않을 자신이….
"그래, 내가 옆에 있으니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
갈태독이 나서서 세 여인을 안심시켰다. 물론 백산 혼자 힘으로 흑막 살수를 다 제거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자신이 같이 가는 근본적인 이유가 백산이라 할 수 있다.
자칫 흥분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백산이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하기 위해 같이 간다고 볼 수 있다.
"다녀올게요. 소령아! 며칠 있다가 보자…….!"
"까르르!"
백산이 무등을 태워주자 소령의 입에서 신비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완전히 백산을 아버지로 인식하기 시작했는지 그가 안아주면 보통 때 보이지 않던 행동을 보이곤 하였다.
"어? 이제는 정말 나를 알아보는 모양이네?"
백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커가는 딸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하게 자신을 알아보리라.
조천영에게 소령을 넘겨준 백산이 갈태독과 함께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며칠 여행을 다녀올 것처럼 인사를 하고 떠나는 길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던 두 사람의 몸이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별일이 없어야 할 터인데……."
멀어지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팽무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뇌룡현에서 떠나보낼 때와는 기분이 또 달랐다. 불안감. 꼭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걱정 말아라. 저들 두 사람은 천하제일이다. 걱정해야 할 곳은 저들보다 우리다."
"우리가 왜?"
팽무도가 깜짝 놀라며 풍신개를 쳐다보았다. 양맹이 지금껏 전쟁을 치르면서 거의 사 할의 전력을 소모했지만 어느 쪽도 승기(勝氣)를 잡지 못하고 있다.
초리하에서만 해도 천무맹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양패구상이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섬서나 하남성에서의 결전밖에 없다. 이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것이 팽무도의 생각이었다.
"천무맹이 밀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너무 빨리 승부가 나고 있음에 대한 걱정이었다. 천천히 조금씩 서로가 망가져야 하는데,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면 자신들 일행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닌 터였다.
"천마맹이 그리 강했단 말입니까?"
남궁세우의 놀라움도 팽무도와 다를 바 없었다. 풍신개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철목승이 빠진 천무맹은 전력상 결코 천무맹보다 우위가 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해서 지금껏 일행에게 공격을 해온 그들이었다.
"천마맹이 강한 게 아니고 천무맹이 약해졌다. 화진악 때문에."
"그가 맹주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말이냐?"
풍신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지금과 같은 양상이 계속된다면 천마맹이 승리할 것이고 천마맹을 지탱하고 있는 나머지 구마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감숙성에 있는 철목승이 된다는 의미였다.
사실 풍신개가 말한 내용은 새로울 것도 없었다. 이미 요마와 비마에게 내려진 명령이 냉추렴의 생포가 아니었던가.
'전부 알 필요가 없음이야. 북경만 가면 모든 게 끝이 난다.'
그가 제삼의 세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였다.
강호의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기에 두 맹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떠나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그의 배려였다.
* * *
풍신개의 말대로 천무맹은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본진끼리의 첫 격돌에서 천무맹의 패배가 그것이었다.
비록 화산과 종남파의 멸망과 산서성에서의 산발적인 전투로 인하여 많은 병력을 잃기는 했지만
섬서, 호북 분타가 남아 있고 구대문파 중 사천의 삼개파를 합치면 아직도 만여 명의 병력이다.
소림, 개방에 이어 무당이라는 거대문파가 불참을 선언했다 하더라도 천마맹의 전력보다 약하다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무당파 영풍진인이 부맹주직을 내놓고 떠났기에 맹주인 화진악에게 더 많은 권력이 집중되어 과거보다 원활한 지위체계를 이루었다. 그런데 왜 이 지경까지 왔는지.
바로 화진악의 독단 때문이었다.
제갈수연이 사천의 삼개파로 하여금 섬서에 있는 패천마궁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음에도 화진악은 고개를 저었다.
제마각의 죽음을 묵인한 군사의 말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제마각의 패배 원인을 밀천각에서 정보를 주지 않은 탓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결국 화진악의 생각대로 천무맹의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일대는 북쪽의 왕굴산(王屈山)을 통해서 태행산맥 남부로 진격해나갔고,
다른 일대는 서쪽 낙하(落河)를 거쳐 복우산맥(伏牛山脈)을 향해, 마지막 일대는 남쪽의 석인산을 통해 대별산맥(大別山脈)으로 적을 맞이하러 나갔다.
그러나 맹으로 날아오는 전서구에 승전보가 없었다. 세 곳에서 공히 퇴각하고 있다는 소식만 전해왔을 뿐이었다.
"이건 사기(士氣) 때문이야, 병신 같은 놈!"
제갈수연이 얼굴을 붉힌 채 고함을 내질렀다.
갑자기 모든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원래 자신의 의도대로라면 지금쯤 화진악은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있어서 스스로 맹주직을 내놓아야 했는데
무당의 불참이 오히려 그의 지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고 말았다.
더구나 이젠 거의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 오직 그의 생각으로 전쟁을 수행하려는 것이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천마맹의 선두에서 병력을 지휘하는 자들은 전설의 구마(九魔)들이다.
그 전설적인 인물들이 병력을 이끌고 있는데 천무맹에서는 각주급도 안 되는 자들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갔다.
애초에 전투 자체가 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수천 명이 집단으로 싸우는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던가. 개인의 실력보다 사기가 우선한다.
자신들이 우러러보는 인물이 앞에서 고함을 지르며 능동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자들과,
먼 곳에서 내려온 지시를 받고 전쟁에 임하는 자들 중 어느 쪽이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천무맹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화진악과 삼파의 수뇌들은 자신들이 패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표정이다. 아직도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다 결정적인 순간에 제마각의 만행을 밝히는 거야."
그녀도 용문산 근처에서 발생한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다. 화진악을 끌어내릴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음에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로 볼 때 자신의 말이 먹힐 상황이 아니었던 터였다. 맹의 수뇌들이 가뜩이나 자신을 불신하고 있는데, 오히려 맹주를 모함한다는 말만 듣게 될 것이다.
기다리려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산서성 전체에 소문이 나고 강호무림이 알게 될 그 시기를.
"흉수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분명 예사인물은 아니다."
세 개의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킨 자들은 제마각 무사들이 아니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럼 결론은 한 가지밖에 없다. 모산파를 멸망시켰던 자들, 결코 숨어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백무천의 소식에 의해 더욱 확실해졌다. 제삼의 세력의 수뇌는 결코 은거기인이 아니다.
강호무림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인물, 그런 자이기에 밀천각의 이목에 지금껏 노출되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이제 나타날 때가 되었다. 누가 되었든지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을 것이기에.
"묵안혈마(墨眼血魔), 이놈!"
또다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제갈수연에게서 분노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조부의 제갈장령과 무천각 병력 칠할 사망, 그리고 백무천의 부상, 초리하에서의 전쟁 결과였다.
초리하의 승리는 그녀가 가장 확신하는 바였다. 또한 비상(飛上)을 위해 가장 필요한 승리이기도 했고.
그녀의 예상대로 천마맹 병력을 없애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금껏 미끼로만 생각하고 있던 일행에게 뒤통수를 맞아버렸다.
그녀를 가장 곤경에 빠트린 사건이었다.
그곳에서 백무천이 당당하게 개선했더라면 지금쯤 맹주를 끌어내리는 작업을 하고 있을 터인데, 밀천각에서 백무천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모든 게 묵안혈마 그놈 때문이다. 제갈세가의 모든 미래를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놈.
"반드시 복수를 해준다. 내 모든 것을 걸고 가장 잔인하게 복수를 해준단 말이다."
제갈수연의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줄기줄기 쏟아져나왔다.
결코 조부를 해쳤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없앨 수 있다고 믿었던 하찮은 자들에게 당했다는 굴욕감 때문이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했던가.
백산은 자신이 그렇게도 원하던 별호 바꾸기에 성공했지만 동시에 한 여인의 저주를 받고 있었다. 그것도 이 시대 최고의 머리라는 여인에게…….
"각주님! 백 공자께서 찾으십니다."
"뭐라고? 이곳으로 오지 않고……."
백 공자란 말에 환하게 미소를 짓던 제갈수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시비를 쳐다보았다.
지금 백무천이 갈 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자신의 거처로 가장 먼저 와야 하는데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어디라 하더냐?"
"장생원이라 하였습니다."
"장생원?"
더욱 놀라운 말이었다. 장생원이면 천무맹이나 세상에서 잊혀진 장소이고 금역으로 지정된 지 오십 년이 넘은 곳이다.
같은 천무맹 내에 있지만 이제는 찾는 사람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곳이 바로 그곳인 게다.
"그렇군……. 그들이었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제갈수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사실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얼굴이었다.
"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벌써 백오십이 넘은 사람이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둘 나이가 절대 아닌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제삼 세력의 수뇌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가보면 알겠지.'
"진식(陣式)?"
장생원으로 가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조그마한 야산에 도착한 제갈수연이 놀라운 표정으로 전면을 주시했다.
평범한 야산으로 보이는 곳에 구축되어 있는 진식 때문이었다.
제갈세가에 있는 모든 진식을 공부했고 세상에 그녀가 모르는 진이 없을 거라 여겼는데 바로 앞에 있는 진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또한 주변에 나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뚫고 오라 이건가?"
자신 앞에 펼쳐진 진을 쳐다보던 제갈수연의 얼굴이 한순간 승부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무공면에 있어서는 타인들에게 양보한다지만 진식이나 머리를 이용하는 쪽에서는 강호무림의 누구에게도 져서는 안 된다.
제갈세가의 유일한 자존심이다. 그것마저도 없다면 세가의 존재 의미가 사라진다.
야산 앞에 가부좌를 한 제갈수연이 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수많은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고, 재배치와 조합을 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해답은 없었다.
한 시진이 지나고 두 시진이 지나, 해가 서편으로 기울어가고 있지만 야산 앞에 박힌 듯 제갈수연의 몸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나 몸만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뿐, 그녀의 마음속은 놀라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진이었던 것이다. 진임에는 분명한데 어떠한 허점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진이 눈앞에 존재했다.
"저럴 수가……."
모든 심력이 고갈되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진(陣)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어둠이 내려앉자 야산 내부가 원래보다 조금 더 밝아졌던 것이다. 지금껏 계속 관찰하고 있었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변화였다.
"역천무한귀역진(逆天無限歸逆陣)이란 말인가!"
가문에서도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최고의 절진, 제갈세가에서조차 손대지 못한다는 절대의 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진을 구축하는 매개체가 자연이라 하였다.
죽어 있는 진이 아닌 살아서 움직이는 진이라 하였다. 시간의 변화와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진이 역천무한귀역진이다.
"무슨 속셈인가. 사람을 불러놓고 시험하자는 건가?"
속셈을 알 수 없었다. 분명 백무천이 찾는다 하였는데 그 사람은 오지 않고 천고의 절진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결국 뚫고 오라는 말인 것이다.
"감히 진으로 제갈세가와 견주어보자는 것이더냐?"
장생원에서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찾고 있는지 그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다. 감히 진으로 제갈세가를 시험코자 하는 자의 저의가 더 괘씸했다. 제갈수연의 몸에서 당찬 기백이 흘러나왔다.
이십 대의 나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제갈세가의 현 가주로서 오연한 기도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다는 제갈세가의 자존심이었다.
"좋다! 내가 간다."
장생원에 대한 일은 잊기로 했다. 일단 앞에 있는 진을 파훼하고 당당하게 물어야 한다. 비록 천무맹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지만 천하제일세가 중 한 곳이었다.
휘이잉!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디서인지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지금껏 야산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나무며 바위 등 모든 사물들이 사라지며 새로운 광경이 나타났다.
수십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 계곡과 그 건물 속 한 방에서 열심히 책장을 넘기고 있는 소녀. 그녀의 모습이 상당히 눈에 익었으나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소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제갈수연이 온몸을 격렬하게 떨며 멈춰 섰다.
비가 오고,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오고, 새싹이 돋고, 계절의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그 소녀를 무등 태워주며 즐거워하고 있는 중년인의 모습 때문이었다.
"아버……."
제갈수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이야기였다. 어디서 많이 보았다 생각한 책장을 넘기던 소녀, 과거의 그녀였다.
그리고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제갈수연이 거칠게 고개를 흔들며 멈춰 섰다.
"이곳은 진이다. 진일 뿐이라고. 저 따위 과거의 환상으로 나를 유인할 수 있다고 보았더냐?"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과거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앞만 보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아버지와의 추억,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오직 최고가 되기 위해, 만인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올라서야 한다는 꿈에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나는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 나타나는 그녀의 모습은 조부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태연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모습과, 부상당한 백무천을 초연하게 쳐다보는 모습이었다.
거의 현실에 가까운 모습이었기에 비교적 생생하게 다가오는 장면이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거야, 살다보면 다칠 수도 있고!"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냉혈한이란 소리를 누르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그래, 바로 저 모습이야. 저것 때문에 살아가는 거라고."
환한 표정으로 변한 제갈수연이 이번에는 기쁨에 찬 외침을 토해냈다.
화려한 금의와 번쩍이는 금관을 쓴 여인의 모습,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지시를 내리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진식이 만들어낸 환상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진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곳에서 나타나는 환영에 울고 웃었다.
자신이 부하들을 죽이는 장면에 이어 백무천마저도 제거하는 환상이 나타났다 사라져도, 그녀의 눈동자는 금관을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만 좇고 있었다.
"이게 끝이야? 이게 끝이냐고!"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쳐다보던 제갈수연이 발악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전면에 나타난 환상.
아직껏 화려한 금의에 금관을 쓰고 있지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단지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의 뒤쪽으로 쇠락해가는 제갈세가만 투영되고 있을 뿐이었다.
가문을 희생시키고, 사랑하는 사람을 제거하여 얻은 최고의 자리에 자신 혼자밖에 없었던 거였다.
"아냐! 저건 나의 끝이 아니라고. 저런 것을 원하지 않았단 말이야……."
결국 오열을 터트리며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저 앞에 나타난 환상이 사실이라면 너무 허무한 종말이 아닌가.
저런 미래를 위해 지금껏 살아왔다는 말인 게다.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세상을 위해.
"아니야, 저건 현실이 아니라고. 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약한 정의 소산일 뿐이야. 저것마저도 끊어야 해, 그래야만 더 큰 영광이 있는 거야."
제갈수연의 말이 맞았다. 지금껏 그녀가 보았던 장면은 마음속에 숨어 있던 자신의 마음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역천무한귀역진의 무서운 점이었다. 자신의 마음속을 관조하게 하여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만들어버리는 진, 인간의 심성을 버렸을 때 비로소 극복할 수 있는 진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제갈장령에게 말했던 철혈(鐵血)의 피였다. 철혈의 피란 타인에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가족에게도, 심지어는 가장 가까운 남편도 야망을 위해선 버려야 함이다.
"나는 끝을 볼 거야, 저 위 가장 높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만다고."
무서운 집념이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는 부정하고 있음에도 이성으로 그것을 내리누르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것이었다.
야산에서 나온 제갈수연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강렬한 아침 햇살이었다. 얼마 안 되는 숲에서 하룻밤을 꼬박 세웠던 것이다.
자신이 걸어 나왔던 숲을 쳐다본 제갈수연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성취감이었다. 제갈세가에 대항하는 자에게 이겼다는 만족감.
조그마한 진식에 이겼어도 이런 성취감이 오는데 세상을 정복했을 때 오는 성취감은 얼마나 클 것인가. 상상만 해도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어서 오너라. 진을 통과해낼 줄은 몰랐구나."
놀라운 눈으로 제갈수연을 맞이하고 있는 인물은 각인대사였다.
역천무한귀역진을 이리도 쉽게 통과할 줄은 그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거의 종교적인 맹신에 가까울 정도의 신념을 가진 자나, 인간의 감정이 없는 강시정도가 통과할 수 있는 진이다.
그런데 제갈수연은 통과해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환상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내고 걸어나왔다.
만일 마지막에 제갈수연이 신념으로 밀어붙이지 못했더라면 그 숲에서 심력이 고갈되어 죽었을 것이다.
"태상맹주께서도 계셨습니까?"
각인대사를 발견한 제갈수연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어렸다. 초대 맹주만 있는 곳이라 알고 있었는데 뜻밖의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아이도 왔으니 무천이를 불러오지."
'어찌 이런 일이…….'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제갈수연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초대 맹주인 검제 담운천과 소림 최고 고승인 각인대사의 관계가 마치 주종관계처럼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초대 맹주이고 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지만 소림의 최고 인물이 하인처럼 행동하다니.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상황은 다음에 일어났다.
초췌한 모습으로 각인대사를 따라 나온 백무천이 담운천을 향해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는 게 아닌가.
웃어른에 대한 존경의 표시가 아니라, 군신의 예였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니…….
"신 백무천, 천주를 뵈옵니다."
쿠웅!
제갈수연의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신 백무천이라 하였다. 자신이 신하임을 자청하는 말이었다.
모든 야망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군림천하의 야망만을 안고 살던 그가 세상을 포기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백랑……"
"인정하기 힘이 드느냐. 세상은 넓은 것이니라."
얼굴이 해쓱하게 변해 있는 제갈수연을 쳐다보며 담운천이 조용히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아마 두 사람에게 이야기할 시간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방법이 없어, 따를 수밖에……."
처연한 눈으로 제갈수연을 쳐다보던 백무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버러지 놈에게 또 패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천무맹에 돌아와서 다시 시작하고자 했었다.
제갈수연의 말대로 천하를 먼저 장악한 후로 복수를 미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갈수연을 만나기도 전에 이곳 장생원에서 또 한 번 무너지고 말았다.
검제 담운천, 초대 맹주로만 알고 있던 그가 천신가의 후예였다.
일꾼으로 쓰기 위해서 자신을 시험했다고 한다. 지금껏 모든 사건이 그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소림의 각인대사마저도 사신가의 후예였다.
금신가의 무공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더 강한 사람이 셋이나 있었다. 담운천의 말대로 세상은 넓었다.
두 손바닥으로 하늘을 움켜쥐고자 했으나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장생원에 와서 다시 깨달았다.
"그래서요. 저들의 지시에 따라 강호를 지배하자고요? 그저 꼭두각시처럼?"
더 이상 놀랄 여유도 없었다. 신의 자손들이라니, 천오백 년 전부터 이어져온 신의 가문이라 한다. 현재 그들의 세력만 하더라도 천무맹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모산파를 공격했던 제삼의 세력이 그들이었다. 거의 백 년 동안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자들이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 엄청난 말들이었다.
'지금은 숙여야 하오, 수연.'
순간 지금껏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백무천이 제갈수연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완전히 굴복한 게 아니었다. 힘이 없기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저자의 나이를 생각해보시오.'
기다림. 백무천이 생각하는 바였다. 나이가 백오십인 사람이다.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자이지만, 결코 죽음은 비켜가지 않는다.
금신가의 마지막 후예인 금장천이 그랬다. 기회를 보며 기다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얘기 끝났으면 이젠 앞으로 할 일을 알려주겠다."
다시 제갈수연이 무슨 말인가 하려 할 때 각인대사가 나타났다.
이번엔 담운천은 오지 않고 그만 홀로 나온 것이다. 주종관계에 대한 의식은 이미 끝났고 철저하게 종으로만 대하겠다는 의미였다.
"두 맹은 최소인원이 남을 때까지만 몰아치면 될 것이고, 더욱 중요한 일은 혈가와 마신가의 후예를 잡는 것임을 명심해라.
머리가 뛰어나니 좋은 방안이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에 대한 간단한 정보가 있어야 하겠지?"
잠시 동안 제갈수연을 향해 무슨 말인가 하는 듯싶더니 다시 장생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요."
멀어지는 각인대사를 제갈수연이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냐."
"나는 아직 당신들과 손잡는다 하지 않았습니다."
"수연!"
곁에 있던 백무천이 기겁을 하며 제갈수연을 불렀다. 앞에 있는 담운천이나 각인대사는 자신이 겪어봐서 이미 알고 있다.
제갈수연 정도는 마음만으로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조차 반항을 포기했던 자들이 그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향해 당신이라 하는 것도 모자라서 흥정을 하려 한다.
"갈! 감히……. 하찮은 인간 나부랭이가 조건을 달려는 것인가."
백무천의 예상대로 각인대사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흘러나왔다.
"크윽! 날 죽이면 직접 해야 할 거예요. 번거롭게 말입니다."
각인대사의 몸에서 흘러나온 죽음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제갈수연은 굴복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눈을 치뜨며 그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이미 그들에 대해서는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진을 통과하면서 느낀 것이다. 결코 스스로 나서려 하지 않는다.
본인의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일에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오직 지시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에만 성취감을 느끼고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대화 자체도 자신들이 인정하는 사람들하고만 하고 있다.
백무천의 말을 들으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자신들이 신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번거롭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제갈수연이 굴복하지 않자 각인대사의 기세가 더욱 삼엄해졌다. 정말 죽이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만 하시게, 사가주."
그때 안으로 들어갔던 담운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갈수연의 요구조건을 들어준다는 말이었다.
"좋다……. 원하는 게 무엇이더냐."
담운천의 지시에 의해 각인대사가 기세를 풀며 요구조건을 물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드러난 감정은 불만이었다. 담운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
"혈가의 후예를 잡기 전에 강호를 먼저 주셔야겠습니다."
"그거야 어려운 일이……."
"그리고 혈맹의 지휘권도 주십시오."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이번엔 어떠한 기운도 내뿜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극심한 한파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더 있습니다. 명령은 오직 남진룡을 통해서 보내주십시오. 이놈 저놈 보내지 마시고요."
"헉!"
남진룡이란 말에 각인대사의 동체가 한순간 떨림을 보였다. 설마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놈 저놈이라 하였다. 결국은 자신도 나타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닌가.
"허허! 사가주가 한 방 먹었군.
앞으로 저들 앞에 나타나면 자네는 이놈이 되는 거고, 나는 저놈이 되는 거네. 좋다, 너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마. 이제 그들을 잡을 복안을 말해보거라."
장생원 안에서 들려오는 담운천의 음성이었다. 그 또한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제갈수연이 하는 말을 단번에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천주님!"
그제야 장생원을 향해 고개를 조아린 제갈수연의 입술이 움직였다. 자신들밖에 없음에도 전음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
담운천에게 전음을 보내면서도 그녀의 눈은 계속해서 각인대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위에 있는 자로는 오직 천주인 담운천 한 명만 두겠다는 그녀의 의지 표현이었다.
"좋다, 물러가라."
제갈수연의 전음이 끝나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는 듯 축객령이 떨어졌다.
"알겠습니다."
가볍게 읍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두 사람이 얼굴을 하얗게 탈색시키며 몸을 떨었다.
그들이 있던 정자 주변에 하얗게 떠 있는 물고기들 때문이었다. 어떤 징후도 느끼지 못했는데 수백 마리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해버렸다.
경고의 의미였다. 말을 듣지 않으면 물고기처럼 된다는 경고.
"그래도 그물은 없어서 다행이군요."
혼자말로 중얼거린 제갈수연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걸음걸이로 장생원을 떠났다.
"저 아이를 계속 써야 할까요?"
"자고로 밑에 있는 자가 똑똑해야 편한 거라네."
담운천이 멀어지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하는 소리였다. 그가 보기에도 대단한 아이였다. 몇 마디의 말로 사신가의 가주인 각인대사와 동등한 위치로 올라서 버리지 않았는가.
그래서 경고의 의미로 물고기를 죽였던 것인데 그물을 운운하고 있다. 자신에게 가하는 어떤 금제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백무천보다 더 나은 아이일세."
"그럼 저 아이를……."
각인대사의 표정이 변했다. 담운천의 표정으로 보건대 제갈수연을 더 크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금제도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기에.
'양날의 칼인가…….'
담운천이 내심으로 중얼거렸다. 똑똑하다는 것은 강호를 통치하기가 쉬워진다는 말이고, 또한 자신에게도 독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일 뿐…….'
"들어가세, 당분간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
* * *
"그들도 인간일 뿐 신이 아닙니다, 백랑!"
담운천이 하찮은 인간이라 생각하는 제갈수연도 그들을 인간이라 칭하며 폄하하고 있었다.
"그러다 연매가 죽을 수도 있었소."
백무천이 놀랍다는 얼굴로 제갈수연을 쳐다보았다.
의연하게 이곳까지 왔지만 결국 각혈을 한 그녀였다. 그들 앞에서는 꿋꿋하게 참고 있었던 터였다. 자신으로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죽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지금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져 있던 자신이었는데 구원의 손길을 뻗쳐온 것이 아닌가. 그러나 덥석 잡아서는 안 된다. 지금은 달콤할지 몰라도 나중엔 분명 더 큰 희생을 요구한다.
그래서 모험을 감행했다. 그들에게 자신이 꼭 필요하다는 확신 하에 이루어낸 일이었다. 결국은 원하는 것을 얻어냈음이다.
"화진악은 어떻게 되었소."
"그는 지금 출정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다급해진 게지요."
천마맹과의 전쟁에서 계속 밀리기만 하자, 결국 그와 맹에 있는 수뇌들이 나서기로 한 것이었다. 여전히 제갈세가는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나가면 돌아오지 못합니다, 다시는……."
"당신……? 어떻게 하려고."
"노인네들을 써먹어야죠. 공연히 봉사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많은 것을 알려줄 필요가 없다. 일이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 저절로 알게 될 터이고 그때마다 조금씩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럼 버러지 놈은 어떻게 하기로 한 거요."
"백랑은 두고 보시면 됩니다. 확실한 복수를 할 테니까요. 지금껏 그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
제갈수연의 눈에서 서릿발 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역천무한귀역진을 겪은 후 심성이 변했는지 처음 조부의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분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묵안혈마와 관련 있는 자들은 한 놈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한 놈도."
제110장
제갈수연이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 동안, 묵안혈마 백산이 갈태독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여 이른 곳은 팔달령에서 삼십 리 정도 떨어진 거용관(居庸關)이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아느냐?"
거용관의 망루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올라선 후 잠시 휴식을 취하던 차에 갈태독이 백산을 향해 물었다.
거용관(居庸關).
백산은 알지 못하지만, 비도의 첫 주인이었던 혈가의 후예가 멸망시킨 진제국의 초대황제인 시황이 가장 먼저 건설했던 곳이 바로 거용관이다.
북쪽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다는 목적으로 과거 제후들이 쌓았던 수많은 성의 연결 작업을 이곳 거용관으로부터 시작했던 거였다.
그때부터 시작된 장성 건설은 하북성 산해관(山海關)에서 감숙성 가욕관까지 무려 일만 오천 리가 넘는 엄청난 길이가 되었다.
지금도 명 황실에서는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허물어진 장성의 곳곳을 보수하고 있었다.
이곳 거용관도 마찬가지였다. 상당수의 일꾼들이 돌과 흙 등을 나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엄청난 게 만 리가 넘는다고?"
백산이 놀란 얼굴을 하며 갈태독을 쳐다보았다. 가장 아래쪽의 폭만 해도 삼 장에 달하고 높이도 그와 비슷하다.
또한 위쪽에 사람이 다니는 곳도 웬만한 관도(官道)보다 넓었다. 족히 장정 열 명은 횡으로 서서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대단하지 않느냐. 저 엄청난 것을 만들어내는 저력이 말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었겠지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황제의 영광이 어쩌니 하고 떠들어대지만 그놈들은 이곳에 와서 돌 하나, 흙 한 줌 나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불쌍한 자들만 이곳으로 끌려왔을 터이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노역을 했을 것이다.
고향 땅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다 죽어갔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애환은 접어둔 채 황실의 업적만 찬양하는 저런 건축물이 무에 대단하단 말인지.
장성이 있든지 없든지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같다.
원나라가 통치를 해도, 명나라가 통치를 해도 사람들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궁궐의 주인만 바뀔 뿐. 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민초를 위한다는 말, 다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인 게다.
'너는 역시 비도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백산이지만 어떤 사물을 보는 관점은 일반인들과 달랐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서면 장성의 웅장함과 저 장성을 건설한 황조의 위대함을 먼저 찬양하게 되는데, 녀석은 아니다.
이곳으로 끌려와 장성을 쌓다가 죽어간 힘없는 군상들의 인생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가(史家)들이 말하기를 일만 오천 리 장성을 쌓기 위해 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어갔다 하였다.
그 죽어간 사람들의 한과 눈물로, 그리고 그들의 죽음으로 쌓여진 성이 이 장성인 거다.
가진 자들에게는 영광의 산물일지 몰라도, 이곳에서 일을 해야 했던 본인들과 그들의 가족에게는 저주받은 장소가 장성인 것이다.
"네 말이 맞다. 이 장성 때문에,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으니……."
흔히 알고 있는 이 말은 인연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이제 갓 혼례를 올린 여인이 남편을 장성 쌓는 곳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집 앞을 지나가던 농부를 유혹하여 초야를 치른 데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얼떨결에 횡재했다고 여겼던 농부는 하룻밤의 꿈같은 시간을 보낸 뒤,
다음 날 아침 여인의 남편 대신 장성 노역으로 잡혀갔고 평생을 그곳에서 일만 하다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인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 아니다.
장성에 쌓인 돌 하나와 흙 한 덩이에 수천수만 민초들의 한과 눈물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들의 한과 눈물이 있는 이런 곳이, 영광의 장소가 될 수가 없다.
"갑시다. 그놈들은 그놈들이고, 우린 우리 일을 해야지."
가래침을 뱉어낸 백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지나간 삶이고 잊힌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은 꿈이 아닌 현실이기에.
"따라오쇼."
사방을 예리하게 살피던 백산이 바닥을 쳐다보며 천천히 움직여나갔다.
사냥술.
아버지께 전수받았던 기술을 이곳에서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무공을 익히고 나면 전혀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많은 부분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는 기술이었다.
얼마나 깊은 곳까지 들어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 시진 정도 전진했을 때 최초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금의위의 시체 한 구가 한쪽 풀숲에 버려져 있었던 거였다. 차가운 기온 때문에 시체의 상태는 양호했지만 죽어 있는 상태로 판단했을 때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것 같았다.
금령이 이곳을 빠져나간 시기에 당한 금의위 중의 한 명인 게다.
다시 반 시진 정도를 더 달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용경협(龍慶峽)이란 계곡이었다.
북방산수의 아름다움과 남방산수의 부드러움을 전부 가지고 있다는 절경으로, 우뚝우뚝 솟아 있는 기암괴석의 신비로움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곳저곳의 풍경만 아름다울 뿐, 계곡에 흐르는 기운은 아니었다.
온 계곡 안쪽을 차지하고 있는 물안개 속으로 진득한 살기들이 넘쳐흘렀다. 많은 죽음이 있었다는 반증인 셈이다.
"이제 시작해볼거나?"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백산이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숲 속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석대인! 나요, 백산이 왔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딱히 석숭이 들으라고 내지른 외침이 아니었다.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흑막살수들의 이목을 이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과 그들의 위치를 먼저 파악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 일부러 표 나게 행동했던 거였다.
계곡의 물길을 따라서 두 사람이 천천히 안으로 진입해들었다.
백산의 손에는 하북팽가의 보물이자 사부의 애도인 혼원벽력도가 가진 바 살기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츄악!
석숭에게 고함을 질렀던 장소에서 일 리 정도를 더 전진해갔을 때 최초의 기습이 있었다.
고개를 돌려 갈태독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순간, 물속으로부터 삼 인의 흑의인이 솟구쳐 오르며 백산을 향해 공격해왔다.
세 사람의 무기도 각양각색이었다. 가장 먼저 솟아오른 인물의 양손에서는 비수가 발출되었고, 그 다음 인물이 던진 무기는 유성추였다.
그리고 마지막 흑의인은 검과 함께 무기의 뒤를 따르며 몸을 날려오고 있었다.
먼저 달려드는 무기를 피하거나 쳐내는 순간에 검을 가진 이가 최후의 공격을 가하는 합격술, 무기와 인간이 하나 되어 펼치는 연환공격이었다.
"호! 시작이라 이거지?"
나지막이 중얼거린 백산의 신형이 순식간에 뒤로 물러서며 비도를 쳐냄과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아슬아슬하게 발밑을 스쳐 지나가는 흑막살수의 검을 갈태독 쪽으로 흘리며 유성추를 회수하고 있는 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헉!"
유성추의 끝을 잡고 있던 자와 검을 들고 뛰어들었던 흑막살수의 입에서 동시에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음이다. 뒤로 물러나는 개념이 아니었다. 마치 공간 자체가 앞으로 당겨진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거였다.
가공할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던 상대가 바로 방향을 틀어 앞으로 달려든다. 말로만 듣던 능공허도(凌空虛渡)의 경지의 무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약해!"
자신을 쳐다보며 눈을 치뜨고 있는 두 복면인을 향해 싱긋 미소를 보내면서 들고 있던 혼원벽력도를 수직으로 그어버린다.
그리고 놀고 있던 오른다리로는 비수를 날렸던 자의 면상을 향해 편퇴(鞭腿)를 날렸다.
철벅!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자로 베어진 자와 목뼈가 부러진 자가 그대로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죽음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비명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독한 놈들이네, 인사라도 좀 하지……."
"네가 더 독한 놈이다, 이 녀석아."
갈태독이 인상을 쓰며 백산을 노려보았다.
백산이 공격받고 있을 때 그보다 조금 뒤에 자신에게도 두 명의 살수가 달려들었다. 아마 백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틈을 이용해서 공격하고자 했던 모양이었다.
무상신법을 전개하여 몸을 뺀 후 두 사람을 향해 장을 날리려는 순간, 백산이 있던 곳으로부터 살을 에는 듯한 살기가 밀려들었다.
호신강기를 더욱 끌어올리며 전면에 있는 두 명을 향해 장을 내뻗었다.
갈태독의 무공 역시 가공했다. 앞에서 오던 두 명은 가슴 쪽이 완전하게 파열되어 피떡으로 변한 채 나가떨어졌고, 호신강기에 걸린 자는 머리가 부서지며 절명했다.
그들 역시 비명소리도 지르지 않고 절명했다.
"다 오래 살라고 그러는 거요."
나이를 먹었으니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암습한 자를 그대로 둔 것은 순전히 갈태독의 건강을 위해서라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갈태독도 말로는 백산을 욕하고 있지만 표정은 아니었다.
이미 금강불괴에 도달한 몸이기에 어줍지 않은 검은 뚫을 수가 없다.
다만 옷이 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호신강기를 펼쳐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기에 짜증이 난 것뿐이었다.
"에라! 이…… 그……."
갈태독이 깜짝 놀라며 무슨 말인가 하려 했으나 백산의 행동이 더 빨랐다.
앞에 있던 커다란 바위 위에 앉으려는 것처럼 하더니 혼원벽력도를 깊숙이 찔러 넣는 것이었다.
"역시 이놈은 명도가 맞아. 이런 바위도 쑥쑥 들어가는 걸 보니."
빙긋 웃으며 도를 뽑아내자 바위 아래쪽으로 붉은 피가 흥건하게 고여들었다.
비록 발각되기는 했지만 살수들의 은신술은 대단했다. 갈태독도 일 장 안으로 다가와서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영감! 우리를 잡으러 여섯밖에 안 보냈나봐."
더 이상 공격이 없자 실망한 표정으로 갈태독을 쳐다본다. 나름대로는 상당수의 인물이 올 것이라 기대했었는데 저들의 생각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한 번 더 외쳐라. 이번에는 영객과 사객을 언급하면서."
"나이를 먹었어도 쓸데가 있다는 말, 틀린 게 아냐."
백산도 갈태독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흑막 최고수 두 명을 죽인 자가 이곳에 와 있다고 하면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오대흑객 중 한두 명 정도는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봐! 자밀원! 내가 영객 놈하고 사객이란 놈을 죽였다고!"
조금 전보다 더 큰 백산의 목소리가 숲 속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기색이 없었다.
"대단하구먼. 반응이 없잖아."
백산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쪽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도발 정도면 미세한 기운이라도 내보일 법한데 전혀 그런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가히 중원 최고의 살수단체란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오게 되어 있다. 가자."
그러나 갈태독의 표정은 태연했다. 아무리 살수니 뭐니 해도, 감정을 죽일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 흑막살수들은 살수행(殺手行)을 하는 자들의 입장이 아니다. 자신들의 사활을 걸고 금의위와 일전을 결하고 있다.
청부가 아닌 인간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감정에 충실한 행위를 하고 있는 이상, 백산의 도발에 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갈태독의 예상은 적중했다.
전방 숲으로부터 은밀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워낙 기척 없이 움직이고 있어 정확한 수는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임에는 틀림없었다.
"참으로 아까운 기술이네. 저런 기술 있으면 나도 좀 가르쳐주지."
흑막살수들의 움직임에 감탄하여 내뱉는 소리였다. 천사맹의 사사대가 보여주었던 경지와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네놈들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커다란 외침소리와 함께 백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림의 절기인 무상신법, 공간을 점유한다는 절대적인 신법이 살수들을 향해 펼쳐진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가 하면 어느 사이 왼쪽에서 어른 허리 굵기의 소나무를 베어내고, 아래로 내려서면서 바위를 향해 도를 찔러 넣는,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저럴 수가…….'
백산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경악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커다란 바위 아래쪽 그늘에 은신해 있는 자(者), 오대흑객 중 사위인 혈객으로 무영권을 익힌 자였다.
영객과 사객을 죽였다는 외침을 듣고 부하들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가 직접 왔던 터였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자들이…….'
혈객이 망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처음 보는 엄청난 신법이었다.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그의 신형이 잡히지 않았다.
도무지 어디서 튀어나올지 짐작할 수가 없다. 전후좌우(前後左右) 할 것 없이 사방에서 불쑥불쑥 솟구쳐 올랐다.
난생 처음 접하는 가공할 신법(身法)이었다.
살수비기를 익혔다 하여 피해갈 수 없는 엄청난 무공. 이십여 명의 부하들이 손도 써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해버렸다.
"영감! 저 바위 밑에 있는 놈에게 한 방 먹이쇼."
"헉!"
"혈파!"
백산의 말에 혈객이 흠칫 놀라며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앞으로부터 엄청난 기운이 밀려들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신이 있는 곳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는 것 같았기에 감지를 못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혈객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하필이면 뒤쪽으로 바위가 있는 곳이라 마땅히 몸을 뺄 곳이 없는 게다.
"무영마권(無影魔拳)!"
흑막의 살수 중 처음으로 목소리를 뱉어낸 자가 되었다. 이미 살수행은 의미를 상실했다고 느꼈는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며 갈태독의 장(掌)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천하제일이라 인정받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인 갈태독의 장이었으니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크윽!"
처음부터 죽일 마음이 없었는지 갈태독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그의 뒤를 이어 백산이 앞으로 나섰다.
"광풍신권(狂風神拳)!"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는 혈객을 향해 백산의 광풍신권이 무차별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몸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날아오는 권강을 향해 무작정 자신의 절기를 뻗어내야 했다.
"커억!"
이미 바위에 등을 대고 있었기에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그런데도 앞에서는 계속하여 권강이 밀려든다. 이건 아예 강기의 폭풍이었다.
"쉰하나! 쉰둘! 쉰셋……."
가증스럽게도 백산은 자신이 뻗어낸 주먹의 횟수를 세고 있었다. 권(拳)을 빠르게 펼치지도 않았다.
'말도 안 돼, 어찌…….'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기막힌 상황에 혈객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기어검이나 이기어도는 보았어도, 권이 시전자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천천히 다가오면서도 언제나 눈앞에 붉은 강기가 있는 거였다.
권으로 시전하는 탄(彈)의 경지였다. 검강이나 도강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
퍼억!
"으아악!"
혈객의 가슴 쪽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들려왔고, 그가 고통에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가슴 부위가 짓이겨지면서 피에 젖은 허연 뼈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신기였다. 권을 이용해서 가슴 부위의 살들을 도려내버린 거였다.
백산이 세는 숫자가 거의 팔십 회까지 이르렀을 때 더 이상의 대항을 포기했는지 혈객이 두 손을 내렸다.
그러나 백산은 쉽게 끝내지 않았다. 마지막 혈객을 친 공격은 완전한 강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 혈객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보통 일반적인 주먹보다 약간의 힘만 주었을 뿐이었다. 바로 죽이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인 것이다.
"임마, 아직 끝나지 않았어. 백 번은 채워야 한단 말이야."
백보신권이 아니라 백번신권이었다. 백 번을 계속해서 쳐내는 권. 살우의 팔을 잘라내고 마을 아이들을 죽였던 자들에 대한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하고 있었다.
아울러 혈객의 비명소리를 듣고 다른 자들이 더 오기를 바라는 이유도 있었다.
백산의 의도는 그대로 들어맞았다.
협곡의 끝부분에서 금의위를 포위하고 있던 인물들 속에 격렬한 반응이 일었다.
무객(無客)과 천객(天客), 실질적인 흑막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자신들의 무기를 거머쥐며 거칠게 살기를 쏟아냈다.
이제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삼 일만 더 견디면 금의위를 일망타진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뜻밖의 방문자에 의해 모든 게 틀어지려 하고 있다.
더구나 지금의 저 소리는 혈객이 내지르는 비명소리다. 특급살수인 혈객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정신을 파괴시켜버렸다는 소리다. 최고의 강적이 왔다는 의미인 게다.
"천객! 공격하시오. 저놈은 내가 잡겠소."
더 이상 방치할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인지 무객이 뒤쪽으로 몸을 뺐다. 앞에 있는 석숭보다 뒤에서 치고 들어오는 자가 더 무서운 놈인 것 같았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자에게 오대흑객 중 세 명이 당한 꼴이었다. 무림에서 난다 긴다 하는 자들마저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은신술을 펼칠 필요도 없이 무공만으로도 제압이 가능하다. 그런데 놈에게는 은신술과 무공을 다 펼치고도 당했다. 결코 단순한 놈이 아니라는 반증인 것이다.
"알았소이다."
천객에게 말을 한 무객이 뒤쪽으로 몸을 날리자, 동시에 수십 명의 인물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공격하라!"
천객도 남아 있던 살수들에게 공격명령을 내리며 무서운 속도로 계곡의 끝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금의위를 치고 달탄으로 빠지고자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지금에 와서 옥새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황제인 건문제가 살아 있다면 흥정이라도 해볼 터인데 그것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시시각각으로 조여오는 금의위의 추격, 결국 그들을 없애고 도망을 치고자 하였고 이곳에 함정을 만들었었다.
옥새를 돌려준다 한들 놓아줄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누가 죽든지 끝장을 보아야 했었다.
"저들의 공격이 시작되었군요."
계곡의 안쪽에 있는 인물들 속에서 나온 소리였다. 오십 명 정도 남아 있는 금의위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언제나 금빛으로 빛났던 그들의 옷은 자신들이 흘린 피와 흙으로 검게 변해 있었고, 피곤과 허기에 절은 얼굴은 눈두덩이가 푹 꺼질 정도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백공자가 왔으니 서두르는 것이겠지요. 자, 한번 버텨봅시다."
초상이 자신의 도를 들며 몸을 일으켰다. 거의 십여 일 이상을 풀뿌리만으로 연명해서인지 중심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희망이 생겼다. 조금만 시간을 벌어주면 될 것이다.
"석대인, 움직일 수 있겠소."
아무래도 석숭의 상태가 걱정이 되었는지 초상이 물었다. 이곳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바로 그였다. 부하들을 대신하여 그가 맞은 칼만 해도 대여섯 번은 될 터였다.
"움직여야지요. 이제야 원하는 것을 찾았는데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지요."
자신의 실수였다. 오백의 금의위면 충분할 것으로 보았는데 흑막살수의 비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부하들이 죽어나갔다.
이곳에 매복을 하고 금의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의위 전체를 노린 게 아니라 자신이었다. 만금돈노이자 금의위 영반인 석숭을 노리고 이곳에 함정을 설치했던 것이다.
자신이 살아 있으면 추격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만 버텨라. 도와줄 사람이 왔다."
부하들을 독려한 석숭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백산이 올 때까지 모든 힘을 다 짜내야 한다. 그가 빨리 오는 만큼 부하들의 희생이 줄어들 것이다. 백산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빨리 오게…….'
석숭이 기다리는 백산은 새로운 적과 조우하여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영감, 이곳은 나에게 맡기고 먼저 가시오."
"괜찮겠냐?"
"별소릴……."
이미 수십 명이 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정확한 위치마저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자들이었다.
"그래, 먼저 가마……."
갈태독이 몸을 날리며 이십여 장 정도를 전진했을 때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혈파!"
갈태독에게서 통렬한 외침이 터져나오고, 그를 향해 달려들던 대여섯 명의 흑의인이 가루가 되어 날렸다.
그러나 백산의 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살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고수가 주변에 있는데 찾아낼 수가 없다.
경악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살수비기를 익혔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완벽한 자는 처음 겪는다.
'단 일 초의 승부다. 놈은 금강불괴까지 뚫을 수 있는 실력자다…….'
갈태독 이후에 처음으로 느끼는 긴장감이었다. 앞에서 갈태독이 다른 살수들 때문에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데 도와줄 형편이 못 되었다.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자들 전부가 귀살 정도의 실력자임에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아니,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눈도 돌리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옳았다.
'왔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찰나, 위쪽에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검은 복면인 한 명이 무서운 속도로 내리꽂혔다.
순간 백산의 오른손은 위쪽으로, 왼손은 전방을 향해 동시에 내밀어졌다.
챙!
"끄으윽! 도가 아니었나?"
백산을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인물. 자신 위에 아무것도 없다 했던 무객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은신 장소는 백산 바로 앞 땅바닥이었다.
나무에 의해 약간 그늘진 곳에서 검을 뽑아든 상태로 은신하고 있다가, 백산의 오른손이 허공으로 올라가는 순간 기습을 가했던 것이다.
"원래 무기는 그거야."
왼손에 있는 수천비 하나가 무객의 이마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무객이 일점홍이란 검법을 펼쳤을 때 혈흔이 생기는 위치인, 양 눈 사이의 미간을 관통해버린 거였다.
털썩!
툭!
"이런!"
백산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무객이 쓰러지면서 놓았던 검이 자신의 손등으로 떨어지고 있음에도 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었는데, 차고 있던 애명환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진 애명환을 쳐다보던 백산은 오한이 드는지 한순간 부르르 떨었다.
마령호의 발자국을 처음 보았을 때 받은 그 느낌, 꼭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아닐 거야. 우연히 그리된 것뿐이라고, 우연히. 사부랑 전부 다 있는데 무슨 일이 있을라고."
거칠게 고개를 흔들며 갈태독을 쳐다보던 백산이 무섭게 몸을 날렸다.
전방에서 그의 비도가 춤을 추었다. 나무며 바위며 할 것 없이 적의 숨결이 느껴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비도가 박혀들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던 까닭이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전신을 지배하며 초조하게 하였다.
이제는 비도에 대한 비밀도 대부분 알게 되었다. 분노하지만 않으면 열두 개의 천비는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분노해버리면 자신이 비도의 노예가 된다.
그것만 조심하면, 분노하지만 않으면 되는 최고의 신기가 바로 비도였다.
무차별하게 휘둘러대는 백산의 비도에 흑막의 살수들이 속속들이 쓰러져갔다.
"무슨 일이냐?"
급해진 백산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한 갈태독이 고함을 내질렀다. 또다시 변해버릴까 더럭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별것 아니요. 이게 깨져서."
"괜찮다, 녀석아. 광풍대원 전원이 다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느냐. 걱정 말아라."
백산이 내민 애명환을 쳐다보던 갈태독이 별걱정 다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양산에서야 광견조원들밖에 없었기에 곤욕을 치렀지만 지금은 광풍대원 전원이 다 있다.
이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조직이 광풍대인 것이다.
"빨리 가자. 네놈의 마누라보다 석대인이 더 걱정이다."
백산의 어깨를 두드린 갈태독이 계곡의 끝을 향해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최정예를 보냈다면 저쪽도 이미 공격을 시작했단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생존이 더 급했던 터였다.
'그래, 빨리 하고 가는 거야. 빨리 하고. 아무 일 없을 거야.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땐…….'
백산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오며 그의 눈에서 붉은 광망이 언뜻 스쳤다 사라졌다. 참지 않겠다는 뜻이다. 악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참지 않을 것이라는…….
제111장
산서성에서 들려온 소문으로 인하여 천무맹 인물들이 다시 한 번 충격 속으로 빠져들었고 모든 이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무맹이 벌컥 뒤집어질 대사건이 일어나 버렸다. 용문산 근처의 세 개 마을의 초토화. 마을에 있던 사람들 전부를 살해하고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천무맹.
그 도륙의 원흉이 천무맹이라는 소문이었다.
강호정의를 표방하고 강호를 지키기 위해 천마맹이라는 마세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천무맹의 제마각이, 무인도 아닌 일반 양민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전쟁의 막바지에 터져나온 소문이었기에 그 충격의 여파는 더욱 심각했다.
전쟁 명분이 사라졌음이다.
비록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내면적인 이유일 뿐,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강호무림을 어지럽히는 마세를 제거함이 이번 전쟁의 명분이 아니었던가.
천무맹의 존립을 위협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경악스런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이 여인, 제갈수연이었다.
전쟁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맹에 남아 있던 그녀에게 이보다 희소식은 없었다. 소문이 빨리 퍼지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드디어 기회가 그녀를 찾아왔다.
"일비! 당장 백랑에게 가서 이 서찰을 전해라."
심복인 일비를 찾은 제갈수연이 전장에 가 있는 백무천에게 급히 쓴 서신을 건넸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그리고 나는 본가에 들렀다 그곳으로 간다고 전해라."
떠나는 일비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어렸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이제부터.'
* * *
제갈수연이 움직이기 시작한 그 시각, 전장에 있는 화진악도 전해진 소식을 듣고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으음!"
절망적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모든 진중에 소문이 났을 터인데 각파의 수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앞섰다.
음모임에 분명했지만 밝힐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생사도 알지 못하는 자식이 일반 양민들을 살해했다는 소문임에도 조사할 수가 없다.
더구나 제마각은 자신의 직속 부하들이다. 그들의 행위는 곧 맹주인 화진악의 명령과 같은 의미로 다가올 것이 아닌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자신의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을 해쳤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것임에 분명했다.
부하들도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상관을 믿지 못하는 부하들을 데리고 어떻게 전쟁을 치른단 말인가.
더구나 아미파나 청성파, 점창파는 추가병력을 파견해서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그들이 발을 빼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함이다. 화진악의 우려는 곧바로 현실로 드러났다.
"맹주!"
거칠게 화진악의 처소를 향해 들어오는 인물들. 아미파의 수장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아미삼노와 점창파의 분광검 좌비영, 그리고 청성파의 차보운이었다.
아미삼노를 제외한 두 사람은 다른 곳에 있다가 급하게 달려온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오 인의 인물 중 가장 흥분해 있는 사람은 아미삼노의 금정신니(金頂神尼) 매일랑(梅一琅)이었다. 불같은 그녀의 성격답게 화진악을 노려보는 눈매가 매서웠다.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의 아들이 만행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아닌가.
만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천마맹의 인물들보다 더 사악한 자의 아버지가 맹주라는 직위에 있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소이다, 이건 음모외다."
"설사 음모라 하더라도 그런 소문이 나돌고 있는데 어찌 전쟁을 수행한단 말입니까. 일단은 철수를 해야겠습니다."
매일랑이 강력하게 철수를 주장하고 나섰다. 지금 상태로 계속 전장에 있어봐야 공연한 희생만 날 뿐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허허!"
화진악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적들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철수를 운운하는 그녀의 행태가 답답했음이다.
적들도 소문을 들었을 터이고,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지금은 철수를 논하는 것보다 적의 공세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함에도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
"맹주님! 적의 공격입니다!"
다급한 부하의 보고에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검을 들고 일어선 화진악이 삼파의 인물들을 쳐다보았다.
"철수를 하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허나…… 우리는 이곳에서 싸울 것입니다."
어차피 없었다 생각하면 그뿐이다. 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었고 결국은 성공했지만 패색이 짙어졌다.
제갈세가를 너무 견제하다 이리 되었다는 것은 그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전쟁에 져서 모든 것을 잃으나, 그녀에게 모든 것을 잃으나, 그의 입장에서 보면 같을 뿐이다. 영광스러운 퇴진이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싸우다 죽는 수밖에.'
"나를 따르라!"
화진악이 검을 뽑아들며 앞서 나갔다. 가장 선두에 서서 보여주어야 한다.
화진악의 아들이, 천무맹 맹주의 직할대인 제마각 무사들이, 그런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증명해야만 한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차문주."
전장을 향해 몸을 날리는 화진악을 쳐다보던 매일랑이 차보운을 향해 향후 거취에 대해서 물었다.
그들로서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마맹의 공세는 시작되었고 지금 발을 빼자니 천무맹이 패할 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천무맹이 지고 나면, 그 다음 수순은 전쟁에 참여했던 자신들이란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인 것이다.
"일단은 적을 물리쳐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철수는 그 다음에 다시 논하지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전장으로 달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차보운의 행동에 금정신니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천마맹의 공세가 시작되었으면 이곳뿐만 아니라 청성파 제자들이 있는 곳도 전투에 돌입했다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그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무천각주로 있는 백소협이 잘하고 있습니다."
차보운이 본 백무천은 한마디로 대단한 젊은이라는 거였다. 이제 서른도 안 된 청년이 자신의 무위를 능가했다.
더구나 몸을 사리지 않고 언제나 최전방에서 지휘하는 그의 모습은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가 바로 떠나지 않는 이유였다.
"그 친구가 그 정도였습니까?"
아미삼노 세 사람이 차보운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음 대의 맹주감이라는 세간의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반신반의했었는데 소문 이상이지 않는가.
더구나 차보운이 부하들을 믿고 맡길 정도의 인물이라니. 백무천이란 젊은이가 다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차보운이 감탄해 마지않는 인물인 백무천도 물밀듯이 밀려오는 천마맹 인물들을 쳐다보며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들의 상대는 화산파 멸망의 주역이었던 패천마궁이었다.
"저들을 처단하여 화산파와 종남파의 원수를 갚자!"
"와아! 와아!"
수천의 인물들이 백무천의 말에 동조하는 함성을 질러댔다. 놀랍게도 천무맹 세 곳 중 백무천이 있는 이곳의 사기가 가장 높았다.
누구도 패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무인이 없었다. 자신들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백무천이란 한 사람이 만들어낸 변화였다. 그가 오기 전까지 지지부진하던 천무맹 인물들에게 백무천은 구세주였다.
그가 움직이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천마맹 인물들의 재가 남았다. 상대의 강약에 상관없이 절대무적의 무위를 보이며 적을 유린하고 다녔다.
무천각주라는 지위보다 그의 무위가 천무맹 인물들을 안심시켰고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런 백무천이 다시 앞서 나가며 적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솟구쳐 오르는 화룡은 천마맹 인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천무맹 인물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화룡이었다.
"화룡지천무!"
백무천의 입에서 포효 같은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열두 마리의 화룡이 사방을 향해 그 불길을 토해냈다. 뜨거운 열기가 훅 끼치며 주변에 있던 패천마궁도들의 재가 날렸다.
비록 한 팔밖에 없지만 그의 무위는 절대적이었다.
"궁주! 이젠 저놈을 잡아야겠소이다."
구마 중 일인인 고루천마 고염라(高廉羅)가 패무극을 쳐다보며 외쳤다. 백무천 때문에 천마맹도의 사기가 많이 저하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일부러 그냥 두었다. 무천각주로 등장한 백무천이 천무맹의 절대구성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천무맹 인물들이 전적으로 기대는 사람이 되기까지 기다렸다가 제거하게 되면 전쟁을 바로 끝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의 의도는 적중했지만 갈수록 백무천의 신위가 커지는 것 같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지금쯤 제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방을 향해 날아다니는 화룡을 쳐다보며 패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패무극을 비롯한 고루천마와 독마 심방 삼 인은 백무천의 본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잡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금방 현실로 드러났다. 백무천을 향해 몸을 날렸던 고루천마가 단 삼 초 만에 재로 스러지는 장면이 목격되었던 까닭이다.
"저럴 수가……."
패무극과 독마 심방은 깜짝 놀라며 행동을 멈췄다.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마인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전설로까지 불리는 인물들이 구마다.
거의 백여 년 동안 자신들 외에는 적수가 없다고 여겨졌던 인물들. 그런 구마 중 고루천마 고염라가 단 세 수만에 패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터였다.
자신들과 싸운다 하더라도 수십 초 내에 끝낼 수 있으리라 장담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였는데…….
"이곳을 맡아주십시오, 심선배."
표정을 굳힌 패무극이 빛살처럼 몸을 날려 백무천이 있는 곳으로 당도했다.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빨리 제압하여 전쟁의 양상을 돌려놓아야 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천마맹이 패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대단하구먼. 고금오천무를 익혔다더니……."
패무극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멀리서 볼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자신의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의 강렬한 투기가 일었다.
진정 싸워보고 싶은 상대를 만났다는 흥분과 자신도 고루천마처럼 될 수 있다는 위축감이 동시에 그의 온몸을 장악했다.
사십 년 만의 강호생활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패천마궁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했소, 패궁주."
패무극에게서 발산되는 기도에 백무천도 내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그가 자신보다 강하리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마도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구마보다 더 강한 무위를 가지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는가."
"쿡!"
패무극의 물음에 백무천이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정곡이 찔렸다는 표정이었다. 패무극이 이곳에 있는 이유와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서로 같았다.
야망(野望).
사내로 태어나서 세상을 가져보고 싶다는 그런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정의니 마도니 하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건 약한 놈들이 하는 상투적인 말일 뿐이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 더 이상 거칠게 없는 경지에 도달한 자들은 야망을 위해 산다.
하늘로 비상하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늘이 되기 위해 산다는 말이다. 서로 다른 소속,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지만 야망이라는 같은 목표를 잡기 위해 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자신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만의 방법으로 그들이 바라는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살고 있을 뿐이다.
"시작합시다."
서둘러 끝내기로 했는지 백무천의 몸에서 전율적인 열기가 흘러나왔다. 여태껏 보여주었던 것은 일부러 한 행동이었다.
지금의 이 상황을 유도하기 위한 제갈수연의 계획이었다. 자신 혼자서 천마맹 무인들을 전부 물리칠 수 없다.
천무맹 무인들의 절대적인 도움이 있어야 함인데 이곳에 도착해서 본 상황은 제갈수연이 예측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거의 싸울 의사도, 싸워야 하는 목적도 잊고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전쟁에 임해봐야 패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계획을 바꿨다. 천마맹 수뇌들의 계획을 예측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던 것이다.
한꺼번에 모든 실력을 보여주지도 않고 적당히 힘을 쓰면서 천무맹 무인들의 사기를 올리는 방법.
지금 앞에 있는 패무극과 그의 일행은 그를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지금껏 방치했던 것이다.
"우리가 당했군……."
백무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쳐다본 패무극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백무천의 본 실력을 알아본 것이다.
조금 전 고루천마와의 대결 때도 완전한 실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자신도 그의 상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했음을 느꼈다.
철목승만을 자신의 상대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참으로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는 게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설마 이십 대의 젊은이가 자신보다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그러나.
그냥 이렇게 끝낸다면 살아온 인생이 너무 초라해질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되지 않겠는가. 화산파의 문주인 악무위가 그랬던 것처럼…….
"파뢰붕천권(破雷崩天拳)!"
패무극의 입에서 천지를 울릴 것 같은 거대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다음 공격을 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최고 절기인 파뢰붕천권에 모든 것을 걸었다.
패무극의 두 손에서 셀 수도 없을 만치 많은 수의 권(拳)이 쏟아져나오며 백무천의 전신으로 쇄도해들었다.
"화룡사멸무!"
화룡파천비공의 이 초인 화룡사멸무, 이미 가루라의 형상으로 변한 백무천의 몸에서 정확하게 마흔아홉 마리의 화룡이 튀어나와 사방을 휩쓸고 다녔다.
패무극도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오직 신가의 무공만 상대가 된다 했던 금신가의 무공. 단지 열 마리의 화룡만 가지고도 패무극이 쏘아낸 모든 권을 차단시켜버렸다.
신가의 무공을 제외한 나머지 무공은 결코 상대가 아니었다. 단 일 초 만에 패무극도 고루천마와 같은 길을 걷고 말았다.
"돌격하라!"
패무극의 죽음에 넋을 잃고 있는 천마맹 무인들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며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젠 더 이상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천마맹 인물들은 퇴각하는 중이고, 자신들은 쫓는 입장이다. 무력이 좀 약하다 할지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게 되었다.
독마 심방은 처음부터 백무천의 상대가 아니었다. 독공과 극성인 열양공, 그 열양공 중에서도 최고인 화룡파천비공이니 독마의 독공이 통할 리가 없었다.
결국 백무천 한 명에 의해서 천마맹 수뇌들이 전부 당하자 더 이상 전쟁이 될 수 없었다. 천무맹의 일방적인 도륙만 남았을 뿐이었다.
백무천이 있는 곳에서는 천마맹 무인들이 도망을 치고 있다면, 화진악이 있는 곳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천무맹의 패배. 검마와 심마, 그리고 군사인 궁유가 있는 천마맹에, 사기마저 한풀 꺾인 천무맹은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화진악이 모든 것을 걸고 선두에서 부하들을 독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전투 시작 반나절 만에 천무맹 진영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쳐야 했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천무맹이 있는 숭산 쪽을 향해 산발한 머리를 휘날리며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는 인물들, 화진악과 살아남은 부하 이십여 명이었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참담한 얼굴의 화진악이 중얼거렸다.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화산파와 종남파가 멸망했을 때 이미 자신의 시대는 끝났던 것이다.
아들인 화인걸의 패배는 그것을 확인해준 절차에 불과했다. 끝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성취했던 맹주자리가 아니었던가.
"아악! 커억!"
앞서 가던 부하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였다.
"이제야 나타났나?"
이십여 명 남은 인물들을 주살하고 있는 자들, 지금껏 싸웠던 천마맹 인물들이 아니었다. 제갈수연. 산동성의 본가에 간다 했던 그녀가 화진악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제가 이겼군요."
오연한 미소로 화진악을 쳐다보며 제갈수연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종착지까지 온 것이다. 이곳에서 화진악만 정리하면 천무맹은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오십 년간 제갈세가의 숙원이, 자신의 야망이 결실을 보는 순간에 와 있다.
"인정해주리라 보는가."
다른 쪽에 있는 무사들이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 서른도 되지 않은 제갈수연이나 백무천을, 천무맹의 맹주로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물론 아직은 안 되겠지요. 하지만 초대맹주님이 나서면 되지 않겠어요?"
"나타나지 않은 세력이 그였는가."
화진악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삼세력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자신의 턱밑에 있었으니 알아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호의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일일 게다.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검제 담운천이 천무맹과 천마맹을 양패구상시키려 했다는 것을…….
"이유가 뭐라 하던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무림 최고가 되었던 사람이고 지금도 나서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양보를 해주는 그런 인물이기에.
더구나 거의 백오십의 나이가 아닌가. 더 이상 부릴 욕심도 없는 사람일진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와 같아요. 나이와는 상관없고……."
"자네도 알 텐데. 그가 천무맹과 천마맹을 전부 없애려 했다는 것을."
누구를 데리고 남은 전쟁을 치르며, 앞으로 무엇으로 천무맹을 유지할 거냐는 소리였다.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천무맹도 천마맹도, 거의 모든 인물들이 사라질 것이기에.
"새집을 짓고 새사람을 뽑을 겁니다. 천무맹과 천마맹 인물을 아우르는 거대한 집을 말입니다."
이미 새로운 인물들을 뽑을 방법마저도 구상해두었다. 그들만 있으면 적어도 십 년 안에 과거의 천무맹이나 천마맹에 버금가는 단체를 만들 수 있다.
그럼 더 이상 두려워할 일이 없다. 오직 제갈세가만이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을 것이다. 물론 담운천의 제거도 그 계획에 포함되는 일인 게다.
"천마맹 인물을 포섭한단 말인가?"
"그래야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가능하겠지. 자네라면 말이야…….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네."
한 단체를 다스린다는 것, 야망의 끝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올라서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려웠다.
언제나 적의 출현에 신경을 써야 했고 자신에게 도전할 수 있는 자를 파악해야 했다.
위협이 될 만한 자를 모함하여 제거해야 하고 때로는 친구마저도 없애야 하는 비정한 자리가 그 자리였다.
"가장 두려운 게 뭔지 아나?"
"두려운 것? 그런 것도 있었나요?"
"있다네, 그 자리에 있을 때는 결코 느끼지 못하는 거지. 지금처럼 모든 것을 잃고 나면 깨달아지는 것이네, 바로……."
제갈수연을 쳐다보던 화진악이 자신의 검을 들었다.
얼마나 많은 피를 먹었는지 검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수없이 많은 적의 목을 잘랐다. 이제는 자신의 피를 먹는 일만 남은 것이다.
"욕심이었네, 그 자리에 계속 있고 싶다는 욕심……."
화진악의 마지막이었다.
화산파의 속가제자에서 검신으로, 그 다음은 강호 최대세력이었던 천무맹의 맹주까지, 가장 밑바닥에서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서며 영광된 삶을 살았던 화진악.
그가 자결함으로써 일생을 마쳤다.
"욕심……. 그러나 세상은 말입니다. 그런 욕심을 꿈꾸는 사람들로 만들어가는 겁니다."
화진악이 죽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제갈수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화진악은 욕심을 경계하라 했지만 그건 가진 자의 넋두리일 뿐이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 아닌가. 별로 와 닿는 말이 아닌 것이다.
'끝났나? 아니지, 이제 시작이지……. 한 가지 일만 더 처리하면.'
떠나는 제갈수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원하는 바를 성취한, 꿈을 이루어낸 자의 웃음이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