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송회’를 말하다 ?___강상기
병든 서울·3
──17년만의 복직과 무죄판결을 받기까지
강상기
■만기 출소 후 생계를 위해 학원 강사로 뛰어다니다
드디어 84년 3월 26일 만기 출소하였습니다. 내가 출소할 때 두 딸아이가 “아빠! 아빠!” 하면서 달려와 내 품에 안길 때 비로소 출소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한 번 크게 느끼면서 형량이 많아서 출소하지 못한 다른 동료 선생님들을 뒤로 하고 먼저 출소하는 것이 죄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아,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는 형을 다 살고 나왔기 때문에 생활인으로서 가정을 추슬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은 없고 다른 기술도 없는 지라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신장기능이 많이 나빠져서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붓고 손이 잘 쥐어지질 않았습니다. 몸을 먼저 바로 잡아야 하는데 돈이 없는 것입니다. 일자리를 알아보느라고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친구를 만났더니 몸에 좋다고 큰 잉어를 한 마리 사주어서 집에 가지고 왔습니다. 아내는 비린내를 무릎 쓰고 큰 찜통에 고왔습니다. 또 한 번은 시청 축산과에 근무하는 친구가 소 내장을 한 바구니 보양하라고 보내주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몸을 어느 정도 다잡은 후에 가족 모르게 공사장에 나가보았습니다. 벽돌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 현장감독이 이런 일은 해본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건축을 하고 싶은데 경험삼아 해보고 싶다고 간청해서 허락을 받았습니다. 오전 중에는 할만 했는데 오후에는 상당히 지쳤습니다. 그날 밤에 집에 돌아와 자는데 정말 온 몸이 쑤시고 아팠습니다. 나는 다음 날도 나갔습니다. 힘에 벅찼으나 오기가 발동해서 참으면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3일을 앓아 누웠습니다. 평생 이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참으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그 뒤로 나는 막노동하는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는 틀림없이 삭신이 쑤시는 고통을 겪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그 고통을 견디는 노동자들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막노동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이틀간의 노임은 포기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온갖 궁리를 해보았으나 돈이 될 만한 특별한 계책이 서지 않았습니다. 후배가 보험을 해보라고 권했으나 지인들에게 폐만 준다고 아내가 하지 말라고 해서 이 일도 포기했습니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가 학원에 가서 강의를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이 모아졌습니다. 나는 전주 시내 학원에 혹시 국어강사 자리가 있는가를 알아보았습니다. 나는 친구가 강사로 일하고 있는 전주 청산학원에 놀러갔습니다. 친구는 당뇨와 고혈압의 합병증으로 학원을 그만 두려고 했는데 마침 잘 왔다면서 “네가 강의해라.” 해서 갑자기 대입재수생을 상대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의를 시작한 지 며칠이 채 안 되어 학원 원장이 “강선생님, 죄송하지만 다음 달부터는 강의를 맡길 수 없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학생들 반응이 안 좋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고, 정보과에서 그런 사람에게 왜 강의를 시키느냐고 해서 어쩔 수 없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나쁜 새끼들, 온갖 고문을 하면서 사건을 조작하여 가정을 풍지박산 시킨 놈들이 이제는 밥줄까지 끊어 굶어죽게 하려는 것인가? 나는 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보안 감찰하는 담당자를 찾아내어 학원 강의를 끝내 방해하면 그 집안 식구를 몰사시켜야겠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습니다. 나는 담당형사와 삼계탕 집에서 만나 점심을 했습니다. 왜 내가 학원 강의 하는 것을 방해하느냐, 그 이유가 무엇이냐며 담당형사에게 질문을 했더니 학생들을 의식화 시킬까 봐서 그런다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의식화 시키는 것이 죄가 된다면 내가 처벌받으면 될 것인데 왜 당신이 나서서 생계를 끊느냐? 양심이 있으면 오히려 당신네들이 내 일자리를 알아봐 주거나 내가 찾은 일자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학원장에게 때를 잘못 만나 고생한 사람이니 잘 부탁한다는 말은 못할망정 이렇게 내 살 길을 방해한다면 나도 결심한 바가 있다. 나도 더 이상 출구가 없기 때문에 나 하나 목숨 던진다고 생각하면 두려울 게 아무것도 없다. 당신 혼자 특진하고 잘 살 것 같으냐?라고 항의했더니 너무 흥분하지 말고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잘 해보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학원 강의 못 하게 해놓고 말이 되느냐? 당신의 진심이 그렇다면 학원장을 지금 이 자리에 오도록 해서 내가 강의해도 좋다는 말을 해라. 이렇게 해서 원장을 포함하여 세 명이 앉은 자리에서 가까스로 타협을 보고 강의를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어렵사리 얻은 학원 강사 자리였습니다. 이 때가 1984년 늦가을이었습니다. 학급수가 적어서 수입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우선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익산에 있는 집은 비운 채로 두었으나 팔기로 했습니다. 거의 2년 동안 한 푼도 벌지 못하고 두 딸 양육비며 변호사 비용 등 생활비 때문에 상당히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돈을 갚을 길이 막연하여 집을 팔았습니다. 1200만 원에 팔았는데 지은 지 몇 년 되지 않은 단독주택이었습니다. 결혼비용을 절약하고 저축한 돈으로 월세집에서 단독주택을 마련하여 이사한 뒤 내 이름이 적힌 문패를 붙였을 때의 감격은 깡그리 사라졌습니다.
그동안에 진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전주시 우아동 3가 743-48 우아 아파트 2단지 112동 203호 18평으로 전세를 들었습니다. 비록 작은 전셋집이지만 단란한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행복이었습니다. 개별난방을 하는 연탄 아파트였기 때문에 연탄을 때맞춰서 갈아주는 것이 좀 불편하긴 했으나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나는 틈나면 두 딸과 놀아주었는데 큰딸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덜 심심했지만 둘째는 유치원에 보내달라 하는 것을 못 보냈더니 친구 따라 유치원에 갔다가 울면서 쫓겨 돌아왔습니다. 이 때의 심정은 정말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가난은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미당의 「무등을 보며」를 생각하며 이때의 심정을 시로 써 보았습니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가 아니다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 다 사라진다.
애비는 돌아오지 않고
이 웬수 놈의 세상, 너 죽고 나 죽자
에미가 자식 목을 조르자
엄마, 밥 안 달랄게 살려줘
애틋한 눈망울 외면하며
에미는 어린 새끼들의 목을 조를 수밖에 없다.
가난의 때가 오거든
그대들이여, 더러는 도둑이 되고
더러는 일가족이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가난은 늘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가난은 살해를 꿈꾸는 일인 것이다.
──졸시 「가난에 대하여」
학원 강사료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재수생을 모아서 수업을 하는데 학급수가 적어 시간 수당을 많이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수입이 적다보니 집 팔고 조금 남은 돈을 허물어 써야 했습니다.
아내도 삶의 기쁨 없이 수심이 가득하여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이혼, 그리고 재결합
나는 돈이 되지 않는 시를 쓴답시고 집안에 쳐박혀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구속되기 전에 출판하려고 정리해 둔 시집 원고를 압수당하여 돌려받지 못했고, 박두진 시인이 써서 보내온 시집 서문도 이때 압수되어 사라졌습니다. 나는 아예 글 쓰는 일을 접었습니다. 내 생전 시인으로서 길을 가고자 했으나 경제적으로 가족을 부양할 책임 있는 가장으로서 문학 활동은 엄두도 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청산학원에서 나와 전주 한샘학원에서 1년 동안 수업을 하며 겨우 입에 풀칠을 했습니다. 1985년 겨울이 되어 이때는 학원 강의도 없고 좀 지내기가 힘들었는데 학원에 나가 강사들과 어울리다가 집에 들어오니 어머님이 와 계셨습니다. 어머님도 아버님과 다툼이 있어 아버님을 피해서 큰 아들인 나를 찾아오셨는데 아내와 말다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내가 시어머님께 “여기서 사는 동안 연탄 한 장 떼어주시지도 않고 그렇게 무심할 수 있습니까.” 하고 항의를 했습니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내 문제로 고부간에 많은 다툼이 있어서 마음에 골이 패여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저녁상을 받아 놓고 화가 나서 상을 뒤집어 엎었습니다. 왜 어려운 때 잘 지내야지 이러느냐면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나는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나는 가게에 가서 소주를 샀습니다. 나는 무작정 걸으면서 소주를 마셨습니다. 한 병을 다 마시고 다른 가게에 가서 또 소주 한 병을 샀습니다. 빈속에 소주를 마시니 속이 아려오면서 취기가 올라왔습니다. 차가운 겨울 저녁의 하늘을 바라보니 대열에서 벗어난 기러기 한 마리 외롭게 날고 있었습니다. 내 신세같이 생각되었습니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이 내 슬픔처럼 눈물에 젖어있는 듯 보였습니다. 술에 취해 다니다가 새벽에 집에 들어갔습니다. 어머님은 가셨는지 계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내를 불렀습니다. 이야기 좀 하자고 했습니다. 앞으로 민주제단에 내 한 몸을 던져버릴 테니 두 딸아이를 혼자 잘 양육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말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면 내가 벌어준 대로 먹고 살아야지 불평만 하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이렇게는 못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하고 희망이 없으니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냐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힘들게 참으면서 억지로 살려고 할 필요가 뭐 있느냐? 그냥 서로 깨끗이 헤어지면 될 것을 뭐 그렇게 피차 상처를 주면서 살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경제적으로 악화된 상황에서 우리 부부는 헤어졌습니다. 1986년 1월 27일 합의이혼을 했습니다. 결국은 국가보안법이 단란한 우리 가정을 송두리째 파괴해 버린 것입니다. 국가 폭력의 피해자로서 다시 한 번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전세금을 뽑아 친정으로 갔습니다. 놓고 간 두 딸은 어머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어머님은 어떻게 손녀 둘을 키우느냐고 걱정을 하셨습니다. 부모가 헤어진 것을 안 두 딸은 곧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빠가 새엄마를 데려와도 좋겠냐고 할머니가 손녀에게 물으니 작은딸이 콩쥐팥쥐를 보니까 새엄마는 나빠! 나빠! 하면서 엄마, 엄마! 전화통을 붙들고 울었습니다. 이제 저 애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보다 돈을 빨리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을 벌어야 가정을 다시 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광주학원으로 옮겼습니다. 주야로 많은 노력을 했으나 돈이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1년 만에 겨우 5백만 원 정도가 모아졌습니다. 나는 다시 서울로 학원을 옮겼습니다. 낮에는 종합반에서 강의하고 야간에는 단과 강의를 했습니다. 1년을 그야말로 하루 11시간씩 수업을 했습니다. 서울 남산 아래 용산구 후암동 하숙집에서 밤늦은 저녁에 코피를 쏟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새벽 6시에 일어나 체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남산에서 조깅을 했습니다. 이렇게 피나게 노력한 보람이 있어 강남에 30평짜리 아파트를 살 돈이 마련되었습니다. 나는 두 딸을 데려다 양육하고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내는 기꺼이 재결합에 동의했습니다.
1987년 10월 20일에 재결합하여 다시 소중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아파트에 이사해 두 딸 아이가 아파트 승강기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보니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다행히 큰 딸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는데 둘째 딸이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미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는 촌지가 있었고 학부형들이 일 년에 한 번쯤은 담임선생님을 찾아보는 것이 상례인데, 나는 그 일을 하지 못 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아빠가 감옥에 갔다 왔다면서? 그래서 담임선생을 찾아오지 않는구나!”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손을 들어도 시키지 않아 아예 아는 것이 있어도 손을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딸아이가 대학에 들어간 뒤에 나는 그때 상황을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때 그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은 기억하기도 싫다고 했습니다. 1년 동안이나 화장실 청소를 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이 이렇게 어린 아이들의 동심까지 멍들게 만들다니! 나는 내 아내와 두 딸이 얼마나 힘들게 나 때문에 심적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왔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 국가보안법을 악용한 국가권력이 소름끼치게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나는 두 딸아이가 인문계에 적성이 높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큰 딸은 디자인에 소질이 있어서 대학을 그 쪽으로 보낼까 했는데 돈이 많이 드는 것이 문제였고, 작은 딸은 법대에 가서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보고 싶다고 해서 걱정이었습니다.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신원조회나 면접에서 아빠의 일로 연좌제를 적용하면 큰 문제이겠다 싶어서 이과로 가서 전문직을 선택하라고 종용했습니다.
■17년 만의 복직과 26년 만의 재심, 무죄 판결
나는 지금도 가슴이 아프기만 합니다. 국가보안법으로 인해서 내 딸들의 단 한 번뿐인 인생의 좌표가 바뀌었으니 말입니다. 특히 두 딸아이를 결혼시키는 데도 이 국가보안법이 문제였습니다. 혼담이 잘 무르익다가도 아빠의 전력을 속일 수 없어서 이실직고 하면 출세에 지장이 있다면서 깨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큰딸은 결혼이 늦어졌고, 작은딸은 언니의 그런 상황을 인식하고서 한의과 대학에 다니며 만난 커플과 연애해 재학중 언니보다 먼저 결혼했습니다.
아내는 동창회모임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동창들의 따가운 시선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 대신에 가톨릭에 입교하여 고요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일들을 신앙생활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본인의 뜻과는 다르게 평탄한 삶을 살지 못한 아내에게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머리숱도 적어지고 명주실오라기 같은 흰 머리카락이 느는 것을 보면서 세월의 덧없음을 실감합니다.
지금껏 나의 개인적 삶은 가정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나를 끝내 따라다니면서 괴롭혔습니다. 지인들과 태국여행을 가게 되어 여행사에서 단체로 여권을 신청했는데 내 것만 발급되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안기부에 연락이 닿아 가까스로 단수여권이 발급되었는데 나의 일을 모르고 있던 지인들이 알게 되어 경계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태국에 여행할 때의 언행을 지인들 중심으로 정보기관에서 조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뒤로 지인들과도 어울리지 못 했습니다. 나는 대인기피증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1990년대 초에 우리부부가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으로 효도관광을 한 일이 있는데 이때도 여권 발급이 잘 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2007년 대선 무렵 대학 동창과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선거이야기를 하다가 언쟁을 하게 되었는데 나더러 “너는 빨갱이로 처벌받은 놈이 아니냐?”라는 말을 듣고 기가 찼습니다. ‘아, 세상 사람들이 다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면서 가슴을 쥐어뜯은 일이 있습니다. 나는 음식점이나 찻집, 노래방이 있는 지하실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대공 분실의 지하실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1999년 9월, 교직에 복직되었습니다. 복직이 아니라 신규로 채용된 것입니다. 1982년 11월에 군산제일고등학교에서 파면된 지 꼭 17년만의 일입니다. 그동안의 호봉도 인정받지 못 하고 오직 평교사로서 다시 교단에 서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나는 2009년 8월에 정년을 했습니다. 근무기간이 20년이 되어야 연금을 받을 수 있는데 나는 국가보안법으로 인해서 20년이 채 되지 못해 정년 이후 연금혜택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은 다행히 둘째 딸 한의원에서 일을 돕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49살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 이제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내가 지은 죄로 인하여 아들에게도 큰 상처를 주지 않을까 늘 걱정했는데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근심 하나는 덜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교육비도 엄청 많이 드는데 아들을 잘 보살필 수 있을까 염려하면 두 딸은 자기들이 잘 보살필테니 걱정 말라고 합니다. 그동안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을 두 딸한테 또 다시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해야 할 석양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1982년 11월 25일에 구속되어 2008년 11월 25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기까지 무려 26년 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광주고등법원 이한주 재판장은 법정에서 “피고인들이 무고하게 이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하였고, 그로 인하여 피고인들과 그 가족들이 우리 사회에서 감내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을 받았던 점에 대하여 우리 재판부는 피고인과 그 가족들에게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이 다행이고 내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이제는 떳떳하지만 그동안 받았던 온갖 고초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감옥 밖의 감옥 생활, 무덤 없는 주검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온 세월,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격리되고, 외딴 섬으로 유배되듯이 사회적 생명을 빼앗긴 채 용케도 살아왔으나 내 망가지고 뒤틀어져 버린 인생을 국가는 과연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딱하게도 나를 처벌했던 국가만을 다시 바라보고 있습니다.<연재 끝>
강상기 / 1946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으며 1966년 월간종합지 『세대』,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이색풍토』, 『철새들도 집을 짓는다』, 『민박촌』, 『와와 쏴쏴』가 있고, 산문집 『빗속에는 햇빛이 숨어 있다』, 『자신을 흔들어라』가 있다.
첫댓글 인생의 갖은 질고를 겪으신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여러 사건들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특히 무엇보다 가장으로서 애쓰시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수요카페에서도 만나뵈었지만 남은 생애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