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희 소설 『혼불』 훑어보기
[9월 문학기행 발표자료]
박경선
1. 혼불의 사전적 정의 : 전라도 방언으로 사람의 혼을 이루는 바탕으로 죽기 직전에 몸에서 빠져 나기는, 맑고 푸르스름한 빛을 말한다.
작가가 가져온 혼불의 정의: 언어가 그 민족의 영혼이고 정신이고 혼불이다.
2. 작가
◉ 1947년 전주 출생. 독신. 전북대학교 졸업. 교사. 아버지 최성무는 일본휴학을 했던 지식인. 어머니 허묘순은 사상철학자. 한학자 허환의 장녀. 최명희는 2남 4녀의 장녀로 1998년 (51세로) 사망.
남원에는 혼불 문학관(2004년에 건립), 전주에는 최명희 문학관(2006년에 건립)
◉ 작가의 메모 수첩에 붙인 이름 <길광편우(吉光片羽-상서로운 빛·생각이 깃털처럼 나부낀다는 뜻)
◉ 작가의 수필 <우체부> -기전여고 3학년(1965년) 때 써서 고교 교과서에 수록된 수필
-오늘날 우리는 모두 고독해져간다. 확실히 매커니즘의 금속성이 신경을 자극하는 요즘, 우리는 서로에게서 격리되고 고립되어 간다. 사람의 목소리보다 더 많은 기계 소리, 사람의 손보다 더 위력 있는 기계 손, 사람의 목숨보다 더 모진 기계들의 수명….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점점 자신을 잃어 가고, 체온을 망각해간다. 그러나, 우체부의 음성은 가장 정겨운 인간의 소리로 우리에게 부딪혀 온다, 항상 따뜻한 것만은 아니어서 사납고 왁살스럽게 들릴 때도 있지만, 조금도 싫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체부는 단순히 편지를 배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춥고, 공허한 마음의 성곽, 절망, 고뇌, 헤어 나올 수 없는 슬픔의 지역에 뜨거운 사랑을 배달하는 사람이다.- 요약함
◉ 단편 (만종) - 경기전(전주)을 보고
사전을 보면 ‘태종 이성계가 어디에 모셔져 있다.’ 이런 말만 나온다. 새로운 사전어를 대체할 언어를 세우고 싶다. 담을 치며 나무를 불도저가 밀어내는 장면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사전에 대한 거부감을 쓴 단편
◉ 1988년 신동아에 연재 시작, 17년간 10권을 썼으며 90년대에 최고 걸작으로 초판 십만 권을 출간하였다.
◉ 난소암에 걸려 완간 4개월을 앞두고 떠나면서 그녀가 마지막 남긴 말
<혼불 하나면 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 잘 살다 갑니다.>
3. 작품의 배경
일제강점기인 1930-40년대, 전통이 망가지고 훼손되는 시대. 남자들은 독립운동을 하거나 노름을 하느라 집을 지키지 못할 때 종부(宗婦) 3대와, 이씨 문중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 마을 '거멍굴' 사람들의 삶을 그린 소설.
만 17년간에 걸쳐 완성된 이 대하소설은 근대사 속에서도 전통 삶의 방식을 지켜 나간 양반 사회의 기품, 평민과 천민의 고난과 애환을 생생하게 묘사하였고, 소설의 무대를 만주로 넓혀 (5권, 8권, 10권은 거의 만주 이야기다) 그곳 조선 사람들의 비극적 삶과 강탈당한 민족혼의 회복을 염원하는 모습 등을 담았다.
◉ 중심 인물
▶청암부인 : 이씨 문중의 1대 종부(宗婦)로 결혼한 지 1년 만에 청상과부가 되어 시동생 이기채를 양자로 들임 ▶강모 : 이기채의 아들로 청암 부인의 손자. 이씨 문중의 장손 강모의 부인은 허효원으로 청암 부인에 이어 이씨 가문의 종부가 됨.▶춘복 : 이씨 문중의 지배를 받던 상민이나 후에 강실을 겁탈함.
이기채는 장가 들어 강모를 낳았는데 강모는 사촌 동생인 강실이를 좋아하며 3대 종부가 될 허효원과 결혼한다. 그러나 강실이를 잊지 못하고 허효원 역시 강모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이 때 강모는 징병을 피해 만주로 가고 청암 부인은 병세 악화로 사망한다. 사촌형 강태와 만주에 도착한 강모는 그 곳에서 심진학 선생을 만나 일본의 억압이 극에 달하더라도 굴복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편 거멍굴 상민들은 양반촌 사람들에게 억눌려 살았던 복수로 상민 춘복이는 이씨 문중의 강실이를 겁탈하고 강실이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4. 혼불의 주제:
작가는 ‘나는 혼불을 통해 순결한 모국어를 재생해 보고 싶었다.‘ 고 했다. 모국어는 모든 문화의 정수리요. 말에는 정령이 붙어 있다. 그녀는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요, 모국어는 모국의 혼이기 때문에 혼불에다가 시대의 물살에 떠내려가는 쭉정이가 아닌, 진정한 불빛 같은 알맹이를 담고 싶다.‘고 했다. 국제회 되어가는 속에서 외래어의 남발로 정체성이 훼손되고 혼의 한 자락이 모국어인데 모국어가 사라지면 나의 정체성도 사라진다. 나를 지켜야 새로운 시대에도 내가 살아갈 수 있다. 나의 정체성을 잃지 말고 내 나라 내 조국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이다.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연변대학에는 한국어를 지원하는 세종학당에서 한국어 수업을 해주고 있다.
5. 『혼불』 을 쓰기 위한 작가의 노력(취재. 자료 수집)과 자세
◉ 원고지의 칸이 너무 깊어 토씨 하나만 틑려도 만년필로 다시 쓰기를 반복해 어느 날은 10여 장의 파지를 만들기도 했다.
“가장 한국적인 말의 씨앗으로 춘향전이나 심청전 같은 우리식 고유의 이야기 형태를 살리면서 서구 전래품이 아닌, 이 땅의 서술방식을 소설로 형상화하여,. 기승전결의줄거리 위주가 아닌, 낱낱이 한 단락만으로 충분히 독립된 작품을 이루 수 있ㄴ은 글을 쓰고 싶었다- 여성동아1988년 1월호 인터뷰에서
◉ 17년 전 봄. <혼불>의 첫 줄을 쓸 당시 저는 이 세상의 단 한 사람만이라도 제가 하는 일을 지켜본다면 이 길을 끝내 가리라고 다짐했어요.-1997년 9월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창립총호에서 한 말.
17년간 하나의 작품에만 쏟아 붓는 투철한 작가 정신을 통해 예술혼의 탁월한 경지를 보여준 작가.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혼불을 지키고 쓰다듬허 풀뿌리 숨결과 삶의 곁은 드러낸 그이기에 그의 유지를 잇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혼불 같은 투신의결정기 곧 혼불이다. 먼 회상여행을 거쳐 오늘의 나를 탐색하게 한다.
◉ 글쓰기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고통으로 한 자 한 자 만년필로 완성해간 그녀는 혼불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거짓이 아닌 글을 쓰게 하소서’하며 날마다 기도하는 여인이었다.
◉ 1990년대 중국과 국교가 열려 독립 운동가의 활동 무대였던 중국 심양 일대를 64일간 취재했고 그가 가본 서시장은 한국의 전통시장을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는 한국어로 된 간판(우리 여행사, 한복집, 백운상사, 최씨 가게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서탑거리에는 독립지사의 부인 여덞 명이 모여 국밥 장사를 해서 독립 자금을 마련하던 곳이다. 그곳이 차차 코리안 타운으로 형성되었다.
◉ 호남 지방의 혼례와 상례 의식, 정월 대보름 등의 전래 풍속을 김홍도의 풍속도처럼 세밀하게 그렸다.
◉ 남원 지역의 방언을 풍부하게 구사하여 민속학·국어학·역사학·판소리 분야 학자들의 주목을 받는다.
◉ 아름다운 모국어로 생생하게 복원해 내면서 대하 서사시적인 규모로, 사건이 아닌 이야기 중심의 소설 장르를 개척하였다.
◉ 새벽의 굉장히 싸늘한 시간을 표현하는 단어를 찾으려고 사흘 밤낮을 성보아파트의 베란다 창문을 열고 새벽마다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삭연하다(외롭고 쓸쓸하다)'라는 단어가 떠올라 사전을 찾아보니 진짜 그런 단어가 있었단다.
◉ 작가의 조사력은 면밀하다. 복사꽃에 관해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부터, 삼국지의 도원결의로, 시경의 도화에 관한 구절로 이어진다. 이런 면밀한 섭렵이 지나치게 전개되면 스토리의 이어짐을 방해하거나 드라마의 재미를 떨어뜨릴 수도 있겠다.
6. 책 속 좋은 문장
◉ 혼불 속의 시적 표현
우리는 조선을 떠났지만
조선어를 한다. (조선어를 사용함으로)
조선 속에 산다.
(나라를 떠났지만 언어공동체 결속력으로 문화적 맥락을 지켜내고 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 나의 넋이 찍히는 그 무늬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7. 혼불 10권 톺아보기
『혼불』 1권- 효원이 사는 대실마을의 풍경 묘사로 시작된다.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대숲에서는 제법 바람 소리까지 일었다.
하기야 대숲에서 바람 소리가 일고 있는 것이 굳이 날씨 때문이랄 수는 없었다. 청명하고 볕발이 고른 날에도 대숲에서는 늘 그렇게 소소(蕭蕭)한 바람이 술렁이었다.
그것은 사르락 사르락 댓잎을 갈며 들릴 듯 말 듯 사운거리다가도, 솨아 한쪽으로 몰리면서 물 소리를 내기도 하고, 잔잔해졌는가 하면 푸른 잎의 날을 세워 우우우 누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혼불」 1권 7쪽
사람은 자기 몫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한 섬지기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근면하게 일하고 절약하여 자기 가솔을 굶기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열 섬지기 짓는 사람은 이웃에 배 곯는 자 있으면 거두어 먹여야 하느니라. <중략> 그래서 장자는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지. 그렇다면 그런 장자로만 이어져 내려온 종가란 문중의 장자인 셈이다. 어른인 게지. 어른 노릇처럼 어려운 게 어디 있겠느냐? 제대로 할라치면,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어려운 것이 어른 노릇이니라.” 1권 147쪽-148쪽
그렇게 지켜온 가문이 창씨개명으로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청암부인은 병을 앓는다. 성씨를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틴 삶이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했으니 병이 안 나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혼불』 2권
한없이 무기력한 사람…… 나는 삶의 왜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을까. 그저 나는 키우는 대로 자라났다. 그리고 만드는 대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나는 없다.- 강모의 한탄 2권 88쪽
문중의 오라비 따라 언덕에서 쑥도 캐고, 그러다 넘어지면 일으켜도 주고, 네 것 내 것 가리지 않고 나누어 먹다 보면, 어찌 정인들 들지 않겠는가. 거기다가 바깥에는 일도 없이, 우물속같이 고여 사는 젊은 것들이 제 속에서 넘치는 심정을 어디에 쏟을 것인가. 칡뿌리든지 소나무 뿌리든지 하찮은 풀뿌리든지 간에 한 그릇 속, 한 자리에 붙박혀 있으면, 제 뿌리끼리 엉키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네. 2권 125쪽
『혼불』 3권
청암부인은 보는 눈을 기르기 위해 ‘배움’을 강조한다. 배움은 정신의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다음 세대의 정신의 등을 밝히는 길이라고 했다. 배움을 게을리하면 결국 천인이 되고 만다면서 자연스레 노비 이야기를 한다. 노비의 역사와 노비의 종류, 궁궐과 민가에서 일하는 노비의 명칭과 차이, 노비 이름에 얽힌 이야기, 송병선과 복남이 이야기를 통해 최명희 작가는 노비들의 발자취를 짚어가며 그들의 삶에 의미부여 한다.
<죽기 전, 청암부인의 몸에서 혼불이 빠져나온다. 인월댁이 지붕으로 올라가 흰 적삼을 푸덕거리며 혼불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한 번 떠난 혼불이 돌아올 리 만무하다.
“인월댁은 종가의 지붕 위로 훌렁 떠 오르는 푸른 불덩어리를 보았다. 안채 쪽에서 솟아오른 그 불덩어리는 보름달만큼 크고 투명하였다. 그러나 달보다 더 투명하고 시리어 섬뜩하도록 푸른 빛이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청암부인의 혼(魂)불이었다.”> 3권 103쪽
<운명하기 전에, 저와 더불어 살던 집이라고 할 육신을 가볍게 내버리고 홀연히 떠오르는 혼불은 크기가 종발만 하며, 살 없는 빛으로 별 색같이 맑고 포르스름한데, 다른 사람의 눈에도 선히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도 남자와 여자는 모양이 다른데, 여자의 것은 둥글고 남자의 것은 꼬리가 있다. 그것은 장닭의 꼬리처럼 생겼다 한다. 어쩌면 남자의 불이 좀더 크다고 하던가> 3권 104쪽
청암부인이 죽자 인월댁이 지붕 위로 올라가 혼을 부르는 장면은 3권에서 가장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초혼이라고 하는데 혼불이 빠져간 후 가장 친했던 일가친척이 지붕으로 올라가 적삼을 흔들며 혼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윽고 그네는 청암부인의 적삼을 활짝 펼쳐 들었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적삼의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 허리를 잡아 허공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며 천천히 휘둘렀다.(중략)
“청아암 부이인 보오옥.”
인월댁이 목메이게 고복하여 혼을 부르는 소리는 바람이 실어가 먼 곳으로 아득하게 흩어졌다. >돌아오라, 혼백이여. 3권 123쪽
시어머니 율촌댁이 바느질 솜씨를 타박했을 때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겉으로는 당당하고 드세 보이지만 효원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마음이 약하다. 그걸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생각이 태도를 만든다는데 효원은 태도로 생각을 다시 세우고 버티는 인물이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자면 죽기보다 어려운 고비가 꼭 있기 마련이니라. 그럴 때는 잊지 말고 내 말을 명심해라. 저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가 맡고 있는 책임인즉.” 3권 162쪽
『혼불』 4권
우리 사람의 정신 속에도 반드시 정신의 눈이라 할 혈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곳에 제대로 있고, 그 혈을 보는 눈이 밝은 사람을 세상에서는 ‘어른’이라 하지. 11쪽
“새는 나무를 골라서 살지만, 나무는 자기에게로 와서 사는 새를 선택할 수가 없다.”는 뜻으로 “조즉택목(鳥則擇木) 목기능택조(木基能擇鳥)”라고 하신 일이 있었던가. 4권 160쪽강실은 깊은 어둠으로 가지를 흔드는 나무가 되어 강모를 부른다. 그러나 강모는 돌아오지 않는 새였다. 강실은 다시 날아갈 새라도 좋으니 기다림으로 강모를 부르지만 이미 다른 나무를 찾아가 버린 강모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다.그러니 발소리만.그냥 부디 발소리만 좀 듣게 해 주소서.그러나, 아마 그것도, 그런 마음조차도, 안 되는 일일 것이었다. 4권 164쪽
『혼불』 7권
<임서방이 말하는 진짜 양반은 강호이지 싶다. 노동의 가치를 아는 양반, 진정한 노동이 무엇인지 아는 양반만이 상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화살이 어떻게 바위를 뚫을 수 있는가요? 설령 바위를 뚫었다 한들, 뭉개져 버린 그 화살촉을 무엇에다 씁니까? 곧이 곧대로 일편단심은 지켰을망정 본질을 망치고서야 무슨 의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태산 같은 바위가 앞에 있으면 돌아서 가야 합니다. 그것은 변절이 아니라 뒷날을 보존하기 위한 합리올시다.” > 7권 203쪽
“문서 가닥만 있다고 양반이 아니라, 그 가싱에 똑 맞는 행실이 따러야만 양반잉 거이여.” 7권 242쪽
『혼불』 9권
작전이 필요할 때 작전을 세우면 이미 너무 늦다, 였어.”꽃이 필요한 순간에 꽃씨를 뿌리는 것과도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언제나 꿈을 가진 사람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하여 땅속에 미리 씨앗들을, 버리듯이 묻어 놓아야 한다고 했네.”
무생물인 종이를 접어서 영원히 지지 않는 생명과 향기로 피워내는 것이 지화일 겝니다. 그러니 우주의 심장에 인간의 정성이 꽃피도록 염원을 다하여 만들어야 하지요. 굿당 무속에 쓰이는 꽃들이나 일반 사람들이 의례에 쓰는 것들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불전에 모시는 꽃이리요.”
-여스님이 절에서 종이꽃을 만들며 들려주는 말이다. 9권의 대부분이 사천왕상과 관련된 걸 보면 작가가 사천왕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말이다. 작가는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다. 방패연을 만들 때 동그랗게 도려내는 종이에도 연민을 가진 세심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에 자세히 기술한 이유는 단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전하고자 한 게 아닐까? 작가의 생전 강연에 그 바람이 그대로 드러났다. <금강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사찰에다 금강문과 천왕문을 중문으로 세워 금강역사와 사천왕을 봉안하는 까닭은, 청정한 도량에 사악한 악귀가 끼여들지 못하게 엄중히 외호하며, 절에 오는 사람들의 방일한 마음을 신성 엄숙하게 가다듬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 9권 80쪽
혼불 10권
첫머리에 나오는 문단-
암부인의 혼불이 빠져나간 날, 효원은 시리도록 투명한 혼불을 넋을 놓고 본다. 그 불빛이 효원의 살 속으로 배어든다. 효원은 청암부인의 혼불을 빨아들여 청암부인과 하나가 된다. 청암부인은 효원의 몸에 살아남아 매안 이씨 가문의 앞날을 밝힐 것이다.
“만주 동북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구 할 이상이 거의 대부분 파산 농가 아니면 빚에 쪼들려 도망 온 사람들이었으니. 죽지 못해 살길을 찾아오는 이들의 비참한 정경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지.”- 첫머리에 나오는 이 문단은 혼불 10권의 전부를 설명하는 문단이라고 할 수 있다.
양판식과 도망치는 와중에 양판식의 부인과 어린 아들이 죽고 마는데 이때 부서방은 없는 형편에 죽은 아기의 옷과 포대기, 귀마개며 신발을 사서 입혀 묻는다.“그거이 어뜬 돈이라고 왜 아까운 맴이 안 들겄능교. 시상에 마님께서 저 같은 놈한테. 한번 살어 보라고 주신 돈이라, 아 그 쌀이 그 돈이지요잉, 참말로, 목숨맹이로 웅케쥐고 애끼든 돈. 우리가 그 먼 질을 가고 감서도 차 한번 지대로 안 타고 <중략> 그래도 그때만큼은 안 아까웠어라우. 그렇게 해 주고 싶었지요.” ∥ 「혼불」 10권 130쪽
목숨처럼 움켜쥔 귀한 돈을 죽은 아이에게 쓴 이유가 무엇일까? 산 사람에게 써도 아까울 돈을 말이다. 그건 아마도 이 풍진 세상에 태어나 제대로 된 옷 한 벌 입지 못하고 꺾여 버린 아이의 생이 가련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오래전 자신이 받았던 은혜를 갚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떻든 부서방 같은 인물은 어디를 가나 가난을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돈은 부서방처럼 측은지심이 넘쳐서는 절대 모을 수 있는 성질의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쓴 돈은 그 어떤 돈보다 값지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아낌없이 돈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목숨을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두는 행위라고 본다. 부서방이 보인 태도는 정신의 불이지 싶다
“내가 오늘 여기 만주 벌판에 와 덧없이 떠도는 것이 저 앞의 이름 없는 선조들의 헤매임과 무엇이 다르랴.” 10권 162쪽
8. 기억하고 싶은 말들
◉ 심진학 선생은 발해의 역사를 통해 백성이 포기하지 않는 나라가 조선이기를 바란다. 일제를 향해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이 절대 헛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으로 놓고 보면 모든 사건의 중심에 백성과 민중의 힘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백성과 민중이 자각하여 미끄러지는 역사를 떠받혀 올곧이 세운 사건은 숱하게 많다. 민중 개개인의 힘은 미약하지만 뭉치면 그 어떤 강철보다 단단해진다. 단단해진 의식은 넘어질 듯 넘어지는 역사의 바리케이드 앞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심진학 선생님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돌풍에도 휩쓸리지 않는 힘을 민중의 힘으로 본 것이다. 그 바탕에는 올바른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만주에 와 있는 조선인들을 보며 심진학 선생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나라가 버린 백성, 백성이 버린 나라.◉ 문학이란 역사의 옷이다. 어지럽고 슬픈 역사 속에 다시 부활의 옷을 입힌 것이 최명희의 소설이다.
◉ 감옥에 갇혀도 모국어라는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 말의 씨앗을 뿌려 민족도 지키고 조국도 지킬 수 있다.
9, 최명희 평
종가댁 잔치마당에 들어선 것 같은 설레는 기대감과 아련한 흥분을 느낀다. 뒤곁 대밭의 은밀스런 속삭임까지도 묵묵히 보고 듣고, 깊이 간진해온 그집 미당가의 한 그루 낡은 은행 고목인지도 모른다. 끝내는 우리 삶의 참모습과 옳은 자리를 보여주는 혼불을 써내게 된 것- 소설가 이청준
한국인은 삶의 크고 작은 토막들을 통틀어 이야기라 한다. 이야기는 말로 가장 많이 긴요하게 주고 받는 ‘말의 말’이다. 한국인은 그것으로 인생을 말하고 풀이하고 인생에 매듭을 지어나간다. 이야기로 살고 사는 것을 이야기 삼아 왔다. 최명희는 그런 뜻으로 받ㄷ아들일 이야기를 맣하는 출중한 이야기꾼이다.- 평론가 김열규
첫댓글 10권의 대하소설 혼불, 다시 잘 읽게 되는군요. 긴 글 정리 노고에 감사합니다.
이런 긴 자료를 정리하신 박경선선생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동화에서는 천진한 어린이의 마음이 대하소설을 정리하는 글에서는 기자의 눈이 엿보입니다.
10권은 엄두가 안 나니 박경선선생님의 정리에 만족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