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임씨의 始祖 東渡說에 대해서는 비슷한 내용으로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고문서실에 보관된 평택임씨 세보권1-2(1802), 평택임씨 족보 권1-5 (1804), 평택임씨 족보 권1-7(1846), 평택임씨 세보 권1-5(1866) 및 1900년대의 족보와 작성 시기 및 작자 미상인 문헌록, 한국한중앙연구소의 성씨관련 연구자료, 기타 도서관에 보관된 각종 성씨관련 서적과 임씨들의 족보와 인터넷에서도 사실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들과 대동소이하다.
근년 전국임씨중앙회에서 시조 동도설과 상계연계를 완료한 바 있다. 더욱이 시조의 상계를 지금부터 약 3,161년 전인 중국 殷나라 주왕 시대(BC 1154 ~ BC 1111)까지 연계시켜 우리 조상의 위상을 높였으며, 이를 근거로 최근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는 우리 여러 임씨 문중의 족보에도 인용되고 있다.
우리 시조 동도설의 대표적인 내용 몇 가지를 들고 이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하며, 이는 개인적인 생각일 뿐임으로 또 다른 여러 방향에서 추론해볼 수 있음을 전재로 한다(다른 의견이나 견해를 주셨으면 좋겠음). 지난 1,100여 년 동안의 사실을 현재로부터 짧게는 100여년, 길게는 200여년 남짓한 기간에 기록된 문중(門中)의 자료만으로 객관적인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어떠한 설(說)을 사실화하기에는 왠지 석연치 않음이 많기 때문이다.
한 예로 고려말(高麗末)에 세자전객령(世子典客令) 겸 연희궁부사 (衍禧宮副使)를 지낸 임세춘(林世春)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평택임씨 세자전객령계의 세춘공(世春公)의 장인(丈人)인 청주경씨 2세조인 경유(慶綏), 세춘공(世春公)의 처남인 경사만(慶斯萬, 2世祖)과 그의 아들인 경복흥(慶復興, ?~1380, 3世祖)은 고려초기의 명가(名家)인 경진(慶珍)과 그의 아들 경대승(慶大升, 1154~1183)을 1世祖인 경번(慶蕃)과 32년의 나이차이가 있어 경번이 경대승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를 연계시키지 않고 도시조로 모시고 있음을 보면 더욱 그렇다.
東渡는 "동쪽으로 건너가다"란 뜻으로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동쪽, 즉 지금의 우리나라로 건너갔다는 말로 事大的인 표현이 아닌가 한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서쪽에서 건너오다"란 뜻이어야 하므로 동도란 표현을 맞지 않으며 "歸化"라고 쓰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다. 중국인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中華思想)을 가지고 있으며 그 외 지역은 夷로 보아왔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민족은 東夷族 인 것이다. 따라서 동도설 보다는 중국에서의 歸化說 쯤으로 표현하였으면 어떨까 한다.
현재 중국에서 부여, 발해, 고구려, 한강 이북은 물론 백제와 신라까지도 그들의 일부(지방정부)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동북공정』도 우리니라 성씨의 대부분이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되어있는 각 성씨의 족보가 근거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니 아니러니 하다.
참고로 세춘공(世春公)의 처조카인 경복흥(慶復興)과 우리의 1世祖인 忠節公 諱 彦修公의 2째 아들인 坪城府院君 諱 堅味公과의 관계, 최영과, 조선 태조인 이성계와의 그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에 서술하고자 한다.
예 - 1)
우리나라 林氏 都始祖는 林八及 할아버지로 서기 870년경 당나라 말엽 文宗 때 18세에 龍圖閣 翰林學士로 시작하여 兵部尙書로 계셨는데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讒訴를 당하여 七學士와 함께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 있는 農城에 東渡 정착하였으며, 신라국에서는 吏部尙書의 벼슬을 하셨고, 적병이 변방을 침공함에 公께서 분연히 토벌하셔서 忠節公이라는 諡號를 받으셨다.【임행진, 전국임씨중앙회 상임부회장겸 한국임씨 상계족보연구 분과위원회위원장, 다음 까폐 평택임씨향선대종회】
예 - 2)
上系先祖人物 事蹟
一世 八及 (忠節公)
서기 870년 경 중국 복건성(福建城) 동령(東鈴) 팽성(彭城)에서 七學士와 함께 唐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지금의 평택시 팽성(彭城)읍에 동도 하셨다. 당나라에서는 18세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시작 신라 국에서는 이부상서 (吏部尙書)의 높은 벼슬에 이르고 변방 외적의 침입을 막은 큰 공으로 시호(諡號)는 충절공(忠節公)이며 묘소는 팽성읍 안정리에, 배위(配位)는 貞敬夫人 福州 金氏이시다. 묘갈명(墓碣銘)은 증손 충숙공(忠肅公)이 쓰시다.【忠節公林八及銅像奉安誌, 2004, p356】
예 - 3)
시조 八及께서 중국 唐나라 조정에 出仕하셔서 나이 18세에 한림학사( 翰林學士)가 되셨는데 간신들의 참소(讒訴)를 입어 축출(逐出)되시니 동료 7분(설인경, 허동, 유전, 송규, 최호, 권지기, 공덕수)과 함께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건너 지금 평택인 팽성 용주방에 다달아 머무시어 사시니 우리 東方의 林氏는 여기서 비롯되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시조 學士公 八及의 동도(東渡)시기는 당나라 문종조와 그 후 후당의 명종조로 밝히고 있으나 년대로 보아 서기 827년에서 933년에 이르는 기간으로 약100년의 기간이 되고 지금으로부터 약 1,100년 전후가 된다. 혹은 거금 3,000년 전으로 소급되는 주무왕 원년 의 동도설도 있다.【임태희, 다음 까폐 평택임씨향선대종회】
예 - 4)
澤君行蹟
公諱八汲 謚忠節公 年十八 仕唐以龍圖閣翰林學士 行(?)部尙書與 同僚七學士 劉筌薛敬仁 許童 宋奎 催冱 權之奇 孔德符 被讒東來(중략) 居于平澤懸 龍浦里 新羅敬順王朝 官至吏部尙書 詩賊窟(?)侵寇公舊義討破之以功封平澤君【平澤林氏事蹟錄, 歲在己丑五月下澣 和順林鎬應謹書, 국립중앙도서관】
예 - 5)
彭城林氏大同譜序
我林氏之系 彭城(?)自唐翰林學士諱 八及始學士公之 東來也家于湖右 彭城 (생략) 【彭城林氏世德誌, 甲子四月日忠貞公十七世孫相熙謹書, 朝鮮總督府寄贈本, 국립중앙도서관】<1924年에 發刊된 彭城林氏大同譜書(甲子譜)의 序文으로 推測됨>
예 - 6)
平澤林氏世德考
氏辨
殷之 王子比干之 堅( )爲長林( )有大勳勞故 賜姓林氏涀 東史節要
始祖事業考
始祖諱八及一云八扱一云八汲年十八(?)蓮堂學士官至吏部尙書諡忠節唐弘農間被(?)(?) 泊于東國平澤龍捕理一名龍珠坊因居焉同(?)人則許童薛仁敬劉筌宋奎孔德符催冱權之奇謂是八學士也海詩一句曰八人八海 (중략) 始祖諱八及唐德宗興元五年乙巳生唐憲宗元和元年壬戌公年十八翰林學士蓮堂學士兵部侍郞禮部尙書(중략)【平澤林氏世蹟 p5】
, 崇楨紀元後三壬戌中夏後孫益載謹書, 국립중앙도서관】
예 - 7)
林八及公은 唐 德宗 乙巳生이며 당년 18세에 登科하여 翰林學士를 역임하시다가 奸臣들의 참소를 받아 七學士와 함께 東渡, 新羅 神德王 때 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扶安林氏先祖寶鑑 p105, 忠節公林八及銅像奉安誌, 2004, p351에서 재인용】
예 - 8)
서기 885년 唐 德宗 興元5년(乙巳)생 902년(土城) 당년 18세에 登科하여 한림학사를 거쳐 兵部侍郞 禮部尙書를 역임하였다가 당나라 말기에 간신들의 참소를 입고 8학사 즉 林八及, 薛仁敬, 許童, 劉筌, 宋奎, 催冱, 權之奇, 孔德符 등 8현이 당나라 산동반도 덩저우 항에서 바다를 건너시어 학사공께서는 당시 彭城 용주방 현 팽성면 용포리에 정착하시었다. 916년(新羅信德王五年丙子)에 이부상서에 오르시고 적병이 변방을 침입함으로 公이 분연히 토벌하였다는 기록기 있으며, 혹은 927년 경순왕시 吏部尙書를 지냈고 변방의 적병을 분연히 토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생략) 【扶安貫先祖寶鑑, 충절공세거지농성(lim.joongboo.com) 제1편 제1장 p109 에서 재인용】
예 - 11)
林氏之自中國東渡始어 唐朝翰林學士彭城부 忠節公諱八及(중략)【林氏上系代順最初譜冊(1764), 忠節公林八及銅像奉安誌, 2004, p373】
예 - 12)
彭城林氏大同世譜券之一
(중략)
始祖
林八及 (중략 : 동도 내용으로 상기 예와 내용이 같음)
與七賢東渡時各昑絶韶句
八人浮海兮 桂棹蘭檣 林八及
仙李運盡兮 賢士被讒 薛仁敬
波濤闊矣兮 舟楫利逝 劉 筌
接淅而去兮 謝暗投明 宋 奎
李老入海兮 殷道衰亡 崔 冱
賢士出東兮 竭誠盡忠 權之奇
見機而作兮 疏廣之徒 孔德狩
【東渡八學士最初記錄譜冊(1924), 忠節公林八及銅像奉安誌, 2004, p375】
예-1)에서 보면
"서기 870년경 당나라 말엽 文宗 때 18세에 龍圖閣 翰林學士로 시작하여 兵部尙書로 계셨는데"라는 부분에서
文宗의 재위기간은 826 - 840년이며, 당대의 한림학사는 신분에 관계없이 文才중에서 선발되었는데 대개(80%)는 과거 급제자 이며 本官이 따로 있는 상태에서 선발되었다. 즉 18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곧바로 한림학사로 선발되었거나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선발되어 본관(本官)을 받고 승진하여 병부상서까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문종 원년인 826년 18세에 한림학사로 선발되어 840년까지 관직에 있으면서 병부상서로 계셨으면 이때 諱 八及 公의 연세는 30세 정도이다. 그리고 870년경에 동도하였으면 그때의 나이는 70여세 정도로 보아야 한다. 아니면 840년 18세에 한림학사로 선발되어 재직 중 참소를 당하여 870년경에 동도를 하셨으며 그때의 나이는 48세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唐代인 문종 재위기간의 한림학사 30명의 명단에 八及公은 들어있지 않으며, 더욱이 龍圖閣 翰林學士는 宋代(960-1279)의 관직명으로 내용의 전후가 맞지 않음을 볼 수 있다.
"七學士와 함께"라는 부분에서
諱 八及 公과 함께 8학사로 불려지는 7학사는 薛仁敬 劉筌 宋奎 孔德符 催冱 權之奇 등으로 이를 기록한 처음 자료가 1924년에 작성된 『평성임씨대동세보(충절공 임팔급 동상봉안지, 2004, p375)』에 기록된 得姓說로 예-3), 예-4), 예-6)과 비슷하거나 내용이 동일하다. 여기서 8학사 동도설이 객관적이려면 적어도 8학사로 거론되는 자들에 대한 고증이 필요하다. 위 7명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7학사의 성씨를 도시조 또는 시조로 하는 성씨는 강릉유씨의 시조(始祖)인 劉筌와 남양송씨 의 시조(始祖)인 宋奎 뿐이며 다른 성씨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 아니거나, 다른 성씨의 자손들은 한미하게 되어 그 후손이 성씨를 잃었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강릉유씨의 시조인 劉筌에 대해서는
강릉유씨 대종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본 결과ꡒ중국 한(漢)나라 시조(始祖) 고황제 유방(劉邦)의 40세손인 유전(劉筌) 호(號) 죽간(竹諫) 시호 문양(文襄) 송조(宋朝)병부상서(兵部尙書)로 재직중 재상인 왕안석(王岸石, 1021-1086)이 제정(制定)한 청묘취식법(靑苗取息法)이 부당함을 왕에게 극간(極諫)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뜻을 같이한 팔학사(八學士)의 일원으로 고려문종(高麗文宗) 36년(1082) 고려에 동도(東渡-건너와)하여 지금 경북 영일군 기계면에 정착하여 우리나라 유(劉)씨의 도시조(都始祖)가 되시다.ꡓ라고 하고 있어, 즉 1082년에 귀화한 것으로 동도 시기인 870년경과는 많은 차이가 발생하여 함께 동도한 8학사의 일원으로 보기도 쉽지 않다.
또한 宋奎는
"남양송씨(南陽宋氏)의 시조로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난신(亂臣)의 참소를 입고 후당(後唐) 면종 원년, 신라 경애왕(926)에 동료 7학사와 같이 동래하여 경순왕의 후대(厚待)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인터넷에서 검색, 종친회에 확인은 하지 않았음】 우리 八及公과 함께 동도한 8학사로 볼 수 있으나, 동도 시기가 870년경과 926년으로 56여년 정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우리 임씨 上系의 2世인 良貯 公이 敬順王(재위 927~935)의 子 貞顯의 사위였다는 사실과도 연계해보면 판단이 쉽지 않다. 즉, 결혼하여 가족(아들)을 데리고 동도하였으면 몰라도 말이다. 가족을 동반했다 해도 8학사의 동도시를 보면 수명이 배를 타고 한번에 서해를 건너우리나라에 왔다는 것도 쉽지 않음을 알게 된다.(경순왕의 자 정현의 사위에 대해서는 나중에 서술하고자 함)
다음으로 薛仁敬이 설씨의 都始祖 또는 始祖인 것으로 판단하여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설씨의 기원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新羅가 생기기 이전(BC 57년)의 박혁거세(朴赫居世) 탄생설화에 나오는 6촌장의 한 사람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호진(虎珍)이 다른 5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신라 초 대왕으로 추대하고 신라를 세웠고, 그 후 32년(유리왕 9년)에 6촌이 6부로 개칭을 하고 명활산 고야촌을 습비부(習比部)로 고쳐지고 2대 설지덕(薛支德)님이 설씨로 하사받았다"라고 알려져 있으며, 이에 대하여 설화이지만『삼국사기』에도 기록되었다 하니 함께 동도한 8학사로 보기엔 어렵다.
또한 고구려 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에 귀화한 성씨 중 8학사로 귀화하여 시조가 되었다는 성씨가 우리平澤林氏를 비롯하여 南陽洪氏, 南陽房氏, 宜寧玉氏, 晋州邢氏, 長興魏氏, 溫陽方氏, 密陽卞氏 幸州殷氏, 孝令司空氏, 南陽宋氏,沃川陸氏, 原州元氏, 南原獨孤氏, 南陽徐氏, 靈山/寧越辛氏, 海平吉氏, 谷山韓氏 18 姓이며, 학사로 귀화하여 시조가 되었다는 성씨는 慶州葉氏, 光山光州盧氏, 開城龐氏, 沔川卜氏, 咸陽呂氏, 金浦公氏, 安陰西門氏, 海州吳氏, 淸州左氏, 達城夏氏, 巴陵胡氏 등 11 姓이나 된다.【韓民族大姓譜, 韓國文化硏究所 傳統儀禮實踐國民運動本部, 1997】
참고로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 있는 農城에 東渡 정착"부분에 대하여는 지명 및 농성 부분에서 자세히 거론할 예정임.
"신라국에서는 吏部尙書의 벼슬을 하셨고"라는 부분에서
신라는 골품제에 의한 철저한 신분 귀족 사회였다.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인 최치원崔致遠, 857~?)은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신라에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친 분인데 6두품의 신분으로서 한계를 넘지 못하여 좌절하고 관직에서 물러났을 정도로 철저한 골품제 사회였다.
휘 팔급 공께서 동도하였다는 870년대는 신라가 처절한 왕권 다툼과 실정으로 도적이 생기고 지역별로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 시기로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어 후삼국이 일어나게 되고 말기에는 경주 정도에만 정치적 영향력이 겨우 미칠 정도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귀화인에게 吏部尙書란 벼슬을 주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더욱이 신라시대의 중앙관료제도에 吏部는 존재하지 않아서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하기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4)의 "新羅敬順王朝官至吏部尙書"도 같은 경우로 보아야 할 것이며,
예-2), 예-3) 의 경우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예-6)의 경우에는 우리 임씨의 시조를 殷代까지 확장하고 있으며 <殷之王子 比干之子 堅( )爲長林 ( )有大勳勞 故賜姓林氏 涀東史節要>
";始祖諱八及一云八扱一云八汲年十八(?)蓮堂學士官至吏部尙書諡忠節"라는 부분에서
蓮堂學士는 唐代와 宋代의 한림학사 명칭에는 (더 찾아보면 모르나)없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始祖諱八及 唐德宗 興元五年己巳生 唐憲宗 元和元年壬戌公 年十八 翰林學士 蓮堂學士 兵部侍郞 禮部尙書"부분에서는
휘 팔급 공의 生年과 관직 임명일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관직명도 한림학사, 연당학사, 병부시랑, 예부상서 등으로 늘어나고 있어 다른 예와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興元은 당 덕종(779-805) 때의 연호로 흥원 5년은 788년이며, 元和는 헌종(805-820) 때의 연호로 원화 원년은 805년이므로 팔급공은 788년에 태어나서 18세 때인 805년에 연당학사, 병부시랑, 예부상서를 역임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예-1)에서와 같이 870년경에 동도하신 것으로 볼 때 동도 시 나이는 최대 83세로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신라 경순왕 때 이부상서를 역임하실 때의 나이는 경순왕 재위 기간이 927 - 935년이므로 이때의 나이는 140세에서 148세 가량이 되므로 또한 모순이 발생함을 알 수 있다.
또한 "崇楨紀元後 三 壬戌 中夏 後孫 益載 謹書"에서 平澤林氏世德考 작성시기가 1802년 여름 중순임을 알 수 있으며 명(明)이 멸망(1644)한지 158년이 지난 이후에도 숭정(崇禎)이란 명(明)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여 그 격(格)을 높이려 한 것을 볼 수 있다.
예-7)와 예-8)에서는 신라에서 관직에 임하신 기간은 신덕왕(912-917) 때로 예-4)의 경순왕(927 -935) 때와 다르며, 예-8)에서 당 덕종 흥원5년을 서기 885년으로 보았는데 이는 788년이며, 885년은 唐僖宗13년으로 신라 憲康王 10년에 해당되는 해이다. 또한 예-6)에서는 연당학사, 병부시랑, 예부상서를 지내셨으며, 예-8)에서는 18세인 902년에 한림학사, 병부시랑, 예부상서를 역임하셨다. 그리고 예-8)에 신라에서 916년에 이부상서에 오르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혹은 927년 경순왕시 이부상서를 지내셨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이때 公의 나이가 32세 또는 43세가 되므로 나중에 서술하겠지만 公의 2世이신 諱 良貯公이 경순왕의 子 貞顯의 사위였다는 사실에 모순이 생기게 된다. 또한 세대가 지나면서 선대의 기록물을 옮기면서 연대를 잘못 환산하거나 관직명이 잘못 기재됨을 볼 수 있다.
예-11)의 경우에는
『동도8학사최초기록보책(東度8學士最初記錄 譜冊)』으로 1924년에 작성되었으며, 8학사 동도 시가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8학사 동도설과 동도 때에 8학사 들이 지은 시까지 더해졌음을 볼 수 있다.
동도설의 여러 사례를 종합하면 八及公은 唐 德宗 興元5年(788) 生으로 唐 憲宗 元和5年(805) 18세에 과거에 급제 또는 한림학사, 연당학사, 용도각한림학사 및 이부상서, 병부시랑, 예부상서을 역임하시다가 간신들의 참소(모함)으로 830년경에서 870년경 사이에 동료 7학사와 함께 중국 복건성 동령 팽성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우리나라 평택시 팽성읍 농성 또는 용포리(일명 용주방)로 東渡(망명)하였으며, 916년(129세) 신라 신문왕 또는 927년(140세) 경순왕 때 吏部尙書를 지내셨고 적병을 토벌하여 충절공 詩號 또는 平澤君號를 받으신 것으로 정리되는데, 생년, 처음 관직 또는 과거 급제시의 나이와 당에서의 관직명, 동료 7학사의 존재 등 여러 면에서 맞지 않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 임씨의 시조이신 휘 팔급공은 당나라에서 이부상서, 한림학사를 역임하셨는데 간신들의 참소로 난을 피하여 당나라 말기인 870년경에 배를 타고 신라로 귀화하여 팽성(현 평택)에 정착하시고, 신라에서도 높은 벼슬을 하였으며, 적병을 토벌하여 평택군호와 충절공시호를 받으셨다"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무리하게 동도설과 상계연계를 정립하려다 보니 연대 고증이 어려워지고, 시기별 연도 차이가 발생하며, 관직 등도 당시의 사실과 차이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조상의 上系에 대하여 나타난 자료 몇 가지를 들어 한림학사, 관직, 국호, 동료 7학사와 관련된 성씨, 八及公의 동도 시 나이 추정 등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았는데 자료가 부족해서 인지 아니면 반드시 객관적인 고증을 해보겠다는 마음이 앞서서인지는 모르나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없음을 알게 된다. 또한 여러 부분을 연결하다보니 문장 구성도 제대로 되지 않고 부족한 점이 더 많음을 알게 되었다.